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자살소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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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11 Jul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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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이억수
협업 참여 동의


 0


모두가 안녕하세요! 대신 껴안으며 우가자가우가우가! 하던 시절의 이야기. 



 01


 한 고을에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를 소녀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소아성애자들이 더러 있었지만. 

 어차피 어른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불러도 무방할 듯싶었습니다. 잘 나가던 역관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던 소녀는. 인형같이 고운 용모에 은하수 같이 흘러내리는 은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태어났을 당시 머리카락의 색깔 탓에 고을에선 한동안 소란이 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냥 부인이 외국인 신부라서 그런갑지. 하고 넘어갔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관용적이었다기 보단. 

 그냥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관심을 가질만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지만요.


 소녀는 성격도 크게 나쁜 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의 교류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예의는 지킬 줄 알았거든요.


 반갑지가 않아도 반갑습니다. 라고 말할 줄 알고. 잘못을 하면 죄송합니다. 책임지고 배상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줄 알고. 슬프지 않아도 상심이 크시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별거 아니라구요? 이 별거 아닌 걸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세상에 많답니다.

 너무나도 예의가 바르고 아름다웠기에 평소 주위로부터 앉으면 작약 서면 모란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소녀였지만 지금에 와선 아무 의미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게 소녀는 지금 막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별달리 친척도 없었기에 소녀는 굉장히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정말로 어마어마어마하게 많은 유산이었지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유산의 약 10배치였습니다.



 02


 지나치게 널찍한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소녀가 생각했습니다. 하인들도 모조리 쫒아버린 직후라 집안은 한산했습니다. 

 딱히, 엄마 아빠가 죽어서 죽고 싶어진 건 아니야.

 평소에도 그렇게 열심히 살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 생긴 것일 뿐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녀는 시무룩해졌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관리들의 편의를 위해서일까요. 

 하여튼 타살로 보이는 건 싫었기에 유서를 썼습니다. 

 누름돌에서 종이를 빼 후후 말리며. 

 소녀는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03


 평소 소녀의 그런 우울을 잘 알고 있던 부모는.

 소녀를 데리고 정신과 의원을 자주 찾아 갔습니다.


 부모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기보다는 갑자기 들은 사고 소식 때문에 

 가지 못했던 정신과 의원을 향해 소녀는 총총 걸어갔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셨던 말이

'점심은 냉장고에 있으니까 챙겨먹고 꼭 병원 갔다와라.'였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었습니다. 


 늘 하는 것처럼 에말아이침도 맞아보고 상담도 받아봤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늘 자신을 구하는 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하네." 


 의원이 근심스럽다는 눈으로 소녀의 두피를 꾹꾹 눌러가며 지압을 해줬습니다.


 "일단 내 탕약을 지어 줄 테니 한번 드셔보시고 이주 뒤에 다시 봄세."


 정신과 의원이 밖까지 나와 배웅해줬습니다.

 소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집에 돌아와.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은 탕약을 마시고 푹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평온하고 안온한 상태에서 조금은 서글프게

'역시 죽자.' 하고 결심했습니다.



 

 04


 소녀는 '그렇다면 손목을 긋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밧줄에 목을 메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싫었고 무엇보다도, 목을 매달면 분변이며 오줌이 다 질질 새어나온다고 들어서 영 꺼려졌습니다.


 아무래도 소녀도 여자라 갈 때는 좀 곱게 가고 싶은 법입니다. 높은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로 꺼려졌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손목을 긋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처라는 건 적어도 익숙한 거였으니까요.


 죽을 방법을 정한 것만으로도 

 이미 죽어버린 것 같은 성취감이 느껴져서 만족스러웠습니다.



 05


 하지만 역시 몸에 칼을 대는 건 무서워서 소녀는 북양에서 들여온 기술로 만들었다는 최신식 사혈 침을 샀습니다. 


 '이거 한방이면 묵은 체통이 싹 내려가오!' 

 라고 포장지에 그려진 동자가 엄지를 치켜들고 있었습니다.


 똑딱이 한방이면 죽을 수 있는 걸까요? 

 어차피 혈관에만 닿으면 됐으니 상관없었습니다. 


 1시간에 걸쳐. 사혈 침을 팔에서 붙였다 뗐다 붙였다 뗐다 하다. 마침내 소녀가 똑딱이를 누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진짜 진짜라고 생각하고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순간 힘이 쪽 빠져버렸습니다. 


 절망스러웠습니다. 대체 어쩌라는 걸까요.

 죽고 싶은데도 무서운 건 무섭네. 하고

 소녀는 자조했습니다.



 06


 사혈침을 다시 상자에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각오가 필요한 가 봅니다. 

 역시 과다출혈로 죽으려면. 

 전통적으로 예리한 칼이 제일이었지요.

