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판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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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57 Oct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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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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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오는날이었다. 비가온다고해서 딱히 달라질만한 것은 없었다.

여느때처럼 같은길을 조금 더 조심히 걸어갈 뿐이었다. 하필이면 새 신발을 신었을 때 오는 비였다.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걷다보니 횡단보도앞이었다.언제바뀔지 모르는 횡단보도 앞에서 휴대폰을 보고있는건 내 급한 성격에 맞지 않기때문에, 오랜만에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 휴대폰을 넣은지 얼마 되지않아 눈이 심심해져 이것저것 쳐다보고있는 나였다. 몇번 두리번거리자 우산을 쓰고다니는 사람 두명이보였다. 역시 사람구경이 제일 재밌다는 생각을 하며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선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중년 아저씨의 우산 밑에서 걸어가고있었다.

많이 봐왔기 때문에, 조금 먼 거리에서 옆모습만 보여도 누군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숨겨둔 일란성쌍둥이가 있는게 아니라면 그녀가맞았다.

근데 왜 하필 저런 도발적인 의상을 입고 , 누가봐도 기분 나쁠 정도로 어깨를 슬슬만져대는 아저씨의 옆에 있는걸까.

모르겠다. 교복은 또 언제 갈아입은거야.저 사람은 아버지겠지? 그런데 왜 저렇게 이상한 스킨쉽을 하는걸까.

이것저것 생각해봤지만 생각할수록 다가가면 안될 결론에 도달하고있었다. 그래도 애써 부정했다. 모든게 나 혼자 하는 망상일지도 모르니까. 우린 아직 중학생이니까.

아무래도 사람을 착각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머리를 만져보니 약간 열 기운이 있는거 같기도 했다.감기에 걸려서 판단력이 조금 흐려졌나 봐.아니면 내가 상황을 잘못 이해했거나. 내가 요즘의 오픈마인드 정서를 못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다.하지만 그 중 가장 강하게 느껴졌던 기분은 그냥 시간이 이 순간을 빨리 잊게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잊을 수 있었을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나는 장기기억에 자신이 없으니까 남들보단 빨리 잊을것이다.
공교롭게도 횡단보도 맞은편에있는 모텔로 둘이 들어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나는 서있는 그대로 사고가 정지했다.앞에 트럭이 물웅덩이를 밟는 것도 못볼만큼.
촤아악 소리를 내며 물보라가 내 전신에 튀었다. 그러자 물소리에 놀랐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모텔에 들어가려던 그녀가 뒤돌아봤다. 정면에서 보니 그녀가 더욱 확실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정면에서도 못알아본다면 바보가 아닐까.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해있다는걸 느꼈다. 그 생각에 닿은순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분명 잘못한건 그녀인데 왜 내가 도망쳐야하는거야.그래도 무언가 보아선 안될 것을 본 두려움이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목끝까지 차올랐을 때 쯤 나는 멈춰섰다.뒤돌아보니 얼마나 멀리뛰어왔는지 아까전과의 풍경과는 사뭇다른 건물들이 나를 반겼다.


그 날은 집에 평소보다 20분정도 늦게 도착했다.옷은 다젖었고. 새것인줄 알았던 신발은 하루만에 쉰내나는 유행지난 러닝화가 되었다.나는 오늘이 목요일이라는 사실에 절망해야했다.

그날밤은 잠을 못잤다.


다음날이 되었다. 학교에 가자마자 책상 위에 엎어졌다. 어제 잠을 못잔 것도 있지만, 그냥 아무 생각하기 싫어서도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론 제발 그녀가 어떤사정으로 오늘 학교를 안나왔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있었다.그런 기대를 하고있는걸 안건지, 그녀는 등교하자 마자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우리 반에서 존재감을 알렸다. 어제의 일은 아무 신경도 안쓰일만큼 일상적인 일인가?아니면 나를 제대로 못본건가. 나는 진심으로 후자이길 바랬다. 그 후엔 책상에 엎어져 잤다. 가끔 나를 뒤집어 보는 선생이 있었지만 내 충혈된 눈과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엎었다.
그리고 미술시간이왔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간이었지만 , 지금은 그것이 저주스러웠다. 그녀와 같은 분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다른 종류의 스케치를 하느라 마주 볼 일은 없었다는 정도였다. 무사히 스케치를 마치고 혹여나 마주치지 않게 빠르게 준비를 했다. 그러자 내 손목에 누군가가 붙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기 두려웠지만 용기를 내 들었다. 그녀였다. 심장이 쿵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왜 라고 답했다.하지만 애들나가고 잠시만 얘기하자는 소리를 듣자 온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나가자 그녀가 입을열었다.그녀는 단도직입적이었다.
"너 내가 원교하는거 봤지? 안알려줬으면 해. 딱히 알린다고 협박해도 너한테 콩고물 떨어지는 일은 없을거니까."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릴생각도 없고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을 뿐.
옳지 착하네하며 그녀가 내 머리를 슥슥 어루만졌다.기분이 좋지않았다. 불결하단 느낌이 들어서.그러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나 좋아했지?"
그건 또 어떻게 안거지. 내가 티를냈던가.
"반응 보니 맞는거 같네.뭐 너라면 알리지도 않을것 같고...그래서 말하는 건데, 너도 혹시 나랑 할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 반값에 해줄게. 짝사랑디스카운트?청소년 할인? 뭐 그런거야. 그럼 다음에봐."
그녀는 그렇게 떠나갔다.나는 홀로 미술실에 앉아있다가 다음 수업을 통째로 빼먹고 나서야 찾아온 애들에게 부축받아 조퇴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ATM기에서 현금을 조금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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