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애프터글로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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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54 Jan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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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극지물류동맹의 수호자인 알렉산더 레인저는 여느 하이브의 전사들과는 달리 여러 곳에 나뉘어 주둔하고 있다. 공동지에는 여러 시설이, 그런 시설에는 언제나 사람이 중한 법, 그 중 관문은 각 하이브를 오가는 호송대를 점검하고 지원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거점이다. 공동지라는 체제로 동맹을 묶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자도생보다 이점이 뚜렷해야만 하니 군의 전술적 중요도 이상으로 거국적인 필요에 있는 곳이라 하겠다.


  이에 사령부에서는 관문수비대라는 편제를 두어 공동지 관문에 주둔토록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종심방어 체계에서 각 방어선을 관장하는 부대라 할 만하다. 이들은 스스로를 레인저가 아니라 관문수비대라 칭할 정도로 자부심 있는 치들이다. 기실 동맹의 대들보를 꼽는다면 바로 저들자신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사령부에서는 이런 영양가 없는 편가르기를 엄금하고 있었지만 또 어느 정도 특성화는 불가피한 일이어서 줄곧 알음알음 그러했다.


  물론 어느 쪽이 대들보건 서까래건 간에 위에서 까라면 까는 게 군인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엄폐호에 모신 빨갱이 수괴에게 아침밥이나 나르는 떫은 임무라도.


  “손님, 아침 식사입니다.”


  “들어오세요.”


  수비대원은 영 무성의하게 문을 열었다. 포로로 가두어야 할 자이나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선지자 이브제니아는 조촐한 호송대만을 대동하여 당황케 했으며 그마저도 아주 돌려보내며 홑몸으로 남아 거듭 그렇게 했다. 사령부의 전갈에 여러 대응책 중 전투까지도 상정한 관문수비대로서는 그저 손 놓고 본대가 책임을 인수해 가길 기다릴 밖에 없었다. 붉은 군단과 신경전을 벌이는 편이 외려 마음 편했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초조하게. 혹여 이 여자가 잘못되기라도 했다가는 내외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며 모두 본인들의 책임이 되지 않겠는가? 


  조약을 준수하겠다는 데서야 동맹시의 호송대건 성화 교단 끄나풀이건 설종 무리건 동등하게 관문수비대의 비호를 받아야만 하니까!


  이브제니아는 천연덕스럽게 말꼬리나 잡을 뿐이었지만.


  “손님이라는 말은 좀 그렇지 않나요? 공동지 관문은 객줏집이 아니고, 저도 여기 객으로 묵으러 온 건 아니니까.”


  “그, 그게…….”


  “호칭이란 건 어려운 법이지요. 불의 사도들께선 절 선지자라 하십니다만.”


  극지물류동맹에서 대선지자니 선지자니 하는 건 성화 교단 광신도끼리의 이상한 호칭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내는 괜히 삐딱하게 되물었다.


  “선지자라면, 뭐 예언이라도 하신답니까?”


  “아무렴요.”


  붉은 방한두건이 들썩거렸다. 웃는 건가? 뭐가 그리 재밌는 건가? 기분나쁜 의문과는 별개로 자그맣고 빨갛기만 한 실루엣 아래 어디에서 튀어나온 지 모를 존재감이 순간 수비대원을 압도했다.


  루비 같은 눈동자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브제니아는 위엄 있게 말했다.


   “불편한 자리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으니 얼른 나갈 구실을 만들어 드리지요. 절 에스코트할 여전사들께서 곧 여기 도착할 것 같다고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꼴에 예언자라고, 하며 비아냥거려 볼 심산이었겠지만 본전도 못 찾은 채 그저 황망하게 물러나야만 했다. 혼자 남겨지자 이브제니아는 천진하게 웃으며 식기를 들었다. 썩 기품이라곤 없이 이끼를 뜯고 플라나리아를 씹었으나 그마저도 어떤 성스러운 형상인 것 같았다. 불은 그저, 그저 이글거리는 법이기에.


  식사를 끝내고 손가락을 쪽쪽 빨던 그녀는 잠시 포만감을 즐긴 뒤 방한두건을 쓰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문고리를 벌컥 돌렸다.


