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2. 아가씨와 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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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가씨와 밤


 다음 날 눈을 뜬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메이드들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쿠드 씨."

 "네?"

 "이쪽으로 오시죠."

 가게에서 몸에 밴 이른 기상이간보다 훨씬 전에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은 메이드들은, 나를 능숙하게 침대에서 끌어내려오더니 옷을 훌훌 벗기기 시작했다. 뭐냐, 깨자마자 이 전개는?

 "아잌, 잠깐 이것들 보세요, 왜 이러십니까?!"

 "씻어야죠."

 왜 숨을 쉬어야 하냐는 질문을 받은 것 같은 메이드의 태도였다.

 "제가 알아서 씻을게요." 

 내가 옷을 여미면서 포획망을 뚫으려 하자 메이드들은 신속정확하게 내 퇴로를 막았다. 그 중 연두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글래머러스한 메이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근래 일반시민의 세신과정이 어떠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쿠드 씨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저희들이 감독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겉보기엔 청순하면서 다이너마이트하다는 언밸런스한 매력이 메이드복 위로 튀어나올 듯 했지만, 목소리는 등에서 차가운 연기가 풀풀 나는 것 같이 드라이했다.

 감독이라니, 즉 내가 적나라하게 씻고 있으면 그걸 찬찬히 보면서 어딜 어떻게 씻으라고 말 해 줄 셈이란 이야기야?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성희롱이잖아!"

 "저흰 당신을 희롱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 얼른 들어가 주세요!" 

 메이드 셋이 나를 부둥켜안고는 이곳저곳을 잡아 욕실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잠결도 잠결이라 힘이 안 들어가는 것도 있었지만, 메이드들이 육탄공격을 해 오자 내 분신이 아침의 정기운동을 하려고 해서 도저히 집중이 안 되었다. 특히 거기 양갈래 거유 누님! 가슴을 그렇게 누르지 마!

 "뭐 하십니까? 빨리 씻으세요."

 결국 나를 욕실 안으로 밀어 넣은 메이드들은 문을 등지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전부터 나를 계속 곤란하게 만드는 저 누님의, 돌멩이를 보는 것 같은 눈은 그냥 넘기더라도, 그 뒤에 있는 둘은 벌건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희롱할 기색이 완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씻으란 거예요……." 

 잠정적으로 소대장 메이드라고 마킹해둔 글래머 누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팔을 걷어붙였다.

 "결국 이렇군요. 됐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희가 씻겨드리겠습니다."

 뒤에 있는 둘 중 짙푸른 머리를 하나로 길게 묶은 메이드가 홍조를 띄며 탄식했다.

 "아, 역시 저희가 씻겨드려야 하는 건가요? 아아아, 어쩔 수 없네." 

 나머지 한 명인 안경을 쓴 견인족 메이드가 콧김을 뿜었다.

 "선배, 정말 어-쩔 수 없는데 씻겨드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히히히."

 당신 둘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이봐! 오지 마! 그만! 벗기지 말라니까!"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 메이드는 나를 붙들고, 훌렁 벗기고, 아아, 결국 아침운동중인 내 존슨을 발견하고, 둘은 묘한 함성을 지르고, 한 명은 그게 어쨌냐는 듯 무덤덤하게 나한테 물을 끼얹고, 그 태도에 나는 나름 충격을 받고, 그 여파로 내 죤슨이 자신감을 잃고, 둘은 아쉬운 함성을 지르고, 비누칠 당하고 보도 듣도 못한 걸 뿌리고 바르고-

 …….

 어쨌든 그럭저럭 순탄하게 몸은 씻을 수 있었다. 몸은.

 "쿠드 씨, 씻기고 입혀 놓으니까 모양새가 꽤 나는데요, 선배?"

 견인족 메이드가 반짝반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네요. 아침부터 셋이 달라붙은 보람이 있어요."

 "덕분에 난 평생 갈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지만요!"

 "남자가 몸을 보이는 걸 뭘 그렇게 창피하게 여기세요?"

 "그래요! 근면함으로 단련된 남성미는 자랑해도 좋아요. 거기다 쿠드씨는 크기나 경도가 평균이니까 자신을 가져요!"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실론, 사론, 의미 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쿠드를 데리고 오세요."

 "네-"

 이야기를 끊어준 건 좋은데, 의미 없는 이야기라고 단언해버리니 기분이 참 거시기하다.

