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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딸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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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10 Feb 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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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헤어져야 할 날은 생각보다 더 훌쩍 다가왔습니다.


  그 훌쩍이라는 게 생각지도 못하게 들이닥쳤단 뜻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오빠가 뻘건 낙인을 박은 그 날부터 차례차례 무슨 일인가는 일어났으니까요. 성기사단 미시르미 천인대에서 성기사님들이 찾아오는가 하면(혹 제 얼굴을 알아볼까 소리 없이 끙끙거렸지요) 신전에서 사나흘이 머다하고 이 업무 저 업무를 맡은 신관님들이 가게 문지방을 넘기도 했고 소포 꾸러미나 전편 묶음이 들어오기도 했어요. 오빠가 입을 기사 정복, 모관, 군화 따위에 우리 가족이 쓸 여비라나요. 여하튼 자꾸만 방점이 찍히다 보니 사이사이에 낀 시간이 어느새 휙 달아난 것 같았고, 그만큼 뒷날이 더 빨리 온 것처럼 느껴졌겠죠. 소문은 소문이라 이웃들도 금방 다 알게 됐는데 옆집 세시누네가 와서는 허릴 꾸벅 숙이는 걸 보고 되레 오빠가 펄쩍 뛰며 맞절을 할 정도였어요. 오빠가 이 일을 벌인 데 젠체하려는 속셈이 아주 없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이런 식은 아닐 테니까요. 딱 하나 좀 덜한 사람이라면 시모였어요. 하도 우물쭈물거리길래 잘 보니 제 눈치나 보고 있었거든요. 어벙한 게 눈에 거슬려 쫓아 버리려고 했는데 오빠가 낄낄거리면서 걜 데리고 어딘가 휑하니 나가 버렸죠. 사내애들이란…….


  여하튼 입단식 날이 되어서 전 새벽도 이런 꼭두새벽이 없을 정도로 일찍 일어났어요. 도시락을 싸야 했으니까요. 미시르미에 달곤돌라가 깔렸다면야 늑장부려도 될 텐데 말이에요. 이름은 비슷한 곤돌라지만 노 젓는 조각배랑은 달라서 이름만 도시인 이런 시시한 데엔 영영 못 들어오겠죠. 잡소리가 길어졌네요. 안내받은 대로 이리리미에 가려면 졸지에 반나절 역마차 신세예요. 그 반나절이 다가 아니라 왔다 갔다에 시간을 버릴 테니 끽하면 배 채울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오빠도 이왕이면 집 밥 먹고 싶어할 테니까요. 안 졸리냐고요? 그깟 잠, 쌀 씻느라 겨울날 물에 손 담그면 그 길로 훨훨 달아나 버릴 텐데. 쌀 씻고 밥 하고 밑작업을 하는 동안 아버지가 나오셨고, 같이 주먹밥을 만드니 한 시진 반이 우뚝 꺾였어요. 그런데 오빠가 나올 생각을 않네요. 이런 일도 있나 싶어 슬그머니 윗층 오빠 방에 고갤 밀어넣었지요. 그런데 이 양반, 진즉에 깼으면서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


  “오빠, 뭐 해요?” 대답 대신 반쯤 드러누우며 등 너머로 눈을 마주쳤어요. “언젠 나보고 저혈압이니 뭐니 핀잔을 주더니만…….” “말이야 맞는 말이잖아?” “그건 한가한 신관님네들이나 걸리는 병이고요.” 오빤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어요. 그 길로 휙 오더니 절 와락 안기까지 했죠. “우리 동생 한 번 안아보자.” “안기 전에 해요, 그런 말은. 으, 총각 냄새.” 아닌게아니라 시큼텁텁한 것 같기도 하고 구수한 것 같기도 한 살갗 냄새가 풍겼죠. 머리꼭대기가 턱에 틱틱 부대꼈고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잘 안 이러는 사람이라 참아 주기로 했어요. 날이 날이잖아요? “어머니가 알면 펄펄 뛰실 텐데 어쩌지? 군교 노릇이나 하며 가엾은 병정들을 강철비 쏟아지는 데다 몰아넣으라고 내가 가르치더냐 하시면 어쩌지?” 오빤 어머니한테 혼난 적이 없는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안고 하는 말이 그런 거였죠. 아니면 혼나 보질 않아서 혼나는 게 정말 무서운 걸지도. “아니꼬와도 우리한테 신관 아버지 마련하셨어야죠, 라고.” 딴에 비꼰다고 비꼰 거였는데 가타부타 말 대신 제 등에 두른 팔에 힘이 꽉 들어갔어요. 숨을 헛삼킬 만큼 꽉. “오빠, 숨 막혀요. 냄새 나고!” “저번엔 막말해서 미안하다. 미안해.” “아니, 계집애도 아니고 아직까지 그걸 담아놓고 있었어요?” 콧방귀가 절로 나왔어요. “네가 담아둔 줄 알았지.” “별꼴이야.” “넌 별로 걱정 안 된다는 건 진담이다. 차라리 아버지가 걱정이라면 몰라……. 그래도 혹시 몰라 시모한테 너 좀 잘 부탁한다고 해 뒀어.” 전 오빨 와락 밀치며 신경질을 냈지요. 여기서 왜 시모가 나와? 저번에 둘이 나가더니 한 얘기가 이 따위 건가? “아니, 진짜 별꼴이야! 걔가 뭔데 그래요, 응?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그러게나 말이다. 아침은 주먹밥이냐? 내려가자.” 무슨 일 있었냐는 둥 오빤 휘릭 멀어졌어요. 정말 휘릭, 하고.


