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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딸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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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07 Dec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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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그 때 미시엄께서 이르길, “이단을 대함이란 그 죄를 거울 삼아 우리를 바로잡음이지, 죄 지은 자들을 꺾어 부숨이 아닐 것이오. 달에 계신 위대한 분께선 전지전능하시니 무엇 하나 그릇되게 함이 없으시겠지. 허나 그분의 종인 우리는? 감히 여신께 버금간다 할 방자한 자 누가 있소? 나는 천 명 이단을 베어도 한 명 무고자를 벤다면 만 명 분 이단보다 더한 대죄를 낳는다 하겠소. 사고하는 은총이란 초월자의 청사진이오. 그분과 닮은꼴인 아이들이 스스로 달바다에 들게 하기 위한. 죄사함이든 죄벌함이든, 그분의 지혜로나 할 수 있는 일을 대행케 하기 위함이 아니란 말이오.”라 하시더라. 이어 싱긋 웃으며 “사실 신학이나 율법학까지 갈 일도 없는 일이오. 당신네가 신관이기 전에 사람이라면, 사람답게 생각해 보시오. 부모를 찢고 아내를 베고 자식을 매다는 자들에 대한 증오가 꿈엔들 잊히겠소? 태양인들 또한 분명 마찬가지요. 야만 속에 우글거린다곤 하나 그네들은 우리 마니인의 열 배를 넘소. 지금 저들에게 흘리게 한 피를,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열 배로 갚게 되지 아니하리라 단언할 수 있소? 물러나시오. 백 리 바깥까지. 여신께서 내게 속삭이셨소. 달 뜰 때까지 신탁에 반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자, 죽음을 면하지 못하리이다. 뼈와 살이 떨어지고, 살점과 살점이 끊어지고, 그 티끌 하나까지 이글이글 타오르게 될 것이오!”라 하심이라. 뭇 신관들과 승병들은 두려워하며 뿔뿔이 흩어지니, 과연 땅거미가 질 즈음 감히 그 말에 거스르는 자 없더라. 그리고 만월이 휘영청 떠오르기 무섭게 빛으로 된 검이 땅에 쏟아져 백 리 안 모든 것을 먼지보다 더 자잘한 티끌로 바꾸었으니 모두가 그 기적 앞에 엎드려 떨기에 바쁘더라. 석 달이나 지나 아라라제의 수엄이라는 성사학자가 선뜻 나서 미시엄께서 앉으셨던 자리까지 찾아갔으니 그분은 온데간데없고 달빛 머금은 보옥만이 하나 남아있어, 미모란제에서는 그 귀물을 기적의 증거라 하여 첫 번째 성유물, 달의 눈이라 부르기 시작했도다.

아라라제의 사마시, 「아이들을 위한 성자와 성유물 전기」



  우리 마니 사람들은 아름답게 죽는 걸 ‘청금석처럼 부서진다’라고 합니다.


