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애프터글로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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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21 Jul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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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겨울밤이 자정을 넘으면서 이빨과 발톱을 남김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밴시가 떼로 짖어 대는 것처럼 북풍이 치달리고 부닥치며 비틀렸다. 작열탄 구덩이 곁에 옹송그리고 설상 키트까지 돌려도 사지 말단부터 차디차게 식는 감각이 끔찍스러웠다.


  각자 부러진 팔과 다리가 밤기운에 극성을 부려 열을 냈다. 이 열로 방한이 되면 좋으련만 얼음을 숯 삼아 낸 열기라도 되는지 더 고통스럽게 시리기만 했다. 메르세데스와 일리아나는 가급적 꼭 붙어 방한포를 칭칭 감았다. 작전 때면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한 명이 없다면 다른 쪽이 그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턱이 고장난 것처럼 덜그럭거렸다. 고장난 건 고작 턱주가리뿐이 아니라 몸 전체겠지만. 일리아나는 불쑥 내뱉었다.


  “메르, 혹시 책 안 갖고 왔어? 그, 엔셀라티카 뭐시기.”


  “책? 그런 보물을 어떻게, 죽을 지 살 지 모르는 데 들고 다녀?”


  핀잔주려는 셈이었겠으나 우들우들 떠느라 아무래도 얄밉게 들리질 않았다. 삭풍이 은신처를 정면으로 두들겼다. 끼이익, 끼이이익, 끼이이이익……. 꿈에서도 사무칠 것 같은 밴시의 포효 앞에, 상처 입은 계집애들은 한껏 우므리고 서로 껴안는 수밖에 없었다.


  큰 노스윈드는 덜덜거리는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입이라도 놀려야 안 얼어죽을 것 같아서 그래.”


  “우린 왜 여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보석 눈의 여신이 어쩌구, 여신의 주사위가 저쩌구 하는 줄 알아? 그게 다, 오랜 분들이 그런 말을 쓰셔서 그래.”


  요청대로 열을 버리며 입을 달그락거리기 시작했건만, 일리아나는 여전히 부루퉁했다. 책 이야긴지 되는 대로 지껄이는 말인지 구분할 길 없었으니까.


  “책 얘기 하라니깐……. 과학사라며? 과학사에 그 따위 이야기가 왜 나와?”


  “세렌디피티니까. 여신의 주사위니까. 우리한테 과학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오랜 분들의 유산 찌꺼기를 만년빙에서 파 내는 도굴꾼 노릇 말야. 그러다보면, 다른 기록을 얼마간 접하게 되기도 하지…….”


  얼어 갈라지는 목으로 마른기침을 몇 번 토한 뒤, 메르세데스는 연극투를 시도했다. 발작적인 오한으로 목소리가 떨려 형편없기가 잘디잔 외풍이나 다름없었지만.


  “여신이라는 전능자들의 적이란 어떤 족속이었는가? 전승에 따르면 이 세상 온갖 악의 정수였다 함이라. 그 마귀들의 사악함은 감히 신성을 훼손할 수 있었으니 보석 눈의 여신들께서 어찌 아니 슬프셨으랴? 천공에 성스러운 광창과 사악한 빛무리가 오고 가매 가엾은 인간들이 오고 갈 데 없더라…….”


  마지막 말 끝이 메아리마냥 얼음집 안에 낭랑했다. 북풍이 우짖는 소리에 곧 묻혀 사라져 버렸으나 이런 겨울의 끝자락에서 그런 이야기란 이상하리만치 와 닿았다. 괴물들. 겨울의 하수인들. 그들 앞에도 어마무시하게 놓인 것들.


  티딕티딕……. 작열탄 바스라지는 소리가 꼬리를 잡았다. 일리아나는 기침인지 웃음인지 모르게 쿨럭거리더니, 친구를 쿡쿡 찔러댔다.


  “그런 걸 다 외고 있단 말이야? 지독한 계집애.”


  “말했잖아. 책은 보물이니까, 귀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이런 크레바스 아래 처박아두긴 너무 비싸고, 또 너무 귀하다. 죽어가는 두 계집애들과는 달리.


  울적한 뇌까림이 절로 나왔다. 들으라고 한 소린지 저 혼자 중얼거린 건지 분간이 안 될 만큼, 가늘게. 서로 껴안고 있는 판에 들리지 않을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괴물들이 진짜 있었을까? 오랜 분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한텐 신이나 다름없잖아. 그런 양반들이 저렇게까지…….”


  “모르지. 진짜일 수도 있고, 은유일 수도 있고. 이런, 망해 버린 세상에도 설종 같은 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그 땐 진짜배기가 있었을지도.”


  “사람 못 살 세계였겠네.”


  “지금은 어디 살 만하고?”


  두 소녀는 웃었다. 사람 못 살 시대에 사는 계집애들이 다른 사람 못 살 시대를 신화랍시고 받아들이고 있으니! 


  한참을 시시덕거린 메르세데스가 이어 입을 열었다. 암흑 속에 작열탄 빛을 모로 받아 겨우 어두침침했다.


