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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프대] 헌터보다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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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왕은 존재한다.

누구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국민의 대표보다 강한 권력,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왕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를 왕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그리고 이 나라의 왕은 바로 우리 할아버지다.

초열염제 왕현철.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 진홍의 수장.


“잘 들어라.”


새해 첫날.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가족들과 길드의 간부들이 모두 모인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할아버지가 천명했다.


“3년 뒤 이 시간. 나는 길드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한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은퇴 선언에 큰아버지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마 ‘여기서 3년이나 더 해먹겠다고?’하는 생각이겠지.

할아버지가 비록 세계에서 가장 강한 헌터 10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헌터라고는 하지만 벌써 연세가 일흔이 넘었다.


헌터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무협지처럼 반로환동이나 환골탈태 같은 편리한 경지가 있는 게 아니라서 노환을 이기는 헌터 같은 건 없다.

할아버지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정정해보여도 아마 몇 년 전부터 천천히, 지속적으로 기력이 쇠약해지고 계셨을 거다.


“아버지! 은퇴라뇨. 우리 진홍에는 아직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 꼬리가 씰룩거리는 우리 큰아버지 왕상혁.

기쁜 건 알겠지만 표정 관리를 좀 하셔야 하는 거 아닌지.


“쯧. 시끄럽다! 이건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번복은 없어!”


할아버지는 그런 큰아버지를 보며 혀를 차고는, 당신의 은퇴에 완전한 쐐기를 박았다.

할아버지의 은퇴 소식에 큰아버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길드의 간부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용히들 해! 늙은이가 이제 좀 쉬겠다는데 뭐가 그리 시끄럽나!”


간부들의 술렁임이 잦아들지 않자 할아버지가 중후한 마력이 담긴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위압감에 짓눌린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몇몇 기력이 약한 사람들은 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다급히 의료반이 달려와야 했다.


거 참.

할아버지의 기력이 쇠하고 계시다는 말, 전언 철회한다.

아직 할아버지는 매우 정정하시다.


“아버지. 그럼 후계자는……”

“쯧쯧. 마음만 급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얘기할 참이었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해진 저택.

그도 그럴 것이 진홍 길드라고 하면 세계에서도 드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굴지의 길드다.

지금 이 순간,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단 한 마디로 그야말로 왕좌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그 권좌에 앉을 차기 주인이 정해진다.


“우리 대 진홍 길드의 차기 길드장은, 내 손자들 중에서 고를 것이다.”

“아, 아버지!”

“아버님! 그게 무슨…… 아!”


길드장의 자리를 아들이 아닌, 손자들에게 주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큰아버지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고 큰어머니는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당연히 길드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거다.


“아버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나 하혁이가 아버지에게 섭섭하게 한 거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저희가 진홍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자격이 부족한 겁니까? 도대체 왜 저희를 건너뛰고 아직 어린 애들에게 이 무거운 자리를 넘겨주시려는 건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상혁 형님 말이 맞습니다. 아버지. 우리 정현이나 형님네 강현이, 도현이에게 진홍 길드의 길드장의 자리는 아직 과분합니다. 좀 더 수업을 받고……”

“떽! 시끄럽다!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게냐?”


할아버지가 큰아버지를 도와 설득하려는 아버지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아무리 자식이라고는 하나,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신하고 할아버지는 왕이다.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며, 그것이 설령 사회 통념과 맞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신하들은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진홍이란 이름을 가진 왕국의 절대적인 룰.


‘그리고 내 손에 들어올 왕의 힘이지.’


그래. 3년 뒤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저 왕의 자리는 내 차지가 될 것이다.

반드시.


“상혁. 하혁. 너희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저무는 해다. 너희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진홍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거라.”

“저흰 아직 쌩쌩합니다, 아버지!”

“조용히 해라. 나 귀 안 먹었다.”


할아버지의 뜻은 확고했다.

