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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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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38 Oct 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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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거리에서, 콘스티투시온 광장의 층계 1141번 보관함에서, 나는 그 모든 얼굴들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이제는 나를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내가 이미 보았던 것에서 다시는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다행스럽게도 며칠 밤의 불면 끝에 다시 망각이 내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


.


.


.


.


알레프에 고한다.」




소싯적 타르트나 페이스트리보다 더 자주 접해 버릇한 암호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숭덩숭덩 읽혔다. <알레프>. 그 사람을 마도학쟁이라 놀리며 가르쳐댔던 헤라르도 루이스의 <알레프>를 어찌 자신이 못 알아보랴? 마티아스는 죽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름 없는 아우성을 남긴 것이다…….


테레사는 주저앉아 소리없이 흐느낄 뻔했다. 아니,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세상에, 어리석고 옹졸했던 자신에 보란 듯이 우짖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를 앙다물고, 피가 배어 나올 만치 경련이 일어나도 슬픔을 씹어 삼켜야 한다. 곡은 방에 처박혀 샤워꼭지를 틀어 놓고 해도 늦지 않을 터.


이 암호에는 원본 텍스트와 다른 부분이 있었다. ‘콘스티투시온 광장의 층계에서’가 ‘콘스티투시온 광장의 층계 1141번 보관함에서’로 바뀌어 있으니 말이다. 1141에 별도로 이탤릭체 표시를 할 만큼 꼼꼼하기까지 했다. 좀 어수룩한 데가 있어도 마도어 때문에 숫자에는 지독하게 꼼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숫자 몇 개 두고도 발작적인 흐느낌이 치솟아,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얼른 가방을 휘어잡고는 파티션 사이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팀장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것도 눈을 동그랗게 뜬.


“테레사, 어디 가?”


“팀장님, 일 해야죠. 아까 그렇게 독촉을 한 게 누군데 이러세요?”


그녀는 하마터면 딸꾹질을 하며 펄쩍 뛸 뻔했다. 태연하게, 평소처럼 변명을 늘어놓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갑자기 열심이니까 그러지.”


“일라리오한텐 사무실로 출근한다고 말해 버렸는데……. 이쪽으로 다시 올 테니 기다리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팀장은 알겠다며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테리, 잘했어, 괜찮았어.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무실을 등질 수 있었다. 언제 왕실근위대가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다. 낌새를 가능한 감추어야 한다.


혹 누군가 정거장에서 어느 선편을 이용하는지 살필지, 뒤를 밟아 행적을 감시하지 않을지 테레사는 안절부절이었다. 그런 와중 딴은 태연한 척 허세를 부렸고 그만큼 영 어줍게 보였다. 물론 이런 시간에 누가 뭘 어쩐들 관심 가지는 사람일랑 없었다. 부양선을 잡아타고, 질색하는 저 거대한 그림자 아래를 지나 푸에르타 데 라 레이나 광장으로 돌아갔다.


콘스티투시온 광장이 어디더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심결에 소르티하 길 쪽으로 걷고 있었다. 관성이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또 기억상 그 광장은 여기서 도보로 갈 만한 거리에 있었다……. 그녀는 금세 고민을 접고, 단골집인 광장 모퉁이 카페를 찾아가기로 했다. 커피 한 잔 시키며 말이나 물으면 쉬이 알아낼 테니.


카페 콘 레체 한 잔, 살갑게 지껄이면서 구태여 수첩을 한 번 튕겼다. 직업상, 또 여러 사정상 거짓말엔 익숙했지만 언제나 능숙과는 거리가 있지 않나 싶었다.


“사장님, 콘스티투시온 광장으로 가는 길이 어떻게 되나요?”


“응? 거기면 푸에르타 데 라 레이나에서 서쪽으로 여섯 블록이지. 아마 수리와 포도나무 동상이 광장 동쪽 입구에서 보일 거예요.”


“감사합니다.”


수리와 포도나무 동상, 그런 아리송한 조형물이 있다는 게 기억났다. 테레사는 ‘El Águila y la Vid’라고 끼적거리며 바 자리에 앉았다. 커피는 금방 나왔다. 조울증이 도지는지 유리잔에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여섯 블록. 고작 여섯 블록 거리까지 찾아왔던 양반이 이젠 마도기 속 이백 자 남짓 텍스트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부득불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댔다. 단돈 5오르덴인 것을 감안하면, 카페 콘 레체는 썩 괜찮았다. 그런 도핑에 기대고 보니 얼마간 황망함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나 싶었다. 왜? 도대체 왜? 마티아스 아드리안 아벨은 자살할 위인이 아니다. 이런 암호 메시지를 보낸 걸 보면 그건 더더욱 확실할 터. 여긴 뭔가 있다, 뭔가 확실하게 있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건 고작 그 정도였다.


