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2. 아가씨와 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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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자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다. 벌써 저녁때인 모양인지 배가 엄청 고팠다. 허기를 어떻게 달래야 할 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자, 메이드가 식사용 차를 밀고 왔다. 그 연두색 머리의 쿨한 누님이었다.

 "식사입니다."

 "식사네요."

 "식-사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 부록도 딸려왔다.

 "부록이라니요!" 

 암청색 포니테일 메이드가 입을 가리며 쇼크를 받았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고는 삼 초 만에 회복해서 견인족 메이드와 함께 방을 촐랑촐랑 다니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녁은 아침에 비해 굉장히 호화로웠다. 내가 먹는 동안, 메이드 둘은 여전히 뭘 하는지 사부작거리고 있었고, 한 명은 내 옆에 우두커니 기둥처럼 서 있었다.

 "저기, 옆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혹시 먹는 방법을 감시하고 있는다던가 하는 겁니까?"

 "아니요. 임시적으로 쿠드 씨의 전속이 되어서 이렇게 있는 겁니다." 

 저어어언소옥?

 "내가 언제부터 전속 메이드를 둘 정도의 사람이 된 거지……? 저 여기 빵 만들러 온 거 아니었나요?"

 "하고 싶으시면 하셔도 됩니다. 아가씨의 손님이니깐요."

 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난 어느새 초대손님이 된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여기 온 의미가 아무것도 없잖아. 따끈하스에 돌아갈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나는 식사를 계속했다. 이 고기 맛있네. 돌아가면 빵에다 넣어서 한 번 먹어봐야겠다. 바게뜨가 어울릴 것 같은데.

 "……저기." 

 아무래도 견딜 수가 없다. 누가 밥 먹는데 쳐다보고 있으니 아무리 잘 씹어 넘겨도 목에 턱턱 걸리는 기분이었다.

 "식사들 하셨어요?"

 "아니요!"

 한구석에서 손날로 포니테일 메이드와 칼싸움을 하던 견인족 메이드가 기세 좋게 외쳤다.

 "메이드의 식사는 거의 마지막 순입니다."

 "아아, 그렇구나. 힘드시겠네요."

 "아닙니다." 

 할 말이 끊기잖아! 당신은 혹시 시종장이 날 압박하라고 보낸 암살자입니까?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결국 나는 옆에 와서 내 밥을 보고 침을 삼키고 있는 메이드(여태껏 무시하고 있었던)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항상 저런 거에요?"

 "……." 

 나는 빵을 하나 집어서 줬다.

 "야호!" 

 내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묻자, 빵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메이드는 꼬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포니테일 메이드가 와서 말을 이어줬다.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해 질 지경이었다.

 "항상 그런 거라면, 뭘 말하는 건가요?"

 "그……그거 말입니다. 머리."

 "아, 트윈테일 말씀인가요.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에요."

 "'쿠드' 가 왔을 때만 했지요!"

 쿠드가 왔을 때만? 내가 반문하자 쓸데없이 기운이 넘치는 견인족 메이드는 신이 나서 말했다.

 "네! 쿠드 후보는 꽤 많았거든요. 아가씨는 그 때마다 비슷하게 하셨어요. 그래도 두 번이나 시도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쿠드 씨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 쿠드 후보란게... 사십 명 정도 됩니까?"

 "어? 잘 아네요? 마흔 네 번째에요."

 아가씨는 그러니까, 마흔 네 번 정도 이 짓을 반복하는 중이라 이거지. 어제 시종장에게 들은 '기행을 일삼는다'는 건 이것인 모양이었다. 말로 들을 땐 잘 실감이 안 났는데, 두 번쯤 겪고 나니까 왜 이걸 여태까지 방치하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음, 사실 아가씨께선 쿠드를 찾는 동안 상당히 안정되셨으니까요."

 포니테일 메이드가 턱에 검지를 대고 뭔가를 떠올리듯 천장을 이리저리 봤다.

 "우리 셋이 오기 전의 얘기인데, 아가씨는 정말 굉장했다는 모양이에요."

 "굉장해?"

 메이드는 내게 바싹 다가와서 귀에 대고 이야기했다.

 "전 주인마님의 치부를 드러내서 쫒아냈다던가?"

 개꼬리 달린 메이드는 그냥 해맑게 얘기했다. 귀가 밝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크로맨시를 했다던가 키메라를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몇 년 전이면 그 아가씨가 근 열 살 때 일이거든? 도대체 말이 돼는 소리를 하시지요.

 "꼭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닌 게, 아가씨는 십 년 정도 전부터 그랬다는 것 같았어요?"

 두 메이드는 평소에 이걸 못 떠들어서 한이라도 맺혔던 건지, 내게 주방의 식기 숫자까지 가르쳐 줄 것처럼 열의에 차 보였다. 그나저나 오기 전의 일일 텐데 잘도 아네.

 "공공연한 비밀인 모양이에요. 특히 십년 전의 사건은."

 "십년 전의 사건? 그러고 보니까 아가씨가 십년 전을 기준으로 성격이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그거랑 상관이 있는 건가요?"

