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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딸기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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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44 Apr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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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미시르미 극장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연극을 즐겨 버릇한 적은 없지만 기분전환 삼아 다녀와도 되겠냐고 아버지께 여쭈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고등마니학교 입학 면접에 다녀와서는 신경증이 깊어져 정신줄이 겨우내 메마른 가시나무 가지 꼴이었으니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겠지요. 사실 무슨 낯으로 이러고 있나 싶어 와락 자리를 박차려는 충동이 발작처럼 울쑥불쑥했습니다. 상경하는 달곤돌라 삯에 미모란제에 한 주 거취를 마련하는 비용으로 전편 수백 닢을 깨부수고 온 딸년이니까요. 아버진 “너답잖게 무슨 조급증을 그렇게 내니?”라고 말로는 태평이셨지만 정말 무슨 생각이신지까진 모를 일입니다. 그 사람 좋은 양반이 뒤로는 딸년 흉을 보리라는 망상을 이다지도 아무렇잖게 하게 된 걸 보면 제 병증이 어지간하지 않다 싶기도 하고.


  또 그 지랄맞은 입학고사 생각을 하면 머리통이 강철비 포탄처럼 뻥 터져버릴 것 같아 전 애꿎은 치맛자락만 손아귀로 구기며 성질을 죽였습니다.


  “아가씨, 간식 어떠세요?” 난데없이 말이 와락 뛰어들어 잘못 퉁긴 마니현처럼 못난 소릴 낼 뻔했습니다. 주전부리 파는 사람이 곰살맞게 웃고 있었지요. 기름이 번들번들한 걸 보니 속이 느글거려 손사래를 치다 말고 말뚱하니 물었습니다. “목 축일 건 없나요?” “단술이 있어요.” “좋네요, 단술. 한 잔 주세요.” “감사합니다. 두 닢입니다.” 허여멀건하니 밥풀이라고는 지금 제 평정심만큼밖에 없는 단술이 두 닢이라니 돼먹잖은 소릴! 속으로 한 소릴 죄 내뱉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미친년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속에 천불이 난 게 조금은 가시는 것 같기도 했지요.


  이제 드문드문 이가 빠진 곳 말고는 대개 자리가 찼고, 한창 이등석이랑 일등석에 비싼 객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무대에는 두꺼운 막이 소나무처럼 우뚝 서 있었지만 수런거리고 옴짝거리는 기색이 만만했습니다. 전원이 올라간 소리상자가 장내 여기저기에서 들끓는 소리를 내고, 안내하는 사람은 개막까지 몇 분이라고 카랑카랑하게 외쳐 댔습니다. 어수선하고 뒤끓는 데가 있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놓였습니다. 나무는 숲에 숨기라고 했던가요? 신경증은 온갖 긴장이 우글거리는 곳이 제격인가 봅니다.


  잠깐 기분이 풀리기가 무섭게 소리상자에서 나발 가락이 기척도 없이 쏟아져 나와 산통을 다 깨버렸습니다.



  「신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월 31일 대 마니 소식말씀입니다. 성기사단 창단 192년을 맞이하여 기무라제의 이다엄 대연병장에서 열병식 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싸우며 자라고, 자라며 싸워 온 여신의 검, 오늘의 성기사단은 이미 성지의 수호군이며 달바다의 십자군으로 그 위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병장에서는 성국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포격 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자랑스레 펼쳐지는 성전사들의 맹공격은 우리 성기사단이 이제 사사마니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는 것을 그대로 증명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교국 금 모으기 운동이 삼 개월 차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달여신의 신민으로서, 영광의 나라로 나아감에 서랍장 속 잠든 가락지며 목걸이, 귀걸이로 기여할 수 있다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각지의 신전에서 거둬 들인 금은 미모란제의 마니은행 중앙금고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11월에 276,083근, 12월에 89,933근이 모여 신민들의 참여 의지가 사자후보다도 또렷했다 하겠으며 올 첫 달의 성과 또한 의심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성황청에서는 의탁된 금으로 사사마니의 무장을 확충하여 성기사단의 흔들림 없는 승리 구축을 위해 힘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사치가 아닌 절약이, 이기심이 아닌 애국이 당당히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을 앞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1월 31일 대 마니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성기사단 만세, 영광의 나라 만세, 달여신 만세!」



