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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수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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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33 Sep 2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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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동생의 눈동자는 아인소프 제일봉 만년빙과 꼭 닮은 빛을 가졌다. 그 시간의 응결, 세월의 망울처럼 청아함이 참으로 피안에 닿아 있으니. 허나 그만큼, 그 투명함만큼 발 아래가 가벼울지니 과연 덧없고 속절없을 뿐이라. 아, 내 동생, 내 사랑. 네 아버지 모두의 선물을 타고남이란 이다지도 구슬프구나! 감히 만상을 꿰뚫는 예언자가, 가장 상서로운 찬티스트가 하간에 물레바퀴로 쓸려가리라는 불안이 나를 옥죈단다. 그저, 나는 그저 이 세상 덩그러니 남겨질 일이 두렵다. 아아, 내 동생, 알레파, 내 사랑. 언제고 널 지켜낼게. 누비구름이 성산 멧부리를 두르듯, 용바람이 그 능선을 굽이굽이 치달리듯…….



  꿈에서 깬 타브나는, 어디 구물거리는 기색 하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슴슴한 집에 소박한 침구, 여느 숲지기의 오막살이 같았다. 방계로 고귀한 열매 일족에 적을 둔 겨울눈 가문의 살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십여 년 전 멸문지화를 시켰던 분가의, 부스러기 말예 자매가 전승 전당에서 빛나니 본가 체면이 이만저만 아닐 터. 하물며 그 둘 중 아래쪽은 천 년 전승 역사에 유례없는 신인으로 온 권능과 영광을 품고 있지 않은가? 


  아인소프에서 전승지기가 품위 유지에 곤란을 겪는다면 혈족 전체의 불명예가 되겠지만 그마저 감내하며 가룰 만큼 자존심 문제라는 것이다.


  허나 전승지기든 숲지기든 다른 세피어르의 시선이야 어떻든, 이런 생활이란 썩 마음에 들었다. 물질이 다 무엇이고 위신이 다 무어란 말인가? 알량한 집안이나마 정답고 또 아버지를 높이는 성무까지 쌍쌍이 도맡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무서운 신통력을 지닌 알레파의 생각은 모를 일이나, 선지자건 선견자건 그녀에겐 그저 예쁜 동생에 불과했다. 동생은 언니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이 명제만큼은 네 아버지의 어떤 은총으로도 물리칠 수 없으리라.


  목욕물을 데우고는 다락으로 올라가 책과 두루마리를 치우고 이불을 걷어붙였다. 그 난장에서 우악스레 끌려 나온 알레파는 감히 볼멘소리 한 끗 하지 않았다. 구부정하니 걷는 와중 밤새 삐친 머리칼이 비질하듯 마루에 하느작거렸다. 찬티스트들은 두발 올올이 아버지 선물이 깃든다고 믿어, 천 하고도 스물 네 곡 찬트 곡조만큼 풍성하게 가꾼다. 검무의 기억을 더듬는 자신이 타 전승에 아랑곳할 수는 없으나, 아침마다 큰일은 큰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동생의 흑단 베일이 싫다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어느 쪽인가 하면, 좋은 쪽이겠지.


  주섬주섬 자리옷을 떼어 동생을 탕에 밀어넣었다. 눈을 꼭 감고 있음에도 엉거주춤하는 기색 하나 없이. 조심조심 받쳐 올린 머리가 선상으로 흐드러져, 적삼 목욕통이 반절은 까맣게 물이 들었다. 온수에 한 움큼 한 움큼 머리칼을 빗어 내렸다. 두피가 간지러운지, 그녀는 키드득거리기 시작했다.


  “언니, 간지러워.”


  “가만히 있어. 아침 글라디올러스 수련보다 이게 더 힘들다고. 노래나 불러 주련?”


  단호하고 묵묵하게 머리를 감기며 대답했다. 알레파는 그저 그렇게 내맡겨둔 채 아, 음, 아, 목청에 신성을 풀무질했다.


  “오늘은 뭘로 할까? <열매의 왕관>? <기둥의 지혜>? <뿌리의 자락>?”


  “벌써 알고 있는 주제에.”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주저없이 발성했다.



  먼 옛날, 이 모든 대지와 숲, 용이 날던 하늘이
  아버지의 빛처럼, 성대하고 생생하다 여긴 때가 있습니다.


  허나 이제는, 밤이든 낮이든 어디든,
  옛 것 온데간데없고 고귀한 모습일랑 흐리어져 갑니다.


  그렇게 잠들고 잊어 가나, 기억은 끊이지 않으니,
  우리 혼이 벌거벗은 망각에서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저 허물을 벗고, 원래 있던 너머로 돌아가
  천 년 지나 머나먼 고향인 소용돌이에서 다시 올 겁니다.


