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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딸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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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28 Mar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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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마니력 1501년, 일디오르 공국에서 기관차라는 기계를 실용화하여 태양인들에게 널리 퍼트리기 시작하였도다. 달기술국에서는 발전이 정체된 성국의 내륙 물류 체계를 엇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방법을 연구했으나 강철비 때와 마찬가지로 방법이 요원하더라. 장인들이 좌절한 때 한 명의 선구자가 있어 이름은 아라마시라 하였노라. “우리 고찰에 오류가 있으니 바로 태양인 흉내를 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네들은 태양티끌을 천 년 넘게 다루어 왔으며 불의 쓰임새에 있어서는 반신(叛神)의 종자다운 솜씨를 지녔다 해야겠지요. 달에 계신 분을 섬기는 우리가 모사할 수도, 필요도 없을 겝니다.” 동료들은 네년이 무언데 감히 우리 피와 눈물을 업수이여기냐며 노했지만 아라마시께서는 “달을 이 땅에 가져와야겠지요, 그러면.”이라 되뇌며 그저 담담히 공방을 뜨셨다 하더라. 뭇 장인들은 기만이요 기망이라며 그분을 제명하려 하였으나 몇몇의 탄원으로 얼마간의 말미를 주기로 결의하였도다. 열 네 날이 지나고 성스러운 보름달이 뜬 밤, 미모란제에 지진이 일어나 만월 광장에 홀연히 석탑이 솟아났으니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혼비백산했더라. 조사에 착수한 사제들이 달기술국의 도움을 구하면서 탑에 가까이 선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아라마시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도다. “여신께서 제게 속삭이셨습니다. 이 탑은 달바다에 무수히 선 그분의 빛기둥을 따라 지은 것이지요. 마니 사람들 중에서도 제일인 장인이라면 이를 흉내내어 무수한 발전을 이루게 되리라 하십니다. 달이 이 땅에 내리기를…….” 달기술국의 장인들은 기적을 내리신 여신과 아라마시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 석탑을 이룬 신물을 일곱 번째 성유물, 월석이라 부르기 시작했더라.

아라라제의 사마시, 「아이들을 위한 성자와 성유물 전기」



  곧 신탁의 날입니다.


  신민들의 성인식이기도 하고, 축제이기도 한 날이에요. 평생 신전에 들어갈 날이 몇 번 있겠지만 자기가 주인공일 일은 이제 결혼식 즈음을 빼면 다신 없을 테니까요. 그마저도 결혼식은 예식 기부금이 무서워 신전에까지 안 가는 일이 많으니 더 그렇겠네요. 무얼 하는 날이냐면 이름 그대로 신탁을 받는 날이면서 비싼 옷을 빌려 입고, 맛있는 걸 먹는 날이라고 해야겠어요. 사내애들은 공단으로 지어서 비취나 터키석 단추를 단 두루마기라던가 금실 은실로 자수를 넣은 각반, 통가죽구두 따위를 덜렁거리고 계집애들은 온갖 화려한 저고리에 치마에 향낭을 찾죠. 그렇게 제 돈 주고 사입지는 못할 옷을 하루나 이틀 빌려 입는 데 전편 백 닢 즈음 우습게 버리지만.


  더 웃긴 건 그 짓을 왜 신탁의 날에 하느냐는 거 아니겠어요? 사실 이건 도대체 성인식을 왜 그 때 하냔 거랑 같죠. 신탁이라는 게 뭐 덕담도 아니고 넌 이러저러한 연놈이라고 콱 낙인을 박아 버리는 건데 말이에요. 제가 너무 신경증 환자처럼 구는 걸까요? 안타깝지만 딱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신탁이니 나발이니 하는 건 없었는데 여우비처럼 난데없이 뿅 하고 나타났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전 그래서 비싼 돈 주고 옷을 빌리는 게 영 탐탁잖았어요. 평소 입던 옷 입는 건 좀 그러니 어머니가 남기신 옷 중에 맞는 게 있으면 그걸 입을까 싶었죠. 그런데 아버진 좀 생각이 다르셨던 것 같아요. 이런 덴 돈 아끼는 게 아니라느니, 네 생각은 대강 알 것 같지만 성인식은 그렇게 얼렁뚱땅 넘기는 게 아니라느니, 내가 미호시 볼 낯이 없어진다느니 하셨죠. 어머니 이름자가 나오고서야 어머닌 어떡하라셨을지 생각해 보게 됐어요. 순순히 아버지가 내미신 전편 백 닢을 받아들 수밖에요. 알뜰하게 쓸 생각 말고 백 닢을 몽땅 쓰고 오라는 엄포까지도요. 솔직하게 말해서 돈을 아끼라는 것보다 더 어려운 명령이었어요. 야무지게 써 보려고 해도 제가 책을 사면 샀지 옷을 사 버릇하진 않아서 막막했어요. 친하지도 않은 같은 반 계집애들한테 갑자기 살갑게 굴기도 자존심 상하고요. 


