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간판소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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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23 Aug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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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물론 업무차 다른 구역으로 가는 이상 남 신세나 걱정해 줄 처지가 못 되었다. 25구역은 먼발치에서부터 스모그로 홀로그램 표시판조차 겨우 어슴푸레 보일 지경이니 말이다. 하늘길의 모든 비행정은 자율비행 시스템에 의지하여 느릿느릿, 장례 행렬처럼 꼬리를 문 채 서치라이트로 괜한 매연에 광량을 투사하고 있었다.


부연 빛이 날뛰며 하늘이 귀신 들린 것처럼 으스스했다. 앙헬리카는 이를 갉작거렸고 소피아는 전방 주시에 혼을 빼앗겨 그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반 시진, 아니, 한 시진은 지나서야 겨우 착륙 고도에 접근할 수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자율비행을 비활성화하고, 저고도를 훑어 내리듯 지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 떨어지는 동네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앙헬리카는 불만 만만으로 대뜸 구시렁거렸다.


“말이라도 좀 해봐, 소피아. 이런 엿 같은 데 끌고 들어왔으면.”


“뭐, 이 계집애가 지금…….”


“일은 설명해 줘야 될 거 아냐? 뭐, 이쯤 되면 알만하다만.”


그녀는 부루퉁하기 짝이 없었다. 돈이 예쁘다지만 이 따위 안개를 들이켜면서까지 아득바득 귀여워하자면 또 신세 처량해지는 것이다.


소피아는 발끈하다 말고 조종간을 살그머니 만지작거렸다. 피차 눈칫밥 먹는 신세에, 그만하면 과한 복선이 아니었을까?


“레스토랑 간판이야. 꽤 큰 업소라 A2사이즈라고 하더라.”


“레스토랑은 개뿔, 공장 구내식당으로 끌고 가고 있잖아, 지금.”


“하여간……. 간판 하는 여자들은 참 귀엽지가 않아, 그지?”


소녀는 다리를 고쳐 꼬았다. 속일 사람을 속여라, 그런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제사 무얼 하든 넋두리 이상은 안 될 테지만.


“다들 건수 건수 하는 와중에 나한테 우는소리 할 때까지 공석인 건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야, 저기 아저씨들이 내 엉덩이 만지면 네가 대신 맞을 줄 알아.”


“나도 좋아서 온 거 아니다, 뭐…….”


앙헬리카의 불만이 어떤 효시가 되었던 걸까? 두 소녀는 티격태격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짜증났던 클라이언트를 욕하거나, 구질구질한 현장에 대해 하소연하거나, 지부장의 보신주의를 헐뜯거나.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밴쉽은 선형으로 가스와 분진을 가르며, 충실히 현장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의뢰처는 25구역 북단, 그것도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선을 끝마치고 출입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숨이 턱 막혔다. 더 하층에 위치한다는 오염 구역이라야 이만치 지독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갈퀴로 기도를 호비는 듯한……. 예쁘장한 반라의 소녀 둘이, 합을 맞추어 허리를 뒤틀고 기침을 쏟아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얼마간 지나서야 안정을 찾고 아픈 목을 물로 씻어내며 잰걸음을 걸었다. 공기가 더럽든 몸이 아프든, 고객과의 약속에 허투루 늦어서는 안 된다. 


소피아의 휴대전화가 울렸고 이내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시르쿨로 아술 간판조합의 소피아입니다', '네, 고객님. 지금 막 공단에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구내식당 3층 사무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시르쿨로 아술의 소피아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타일은 다르더라도 그녀 역시 수완가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그 사이 앙헬리카는 근처에서 힐끔힐끔 눈치나 보던 사람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화사한 미소로, 허리를 슬그머니 숙여 보였다. 그런 뇌쇄에 버틸 자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헤벌쭉한 사내에게서 구내식당 위치를 캐묻고는 곧 뒤돌아 등을 보였다. 새하얀 살결 위, <Caliente Seis, 당신의 에너지>라는 문구는 분명 머리 속에 말뚝처럼 박혀 들어갔을 것이다.


두 간판사는 입을 가린 채 공터를 가로질러 걸었다. 목적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잔뜩 종종걸음을 쳐 건물에 들어서고 나서야 부리나케 아껴 두었던 숨을 몰아 쉬었다. 시뻘개진 모양새가 곪은 뾰루지 같았다. 그만치 이 구역의 공기는 지독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누구라고 이걸 즐거이 들이켜지는 않을 테지만.


