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다이달로스 #13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 02:13 Jul 20, 2020
  • 25 views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아롤터의 진자.


에르사예즈에서는 과학자 제레미 푸코가 지구의 자전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실험 장치를 그렇게 부른다. 베릴 클로스테르망은 입버릇처럼 이 도구를 국제 관계의 이치를 빗대는 데 써먹곤 한다. 제아무리 에르사예즈가 정의롭고 자유롭다(물론 이견의 여지가 있는 명제이겠지만)한들, 이 세상이 흔들린다면 그 세차에 휘말려 불의의 운명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떡해야 할까? 에르사예즈의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대령의 결론은 다른 나라를 바꾸어 버리면 된다, 그것뿐이었다. 협잡꾼으로 태어난 만큼 조국을 떼밀어 앞으로 나아가게 할 부류가 못 되니까. 독을 제 몸에 찌르면 자결이 되나 적의 몸에 찌르면 전공이 되리라, 그렇게 되뇌며 살아온 세월이 벌써 마흔여덟 해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사관인 루이는 협잡꾼이니 독이니 하는 상관의 입이, 일종의 자기최면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상주의자니까. 자유 에르사예즈의 아이들이 벨 에포크를 다시 살기 바라며, 자신 역시 말년에 그런 황금시대에 눈을 감고자 하니까. 그렇다면 정녕 살모사의 탈일랑 레지옹 도뇌르보다 값질 수 있을 테니까.


부러운 일이다. 모순을 기꺼이 안은 자에게, 이 세상이 힘을 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관사를 나선 루이는 잰걸음으로 관문을 빠져나갔다. 마소방출구와 유도 술식이 가슴팍을 겨누는 감각이 섬뜩하더니, 곧 무관들이 경례로 배웅해 주었다. 군복 차림이 아니었던 탓에 목례로 되돌린 후 임무를 찬찬히 곱씹었다. 테레사 알마스 기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낸다, 우선은 그녀가 적을 둔 <엘 문도> 신문사에 들러야 할 것이다.


그는 절도 있게 매무새를 점검했다. 제복에 계급장을 번뜩일 수는 없으니 단정한 셋업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어 대사관의 주무관 행세를 할 참이었다. 아무래도 입어 버릇한 군복보다는 거북한 데가 없지 않았다. 게다가 가발까지 썼으니 더욱 그랬다. 이런 잠행에서 위장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어찌되었든 임무에의 효용이 제일인 법.


북지의 동토, 서녘의 곡창, 동쪽의 산악, 남의 대초원. 모든 자연을 가졌다는 세레네이 반도에서 왕도 라 오르데나는 이천 년 왕통의 심장 땅이라고들 한다. 가상 적국의 무관 된 몸으로서, 또 공화국 자유 시민으로서 그런 메타포는 숫제 육갑이나 다름이 없으나 한 번쯤 그리 되뇌는 사람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저 시꺼먼 첨탑은, 당신네 심장에 박아 넣은 말뚝이냐고.


아침나절부터 인파로 북적이는 대로, 굉음과 섬광을 동반하며 하늘길을 점하는 부양선과 부양정, 그 가운데 오묘하게 끼어든 이방인 한 명……. 그 모든 광경이 모놀리토의 흉측한 그림자 아래 있다. 과유불급. 그 어떤 구조물도 일정 범주를 넘어서면 탐욕의 산물이거나 폭거의 증거로 전락할 것이다. 하물며 저런, 신비에 얽힌 초구조체가 옳은 물건일 리 없다. 


루이는 국적과 업을 차치하더라도 정녕 그렇게 생각한다. 입만 열면 이천 년 전통 운운인 오르데나 신민들이 어찌 그와 하등 무관한 구조체를 추키고 기리지 못해 안달인지! 어딘가 잘못되지 않고서 그러지는 않으리라 믿고 싶었다. 심장에 말뚝이 박혀, 마음이 멎어버린 게 아닌 데야 그런 역설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에르사예즈 사람은 화가 나면 말이 많아진다고들 한다. 연이은 실패, 가외의 잡다한 임무, 쓰잘데없는 올림픽 분위기……. 부양선 정거장에서 가을볕을 맞으며 평정심, 평정심을 되뇌어야 했다. 상사 같은 낭만주의자에게 힘든 시절이며, 자신 같은 현실주의자에게도 가혹한 때이다. 조국을 위해 타국을 염려해야 하는 역설이란!


