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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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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09 Jun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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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겨울일랑 봄의 앞잡이다.


현실주의자로서는 썩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다. 특히 졸업학기가 물씬 다가오자 졸업논문이라는 괴수에게 연일 시달리고 있었던 내겐. 그걸 테레사는 마도학부의 수재께 그까짓 논문, 학위에 거쳐가는 관문이 아니냐며, 봄 앞에 겨울 있음이라며 약 올릴 구실 삼고 있으니 어찌 속이 안 터지랴. 인과 수순을 그리 제멋대로 할 수 있다면 삼라만상이 재귀하리라 반박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참말로 혀 끝에 오락가락했다.


이 년 여, 마도학자 구린내를 슬쩍 감추어 덜 놀림받는 재주가 는 셈이다.


자취방 앞, 도토리 화실 거리는 댓바람부터 을씨년스러웠다. 이곳 알베르카는 푸에르토 데 이엘로에서 불과 40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북녘……. 그런 혹한의 와중 양 손이 책이며 필사, 노트라 외투를 여밀 길 없었다. 비블리오테카 레이나까지 갈 길이 까마득했다. 굼뜨게 짐을 고쳐 드노라니 뒤에서 웬 팔이 쑥 솟구쳤다. 이런 날에도 저 코로나처럼 훤히 웃는 테레사는, 바깥에서 몰래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발갛게 들떠 있었다.


내민 손이 수평으로 홱 눕더니, 끄트머리가 까딱거렸다. 무슨 제스처인지 어린애라도 훤히 알겠지.


“짐, 내놔.”


“아니, 됐…….”


“내놓기나 해. 나랑 달리기 하면 지는 주제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테레사는 그저 신이 나서 계속 떠벌려 댔다.


“솔직히 좀 놀랐어. 아, 좋은 뜻으로. 나름대로 플랜을 좀 세우고 있었는데 그런 또라이 같은 일 벌일 줄은 몰랐거든. 그 마티아스 아드리안 아벨이.”


“플랜? 웬 플랜?”


“뭐, 청탁 같은 걸 할 것 같았거든. 메르세데스한테 다리를 좀 놔 달라는 둥…….”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봉인서고 출입 허가 정돈 어떻게 해 줬을 것 같은데? 내가 좀 짭짤하게 팔렸어야지.”


“팔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이상한 말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오늘, 테레사는 기분이 제법 좋은 것 같았다. 놀려먹을 게 있어 그런 걸지도 모르고.


“몰랐던 모양이네. 내가 이야기 안 했던가……. 십만세회로 동인 경연 우승한 해에 걔들이 날 갖고 내기를 좀 했거든. 나한테는 1만 오르덴 빵이라더니.”


“그 테레사 알마스도 명가 양반들 앞에선 허수아비네. 그럼 경연 우승 여부나 숨마 쿰 라우데 같은 걸로?”


“진심이야? 걔네가? 내 남자친구 맞추기, 몇 개월 갈 지 맞추기, 섹스는 언제 처음 할 지 등등, 시시껄렁하고 자극적인 것들이었어. 메르세데스가 전부 쓸어담았고. 내가 아는 걸로만 그런 내기로 다른 애들한테 천만 오르덴을 넘게 받아냈는데.”


테레사가 끗발 좋은 망나니들이랑 어울렸던 걸 모르진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둘이 만난 계기가 그렇고 그런 놀음판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우리한텐, 적어도 사람 일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주의가 있다. 술판에서 만났으면 어떻고, 썩 삐뚜름하게 만났으면 또 저떻냐는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쨌든 알아서 해결했으니 잘 된 거네.”


“응, 맞아.”


테레사는 밝디밝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부득부득 학내 중앙도서관까지 따라왔다. 그리고는 그 전주 아래서, 내 오른손 엄지부터 약지까지 차례차례 입을 맞추고는 밥벌이 도구 네 개에 여신의 축복 있으라며 시시덕거리고는 인문대학 방향으로 훌쩍 갔다. 나는 뒷모습이 저 멀리, 판테온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그저 보고만 서 있었다. 그리고는 가리늦게 도서관 정문을 열어붙였다.


비블리오테카 레이나에 가능한 조용히 들이닥쳐 잰걸음을 걸었다. 일반 열람실을 지나, 마도서고를 지나, 층계참을 올랐다. 4층 봉인서고는 다행스럽게도 한산했다. 창구 하나에 격리열람실 둘뿐인 곳이니 한산이란 대기자가 아주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이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필증을 내밀었다. ‘카예타노 캄피에레’ 여덟 자가 방사광 각인으로 불그레하게 반짝거리는.


서류가 슬금슬금 사라졌다. 나무늘보가 먹이를 집어 가는 것처럼.


