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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프대] 저, 오늘 결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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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8 Jan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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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저실장
협업 참여 동의

 저, 오늘 결혼합니다.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의 결혼은 손해 보는 장사다. 내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이자 짐 덩이를 얹고 사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연애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결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사치다. 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나, 오늘 결혼한다.

 예식장의 분위기는 들떠있으며 시끌벅적하다. 직원들은 모두 하나같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며, 하객들은 저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그 와중에 대기실에 숨어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나를 위해 찾아오는 하객은 거의 없다. 친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부모님만이 밖에서 몇 없는 지인들을 맞이하고 있을 테니까.


 나라는 존재가 붕 떠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다른 세상의 일인 것 같다.


 그렇게 혼자서 죽을 쑤고 있을 때, 직원 하나가 큼직한 가방 하나를 들고서 찾아왔다. 식이 곧 진행될 예정이니, 화장을 고쳐주겠다는 소리였다.


 “부탁드릴게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 나는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또다시 낯설다.


 평생 입어볼 일이 없던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나.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한때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내 얼굴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정도로 어색한 표정이다. 기뻐야 하는 날인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오는 게 보인다.


 이러면 화장 번지는데.


 걱정할 새도 없이, 내 화장을 고쳐주던 여직원이 능숙하게 파우더를 펴 바르며 눈물 자국을 지운다. 이 여직원에게 있어서 신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익숙한 일인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스워졌다. 한 번뿐인 결혼식에서.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단 한 번뿐인 결혼식에서 울음이 터진 신부는 최악인 것 같은데, 이 여직원에게는 수많은 신부들 중 하나일 뿐이잖아. 이 사람은 내가 여기서 펑펑 울어도 ‘아,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네.’ 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화장이 끝났다.


 “입장 준비 하실 게요.”


 “네.”


 복잡한 마음은 구석에 숨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날인 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자. 어느 누가 봐도 행복한 신부로 보이게 미소를 짓자.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향하는 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


4개월 전.


 “좆 됐다.”


 눈을 뜨자마자 뱉은 한마디는 쌍욕이었다.


 숙취로 인한 두통과 갈증이 나를 괴롭혔지만,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내 몸에서 느껴지는 찝찝함에 그저 역겨움만 느껴졌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맛은, 필시 내가 잘 알던 어떤 액체의 맛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배꼽 아래에 말라붙은 의문의 자국과 다리사이의 불쾌한 끈적임은…….


 태양이 밝도록 퍼질러 자는 저 개새끼와 쓰레기통에 박힌 다 쓴 콘돔들을 보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온다.


.나, 따먹혔다. 남자한테.


 내 동정을, 아니. 내 처녀를 저 이름 모를 개새끼한테 헌납하고 말았다. 얼마나 아끼고 가꿔온 몸인데. 저런 새끼한테 쉽게 줘버릴 게 아니었단 말이다.


 괜스레 화가 나서 아직도 자고 있는 저 개새끼를 발로 뻥 차본다.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다.


 “형? 아, 이제 누나지. 아무튼 저 힘들어요, 이제.”


 뭐래 저 미친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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