할아버지의 뜻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큰아버지는 낙심한 표정이었고, 애당초 후계자 자리를 넘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런 큰아버지를 위로할 뿐.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반대로 자신들에게 왕좌에 오를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촌 형들은 입이 귀까지 걸려 있다.

그리고 서로를 노려보며 경계한다.

아마 저 양반들은 나를 경쟁상대로도 생각하지 않을 거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지금까지 힘을 감춰왔던 거니까.

오히려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으면 내가 곤란하다.


“길드장님. 그래서 결국 후계자는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실 건지……”


길드 간부 중 큰아버지의 오른팔인 권수한이 물었다.

차기 길드장의 후보로 왕강현과 왕도현으로 좁혀진 지금, 둘 중 어느 라인을 타야할지는 그들 입장에서도 꽤나 중요한 일이다.

권수한의 질문에 긴장한 간부들의 이목이 할아버지에게로 쏠렸다.


“크흐흐. 당연히 능력 있는 녀석을 앉혀야 하지 않겠느냐? 다름 아닌 우리 대 진홍 길드의 수장 자리다. 모든 이가 납득하고 우러러볼 만한 녀석이 아니면 자격이 없지.”


나는 뒤이어 나올 할아버지의 말을 알고 있다.

집안과 길드의 그 어떤 지원도 받지 않고, 맨땅에서 길드를 만들어 3년 동안 가장 크게 키운 자가 왕좌를 손에 넣을 거라고 하시겠지.


“내 자리를 차지하려거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할 게야. 강현이 도현이, 그리고 정현아.”

“넷!”

“네. 할아버님.”

“예.”


자애로운 모습으로 사랑스러운 손주들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은 이내 초열염제라는 별호에 걸맞도록 날카롭게 변했다.


“너희는 오늘부로 짐을 싸서 집을 나가라.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집안과 길드에서는 너희에 대한 지원을 모두 끊는다. 신분증도 새로운 걸로 만들어줄 것이야.”

“네? 그게 무슨……”

“신분증을 새로 만들다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할아버님.”


말 그대로 진홍 길드의 수장 왕현철의 손자가 아닌, 아예 생판 남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소리다.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진홍 길드 수장의 힘이다.


“나, 그리고 너희 애비들과 함께 진홍 길드를 만들어 온 녀석들 중엔 너희보다 뛰어난 자들이 많다. 그런 그들 위에 서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능력을 그들에게 증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능력을 증명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기로 했다.”

“그게 저희를 호적에서 파는 것과 어떤 관계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라. 너희 스스로가 길드를 만들어 키워보도록 해라. 그렇게 3년 뒤 이 시간까지 길드를 가장 크게 키운 녀석에게 이 자리를 넘겨줄 게야.”

“할아버님. 지원을 모두 끊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말 그대로다. 너희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단 한 푼도 없다. 먹고 싸고 자는 것부터 너희들의 힘으로 해결하는 게야. 당연히 나나 진홍 길드에 대한 영향력은 그 무엇도 기대하지 말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쌓아 올리는 게지. 알겠느냐? 그리고 왕상혁. 왕하혁.”

“네, 아버지.”

“말씀하세요.”

“이 아이들의 모든 행동은 내 감시 하에 둘 터이니, 쓰잘데기 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명심하도록 해라.”

“……네.”

“물론입니다.”


이건 할아버지나 진홍 길드의 영향력이 닿는 모든 인맥이나 자원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

거기다 큰아버지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남몰래 도움을 주지 못하도록 쐐기도 박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사촌 형들을 나 몰라라 할 큰아버지는 아니지만.


“자, 할 말은 모두 했으니 모두 해산해. 말했지? 지금 이 시간부터다. 서무진. 내 사랑스러운 손주들에게 새로운 신분증을 전달해 줘라. 그리고 지금까지 사용하던 계좌는 모두 정지시키고.”

“예. 길드장님.”


그렇게 사촌형들과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진홍 길드를 키워온 간부인 서무진이라는 헌터로부터 새로운 신분증만 달랑 받고 저택에서 쫓겨났다.

진홍 길드의 수장이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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