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간판소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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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56 Jul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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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앤티크 간판의 수리는 썩 달가운 일이 아니다. 간판협회 표준 규격이 제정되기 전의 물건들이란 그야말로 괴발개발이니 말이다. 허나 내색은 금물, 기능직이며 서비스직인 간판사에게는 요령이 제일의 미덕인 것이다. 앙헬리카는 상담 중 내내 클라이언트에게, 다이아몬드 커팅한 강판 모서리처럼 정갈한 웃음을 흘렸다.


‘안녕하세요, 시르쿨로 아술 간판조합에서 나온 앙헬리카입니다. 간판 수리를 의뢰하셨죠?', '수리하실 간판은 이건가요? 연식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33년! 저희 조합보다 나이가 많네요', '아닙니다. 수리엔 아무 문제없죠. 맡겨만 주세요!' 능청이 일상이요 교태가 기술이라, 예쁜 얼굴에 미소가 더해진 데서야 당할 재간이 있으랴. 이미 성공한 영업이다.


앙헬리카는 사다리에 올라 물건을 이리저리 살폈다. 손 닿는 부분은 물론이요 어디 구석구석 녹투성이 아닌 데가 드물었다. 금속이란 값비싼 합금이 아니고서야 이 도시 첨탑의 끔찍한 대기에 쉬이 부식되기 마련, 하물며 연식이 연식이니 간판 모양을 한 고철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요행을 바라야 별반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우선 전동 렌치로 볼트를 빼내고 매니퓰레이터를 움직여 앞판을 집었다. 조심조심 들어올리고 보니 생각보다 내장과 배선은 멀쩡했다. 전기계통 일이 없다면 작업은 반절 이하가 되는 셈이다. 플러그를 떼어낸 뒤, 앞판 자체는 아주 들어내어 땅에 내려놓았다. 슬쩍 빼돌려 넝마주이들에게 넘기면 용돈깨나 될 터.


사다리를 내려오다 구경꾼이 제법 되었다. 앙헬리카는 교소를 흘리며 어깨를 짚은 손으로는 등을 가리켰다. 뒤가 휑한 레오타드, 새하얀 살결과 빈틈없는 각선미가 시선을 휘어잡는 건 필연일 터. 물론 뇌쇄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SARA-봄 시즌오프>. 등과 허벅지의 광고 스티커가 발랄함을 빌어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박수를 쳤다. 갑작스레 갈채군(群)이 들입다 쏟아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간판사 업계에서는 이런 광고판 노릇이야말로 본업에 가까우니 그때 그때의 센스가 일류와 이류, 이류와 삼류를 가르는 척도가 된다. 그녀는 '고마워요, 고마워요!'를 연발하며 윙크로 화답했다. 난리굿은 앙헬리카가 부품을 가지러 밴쉽에 들어갈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간판협회가 시장을 장악한 후 간판은 기성품이 되었다. 간판을 유지 보수할 때는 문제가 생긴 모듈을 파악하고 교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런 고물의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그야말로 현장 유도리에 모든 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앙헬리카는 눈대중으로 치수가 비슷한 S3 보드를 써 보기로 했다. 매니퓰레이터로 판을 올려놓고 위치를 맞추어 보니, 운 좋게도 볼트를 우겨 박으면 들어갈 것 같았다. 천공기 쓸 일을 면했으니 만사형통이었다.


앞판을 임시로 달고는 사다리를 내려왔다. 앙헬리카는 허리에 양손을 짚고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골목길의 싸구려 바지만 길모퉁이나마 차지하고 있으니 잘 꾸며 주기만 한다면 분명 눈에 띄리라. 간판의 글자체와 배색은 그만큼 중하다. 간판 자체뿐 아니라 가게 외장, 보도, 거리의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계산에 넣어야 하는 것인 만큼.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곧 밴쉽으로 쫓아 들어가 이것저것 들고 나왔다. 영감이 증발하는 걸 무서워하기라도 하는지 서둘러 보드 위에 글자를 올리고 초벌 나사를 박았다. 다시 땅에 발을 디디고 팔짱을 낀 앙헬리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Anoche> 여섯 글자는 삭아빠진 고철에서 멋들어진 기성품으로, 숫제 환골탈태를 했다.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죄고, 전기 체계를 다시 연결하는 것으로 일은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아귀가 안 맞는 보드에 고정 볼트를 우겨 박는 작업뿐이었다. 앙헬리카는 우선 손이 제일 잘 닿는 좌하단에 전동 렌치를 들이댔다. 매캐한 금속내가 요란뻑적지근했지만 생각보다 잘 들어갔다. 나머지 볼트 구멍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재수 좋은 날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앞머리 사이사이로 새는 땀방울조차 썩 유쾌할 정도로. 얼른 내려와 차단기를 다시 올렸다. 노란 LED가 휑뎅그렁한 골목 끄트머리에서 튀는 듯 튀지 않는 듯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클라이언트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훌륭하게 한 건 끝낸 셈이다.