 "아, 그런데 왜 절 보고 쿠드라고 하는 거죠?"

 "경어는 안 써도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선 시종장에게 물어보세요."

 "시종장?"

 "어제 당신을 인솔한 사람입니다."

 "아. 그 협박인……."

 마음의 무게추가 또 어느 한쪽으로 무거워졌다.

 아가씨가 기다린다는 이유로 정말 간단히 식사를 하고 문을 열자 시종장은 바로 방문 앞에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다린 냅킨처럼 서 있었다. 시종장이란 사람이 이렇게 한가롭게 대기하고 있어도 되는 거야?

 "지금 당신은 꽤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까요."

 따라오시죠. 라는 말에 홀리듯이 뒤를 쫒아갔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었지만, 오늘 다시 보니 영주성은 굉장히, 엄청, 어마어마하게 사치스러웠다. 지금 밟고 있는 복도의 재질과 융단부터 시작해서 모서리, 장식장, 가구, 장식, 벽, 그림, 창틀, 창문, 기둥, 천장과 램프, 샹들리에 등등 심미안이 없어도 비싸 보인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게 되어 있었다.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난거지? 세금으로는 충당이 안 될 것 같은데. 사실 그런 의문은 지금 하등 필요하지 않았다.

 "저기, 왜 날 쿠드라고 부르는 겁니까?"

 "어제 아가씨께서 그렇게 명했습니다."

 "나한테는 센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만."

 "이명이라고 생각하시죠."

 "……어제는 협박으로 못 나가게 하더니 이제는 내 이름마저 맘대로 붙인다고?"

 시종장이 돌아서서 내 눈을 보고 말했다.

 "당신이 센인지 쿠드 인지 별 상관없습니다. 다만 아가씨께서 당신을 쿠드라고 하는 동안 사역인인 우리도 당신을 그리 부를 뿐입니다. 나중에 이 성을 나갈 땐 당신이 원해도 쿠드란 이름을 쓰지 못할 테니 그 때 마음껏 본명을 쓰세요."

 "이런 짓을 마흔 네 번이나 하고 용케도 여태 안 들켰군."

 내가 정확하게 짚은 건지 시종장은 잠시 경직되더니 휙 등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들은 왜 다 그 아가씨 좋을 대로 하는 거야? 너희는 돈만 벌면 된다 이거야? 잘리는 게 그렇게 무섭나? 요즘 그렇게 경기가 안 좋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당신에게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헨나 아가씨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럼 더더욱 말려야지."

 시종장이 혀를 찼다. 

 우리는 별 대화 없이 어제 소동이 일었던 그 방 앞에 다다랐다. 시종장은 문 앞에서 잠시 등을 돌린 채 그대로 서있더니 입을 뗐다.

 "아가씨는 당분간만이라도 당신을 누구보다도 신뢰하실 겁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것을 허락해 주실 겁니다. 아가씨의 정식적인 명령이라면, 아직도 이 안에서 효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 참 굉장하네.

 "물론 그건 당신의 운이니 그 권리를 누리는 것을 뭐라 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적정한 한도란 게 있는 법입니다. 만약 그 선을 넘기고 방약무인하게 군다면-"

 뒤돌아서있는 시종장의 등에서 에서 푸른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얼마나 살뚝한지 뺨에 닿으니까 피가 나는 것 같은 느낌도 드네요.

 '어떻게 피가 나는 거야??!? 지금 이 해초 같은 게 닿으니까 면도날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아가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겁니다.

 나는 굳어서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서 뭉개진 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고아출신으로 지금까지 내 손으로 일해서 살아온 사람이야. 어느 날 뚝 떨어진 권력은 쓰고 싶지 않아."

 "그 말 기억해 두지요" 

 정답이었던 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퍼런 오오라가 사라졌다. 시종장이 돌아서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충고를 하나 하지요. 아가씨에게, 진심으로 충의를 느끼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아가씨는 앞으로 큰일을 하셔야 할 몸입니다."

 "풋."

 진심으로 충의? 억지로 잡아와서는 일반인이 체험 못 할 스펙타클한 일일 경험을 시켜주고 있는데 충성심을 느끼게 되겠냐? 내가 변태냐? M?

 "아니, 미안, 비웃는 게 아니고……."