 그래서 소녀는 제대로 손목을 베어 보기 위해 닭을 잡는 시퍼런 칼을 가져왔습니다. 힘을 주어 팍 베면 지혈을 하려 해도 돌이킬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도 영 힘들었습니다. 사혈 침 똑딱이도 제대로 못 누르는 겁쟁이가 손목을 그을 수 있을 리가요! 힘을 충분히 주었다 싶으면 공중에다 헛손질을 했고. 제대로 손목에 칼을 댔다 싶으면 힘이 빠져버렸습니다. 이래선 백날이 가도 손목은 못 그을 겁니다. 


 자신의 의지 박약에 시무룩해진 소녀는.

 그만 힝 하고 칼을 내팽겨 쳐버렸습니다.



 07


 그래서 소녀는 검의 달인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최고의 살수. 300년 전통의 살인기계 검술, 호신술 지도 편달.> 이라고 낡은 전단지엔 그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평소에 뭐든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 거란다. 라고 소녀를 가르쳤습니다. 이럴 때도 제대로 하라고 가르친 건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소녀는 기억 속의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도 검의 달인은 쓰는 사람 편하라고 고을 외곽의 공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검의 달인이라고 해서 당연히 호호백발의 할아버지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녀 또래의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시대가 변해서 할아버지들은 다 죽었나봅니다.


 검의 달인은 자신이 유명한 무사 백동수의 당숙의 처조카의 외고조손이라 소개했습니다.

 순간 소녀의 뇌리에 번개처럼 '그러면 그냥 남 아닌가...' 하는 지극히 타당한 의심이 스쳤지만 칼질만 잘 가르쳐준다면 크게 상관없는 문제라 여겨져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강비를 지불하고 하얀 도복과 띠를 찼는데.

 달인이 갑자기 검을 가르쳐주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검을 배우려는 이유가 뭐지?"


 소녀는 잠시 표정을 찌푸리고 고민을 하는 척하다.

 미리 정해둔 대답을 했습니다.


 "...베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달인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군.”


 소녀는 딱히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자기 자신도 사람은 사람이니까요.


 08


 다행히도 검의 달인은 진짜배기 검의 달인이었기에

 소녀를 만류하거나 내면의 정화 어쩌구 하는 사이비 같은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의 수강신청서에 지장을 꾹 찍으며 달인은 

 "뭐, 부모의 원수 비스무리 한건가 보지?" 하고 물었습니다. 참 써먹기 좋은 구실이다 싶어 소녀는 "뭐, 비슷해요." 하고 긍정 했습니다.


 09


 고을 외곽의 공터에서 머무른다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검의 달인은 노숙자였습니다. 단어 선택이 잘못 됐을까요? 


 하지만 요즘 세상에 검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수강료를 벌지 못했기에 달인의 거의 반 노숙자와 다름없었습니다.

 양반이라는 체면 탓에 걸식도 못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노숙자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습니다.


 공터 한가운데에 초라하게 세워진 달인의 천막을 구경하게 된 소녀는. 살림의 빈곤함에 순수하게 경악했습니다. 


 아무래도 사부로 모시려는 작자가 노숙자인 것도 영 맘이 편치 않았기에 소녀는 달인에게 "일단 내 집에서 살아요." 라고 하고는 짐을 옮기는 걸 도왔습니다. 


 워낙에 빈곤한 살림이었기에 두 번만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 이사는 끝났습니다.


 손님방 중 하나를 내주며 똥간과 부엌의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밥을 안치고 고기를 볶았습니다.


 실로 오랜만의 이밥이로고. 하고 기뻐하는 달인을 보며 소녀는 달인을. 이를테면, 가정교사 같은 걸로 취급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0


 "장난하는 거지?" 


 하고 달인이 헛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장난하는 게 아닌데요." 하고 살짝 시무룩해했습니다.

 예리한 낫을 만지작거리며 소녀가 '날만 달려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짓자 달인은 드디어 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련장으로 쓰기로 한 널찍한 마당에서 달인이 노발대발했습니다.


 "검이 있어야 검술을 배우지 않겠나!" 


 처음은 당연히 목검 같은 걸로 훈련을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데 달인이 '우리 문파는 검의 예리함을 가르치기 위해 늘 진검으로 연습한다.' 라고 말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돼 있던 소녀로서는 다행히도 소녀의 집에는 진검이 없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진검을 늘 상비하고 있는 집이 있을 리가 있나요. 식칼을 가져오자 고개를 휘휘 젓기에. 은장도도 하나 없던 소녀는, 그래서 아버지가 절대로 만지면 안된다! 하고 주의를 주었던 하인들이 쓰던 날이 새파란 낫을 두 자루 들고 왔습니다. 잠시 달인의 눈을 피해 땅을 내려다보다. 소녀는 '진짜 귀찮게 구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달인은 소녀를 이끌고 장터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장터 어느 곳에도 검을 파는 곳이 없어 

 "내가 처음 검을 배울 때만해도 이러진 않았거늘..." 하고 달인은 좌절했습니다.