 "네에. 그게 말이죠-"

 "실론, 거기까지만 해 둬."

 "선배, 왜요? 주변에 딱히 아무도 없는데 말해도 괜찮지 않아요? 저, 이 말을 할 곳이 없어서 요즘 화병이라도 생길 것 같았단 말이에요."

 "맞아요. 바로 옆에서 밤마다 실론 선배가 이불을 끌어안고 음란한 신음을 내는 거 더 못 들어주겠다구요!"

 "응? 사론, 난 그런 소리 낸 적 없는데?"

 "……네?"

 실론과 사론이 한 곳을 바라봤다.

 "뭘 기대하는 거냐."

 "선배. 선배도 평소엔 이렇게 정나미 떨어지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잠자리에선 반동으로 누구보다도 뜨거워진다던가 하는 거에요?"

 "그런 거였어요, 선배?"

 "아아, 사론, 우리는 세실 선배를 너무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포니테일 메이드가 이마를 짚으며 슬프게 말했다. 주변에 백장미라도 필 것 같은 동작이었다.

 "아아, 선배! 죄송해요, 이제부터라도 우리 셋이 데일 것 같이 뜨거운 열락의 밤을 보내는 거에요."

 청순 다이너마이트 실론은 둘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해서 제압한 다음에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나가면서도 예의바르게 인사는 하는 점이 그녀다웠다.

 다음 날, 눈을 뜨자 양 옆에 메이드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누운 채로 몸에 힘을 줬다 빼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뒤에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좋아, 기습은 성공했다! 나는 욕실의 문을 힘껏 닫았다.

 "후후후후후, 쿠드 씨, 안 돼요 안 돼."

 문틈으로 발이 들어와 있었다.

 "오늘도 저희가 부드럽고 세세하게 씻겨 드릴게요."

 "당신 그렇게 웃으면 엄청 무섭거든요? 아니, 왜 이렇게 발이 빨라?"

 내가 끼어있는 발을 툭툭 차서 밀어내며 문을 닫으려 하는 사이 나머지 둘이 느긋하게 다가왔다.

 "선배, 나이스 인터셉트!"

 "쿠드 씨, 여러 방면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저항은 그만 하시죠."

 아, 안 돼. 

 안 돼…….

 나는 패배를 직감했다.


 문을 열자 어제와 하등 다를 게 없이 시종장이 서 있었다. 내가 어제를 한 번 더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거지? 나는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됐다! 굳이 내 아름다운 트윈테일이 아니더라도 이걸 보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겠지! 이쪽으로 와!"

 아가씨는 버럭버럭 성을 내더니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어제를 다시 살고 있는 것 같은 건 아가씨의 방에 들어가서도 똑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아가씨의 머리가 이제는 틀어올려져 있는 게 아니라 뜨개질이라도 한 것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대화라는 걸 나누긴 했지만, 돌아갈 생각밖에 없는 나와, 내가 정체불명의 누군가라고 굳게 믿고 성에 잡아놓으려는 아가씨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에 접점이란 게 있을 수가 없었다. 별 진행이 안 되는 평행선상의 얘기에 나뿐만 아니라 아가씨도 진절머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선지 오늘은 아가씨가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그런데 그 텅 빈 데서 뭘 보여준다는 거지? 무기처럼 보이는 건 이 방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아가씨는 칼끝을 내 코앞에 겨눴다.

 처음엔 바로 앞에 있는 게 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뽑는 동작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순간적으로 보인 붉은 빛이 잔상으로 남아서 '아. 검을 뽑은 거구나.'하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런 게 어디서……?"

 "여자의 드레스 속엔 많은 것이 들어가지." 

 진짜로?

 칼은 기다란 도신에, 약간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마법검인가? 길이를 보니, 도저히 드레스 아래 숨길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기색을 알아챈 건지 아가씨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건 네게 보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증거 중 하나인 너의 애검, '단풍'이다. 생명이 꺼지기 전에 발산하는 아름다움을 부리는 환도지."

 "비싸 보이네요."

 "이 명도에 돈으로 가치를 매기려고 한 사람은 없었다."

 "굉장하네요."

 "그래! 굉장하지. 이게 네 거였다. 아니, 지금도 네 것이지. 자, 지금 나와의 관계를 기억해 내면 이것이 사은품으로 딸려오는 것이다!"

 아가씨는 흥분한 건지, 말에 이런저런 말투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전 뇌물은 안 받는 주의라……."

 "시덥잖은 소리 마. 기억나지 않느냐! 자, 단풍도 널 부르고 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에고-아이템 입니까? 엄청나네요!"

 "그렇지! 혼을 가진 물건은 어떤 세상이든 극상의 희소품이 아니겠어. 자꾸 말 돌리지 마라! 무겁잖아!"

 아가씨는 애처롭게 소리쳤다. 과연 안 그래도 가는 팔인데 한 손으로 들고 있기는 무리였다. 내 코끝에 닿을 것 같았던 검극은 어느새 내 가슴께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 손으로도 무거웠는지 양 손으로 손잡이를 받쳐들고 있었다.