  처음엔 죽는 걸 그런 아름다운 거에 어떻게 빗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언젠가 옆집 이리미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광경이 달빛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었거든요. 장례식 날 하루 내내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끊이지를 않았지요. 아저씨도 울고 아줌마도 울고 언니도 울고 심지어는 동갑이던 열 살 난 세시누도 엉엉 울었어요. 저까지 울어버릴 것 같아 어머니께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 이리미누 할머니는 나쁜 병에 걸려서 돌아가셨나요?”라고. 화들짝 놀라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되물으셨는데 “할머니가 편안하게 그분께 가셨다면 저렇게 슬프게 울 것 같지가 않아서요.”라 대답했지요. 어머니는 아직 한 가닥도 안 비어져 나온 제 말꽁지머리를 괜히 풀어서는 다시 틀어 올려 묶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미호누는 생각이 많구나. 맞는 말이지만 망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면 슬퍼하는 걸 어쩔 수 없는 것도 사실 아니겠니?” “하지만 내가 달로 돌아갈 때는 곡을 안 했으면 한단다. 알겠니?”라고.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지요. 왜 청금석처럼 부서진다고 말하는지는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그 약속 아닌 약속을 지켜야 할 날이 고작 육 년 만에 올 줄은, 열 살 미호누는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궁금증을 그때 풀게 될 줄도요. 관 속에서 옴짝달싹 않는 어머니를 보노라면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어요. 혹여 장난으로 꺼내 보기라도 했다간 화를 내시던 학자복을 곱게 갖춰 입고, 가슴 위에 첫 번째 성자님의 책이랑 달맞이꽃을 두고 양 손을 잘 겹쳐 올리고, 먼지 한 톨 없이 피부를 뽀얗게 닦고. 그제서야 알게 됐죠. 훌륭한 승정이나 사제, 무녀, 학자, 전사가 죽는 건 여신님께서 데려가 버리시는게 아닐까? 그 마지막 광경을 성스러운 보석이 쪼개지며 내뱉는 파아란 비명 말고 무엇에 빗댈 수 있을까? 어머닌 좋은 성사학자셨으니 분명 청금석처럼 부서지셨다 하기에 모자라지 않잖아? 아, 눈물이 나오려고 했어요. 이리미누 할머니, 옆집 아저씨 아주머니 언니, 바보 세시누, 미안해요. 이래서 꺼이꺼이 울었구나. 그렇지만 전 어머니랑 약속을 해버린 걸요. 여신님이 어머닐 데려가 버리실 때 안 울겠다고.


  참았어요. 눈을 냅다 때리고 가슴을 쾅쾅 두드리면서. 아빠랑 오빠 다음 말석에 오도카니 서서는 울음을 참으려고 부들부들 떨었어요. 첫 번째 성자님, 첫 번째 성자님. 제가 성자님 책을 많이 읽어서 인연이 좀 있는데 봐 주세요. 미호누가 안 울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어머니께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아, 어머니 성함은 미호시예요. 신관질 때려치웠다는 사람이지만, 성전 넘기던 손으로 신민놈들 끽차점 탁자나 닦게 된 사람이지만 아직까지 미시르미에서 어머니보다 똑똑한 여신관이 없으니 달바다 끝자리 즈음엔 드셨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첫 번째 성자님 책 더 많이 찾아 볼게요. 이런 생각을 했지요. 그렇게 어머니께서 청금석처럼 부서져 버리고 만 날은 가슴 한 쪽에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아마 곡하지 말라는 건 이렇게 품지 말라는 걸 에둘러 말하신 게 아닌가 싶지만 이미 그렇게 돼 버린 걸 어떡할 수는 없겠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건 말건 일상이란 건 삼 일 만에 다시 열심히 들이닥치기 시작했어요. 집안 일 돕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마니학교에 가야 하는 건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 때가 되니 여신님이니 달바다니 첫 번째 성자님이니 청금석이니 하던 게 훌쩍 현실에 와 있었어요. 이젠 성자님들의 글귀를 읽고 익히면 칭찬해 줄 분이 안 계시니까요. 히미시 무녀님한테 이상한 걸 물었다가 부모를 불러오랄 때 얼른 달려와 절 감싸 주실 분이 안 계시니까요. 아아, 어머니. 전 탁자를 닦고 의자를 내려놓으며 느닷없이 들이닥친 고민들과 싸워야 했어요. 아무리 아버지가 좋은 분이고 절 사랑하신다고 해도 계급이 다르니 어머니처럼 해 주실 수는 없겠지요. 괜히 ‘미호시처럼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며 슬퍼하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덜컥 학교 가기가 싫어졌어요. 하지만 갈 수밖에 없겠죠. 율법에 따르면 전 어떡해도 신민이고, 마니학교도 못 마친 신민은 근본 없는 연놈 취급일 테니까.


  얼추 일을 해 놓고는 허겁지겁 신민 학생복으로 갈아 입었어요. 긴소매저고리를 위에 걸치는지 허리치마를 위에 걸치는지 헛갈릴 정도로 허둥거렸죠. 겨우 준비를 끝내고서는 문을 밀어젖히며 나가려다 말고 뒤로 고개를 쭉 뻗어 인사를 했어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아무래도 이제 어머니가 안 계시니 인사라도 꼬박꼬박 안 하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 잘 다녀오라는 대답은 주방 뒷편에서 겨우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진 끽차점 일을 미리 준비하고 계신 것 같았어요.