  자연적 엄폐호 출입문을 지키고 섰던 병사가 화들짝 놀라 앞을 막아섰다.


  “손님, 나오시면 안 됩니다.”


  “감옥에 갇혔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놈의 손님이란 말은 언제 그렇게 부르자고 입이라도 맞춰 둔 건가요?”


  “아시다시피 여긴 공동지 관문입니다. 위험…….”


  이브제니아는 붉은 두건이 옴짝거릴 정도로 웃었다. 아닌게아니라 참 변명같지도 않은 변명이었던 것이다. 설렁한 방설통로 아래 불꽃 같은 목소리가 맑았다.


  “관문수비대원들은 유머 감각이 수도승 미만이네. 샤르코 협만이, 아니면 이 요새가?”


  “……설종 이야기가 아닌 건 아시리라는 전제 하에 말씀드린 겁니다.”


  이브제니아는 두건 매무새를 다시 만지면서 물었다.


  “수비대원님, 성함이?”


  “루카스입니다, 손님.”


  “루카스, 불에 대해 좀 아시나요?”


  이게 웬 뜬금없는 말인가? 극지물류동맹에서는 맥락 없이 불 운운하는 건 광신도들의 수작질로 여겨지곤 한다. 루카스가 정색하는 게 썩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포교나 설교를 하실 생각이라면…….”


  “이보세요, 그런 상서로운 건 아무 데서나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상식 이야기 하고 있어요, 상식.”


  “……웬만큼은 압니다. 난방 없이 사람 없으니까. 난방탑이나 작열로엔 불이 있잖습니까?”


  그냥 여인네 흰소리처럼 들렸지만 원인 모를 위엄이 있어 꼼짝없이 곧이곧대로 답할 밖에 없었다. 이브제니아는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어디 불이 스스로 꺼져버리는 걸 본 적 있나요?”


  “뭐……. 태울 게 떨어지든 외풍을 맞든 이유가 있어야 꺼지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그래서 우리 교단에서는 자살을 죄악시하지요. 인간은 불의 사도니까. 불은 불을 꺼트리지 않으니까. 마찬가지로 교단이 교인을 해치지도 않습니다. 교단은 사도들의 총칭이니까. 불길은 불꽃을 꺼트리지 않으니까.”


  우물쭈물거리는 루카스에게, 선지자는 인장을 콱 박듯 맺었다.


  “위험 운운에 대답이 됐으려나요?”


  이브제니아는 옆으로 쏙 빠져나가 총총 걸었다. 머저리처럼 뚱하니 보던 수비대원은 허둥지둥 뒤에 따라붙어 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눈위장무늬로 희끄무레한 관문 요새에서 붉은 설상복은 눈밭에 작열탄으로 피운 불구덩이처럼 눈에 띄었다. 방설통로를 따라 굽이굽이 윗층으로 오르는 사이 근처 사람 모두를 한번씩은 멈춰 세울 정도로. 아마 여느 하이브에서 관문요새를 처음 방문한 누구라도 이렇게 태연하지는 못하리라. 하물며 적성 광신도인 데서야! 


  관문수비대와 물류대원 등속이 보기에야 강단 있는 건지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알 길 없었다. 주의를 크게 끈 만큼 제지할 무리도 금방 나타났다. 무려 관문대장과 직속 호위대였다. 이브제니아로서는 이 요새에서 몇 안 되는 구면이 나타난 셈이었다. 물론 심기가 썩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야 골칫거리가 아닌가! 골칫거리도 쏘다니는 골칫거리인 것이다.


  “어제는 호송대를 물려서, 오늘은 웬 예언으로 저희 수비대를 놀라게 하실 참입니까, 손님?”


  “그놈의 손님 타령. 그리고 예언이 아니라 천리안, 이글거리는 천리안이에요.”


  “어느 쪽이건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만.”


  “마찬가지가 아닙니다, 수비대장님. 당신네더러 관문수비대가 아니라 알렉산더 레인저라고 하는 게 엄밀하게는 틀린 것과 같이.”