  “하늘사다리에 도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오랜 분들의 유산 중에 그보다 멀쩡한 게 없으니까.”


  “내 생각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뭐가?”


  “네가 하늘사다린지 나발인지에 가 보고 싶어하는 이유 말이야. 그건 누구 들으라고 하는 아무말이고, 진짜가 따로 있잖아.”


  일리아나는 으슬으슬 떨면서, 얼른 말을 이어붙였다.


  “진짜 미친년 같거든, 평소에 하는 말이 입바른 거짓말이란 게 보일 정도로.”


  “미, 미안…….”


  “미안할 건 또 뭐야, 엔셀라티카에 온전하게 정신줄 붙들고 살아 있는 연놈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다고. 그만큼 겉과 속이 다른 게 아닐까? 다들 그렇고 그런 거란 말이야.”


  이를 가지런히 드러내 보였다. 이끼로 누리끼리하고, 바짝 말라 악취가 진동했지만 여느 때보다 더, 뼈가 있었다.


  단짝끼리 딴은 숨길 건 숨긴다지만 사실은 그저 그러라며 눈감아 주는 걸지도 모른다……. 메르세데스는 꼭 여느 때 같은 미소로,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난 말야……. 인간이 원래 하늘의 종족이었다고 생각해. 그것뿐일까? 하늘 바깥까지 뻗어나가서, 저 우주를 헤집고 다녔을 거야. 거기 뭐가 있는진 오랜 분들이나 아시겠지. 결국엔 모든 게 잊히고, 얼어붙어서 남은 찌꺼기가 우리일 테고. 저 하늘사다리는, 베이스캠프 같은 게 분명해. 우리가 설산에서 8부 능선 언저리에 눈굴을 파듯 하늘이랑 우주 사이에 띄운 베이스캠프. 거기 가면 뭐, 알 수 있겠지. 잃어버린 역사든, 말도 안 되는 기술이든. 그런데 그건 그냥 곁가지야. 부작용. 난……. 그냥 보고 싶은 거야. 오랜 분들이랑, 같은 눈높이로, 저기 위에서.”


  “그게 뭐 어떤 느낌인 거야? 난 잘 모르겠는데.”


  한참을 달싹거리다가 도로 씹어삼키기를 반복하고서야 그럴듯한 설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메르세데스는 옴작옴작 검지를 세워, 눈집 천장을 가리켰다.


  “일리아나, 달을 보곤 하지?”


  “뭐, 레인저는 종종 본의 아니게 그러잖아.”


  “엔셀라티카가 그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천 배 정도 크고, 만 배 정도 밝긴 하겠지만.”


  지정사수에게는, 그보다 쉬운 설명도 없었으리라. 두 소녀는 서로 숨 속으로 파고들면서 온기를 나누었다. 생존본능이요, 우정이나 애정이기도 했다.


  외풍과 냉기도 언제까지고 피로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한계를 넘은 순간, 껴안은 채 기절하듯 잠들 밖에. 보이지도 않는 태양이 정오의 역을 넘고서야 진짜 밤이 찾아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기침 반 호흡 반, 시퍼런 숨을 몰아쉬면서 뜬 눈에 얼음을 받아 사방으로 날뛰는 볕이 어지러웠다. 발작적으로 몸부터 일으키려던 메르세데스는 자지러졌다. 무의식적으로 오른팔을 움직이려고 했던 것이다. 꼴사납게 벌벌 기면서, 팔이 두 배 세 배로 부어오른 게 방한복 때문에 차라리 안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앞에서 일리아나의 숨이 얕게나마 느껴졌다. 작지만 크게, 마음이 놓였다. 습관적으로 따귀를 갈겨 깨우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잠 같지도 않은 잠이나마 자두는 게 나을 터. 메르세데스는 버둥버둥 방한포에서 빠져나왔다. 온 몸이 얼음장이되 간밤만큼은 아니었다. 얼기설기 쌓아 막은 입구를 발로 차 뚫고는 슬금슬금 바깥으로 나갔다.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 눈 앞에 있었다. 아침 볕이 높다란 얼음 벽 사이에서 부스러지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빛깔로 천연덕스러웠던 것이다. 매서운 삭풍도, 짜증나는 눈발도 없이 그저 찬란했다. 어디에서 들어 본 적도 없는 풍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크레바스에 빠지면 겨울의 아가리에 머리를 처넣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 광경을 보고 살아나간 자가 드무니까.


  그 빛무리에 질세라 힘껏 웃었다. 보석 같은 눈이 마치 턱밑까지 도사리는 죽음을 잊은 것 같았다. 곁에는 밤새 타고도 여태 힘껏 이글거리는 작열탄 봉화가 있었다. 문득 온 몸이 시려 왔고, 그제서야 설상 키트를 두고 나왔다는 게 생각났다. 얼음집으로 다시 기어들어가지는 않았다. 오기가 들끓었다.