  아침을 먹고 뒷정리를 하고 평소엔 거의 일없는 외출 준비까지 하다 보니 한 시진이 더 훌쩍 지나갔죠. 오빤 드디어 그 성기사 정복을 걸쳤어요. 얼룩덜룩한 무명옷이나 걸치던 사내가 날붙이처럼 뾰죽하게 다린 하양 정복을 입으니 얼굴이 다 훤했죠. 옷이 빳빳하면서도 보들보한 게 기가 막혔는데 무슨 최고급 탈지면에 모를 같은 비로 섞어 지었다나요. 신민들이 감히 하늘하늘 입어 버릇할 수 있는 옷감이 아니었어요. 아버진 끽차점 한 달치 수익을 그러모아야 겨우 사볼 만한 게 아니겠냐면서 너스레를 떠셨지요. 정작 오빤 안전부절 못했어요. 좋은 옷인 건 둘째치고 때깔이 너무 하얘서 어디 슬쩍 부대끼기만 해도 흉이 질 거라면서. 뭐, 아무리 그래도 저걸 매일같이 입지는 않지 않겠어요? 그랬다가는 잘난 성기사님들이 매일같이 빨래만 하다 일 다 볼 테니까요. 사실 어머니가 꽁꽁 감춰 두셨던 학자복도 만만찮지만 신성도서관 죽돌이들이랑 뛰고 구르고 쏘고 하는 군교들이랑은 척 봐도 다르지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지만 이대로 오빨 몇 년은 못 볼 수도 있다고 하니 지금 봐 줘야 했고, 그러다보니 옷 갖고 미주알고주알하는 게 이상하진 않잖아요?


  슬슬 겨울이 깊어지고 있다 보니 외투를 걸쳐도 바람이 무척 모졌어요. 바들바들 떨 건 없었지만요. 그것보다는 사방이 깜깜한 게 신경쓰였지요. 사실 이런 꼭두새벽에 나다닐 일은 잘 없으니까요. 그나마 봄 즈음만 되었어도 희끗희끗 빛이 들었을 텐데. 웃기는 건 그런 와중에도 우리가 엄청 눈에 띄였다는 거예요. 아닌게아니라 요즈음 성기사라면 껌뻑 죽는 게 마니 사람이니까요. 이놈의 정복이 너무 반듯하고 이상하리만치 희어서 해 뜨기 직전 어둑어둑한 데서도 그럭저럭 눈에 띄었어요. 사람들은 슬그머니 보고는 헉 소릴 냈죠. 혹 아버지나 오빠, 저랑 얼굴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소문 들었다느니, 우리 동네에서 성기사가 났으니 경사가 아니겠냐느니, 앞으로 잘 좀 부탁한다느니 하면서 온갖 아부에 호들갑을 다 떨었어요. 어머니가 달바다에서 이 꼴을 깜빡 못 보시기를 바랄 수밖에요. 아버진 괜히 늦을지도 모르겠다며 빨리 걷자 하셨는데 우리 가족 생각은 다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요?