사실, 대장간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그래서 달인이 직접 검을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일단 낫으로 검술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11


 마당에서 밤새 무언 갈 뚝딱뚝딱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두개의 낫에 무언가가 달려있었습니다. 


 "코등이."


 달인이 피곤한 듯 시무룩하게 말했습니다.


 “자 따라해 봐. 코등이.”


 소녀가 예쁘게 하품을 하며 따라했습니다.


 “코등이.”


 달인이 피곤이 묻어 있는 눈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래, 잘했다. 이 손잡이 윗부분에 달은 이 부분을 코등이라고 한다. 검과 검을 맞대고 싸울 때 손을 베이지 않게 보호해주는 물건이지.” 


 달인이 잠시 생각을 하다 물었습니다.


 “그런데 베고 싶은 상대도 칼을 쓰나?”


 소녀도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요.”


 잠시 실례. 하고 달인은 다가와. 소녀의 팔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온 터라 소녀로서는 반응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녀가 살짝 혐오하는 표정을 지은 것은. 달인이 팔을 본격적으로 주물럭거리기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달인의 면상이 태생적으로 음흉했기에 소녀가 성추행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야! 잠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어허, 씁! 사부님한테 그런 표정 짓는 거 아니야! 전화기는 갑자기 왜 찾아! 잠깐만... 잠깐..! 진정해! 설명하게 해주세요. 제발 설명하게 해주세요!” 


 무릎을 꿇은 달인에게, 소녀가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치켜들자. 달인은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 살짝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습니다. 소녀는 속으로 ‘이 남자 무릎이 굉장히 싸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근육이 붙은 정도를 확인해보려고 한 거야.”


 “혹시 몰라서 말하는 건데. 이거 원래 다들 하는 거야. 원래 입문 전에 근육이 붙은 상태를 확인하고 수련을 어떤 식으로 할지 결정하는 거라고. 북양에서도 유행하는 과학적 훈련방식이라니까?”


 소녀는 북양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적어도 성추행이 목적인 것 같진 않았습니다.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던 소녀는 달인을 용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요?”


 “어... 예?”


 소녀는 한숨을 파 쉬며 말했습니다.


 “제 근육이 붙은 상태가 어땠냐구요.”


 달인이 잠시 머뭇거리다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예쁘게 붙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녀는 잠시 진짜 포도청에 신고해야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12.


 소란이 가라앉고 달인과 소녀가 정좌해 앉았습니다. 

 검과 낫을 사이에 둔 채였습니다. 달인이 자신의 검을 집어 들며 말했습니다.

 스르릉. 하고 칼집에서 꺼낸 양날이 시퍼랬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소녀는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소녀는 몰랐지만 북양에서는 이런 검을 클레이모어라고 불렀습니다. 


 “이 검의 이름은 호조(虎爪)라고 한다. 범의 발톱이라는 뜻이지. 봐봐. 날이 양쪽으로 나있지? 우리 유파의 궁극적 목표는 어디에서라도 벨 수 있는 만능의 검. 신법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검이지. 네 것도 우선 양쪽으로 날을 갈아뒀다.”


 소녀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물었습니다.


 “제건 낫인 데도요?”


 “......일단 날은 붙어 있으니까. 절대로 내가 검을 만들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야!” 


 소녀는 달인을 빤히 쳐다보다. 분명 귀찮아서 이러는 것이리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멋쩍은지 달인이 크흠! 하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찾아보니까 고대 유파긴 하지만 우리 유파에 장병검(날붙이를 이용해 전장에서 간단히 만들어 쓰는 무기.)을 다루는 기술이 있긴 하더군. 평소에도 그 검... 아니 낫을 몸에 붙이고 다니며 무게를 몸에 익히도록.”


 소녀는 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 이제 제일 중요한 순간이다. 네 낫의 이름을 정해라.”


 소녀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낫의 이름이요?”


 “그래, 낫의 이름. 우리 유파의 전통이다. 이름이 있어야 자주 부르면서 정을 붙일 수 있는 법이거든.”


 소녀는 속으로 참으로 이상한 전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맘으로는 살짝 기뻐하며 속으로 정해놨던 이름을 읊조렸습니다.


 “...손목 긋기.”


 “‘손목 긋기‘ 라고 할래요.”


 소녀는 낫을 끌어안으며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달인은 소녀도 웃을 수 있었구나. 하고 살짝 설레했습니다. 아, 부디 남자 앞에선 함부로 웃지 마세요. 사람이 웃는 모습에 반하면 답이 없답니다.


 13.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달인의 판단에 의하면. 근육이 예쁘게 붙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상대방과 칼을 맞댔을 때 백이면 백. 상대방의 힘에 밀려 역으로 베일 것이라고 하여 아침에는 근육을 키우는 훈련을 하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침엔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를 위주로 근육을 붙이는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검술, 아니 낫술을 배우기로 하였습니다.


