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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석의 소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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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석의 소년기사

 

 <서막>

 

 계획은 없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강성윤에게 이 시점에서의 계획을 요구할 순 없었다. 그가 무능하거나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다. 늦은 시간에 마친 학원공부의 피로도 원인은 아니다. 그가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이다. 범인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광경이란 불편한 것이 존재한다.


 장마철의 도래를 유감 없이 증명하는 빗줄기 속에서, 방울나뭇잎으로 몸을 감싼 작은 요정. 나뭇잎 아래 드러나는 여린 몸매의 그림자는 가늘게 떨렸고, 검은 머리카락은 푹 젖어서 나뭇잎에 달라붙어버렸다. 깨끗한 흰 피부는 창백해서 마치 종이 같았다. 그녀의 감긴 두 눈은, 절망 그 자체처럼 보였다.


 생이 후회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인간이 적어도 선택의 순간에는 그나마 가장 좋은 방법을 고르기 때문이다.

 

 


 <1막 - 요정과 터키석의 일상>

 

 요정을 주웠다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카페 <Premier dimanche 프르미에 디망쉬>의 2층은 토요일 저녁까지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과거 시제인 이유는, 그곳이 요정을 모신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성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셨다. 구한 것이 아니라.


 "삭막한 방이야."


 창틀 아래 책장에 앉아, 새침한 표정으로 소년의 방을 혹평한 소녀는 아침 해가 기웃거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년과는 눈을 마주치기 싫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단아한 얼굴까지 갖췄기에 그녀는 잘 만들어진 인형이 창가에 장식된 것처럼 보였다. 웃기는 것은, 그녀가 인형과의 공통점을 평범한 사람들보다 하나 더 공유하고 있단 사실이다.


 그녀의 키는 20cm에도 미치지 못했다.


 적당한 옷을 찾지 못했단 사실이 요정에겐 적지 않은 의식주 감점요인이었다. 물론 성윤은 할 말이 있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방에 8분의 1 크기의 인형을 위한 드레스가, 특히 입어도 피부를 자극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창고에서 찾아낸 누나의 어린 시절 보물들 속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피부를 다 할퀴어 놓을 것 같은 질감의 옷 밖에 없었다.


 설령 옷을 구하더라도, 혼절한 것이나 다름 없던 요정이 직접 옷을 챙겨 입을 순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물기를 닦아내지도 못했다. 결국 성윤이 요정의 몸을 직접 닦고, 한번도 쓰지 않은 손수건으로 둘둘 말아놔야 했다. 정신을 차린 요정이 그 모든 과정을 짐작해내고는 바로 통성명을 거부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성희롱이라면 분명 성희롱이다. 소녀의 나체를 손 안에 쥐고 주무른 꼴이 됐으니.


 "안 봤어."


 방 한복판에 정좌한 성윤은 가까스로 항의했다. 소녀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답했다.


 "시끄러워요. 불가촉천민."


 냉장고에 넣어 버릴까? 성윤은 강력한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소년과 소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소년은 한 건물에 900명의 남자만이 존재하는 건물에서 4년을 살았다. 조숙한 초등학생의 삶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는 소녀를 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소년은 무난한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고프지? 잠깐 기다려."


 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을 나서 복도 끝 계단을 내려가 쪽문을 연 다음 오른쪽으로 반 바퀴를 돌자 익숙한 카페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개시 전의 썰렁함이 오히려 반갑다. 성윤은 냉장고로 달려갔다. 소년의 몫으로 누나가 만들어둔 샌드위치(아침)와 조각 케이크(간식)이 예상대로 존재했다. 사소한 곳에서 일상의 건재함을 확인한 소년은 식기와 수저를 어떻게 조달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 기쁨을 곧 잊었다. 샌드위치는 작게 잘라서 주면 된다. 그럼 케이크는? 접시는 평범해도 좋다. 이 커다란 달콤함을 보면 요정의 기분이 풀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손으로 퍼먹으라고 했다간 뭔가 크게 잘못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숟가락…….”


 가장 작은 차 숟가락도 그녀에겐 공사용 삽 수준일 것이라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참을 고민하던 성윤은 문득 마실 것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애완동물을 처음 키우게 된 인민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번잡하담? 먼저 우유를 확보한 다음, 가장 가느다란 빨대를 고르던 성윤은 문득 가장 굵은 빨대에 시선을 뺏겼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전자레인지로 데운 샌드위치 조각.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본 요정은 성윤이 많은 것을 고려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있을 장소로 책상 위가 아니라 책장을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창가라 햇빛이 들기 때문이다. 손수건 포장지가 엉망으로 뜯겨 널브러진 것을 보면, 소년은 새 손수건들로 그녀의 몸을 닦았다. 책장 아래에는 헤어드라이어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그 자리가 아니라 세면대가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어젯밤 그녀의 몸을 말리고 덥히는데 쓰였음이 분명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와 컵의 높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쌓아놓은 커다란 책들과 그 컵에 꽂힌 요구르트용 빨대, 그리고 숟가락으로 쓰기 위해 오려낸 플라스틱 빨대였다. 그것도 그녀에게는 밥주걱 수준의 크기였지만, 차 숟가락보단 훨씬 작고 쓸만하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성윤의 요청에 요정은 겨우 응했다. 그제야 성윤은 정성이 통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정은 말 없이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씹고 우유를 마셨다. 성윤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옷은 어쨌어?”
 “잃어버렸어요.”


 간단한 즉답이 돌아왔다. 성윤은 어떻게 하면 옷을 잃어버릴 수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빗물에 몸을 씻으려다 옷을 잃어버린 것일까? 성윤은 그게 타당하리라 생각하곤 더 묻지 않으려 했다. 요정에게 어울리는 일 아닌가? 가만. 서울의 비가 그렇게 깨끗했나?


 요정은 성윤이 잘라놓은 샌드위치 조각을 하나만 먹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됐어요.”
 “케이크는?”
 “우선은 씻고 싶군요. 그 다음에 먹죠.”


 역시 오답이었다. 그러나 성윤은 정답을 찾는데 사고를 할애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공황에 빠져버렸다. 욕조는 대체 어떻게 하지? 샴푸도 필요할까?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모습에 요정은 킥 웃어버렸다. 성윤이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미소였다. 소년이 잠깐 동안 공황을 잊은 사이, 요정이 말했다.


 “레이니. 내 이름. 그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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