  죽을 힘을 다해 머리를 쥐어 짜서 비싼 옷집이란 죄 강 안쪽에 있을 거고, 강 안쪽에는 신관님들이 사니 이오미시가 절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요. 요즘 제철인 향참외를 하나 싸들고 가서는 부탁을 해 봤는데 외려 걔가 심심한 차에 잘됐다며 좋아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닌게아니라 이래저래 얼굴 아는 신관님한테 알음알음 부탁하는 일이 적지 않은가 봐요. 견습 신관님들은 온종일 법복 차림으로 신전에 붙들려 허드렛일 할 신세라 이 친구는 그날 입을 예쁜 옷을 대신 골라줄 수 있다는 게 신이 나는 모양이었죠. 향참외를 뚝 깨뜨려서 사분지 일로 두 조각씩을 아침 댓바람에 와삭와삭 먹어치우고는 어디에서 몇 시에 보자는 약속을 하고 휑하니 각자 신민부랑 신학부로 돌아갔어요.


  강 안쪽은 어떻게 말하면 신관촌이고 또 다르게 말하면 부촌이죠. 성국의 여느 도시가 그렇듯 이런 부촌은 품부터 영 달라요. 제가 사는 덴 서 푼짜리 기와 얹은 못난이 집 투성인데 여긴 네모반듯한 건물에 벽에는 말끔하게 회칠이 돼 있고 떡하니 돌 장식 입구까지 뚫은 집이 한 줄로 서 있지요. 당연한 말이겠지만 영 불편했어요. 제가 허파에 바람 든 것도 아니고, 잘못 들락날락하다가 어디 도둑으로 오해받고 혼쭐이 날 수 있는 델 왜 와 버릇하겠어요? 그래도 왕왕 우리 끽차점에서 뭘 시켜다가(보통 찻잎이고 가끔 아버지가 만든 떡이나 마니과자 같은 걸요) 배달해 달란 손님이 있는데 그런 일을 제가 맡아 해서 가끔씩은 들러 봤어요. 그래서 만나기로 한 마니은행 앞은 어렵잖게 찾아갈 수 있었죠. 이오미시는 저보다 먼저 와 있었는데 모관에 법복 차림인 애는 온데간데없고 좋은 옷 입은 꼬맹이 아가씨가 대신 온 것 같았어요. 


  그제야 진짜 신관은 신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신민복 입고 같이 다니면 제가 쭈글이로 보이지 않을까요? 뭐, 어쩔 수 없는 건 둘째치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에요. 고 계집앤 절 보더니 “용케 제 시간에 왔네? 길 모를 것 같아 한참 기다릴 각오도 한 참인데.”라며 그러고 있던 제 성질을 긁었어요. 입술이 절로 삐죽 튀어나왔죠. “난 여기 안 와본 거 아니다, 뭐.” “……물건 사러?” “물건 갖다 주러. 배달 손님도 있어, 우리 가게.” “힘쓰는 일을 계집애가 해?” “차나 과자를 백 근씩 시키는 손님이 있으면 힘쓰는 일일 수도 있겠네. 우리 집에선 내가 제일 짬 낮으니까 하는 거지.” 제 대답을 들은 이오미시는 고개를 끼릭끼릭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말을 뱉어냈어요. “사실은 미호시 님의 계략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무슨 계략?” “몇 번 보면 이까짓 걸로 기죽진 않을 거니까.” “그런 계략이면 성공하셨달 수도 있겠네.” 전 어딜 가는지 모르고 이오미신 알려주잖고 걸었죠.


  사분지 일 시진 즈음 걸은 것 같았어요. 이오미시가 소매를 잡아 끌길래 저도 모르게 그 옷가겐지 의상실인지의 문지방을 덜컥 넘고 말았죠. 주인은 곧장 이오미시한테 알은체를 했어요. 고 계집애도 그러니 아무래도 아는 사인가 보죠. 절더러 친구라니 표정이 아주, 아주 이상해졌지만요. 그래도 쓸데없이 캐묻거나 이상하지 않냐고 따지진 않아 다행이었죠. 뭔갈 훔쳐갈까 감시하지도 않았고요. 뭐, 도둑질을 하면 이오미시가 덤터길 쓸 테니까. 


  전 외려 옆에서 신탁의 날에 입을 옷을 봐 주러 왔다느니 하며 재잘대는 계집애가 엉뚱한 소리를 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여기서 써야 될 돈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왜, 아버지가 강 안쪽에 있는 데서 옷을 빌리라고 전편을 셈하진 않으셨을 것 같았으니까요. 돈이 형편없이 모자라면 괜히 이오미시가 부끄러워지지 않겠어요? “혹시 가격이 어느 정돈지 알 수 있을까요? 예산에 맞을지 잘 몰라서…….”라고 한 마디 묻는 데 진이 빠져버릴 정도였어요. 제가 요 따위 말더듬이었던가요? 


