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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남자와 우주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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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Jun 0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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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위래

  "나는 신이야."
  오만한지고.
  나는 허리를 숙여 소녀를 내려다봤다. 소녀의 표정은 잔뜩 굳어서, 방금 자신이 뱉은 말에 위엄을 더해보고자 하는 듯 했지만, 이리봐도 저리봐도 그냥 어린애였다.
  혹시 내가 오해한 것인가 싶어 검지로 내 신발을 가리켜보았다.
  소녀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냐! 갓! 카미! 귀신 신! 하느님! 알라! 제우스! 오딘! 오시리스! 옥황상제! 아후라 마즈다! FSM! 아자토스! 구글! 할 때 신 말이야!"
  소녀의 큰 목소리는 소녀 자신의 목과 내 귀에게 쌍방으로 데미지를 주었다. 소녀는 말을 마치고 캑캑 거렸고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잠시 데미지를 회복하고 나서야 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장단을 맞춰주기로 결심했다.
  "그래. 꼬마. 네가 신이라고 치자고. 그래서?"
  "신이라고 치는 게 아니라……"
  "그래. 넌 신이 맞아. 미안해. 말이 헛나왔어."
  소녀는 나를 째려보더니 엣헴,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나는 다차원분계 24계지 제 8사분면 성해우주(成偕宇宙)를 다스리는 신이야. 지구우주(地球宇宙) 따위에 비하면 50억년이나 나이가 많은 성숙한 우주지. 하지만 성간 전쟁이 다차원간 전쟁으로 확장되면서 우주합치(宇宙合致)가 일어났어. 그 때문에 십의 삼천 제곱 개의 블랙홀이 우주에 동시 다발적으로 나타났고, 차원폭풍을 불러일으켰지. 엄청 강한 폭풍이었어. 신인 나 까지도 다른 우주로 튕겨나갈 만큼 강했지."
  SF적 이야기가 제법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SF를 좋아했다.
  소녀가 계속 말했다.
  "다차원 방벽으로 몸을 보호한 것 까진 좋았는데, 다른 우주로 튕겨나와버린 게 문제야. 지구우주에서 성해우주로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야말로 우주 미아……"
  나는 중얼거렸다. 세계를 잃어버린 신과 신을 잃어버린 세계. 나름대로 매력있는 이야기다.
  내가 말했다.
  "어떻게 도우면 되는데?"
  "지구우주의 성간 게이트에 반중력자 폭풍을 일으키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문이 열려."
  "그럼 곧장 갈 수 있나?"
  "아냐. 다차원분계 신림성 측정에 따르면 우주의 갯수는 10의 1조 제곱. 차원간 게이트를 탔을 때 가고 싶은 우주로 갈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한 없이 가까워……"
  나는 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고 함선 내에 있는 작전지휘 사령부를 호출했다.
  "성간 게이트의 비밀을 시리우스인들이 알고 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이 우주는 누구의 것인가?"
  "황제 폐하의 것 입니다."
  "그럼 시리우스인들의 기술도 나의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폐하."
  "시리우스인들의 전력과 싸워 이길 확률은?"
  잠시 침묵이 있었다. 하지만 내 물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모든 계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
  목소리가 들려왔다.
  "0.02% 입니다."
  "승산 있는 싸움이로군."
  나는 입술을 핥았다. 황제의 자리를 얻고 성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작전지휘 사령부에서 낸 승산은 결코 0.1% 이상을 넘은 적이 없다. 제로는 나에게 익숙했다.
  사령실의 모든 모니터를 활성화시키자 드넓은 우주가 보였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소녀, 자칭 성해우주의 신.
  내가 말했다.
  "도와주지. 성해우주로 가는 길."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나는 이 소녀를 믿었다.
  누가 감히 제국 황제 앞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나타날 수 있겠나.
  신이 아니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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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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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블레츨리역 지붕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환상을 읽고 자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기관사 노릇을 더 잘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 J.R.R Tolkien, <On Fairy Stories>

comment (2)

Yukinong 10.06.05. 11:06

0.02%의 확률은 서로 어택우주 찍어서 나오는듯 아마.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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