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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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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옛날이야기


 쿠드와 사엘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사방으로 완전히 개방된 시야엔 다 죽은 나무만 듬성듬성 있었고, 눈앞으로는 급경사 아래로 바다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광야가 펼쳐져 있었다. 퍽퍽하고 마르고 건조하고 습기 없는 열대평야였다. 그리고 저 멀리, 검은색 슬라임 같은 것이 구물구물 기어가고 있었다. 

 “뭘까?”

 “뭐가?”

 “저거.”

 “글쎄?" 

 성의 없어. 하면서 키가 작은 사엘이 로킥을 날렸다. 쿠드는 오랜 경험으로 쌓은 기억에 의거해, 그냥 맞았다. 널따랗고 아무것도 없는 암녹색 황야에 트윈테일과 먼지가 '폭' 피어오른다. 피했다간 진짜 못 피하는 게 후속타로 날아올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먼지를 조금 들이마신 건지 켈록거리던 사엘이 뾰족하게 말했다.

 "너, 요새 상당히 자기 입장을 형편 좋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말이지."

 넌 좋게 말하면 계약자고, 나쁘게 말하자면 노예야. 아니, 딱 집어서 노예야. 사역인. 하인. 종. 개. 소모품. 부지깽이. 쓰레기집게. 알아? 하는 둥 뭐라는 둥 듣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어투로 지껄이는걸 흘려보내며, 쿠드는 저 멀리 '뭔가'에 집중한다. 시큰둥하게 대답은 했었지만, 상당히 흥미로웠다. 모르겠다는 점에서 쿠드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음, 사엘.” 

 주절거리던 사엘이 뚱하게 쳐다본다. 요즘 완전 건방지잖아. 라는 눈초리다.

 “네놈, 요즘 완전 건방지잖아.”

 사엘은 쿠드가 빙글거리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눈썹 사이를 찌푸리고 다시 다리에 로킥을 날렸다. 맞았다. 다시 먼지가 '푹' 하고 핀다. 일반인이라면 순식간에 가루가 됐을 힘이었지만, 이미 그 힘에 익숙해진 육체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로리한 사엘은(아프긴 하지만) 귀여웠다. 

 “그래서, 뭔데?”

 “저건 일단, 먹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면 먹어보던가.”

 그야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먹고 싶게 생기지도 않았고.

 “그런데, 왜? 식도락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고 싶은 거야?”

 “……아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쿠드는 ‘단풍’을 꺼내들었다. 날 끝이 밝게 울린다. 분명히 신나하고 있는 걸 거야.

한 걸음, 앞으로 떼어놓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속도로 정체불명의 덩어리에 접근했다. 아무 긴장감도 없었다. 긴장할 만 한 상대 중에 지레 겁먹고 들어갈 만 한 놈은 이제 없었으니까. 그래서 방심했던 걸까, 쿠드의 검을 너무나도 쉽게 '흡수' 해 버리고, 그 등 뒤에서 검은 촉수가 여든 여덟 갈래로 튀어나왔을 때 순간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건. 

 이런 기습은 오히려 신선해서 나쁘지 않았다. 쿠드는 뒤에서 사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대충 짐작하고 난감해졌다.

 "……뭐?"

 덩그러니 남겨진 사엘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을 일에 멍하게 꿈틀거리는 검은 덩어리만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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