전권대사 베릴 클로스테르망, 그 사내의 암시. 뭘 알고,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에르사예즈 공화국이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구태여 언질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머리가 뻥 터지고 뇌가 흐물흐물 녹을 것 같았다. 폭로 기자는 무슨, 이제 그녀는 그저 시류에 휘말린 잎사귀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형편없이 말라 비틀어진.


알레프에 고한다, 마도학자들의 선서이며 그 사람의 입버릇이고 그녀 자신을 옥죄이는 말. 이 시대 이 나라에 그런 것 따위에 관심 두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언제고 드물고 귀하니 알레프니 진리니 하는 말이 이다지 거창한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황금시대에야 이상론자에게 내 줄 자리가 있겠지만 지금 오르데나에선 어림 반푼어치도 없겠지.


테레사는 핑 도는 눈물을 애써 숨기며 일어섰다. 마티아스는 무언가 남겼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 자신에게.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마요르 길을 걷는 내내 주위를 살폈다. 왕실근위대가 언제 나타나 마티아스 아벨 사건의 참고인으로 임의 동행을 요구할지 알 수 없다. 아직 잠잠하고, 누군가 밀고한 정황도 없지만 그네들이 누굴 잡아가겠다며 각적이나 나발 따위 불고 다니진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머잖아 ‘마티아스 아벨의 전 애인’ 명목으로 조사가 들어올 터. 시간은 그 전까지다.


멀다면 말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한 블록 한 블록 불편하고 거북한 길. 「세레네이 영웅 이스마엘 미에르, 레알 오르덴 데 발렌티나 수훈 유력」, 「‘마지막 한 발을 격발할 때 왕태자 전하의 미소가 보였습니다’, 감격스러웠던 간드 클레이 사격 남성 단체 종목 결승전 신승」, 「전통 가는 길을 비추다, 추계 마도 올림픽으로 돌아보는 우리 영광」. 갖가지 헤드라인이 정거장에, 상점에, 가판대에 그득하여 달콤하고 멋들어지게 부르짖었다. 눈을 감아도 들리게, 귀를 막아도 보이게. 사람들은 카페 테라스에서, 흡연 구역에서, 하다못해 부양선 대기열에 늘어서서 그저 흥청거리고 있었다. 비바 오르데나, 오르데나 왕국 만세, 왕태자 전하 천세, 올림피스트에게 영광을, 마도 입국에 빛을, 비바 오르데나……. 저 멀리 에스피나 꼭대기, 모놀리토가 사뭇 제 그림자를 드리우는 줄 모르고. 불행한 호외는 그저 쓰레기처럼 바닥에 뒹굴 뿐 별반 가십거리조차 못 되었다. 마티아스 아벨이 죽었다는데, 자살인지 타살인지 별안간 미심쩍게 갔다는데! 죽은 마도학자 한 명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걸까? 국가가, 왕실이, 전 국민이 목매는 마도입국이 아니던가? 뒤쳐지면 버리고, 쓸모가 다하면 내치는 데 익숙하다지만 그 선봉까지 이렇게 동댕이치면 어쩌자는 말인가? 마법이니 마도니 그 개 같은 마자 돌림말에 독이 있다면 그보다 더한 게 영광이니 명예니 하는 허언 일체에 들어 있는 게 틀림없지 않나……. 차라리 자신이 참 질척하고, 야무지지 못해 엄살한다 믿고 싶었다. 4년 전 제 손으로 끝장 낸 관계를 끝없이 부정하며 꿈이면 꿈마다 사랑해, 안아 줘, 그렇게 안달복달하다 깨기가 무섭게, 아침마다 질질 짜기 바쁜 등신이라 그 꼴이라고 제발 누군가 말해 줬으면 싶었다.


입 닥쳐. 아가리 닥치란 말이야, 테레사 알마스! 발작하는 울음을 씹어 삼키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대로에서 대성통곡이라도 했다간 누구라도 질겁할 것이다. 경찰이라도 부른다면 볼 장 다 본 게 되겠지. 안 될 일이다. 바득바득 이가 갈릴 정도로 입을 처닫은 채,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수리와 포도나무 동상이 눈에 띈 건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왕가의 상징과 왕궁의 심벌, 그런 형상을 두고 마음이 놓이니 참 사람 마음이란 난해한 것이다. 여기다, 콘스티투시온 광장. 바로 여기.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동상에 손을 짚고, 우선 수리의 발톱부터 쓰다듬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며 어디서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푸에르타 데 라 레이나에 비하면 시시한 곳이었다. 평일 오전, 통근시간도 점심시간도 아닌 때라 행인마저 드물어 인근 상인들도 구무적거리며 영 딴청이었다. 테레사는 풍경이나 정경 따위 눈길 한 번 안 주고 휑하니 광장을 가로질렀다. 사각 터 끄트머리로 기단에 나란히 계단이 놓여 있었다. 그 위로 놓인 게 무언지 건너편에서도 훤히 보일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벽면에 쪼로니 놓인 보관함들. 관광객이나 잠깐 쓸 똥통이지만 서글프고 싱숭생숭하여 없던 수전증에 걸린 것 같았다. 일련번호를 따라 1141번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문짝에는 시시한 마도기가 부착되어 있었고, 네 자리의 다이얼이 부직부직 녹슨 채 도드라져 보였다. 네 자리 비밀번호, 네 자리 비밀번호……. 순간 당황하여 손이 우뚝 멎었다.


