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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아비는 오늘도 모험가 양의 뒤를 따라 걷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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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35 May 1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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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miroslav
협업 참여 동의

이것은 어느 나른한 오후.

“뭔데? 갑자기.”

나른한 얼굴로 서재를 둘러보고 있던 사내- 루크는 뭔가 언짢은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웬일로 서재에 있는 거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도화지처럼 새하얀 백발과 잿빛 피부, 그리고 신비로운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이 소녀의 이름은 라트리아. 루크가 머물고 있는 이 저택의 주인이었다.

“뭔 상관이고.”

라트리아가 겉모습에 걸맞지 않는 말투를 구사하고 있음에도 그녀를 꽤 오랫동안 봐왔던 루크는 별로 개의치 않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읽고 있던 책을 덮어버렸다. 책을 탁자에 대충 올려두고 소파 위로 늘어지자, 가까이 다가온 라트리아가 옅은 웃음을 띤 채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네가 좋아할만한 건 안 나온다고?”

“뭔 소리고. 내가 좋아하는 거를 할멈이 우예 아는데?”

“훗.”

소파에 턱을 괴고 앉은 루크가 무심한 얼굴로 묻자, 라트리아는 낮게 소리 내어 웃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라트리아가 빛에 휩싸이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키가 루크와 비슷할 정도로 자랐고, 평평했던 가슴과 엉덩이에 굴곡이 생겼다. 어린아이 특유의 동글동글한 얼굴도 날렵해졌다.
한마디로 어른이 된 것이다.

“뭐, 이런 거?”

“오오-”

한순간에 어린아이에서 누님으로 변모한 라트리아가 매혹적인 웃음을 띠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루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흐흥, 그럴 줄 알았어.”

라트리아는 흡족한 얼굴로 웃더니, 이내 줄어들어서 어린아이로 변해버렸다.

“왜 돌아가는 기고? 그게 훨씬 보기 좋구만.”

“이 모습은 연비가 나빠서.”

어린아이로 돌아간 라트리아를 보며 루크가 볼멘소리를 하자, 라트리아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고는 루크가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책을 집어 들었다.

“네가 이런 책에 관심을 가지다니. 별일이구나.”

방금까지 루크가 읽고 있었던 책은 ‘체이스의 모험담’. 금발머리를 가진 방탕하지만 정의로운 모험가 체이스의 모험담을 담은 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책이다. 

“그냥 책장 뒤지다가 찾아서 함 봐본 기다.”

“네가 어릴 때 머리맡에 앉아서 읽어줬던 게 기억나는군.”

“맞나, 내는 하나도 기억 안 난다.”

루크는 더 이야기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라트리아의 말을 일축하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잘란다.”

그렇게 말한 루크가 깍지 낀 두 손을 베개 삼아 잠에 들려던 순간, 라트리아가 다가와 책의 모서리로 루크를 툭툭 건들며 말했다.

“좀 부탁할 게 있는데.”

“싫다.”

“양심이 없구만.”

너무 단호한 거절에 라트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에 반해 루크는 무심한 얼굴로 돌아 눕더니, 침대 옆에 나 있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는 그런 거 안 챙기는 편이다.”

루크는 몸을 조금 뒤척이고는 창밖의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노을이 붉게 물든 하늘은 오늘도 어김없이 아름다웠다. 창밖에는 각진 지붕이 늘어선 고풍스러운 거리와- 그리고 차마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속에 감춰진 부유성의 모습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하늘에서부터 솟아나 있는, 즉 하늘에 ‘거꾸로 매달린’ 저 성의 이름은 부유성 이스티아- 지금 루크가 살고 있는 도시 그라시아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자 결코 다가갈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머나먼 옛적부터 하늘에 떠 있었다고 전해지는 고대 유적이다.

“300 골드 줄 테니까 좀 다녀와.”

“에게, 300골드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노? 내같은 고급인력을 쓸라믄 한 3000만 골드는 가지고 와라 안 캤나.”

“…….”

참고로 3000만 골드는 그라시아 거리의 전망 좋은 곳에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돈이다. 너무나도 뻔뻔한 루크의 태도에 결국 라트리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사람이 남의 집에 얹혀 살고 있으면 양심이 있어야지!”