  “신세 폈네요, 오빠.” “어머닌 질색하셨을 것 같네.” 오빤 자꾸 제복에 뭐가 묻기라도 했는지 소맷자락이며 바짓단을 슬금슬금 살피고 있었죠. 전 괜히 말이 더 하고 싶어져서 제멋대로 지껄였어요. “질색하셨으면 오빠도 입단 안 했을까요?” “역사에 만약이라는 게 어딨냐?” “학자들이 사고실험이라는 건 왜 하겠어요?” 한숨 푹 쉬는 게 들렸어요. 이제 아침해가 제법 떠서 아직 새벽이구나 싶을 정도로만 밝았죠. 괜히 표정이 보이게 됐단 말이지요. “똑똑하고 피곤한 계집애, 내 생각엔 별 수 없으셨을 거다. 왜냐면 어머닌 우리 성국이 이렇게 된 게 참 별 수 없었다는 걸 몸소 느끼셨을 테니까.” “성사학자 때려치우셨던 게 헛짓이었다는 말이에요?” “맞아. 그리고 소용없을 걸 알면서도 더 올바른 쪽을 선택한 사람이 어떻게 대단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 제가 대답하기 전에 날쌔게 한 마디가 더 끼어들었어요. “그리고 난 헛똑똑이여서 어머니처럼은 못하겠다.” “헛똑똑이는 무슨.” 오빠 가슴에 달린 견습 성기사 휘장이 괜히 저쪽에서 오는 새벽볕을 되튕기고 있었지요. 그제서야 아버지 다 듣고 계시는데 뭘 한 건가 싶었는데, 괜히 평소 같은 표정을 그대로 하고 계셨어요. 아마 어머니랑 비슷한 이야기 실컷 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네요.


  역마차 탈 데 도착하니 거의 아침다운 아침이 다 돼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무도 이런 걸 타 버릇해본 사람이 없어 바짝 얼어 있었어요. 공일인데 사람 많지 않을까, 잡아타긴 어떻게 잡아타야 하는 걸까 하는 거였죠. 곧 우린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지요. 승강장은 썩 붐비지 않았고 그나마도 오빠 정복이 밭고랑에 댄 쟁기처럼 사람들을 휘릭 갈라 놨거든요. “성기사님이다!” “세상에, 성기사님이 이런 델 다.” 따위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에서 들렸어요. 우리 앞에서 마부랑 흥정을 하던 사람이나 마차 발받침대에 발을 얹고 있던 사람들이 죄 후닥닥 물러나 버려서 어거지로 맨 앞으로 떠밀린 꼴이 됐어요. 아무도 우리보다 먼저 타려고 하질 않았거든요. 사실 그렇잖아도 역마차가 처음인 우린 이런 이상한 광경에 더 어쩔 줄을 모르게 돼 버렸죠. 슬금슬금 눈치 보던 마부 아저씨 한 분이 와선 우릴 낚아챌 때까지. 사실 이 아저씨는 장삿속을 채울 겸 성기사를 태웠다고 자랑할 겸 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고맙게 생각될 정도였어요. “아이구, 성기사님. 다들 높으신 분한테 양보하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괜히 빼지 말고 타십쇼, 알아 뫼시겠습니다.”같이 굽실거리는 게 말이에요.


  이리리미까지 가자니 아저씨는 드러내놓고 좋아했어요. “이리리미는 적당히 멀어서 달곤돌라 타고 온 분을 이쪽까지 실어 두 탕을 뛸 수 있어 좋습지요.”따위 설명까지 해 줄 정도로요. 우린 삯을 흥정해야 된다고 들어서 괜히 쭈뼛쭈뼛 머뭇거렸지요. 한창 신이 났던 마부 아저씨는 이 양반들이 왜 이러나 싶은 눈으로 보더니 금방 눈치 채고 “성기사님들이 이리리미로 가자면 얼마를 받으라고 신전에서 단단히 일러 놔서 말입니다요, 관에서 까라면 까야지 않겠습니까?”라며 껄껄거렸어요. 아무래도 이런 체계는 꽉 잡아 놓은 모양이죠. 전 바깥쪽에 타고 싶어서 아버지랑 오빠한테서 한걸음 샥 물러나 마지막에 탔어요. 어마어마한 달곤돌라도 아니고 겨우 네모난 곽에 구멍이나 뚫어놓은 거라 뭐 대단한 게 있을까 싶었지만 풍경이라던지 바람 같은 걸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봐 두고 싶었거든요.