  소식말씀은 이제 대 마니 소식말씀이 돼서 담담하고 살벌하게 성기사단 찬양에 앞서고 있습니다. 짜증나는 건, 소식말씀일 적엔 가도에서만 귀를 막으면 됐지만 이젠 어딜 들어가든 소리상자만 있으면 한 시진이 멀다하고 저런 게 들려오니 환장할 노릇이라는 거죠. 여기까지 와서 이게 무슨 노릇인가 싶었지만 객석 조명이 착착 나가고 수선스러운 게 막 뒤 즈음뿐이 되니 훨씬 나았습니다. 정말로요. 그제서야 그러고보니 극단 전단지라도 좀 읽어 둘 걸 싶었습니다. 제목이 무어더라, ‘님’이던가? 치정극일 게 뻔할 테지만.


  그런데 막이 걷히기가 무섭게 참 익숙한 배경 음악이 멋들어지게 울려퍼지는 게 아닐까요? 나발 소리, 꼭 방금 전에 들었던 그 오살할 놈의 곡조를 교묘하게 편곡한 듯한 가락이 쩌렁쩌렁 객석을 어루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입을 떡 벌릴 수밖에요. 님이라며? 님이면 애인 말하는 거 아냐? 너 아니면 못 사네, 날 두고 가지 마오 이럴 거 아냐? 아무래도 제겐 시대적인 예술 정신이 쏙 빠져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아라엄 (성기사단 나팔 소리가 세 번 연속으로 들리며) 아라라제의 신민 여러분들은 들으시오! 주목하시오!


아라엄 성기사단이 님의 나라를 위하야 성지로 담대히 나아간 지 오늘로 열하루가 지났소. 공왕의 군세는 일식과도 같이 사방으로 비산하여 꺼지고 말 게요.


아라엄 허나 태양인들이란 그네들이 불장난하는 태양티끌 수만큼 무수하오. 외풍 앞에 휘청거리는 불길마냥 우리를 목하 습격하리이니 지금의 승리는 승리 아닌 시작일 것이오.


아라엄 대율에서 이르길 여신의 말씀 듣는 자 신관이요 말씀 따르는 자 신민이 아니겠소! 정녕 두 계급이 님의 나라 앞에 같으오. 들음은 곧 알음이오 알음은 곧 행함이니 말이오.


아라엄 그리하야 성기사단에서는 더 많은 신민이 성전사 되어 함께 걸었으면 하오. 달에 계신 그분께서 미소 짓고 계시오. 아름다운 성지가 우리 손에, 만연한 이단 중에 고결히 빛나리니 말이오!


아라엄 나는 징집관 아라엄이라 하오. 아라라제 신전에서 님의 나라로 발맞추어 갈 자를 항시 기다리고 있소. 성국 만세, 성기사단 만세, 달여신 만세!


바라모 (독백) 이를 어쩌지! 내 님을 위해 꿋꿋이 살겠다 다짐했거늘 막상 때가 오니 흔들리는구나. 여신이시여, 용서하시기를.


바라모 (독백) 하지만 달에 계신 분이시여, 가르침을 주십시오. 당신의 종은 하나이자 둘이며 둘이자 하나입니다. 제 반이 죽어가거늘 그저 무심히 나아갈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아! 이리 나약한 종을 용서하소서.


(바라모, 광장을 떠나 무대 반대쪽인 자신의 집으로 간다)


(조명, 광장 쪽에서 꺼지고 바라모의 집 쪽에서 켜진다)


바라모 (문을 열면서) 나 왔어요.


아, 어서 오세요. 오늘도 힘들었죠? 얼른 저녁밥을……. (격렬하게 기침한다)


바라모 아픈 사람한테 어떻게 일을 시켜요? 그런 건 내가 할 테니까 누워 쉬어요.


바라모 그러고보니 폐병약을 좀 구했어요. 며칠 분 밖에 못 구해서 너무 미안해요. 같이 저녁 들고 얼른 먹어요.


아누 이 비싼 걸……. (흐느낀다)


바라모 아누, 당신 없인 나도 없어요. 세 달만 쭉 먹으면 나을 거라는데……. (같이 흐느낀다)


(바라모, 곧 울음을 그치고 잠깐 옆으로 나가 저녁상을 들고 돌아온다)


(바라모, 해작거린다)


아누 당신.


바라모 (뜨끔하며) 응? 왜 그래요?


