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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그의 진실의 그녀 - 4.소년, 이해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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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6 May 1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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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xester

온달은 초조해져 있었다.

오늘따라 수업은 엿가락처럼 늘어졌고, 종래에는 타래엿 장인이 뽑아낸 실엿처럼 변해버렸다. 동시에 온달의 정신줄도 그렇게 변해, 이제는 옆에서 훅 바람만 불어도 끊어질 것처럼 되었다.


그러니까~ 그리하여~ 그런 관계로~ 그러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고 온달의 정신줄을 기어코 끊어보려는 듯 오갑배의 종례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4반 학생들로부터 종례사로 불리는 이 의식은 이미 1학년 전체에 정평이 나 있었다.


“~라는 것이다. 알겠지?”

“““!”””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들한테 하고자 하는 말은-”


학생들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져 나오려는 바로 그때였다.


차렷!”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를 긴장시켰다. 교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차려 자세를 취했다. 심지어 갑배까지도.


경례!”

“““감사합니다!”””


기회는 지금뿐이란 걸 직감한 학생들은 교실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교실은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런 일에 멍해져 있던 갑배는, 아직 세 명의 학생이 남아있는 것을 깨닫고 말했다.


……딴 데로 새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갈 것. 이상.”


갑배가 풀이 죽어 교탁에서 물러났을 때 온달도 허둥대며 일어났다. 그 누구보다도 빨리 교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온달이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했던 건, 선생이 종례사를 끝내기 전에 교실을 나가는 건 전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온달은 종례종결자를 보았다. 강희는 조용히 책가방을 챙기더니 온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얼굴을 내밀며 속삭였다.


오늘, 우리 집으로 와.”

……?”

저녁 같이 먹게.”

……?”


온달은 앵무새 같은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왜라니,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얼굴을 살짝 붉힌 강희는 온달을 지나쳐갔다.


오늘…… 우리 집 비어 있으니까.”


강희가 교실을 나갈 때까지 온달은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에는 자주 저녁을 같이 먹곤 했지만 그건 벌써 옛일이었다. 게다가 우리 집 비어 있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유혹하는 건가?’


. 온달은 실소를 지었다. 그럴 리 없다. 이건 크림빵에 이은 또 다른 함정이다. 무슨 함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라버니, 정말 괜찮으신 것이와요?”


온달은 흠칫 놀라 돌아섰다. 잠시 잊고 있었던 작은 악마가 거기에 있었다.


뭔가 고민하는 것 같더니 다시 히죽거리지 않나…… 소녀는 오라버니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지 심히 염려되와요.”


그렇군. 아직 이게 있었지. 온달은 재빨리 말했다.


괜찮아. 문제없어. 그럼 난 이만.”


경례하듯 손을 눈썹에 갖다 댄 온달은 부리나케 교실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지만 온달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온달은 그때서야 비가 내리는 것을 깨달았다. 비가 올 거란 예보가 없었기에, 온달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돌발강우는 세라하와 여린의 격전으로 인해 대기가 불안정해진 탓이었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세라하와 여린조차도.


맞고 가는 수밖에 없나.’


온달은 혀를 찼다. 집안 사정 어려운 걸 알기에 우산을 살 수는 없었다. 셋방은 영 세입자가 들어올 기미가 없었고, 고사리 손들이 내어놓은 도장 수업료는 생활비와 건물 관리비를 내고 나면 끝이었다.

교복을 최대한 말려 보는 수밖에…… 하고, 현관을 나서려던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소녀에게 우산이 있사와요.”


온달은 놀란 나머지 소매를 잡은 손을 떨쳐버릴 뻔했다. 겨우 충동을 억누르고 돌아보니 루나가 그녀의 원피스와 같은 색 우산을 내밀고 있었다.


같이 쓰고 가는 것이 어떻겠사와요? 소녀가 오라버니의 집까지 같이 가드리겠사와요.”

아니, 괜찮아! 걱정 마! 안녕!”


온달은 재빨리, 그러나 불쾌해하지 않을 정도로 루나의 손을 떼어놓은 다음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뒤따라오는 목소리가 없었고, 그것은 온달의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했다. 그러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려는데-


아얏!”


뭔가가 정수리에 둔탁한 충격을 가했다. 아픈 머리를 감싸며 그 뭔가를 찾아보니, 바닥에 우산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집어든 온달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것은 분명 루나가 갖고 있던 것과 같은 우산이었다. 고급스런 물건으로, 시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색마저 같다면…….

온달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 위까지 빠짐없이. 그러나 루나의 모습은 없었다. 학교 앞 골목길 좌우엔 담장을 허물고 마당을 넓힌 주택들뿐이라 딱히 숨어 있을만한 곳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온달은 섬뜩해졌다. 온달은 우산을 내팽개치고 도망치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러는 대신 이성을 풀가동해 작금의 상황을 이해해보려 했다.

비행기에서 떨어진 물건? 그랬다면 머릴 맞고 멀쩡할 리 없다. 새가 떨어뜨린 물건? 대체 어떤 새가 우산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집 대신 요새라도 지을 셈인가? 인근 주택에 사는 마음씨 좋은 집주인이 비를 맞으며 하교하는 소년이 불쌍해 창문에서 던진 물건?