「9연패! 남자 개인 간드 클레이 사격 금메달 이스마엘 미에르」, 「오르데나의 아홉 번째 쾌질주, 천재 올림피스트의 손끝에서」, 「보고 있나, 에르사예즈! 오르데나는 멈출 줄 모른다」. <라 보스>, <엘 티엠포>같은 오르데나 어용 언론의 악다구니 헤드라인을 보며 마음을 다스린 그는, 아우로라 거리 방면 부양선에 훌쩍 올라탔다. 그 길로 사십 오 분을 날았다.


암기해 둔 경로를 마도 기계처럼 무심하게 걸어 <엘 문도> 사옥에 들어서자 프런트의 여직원이 눈에 띄었다. 루이는 짐짓 절도 있게 가 섰다. 불안정한 당황이 체취처럼 흘러 들었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에르사예즈 대사관에서 주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알퐁스 쿨롱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금번 에르사예즈-오르데나 수교 100주년 기념 행사에 귀사의 기자 한 분을 특별 초청했는데, 참석 가능 여부를 아직 회신 받지 못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루이는 뻔뻔하게 가명을 늘어놓았다. 안내 직원은 고개를 숙이더니 훌쩍, 1층 사무실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스쳐 지나간 그 표정, 그 태도는 열 마디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이 속삭여 왔다.


결례도 보통 결례가 아닐 정도로 함흥차사이던 그녀는 이십 분이나 지나서야 다시 나타나 안내를 자청했다. 3층. 고작 층계참 몇 십 개를 오르는 동안, 부득부득 최소한의 거리를 두려 하면서.


3층 동편 사무실 입구에는 웬 사내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썩 딴판인 태도로 사람 좋게 웃는 그 사람을 향해, 루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반갑습니다, 미겔 아길라르라고 합니다.”


“아길라르 씨, 알퐁스 쿨롱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비워 둔 회의실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하면서 사무실을 가로질러 갔다. 루이는 천연스럽게 직시하는 척, 주변 파티션 너머를 훑었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우거나 화장실이나 흡연실 등지에 도망하는 것 같았다. 정보 활동을 하노라면 익숙한 모습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족치고 지나간 부스러기의 꼬락서니.


루이는 회의실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슬슬 제가 이 신문사에서 어떤 분이랑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쿨롱 씨, 저는 <엘 문도>에서 사회부 팀장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 저희가 초청한 알마스 기자님이 사회부 기자시죠. 기자님은 안녕하십니까? 본인이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 건이라면 회사에서 에르사예즈 대사관에 서면으로 답변을 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면? 공문이 왔으면 제가 왜 괜히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짐짓 황당하다는 투로 쏘아붙이자 건너편에서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우편국의 잘못이 있든 중간에 우편이 분실됐든,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서는 다시 발송토록 조치하겠고, 지금 구두로도 말씀드리자면 테레사 알마스 기자는 개인적인 사유로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신문 소속으로 오르데나-에르사예즈 재수교 100주년 행사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맙소사, 그렇게 의욕적이던 분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워커홀릭이라서 말입니다. 자세히 캐 물을 문제가 아니어서 무슨 병인지 구체적으로는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물어봐야 나올 것도 없으며 내 주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엘 문도>에서 보아야 할 건 진즉 다 봤으니 더 이상 시간을 버리기 싫었다. 루이는 기대 세워 둔 가방을 집어 들고, 곧장 일어섰다.


“그렇습니까? 안타깝게 됐습니다.”


“혹시 다른 참석자가 필요하시다면…….”