“마티아스 아벨, 마도학부 4학년……. 보증인 카예타노 세바스티앙 캄피에레, 알레프 마소 연구소장. 거기 그렇게 써넣게. 날짜도. 이번이 세 번짼가?”


“네, 다섯 번 남았습니다.”


“오늘은 대기자가 없어서 묻네만, 자네 도대체 알레프 소장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인가? 몰골을 보아하니 명가 연줄이랑은 무관해 보이고…….”


“기관지에 쓰인 주소로 초록을 보냈습니다. 논문 완성에 비블리오테카 레이나 봉인서고 열람이 필요하니 꼭 허락해 주십사 하고.”


정적이 흘렀다. 학부 사람들에게 고해 바치다 몇 번 겪었던 일이라 달리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막간에 짐을 슬금슬금 내려놓으며 숨을 돌렸다.


“허허…….”


“뭐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왕실근위대 무서운 줄 모르는구먼. 그래, 봉인서 반출, 훼손 및 필사 금지, 여덟 시간의 열람 시간 제한. 알고 있겠지? 1번 격리열람실, 삼십 분 대기하게.”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여덟 시간이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고 말았다. 어렵사리 따낸 봉인서고 열람권은 총 여덟 회에 예순 네 시간뿐이니 초조할 밖에……. 나는 퇴실 시간이 다 되어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 허둥지둥 빌린 책과 내 자료 뭉치를 도로 나누어야 했다. 봉인서들이란 보존 술식과 보안 술식으로 이중 삼중 떡칠이 되어 있으니, 대강 마소 반응에 따라 분류하여 얼기설기 쌓아 두고 남은 노트만 그럭저럭 그러모아 나왔다. 


늙수그레한 관리인은 그 종이쪼가리들을 부득부득 빼앗아 죄 꼼꼼하게 검토했다. 덕분에 서고 밖으로는 일곱 시가 훌쩍 넘어서야 놓여날 수 있었다. 추위는 극성이요, 칼바람은 기승이니 올 때보다 살벌하게 떨며 갈 밖에. 고학생이나 환쟁이만 득시글거리는 이 거리는 출타할 아침나절보다 한결 을씨년스러웠다. 졸업만 하면 얼른 떠나리라고, 테레사랑 약속한 대로 왕도에 일자리를 얻어 훌쩍 떠나 버리리라고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온종일 식어 빠진 자취방이란 으스스하기 짝이 없었다. 얼른 난로를 켜고 그 위에 먹다 남은 소파 데 아호를 데웠다. 테레사가 보고 싶었다. 레이나 발렌티나 대학 마도학부는 마굴이다. 명가 자제나 연줄 있는 치들은 심사에 잉크방울 한 점 없이 왕국 마도 기술부나 기업 집단의 마도학 자문 자리를 꿰차고, 판테온 문턱이나 겨우 넘은 예삿것들은 순 악의적인 술식 퀄이니 초록 심사니 최종 심사 따위에 굽이굽이 허덕여야 하는 것이다. 


냉방에 식어 빠진 수프가 다 뭐라고 궁상인지, 나는 쓸데없이 웃고 말았다. 어련할까, 테레사는 더 속에 천불이 날 텐데. 시시한 저녁밥을 해작이며 왼손으로 자료를 뒤적거렸다. 시간에 쫓기는 건 사실이되 이 개 같은 노릇에서 하루빨리 놓여나고 싶은 마음뿐……. 그런 와중 괴상한 문서 다발이 눈에 띄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여 착오가 있어 봉인서를 잘못 반출했다면, 경을 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 종이뭉치를 흘겨보노라니 언뜻 괴악한 장난처럼 보였다. 152, 88, 1, 236, 76, 161, 71, 43, 102, 194, 55, 65, 44……. 반듯한 글씨를 보니 애는 아니고, 제멋대로 써 갈긴 걸 보니 올바른 어른도 아니리라. 그 와중 언뜻 마소의 흔적이 느껴져 얼른 집어 들어 볼 밖에. 허! 문서 첫 페이지에는 마도사만 읽어낼 수 있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장난이 아니다, 수열도 아니다, 다만 언어이다’. 논문을 잠시 제쳐두고서라도 한 번 어울려 줄 마음이 들었다.


이 난수표 비슷한 기록이 장난도, 수열도 아니며 언어라는 말은, 술식이라는 걸 에둘러 말한 셈이다. 숫자는 마도어로 구성하여 술식을 짜기에 썩 적절한 수단으로 통한다. 그렇다면 이 종이뭉치에서는, 정말 못된 장난이 아닌 한 규칙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몇 소절일까? 요즘 널리 쓰인다는 마법 장치에는 수 백 소절 남짓한 게 들어간다지……. 그런 시시한 술식일랑 아예 배제해도 될 것 같았다.