 "됐습니다. 보아하니 얼마 안 가 쫓겨날 게 뻔하니까. 빨리 들어가시죠."

 "아. 하나만 물어봅시다."

 "뭡니까?"

 "당신은 이름이 뭐죠? 계속 시종장이라고 부르긴 뭐하네요."

 시종장은 잠시 두 눈을 끔뻑거리더니

 "시종장으로 됐습니다." 

 라는 말을 해 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가씨는 그 긴 머리를 몽땅 틀어 올린 채였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머리는 혹시 풀려고 한다 해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보였다. 아가씨는 뚱한 표정으로 어제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풀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는 뭔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이제야 왔어! 기억을 잃은 몸인데도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역시 배짱이 좋다니까.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처음 만났을 때 죽음이 어쩌구 하면서 삶에 달관한 것 같이 재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땐 아무리 종이었다지만 솔직히 목을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용모에 안 어울리게 흉악한 소리를 하는 아가씨였다.

 "뭐, 늦게 온 건 잘 차려입고 왔으니 용서해줄게. 이런 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도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귀염성이라고는 지옥에 맡겨두고 온 것 같은 녀석이 이렇게 어리벙벙하게 있는 꼴이라니."

 흥흥흥흥흥, 하며 아가씨는 방 안에서 혼자 들떠서는, 뭐 그래봐야 둘밖에 없었지만, 선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내가 알지 못할 소리를 했다. 백두산이 폭발하고 베네치아 연안에 홍수가 어쩌구. 나는 입구에 멀뚱히 선 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 멀쩡한 방에서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고 있을 게 아니었네. 앉아." 

 아가씨는 고풍스럽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앉으라고 해도, 여긴 아가씨만을 위한 방이었다. 외간 남자가 들어와서 있을 만한 곳은 침대 말곤 없어보였다.

 "에, 아가씨. 어디에 앉으면 될까요?"

 아가씨도 그 사실을 이제야 눈치 챈 건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그렇구나. 음. 바닥에 앉지 그래?" 

 내가 애완동물이냐!

 "뭐야, 어제처럼 침대가 좋았다던가 그런 건가? 쿠드 네놈은 생각보다 색욕에 피라미터가 높았구나."

 내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자 아가씨는 좀 김이 샌 듯했다.

 "됐어. 농담에 대답도 제대로 못 하는 건 그대로잖아."

 아가씨는 의자를 하나 더 들여오게 해서, 창문 앞에 있는 작은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소녀틱한(그리고 삐까번쩍한) 테이블에 앉아 창문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내 눈망울이 커지고 눈동자에 별모양이 생길 것 같았다. 점점 불길한 상상이 확신처럼 굳어갈 때 아가씨가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그래, 간밤에 자신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봤어?"

 "생각하고 자시고, 저는 센입니다."

 "센이 아니라고 한 적은 없는데. 센이자 쿠드지."

 "아니, 그 아가씨. 환생이 있는지 없는지 알 바는 아니지만, 혹시 내가 환생을 한 거라면 예전의 저는 이미 죽은 몸 아닙니까?"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죽은 사람을 찾을 곳은 여기가 아니고 자기 추억 속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크아, 명언이다!

 "그건 좀 틀린 말이야."

 "?"

 "쿠드 넌 비정상적으로 혼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사실 죽었다고 말하긴 애매한 상태. 말 그대로 혼만 뽑혀나가서 덧입혀진 상태지. 말하자면 혼이 몇 사람을 경유했는데 본인이 기억을 못 할 뿐인 거야. 그걸 두고 죽었다고 방치할 순 없는 것 아닌가?"

 "그건 아가씨 사정 아닙니까."

 "그래. 내 사정이지."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한 전 어떻겠습니까?"

 "오랜 기간 헤어진 주인을 만나서 기쁘지 않을까?"

 "그러니까 왜 내 주인이 아가씨냐고오오오오! 그 쿠드란 놈은 무슨 계약을 했길래 죽어서도 채무자처럼 쫓겨 다녀야 하는 겁니까? 무슨 지갑도 아니고, 툭툭 치면 툭툭 나오는 그런 겁니까!"

 나는 '지갑'이라는 단어를 말 할 때쯤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하던 말을 중간에 끊을 수도 없는지라 일단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딱히 꿀릴 것도 없어! 존댓말도 했고. 암. 그렇지? 시종장의 퍼런 오라나 비수에 찔려 죽거나, 이 아가씨가 '사형' 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겠지?