“아, 알마스 기자님 건을 확인만 하고 오라는 지시여서요. 그건 지금 제 선에서는 달리 말씀드릴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숫제 사무적으로 선을 그었지만 미겔이라는 사람은 다소 질척하게 굴었다.


“구체적으로 테레사 알마스 기자의 참석이 필요하셨다는 건지요?”


“글쎄요, 그야 결재권자 의향에 달린 일이지 일개 주무관에 불과한 저는 잘…….”


은근짜 같으니, 그렇게 웃으며 출구를 묻자 미겔은 더 이상 붙잡지 않고 1층의 출입문 바깥까지 동행하여 배웅해 주었다.


에르사예즈 대사관의 정보부 요원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협력자가 별안간 증발하여 온데간데없는 일에. 그 주변은 쑥대밭이 되고 주변의 눈이, 행동이, 태도가 꼭두각시놀음인 양 닮은꼴이 되는 일에. 그러고도 어용언론의 기사 한 꼭지든 외교적 항의든 형태 있는 리바운드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일에. 그렇게 몇 십 명을 잃어 왔으니까.


태양이 채 중천에 걸리지도 않은 시간, 루이는 온 길을 반대로 거닐었다. 담뱃갑을 뒤적이며 지금까지 일을 찬찬히 복기해 보았다. 어제 들었던 말처럼, 이상한 일이다. 정말 그렇다. 일개 기자가 이 세상에서 지워졌다면 대사관으로 그 이름자가 박힌 공문의 회신이 올 리 만무하다. 또 자신에게 무언가를 추궁하려 드는 어수선한 수가 나오지도 않았으리라.


믿어지지 않지만 테레사 알마스 씨는 왕실근위대의 올가미를 빠져나간 것으로 보였다. 또 그게사실이라면 왕실근위대는 이만저만 불편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증거라고 해야 할 지 방증이라고 해야 할 지, 미행이 두 사람 따라붙은 게 눈에 띄니 말이다. 이 일의 귀추는 어찌될 것인가? 적어도 지금까지의 실패와 교착보다 나쁠 리 없지 않을까?


어쨌든 아직 심증, 그것도 겨우 한 단면의 유추에 불과하다. 가엾은 여기자를 미끼로 왕실근위대가 모종의 공작을 벌이는지도 모른다. 일일이 확신을 득해 움직일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강한 수긍은 있어야 할 터. 의심쩍지 않게 대로변 상황이며 기물 배치를 살핀 그는 머릿속 라 오르데나 지도를 떠올렸다. 우선은 못생긴 꼬리표부터 떼어내야 한다.


어설프게 수작질하면 사람이 더 붙고 경계를 강화하게 될 일. 자연스럽게, 정갈스럽게 저들을 따돌려야 뒤탈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절의 라 오르데나에는 딱 유리한 장소가 있다……. 루이는 천연덕스레 정거장에 섰다. 그리고는 귀관편인 파스 길 방면의 부양선을 보내고, 콘벤시움 스타디움으로 갈 수 있는 선편을 잡아탔다.


개막식 날, 경기장 안팎에서 벌어지던 아귀다툼이 새삼스러웠다. 이제 대회는 본궤도에 올라 주요 종목의 상위 토너먼트가 진행되고 있어, 오르데나 사람들은 환장한 족속들처럼 관람에 목을 맸다. 마도 올림픽의 꽃이라면 개막식과 폐막식이 아니던가? 완급 없이 나날이 관람객이 늘어만 간다면 마지막 날엔 무슨 광경을 볼 수 있을 지 궁금할 일이었다.


관람객, 딱지장수, 잡상인, 거지, 삐끼, 소매치기……. 마녀의 가마솥처럼 우글거리는 스타디움 앞에서, 루이는 미행을 뿌리치기는커녕 잘 따르고 있는지 살피는 데 안간힘이었다. 쓸데없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시의적절한 그 순간까지 말이다. 왕실근위대의 주구들은 다행히도 억척스레 입장 대기열까지 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같이 서서 눈을 부라렸다.


