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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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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44 Jan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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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21호 태풍 고사리 소식입니다. 기상청은 21호 태풍이 첫 예상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면서 우리나라는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변경된 경로에 따르면 고사리는 모레인 24일 오키나와 앞바다에 상륙하여 25일 일본 중부를 강타한 뒤 26일 진행 속도를 높여 오호츠크 해 방면으로 빠져나간다고 하는데요. 제주도 남동부 해상의 간접영향권에서는 풍랑에 주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하나는 난데없이 빈백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어머, 비행기 예약해야겠어요.”


  태풍 예보를 듣고 하는 말 치고는 생뚱맞은 이야기였다. 이런 연인의 화법이란 도저히 익숙해질 게 못 되었다. 태풍과 비행기, 창하는 잽싸게 백기 투항을 선택했다. 그러는 쪽이 조금이라도 놀림을 덜 받을 테니까.


  “무슨 소리예요? 태풍 온다는데 웬 비행기?”


  “바아보오.”


  평소처럼 은근슬쩍 ‘유비적 해설’을 빙자할 설명을 듣게 되리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나는 바보가 뭘 기대했건 말건 항공권 조회 사이트들을 뒤적이느라 무척이나 분주했다. 평소답지 않은 말본새보다도 곧 태풍이 덮친다는 옆나라에 당장 여행 갈 생각 만만인 게 더 놀라웠다.


  바삐 돌아가던 마우스는 슬금슬금 힘을 잃어 갔다. 비성수기라고는 해도 바로 이틀 뒤에 뜨는 비행기삯이 신통할 리 만무할 터. 그는 어깨너머로 힐끔힐끔 숫자를 보았다. 못 낼 건 없지만 구태여 내기에는 아까운 돈, 태풍 오는 나라로 갈 비행기. 난제 앞에 계산기 없이 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관심 없는 척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곧 키보드 스위치가 널뛰는 소리가 다각다각 들리더니 모니터 귀퉁이의 메모장에 문장이 하나 나타났다. 


  ‘빨리 물어봐요, 똥개같이 눈치 보지 말고’


  “진짜 일본 가려고요?”


  그녀는 대답 대신 히죽 웃어 보였다. 창하에게 경보가 울렸다. 잘못 물어봤나? 힌트는 못 받은 것 같은데. 화 내면 좀 봐 달라 하자.


  적절히 긴장이 올랐을 때쯤 유쾌한 목소리가 폴짝 뛰었다.


  “태풍 왔을 때 여행해 본 적이 있어요. 아, 그 땐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운이 좀 없었거니 하며 최악의 경우 하루이틀 버리는 셈 치기로 했죠. 첫 날은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기껏해야 보슬비였고, 3단 우산으로도 옷 안 버리며 다녔으니까. 약한 태풍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둘째 날에 사단이 난 게 아니겠어요? 비바람이 우산을 와락와락 뒤집는데 택시는 곧 죽어도 안 타겠다며 여기저기 걸어다녔으니까, 뭐, 엄밀하겐 사단을 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꼼짝없이 푹 젖은 거죠. 가디건에 셔츠에 속옷에, 기분 어땠을 것 같아요?”


  “아주, 좋았을 것 같아요.”


  눈치 보며 열심히 듣던 그는 살얼음 밟듯 살금살금 비아냥으로 답했다. 빙그르르, 의자가 돌았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어 좋네요. 그야말로 좋은, 기분이었어요. 숙소는 온천 료칸이었어요. 그러니까 기분이 암만 엿 같더라도 온천은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젖은 옷은 젖은 옷이고, 온천은 온천이니까. 여자 대욕탕으로 가는 복도에선 정말인지 희한한 소리가 났어요. 나무 벽에 강풍이며 빗줄기가 마구잡이로 부대껴 걸쇠 잡아 흔드는 소리, 틈바귀로 바람 뒤틀리는 소리, 빗방울이 자지러지는 소리가 뒤얽혀 자빠지고 있었어요. 시간이 아홉 시 즈음 되니 실내 욕탕이건 노천탕이건 부지불식간에 전세탕이 돼 있었어요. 칸막이 문을 여니 들리던 소음이 눈이랑 피부로 와락 달려들었죠. 그럴 법도 하죠. 노천탕이니까. 열 걸음 걷는 동안 숫제 폭격을 받았어요. 탕에 들어서도 그랬고. 물방울이 쏙 나온 머리를 모로 두들기는 거에요. 불발탄들은 온천수에 떨어지면서 동족상잔을 해 대고. 빗줄기가 탕을 식히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온천수 안에서도 체온이 좀처럼 안 오르는 거죠. 그게 피부에도 또렷하게 와 닿은 거고……”


  “비는 그렇다 치고, 바람은요?”


  눈을 감고 당시의 여운을 끌어올리던 그녀를 굳이 질문으로 건져올렸다. 하나는 책잡지 않았다. 이를테면 쓸데없는 독립변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었을까?


  “눈치 없긴. 좀 참아 봐요. 그러는 중에 노천탕을 두른 덤불 벽이 흐느껴요. 동으로 불어닥치면 동으로 기우뚱, 서로 불어닥치면 서로 기우뚱…… 잎사귀며 가지며 덩굴이 떨면서 싸아아악, 하는 소리를 내죠. 언뜻 작은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았어요. 아닌게아니라 빗줄기가 사이사이 파고들어 떨어지고 있을 테니까. 듣다 보면 또 삼림욕할 때 머리꼭대기에서 들리던 숲 노래 같기도 하고. 빗방울이 바닥을 갈기는 폭음, 온천수에 떨어지며 나는 파열음 와중에 그런 바람이 살갗 위에서, 머리칼 위에서 춤을 추는 거죠. 그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론이 바로 이어 나오지 않았다.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를 본 창하는 슬그머니 다가섰다. 한참 노리고 있던 못대가리를 망치로 쾅 내려치듯, 속삭임이 엄습했다.


  “아, 내가 있는 힘껏 울부짖어도 아무도 못 듣지 않을까, 라는 생각.”


  “풍요로웠던 10월도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태풍 보기가 힘들었는데요, 이 추세대로면 8년 만에 한반도에 태풍이 하나도 상륙하지 않은 해가 되겠습니다. 덕분에 황금 연휴를 더 즐거이 보낼 수 있었겠습니다만 다음 번 태풍을 위해 대비하는 자세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지금까지 KBC 9시 뉴스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 특히 그 중 한 사람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동안 클로징 멘트만 무심하게 흘러나와 요란스러웠다. 21호 태풍이 지금 이 방 밖에 휘몰아치며 두들기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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