 달인이 계획표를 짠 것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자. 소녀는 그래도 이 남자가 나름 제대로 된 양반이구나. 하고 속으로 조금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달인이 근육을 붙이기 위해. 당분간은 고기위주로 식사를 하기로 하자고 하여 알겠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어차피 벨 상대가 자기 자신이었기에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자기를 벨 생각이니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하면 더 이상 검을 가르쳐 줄 것 같지 않아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아침 훈련이 끝나고 우물가에서 달인은 닭을 잡고 소녀는 목을 축이며 달인이 해주는 검술 이론을 들었습니다.


 "역수(逆手)를 물로 보는 놈들이 꼭 역수에 당해 죽지. 인조 때의 나주 정가 정명현과 김해 김가 김호중이 역수를 물로 보는 대표적인 무인이었지. 당대에 비교할 짝이 없는 강대한 무인들이었지만. 둘 다 역수에 당해 죽었어. 이괄의 난 때. 항왜들에 의해서 말이지. 항왜들은 상대방을 죽일 수만 있다면 칼집으로라도 때려죽이는 놈들이었으니까. 당연히 역수에도 능숙했지. 가장 빨리 벨 수 있는 자세가 역수면 당연히 역수로 베어야 하는 것이야."


 훌륭한 학생답게 소녀가 예리하게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역수는 힘이 덜 들어가지 않나요?”


 달인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검과 발만 예리하게 갈아두면 역수라도 정으로 잡은 느린 검보다 강한 법이다.”


 “물론 검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바로 잡는 게 좋겠지만 말이야.” 


“아직 너는 그런 판단이 잘 안 설 테니까. 급하면 역수보다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검을 바로 잡도록 하자.”


 소녀가 곁에 있던 낫을 집어 들며 “흐음.” 하고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낫을 역수를 쥔다 해도...”


 “아니,.. 뭐... 그러게...” 


 소녀의 지적에 바로 꼬리를 내리는 달인을 보고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정으로 드러난 걸까요. 그런 소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달인은 헛기침을 하며 몇 가지 말을 덧붙였습니다.


 “크흠, 뭐. 그래도 배워서 나쁠 건 없으니까...”


 달인의 눈이 흉흉하게 변했습니다.

 “그 낫을 어떻게 쥐어야 어디를 어떻게 벨 수 있을지. 어떻게 검을 받아서 흘릴 수 있는지. 혹은 엮을 수 있는지. 그런 걸 잘 알아두도록!”


 그리고 문답무용으로 칼을 날렸습니다. 

아마 달인을 한심하다 생각한 게 들킨 탓이겠지요. 겨드랑이에 끼어놨던 낫으로 이를 악물고 검을 막으며 소녀는 이 남자 정말로 졸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4


 다른 유파도 비슷하겠지만 달인이 속한 유파의 검술도 동물의 모습을 본떠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달인은 소녀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많이 다녔습니다. 멧돼지가 곰을 공격할 때 어떻게 방어를 풀고 들이받는지. 개호주가 들개를 사냥할 때 어떤 자세로 대기하는지. 산양이 절벽에서 떨어지듯 내려올 때 어떻게 발을 디디는지. 모든 것을 견식하고 연습해보게 했습니다. 


 평소에 운동을 그다지 하지 않았던 소녀로선. 죽을 맛이었습니다. 이렇게 동물을 잘 찾아다니는데 왜 포수 일을 하지 않고 빌어먹고 사는지 의문이었습니다. 


 15


 소녀는 사냥꾼을 불러 달인에게 덫치는 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이후로는 둘의 밥상에 간간이 토끼고기나 노루고기가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16


 두 사람이 살고 있기에 두 사람 분량의 식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다지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던 소녀는 여지껏 텃밭과 닭장에서 나물과 닭알만 가져오면 됐기에 장을 볼 필요가 없었지만 딸린 입이 하나 늘며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소녀만 장을 나갔지만. 


 기둥서방 주제에 일도 안하는 게 영 멋쩍었는지 나중에는 짐꾼을 자처하며 따라나섰습니다. 미묘한 거리에서 짐을 나르는 달인과 미묘한 거리에서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 물어보는 소녀. 


 마을 사람들은 둘을 보고 소녀가 괜찮은 짐꾼을 얻었다고 봐야할지. 공처가를 얻었다고 봐야할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만 뭐가 됐던 일단 정분은 난 것 같다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17.


 반년이 지났습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강도 높은 훈련에 소녀의 낫질, 아니 검술은 날이 갈수록 늘었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눈가의 그림자도 점점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소녀는 여전히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습니다. 


 달인의 말에 의하면. 흐름을 탄 검의 궤적을 읽을 줄 알았기에 소녀의 재능은 매우 뛰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1년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한 재능이라고 했던가요. 그걸 들은 소녀가 검을 피하며 


 “변변찮네요.” 라고 말하자. 달인은 소녀를 구석으로 몰아세우며 


 “변변찮긴 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웬만큼 검을 배웠으면 다들 할 줄 아는 거니까.” 