좋아, 이걸로 하자. 온달은 납득했다. 굳이 우산을 던진 이유는 집주인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다. 루나가 갖고 있던 우산과 똑같은 것은 집주인의 취향이 우연히 루나와 같아서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자 온달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온달은 친절하지만 다소 수줍은 집주인이 선물한 우산을 쓰고 가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 집주인이 살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집에 대고 인사까지 했다.


그나저나.’


성큼성큼 걸어가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집으로 가는 길목 어딘가에서 스토커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를 따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잠복이 유력한 곳은 큰길가에 있는 패스트푸드점 2(전망이 좋으므로), 홍익빌딩 앞(집에는 들어가야 하니까), 그리고 다리 밑.

다리 밑?

육교를 건너려던 온달은 움찔해 멈췄다. 순간적이었지만, 육교 계단을 오르기 직전 계단 아래에서 삐죽 나와 있는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익숙한 뭔가를.

계단 난간에서 고개를 내밀자 프릴 달린 에이프런과 남색 스커트 끝자락이 보였다. 스커트 아래로는 하얀 양말과 갈색 구두가 신겨진 다리가 나와 있었다.

못 본 척 가버릴까. 갈등하던 온달은 결국 계단을 내려왔다. 예상대로 그건 노아였다. 그녀는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자기 다릴 껴안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게다가 흠뻑 젖어 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메말라 죽어가던 풀이 물을 머금고 다시 살아나는 모습 같았다. 노아는 꽃잎 벌어지는 것처럼 눈을 떴다.


온달 님……?”

“‘은 됐고, 여기서 뭐하는 거냐니까?”

미래로 돌아가라고 하셔서요.”

?”

온달 님이 그러셨잖아요. 미래로 돌아가라고요.”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미래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서요. 그래서 여기서 미래가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어요.”

설마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면서?”

.”


스토커라는 거, 장난 아니네. 한숨을 내쉰 온달은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가자.”

가자뇨, 어디로요?”

우리 집으로 가자는 거야.”


온달은 재빨리 덧붙였다.


착각은 하지 마. 어디까지나 비가 그칠 때까지만 있으라는 거니까.”

비가 그친 다음에는요?”

다음에는…….”


어디로 가라고 해야 할지 금방 생각해낼 수 없었던 온달은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건 비가 그친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 일어나.”


노아는 온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온달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자 노아는 도리질했다.


저는 안드로이드니까 괜찮아요. 우산은 온달 님이 쓰세요. 비를 맞아 체온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감기에 걸릴 확률이 높아질 거예요.”

머리만 안 젖으면 돼.”

하지만-”

괜찮다고 했잖아.”


황송해하던 노아는 문득 박수를 쳤다.


,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서 노아는 온달과 팔짱을 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온달은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가까이서 보는 노아는 가슴이 설렐 만큼 예뻤다. 특히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분홍빛 이마며 뺨에 달라붙은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으로 보였다.


온달 님? 심박수 증가 및 체온 상승이 감지되었는데, 괜찮으세요?”


그놈의 안드로이드 흉내만 내지 않으면! 설레던 가슴이 평온을 되찾다 못해 아예 침잠해버렸다. 온달은 팔짱마저 풀어버릴까 했지만 끝에 가선 마음을 돌렸다. 역시 그건 좀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대신 온달은 노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노아는 온달의 빠른 걸음에 보조를 맞춰 종종걸음을 걸었다.

갑작스레 내린 비 탓인지 거리엔 사람이 드물었고, 그건 시장 골목으로 들어설 때까지 계속됐다. 한산해지자 상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TV를 보거나 잡담을 나누거나 고스톱을 치거나 했다. 덕분에 온달은 아침처럼 주목받지 않아도 되었다.

홍익빌딩 3층에 이른 온달은 도장 안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런데 도장 불은 꺼져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중등부 수련이 한창이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온달은 서둘러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옥상에서 본 것은 참상, 그 자체였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바닥에는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지나간 듯한 자국이 나 있었다. 또 불에 그슬린 곳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기도 했다. 집도 마찬가지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집 안에 들어선 온달은 할머니방 문에 A4지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엔 달필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 귀염둥이에게.

집 꼬라지 보면 알겠지만, 네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 살수가 찾아와 일전을 치렀단다.

간만에 강적을 만나 지나치게 진기를 쓰다 보니 그만 내상을 입었지 뭐니.

그래서 하루 정도 운기조식을 해야 할 것 같구나. 그러니 네가 날 대신해서 수련생들한테 연락 좀 해주렴. 내일 하루 쉰다고.

, 살수는 걱정할 것 없다. 혼쭐을 내줬으니 적어도 오늘 하루는 얼씬 하지 않을 거야. 만약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걱정 없단다. 도와줄 친구가 곧 찾아올 테니까, 부디 그 친구하고 사이좋게 지내렴.

그럼 내일 보자꾸나. 어여쁘신 이모가♡♡

 

추신) 나 없다고 멋대로 집안에 여자 끌어들일 생각은 말 것. 남자는 모름지기 세 뿌리를 주의해야 하는 거야. 혀랑 팔다리랑, 그리고 다리 사이에 있는 뿌리를. 알겠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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