 "저기, 아가씨. 유감인데 전 쿠드가 아닌 모양입니다."

 나로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갑자기 피잉! 하고 기억이 돌아오면서 거대한 운명의 격류와 겹겹이 쌓인 적들에게 휩쓸리는 건 사양이었다.

 "거짓말. 난 너를 보는 순간 확신했단 말이다."

 아가씨의 깊은 눈이 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반응이었다. 이 칼은 아가씨가 자신하고 있던 증거품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러니까 괜히 미안해지네.

 "정말입니다. 용모가 비슷해서 잘못 보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방 안에 침묵이 돌았다. 검은 이제 내 배 언저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정말?"

 네. 정말이에염.

 아가씨의 손에서 검이 툭 떨어졌다. 과연 비싼 물건이라 그런지 검은 바닥에 꽂히더니 새빨간 빛을 내며 사라져버렸다. 작은 구멍만 하나 남았다.

 "됐다. 너를 보니 내 말을 들을 준비조차 안 된 것 같구나. 이제 와서 헛된 희망을 계속 갖고 있기엔 이 몸은 너무 지쳤다."

 "죄송합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한 건지 알 순 없었다. 아마 있는 대로 침울해져서 공허해 보이는 아가씨의 모습 때문일까.

 "닥쳐라. 알량한 소리는 듣기 싫다. 오늘 중으로 보내 줄 터이니 빨리 나가라. 옷은 사과하는 의미로 줄 테니 기념품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기념품이라니……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말하는 아가씨였다.

 자리에 있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진 나는 바로 방에서 나왔다. 밖에선 시종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도 없었군요. 들어온 지 만 이틀 만에 나가게 되다니, 감탄했습니다."

 "헹. 나도 당신들 얼굴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시원합니다."

 "이 일을 발설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속 시원해 해도 괜찮습니다."

 나와 시종장은 이 성에서 가장 많이 취한 포메이션인 것 같은 시종장 앞 나 뒤의 배치로 또 걸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순순히 보내주네?"

 "아가씨께서 확인한다고 하셨으니까요."

 이보셔. 그 말 듣기에 따라서 굉장히 불안한데.

 "이 옷, 갈아입고 싶은데."

 "아가씨의 호의입니다. 가져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거리에 이런 옷을 입고 나가고 싶지 않을 뿐이야."

 "멋을 모르는 사람이군요."

 나는 아침에 일어났던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마이페이스 메이드 소대는 다행히도 없었다. 아침에 그 소란을 부렸는데, 고작 그 뒤로 두세 시간 만에 성을 나가게 됐다고 하면 잘못한 게 없어도 마주하기 좀 껄끄러웠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 하자 시종장이 결국 입었던 옷을 싸서 내게 들려줬다.

 성 입구엔 정말로 아가씨가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고고한 기상을 갖고 있는 모습은 첫날 처음 봤던 그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눈이 탁하게 보였고, 그래서 이번엔 정말로 조각상 같았다. 성 안에서 봤던 정신없을 정도로 기분이 변하던 아가씨는 마치 없었다는 듯한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아가씨가 무감각하게 말했다.

 "내가 실례를 끼쳤다.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기념품도 받았고."

 "그래. 당신의 삶에 축복이 있길."

 내가 읍하고 성 밖으로 나서자 아가씨도 곧바로 등을 돌려 안으로 향했다. 어제부터, 정말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은 날들이었다. 귀신의 집 같은 성이야. 그런데 따끈하스에 돌아가는 건 좋지만,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그냥 솔직하게 말 해?

 내가 할 말을 고르며 걷고 있자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형씨도 여느 젊은이처럼 귀가 얇구만."

 "네?"

 어제 봤던 직무태만 문지기였다.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는 길을 잘못 들기 쉬워."

 "무슨 소립니까?"

 "그냥 그렇다고." 

 뭥. 

 뭐지 이 있어 보이려 하는 문지기는.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 

 문지기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단 이틀 있었던 것뿐이었는데, 인상이 워낙 강하게 박혔었던 건지 적응이 안 되는 번화가의 풍경 속을 걷고 있을 때 문득 떠올랐다.

 아가씨의 말은 전혀 믿고 있진 않았지만, 나에게 들려줬던 기억들은 그 자체로써 평범한 게 아니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정말로 보고 온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그것도 망상으로 가능한 건가? 아가씨가 원래 천재였기 때문에 그런 망상도 그에 걸맞은 스케일도 했다는 걸까. 10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사람이 성대하게 정신병에 걸릴 수 있는 걸까. 왠지 아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좀 더 생겼다. 하지만 괴악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이 제와서 돌아가겠다는 마음이 생기지도 않는다. 또 간다 해도 뭐라 할 거야?

 "용궁 한 번 갔다 왔다고 생각하지 뭐."

 나는 따끈하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찌 됐든 생명의 위기 비슷한 걸 넘기고 무사히 귀환하는 거니까 기뻐할 만한 일인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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