"시르쿨로 아술 조합의 앙헬리카였습니다. 간판이라면 또 언제든지 맡겨만 주세요!"


앙헬리카는 예의 절제된 아양으로 마무리 멘트를 했다. 여태 구경하던 몇몇 사람이 다시 박수를 쳐 주었다. 물론 간판 일보다는 엉덩이나 허벅지에 침 흘리고 있었겠지만 그조차 간판소녀 업무의 일환인 것이다. 밴쉽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흑단빛 머리칼은, 그런 너저분한 눈빛에 과분하리만치 매끄러웠다.


그녀는 시트에 늘어져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렸다. 의뢰를 후딱 마무리한들 피곤한 인생이 어디 휑하니 달아나지는 않으니. 시원한 것들이 간절하다, 지금은 그뿐이었다. 맥주, 샤워, 맥주, 샤워, 맥주, 샤워……. 안달하는 마음만큼 밴쉽도 난리법석이어서 수직이륙하며 동시에 기수가 치들렸고, 숫제 나선을 그리며 날기 시작했다.


밴쉽은 곧 제3종 비행정 규정고도에 이르렀다. 노동자의 서 푼짜리 비행정은 이 고도로밖에 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느지막한 오후, 러시아워를 비껴 있어 하늘길은 한산했다. 조기퇴근, 빠른 귀가, 샤워와 주전부리. 괜히 지부에 연락했다간 산통 다 깰 것 같아 그녀는 입 닥치고 무던히 조종간만 매만졌다.


<26구역>이라는 홀로그램 근방에서, 앙헬리카는 기수를 낮추었다. 밴쉽은 저고도에서 살풍경한 고철더미 시가지를 스쳤다. 흉물스레 불거진 금속 구조물, 녹슨 배관이며 아크가 튀는 배전선. 세기말의 단말마야말로 하부 구역에서는 일상인 것이다. 그녀는 녹내를 가르며 미끈하게 비행정을 몰아, 어딘가에 사뿐 내려앉혔다.


허겁지겁 달리는 소녀 위로 거대한 간판이 이기죽을 갉작거렸다. <El Corte Colmenés>, 화려한 초록빛 간판이 저물녘의 볕을 받아 비릿했다. 하늘은 가스와 분진의 산란으로 푸르스름하며, 땅은 삐뚜름한 네온사인과 나트륨등으로 푸르딩딩하다. <벌통>. 이 도시 첨탑에서는 온갖 엿 같은 것들 것 작당이라도 하는 듯 비스무리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형 슈퍼마켓에 들어서자 부리나케 주류 코너부터 찾았다. 큰 냉장고가 횡으로 줄줄이 늘어서 있고 병이며 캔이 빼곡했다. 4.99오르덴, 3.99오르덴. 손 닿는 위치의 가격표란 다 그렇고 그런 것들 일색이었다. 이 정도면 분명 마실 만한 맥주일 것이다. 하지만 앙헬리카는 애초부터 그런 호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래위 구석진 자리, 저급품들이 덩그러니 줄지어 있는 곳. 조금 고민한 뒤, 1.29오르덴에 두 캔을 주는 PB상품을 집었다. 오줌처럼 떫고 밍밍하겠지만 맥주란 당장 목넘김만 시원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다음으로 안주 수배에 나선 소녀는 기름이 느글느글한 팝콘을 집었다. 저질 술에는 저질 주전부리가 적격인 것이다.


상할 물건을 산 것도 아니거늘, 앙헬리카는 재차 서둘렀다. 피로란 집 문지방이나 넘어야 해소될 수 있으니 말이다. 비행정은 위태롭고 절묘하게 달동네 계단에 소음 폭격을 퍼부었다. 목적지는 일대 빈민촌에 툭 불거진 구조물. 탑도 아니고 마천루도 아니며 그저 폐선 프레임을 기단 삼아 얼기설기 쌓아 잡스러운 곳으로 고도를 조정했다.


그 꼭대기에 다다라서야 속력이 죽었다. 앙헬리카는 꼭대기 공동주택 옆, 앙상한 주선장(駐船場)으로 밴쉽을 몰았다. 조심스레 주선을 끝내고 멀찌감치 서서 보자니, 낯선 비행정이 하나 눈에 띄었다. 이런 시간에 객이 있을 곳은 못 된다. 별일도 다 있네 싶었지만, 별반 신경 쓸 만한 일은 못 되었다.


하지만 집 현관 앞에서, 그게 진짜 별일이며 신경 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따로 연락하려던 찬데 잘 됐습니다. 앙헬리카 씨, 반갑습니다. <벌통> 제3지구 사회복지공사 소속 사회복지사, 후안이라고 합니다."


"네? 사회복지공사요? 무슨 일이죠?"


"뭐, 별일은 아닙니다……. 룸메이트를 들이셔야 할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요새 3지구 임대주택 사정이 별로 안 좋아서요."