앙헬리카와 소피아가 사무실 문을 찾아 문을 두드린 시간은, 정확히 약속시간 십 분 전이었다. 약속시간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약속시간 십 분 전을 지킨다, 그게 간판업계의 모토 아닌 모토이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럽게도 약속시간 십 분 전의 십 분 전에 사람이 바빠지니 도대체 약속시간이라는 게 왜 있는지 모를 일이 되고 말지만.


"안녕하세요, 시르쿨로 아술 간판조합의 소피아입니다."


"시르쿨로 아술의 앙헬리카입니다."


"햐, 언니들 정말 몸매 좋은데? 왜 이런 아가씨들은 27구역 같은 데만 있나 몰라."


영업용 미소와 나긋나긋한 인사가 합을 맞추었다. 고객의 눈길은 숫제 질감이라도 가진 양 뚜렷했다. 몸의 굴곡 굴곡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것을 달리 어찌 말하랴? 


추파가 예상 범주에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들은 듯 안 들은 듯, 천연덕스러워야 한다. 우선은 그래야만 한다.


"감사합니다. 의뢰하신 간판은 A2규격, 연식 1년 1개월, 문제 사항은 부식입니다. 들어오면서 본 1층 언저리의 큰 간판 같은데, 맞나요?"


"에이, 그런 이야기보다는 어디 보자……. 왼쪽 까만 머리 아가씨, 전화번호 좀 가르쳐주면 안 될까?"


"죄송하지만 고객님, 업무 중 클라이언트와의 사적 관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짝을 맞출 때는 꼭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들은 능숙하게 업무분장을 하고 있었다. 중키에 조금 귀염상인 소피아가 일 이야기를 한다면 훤칠하고 늘씬한 앙헬리카가 응대를 맡는 것이다. 내색하지 않고 대금을 받을 때까지 싹싹하게, 역할극을 잘 해내야만 한다. 이런 진상 고객이라면 더더욱.


씨알이 먹혀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클라이언트는 그저 헤벌쭉이었다. 아니꼽더라도 현장에 와 버린 이상 피할 길은 없다. 더러운 꼴 면하고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낼 궁리를 해야지.


"그러지 말고. 삯에 웃돈 얹어 줄 테니까……."


"업무 중, 업무 중 클라이언트와의 사적 관계 형성은 면허 제명 사유가 될 수 있어서요.”


"알았어, 알았다고. 업무 중이 아니면 된다 이거지? 물건은 아까 말한 그거 맞아. 이제 완전 개판이니……. 적당히 해 줘.”


앙헬리카는 싹싹하되 철벽이었지만 얼굴이 무기라 두 손 다 든 듯했다. 매춘과 그에 준하는 추태가 아니라면 가릴 게 없고, 또 이런 기품 있는 방식이란 일류의 전유물이니 말이다. 얼른 꺼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한껏 담아 인사하고 뒤를 돌았다. 하얗게 드러낸 등짝과 스티커 광고, 이런 때에 이만한 핑계거리도 없을 것이다.


"용돈은 얼마나 줄까, 아가씨?"


다소 아쉬워하는 듯한 네 마디가 느적느적 날아들었다. 손을 슬쩍 들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무실 문을 꼭 처닫기가 무섭게, 앙헬리카는 이를 갈기 시작했다. 물론 과녁은 옆에 우물쭈물 선 친구였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네 다리가 좋은 모양이더라, 리카?"


"시끄러워, 이 계집애야. 너한테 오늘 꼭 점심 얻어먹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렇게 알아."


"그, 그래……. 난 저 아저씨보단 여기 공기가 더 싫어. 병 걸릴 것 같다고."


백운모처럼 하얗고, 광고 스티커를 꼼꼼하게 붙인 다리 네 쌍이 깡총걸음을 걸었다. 당연하겠지만 일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건 아니었다. 똥냄새는 똥에서 멀어져야 덜 나는 법.