  메르세데스는 내팽개쳐 두었던 눈삽을 찾아 들었다. 이제는 눈더미에 아주 파뭍혀 버린 탄차 잔해에 다가가 들입다 삽을 내리쳤다. 깡! 왼손으로 힘을 쓰는 게 어줍었지만 가능한 모질게 재차 내질렀다. 깡! 하늘이 보이냐고, 겨울이란 놈도 저 불덩이 앞에서는 주춤거리지 않느냐고 생각하며 거듭 메어쳤다. 깡! 설종 새끼가 여기 같이 떨어졌다면 좋았을 걸, 이건 우리 하이브 몫! 우리 레인저들 몫! 우리 대장 몫! 일리아나 다리 몫! 내 오른팔 몫! 오른팔! 오른팔! 쇳덩어리 들뜨는 소리로 주변이 떠들썩했다. 얼굴이 시뻘겋고 땀이 흥건했다. 단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목구멍에 얽혀 자빠졌다. 곧 손아귀가 풀리고 말았다.


  그 때, 머리꼭대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북풍이 수선거리는 소리일지도, 겨울의 환청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설종들보다 제가 더 예민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의 오기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여신의 주사위가 제대로 구르든 기적이 찾아오든 한 걸까? 무어라고 꽥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이 굳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미친년처럼 열을 버려서 지금 이렇게 몸이 더운데도! 하필이면 지금!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메르세데스는 눈삽을 들고 배는 사납게 치들었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 공회당 꼭대기에서 경보종을 맡던 시절 그렇게 냅다 두들기고 싶던 신호를 양껏 쳤다. 여기가 안버스라면 온 하이브가 발칵 뒤집혔겠으나 그저 빙벽 틈바귀에서 이리저리 되튕길 뿐. 왼팔이 당장 뻥 터지든 뚝 끊어지든 할 것만 같았다. 도와줘, 도와줘, 누가 있으면 도와 달라고. 여기 밑에 있으니까. 도와 달란 말이야!


  무언가 휘릭 떨어져 내렸다. 빙벽 로프였다. 메르세데스는 그 순간 주저앉고 말았다. 사지가 풀리며 형편없는 꼴로. 탄차 외장에 뺨을 치대며 모로 꿇어앉은 그녀는 괴악한 박자로 숨을 몰았다. 열기와 부기와 냉기에 취해 몽롱했다. 말소리가 하나 둘 들리기 시작했다. ‘대장……. 밑……. 있습니다…….’ ‘미친……. 연기……. 거야…….’ ‘웬 불구덩이……. 아니……. 탄차…….’ ‘사람……. 죽은 사람…….’ 


  메르세데스는 대답이라도 하려는 심산으로 있는 힘껏 플라나리아처럼 꿈틀거렸다. 곧 사내 몇이 바닥에 도달했다. 공동지를 건너온 치들이니 레인저일 게 뻔했고 기실 그래 보였다. 연기에 비상 구조 신호라면 사람부터 찾는 게 우선일 터. 그건 어렵잖은 일이었고 곧 네 명의 레인저가 메르세데스 근처로 몰려들었다.


  “이그나츠 타격대장님! 이 사람 살아 있습니다!”


  “재수 좋은 놈일세그려……. 부란 덕에 죽을 뻔하고 부란 덕에 겨우 산 걸지도 모르겠다. 노턴! 먼저 올라가서 사람 끌어올릴 준비 해두라고 해.”


  “옙!”


  지시를 받은 레인저가 물러나자 딴은 조곤조곤하게, 이그나츠가 말했다.


  “여기 보십쇼, 저흰 알렉산더 레인저입니다. 임무에서 귀환하던 차에 연기가 나는 걸 보고 설상기동 했습니다만……. 여하튼 구조해 드리겠습니다. 어디 몸에 이상은?”


  “가, 감사합니다. 전 오른, 오른팔이……. 그리고 저기……. 친구가…….”


  오락가락하는 걸 보니 성한 데가 없어 보였다. 그는 부상부터 살피고자 했다. 그러던 중 방한 후드가 벗겨졌고, 기다란 머리칼에 앳된 낯짝을 보고는 기겁하며 손을 떼고 말았다.


  “뭐야, 계집애잖아?”


  “전! 계집애가! 아닙니다! 안버스 레인저, 메르세데스라고요!”


  어디에서 별안간, 그런 원기가 솟았을까? 메르세데스는 거칠게 부라리며 한 어절 한 어절 토악질하듯 사자후를 토해냈다. 어찌나 기세가 사나운지 얼른 보우건을 견착한 치가 있을 정도였다. 안버스 레인저, 메르세데스. 그 길로 혼절하고 말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작열탄 불꽃을 제하면 그만한 호소가 없을 거라고들 한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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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3)

까치우
까치우 19.07.30. 22:51
넉 달.. 넉 달만의 애프터글로우가 바로 이 시점에..!!!
까치우
까치우 19.07.30. 22:52
이 작가, 혹시 엄청 성격 나쁜 게 아닐까?
까치우
까치우 19.07.30. 22:53
정말 죽다 살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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