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애프터글로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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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01 Mar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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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빠르달 게 없는 설상기동이었으나 그렇다고 예정보다 뒤쳐진 건 아니었다. 레인저 아닌 자를 데리고 있다곤 해도 반극성기에 자율기동 군장의 도움까지 있었으니까. 어느새 등성이가 우둘투둘한 백색 선으로 병풍을 치고, 그 위로 눈신기루가 석양에 너울거리는 음울한 광경에 에워싸여 있었다. 밤중 체력을 비축하여 동남동으로 주파하면 8부 능선 즈음부터 그 한참 너머의 버그 파이크가 비죽 정수리를 들이밀 것이다. 바로 이틀 전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가 지나 온 눈윗길을 거꾸로 다시 가는 셈이다.


  주변 눈막대를 지표 삼아 그저께 썼던 눈굴을 잠시 찾던 두 여인은 곧 부질없는 짓을 그만두었다. 이 절기에도 거진 이틀치 하룻눈이니 바닥이 쓸리고 도로 쌓였을 테니까. 설종같이 지긋지긋한 눈삽질! 그렇게 오만상으로 툴툴거리는 찰나 곁에서 불그레한 실루엣이 불쑥거리자 일리아나는 뜨끔했다. 어느새 여분 눈삽을 꼬나쥔 이브제니아였다.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전우조는 잠시 눈빛을 주고받더니 곧 똑같은 꼴로 한숨을 쉬었다. 다행인 게 있다면 작열로 앞에서 한 삽 했다는 이야기가 아주 허튼 소리는 아닌 걸로 보였다는 것이다. 선지자라는 거창한 직명이 외려 어줍을 정도로.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한 시진 즈음 지나자 삭풍이 면도날처럼 설상복 위를 저미기 시작했다. 극성기든 반극성기든 밤은 밤인 법. 겨우 늦지 않게 공사가 얼추 끝나, 세 사람은 자율기동 군장을 눈굴에 처넣고 굄돌 삼아 방한포를 쳤다. 아직 남은 작업이 없진 않되 식사가 우선이었다. 일상처럼 합을 맞추어 식수를 만들고 죽을 끓이는 가운데 이브제니아는 좁다란 굴에 쭈그려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무료했는지, 그녀는 지껄이기 시작했다.


  “오랜 분들의 시절에는 이 협만 너머 빙해에 얼음이 한 조각도 없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대로 엔셀라티카를 반 바퀴 둘러 가면 따듯한 바다로 이어진다고.”


  “신화네요.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


  “소용이 왜 없겠어요? 오히려 소용 그 자체 같은데. 당신들 동맹의 말로는……. 세렌디피티라고 하지 않던가요? 우리는 참으로 공교롭게도 오랜 분들의 유산을 디디고 섰던 거라는. 그렇다면 우리가 그 유산이 만들어질 적에 대한 지혜를 업수이여길 이유가 없을 겁니다.”


  두 여전사는 동시에 움찔거렸다. 메르세데스는 눈 녹이는 반합을 설상키트 위에서 잠시 내려놓기까지 했다.


  “좋아 보이는 게 오롯이 좋을 순 없어요. 겨울은 여유란 걸 주질 않으니까. 당장 감당할 수 있는 것 외에 나머지는 천 근 보석이라도 쓰레기나 다름없죠. 다 끌어안으려다가는 겨울 앞에 자빠질 거예요.”


  “물류쟁이들이란, 레인저들이란!”


  “오히려 자칭 선지자인 당신이 그런 말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불을 섬겨야 할 사람이 웬 오랜 분들 찬양이람? 번지수 잘못 찾은 거 아닌가?”


  호위하며 가야 할 사람에 대한 태도치고는 무척이나 불손했다. 하지만 이브제니아는 기분 좋게 방한두건을 솔솔 매만지며 말했다. 이런 드잡이질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전 메르세데스, 당신이 그렇게 삐딱한 게 더 의외였는데.”


  “무슨 뜻이에요, 그거?”


  백색 동공에서 순간 불똥이 튄 것 같았다. 이 여자가 무슨 개소리지? 뭘 안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런 함의가 말본새만으로 순간 나고 든 것 같았다.