그 길로 일은 일사천리였다. 공업구역의 오염된 공기를 함뿍 들이마셔야 한다는 것만 빼고. 비행정을 도로 몰고 와 식당 건물에 바짝 붙이고는 매니퓰레이터를 들이밀었다. 가위바위보에 이긴 앙헬리카가 조종기를, 져 버린 소피아가 사다리를 대고 올라 전동 렌치를 잡았다. 대형 간판이어서 볼트를 다 푸는 데 두 번 오르내리는 수고를 거쳐야 했다. 앞판을 들어내고 보니 전기계통이든 조명이든 내장 하나 없는 깡통이라는 게 드러났다. 고객이 심드렁할 만도 하지. 사실 공장 구내식당이 어디 점포처럼 휘황찬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럭저럭 구실이나 하면 그만인 것이다. 먼 길 행차에 성희롱까지 당한 것 치고는 김새기 그지없는 일감이 아닐 수 없었다. 새 보드에 짜맞추고는 도로 달아놓는 데 채 한 시간이 안 걸릴 정도인.


마무리를 할 무렵 점심 시간이 되었는지 사람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기자재를 정리하는 두 소녀에게 엉큼한 휘파람이며 환호가 짱돌처럼 날아들었다. 이것도 업무의 일환이라면 일환, 밴쉽에 사다리를 대고 선체 위에 나란히 올라섰다. 엉덩이를 맞붙인 채 서로 바깥쪽 손으로 제 등의 광고 스티커를 짚어 보이는 퍼포먼스에 구경꾼들은 열광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그런 생각뿐이었다. 오른손으로 키스를 흩뿌리던 앙헬리카는, 이온 엔진처럼 밝은 미소 뒤에 오만상과 욕지거리를 구깃구깃 감춰 넣고 있었다.


도로 구내식당 사무실에 들어서자, 아니나다를까 엄한 소리가 재개될 기색 만만이었다. 급살이라도 맞지 않았다면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 벌써 끝난 거야? 잘 됐네. 그럼……."


그녀는 씩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얼른 다가가 무어라 속삭였다. 작업을 걸려던 쪽이 외려 당황할 만큼 대담하게. 책상 위 종이에 몇 자 끼적이는 모양새가 연락처를 알려 주려는 듯했다. 늙수그레한 낯짝에 천박한 웃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소피아는 동료가 제 곁에 돌아와 다소곳이 설 때까지 휑하니 정신줄을 놓았다.


앙헬리카는 얼른 옆구리를 쑤셨다. 소피아는 동전 먹은 자판기처럼 움찔거렸다. 마무리를 안 하면 일이 안 되겠지.


"시르쿨로 아술 간판조합의 앙헬리카였습니다. 간판이라면 언제든지 맡겨만 주세요!"


"시르쿨로 아술 간판조합의 소피아였습니다. 간판이라면 언제든지 맡겨만 주세요!"


두 소녀는 언제나 쓰던 멘트와 함께 허리를 숙이고는, 이번에는 아주 시원스레 뒤를 돌았다. 왕복 여정보다 시시껄렁한 일이라도 시마이는 멋들어지게 해야만 한다.


이번에는 장소가 바뀌기가 무섭게, 소피아 쪽이 펄쩍 뛰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잠깐 넋을 놓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야, 리카. 너 진짜 저 아저씨한테 번호 가르쳐 준 거야?"


"왜? 안 그러면 순순히 대금 입금 안 해 줬을 거 같은데? 아니, 일단 이 자리에서 놓여나고 봐야지, 응.”


태연자약한 대답이 마치 오염 지대에 방호복 없이 뛰어드는 미치광이처럼 태연해,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앙헬리카의 손목을 얼른 낚아챘다.


"너, 이런 현장에 잘 안 나와서 이러는 모양인데, 이거 뒷감당……."


"야, 내가 등신인 줄 알아? 쪽지에 쓴 거, 지부장 데스크 번호라고, 후아나 아줌마 데스크."


"너구리 같은 계집애."


앙헬리카는 홱 뿌리치면서 쏘아붙였다. 그래,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일 리가 없지. 서로 흘겨보던 두 사람은 실없이 쿡쿡거리더니 잽싸게 계단을 내려갔다. 향기로운 바람 한 쌍이라도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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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20.08.16. 18:13
예전에는 장치 중 하나로 무심히 지나쳤던 대기오염이 폐로 와닿네요. 참담한 배경 앞에서 짤막한 호흡으로 통통 튀는 분위기가 매력적입니다. 때로는 5천 자 내외가 표준으로 자리매김한 판이 되고 만 데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역시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다고 새삼 느낍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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