아누 제 폐병 말고도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 거죠? 얼른 말해 보세요.


(바라모, 한두 술 더 해작거리나 곧 수저를 아주 놓아버리고 만다)


바라모 (우물쭈물하며) 아라라제 광장에서 아라엄이란 분이 연설을 하셨어요. 성기사단에서 나온 징집관 같으셨죠. 성기사님들이 곧 히나마니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실 거라나요. 하지만 태양인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님의 나라를 위해선……. 우리 신민들이 많이, 더 많이 성전사로 합류해야 할 거라고, 그게 대율에서 가르치는 진정한 신민다움이라고 하시더군요.


아누 (잠시 말을 잃고 나서) 제가 남편 앞길에, 이제는 믿음까지 가로막고 있네요.


바라모 (허둥지둥) 아누, 그게 아니에요.


아누 당신, 님이 무언가요?


바라모 님은……. 달에 계신 분이시지요. 님의 나라는 그 분의 영광으로 가득한 나라고.


아누 맞아요. 우리가 언제나 그리워했고, 사모하고 눈물 흘리며 오랜 세월 목말라 해온 그런 영광이 아닌가요? 마니 사내가 그런 님의 나라로 같이 걷지 못하면 부끄러워 어찌 살까요?


바라모 아누, 내가 병든 아내를 두고 어떻게 집을 나가버리겠어요?


아누 (단호하게) 여신께서 돌보아 주시잖아요?


아누 전 자랑스레 나가 말할 거예요. 우리 바깥양반이 성전사가 되었다고. 성전의 최전선으로 나가 있다고. 님의 나라에 작은 보탬이 되고 있다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싸우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온 여편네가 절 부러워하도록.


아누 그러면 제 목숨 하나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게 어떻게 어려울까요?


바라모 아누.


바라모 (북받쳐 울며, 아누를 와락 껴안으며) 아누, 역시 당신이길 잘 한 것 같아요.


아누 (바라모의 등을 토닥거리며) 저도 제 남편이 자랑스러워요, 바라모.



  채 1막도 끝나지 않았지만, 전 온 살갗 위에 벌레가 스멀스멀 누비고 있는 것 같아 도망칠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디 다른 사람 방해하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제 자리는 쉬이 통로로 나올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막 오르기 전에 전단지나 읽어 둘 걸 그랬다고 했던가요? 정말인지 그 말대로였습니다. 애저녁에 나와 푯값을 환불해 달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전 못나게 구겨진 극단 전단지를 한 발 늦게라도 주섬주섬 펴 보았습니다. 줄거리가 친절하게 쓰여 있었지요. ‘가난한 바라모와 부잣집 아들인 다모. 다모는 평소 바라모를 업신여기며 자신은 신전의 연줄로 신관이 될 거라고 말한다. 바라모는 주눅들거나 삐뚤어지지 않고 님을 위해 꿋꿋이 살아가겠노라며 굳건히 자란다. 성지수복전쟁이 시작되자 바라모는 몸이 아픈 아내를 두고 고뇌하나 그녀는 님을 위해 성전사로 입대해야 하며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든 되리라고 한다. 바라모는 당당하게 성전사가 되는 길을 택한다. 한편 다모는 입대의 편익을 취하고 싶으나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돈으로 사람을 사 자신인 양 성전사로 입대시킨다. 거짓말은 오래 가지 않아 들통나고 만다. 판관 바라미시는 대노하여 다모에게 엄한 벌을 내린다. 한편 바라모는 히나마니 전역의 최전선에 투입되어 위기에 빠진 아군을 위해 영웅적인 활약을 하고 큰 부상을 입고 만다. 찬사와 함께 후방으로 수송된 바라모는 요양 중 혈액 검사를 하다 신성적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성기사가 되어 신관으로 격상되고, 녹을 받아 아누의 병을 고친다. 결국 님을 좇은 이가 행복까지 찾은 것이다’. 얼른 이 쓰레기를 동댕이쳐버리고는 극장가에서 후닥닥 달아나기로 할 밖에요. 달여신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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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4.17. 22:55
가끔 나오는 사투리가 주인공이 사는 지역이 촌임을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네요. 낱말을 사용해서 은연중에 작품 속 세계를 구축하는 솜씨가 되게 빼어나시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을 풀어내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말이죠 ㅎㅎ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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