  날씨는 기분 나쁘게 좋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어 해가 휘영청 따가운데 겨울 바람은 도저히 질 새 없이 살갗에 와 닿았어요. 아, 세상은 제 마음에 구멍이 뚫리고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지요. 어김없이 찾아온 학교 가는 날, 여느 11월과 다르지 않은 초겨울 날씨, 아침마다 이상하게 찢어지는 소릴 내는 소리상자. 전주 몇 개마다 하나씩 달린 이 짜증 나는 기곈 어느 아침에는 성가대의 고운 노랠 절구에 빻은 곤죽처럼 못나게 만들어서는 왈칵왈칵 쏟아내기도 하고, 또 어느 아침에는 히나마니에서 내려 보낸 무슨 말씀을 주둥이 부서진 앵무새마냥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흘려보내곤 해요. 오늘은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였어요. 흘려 들었다가는 경을 칠 수도 있는 걸 저렇게 틀어 주니 사람들은 소리상자 아래 바짝 붙어 열심히 알아들은 뒤 가던 길을 가죠. 오늘은 성황청의 알림말씀이란 걸 내보내고 있었어요.



  「신민 여러분들께 성황청에서 알림말씀 드립니다. 현재 성황청에서는 기무라제의 성기사단 군항에서 성무에 종사할 기술자 및 잡역부를 모집 중에 있습니다. 영광의 나라를 위해 많은 자원 부탁드립니다. 해당 업무에는 성황청이 연금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장 통제에 대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현재 일반 신민들이 청금석, 영원석, 잠복석, 쌍동석, 천공석이나 저승석을 매매하거나 물물거래에 사용하는 것은 율법에 따라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통제 품목들은 성황청에서 일괄 징발, 보상 중에 있으므로 해당 자원을 소지한 신민 여러분들께서는 가까운 신전을 통해 징발에 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성황청에서 알림말씀 드립니다…….」



  모여서 알림말씀 듣던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나니 또 매일 보는 꼴을 보게 되었습니다. 삼삼오오 열을 맞춰서는 행진하는 사내애들이요. 교단에서는 신민 의식을 고취하겠다며 아이들에게 매일 저 짓을 하길 부추기지요.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따르면 점수도 더 주고 집안에도 얼마간 혜택을 준다고 해요. 가만히 보면 웃기지도 않지요. 걸음 걸음마다 무릎을 쭉쭉 허리 높이까지 들어올리고, 그때마다 반대쪽 팔을 꼭 주먹 쥔 채 땅에 나란하도록 힘껏 쳐올리는 게 말예요. 저는 이게 사람이 걷는 건지, 목각인형이 삐그덕거리는건지 잘 모르겠어요. 철컥철컥거리니까요. 사람은 휘적휘적거리지 철컥철컥거리지 않으니까요. 아무렇게나 떠벌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가도 돌바닥을 와작와작 밟을 때마다 단화발로도 무슨 판자를 두들기거나 경첩을 꺾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난다니까요? 저렇게 스무 걸음만 걸어도 땀이 뻘뻘 날 것 같은데 몇 명이 무리지은 그 자리부터 교문까지 몇 백 걸음을 걷습니다. 재주도 좋아요.


  그뿐이 아녜요. 그렇게 걷는 도중에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노래, 마니 사람은 노래와 친한 민족이죠. 왜, 언덕 위에 올라 달을 바라보며 그분을 찬양하다 보면 자연적 노래가 나오지 않겠어요? 온갖 아름다운 노래가 성가대에 전해지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아무래도 ‘노래’라는 말로 저 노래와 이 노래를 묶어놓는 건 모욕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네요. 여하튼 저 사내애들은 노랠 불러 댔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풍금 반주일랑 안 달아도 곱디고운 성가랑은 다르게 옆에서 나발을 꽥꽥 불고 북을 쾅쾅 두들기며 징을 쨍쨍 울려야 할 것 같은 요란뻑적지근한 노래였지요. 성기사님들이 행군할 때 부르는 노래라나요. 변성기 애들이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런 노랠 부르니 될 일도 안 되지 않겠어요? 게다가 노랜지 비명인지, 소리가 너무 크다 보니 귀를 틀어막아도 속에까지 아려요. 어쩔 수 없이 저 무리가 멀찍이 가 버릴 때까지 듣고 있어야 했어요. 어디 제철소에서 나오는 불과 그을음만 공해일까요? 저런 것도 공해지.