  그래선지 좋은 비단에 모에, 심지어는 천잠사로 짠 복주머니나 향낭까지 있는데도 얼추 전편 몇십 닢이면 된다는 대답에 깜짝 놀랐죠. 그리고 대개 그러저러한 옷을 꾸어 줄 때 눈탱이를 때리는 건 돌려주지 않을 걸 셈한 거라나요. 맞아요, 전 알게 모르게 쭉 도둑놈 취급인 거였어요. 여기서 보통 신민이란 으레 도둑놈이란 거니까. 이건 제가 아닌 제 친구한테 빌려준다는 말이랑 다를 게 없었으니까. 기분 나빴지만 꾹 참을 수밖에요.


  “미호누, 이리 와.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오미시는 벌써 저만치에서 저고리 소매를 만져 보고 있었어요. 이상하게 아침에 말 꺼낼 때랑 달리 별로 신나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이런 신세가 될 걸 얼추 알고 있었던 모양이 아닐까요? 뭘 모르는 앤 아니니까요. 전 못 이기는 척 총총 뛰어갔어요. 별 신경 안 쓰고 있을 때랑 다르게 온갖 색이 눈 앞에 빙글빙글 해서 좀 어찔했죠. 마니학교에서 귀 뚫린 덕에 안 들어도 되는 이야길 많이 든는데 종종 부업을 해서 무슨 치마를 샀느니 어딜 가서 옷을 보고 왔느니 하곤 해요. 으레 이런 데 관심 두어 버릇했다는 거 아닐까요? 전 천쪼가리보다 종이쪼가리가 좋으니 만날 신민복 신세지만요.


  “무슨 색? 빨간 색?” 소매만 몇 개씩 만지던 애가 갑자기 묻는 바람에 전 엉겁결에 어깨를 움츠렸어요. “왜 처음 묻는 게 빨간 색이야?” “마니 사람들은 보통 파란 색 좋아하니까. 넌 반대가 아닐까 싶어서.” 헛웃음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어요. “내가 무슨 청개구리야? 뭐든지 거꾸로게.” “농담이고. 첫 번째 성자님이 제일 좋아하신 색깔이 붉은색이라며? 그래서.” “……빨간색 입으면 튈 게 뻔하잖아.” 전 우물우물하다 툭 내뱉었어요. 아니나다를까 까르르 웃는 게 들렸어요. “너답잖게 뭘 튈 걸 걱정하고 그래?” “나답잖게?” “응. 요즘 너 신학부에서도 유명하다? 저번에 상 받아버린 거 때문에 말야. 히미시 무녀님이 수업 들어오시면 ‘무녀님, 미호누란 신민 계집앤 도대체 뭡니까?’라고 묻고.” “아니, 견습 신관님네들이 히미시 무녀님 귀찮게 하니까 더 날 아니꼽게 보시잖아!” 입이 떡 벌어졌어요. 이오미신 제가 입을 벌리든 콧구멍을 벌리든 킬킬거리면서 옷을 골랐어요.


  친구 녀석은 허튼 소리를 한 게 아닌지 정말로 빨간 저고리를 집었지요. 품이나 곧은 옷깃은 으레 보는 저고리 같았지만 허리가 잘록한 데다 소매가 크고 길어서 같은 옷이 맞나 싶었어요. 그래도 엄청 비싼 공단을 썼는지 반질반질하게 빨갛고 앞섶을 따라 넣은 자수를 빼면 단출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빨간색 좋아하니까요. 이오미신 점점 신을 내기 시작했죠. 갑자기 제 치맛자락을 확 들춰 다리를 보질 않나, 이 치마 저 치마 들고 와서 제 허리춤에 대 보질 않나, 내일 제가 못 입는 분까지 저한테 입혀 보려는 건지 인형놀이를 하려는 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요. 짧은 치마는 싫대도 네가 뭘 모르는 거라며 부득부득 무릎 위에서 살랑거리는 걸 들리고, 허리싸개에 복주머니에 단화에 심지어는 한 쪽만 신는 이상한 길쭉양말까지. 그냥 신민복이나 입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죠. 다 어딜 봐도 강 바깥쪽 옷집에는 걸려있지도 않을 물건 같았습니다. 그러고도 빌리는 삯이 일흔 닢 남짓이었어요. 전 미리 세어서 열 닢씩 묶어 둔 전편을 일곱 덩이 꺼내서 내밀었지요. 이오미시는 의상실을 나서서도 기분이 좋은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자기가 낼 테니 달쌈밥으로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어요. 전 정중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슬슬 가게 일 도우러 가야 하고, 이런 짐덩이를 들고 밥 먹긴 좀 그렇단 핑계로. 이건 너한테 빚져서 빌린 거나 다름없는데 밥 얻어먹어서 더 빚지긴 미안하단 말까진 안 하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그런 생각 하고 있단 걸 모르진 않는 것 같았어요. 굳이 안 붙잡고 대신 내일 신전에서 일하는 자길 찾아서 보여달란 말로 대신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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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3.08. 22:53
외짝스타킹.. 패잘알.. (기립박수)
줄거리가 되게 크네요. 그간 지나온 분량이 상당했는데 아직 어떤 내용인지 전체 윤곽이 드러나지도 않았으니
작가님 설마 이게 마지막 편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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