마티아스 아벨이 누구인가, 또 마도학자란 어떤 치들인가? 이 깡통을 언급하지 않은 건 분명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겠지. 0, 3, 1, 9. 문짝은 쉬이 발깍 열렸다. 제 생일이 정답이라는 게 하 기가 막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나쁜 새끼, 나쁜 새끼, 나쁜 새끼……. 테레사는 소리 없이 꾸역꾸역 구시렁거렸다.


보관함에는 웬 종이가 한아름 들어 있었다. 묶음으로 꽁꽁 봉한 위로 딱 한 장, 수기 문서가 따로 놀았다. 테레사는 그걸 전부 집어들고, 몸을 빼냈다. 도로 닫아 두는 것도 까맣게 잊어 문짝이 덜렁덜렁, 경첩 으츠러지는 비명을 갉작거렸다. 제법 별난 일이었지만 굳이 관심 두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소동이라도 피웠다면 모를 일이지만.


짐은 실제 제법 무거웠고 마음에 얹히기로 그 갑절은 더했다. 퍼질러 앉아 읽어 내리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으니 말이다. 마티아스가 무슨 말을 남겼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이런 비밀스러운 일을 벌인 걸까? 심정이 어떻든, 뻘뻘거리며 잰걸음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이 거리는 무심하고, 위험천만하니 말이다.


집으로 가는 길, 겨우 몇 블록이 스물여덟 여인에게 참 대수롭잖으면서도 고달팠다. 블라우스가 땀복처럼 물먹어, 속옷이 다 비쳐 보일 정도로. 식은땀으로 칠갑하며 걷고 또 걸을 밖에……. 도착할 즈음 종이뭉치는 끌어안은 양쪽, 작은 손아귀며 팔을 따라 둥그렇게 오그라들어 있었다. 발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겨우 움켰다.


현관을 꽝 처닫기가 무섭게, 짐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어슷 걸쳐 있던 종잇장이 팔랑, 테레사의 스타킹 발 위에 내려앉았다. 괴발개발 갈긴 글씨가 너무나도 친숙했다.




테레사, 안녕?


네가 이 편지에 손을 댔다면 이젠 정말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거란 뜻이겠지. 안녕이라면 이상할까, 아니면 그대로 괜찮은 걸까? 그렇게 틀어졌던 사이에 이게 무슨 민폐인가 싶지만 또 우리 관계가 아주 없던 일이 된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 시절이 생각나네. 라 아르모니아 25년 겨울 말이야. 정말 마지막으로 좋았던 그때가…….


아무래도 내가, 내 메시지가, 내 부탁이 널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 오르데나가, 이 대륙 전체가 끔찍한 위험에 빠져 있어 그저 모른다고 나아질 게 없는 상황이라면 이야긴 다르겠지. 지금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진 모르겠어. 다만 내가 이 판국에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너란 것만은 받아들여줄 수 있으면 좋겠어.


테레사, 보관함에 있는 문서를 가능한 빨리 에르사예즈 대사관에 전달해 줘. 아마 ‘오르데나 다이달라이트 산업의 비밀과 위험성에 대한 마도 기술 자료’라고 말하면 될 거야. 그리고 이 나라에서 몸을 피하도록 해. 에르사예즈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더 좋고. 가능하다면 주변 사람한테도 대피를 권해도 좋아. 그 말을 믿어 준다면 말이지.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유언을 남길 사람이 너란 게 참 영광스러운 것 같아. 좋은 여자 말 귓등으로도 안 들은 죄값을 이렇게 치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미안해, 모든 게. 이런 무거운 짐 떠맡긴 것까지 전부 다. 그리고 아직 널 사랑한다는 이야길 해 두고 싶어. 이제 와서 아무 소용없겠지만 그 덕분에 정말 좋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해. 정말로, 진심으로.


그럼 테레사,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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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20.10.13. 23:05
아무래도 마티아스는 영영 안녕인가보군요. 이리스의 생사도 궁금해지는 부분입니다. 연재글은 이런 데에서 끊길 때가 정말 참기 어렵습니다ㅋㅋ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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