행렬은 굽이굽이 경기장 안으로 요동쳤고, 몇 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중없이 움직였다. 여느 대기자라면 얼른 관람석에 가고 싶어 안달이겠지. 부득부득 겹겹이 틈을 좁히는 그 심보가 본의 아니게 아롤터 사람 한 명을 돕고 있었다. 그는 사각을 노려 몸을 수그리고, 가발과 재킷을 벗어 서류가방과 함께 낯선 정강이 틈새로 이리저리 내버렸다. 그리고는 ‘죄송합니다,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보란 듯이 외치며 대열을 빠져나갔다.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다.


콘벤시온 스타디움을 나선 루이는 부리나케 아수라장을 등졌다. 이제 시간 문제이다. 꼬리표를 담당한 두 사람이 언제 눈치채는가, 그 뿐인 문제. 다행히도 시간일랑 다만 얼마간이면 그만이다. 또 비상이 걸린들 쉬이 찾아낼 수도 없을 것이다. 셔츠 소매를 끌러 바짝 걷어붙인 그는 승객을 토해내고 말끔해진 부양선을 타고, 푸에르타 데 라 레이나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 서편 소르티하 길, 반대편으로 네 번째 골목. 성냥갑 같은 맨션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댄 곳에서 천연덕스레 명패를 눈으로 훑었다. 별의별 암구호를 외어 버릇한 사람에게, 주소 암기야 업무조차 못 되는 일. 그런 그의 눈에는 테레사 타티아나 알마스 씨 거주지 앞, 2인 1조로 진을 친 사내들이 똑똑이 보였다.


트라우저 주머니에 쑤셔 박은 담뱃갑을 뒤적이며, 루이는 그 앞을 훌쩍 지나갔다. 협로의 후굴을 살짝 돌아 기대서는 못나게 쭈그러든 궐련을 하나 하나 피워댔다. <엘 레이노>, 한 갑에 20오르덴짜리 담배 이름이 ‘왕국’이니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가? 오르데나 사람들은 이걸 태울 때마다 왕국의 일 편린씩 살라 부스러뜨리는 셈이니 말이다……. 


그렇게 무심히 소일하던 그는 반 시진에 한 번씩 등 뒤를 엿보았다. 그렇게 두 번, 똑 같은 치들이 그 자리에 우뚝한 것을 확인한 뒤 미련 없이 뒤축에 힘을 실었다. 왕실근위대는 저 집을 감시하고 있다. 그게 뜻하는 건 하나뿐. 마소 호출기를 꺼내고, HUD를 조작하여 핫라인 술식을 가동하는 모습이 날카로우며 으슬으슬하기까지 했다. 


루이는 연결되기가 무섭게 또박또박 한 마디씩 말했다.


「부바르디아, 여기는 라벤더. 튤립은 영 좋지 않은 일을 당한 듯.」


「라벤더, 튤립은 보라색인가?」


마찬가지로 지체 없이 대답이 이어졌다.


「아니다. 색깔 확인이 불가. 페인트공이 보라색을 칠하려고 안달이 난 듯.」


「수고했다, 라벤더. 페이스트리를 구워 놓고 기다리겠다.」


그대로 마소 호출기를 떨어트린 뒤, 짓밟아 결딴내고는 발로 차 사방으로 흩어 버렸다. 술식 한 끗, 단서 한 조각 건져 올릴 수 없도록. 다이달라이트 잔여물이 공기와 쌍소멸하며 잔광을 흩뿌렸다. 붉은 섬광을 뒤로 한 채, 루이는 그저 걸었다. 대사관 반대 방향으로 제법 멀어졌으니 말이다. 경비 무관들의 가늠쇠 끄트머리조차 지금은 마뜩할 것이다.

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20.07.25. 21:12
애정소설인 줄 알았지만 깔아두었던 불안이 꿈틀꿈틀하면서 본격적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서스펜스란
공동체 속의 개인을 바라보는 감성이 정말 매력있네요
권한이 없습니다.
prev
이동할 페이지 번호 입력 후 엔터
('63'이하의 숫자)
of 63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