  우리는 1117년의 다마란제에서,
  강철비가 나리는 지옥에서 태어났네.
  이제 우리 사사마니 위에 성유물을 들고
  쇳덩이 함성을 뚫으며 용감히 싸우리.
  성기사들 히나시미 강 건너 성지로 나아가
  그 이름과 명예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리.
  깃발 높이 쳐들고 자랑스레 행군하는 우리
  그분께서 가라사대 ‘둘째 가는 자 없다’하시네.


  오늘날 성지 경계를 따라
  성기사들 어느 때보다 눈 번뜩이네.
  여신의 가르침과 올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영광 나라의 첫 번째 장을 써나가리.
  그분께서 우리 가슴에 깃들어 함께 가시니
  우리는 태양과 강철비가 두렵지 않으리.
  디딘 땅에 우뚝 서서
  우리 확신을 노래하면
  온 마니 사람 이르길 ‘둘째 가는 자 없다’하네.



  철컥철컥 소리에 군가를 쌍쌍이 듣고 나니 괜히 피곤해졌어요. 괜히 가도를 망가뜨려 놓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죠. 전 길 안쪽으로 터덜터덜 가서 제방 위에 다릴 걸치고 앉았습니다. 저 패거린 일찍 다니니까, 그네들 구경을 했다는 건 이렇게 뭉개고 있어도 늦진 않는단 거죠. 가도 안쪽으론 제방, 제방 안쪽으론 미시시미 강, 강 안쪽으론 시내. 무릎을 까딱거리며 뭉그적거리노라니 아침나절 일로 바삐 오가는 곤돌라들이 유독 눈에 띄었지요. 개중에는 뱃전에 성국기, 성기사단기 따위가 나부끼는 배가 더러 있었어요. 여신님과 우리 마니 사람을 상징하는 얼룩덜룩한 정월이, 성기사님들을 상징하는 쐐기 모양 월석이 바람을 따라 구불구불 흔들렸어요. 동쪽에서 모로 들이닥치는 햇빛, 휘청거리는 겨울 강, 수운 도시의 물길 조각배, 괜히 뭇사람들 뱃전을 들이채운 대단한 깃발……. 


  격에도 안 맞는 꼴을 보노라니 시시한 흥얼거림이 다 나왔어요. 미시르미 강 강물은 파아래, 파란 건 하늘 하늘은 넓어 넓은 건 우리 성국, 성국 사는 건 마니 사람, 마니 사람 좋아하는 건 성지, 성지는 태양인들 땅, 태양인은 많아 많은 건 빗방울 빗방울은 포탄……. 이런 생각 없는 노랠요. 어머나, 이것도 노래라면 성가대 사람들이 또 기분 나빠할 텐데. 제 이상한 노랫가락 뒤로 이번에는 소리상자가 아침 소식말씀이라는 걸 토해내기 시작했어요. 늘 같은 말로 운을 떼지요. 「성국 신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 히나마니를 바라보며 아침 소식말씀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그놈의 성지.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아요.


