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1. 천변만래 아가씨 허리케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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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성.

 아저씨와 같이 왔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깃발이 걸린 성벽이 하늘을 긁듯이 뻗어있는 게, 오랜 역사를 가진 솔브레이스 가문 자체가 나를 찍어 누르려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정말 아저씨에게 기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 돼. 정신 차려야지."

 오늘 아침에 레나에게 받은 팬던트를 한 번 꾹 쥐고 고개를 털어서 부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지웠다. 나는 하품을 하고 있는 문지기에게 말했다.  이런 성 앞에서 삐까한 갑옷을 입고 있는 거에 비하면, 근무태도는 영 아니었다.

 "센 문트 센트레비입니다. 헨나 아가씨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아앙. 당신이 이번에 온다던 그 사람인가."

 "예."

 문지기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뭐, 뭐야?

 "흐음. 뭐. 내가 알 바 아니지. 통과."

 "예에."

 너무 쉽게 들여보내주는 거 아냐? 좀 떨떠름하게 지나가자 문지기가 내 뒤로 작게 말해줬다.

 "잘 버텨보라고. 마흔 네 번째."

 "네?"

 "아냐."

 뭐야?

 성 안으로 들어가자 나의 불안감은 더해졌다. 시종이라는 사람에게 안내되어 가는 동안, 주변의 메이드나 하인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저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헨나 아가씨의 방입니다."

 "네? 왜요?"

 "그리 명을 받았으니까요."

 나는 여기에 과자 만들러 온 거 아니었나? 먼저 얼굴부터 익혀야 하는 건가?

 "아가씨를 뵙기 전에 몇 가지 알아둘 게 있습니다. 한 번만 말 하겠습니다. 첫째. 헨나 아가씨께서 하는 일에 의문을 가지지 말 것. 둘째. 헨나  아가씨께서 하시는 일을 입 밖으로 내지 말 것. 셋째. 도망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도망? 아니 이봐요, 뭘 하길래 지금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까?"

 "가 보면 알게 됩니다."

 "싫어요. 나는 여기에 과자를 만들러 온 거지, 이런 이상한 설명을 들으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시종은 한숨을 쉬더니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그래 이건 이상한 눈이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는 눈이다. 측은함과 갑갑함과 동정과 분노와 짜증과 지겨움 등등이 명백하게 섞인 눈빛 따위!

 "이제 당신은 여기서 나가지 못합니다."

 "……뭐?"

 "당신이 이 성의 경비를 뚫고 나갈 수 있고, 당신이 일하던 곳의 식구들을 영주님의 사병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면 탈출하세요."

 "지금 무슨 소리야!"

 "반대로, 위의 세 가지만 잘 지킨다면 그럭저럭 잘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서로에게."

 "웃기지마. 아무리 영주의 딸이라지만 이건 범죄야!"

 내가 시종의 어깨를 잡으려 하자, 시종은 가볍게 내 손을 피하고는 뒤돌아서 내 목에 차가운 것을 갖다 댔다. 손가락만한 비수였다.

 "그래서요?"

 "아, 아니 그렇다구요."

 "다 왔습니다."

 시종은 비수를 깔끔하게 품속으로 집어넣고, 내 옷을 가다듬어주고, 자기 옷도 정리하더니 내가 왔다고 알렸다. 문 안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종은 문을 열고 나를 밀어 넣었다.

 "들어가세요."

 문이 열리고, 안의 풍경이 보였다. 약한 상아색을 띄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사엘께서(이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존칭인가 싶다.) 한 손에 부채를 든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 의자만 해도 우리 가게 한 달 치 빵은 다 살 수 있지 않을까?  볕이 잘 드는 하얗고 금색으로 치장된 방은 혼자 지내기엔 굉장히 넓었지만, 사엘께서 있기엔 좁고 초라해 보였다. 정말 귀족들은 다 이렇게 엄청난 건가?

 "좋아. 당신들은 물러가도 좋아요."

 "예."

 안에 있던 시녀 둘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침묵이 흘렀다.

 "쿠드."