  마차는 곧 시내를 벗어나 근교로 접어들었어요. 곤란한 게 있다면 벌써부터 엉덩이가 아프다는 거였어요. 도시 길 위에선 덜컹거리는 게 좀 덜했지만 포장 안 된 데로 빠지기가 무섭게 와락 튀어오르건 덜걱덜걱 흔들리건 난리법석이 시작됐거든요. 그래도 미시르미 바깥으로 나오니 좋았지요. 변두리까진 몇 번 나와 봤는데도 말이에요. 겨울이라 도시 곁 가사미 산이 허여멀건한 게 이가 숭숭 빠진 것처럼 보였어요. 그렇잖아도 끽해야 동산쯤밖에 안 되는데 헐벗기까지 해서 영 볼품이 없었죠. 그래도 가사미 산 아래로 널따랗게 펼쳐진 측백나무 숲은 여전히 멋지고 파릇파릇했어요. 측백나무란 건 왜, 마니 사람들이 ‘백작 나무’라고 부를 정도로 고상한 나무예요. 성자님들이 달바다에서 측백나무 의자에 앉아 계시다나요. 여하튼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저한테 제일 가까이 있는 늘푸른나무란 게 좋아요. 사람이랑 달라서 영원히 사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소풍이란 핑계로 측백나무 숲 청솔 시키는 신민부 소풍이 전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어요. 쓸데없는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어차피 전 창틀에 턱을 올려놓고 이리 흔들 저리 덜걱 하면서 숲이나 보고 있었거든요. 마차는 착실하게 남쪽으로 내려갔고, 가사미 산이건 측백나무 숲이건 점점 작아지더니 보이질 않게 됐죠.


  전 이 여행 아닌 여행길에 미시르미 바깥 구경도 좀 하려고 했는데 영 시원찮았어요. 생각해 보니 그런 게, 도시랑 도시를 잇는 길이 험하고 경치 좋은 델 지나갈 리가 없잖아요? 전 가사미 산 비슷한 산들이랑 측백나무 숲보다 못한 숲들이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가 사라지는 걸 봤어요. 턱이 아프면 머리를 차벽으로 옮겨 괴기도 하고, 팔을 쑥 내밀어서 휘적휘적 바람을 잡아 보기도 하고. 몇 번째 성자님이더라, 여섯 번째 성자님이었나? 여행의 즐거움이란 바람이 바뀌는 걸 느끼는 거라고 하신 분이 있는데 아직까진 영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죠. 슬슬 지겨워지려고 할 즈음 앞쪽 덧창이 드르륵 열렸어요. 마부 아저씨가 “손님들, 반쯤 왔습니다. 이 길 처음이신 것 같은데 곧 오른편으로 그리미마니 호수가 보일 테니 구경이라도 하십쇼.”라나요. 전 보던 쪽을 계속 봤고 아버지랑 오빤 척, 하니 기댄 자세 그대로 고개만 슬쩍 돌렸죠. ‘그리미마니’면 ‘땅 위의 달’인 셈인데 이런 거창한 이름을 가진 게 어떤지 솔직히 궁금했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오른쪽이 탁 트이면서 땅이 아래로 쑥 꺼진 게 보였어요. 그 안에 든 게 전부 물이었고요. 웬 작은 파도 비슷한 게 호숫가로 철벅철벅 오고, 물안개가 떡 하니 떠올라 모관처럼 위에 쑥 씌워져 있었죠. 미시르미를 통째로 들어다 담가도 한참이나 남을 것 같았어요. 밝은 밤이면 저 엄청난 물에 큼지막하게 달이 비칠 테니 헛지은 이름이 아니라고 할 만했지요. 왠지 밥때가 된 것 같아서 전 오빨 멀뚱 쳐다보고는 도시락통을 톡톡 두들겼어요. ‘내가 왜’같은 표정이 휘릭 스쳐 지나갔지만, 뭐. 괜히 견습 성기사가 부르니까 마부 아저씬 혼비백산했고, 좀 쉬고 점심도 먹고 가자니 그제서야 “아이고, 그러십시다.”라며 안심하셨죠.


  주먹밥이 열 개니까 제가 두 개, 아버지가 세 개, 오빠가 세 개에 마부석으로도 두 개를 나누어 드렸어요. 분지 한쪽 끝에 걸터앉아 그걸 들고 있자니 아래서 위로, 호숫바람이 살금살금 불어왔지요. 곧 추워질 것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게 바람이 냉하진 않았고 증기를 싣고 와 간질간질하기도 했거든요. 전 제 몫을 와삭와삭 먹고 오도카니 앉아 있었죠. 이상하리만치 나른했어요. 오빤 뭔가 아쉽기라도 한지 밥풀을 소처럼 우물우물 오래 씹었어요. 아버진 진즉 식사를 끝내시고 마부 아저씨랑 연초를 나눠 피우고 계셨고요. 저요? 전 날은 날이라고 화장도 좀 하고 머리는 풀어서 치렛감도 하나 차고 나왔는데 축축한 바람이나 맞고 있으니 말짱 황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죠. 그래도 기분 좋으니 다행일까요?