“어디서 양심을 찾노! 할망구는 모아놓은 돈도 많으면서 왜 날 못 부리묵으가 안달인데!”

루크가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평소에 요리나 자잘한 집안일은 내가 다 하고 있다 아이가! 요리도 하지 청소도 하지…… 아침에 할망구 출근하기 싫다고 땡깡부릴 때도 밥 멕이고 씻기고 옷 입혀주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나!”루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라트리아는 찔리기라도 했는지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잠시 후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그 건에 대해서는 나도 고맙다고 생각해. 그런데 출근하기 전에는 원래 다 그런 법이야. 너는 출근이란 걸 해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하하.”

“참나……”

“아, 그리고 오늘 음식은 좀 싱겁더라. 난 좀 짭짤한 게 취향이라서.”

“치아라.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루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돌아섰다. 그러자 라트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최후의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한번만 다녀올래. 아니면 휴가를 반납하던지.”

“아 또 머라캐쌌노!”

라트리아의 말에 루크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핏대를 세웠다. 

“하이고 또 시작이다. 그건 대체 언제까지 우려묵을 낀데?”

“말 잘 들을 때 까지.”

“여튼! 휴가 반납은 절대 안 된다!”

“그럼 얌전히 심부름 다녀와.”

“아오!”

루크는 펄쩍 뛰었지만, 라트리아는 단호하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결국 루크가 진저리난다는 듯이 머리를 북북 긁으며 침대 옆에 세워둔 대나무 몽둥이를 집어들자, 라트리아는 흥미롭다는 얼굴을 코웃음을 쳤다.

“호오? 한번 해보자는 거냐? 꼬맹아.”

“꼬맹이는 당신이겠지! 이번에야말로 서열정리 다시 하는 기다 알겠제? 내가 이기면 얌전히 이 집, 내한테 넘기라. 알아들었나?”

“뭐…… 마음대로 해. 그런데 내가 이기면?”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됐제?”

“그래? 그거 괜찮군.”

라트리아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고.”

“아니, 그냥. 혹시라도 있다면 고해성사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런 거 없다! 얼른 치고 받을 준비나 해라. 이번에야말로 할매를 쓰러트리고 내 즐거운 백수 생활을 되찾을 끼다.”

“흠…… 그런가.”

루크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나무 몽둥이를 자신에게 겨누자, 라트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그럼 시작한다.”

그 한마디와 함께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주변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엄청난 굉음을 내며 폭발하고야 말았다.

“…….”

잠시 후, 시야를 가득 메운 충격의 여파가 사라지자 주위를 둘러본 루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책들이 있던 서재, 고가의 가재도구가 즐비한 호화로운 식당, 넓고 편안했던 침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말 그대로 라트리아가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이 거대한 저택을 인정사정없이 날려버린 것이었다.

“네가 날 이길 리가 없잖아. 꼬맹아.”

라트리아는 폐허가 된 저택의 중심에 서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루크를 내려다보았다.
“더 해볼 거냐?”

루크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퍼뜩 고개를 저었다.

“후후, 그럼 나의 승리라는 걸로.”

눈을 까뒤집은 채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루크를 보며 실실 웃던 라트리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저택은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폭발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하이고. 내가 그만 마녀 소굴에 들어와삤다.”

그제 서야 루크는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한다고 했었지? 그럼 며칠 전에 삥땅친 심부름 값. 그거 도로 뱉어내.”

“윽-”

“그저께 카지노에서 몽땅 잃은 거 알아.”

“하, 할매가 그걸 우예 알았노……”

루크가 벌레 씹은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자, 라트리아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고로 엄마라는 건 자식이 밖에서 뭘 하든지 다 알고 있는 법이란다.”

루크의 얼굴이 점점 더 썩어 들어갔다. 

“어……”

“……?”

“엄마!!”

루크는 마치 사회의 낙오자 같은 몰골로 라트리아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눈물을 질질 흘렸다.

“제발 좀 봐도! 300골드 줄 테니까!!!”

찢어지는 듯한 루크의 절규가 그라시아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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