 "예, 저 말입니까?"

 "그래. 너."

 "아가씨, 제 이름은-"

 아가씨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사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아 죄송합니다."

 온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흠. 아가씨……아가씨라……이것도 괜찮나? 흠. 당분간은 좋을지도. 쿠드. 명칭은 뭐 알아서 하도록 해. 헨나라고 하지만 않으면 돼."

 "무슨 사정이 있는 겁니까?"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귀족 사정에 다짜고짜 발을 들이밀다니!

 "아니."

 어-

 예상외로 아가씨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너는 지금부터 쿠드야."

 "저기……갑자기 이름을 바꾸라고 하셔도 좀……."

 "내가 사엘. 네가 쿠드. 됐지? 오늘부터 너에게 내려진 새 이름이야.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전 이름이지."

 "예전 이름이요?"

 "그래. 네가 태어나기 전의 이름."

 "예에에?"

 아가씨는 연극이라도 하듯이 하늘을 향해 말했다.

 "내가 삼백년쯤 전에 너한테 준 이름이야. 정말이지, 맘대로 이름을 바꿔버리면 어떡해?"

 아. 그 시종이 내건 조건이 조금 이해되는 것 같았다. 이 아가씨. 정신이 좀 이상한 게요. 어딘가 나사가 빠졌다. 옆에 있다가 좋은 꼴 볼 것 같지 않아.

 "아무튼."

 아가씨가 일어나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이번엔 여태까지 봤던 기상 높은 행진이 아니라, 드레스 자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걸음이었다. 

 저기 아가씨, 왜 그렇게 은근한 표정을 짓고 계시는 건가요? 뭔가 그렇게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보여주면 좀 안 좋은뎁쇼.

 "드디어 만났구나. 정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칠십년이나 넘게 찾아다닌 보람이 드디어 의미를 갖게 된 거야."

 아가씨가 나를 꾹 안아왔다.

 뭐?

 안아?

 "저, 저저저저 아가씨, 이건 무슨."

 이래도 괜찮은 거야? 신분격차가 어쩌구 할 건 없지만 다짜고짜 고용인한테 이렇게 밀착해서는 아가씨의 입장이라는 건? 스캔들에 휘말릴 거면 혼자 휩쓸리면 될 텐데 나까지 끌어들이는 거냐.

 "뭐? 이 몸이 거진 팔십 년 만에 대 서비스를 해 주는데 반응이 그게 뭐야?"

 "아니 그게 이러시면 위험한 게."

 "위험?……헤엥. 뭐가 위험한데? 이런 거?"

 아가씨가 내 복부에 가슴께를 눌러왔다. 옷에 가려있던 거였던 건가, 생각보다 가슴 있잖아! 역시 잘 먹고 자란 아가씨는 이렇게 어려서부터 발육이 잘 되는 건가.

 "그 가……가슴이라던가?"

 "가슴이 왜?"

 "저기……."

 "가슴이 어떤데?"

 아가씨가 몸을 더더욱 밀착해왔다. 아니 이러면 정말 위험해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온갖 방면에서 위기를 맞게 되는 게 

 "신선하네에. 한 번씩 이런 것도 좋구나아."

 아가씨는 완전히 짓궂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안은 채 내 등을 슬슬 쓰다듬었다.

 으, 으으으, 안 돼. 상대는 어린아이야! 참아라 센. 너는 이러면 안 돼. 나한테는 레나가 있다던가 하는 문제를 벗어나서 이러면 안 돼!  여기 있는 두 사람은 청년과 애라고!

 "말을 안 해주네? 몸한테 물어볼까?"

 아가씨는 내 가슴에 귀를 댔다. 머리카락에서 과일향이 퍼지고, 배에는 말랑한 게 닿아서 문질문질 거리고, 가는 손가락이 등을 더듬고, 드레스 자락이 내 다리 사이로 오

 "오으, 아아아아으아."

 안 돼. 제발?!

 "아."


 내 분신아.

 이러면 안 돼.

 제발.