언뜻 단위를 보아하니 상한선이 제법 분명한 것이 눈에 띄었다. 256진법! 그 정도라면 틀림없이 이런 배열이 나오리라. 그럴듯한 해석 방향이 나오자 자연어 번역은 일사천리였다. 마도학자의 전공은, 이런 부류의 작업이니 말이다. 그런데 만 육천 소절 정도일 이 술식은 곧 천재의 작품임이 드러났다. 재귀성! 누군지는 모르되 각 소절이 자기반복적으로 포개지며 이 긴 술식이 기막히게 압축되도록 안배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해석이 끝나자 ‘넌 자격이 있다, 진짜 게임을 시작하자, 이젠 만만치 않을 걸’ 단 스물 세 자만 덜렁 남아 나를 허탈케 했다.


이게 뭐야! 이때까지 해낸 게 그저 자격 시험에 불과했다니! 나는 문서를 집어 그 뒤로 펼쳐진 숫자의 향연을 흘겨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진짜 게임 운운했던 말일랑 진담 중의 진담이었던 모양이다. 숫자들이 정연하게 춤을 추었고, 나는 1024진법으로 된 술식의 유도식을 끌어안고 끙끙거려야만 했다. 이제 키를 안다고 술술 해독해 낼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단히 고등한 마법적 조치를 실현하는 술식은 자연어로 바로 읽어 내기 어려운 법. 그 작용이 무엇인지 해독자가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야 풀어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소로 정육백포체 케이지를 짓고 내부 모든 면을 광학적으로 정렬, 광소를 6백 번 거듭해 가속한다. 결과적으로 빛은 이 케이지 안에서 광속의 세제곱 속도로 전진하게 된다……. 황당무계한 술식은, 목적이 불가해하여 해석하다 보면 주체할 수 없기 십상이다. 나는 어느새 초조하게 펜대를 돌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철저한 재귀성, 적확한 반복성. 이 술식은 테트라플렉스 케이지를 만들고, 꼭 다음 차례에 올 케이지의 위치와 타이밍을 예측하며 그렇게 무한정 뻗어 나가는 것만을 위해 쓰인 것처럼 보였다. 그저 그렇게, 끝없이.


따지고 보면 테스트 술식의 탁월한 구성도 이런 광기의 산물이 아닌가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마도학자인지는 모르되 일생을 테트라플렉스니 광속의 600중 가속이니 정육백포체의 무한 연결이니 하는 작업에 바치고 나면, 탈모도 프랙탈로 올 게 틀림없을 것이다. 술식 뭉치를 내던지고 보니 노을은커녕 밤조차 겨울바람에 흩어져 새벽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신줄을 아주 쏙 빼놓았던 모양이지……. 허기가 밀려들어 급히 야식거리를 뒤적거렸다. 그 때, 자취방 문고리가 갉작거렸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를 보아하니 테레사가 틀림없었다.


“자기, 왜 안 자?”


“저기요, 그거 누가 할 소린데?”


그녀는 당당하게 툴툴거리며 목도리부터 벗었다.


“오늘은 잘 안 풀려서 궁상맞게 홀아비 식단으로 밤참이나 주워 먹고 있으려나, 괜히 걱정돼서. 지극정성이잖아.”


“술식이 화수분처럼 나오면 벌써 알레프 연구소 같은 데서 한자리 꿰어 차고 있게?”


“이 시국에 개 같은 학문에 엿 같은 농담이네. 베네딕토 전하가 들으실까 겁난다. 가서 일 봐. 그 프리타스 봉지, 도로 넣어 놓고.”


양치기견에 몰린 양처럼, 나는 주방 테이블에서 쫓겨나 방구석 의자에 오도카니 쑤셔 박혔다. 골방일랑 사람 하나만 늘어도 한결 더워지겠지만 테레사는 그보다 훌쩍, 특별한 데가 있었다. 태양. 나는 줄곧 그렇게 부른다. 물론 본인 앞에선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쪽팔리는 말 어디서 배웠느냐며, 솜방망이 주먹으로 다스려질 게 뻔하니까. 문학입네 하며 낯간지러운 소리가 입버릇인 사람치고는 썩 태도가 이상하지 않나 싶지만, 늘. 태양! 그래, 태양은 우주에 떠 있지. 순간 코로나처럼 밝고 플레어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엄습해 왔다. 나는 당장 쫓아가 테레사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영감은 연기나 가스 같은 것이어서 쉬이 흩어지고 마는 법이다. 지금 당장 붙잡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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