  말 잘 하면 빨갱이라고 했던가, 칼밥 먹는 양반으로서는 입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브제니아의 두건이 아래위로 달그락거렸다. 쿡쿡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엄폐호에 가둔 게 아니냐고 따지는 게 아니라고 미리 말씀드려야겠네요. 책임은 중하지요. 교단에서도 중한 덕목이거늘 이해관계에서 생겨난 이, 물류동맹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책임이란 건 언제나 소재를 따지기 마련이죠. 뭐, 피차 양해해야 할 게 아닌가 싶네요. 전 갇혀 있었고, 당신들은 우리 교단이 얼토당토않은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고. 여하튼 짧은 만남도 끝나가는 것 같으니 그만 잊도록 할까요?”


  “그건 당최 무슨 말씀입니까?”


  대장 이하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선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천리안이라고 하는 거지요. 아까 식사를 가져오신 분한테 아주 곧이곧대로 말씀을 다 드렸는데…….”


  동시에 남동쪽 출입로 방면에서 나팔이 요란하게 울렸다. 우군이 출입 수속을 끝냈을 때만 내보내는 신호였다. 이브제니아는 가만히 방설통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자 두 명의 레인저가 안내인을 앞세워 요새 상층으로 올라왔다. 사령부의 전언대로라면 버그 파이크에서 능선을 넘어 설상기동을 했을 텐데 이상하게 꼴이 단출했다. 군장은? 주변 관문수비대원들의 궁금증을 뜸 들여 풀어주기라도 하듯 이상한 썰매 모양 짐짝이 끈에 꿰인 채 덜걱덜걱 뒤를 따랐다. 그게 샤르코 협만 관문요새의 주포보다 더 비싼 장비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실소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비웃음은 곧 웅성거림이 되었다. 방한두건을 벗고 수비대장에게 경례하는 게 여자 둘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이상한 일 연속인 셈이니까.


  “클로비스 수비대장님, 레인저 상등기수 메르세데스입니다.”


  “상등사수 일리아나입니다.”


  “환영한다. 샤르코 협만 구경은 실컷 했나?”


  “개 같은 임무 덕분에 실컷 했습니다. 교단 호송대는 어디 있습니까? 저흰 그쪽에 합류해서 알렉산더로 귀환하는 걸로…….”


  수비대장뿐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이 일거에 비죽 웃고 말았다. 아닌게아니라 그네들로서는 무례하더라도 반사적으로 그리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두 레인저는 눈썰미가 좋았다. 일리아나는 메르세데스 곁으로 살짝 더 다가섰다. 늘 그랬듯이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하니까.


  “호송대? 성화 교단 호송대 말인가?”


  “예, 성화 교단 호송대.”


  메르세데스는 클로비스의 손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룻눈 위에서 죽어 널브러지기 좋은, 시뻘건 설상복이 하나 눈에 띄었다. 하나.


  최대한 공손하게 되물으려고 애써야만 했다. 속으로는 수은주를 이리 기울였다 저리 기울였다 하며 시나리오를 쓰면서. 교단 사람이 왜 한 명이지? 호송대는 어디로 내뺐지? 이 인간들은 왜 짜증나게 쪼개고 지랄이지? 설마 애저녁에 전쟁질이 끝났고 포로가 이 양반이란 건 아니겠지? 사령부에선 알고 있는 거 맞나? 이거 설종 똥 밟은 거 아냐?


  “무슨 농담입니까, 이거?”


  “나도 장난이면 좋겠다, 메르세데스 상등기수. 저쪽 호송대 같은 건 VIP 데려다 놓고 왔던 길 돌아갔다고.”


  “예?”


  맥이 탁 풀렸다. 일리아나 역시 슬슬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재미있게 구경이나 하던 이브제니아가 능청스레 나와 악수를 권했다.


  “반가워요, 메르세데스, 일리아나. 전 이브제니아라고 해요.”


  메르세데스의 오른팔이 삭풍에 나부끼는 겨우살이처럼 휘적휘적 낭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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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1.19. 13:30
“공동지에는 여러 시설이, 그런 시설에는 언제나 사람이 중한 법, 그 중 관문은 각 하이브를 오가는 호송대를 점검하고 지원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거점이다.”
어색하지 않나 싶은데 혹시 짤렸나 해서 말해봅니다. 재미있게 읽고 가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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