 아가씨는 딱딱한 것이 닿는 걸 느낀 건지 아래를 쳐다보곤 얼굴을 화아아아악 붉히고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이, 이거……."

 "아, 아니 아가씨, 이건 뭐랄까, 그 에, 제 지병으로써."

 내 반응을 본 아가씨는 얼굴을 빨갛게 한 채 사악하게 웃었다. 아가씨의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후후후후후후"

 "에 그……."

 "귀엽네."

 뭐가? 누가? 어디가?

 "하지만 안 돼. 서비스도 이걸로 끝."

 아가씨는 침대로 걸어가서 폴싹 앉고는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으응. 정말이지,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았는데 말이지."

 그러고는 침대에 푹. 누웠다.

 "막상 만나니까 아무래도 상관없게 됐어. 뭐 해? 앉아."

 나는 아직도 좀 전의 쇼킹한 경험에 온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처 있었다. 조숙해. 너무나도 조숙해! 저 아가씨 아직 술도 담배도 하면 안 되는 아니, 아직 어린애 아냐? 숙녀와 유녀의 중간단계정도 되는.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

 "쿠드? 자극이 너무 셌나?"

 "핫. 아가씨, 방금 전은 무슨."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너 예전에는 자꾸 피해버렸고."

 "네?"

 "됐어. 와서 앉아."

 "와서 앉으라니……."

 "여기."

 침대요?

 귀족 아가씨랑, 한 침대에 있어요? 한 분은 조신하지 못하게 누워있는데요?

 "나 참. 아무도 안 오니까 빨리 와."

 내가 쭈삣쭈삣 다가가자, 아가씨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내 팔을 잡아 억지로 앉히곤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살짝 올라간 드레스 아래로 다리가 보이고, 팔을 뒤로 뻗어 있어서, 허리 라인이 머리카락을 배경으로 확실하게 눈에 띄는 게

 가 아니지! 난 뭘 보고 있는 거야?

 "좀 더 봐도 돼. 무려 칠십 육년 하고도 칠 개월 만이잖아?"

 "아닙니다!"

 "어? 내가 날짜 잘못 셌나?"

 그걸 부정한 건 아니었지만, 자꾸 말려들어가는 페이스에 나는 입을 닫았다.

 "그나저나 아무것도 기억 못한다니, 큰일이네."

 "기억이요?"

 "그래. 무리하게 세계를 뛰어넘느라 에너지를 너무 소모해버렸어. 네 힘이라도 보태서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잖아."

 "저기, 어디로 돌아간다는 건가요?"

 "지구. 마계. 신대륙."

 "네?"

 "됐어. 내가 찬찬히 설명해 줄게."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아가씨는 고래를 통틀어 대적할 자가 몇 없는 희대의 마녀였다. 그리고 나는 삼백년 전에 아가씨가 산하로 들인 몇 안 되는 종 중 하나였고, 주인의 명성에 걸맞은 강대한 힘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엄청나게 긴 수명마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할 짓 이라고는 거의 다 해서, 별 이유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중에 이상한 걸 발견했고, 내가 그걸 건드린 순간 나는 슈욱 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해 버렸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세계를 뛰어넘을 순 없는 노릇, 내 피륙은 산산이 흩어지고, 혼만 옮겨져 다시 태어나버렸다! 나는 기억이고 힘이고 깡그리 잃어버린 채 평범한 삶을 이어갔다.

 반면, 아가씨는 두 눈 뜨고 부하를 잃은 게 기가 막혀서 '이상한 것' 의 잔해를 조사하다 우연찮게 힘으로 신계의 입구를 여는 무지막지한 짓을 해 버렸단다. 거기다 또 웃긴 게, 신이라는 게 알고 보니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아니라 각 세계에서 뽑혀온 자원봉사자 같은 것이었다. 무력만을 비교하자면, 신계에 있는 백 육십억 신 전부가 덤벼도 졸라 짱 쎈 아가씨에게 비할 게 못 됐다.