 마침내 구석에 몰린 소녀의 어깨에 달인의 검이 사선으로 들어왔습니다. 소녀는 낫으로 달인의 검을 타고 들어가 좌측 겨드랑이를 노려 베는 시늉을 하며 그걸로 오전의 수련은 끝이 났습니다. 달인은 괜찮은 선택이었다며 소녀를 칭찬했습니다. 어깨를 두드릴 때 소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달인은 눈치가 없는 남자라 그런 건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만날 북양, 북양 거리더니 손버릇도 북양식인가 봅니다. 


 그렇게 점심밥을 든든히 먹고 나서. 

 

 오랜만에 달인과 소녀가 마주보고 정좌했습니다. 

소녀는 살짝 긴장했습니다. 이제 너도 배울 건 다 배웠다! 첫 번째 시련이다! 뭐다! 하며 원수 유파의 조무래기를 처리하라고 말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요. 


 차를 후르릅 마시고 달인이 물었습니다.


 “네 원수, 지금 어디 있는지 아냐?”


 소녀가 다과를 집어먹으며 자연스럽게 답했습니다.


 “대충은요.”


 달인이 찌뿌듯한 듯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습니다.


 “예상은 했겠지만, 내가 가르쳐 줄만 한건 다 가르쳐줬다.”


 “벌써?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검술이라는 게 원래 그래. 기본을 배우고 나면 그 다음엔 오직 수행과 실전뿐이지,”


 “그리고, 네 재능 덕분에 너는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선 굉장히 빠른 검사에 속한다.”


 “원한다면 하산해라. 아니 이 경우엔 내가 나가야하나? 그리고... 사이비 같은 소리지만. 웬만하면 네 원수를 잊도록 해. 그게 네 사부의 마지막 조언이다.”


 그러곤 느긋하게 다과를 집어먹었습니다.


 소녀는 멍하게 달인을 쳐다봤습니다.


 18.


 소녀는 내 원수는 사실 나에요. 라고 대답하려다 다른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럼, 떠나는 거예요?”


달인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르칠 건 다 가르쳤고. 원래부터 오래 있을 예정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흠...” 


 달인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습니다.


 “아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어. 아무튼 내일 떠나게 될 것 같다. 그동안 고생했다.” 


 소녀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조금은 데퉁스럽게 말했습니다.


 “자세 교정이나. 뭐……. 그런 것도 있잖아요. 전 아직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소녀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찰나 동안. 수십 번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그러니까, 좀만 더 같이 살면 안돼요?’ 라고 말하려 할 때. 


“거기 김진사댁 따님 계신가?” 하고 누군가 문밖에서 외쳤습니다. 


 소녀는 잠시 입을 앙 다물고 문을 바라보다 “나가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왜인지 달인에게 빨리 방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을 하고는 객을 맞았습니다.


 19.


 방에 들어간 달인은 그런 적은 없었지만 왜인지 불륜을 해서 장롱에 숨어 있는 남편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멋쩍어하며 소반을 든 채 서있자. 


 소녀가 문을 열자 의원이 뒤에 보따리를 잔뜩 이고는 서있었습니다. 아버지 친구에게 인사도 않고 소녀는 궁금한 것 먼저 물었습니다.


 “약방은 어쩌시구요?”


 "위중한 환자가 일 년 째 안오는데 어쩌누? 환자가 안오면 의원이 와야겠지."


 "...지금은 안돼요. 내일 제가 의원으로 가면 안될까요?"


 의원이 소녀의 어깨너머로 까치발을 들며 물었습니다.


"집에 누가 계시나?"


 소녀도 덩달아 까치발을 들며 황급히 말했습니다.


 "아, 아니요! 아무도 어..없는데요?"


 흐음. 하고 턱을 매만지며 소녀를 보던 의원이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으음... 일단 알겠네. 그럼 내일은 꼭 와야하네? 아무리 일이 바빴다곤 하지만 그래도 친구 딸내미를 너무 오래 방치한 것 같아 미안허이. 철진이한테 면목이 없구만." 


 "제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구요..."


 "돌잡이 하는 걸 본 사람 눈엔 언제까지고 어린 아이로 보이는 법이야.“


 의원이 다시 소녀의 머리를 꾹꾹 눌러주며 말했습니다.


 “늘상 말하는 것이지만. 자신을 구하는 것은 늘 자기 밖에 없는 것이야."


 그리곤 뒤로 돌아 다시 왔던 길을 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돌아가려는 것이겠지요.


 그런 의원의 모습에 소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자 갑자기 의원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습니다. 


 "아, 이 말을 깜빡했구먼," 


 "그리고 집에 계신 도령은 들으시게! 여기 계신 부인 좀 신경써주시게나! 자기 마노라는 잘 돌봐드려야 무릇 사내대장부지 않겠는가!" 


 그리곤 하하하 하고 통쾌하게 웃으며 부리나케 달아났습니다. 소녀가 아저씨! 하고 심통을 냈지만 졸지에 지아비가 되어버린 달인은 곤란해하며 머쓱하게 헛기침만 할 뿐이었습니다.