후안이라는 사내는 능청스럽고 싹싹했다. 이 도시에서 사회복지공사란, 그런 수완가들이 빈자와 병자를 함부로 다루는 마굴이다……. 경계할 틈바귀도 없이, 그 등 뒤에서 계집애가 한 명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주눅이 들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 분명 양육원에서 방금 끌려 나온 처지일 것이다.


소개라고는 일절 없이, 사회복지사는 그 길로 휑하니 떠나 버렸다. 화낼 힘조차 나지 않았다. 어쩌라는 말인가? 어떤 아인지, 어디서 왔는지, 취직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 어울려 줄 게 아닌가? 야근이나 하고 올 걸 그랬다는 해괴한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했다. 현관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다 뒤를 돌아보았다.


실감나진 않지만, 자신이 저 아이의 인생 선배인 셈이다. 말을 붙여도 이쪽에서 먼저 붙이는 게 맞겠지……. 하지만 앙헬리카의 결의는 비밀번호를 알려 주는 정도로 동이 나고 말았다. 우선 낯선 룸메이트를 거실에 앉혀 두고는 샤워실로 냅다 도망쳤다. 등신, 쪼다, 방제노예들보다 못한 년……. 그렇게 저를 들입다 욕하면서.


샤워꼭지에서는 찬물이 와장창 쏟아졌다. 비명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이 도시원뿔의 허울뿐인 봄일랑 냉수마찰에는 가혹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그녀는 숫제 방방 뛰며 몸을 축였고, 기나긴 흑발이 한결 반지랍게 백열등 빛을 받았다. 샤워인지 촌극인지 모를 광경은 다만 잠시간이었다. 소녀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수건을 두른 채 얼른 뛰쳐나갔다.


그렇게 현실은 다시 한번 무심하게 그녀를 반겼다. 그 아이는 샤워실에 들어가던 때와 똑같이, 내내 뻣뻣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타올이 살그머니 보디라인을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새로운 보금자리랍시고 등 떠밀려온 곳이 기실 깡패 같은 양육교사나 별의별 양아치 양육원생이 횡행하는 아수라장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게 아니겠는가?


슈퍼마켓 봉투를 열었다. 맥주 캔을 따기가 무섭게 목을 젖혔다. 이 알싸한 감촉, 언제고 마셔 버릇하던 그 쾌감 그대로였다. 앙헬리카는 그대로 나머지 한 캔을 건너편으로 들이밀었다. 새파래진 낯짝이 캔, 팔뚝, 아래위와 얼굴을 부들부들 오갔다. 앙헬리카는 제가 훌떡 벗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채고는 멋쩍게 웃었다. 


"눈치 그만 봐. 여긴 양육원 아니야. 난 쓸데없이 사람 괴롭히는 취미 같은 건 없고."


"이, 이거∙∙∙∙∙∙. 뭐예요∙∙∙∙∙∙?"


"맥주지, 뭐긴 뭐야? 양육원에서 쫓겨났다는 건 이제 열 여섯 살이란 거잖아?"


소녀는 툴툴거리며, 낡은 소파에 반쯤 벌러덩 드러누웠다. 남이사 신경 쓸 일이 못 되었다. 저 계집애는 이제 운명공동체나 다름없을 테니……. 물론 신참은 선배의 가랑이보다는 불의의 선물에 더 흥미진진이었다. 그 싸구려 캔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동그래진 모습에 앙헬리카는 그만 까르르 웃고 말았다.


그녀는 곧 잔뜩 곁눈질을 시작하더니 가만가만 흉내를 내어 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어설픈 데가 없지 않았다. 한 번에 끝장을 볼 셈인지, 작은 목이 쉼 없이 오르내렸다. 빈 깡통을 내려놓고는 독약이라도 마신 듯 시뻘개지고 팔을 바들바들 떨었다. 신고식 아닌 신고식인 셈이다. 앙헬리카가 얼른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난 앙헬리카. 좋든 싫든 이제 같이 살아야 돼. 임대주택은 사회복지공사 마음대로고, 여길 나갔다간 집세 폭탄이거든. 이름이 뭐야?”


"마리아∙∙∙∙∙∙, 끅, 마리아예요."


"존댓말 하지 마. 나, 열 여덟 살 밖에 안 됐어. 내 집에서 불편하게 말하는 것도 싫고.”


피차 흔하기는 발에 채일 정도인 이름이다. 앙헬리카는 신상 명세를 캐물었으나, 정신줄을 반쯤 놓친 룸메이트는 그저 어물어물이었다. 저녁밥이나 먹이고 이야기할까 하여 계란 요리를 뚝딱 냈다. 하지만 김이 송송 오르는 오믈렛 그릇 앞에서 마리아는 아주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근거는 없지만, 어떻게든 같이 잘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예감과는 별개로, 앙헬리카는 난생 처음 한 끼에 오믈렛을 두 그릇이나 먹어 치워야 했다.

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20.07.09. 21:37
동서남북으로 울부짖었습니다
어느새 동생이 된 그들..
개고가 되었을지언정 추억은 그대로인 법이군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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