  사람은 짧고 기억은 길며 혼은 영원하니
  아름다운 시절이란, 위대한 형상이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불경스러운 노랫말임에도 가락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신성했다. 듣는 귀 지천인 여느 전승가에서는 어림없는 장난질이겠지. 타브나는 어디 흥얼거리는 기색 없이, 내내 세발하는 데 열심이었다. 어떤 선물도, 네 아버지 중 어느 누구의 것도 받잡지 못한 만큼 그래야만 했다. 어설프게 흉내 냈다가는 불협화음을 넘어 징벌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정화를 마친 알레파는 부득부득 언니를 욕조에 처넣으려 들었다. 못 이기는 척 교대하여 똑같은 모양새로 수발을 받았다. 솜씨가 썩 보잘것없었고, 중단발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이럴 때면 동생이 사람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이어지는 찬트를 들으며, 타브나는 삐뚜름하니 선잠에 빠졌다. 제 머리칼이 괴발개발 쥐어뜯기고 있음에도.


  쌍쌍이 짙은 창포 내음을 흘리며, 두 여인은 거실로 나왔다. 널따란 창에 수정판 없이 가리개만 달려 있어 조조부터 온 기린바람이 실내에 향긋했다. 넉넉하지 못함이 때로는 풍취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알레파는 창틀에 올라앉아 다리를 까닥거렸다.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양이 지르감고 있음에도, 분명 도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맞바람을 두고 한 아름이요 네 척은 되는 머리칼이 숫제 검은 너울이었다.


  타브나는 식사 준비로 분주했다. 고기 한 점 없지만 곡기가 부족하진 않았고, 달걀과 푸성귀는 양껏 낼 수 있었다. 허약한 동생을 위해 당귀차도 내렸다. 접시와 잔을 집어들 무렵, 알레파가 얼른 가리개를 드리우고는 종종 식탁에 와 앉았다. 남은 기운만으로도 얼마간 삼림 복판에서 식사하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알레파는 수저에 손을 얹으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참으로 추측이나 예상 따위가 아니었다.


  “오후엔 비가 와.”


  “그래? 지우산을 하나 챙겨야겠네.”


  “둘이 아니고?”


  늘 둘이 함께하는 일상을 생각해 보면 지우산 두 개란 아주 생뚱맞았다. 또 별다른 걸 보았는가 싶어, 타브나는 얼른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아니, 라메도 씨 만나는 데 내가 거치적거릴 순 없잖아.”


  “비 온다면서? 정혼자 나부랭이 목적이야 뻔한데, 궂은 날 네 간수나 잘 하라고 하겠지.”


  알레파는 왼눈을 살짝, 아주 살포시 떴다. 그새 다섯 색깔 안광이 샜다. 다소 뜻밖이라는 듯, 그녀는 슬그머니 갸울었다.


  “흐응……. 정말 따로 안 볼 생각이구나. 그래도 라메도 씨, 그런 세피어르는 아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얘가.”


  썩 묘한 미소가 뒤따랐지만 동생은 의향대로 그 이야기를 아주 그만두었다. 나름대로 모시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끝마치고, 알레파는 그릇을 뽀득뽀득 물로 훔쳤다. 그 사이 뒤에 선 타브나가 머리 단장을 시켜 주었다. 그저 늘어뜨리기에는 보통 머리가 아닐 터. 양 옆머리를 땋아 뒤통수에서 오각 박달나무 핀에 비녀로 고정한다. 오각형은 네 아버지와 사람을 상징하는 표징이니 찬티스트에게 그만한 장식이 없다. 뒷머리는 삼분지 일 즈음에서 가죽 고리로 죄고. 오색 돌조각이 가지를 친 머리끈을 얽어 결속한다. 거기에 다섯 빛깔 코사지를 모로 지르면 치장이 끝난다. 이 대거리 아닌 대거리에, 동생의 설거지가 어설퍼 천년만년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타브나는 제 작품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두 여인은 집 안 상석으로 가 깍듯이 문안을 드렸다. 비명에 가신 부친과 모친의 허물이 걸려 있었다. 투명하되 흐릿하고, 하늘거리되 뻣뻣하여 자연의 무엇과도 같지 않았다. 자매 각각 부모의 허물을 걸치자 살갗이, 껍질이, 의복이 되어 꼭 맞게 이어졌다. 기시감이나 단말마처럼 타브나는 부친의 기억을 일견 보았다. 그런, 한결 같은 아침이었다. 별다른 게 있다면 그녀 손에 들린 지우산뿐이었다.



  현관을 넘자, 수해였다.


  나무는 기억의 아버지의 상징이니, 당신 손수 창조하신 사람과 성역을 그 품으로 안으신 것이다. 기억은 유한하되 흐르고 이어지기도 한다. 용바람, 기린바람, 늑대바람, 수리바람, 거북바람. 그 앞에 봉오리는 떨고, 잎은 울며 가지는 흐느끼는 법……. 예삿것들은 올망졸망 씻기어, 갈잎과 낙지일랑 남아날 길 없이 풍뢰에 으츠러져 가리라. 그 분을 퇴비 삼아 설 나무는 서리니, 숲이란 과연 기억과 같은 것이다.