 20.


 마루에 선 달인과 마당에 선 소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아저씨가 하신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짓궃은 농이 심하신 분이에요." 


 "염두에 두지 않으니 괜찮아. 그래서?"


 “?”


 “자세 교정 같은 건 이제 혼자서 할 수 있잖아.”


 “아...”


 “...”


 “...사람 정 없게! 내일 아침은 먹고 가라구요.”


 “실없기는.”


 달인이 피식 웃었습니다.


 21.


 그 이후로 둘은 평범하게 오후를 보냈습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오고 

달인이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고 소녀가 웃거나 썰렁하다 매도하고. 옛날이바구를 듣고. 텃밭에서 호박잎을 따오고. 닭장에서 닭알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둘 다 어딘가 조금 멍한 듯했습니다.


 저녁을 먹었습니다. 간만에 닭을 잡았습니다. 소녀는 다리살을 좋아했고 달인은 퍽퍽한 살을 좋아해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노나 먹었습니다. 상을 물리고 달인은 실로 오랜만에 곰방대를 물었습니다. 


 22.


달이 깊어져 새벽이 된 시간에. 

소녀는 손목긋기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시원하면서도 완고한 듯한 바람이 몽롱한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었습니다. 이젠 떼가 꽤 자란 부모님의 묘소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저곳에 자란 잡초들을 손으로 뽑으며 소녀는 아빠의 흰머리를 뽑아줄 때의 일을 떠올렸습니다. 보고라고 해야 할까요. 무덤을 정리하며 소녀는 중얼거렸습니다.


 “검을 쥐는 법을 배웠어요.”


 “검의 달인이라는 사람한테 배웠는데. 이름이 달인인가 봐요. 웃기죠?” 


 "나주 정가의 정명현이라는 사람은 키가 칠척에 부인도 일곱명이나 됐데요. 그리고 김해 김가의 김호중은 고양이를 좋아해서 장원에 고양이를 위한 전각을 지었는데..." 달인이 말해준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설명하며 소녀는 잠깐 키득거리기도 하고 우울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며 소녀는 왜인지 부모가 다시 살아난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처음에 달인이 알려줬던 이야기부터 꺼내놓던 그녀는 하나 둘 이야기를 늘어가다. 어느새 자신의 근황까지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기름대신 물을 발라 닦았다가 낫에 녹이 슬어 달인에게 혼났던 일.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일. 미안했던 일. 아저씨가 와서 진료를 봐준 일. 여우 새끼가 애교를 피우자 달인이 굉장히 좋아하던 일. 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온다는 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책임지라는 일. 그래도 보고 싶다는 일. 


 그래서 소녀가 말을 멈췄을 때. 깊은 허무감이 소녀를 덮쳤습니다. 이제 장난은 끝이라고. 모든 걸 끝낼 시간이라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 이제 쉬자.’ 하고.


 살짝 후련한 얼굴로 소녀는 손목 긋기를 쥐고는 손목을 향해 내리쳤습니다.


 23.


 그때 어디서 나타난지 모를 달인의 손이 소녀의 손목을 강하게 그러쥐었습니다. 


 놀란 소녀의 예쁜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습니다.


 무어라 말해야할까. 고민하던 달인은 이내 입을 굳게 다물고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역정이나 울음부터 나올 것 같았습니다. 


 소녀가 입을 열었습니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도 아니고 미안해요도 아니었습니다.


 “죽고 싶어요. 모든 것이. 제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달인의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저를 죽여주세요.”


 24.


 잠시 화난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달인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제자를 베지 않는다.


 소녀가 훌쩍이며 말했습니다.


 겁쟁이.


 그래서 달인은 타이르듯이 말했습니다.


 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소녀가 조금은 진정된 듯 말했습니다.


 겁쟁이.


 달인이 곤란해 하며 말을 더듬었습니다.


 사, 사람을 베지 않는 것이 우리 유파의...


 겁쟁이 최고의 살수라면서요.


 …….


 사실 사람을 베어본 적이 없는 거죠?


 그럴줄 알았습니다.


 달인은 시무룩해하며 말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베어본 적이 없어서 무섭습니다.


 갑자기 웬 존칭이래.


 소녀가 울다가 피식 웃었습니다.


 25.


 앉기 좋은 둔덕에 나란히 앉아 달인은 소녀를 달랬습니다. 원래 좀 울고 나면 이야기를 듣는 게 수월하듯. 달인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조곤조곤했습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던가.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같은. 그 시대상으로는 꽤나 획기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둥실거렸지만. 입으로는 일단 집에 가서 잠을 자보자 자고 나면 의외로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와 내가 잘못한 게 있었냐. 미안하다. 같은 근시안적이고 위로가 안 되는 말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용과 별개로 조곤조곤한 말소리는 마음에 들어서 소녀는 가만 내버려두었습니다. 달인의 허둥지둥이 어깨까지 차오를 즈음에. 