 "그건……네가 아직 기억을 못 찾아서 그런 거겠지! 너는 그 하인이긴 했지만, 일반적인 하인이 아니었다고 할까. 음, 아무튼 그랬어!"

 "네에?"

 "그런 게 있다니까! 네가 기억만 돌아오면 모든 게 이해될 것 아냐?"

 내 목숨을 보전한 건 좋았지만, 도무지 '나=쿠드'라는 전제조건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답답한 아가씨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주워들었던 말을 쉽게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마흔 명 정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다 아닌 것 같으니 내버렸습니까."

 내 말을 들은 아가씨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쓸데없는 말을 듣고 온 모양이구나. 시종장이 말 해 줬겠지? 그 사람은 요즘 주제도 모르고 참견이 심하니까. 이번엔 뭐라고 하더냐?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과대망상 환자? 성장이 멈춰서 악마와 계약한 멍청이?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 아, 그래. 남자를 불러다가 음욕을 채우는 갈보라더냐?"

 예상치 못한 아가씨의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시종장은 그런 말들까지 해 왔던 건가?

 "전부터 나한테 이상한 기대를 하는 것 같더니 요즘은 도가 심하구나. 설마 쿠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아가씨는 테이블 건너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런 말은 들은 적도 없어요. 것보다, 나이도 어린 아가씨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나는 오백 년도 더 살았어!" 

 열다섯쯤 된 아가씨가 다섯 세기를 살았다니 기분이 묘했다.

 "……나이테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좀 보여주시지 않을래요?"

 아가씨는 전혀 자기의 말이 먹히지 않는 게 분한지, 뜨거운 차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찬 물도 먹었다.

 "이상하네, 씨알도 안 먹힐 줄은 몰랐는데."

 뭘 근거로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건지 감이 안 잡힌다. 나는 반복적으로 찻잔을 입에 갖다 댔다. 이 성에서 마음에 드는 거라고 하면 푹신한 베개와 이 찻물 정도였다. 아가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쿠드가 여기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혀 모르잖아."

 "그야 그렇겠죠."

 "말해봐." 

 일방적인 명령 같은 어조에 나는 속에서 뭔가 꿈틀, 하고 올라와서 반박했다. 인권과 시민권과 자유의지에 입각-했다고 여기고 싶은 나의 항변을 아가씨는 이렇게 일축했다.

 "그러면 어제하던 불장난이라도 계속 할까?"

 그건 그것대로 재밌겠네. 하고 입을 지익 찢으며 웃는 아가씨의 모습에, 나는 얌전히 내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내 이야기라 해 봐야 그리 별 건 없긴 했다. 칠 년 전까지만 해도 고아였고, 뒷골목에서 거지처럼 생활한 게 전부였다. 마왕전쟁 이후엔 그런 고아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 같은 아이는 꽤 많이 있었고, 이런 개발된 도시라고 해도 뒷골목은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 고리 안에서 시궁쥐처럼 살았다. 그러다 아저씨에게 이끌려 빵집에서 생활하게 된 이후로는 하루하루 일을 배우고 체력을 쓰고 나면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 같은 건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탈진하며 살아왔다. 뒷골목에서의 인연이 무조건 나빴던 건 아니었다. 내가 부모를 얻은 걸 축하해 주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뒷골목을 벗어나는 게 망설여졌냐 하면 그건 또 전혀 아니었다. 그때 봤던 아저씨의 넓은 등은 그런 생각을 들게 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별 바리에이션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아가씨는 여태까지 한 것과는 안 어울리게 이야기를 듣는 자세가 잘 되어 있었다.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장단을 맞춰주는데 나도 기억 뒷전으로 밀어뒀던 추억이 생각나서 반가울 때가 있을 정도였다. 특히 아가씨가 관심을 보인 건 레나에 대한 것이었다.

 "레나라면 내가 거기 갔을 때 네 옆에 있던 여자지?"

 "그렇죠."

 "흐응. 사귀는 거야?"

 "사귄다고 해야 하나, 자연스러운 관계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럼 나랑 그 여자 중에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레나죠." 

 아가씨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쿠드, 거기선 얼굴이라도 좀 붉히며 고민해 봐야 하지 않아?"