  “야, 미호누.” 갑자기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너무 멍하니 생각을 많이 했는지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죠. “학교 안 가고 뭘 중얼거리고 있어?” 이웃애인 시모였어요. 이웃이라니 조금 말이 잘못됐네요. 지금은 좀 멀찍이 이사를 가 버렸으니 이웃애였던 시모라고 하는 게 맞겠어요. “원하는 게 뭐야, 시모? 오늘 문답 네 차례야? 아니면 작문 공책 보여줘?” “그런 거 아냐. 사흘이나 마니학교 쉰 애한테 뭘?” “그까짓 사흘이 뭐?” “그까짓 사흘은 아니잖아.” 저는 눈을 살그머니 가늘게 떴습니다. 독심술을 배운 적이야 당연히 없지만 나보다 덜 똑똑한 아이 머릿속은 그럭저럭 읽어낼 수 있지요. “장례식에도 왔었으면서 유별나게 왜 그래?” 시모 요 녀석은 입관 때 한창 울음을 참던 중 눈이 똑바로 마주쳤던 차예요. 의뭉스럽기라도 했으면 얼렁뚱땅 넘어갔을 걸 눈길을 슬그머니 피했으니 빼도 박도 못하지 않겠어요? “그냥 얼렁뚱땅 꺼내 본 말이야. 다들 그러잖아.” “다들 그래서 나한테도 그런 거라고?” “미호누, 좀 봐 줘. 네가 이러는 거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어.”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다리를 괜히 더 까딱거렸어요. 


  맞아요. 신민부 아이들은 죄 신민들이죠. 신민은 신민다우라는 게 아니겠어요? 선생이신 무녀님들도 ‘그분의 백성답게 읽고 쓸 줄은 알아야 한다, 그분의 신민답게 율법에 신민들이 할 일로 정해진 것을 신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가르치시지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성자님은 이교도 땅 출신의 천한 사람이었지만 무려 기적을 부르고 달바다에 드셨는데, 그래도 신관 피가 반은 섞인 제가 기껏해야 율법서나 성인 전기를 읽고 그때그때 앞뒤에 더 맞는 일이 뭔지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요. 신민다우라며 절 보이지 않는 나무망치로 쾅쾅 내려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어디서 뚜껑 열린 바구니에 게를 한가득 담아 두면 열심히 기어 올라 도망가려는 게를 다른 게들이 붙잡아 끌어내린다는 이야길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런 게 아닌가 싶어 종종 무섭습니다. “누가 좋아해 달랬어? 난 어머니만 좋아해 주시면 그걸로 됐는데…….” 무심결에 지껄이고 나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어요. 약속을 어길 순 없죠. 눈물을 다스린다는 게 그만 시모를 노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어요. 제 표정이 어땠는진 모르지만 사내애가 주춤거릴 정도면 아주 못나고 못됐을 게 틀림없었어요.


  화가 나기도 했고, 무안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해서 앞서 성큼성큼 달아났어요. 시모는 두어 번 이름을 불러 보더니 잠자코 따라오기만 했지요. 어머니가 이 꼴을 보셨으면 당장 사과하라고 하셨겠지만 도저히 당장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교실 분위기는 별다르지 않았어요. 다들 허름한 책상에 변변찮은 걸상을 두고 앉아 앞이나 뒤, 옆 친구랑 잡담을 하고 있었죠. 오십 명 즈음이 그러고 있으니 왁자지껄한 게 난리도 아니었어요. 개중에는 제가 들어온 줄 알고 눈길을 힐금하며 흠칫거리는 녀석도 있었지만 그뿐이었지요. 책보따리를 놓아 두고 자리에 앉았더니 사흘이나 안 데워졌던 의자가 유난히 딱딱하고 찼어요. 엉덩이를 곰지락거리며 ‘이게 걸상이야 장작더미야’, ‘가게 의자 갖다 놓고 말지’ 따위를 구시렁거리고 있노라니 앞문이 삐걱거리며 드르륵 열렸어요. 제멋대로 떠들던 아이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입을 다물었고, 교실이 기도당으로 바뀌기라도 했는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석상처럼 앞만 보기 시작했지요. 고개라도 움직이는 건 저뿐이었습니다. 히미시 무녀님이 교탁까지 가는 동안 천천히 고개를 따라 돌렸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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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2)

까치우
까치우 18.12.29. 19:19

이런 화자는 쓰기가 되게 까다롭던데 꼬마애가 말주변도 좋네요.

그나저나 이 불길한 냄새는.. 연중의 냄새?!

분노삐약 19.01.20. 00:02
너무 좋아서 울고있습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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