 그런고로, 진짜 (마)신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이 졸라 짱 쎈 아가씨는 백 육십억 신들을 죄다 굴복시키고, 입맛에 맞게 세계의 문을 열고는 육신을 유지한 채 거기로 투신했다. 그런데 그 세계에 내가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쥐 잡듯 뒤지는 수밖에 없었는데, 아가씨는 그리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지, 아무리 극강한 아가씨라도 나를 찾는 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를 넘나들기를 수차례, 신계는 논갈이하듯이 뒤집어엎어지고, 그 아가씨조차 후유증으로 힘을 쭉쭉 엔트로피화 시켜갔다.

 그래서 지금은 능력을 거의 잃은 상태. 사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아가씨는 이번에는 나를 만날 걸 확신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 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 어린아이 같은 육신은 풀길이 없는 저주 때문이라 힘의 유무와는 크게 상관없는 것이라 

 "카더라……."

 "정확해. 잘 이해했네! 역시 쿠드. 이백년간 끌고 다닌 게 헛짓은 아니었어."

 "아가씨."

 "왜?"

 "아무래도 소설을 너무 많-커헉?!"

 아가씨는 누운 채 다리만 날려 내 얼굴에 킥을 먹였다.

 내가 얼굴을 싸매고 있는 사이 자기도 아픈지 정강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소설이라고 하지 마! 진심으로 하는 소리란 말이다!"

 "그렇지만 아가씨. 아무리 마법이 있고 마술이 있다 해도 그런 우주적인 이야기는 너무 시대착오적인데요. 뭣보다 신이 백 육십억이나 있다는 것부터가 좀."

 "으으으으으윽."

 아가씨는 열이 올라서 침대에서 격하게 뒹굴뒹굴거렸다. 지금 와서 보니 처음에 갖고 있던 기품이라던가 하는 건 물에 물 탄 듯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좋아! 그럼 내가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주겠어."

 아가씨는 화장대로 가서는 주섬주섬 머리끈을 두 개 가져왔다. 그러고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중 반을 옆으로 빼서 아래쪽을 머리끈으로 묶고, 다른 쪽 머리도

 잠깐, 설마

 "아가씨, 지금 설마 뭘 하려는 겁니까?"

 "뭐긴. 알잖아?"

 "아가씨 아무리 아가씨라도 그건 안 됩니다!"

 "너만 말 안 하면 괜찮아."

 "그런 차원이 아니잖아요! 아가씨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지금 하려는 걸 정말 할 수 있는 겁니까?"

 "시끄러! 내가 보기엔 이 곳 놈들이 이상한 거야!"

 "아가씨, 진심으로 하는 충언입니다. 지금 하시려는 건 말도 안 돼요."

 아가씨는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가씨 쪽이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좀 전에 늘어놓는 건 그저 소설을 많이 읽은 여자아이의 망상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지금 이건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무려-

 트윈테일을 하려 하다니!


 방 안의 소란을 듣고 메이드들이 문을 빼꼼히 연 게 이때쯤이었다. 막 나머지 머리도 묶어버리려는 아가씨를 본 그네들은 경악성을 지르더니 우르르 아가씨를 덮쳤다.

 "잠깐, 뭐하는 짓이냐!" 

 아가씨는 호통을 쳤지만, 위엄을 차릴 새도 없이 필사적으로 앵겨드는 무게에 바닥에 시녀들과 볼썽사납게 한 덩어리가 되어서 뒹굴었다. 눈앞에 단 십 초 만에 만들어진 엄청난 덩어리는 괴로워하는 신음과 한숨과 탄식이나 울먹거리는 목소리 등등을 내고 있었다. 솔직히 좀 무섭다고 생각하면서 멍하게 그 진풍경을 보고 있는 나를 좀 전에 봤던 시종이 조용히 데리고 나왔다. 뒤에선 멀어져서 들리지 않을 때까지 아가씨가 지르는 고함이나, 장탄식, 짜부러져 눌린 비명 같은 게 들려왔다.

 나와 시종은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끊임없이 걸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그간에 한 마디의 대화도 일어나진 않았다. 아마 내가 먼저 말하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저기, 설명을 좀 해 주실래요?"