 "왜요?"

 "왜냐니,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가 자기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어리숙한 청년은 당황하는 게 정석 아니냐!"

 "매력적이기 이전에 어린 애한테 뭘 얼굴을 붉혀요!"

 "젠장, 몇 번 다시 태어나더니 영혼 속에 박힌 자신의 취향을 잊은 거냐? 넌 내 몸이 취향이다! 부모 얼굴은 잊어도 그것만은 기억하고 있을 거 아냐!"

 "무슨 귀신 콩까먹는 소릴! 전 그런 취향 절대 없어요!"

 아가씨가 흥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핏대를 세웠다.

 아가씨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큭, 역시 완전체가 아니면."

 "완전체……?" 

 지금은 번데기라도 되는 겁니까?

 "역시 이게 아니면 안 되는 거구나!" 

 아가씨가 자기 뒤통수에 손을 휙 긋자 멀쩡하게 묶여 있던 머리가 일순 풀려서 파도처럼 아래로 넘실댔다.

 "뭐, 아, 설마!"

 "역시 이 몸의 완성을 위해선 이게 아니면-!" 

 아가씨가 다른 쪽 손을 들자 손가락에 머리띠가 걸려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앗!"

 그리고, 문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메이드들이 통곡을 하며 안으로 쳐들어왔다.

 "에이이이잇, 오늘만은 잡혀줄 수 없어!"

 아가씨는 어디선가 분홍색 시험관을 꺼내더니 발 아래로 집어던졌다.

 "멜로!"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분홍색 연기가 아가씨의 발아래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당황해서 입을 가렸지만, 벌써 좀 들이마신 이후였고, 딱히 별것도 없었다. 다만 눈앞이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 누르며 소리쳤다.

 "숙이세요!" 

 내가 허리를 굽히기도 전에 어깨에 올려진 손은 나를 엄청난 힘으로 찍어눌러버렸다. 내가 바닥에 엎어지고, 그 위에서부터 강풍이 일었다. 분홍색 연기가 바람에 일순간 걷어지면서 아가씨의 모습이 그 사이로 보였다. 아가씨는 방구석에서 다급하게 머리를 묶고 있었다. 이런 때는 왠지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던 긴 머리가 독이 된 모양이었다. 거기를 향해 시종장이 달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 연기가 눈앞을 가렸다. 환기가 잘 되지 않아서 도무지 시야가 확보되질 않았다.

 "거기 아가씹니까?!"

 대답 따위는 듣지도 않고, 나를 향해 아침에 봤던 견인족 메이드가 하단태클을 걸었다. 근데 난 반쯤 누워 있었으므로 그냥 어깨와 어깨가 충돌했다.

 "푸억?!" 

 너 아가씨한테 이걸 할 생각이었냐? 어깨가 얼얼했다.

 "아, 쿠드 씨였습니까. 그렇게 아리땁게 계시면 안 돼요. 헷갈리게."

 메이드는 내 위에서 마운트 포지션을 취한 채 핀잔을 줬다.

 "……으음."

 내가 별 말 없이 있자 이 견인족은 왠지 입맛을 다시더니 나에게 가슴을 기대왔다.

 "잠깐은……괜찮겠죠?"

 "안 괜찮거든! 넌 뭐하는 거야?"

 "영주성에서 나갈 기회가 잘 없으니깐요. 이런 체리는 먹을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드실 생각입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아수라장 속에서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정조의 위기를 맞고 있을 때,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를 제압했다! 전원 동작 그만! 실론, 사론, 세실은 환기를 해!"

 "체엣."

 나를 먹으려던 메이드는 껄떡하게 혀를 차더니 해맑게 시종장의 명령에 대답하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있으니 집기들이 나뒹굴고, 찢어진 아수라장이 된 방과 십 수 명의 메이드, 그리고 시종장에게 한 쪽 팔이 잡힌 아가씨가 있었다. 아가씨는 골이 나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무슨 장난감 안 사준 어린애도 아니고.

이렇게 아가씨와의 이틀째는 마무리 되었다.

 날은 아직 창창하게 밝았지만, 방으로 돌아온 난 심각한 피로에 침대로 몸을 던졌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내 몸을 받았다. 설마 내일도 이런 건 아니겠지……이런 불길한 상상을 하며 나는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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