  마부 아저씨가 안절부절 못하고 오빨 드문드문 쳐다보기 시작할 즈음 우린 도로 객석에 가 앉았어요. 또 와락 튀어오르건 이리저리 덜걱거리건 하는 길이 시작됐죠. 분지 호수를 뒤로 하니 또 그렇고 그런 심심한 광경뿐이었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걸린 시간만큼 더 가니 이리리미였죠. 외각지에서부터 정말 볼만했어요. 아마 미시르미를 네 개 정도 이어 붙이면 이 정도 크기가 될까요? 그렇게 해 봐야 미시르민 신관님들 사시는 시내 중심 부근에서나 겨우 도시지 아랫것들 사는 바깥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으니 비교가 안 될 테지만요. 달곤돌라라는 게 지나가면 구경하려고 했는데 안타깝지만 뭔가 기둥에 막대를 끼워 놓은 게 쭉 이어져 있는 것 말곤 안 보였지요. 역마차가 북문으로 드니 검문을 한다 뭘 한다 하며 자꾸 사람이 들이닥쳐서 조금 짜증이 났어요. 그리고 오빨 보더니 죄 “아이고, 성기사님 아니십니까! 이거 실례했습니다.”따위로 굽실거리더니 얼른 보내주길 반복했죠. 우린 곧 정확히 어딨는지도 모를 승강장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길을 모르니 물어물어 가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역마차 내린 데서부터 달곤돌라 역 방향이 어딘지 표지판이 서 있었어요. 우린 엉거주춤 길목 길목마다 그런 팻말을 찾으며 걷게 됐죠. 왜 엉거주춤이나면 이리리미는 겨우 도시 말석인 미시르미랑은 영 딴판이었거든요. 가도 양쪽으로 건물이 서 있었는데 죄 이층이거나 삼층이어서 걷는 쪽으로는 늘 그림자가 져 있었어요. 사람도 사람이어서 해가 정수리를 넘어갈 시간에도 오고 가는 양쪽에 가득했지요. 이래서 다른 도시 갔다 온 사람들이 대처 대처, 하면서 미시르미를 촌동네처럼 무시하나 봐요. 여하튼 그런 데서 표지판 보며 가자니 사람 피해, 그림자 피해 고개를 쭉 내밀던 허리를 슬그머니 꺾던 해야 했으니까 엉거주춤했어요. 그렇게 가는 길에 웬 사내애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무슨 종이를 뿌려 댔어요. “호외요, 호외!”하는 걸 보니 신문인 모양이었죠. 제 옆으로 날아가는 걸 엉거주춤 낚아채서 팔락팔락 잡아올렸어요.



  마 니 일 보 [號外]

  성기사단 입단식, 이대로 괜찮은가?

  마니력 1721년 1월 16일, 만월의 성스러운 날을 잡아 11개 도시에서 견습 성기사들의 성기사단 입단을 축하하는 입단식이 개최된다. 우선 그들의 앞날에 여신의 보살피심이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허나 이러한 행사의 규모가 갖은 비판을 묵살하면서까지 매년 규모를 키우고 있는 배경에는 아무래도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올해 입단식은 성지 유역에서 일디오르 공국군과의 무력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보란 듯이 강행되어 더욱 그러하다 하겠다. 신관들과 신민들 중 성황청과 성기사단의 유착에 심히 의문을 품는 자가 적지 않다. 거듭된 진상 규명 요구에도 진솔한 해명은커녕 침묵으로 일관하는 두 청을 고귀하신 달여신의 가호와 332년 마니일보 역사 앞에 규탄한다.

  마니일보 주필 네시엄

  마니일보 부필 시시미시, 미우리엄, 가네시, 라다엄, 두엄

  이하 마니일보 초필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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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2)

까치우
까치우 19.02.24. 22:31
아니 이건 말로만 듣던 연참....!
까치우
까치우 19.02.24. 22:34
굴곡을 예상했는데 분위기만 살짝 깔고 물 흐르듯이 지나가네요. 반전 아닌 반전..
이야기 말고 문장만 읽어도 재미있네요 갓―연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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