 소녀는 자신이 손목을 벨 용기가 없어서 검의 달인을 찾았다 것을 고백했습니다. 


 솔직히 이 말까지 들으면 달인이 배신감을 느끼고 떨어져나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달인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뿐. 역정을 내진 않았습니다.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달인도 반년 간 나름 즐겁게 살았으니까요. 대신 달인은 조심스레 소녀의 이야기를 해 달라 했습니다. 


 26.


 소녀에게 모든 기억은 비수였습니다. 기억은 자꾸만 소녀를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급우에게 했던 사소한 말과 행동. 무의식적으로 했던 말들이 소녀에게 사죄를 요구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고 있기 일쑤였고. 이따금은 죽어라. 죽어버려라. 하고 급우는 한 적도 없는 말이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빈도수가 적었지만 날이 지날수록 늘어나기 시작해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는 자퇴했고 친구는 책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행동도 악의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꽤나 끔찍한 일이랍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싫어집니다. 


 미친년 소리 듣기 딱 좋은 고민이었고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게 된 결과 소녀는 공허해졌습니다. 부모가 이 같은 사실을 늦게나마 짐작하여 몰래 몰래 의원을 다니게 했지만. 약을 먹어도 그것은 호전이 아니라 악화가 더뎌진 것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습니다. 


 달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럼 나랑 지낼 때도 내가 의심스러웠느냐."


 고 묻자. 소녀는 


 "친구도 뭣도 없는 노숙자가 제 호박씨를 깔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하고 논리적으로 상처를 줬습니다.


 이젠 달인이 자살하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27.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그럼 애착을 줄만한 걸 만드는건 어떻냐고 묻자 소녀는


“하지만 저는 사랑하는 게 없어요.” 라고 시무룩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또 한참을 곤란해 하던 달인은.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는


 짐짓 당연하다는 듯. “그럼... 나를 위해 살아.” 라고 말했습니다. 얼굴이 새빨갰다는 건 지적하지 않아도 달인도 알았습니다. 소녀가 어이없어했습니다. “여전히 겁이 많아요. 고백할 땐 당신을 좋아합니다. 혼인해주십시오. 라고 하는 거예요.” 


달인이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많이 청혼 받아 봤나봐?”


소녀도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책에서 많이 봤어요.”


그래서 달인은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혼인해주십시오.”


소녀는 잠시 눈을 위로 했다가 아래로 깔았다가 

얼굴을 붉히고 팔짱을 끼고 왼쪽 발로 바닥을 탁탁탁탁 쳤다가 한번 흐음ㅡ 하고 말했습니다.


 “……좋아요.” 


 28.


 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나아질까요. 하고 시무룩하게 소녀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달인은 나랑 같이 있으면 즐겁지 않느냐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 뻔뻔함에 소녀는 경악했지만. 별달리 방법도 없을 것 같아 같이 산을 내려왔습니다. 


 소녀가 진짜 괜찮냐고 묻자. 


 달인은 진짜 진짜 괜찮다고 소녀가 묻지 않을 때까지 답해줬습니다. 


 그날 소녀는 해가 살짝 기울 때까지 푹 잤습니다.

 

 29.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본래 그런 것이니까요. 

고을 훈장님이 와서 주례를 서주고 아낙네들이 와서 잔치 음식을 차리는 것을 도와줬습니다. 의원은 아버지 역할을 맡아줬습니다. 젊은 남녀끼리 한 집에 살더니.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게 대다수의 의견이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선덕한 돼지비계와 어마어마한 양의 전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어마아머한 양의 국수가 준비되었습니다. 


 모두가 이 아름다운 소녀와 거지의 혼인을 축하해줬습니다. 누군가가 남편의 능력없음을 지적했지만. ‘어느 쪽이든 능력이 있음 됐지 뭘.‘ 하고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갔습니다. 

 

 30.


예쁘게 꾸민 신방에서. 

연지곤지를 진하게 바른 새신부가 불평했습니다.


“뭔 이야기가 이래요.”


“반전도 없고 위기도 없고. 개연성도 없고...”


“작가가 있으면 분명 겁쟁이에다 머리도 멍청할 거예요.”


 그러자 새신랑이 새신부의 손을 살며시 붙잡으며 웃었습니다. 


“괜찮잖아. 세상에 이런 이야기 하나쯤 있어도.”

 

 분명 죄는 아닐거야. 하고. 


 순간 어디서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초롱불이 훅. 꺼졌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죽여본 적 없는 살수와 정신병자 소녀는 혼인했습니다. 누군가 이야기가 너무 불안 불안하다고 지적했지만. 인생이란 건 원래 불안한 거니까요. 


 둘은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그들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때로는 불행한 듯. 행복한 듯.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후기. 자살소녀에서 벗어나. 