  잠시간 이끼와 지방 끓는 뭉근한 소리만 팔팔거렸다. 선지자는 괜히 슬근슬근 답하며 뭉뚱그리려 들었다.


  “불의 사도가 어찌 오랜 분들을 찬양하느냐, 그야 오랜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불의 사도들이셨으니까요.”


  “아니, 이젠 그런 위대한 양반들이 당신네랑 한 패라고 우길 거예요?”


  “우리 교단과 같으시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더 근원된 불의 지혜에 닿아 있던 분들이니 더 상위 범주에 속하시겠지요. 보십시오. 현대 인간들이 복원해 낸 부스러기만으로도 감히 겨울에 맞설 열기와 온기를 주지 않습니까? 알려진 몇몇 비전도 다 그렇다지 않습니까? 불을 심장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거인, 불을 빛으로 빚어 쏘아보내는 무기……. 그러한 신물을 빚어낸 그분들은 진정한 불의 사도라 할 만하지요.”


  일리아나가 대뜸 쑥 끼어들었다. 이끼죽이 눌어붙게 할 수는 없으니 얼추 요리가 끝날 때까지 듣고만 있었던 듯했다.


  “하늘사다리는 오랜 분들의 유산이지만 불이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잖습니까?”


  “하늘사다리, 그렇지요. 언뜻 보기에 그렇습니다만, 일리아나.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늘사다리에 대해 아는 게 무어 있습니까? 기실 없다 보아도 무방합니다. 여차저차 입방아 찧을 깜냥이 못 된다는 거지요. 다만 추측컨대, 엔셀라티카에서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불이 어디에 있나요?”


  태양을 말하는 건가? 일리아나는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늘사다리가 태양을 조종하는 구조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나가도 너무 나간 거 아닙니까?”


  “두고 보세요.”


  “뭘 두고 보자는 건지…….”


  흰소리는 흰소리였지만 미운 털 때문인지 더 뻔한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그런 메르세데스를 앞에 두고서도 이브제니아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두건 아래로 마냥 웃었다.


  머지않아 식사 준비가 끝났다. 삼분지 일씩으로 나누어 담은 죽은 참으로 평소와 같은 때깔이었으나 분위기는 썩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메르세데스 쪽이 더 그랬다. 맞는 걸까, 틀린 걸까? 계산대로라면 호송에 걸맞게 시뻘건 설상복으로 요란한 치들 사이에서 신경을 곤두세웠을 테지만 불식간에 광신도 수괴와 어깨를 맞대고 눈굴 신세가 아닌가? 더 얄미운 건, 이브제니아가 이 상황을 바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지자 이브제니아. 거진 크레바스의 이쪽과 저쪽처럼 단절되어 있는 동맹과 교단이나, 선지자가 신비하고 기괴한 모사가라는 사실만큼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저 눈굴 속이라고 같이 궁둥이 붙이고 드러눕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브제니아는 천연덕스럽게 제 몫 죽을 뚝딱 비웠다. 네까짓 것들 속이야 뻔하다는 건지, 그저 짐승처럼 포만감이나 즐기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온도차는 있었지만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식기를 정리하는 척, 남은 눈굴 작업을 하는 척하면서 그녀를 살폈다. 밤이 기울어 갔다. 머리 위는 하룻눈이 휘날리고 처덕거리는 소리로 흉흉했다. 밴시의 우짖음이 영 없다는 걸 빼면 공동지에서의 여느 밤과 같았다. 겨울은 인간사에 무심한 법.


  손님은 방한침낭에, 레인저들은 방한포에 눕기가 무섭게 이브제니아는 다시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아깐 재미없는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한 것 같네요. 전 당신들 이야길 좀 듣고 싶었는데……. ‘크레바스에 빠지고도 살아 돌아온 여전사들’ 이야기는 우리 루스카야 하이브에까지 유명하답니다.”


  “천리안인지 뭔지로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못 보나 보죠?”


  “당신들 시점에서 당신들 이야기를 해 줘야 재미있을 테니까요.”


  메르세데스는 질색을 했고 일리아나는 떨떠름했다. 곁에서 주둥이를 놀리건 말건 눈을 질끈 감아버릴 법도 했지만 겨울밤 눈굴이란 난방로 아래 요람이 못 되는 것이다. 여전사들은 번갈아가며 저들 이야기를 주섬주섬 지껄이기 시작했다. 추위로 턱주가리가 덜그럭거리는 데서야 떠들기라도 하고 볼 일이니까.