  오솔길에서는 기린바람이 어디 수그리는 법 없었다. 전승 전당까지 반 시진, 가도로 나가기 전엔 줄곧 이렇게 요란스럽겠지. 머리를, 허물 자락을, 등허리의 가검 두 자루를 간수하며 줄곧 걸었다. 사방에서 잔가지가 휘몰리며 체를 치는 양 볕이 듬성듬성 헛다리를 짚어 댔다. 그 광경 위로 숲은 어지러이, 사박사박 귓전에 갉작거렸다. 뾰죽한 귀가 만족스레 쫑긋거릴 밖에. 세피어르는 천성이 숲 사람이고, 두 자매 또한 예외가 아닌 만큼.


  전승 대로에 접어들자 바람이 감쪽같이 잦아들었다. 조각석으로 짜맞춘 가도를, 숲지기 몇이 쓰레질하며 오가고 있었다. 말쑥하게 맨살에 허물 차림인 둘을 보고 그네들 손이 멎었다. 아무려면 누추한 바깥길에서 전승지기들이 나타났으니 별일이겠지. 곧 우물쭈물 굽실거렸고, 타브나와 알레파는 맞절하며 지나쳐 갔다. 수런거림이 들려왔다. 알레파를 알아보고 예언자님, 작은 예언자님 하는 것이었다.


  공회 시간이 가까워 하나 둘 다른 전승지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브나는 불가시의 적의를 느꼈다. 겨울눈 가문 찌끼들, 전승 떨거지들, 아버지의 변덕 같은 년들……. 그저 힐끔 보는 데서도, 넌지시 늘어놓던 멸시와 질시가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면전에 대고, 예지를 사적으로 점유한다며 지우산을 빼앗아 동댕이칠 강단도 없는 소인배들 같으니라고. 


  가검 자루가 간질거렸다. 어느 편, 어느 쪽에도 비호해 줄 사람 하나 없는 타지니까. 자매의 타지, 가문의 타지, 양심의 타지니까. 전승 전당까지 사뭇 뻗어나간, 대로 전체가 그러하니까.


  그런 사실상의 적지에서 자매가 공회 전에 할 일이란, 움츠리는 것뿐이었다. 일족의 전당 좌석에서도 겨울눈 가문은 구석도 아주 구석 모퉁이 차지인 만큼. 알레파는 천연덕스럽게 구벅구벅 졸기 시작했다. 머리 치장이 무너지지 않게 뉘이고, 안대 삼아 손을 드리워 주었다. 요람가라도 속삭여줄 수 있다면, 선잠이나마 한결 달큼할 텐데. 내 동생, 내 사랑, 성산 용바람에 맞서 핀 에델바이스 같은 아이…….


  일족들이 어디 유령 보듯 하며 스치는 사이, 저 너머에서 사내 하나가 부득부득 건너와 고이 말을 붙였다.


  “타브나, 잠깐 괜찮을까요?”


  “말씀하세요, 라메도.”


  타브나는 턱 끝, 손 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무심하다기에는, 썩 정중하고 은근한 투였다.


  “알레파가 피곤한가 보네요. 급한 일은 아니니, 만과 후에 다시 뵐게요.”


  라메도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전당 반대편, 뿌리 일족 자리로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타브나는 냉큼 동생 볼살을 비틀었다. 그녀는 죽는소리를 했다.


  “언니, 아파, 아파, 아프다고…….”


  “네가 본 게 이게 맞아, 응? 일부러 꾸벅거린 게 아니냐는 말이야. 굳이 저 양반 내쫓으려고. 공회 끝나고 나서 날 보게 하려고.”


  알레파는 부루퉁하게 말대답을 했다.


  “성산 만년빙이 녹았는데, 거기에 벼락이 떨어졌건 누가 불을 놓았건 무슨 소용이고 또 상관이겠어?”


  “요 녀석 봐라? 사람 일이니 하는 말이잖아. 그렇게 무심하게…….”


  정색을 하려던 차, 동생이 양 눈을 슬며시 떠 제지했다. 이럴 때면 참 사람 같지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게 실감이 되었다.


  “물론 사람 일을 그렇게 보진 않지. 벼락이건 불질이건 목적 본위였다, 이 말이야. 다 사랑하는 언닐 위해서.”


  타브나는 드러내놓고 한숨을 쉬며, 뻘개진 뺨을 얼러 주었다. 여느 전승에서의 선지자들이란 따분한 철인 일색이나 알레파만큼은 유난하지 않은가? 딴은 장난이어서 적기에나 저를 곧추 내보일 셈인지, 더러는 진짜배기 은총일랑 인식의 범주 밖이어서, 뭇 세피어르에게는 그저 못된 장난으로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허나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도 투명하여 그런 망상증을 허하지 않았다. 예지란 낯짝 때깔 바꾸는 기술이 아닌 법. 그저, 본시 그런 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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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9.26. 00:19

제목을 보고 또 연중이냐고 울부짖다가, 도입부가 너무 꼬여있어 실망하다가, 낱말의 향연에 감탄하다가, 설국이 펼쳐진 이후로는 설정에 반해 정신줄을 놓고 읽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독서였읍니다

어휘 선택 대체.. 여가 시간에 사전이라도 펼쳐드시는 건지 궁금할 따름. 5년 전과 지금을 견주면 아득할 뿐인데 5년 후에는 얼마나 더 아득해질지 감도 잡히지 않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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