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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동프대] 그리고 수유의 불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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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31 Aug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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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채명준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프롤로그


  여기 하나의 짐승이 있다.


  짐승의 이름은 카미시라사와 케이네. 그녀는 반쯤은 인간이요, 반쯤은 신화 속의 짐승인 백택이다. 그녀에게는 다른 이름이 많다. 지식과 역사의 반수, 역사를 먹는 짐승, 역사를 왜곡하는 힘을 받고 태어난 역사학도. 그녀는 환상향이 빚어낸순수한 모순이며, 환상향의 가장 아이러니한 울타리에서 살아간다.


  그녀는 역사의 적이지만 역사를 공부한다.


  그녀는 인간의 적이지만 인간을 사랑한다.


  그녀는 요괴지만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다. 어쩌면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바람이기도 하다. 요괴의 낙원인 이곳 환상향에서, 요괴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없이 비열한 위선이다.


  역사를 먹어치우면서도 역사를 공부한다는 모순. 인간의 공포를 먹으면서도 인간을 사랑한다는 모순. 그 모순을 어떻게내면 속에서 융화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을 견뎌내며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것은 케이네라는 인간이 짐승으로 변하면서부터 숙제로 떠안은 질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모순은 인격의 해리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존재를 분리해서 생각해야만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서당의 선생으로 사는 인간으로서의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와, 그녀 내면의 짐승인 백택은 전혀 다른 존재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적병을 찔러 죽인 군인이 가족을 품에 안기 전에 손을 씻듯이,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기위한 의식을 고안한다.


  백택이 된 그녀는 자신을 방 안에 가둔다. 그때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역사서를 쓰는 작업에만 몰두한다. 그것은 지식을 위한 작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의식이다. 그로써 그녀는 그녀의 내면을 정화하고, 보름달이 가라앉고 나면 백택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녀는 인간을 흉내내는 짐승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의 사정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다.




*



  또한 여기에는 한 명의 인간이 있다.


  그녀는 후지와라노 모코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봉래의 인형, 불꽃 속에서 되살아나는 자, 천 년이 넘는 세월을 한 인간의 몸으로 살아온 역사의 증인. 사라지지도 죽지도 않는 기억들의 담지자. 그녀가 어떻게 불리든,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그녀는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믿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천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은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퇴색시켰다. 단지 기억만이 퇴색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인간이었을 때검고 윤기가 흐르던 머리는, 봉래의 약을 먹고 나서는 하얗게 새어버린 백발이 되었다. 파괴와 수복을 반복하는 육체는 원래의 모습과 한없이 닮아 있지만, 어느샌가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를 결여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없다.


  그래도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믿는다. 그녀는 인간이며, 그녀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육신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녀의 내면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영혼은 시간 속에 마모되어 가면서도 진정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너는 인간이며, 영원히 인간일 것이라고.


  그녀의 인간성을 지탱하는 감정은, 안타깝게도 증오다. 사랑이 아닌 증오만이 그녀의 영혼을 불타게 한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 명의 원수에 대한 증오가 가득하다.


  호라이산 카구야. 달의 공주라고 알려진 여자.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찬 그녀의 천 년을 선사한 불멸의 숙적. 그녀는 카구야를 죽인다. 카구야는 그녀를 죽인다. 그들의 관계는 이로써 정의된다. 죽을 수 없는 존재끼리 이어진 죽음의 고리.


  그 관계에서 그녀는 모순을 찾지 않는다. 모순 같은 것에 매달리기에는 지나치게 격정적인 인간이기에. 그녀는 대신 죽이고 죽음으로써 살아가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를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한다.


  여기까지가, 후지와라노 모코우의 사정이다.



*



  이제 다른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하쿠레이 대결계의 바깥에는, 물론 '바깥의 세상'이 있다. 결계 바깥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곳이 원래 세계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모든 환상과 낭만이 톱니바퀴로 된 근대국가의 체제 아래에 파묻힌 세계. 그 세계에서 계몽은 미신을 몰아내고, 쇠우리이며 강철 성채인 국가는 안락과 순응 속에서 인간들을 길러내었다. 인간들은 더 강해지지는 않았으나 대신 점점 더 동일해져갔다. 동일성은 곧 응집된 힘이 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의 미혹이 낳은 존재인 요괴들은 계몽 앞에서 패배했다.


  요괴, 요수, 흡혈귀, 반수, 요정, 유령, 신령, 마법사는 바깥 세상에서 존재할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혔고 존재의 가능성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이성과 계몽의 지배 앞에서 패잔병들은 자신들을 위한 낙원을 건설하고 그곳으로 도피했다.


  환상과 실체의 경계가 갈라지고, 잃어버린 낭만의 노스탤지어는 모두 환상향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는 오직 냉혹하고 기계적인 물리법칙의 세계만이 남겨졌다. 그렇게 인간은 환상을 몰아냈고, 환상은 순순히 물질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바깥에는 새로운 세계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일한 종을 위한 세계에서는, 그 인간조차도 행복하지못했다. 확실히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보다 행복해졌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하루 열네 시간을 정신적으로 소진해나가는 삶이야말로, 오늘날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인생의표준이니까.


  테라사키 사쿠라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동경대학 인문학부에 재학 중인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을 공부하는 로봇처럼 살았다. 그녀에게 삶이란 단순하고도 명확한 것이었다. 경쟁하고 노력해서 남들보다 높은 인간이 되는 것. 남을 짓밟기위해서 스스로를 가꾸는 것.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 된 것에는, 재일 출신의 어머니로 인한 차별과 멸시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차적인 환경일 뿐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선천적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종류의 인간이란 것을.


  요컨대, 이것은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태어난 인간의 이야기다.



*



  자, 대충은 감이 잡혔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요괴와 한 명의 인간, 그리고 한 명의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다. 환상향이라는 공간이 요괴에게 그리고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나며, 이방인의 시선에는 어떻게 비치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좋을 것이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런 소개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대들에게 그들은 낯선 타자에 지나지 않을 테니.


  이야기는 테라사키 사쿠라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벽네 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이 무언가 이상하다. 분명 평소와 같은 길을 가는 것 같은데, 같은장소를 빙빙 도는 것처럼 기이한 감각을 느낀다. 그녀는 그 감각을 일단 무시해버린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하고.


  한 시간을 더 걸은 뒤에야 그녀는 깨닫는다. 길이 이상하다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그녀는 어느샌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산의 중턱에 서 있다. 불길한 기류가 흐른다. 사람이 다니는 산 같지는 않다.


  그녀는 미신이나 종교를 믿지 않는다. 당연히 카미카쿠시 설담 따위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릴적 어머니가실종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조차, 그녀는 그것이 재밌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믿음을 포기하기보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쪽을 택한다.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중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나 그런 도피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녀는 거대하고 으스스한 토리이 앞에 서 있다.


  붉은 목재가 달빛을 받아 기이하게 빛난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닫는다. 이곳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구나. 나는, 완전히다른 세상에 들어왔구나.


  그녀는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신사 쪽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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