  메르세데스는 눈을 마구 토하며 정신을 차렸다.


  왼팔, 왼다리, 오른다리……. 성한 감각이 드는 게 다행이었다. 본능적으로 드는 물음이 둘, 언제 정신을 잃었던가, 여긴 도대체 어딘가?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뒤꽁무니부터 메다 꽂힌 탄차가 파랗게 얼어붙어 흉물 오브제가 되어 있었으니까.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했다. 얼음으로 된 빙벽이 참으로 모질게 보였다. 그렇다. 설종에게 떠밀려, 겨울의 아가리 속으로 직행하고 만 것이다.


  저만치 위에서 하룻눈이 조금씩 넘치며 아래로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우짖으며 눈이 옆으로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볼에 맞으면 따가울 만큼. 부란이 맹렬하여 크레바스 아래가 눈 천지였다. 이 싸늘한 융단이 없었다면……. 불합리한 일일지 모르나 부란이 그들을 죽이고 또 살린 셈이었다. 메르세데스는 비웃듯 낄낄거렸다. 곧 폐부가 시려 고통스러운 사레가 들렸지만.


  기침이 잦아들자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일리아나였다. 먼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다 웃었어? 나 골 울리니까, 또 웃진 말고.”


  “아나! 괜찮…….”


  일리아나는 친구 말을 꺾어 부쉈다.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다리 보이지?”


  그녀의 오른다리는 척 보아도 괜찮지가 않았다. 사실 백 척 아래로 곤두박질치고서 이만하면 천운일 것이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고 짜증스러운 건 짜증스러운 거니까.


  “우리, 일단 작열탄부터 몇 개 주워서 불부터 피우자. 정신 차렸을 때 그러려고 했는데……. 저기까지 기어가기 전에 아파서 미쳐버리겠더라고, 다리가.”


  메르세데스는 끄덕거리며 다리를 끌었다. 언제는 목숨줄이었을 작열탄이 사방으로 흩어져 지천이었다. 성한 손을 그럭저럭 놀려 몇 개를 주워섬긴 그녀는 얼른 돌아왔다.


  일리아나는 불똥 막대를 긁적거리며 우울하게 뇌까렸다.


  “우리, 이제 답도 없는 거지?”


  “몰라.”


  작열탄 더미는 불똥을 받아 맹렬하게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불길을 신호탄 삼아, 일리아나는 비아냥거렸다.


  “모르긴 뭘 몰라, 여기 크레바스야. 떨어지자마자 가든 조만간에 가든.”


  “기적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아?”


  웃음이 나왔다. 이곳은 겨울의 밑바닥이다. 감히 희망마저도 사그라들고 마는. 공동지 한복판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구원을 어찌 바라랴?


  하지만 메르세데스가 헛소리꾼일지언정 허튼소리나 하는 계집애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일리아나는 친구의 하얀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정도로도 다리가 망가진 절망감이 다소 가시는 것 같았다.


  “하고많은 네 개소리 중에 이만한 게 또 어딨나 싶다.”


  “작열탄이라도 얼마든지 있잖아? 발버둥은 쳐 봐야지. 기적이라고 해서 손잡고 누워 어디 여신님한테 기도나 하잔 건 아니었다고, 적어도.”


  “비관론인지 낙관론인지 모르겠네. 좆되기 전까진 좆된 게 아니라고?”


  일리아나는 이상하리만치 흡족함을 느꼈다. 이상하긴 이상해도 체력이 떨어지든 작열탄이 떨어지든 식량이 떨어지든, 겨울과 끝장 전쟁을 벌이고 보자는 단순한 계획이었으니까.


  두 소녀는 작열탄 몇 조각으로 피운 불구덩이를 앞에 두고 앉아 머리를 머리를 맞댔다. 이맛전으로 오가는 알량한 존재감이나마 지금은 연료보다 더한 자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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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3.14. 20:52

의표를 찌르는 #11..!

날카로운 착점에 헉 좋아 죽습니다

명사 사용 좋아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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