 "……분명히 세 가지를 지키겠다고 했지요."

 그러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이봐요, 설마 그래서 나한테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다-이런 겁니까?"

 시종은 걸음을 나를 봤다. 그러고 보니 어느 샌가 인적이 없는 깊숙한 어딘가에 와 있었다. 빈틈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눈가에 피로가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시종은 한숨을 가볍게 쉬고는 내게 대략적인 설을 풀었다.

 "아가씨는 최근 몇 년 간 조금 이상해지셨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영주님의 따님 헨나 아카드 솔브레이스는 10년 전부터 주목받아온, 나라에 둘도 없는 보물일 정도로 빛나는 존재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아름다움, 학식과 재기, 지혜와 담력, 위엄과 기품, 자애 도덕 등등 대략 모든 걸 갖춘 영애였다. 비록 어렸지만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을 빼앗기고, 아무도 그녀를 적으로 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성장이 빨랐던 탓일까, 그 뒤로 아가씨의 몸은 성장하지 않았다. 그게 어떤 저주인가 병인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유일한 결점이 된 아가씨는 이런저런 전부터 관심이 있던 마도에 빠져들다 못해 탐닉하기에 이르렀고, 최근엔 급기야 차마 외부에 발설할 수 없는 기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자기 눈에 든 남자를 성으로 데려와서 이리저리 무언가를 실험(실험?)해 보고, 흥미를 잃으면 헌신짝처럼 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수백 년 전에 뒀던 자신의 종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다시는 얼굴을 들지 못할 가십으로 발전할 만한 일이었지만, 아가씨는 그 외에는 여전히 완벽했다.  

 오히려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황족이라고 해도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역시 그 위압감은 보통 비범한 게 아니었구나.

 그 정도까지는 영주님의 아량으로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게……그 트윈테일 말입니까."

 "맞습니다. 여느 때처럼 남자를 시험해보던 아가씨는 무슨 뜻에선지 그 악마의 형상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든 무마했지만,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언젠가는 밖으로 말이 새어나가겠지요."

 "아가씨와 대화는 해 봤어요?"

 "물론 해 봤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지요."

 "혹시 그 세계를 뛰어넘었다던가 하는……."

 맞습니다. 그 외에도 치부라 할 것은 있지만, 당신에게 지금 알려줄 만 한 건 아니군요. 어쨌든 그런 이유로 아가씨에 대해선 모두가 쉬쉬하게 되고, 외부에서 아가씨는 조금씩 잊혀져 갔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도무지 저주가 걸렸다는 꼬투리조차 잡을 수 없으니…….

 나는 배정받은 방의 침대에 누워서 시종에게 들은 말을 곱씹었다.

 "마왕의 저주인가."

 누가 무슨 머리를 하고 다니든 그건 알 바가 아니었지만, 모든 지방에서 배척받는 헤어스타일이 있었다. 배척받는다기보단 금기되고 있었다.

 트윈테일. 

 그 모양은 마왕의 뿔을 상징한다고 한다. 예전, 전 종족을 상대로 침략을 시도했던 마왕이 변신했을 때도 트윈테일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 역시 그 저주스러운 머리를 하고 입에 담기 힘든 짓을 저지르고 다녔다고 한다. 트윈테일은 단순한 머리를 묶는 방식이 아닌, 마왕의 힘을 빌린다는 직접적인 표시이며, 마왕의 세력이 사라지되 그 피해가 아직도 채 복구되지 않은 이 세상에서 그 표식은 당장 공식 재판에 회부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꺼려졌다.

 하지만 나에게 다짜고짜 그걸 보여주려 하다니, 아가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혹시 그게 그 결정적인 증거라는 거였던 건가.

 "설마. 내가 왜 그런 위험한 거랑 관련되어 있겠어?" 

 아무도 듣지 않는 방 안에서 나는 일부러 소리 내서 말해봤다. 당연히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젠장. 이럴 땐 일단 자고 보는 거다. 나는 좀 전부터 눈에 밟히는 아가씨의 모습을 몰아내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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