 열여덟 살 즈음부터. 연초가 퍽 스펙터클합니다. 절친한 친구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나. 다음 해에 또 한놈이 커밍아웃하질 않나. 제 주제에 여자친구를 사귀질 않나. 담배를 배우질 않나. 정신병에 걸리질 않나. 자살에 실패하질 않나……. 


 올해 초에도 어김없이 그런 악운이 찾아왔습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사람에게 배신당했습니다. 소설과 달리 세상은 제가 주인공이 아니라. 사이다 같은 전개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악당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로지 곤란한 오해와 경솔한 사람과 개새끼만 있을 뿐이겠지요. 오해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경솔한 사람과 개새끼도 여전합니다만. 다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일상으로 복귀했다는 흔해빠진 전개로 어찌저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쓴 자살소녀는 반쯤은 자전적이고 반쯤은 장래희망 같은 소설입니다. 자전적이라는 부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예, 맞습니다. 저는 사실 은발혼혈미소녀 여중생입니다. 여러분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실까 우려되어 숨기고 있었습니다만, 도내 최상위권으로 랭크될정도의 미모와 문무를 겸비한 차세대 엘리트입니다. 문장이 미숙한 이유도 전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 것이지요... 예? 이제 어느부분이 자전적인지 알 것 같다구요? 아무튼 자전적인 내용을 담아서인지 몰라도 이 소설은 반년을 붙들고 있었는데도 이 모양입니다. 양도 적고, 내용도 치졸합니다. 더 재밌는 시놉시스도 있고 쓰고 싶은 액션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소설에는 넣어지지가 않은 건지 넣고 싶지가 않았다고 해야 할지. 제 눈에도 미숙하다는 것이 보이는데도 도저히 수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내용도 쓰기가 매우 곤란했습니다. 원래는 꽤나 가볍고 동화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참... 첫 문장을 잊은 채 지금 삘에만 충실하면 이 꼴 나는 겁니다. 글 쓰시는 다른 분들도 늘 조심하시길.


 이런 소설을 올려놓고 말하기엔 염치없는 변명입니다만, 어떤 소설을 끼적이고 투고할 때마다 어린 자식을 외출시키는 마음으로 내보냅니다. 자기 새끼를 내복차림으로 내보내는 부모가 없듯이 저 또한 하나의 작품을 쓸 때마다 더 좋은 문장과 더 좋은 플롯을 입히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번 소설은 차라리 올리지 말고 USB 속에 보관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럼에도 경소설회랑에 올리는 이유는 경소설회랑을 우습게 여겨서가 아니라. 제가 이것마저 올리지 않으면 더 이상 소설을 투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실로 정신병자다운 이유입니다) 탓입니다. 물론 전 후기 쓰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인간이기에 후기를 쓰기 위해서라도 글을 쓰겠지만. 미신과 직감을 잘 믿는 정신병자에겐 이런 헛짓거리도 가끔은 필요한 법입니다. 


 해서 그런 알량한 사유로 자식을 팬티바람으로 밖에 내보냅니다. 언젠가 제가 고인물이 된다면 빤스바람은 물론이고 별에 별 해괴한 차림의 빠요엔들을 세상에 내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으로선 하루빨리 필력을 길러 이 친구를 다시 치장시켜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럼 은발혼혈미소녀중학생쟝 억수는 여기서 이만 인사 올리겠습니다. 

취향이 취향인지라 또 다시 중학생들이 잔뜩 나오는 소설들로 돌아올 것 같네요. 

 9월 전에 다시 후기에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ps. 원래 상하로 나누어 올리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나누어 올릴 분량은 아니라 통합해 올립니다. 까치우님 언제나처럼 좋은 댓글 감사했습니다만... 선생님이라는 단어에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소녀처럼 밤중에 이불을 걷어차며 꺄아악 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별 뜻 없이 쓰셨으리라 생각되지만... 괴로우니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comment (2)

까치우
까치우 19.07.16. 00:04

작가님 문장은 방법론 하나의 완성형 같다고 생각해서, 더 좋은 문장이라니 그런 게 되나 싶네요. 그런고로 이번 글은 문장이 달라진지라 얼떨떨합니다. 미원 한술 없이 담백한데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통속적 설렘은 변함없지만, 문장은 꼭 정형화되려는 듯이 보입니다.

몰까요. 글쓰기에 대해 어떤 조언이라도 들으신 걸까요.

이억수 작성자 까치우 19.07.20. 01:59
댓글 감사합니다! 문체 자체는 아직 아마추어인지라, 그냥 쓰고 싶은 방식이 있을 때마다 바뀌는 편입니다.
그리고... 방법론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지식백과를 찾아봤지만 역시나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플롯이 나아질 수 있는 것만큼이나 문장 또한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써보기도 하고 뭉뜽그려보기도 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사실 성과는 없고 그냥 시도만 해보고 있습니다 시도만...

문장이 딱딱하게 보이셨다면 그건 제가 생각없이 문장을 적은 탓일겁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읽으실 땐 그래도 좋은 이미지 하나 정도는 뇌리에 박아넣을 수 있도록 힘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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