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3. 쓰레기장의 아가씨, 싸우는 소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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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쓰레기장의 아가씨, 싸우는 소녀


 "좀 더 나은 곳은 없더냐?"

 "이제 여기 말고 갈 곳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귀족영애를 이런 곳에 집어넣다니. 대담하지 않느냐."

 "글쎄, 그 메이드들이 끈질긴 거죠." 

 우리는 지금 하수도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가슴 벅차게 도망다니긴 했지만, 이내 아가씨가 '효력이 끝났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렸다. 거리를 벌리긴 했지만, 아직도 도시를 배회하는 메이드 셋을 피하기 위해서 결국 하수도로 들어왔다. 귀족 아가씨를 동행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쪽에서도 수색하는 순위가 낮을 거라고 생각해서 선정한 선택지였다.

 "뭐, 경험이야 몇 번 있으니 일단은 상관없지만."

 그 말대로 아가씨는 처음에만 코를 잡아매고 격하게 괴로워한 이후 나보다도 이 하수도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내 팔도 잘 안 보이는 어두운 곳에서 잘도 앞장서서 걷는 사람이 정말 태어나면서부터 영주성에서 별로 나온 적도 없는 아가씨가 맞는지 이제 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가씨, 길은 아십니까?"

 말 할 때마다 아직도 고약한 냄새가 들어왔다 나갔다.

 "아니. 하지만 대강 방위는 안다. 워낙 오래 전의 감각이라 좀 오차가 있을 수도 있지만. 하수도라니 신선하군, 신선해."

 "이래저래 굉장한 감각이네요."

 "처음 이랬을 때는 혼자였으니까. 꼭 환생해서 레벨이 초기화 된 것 같지 않느냐. 이런 식의 굴욕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쿠드 너와는 공유할 일이 없을 질 나쁜 추억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너와 이렇게 있다는 게 재밌지 않나."

 하나도 안 재밌는데요.

 아가씨가 쥐라도 걷어찬 건지 찍찍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쿠드란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쿠드란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아가씨는 이렇게 필사적일 수 있게 된 걸까. 상상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을 위해 이만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설령 미쳤다고 해도, 이 행동력은 감탄할 만 했다.

 사실 그 상상이란 것도 이제와선 조금 헷갈렸다. 환각이라고 하기엔 생생했던 단풍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환각으로는 사람을 잠에서 깨울 수 없다. 지각하는 것을 뒤트는 것이라 눈 감고 안 듣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마술에 무지한 수준이니 내가 모르는 방법들이 있을 테지만, 그걸 세 메이드를 막아가면서 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내 질문에 아가씨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야 너 아니냐."

 "그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찾아 헤매는 거냐구요."

 "으음? 궁금한가?"

 "그 인간 때문에 지금 팔자에도 없는 하수도 탐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디 듣고 싶습니다만."

 "그런가. 그럼 어느 정도 들려주지. 쿠드는, 지금 너보다는 키가 조금 작고" 

 엥?

 "좀 더 패기 없고 꺼벙하게 생겼었다."

 "생김새부터 다르잖아요?"

 "그야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어도 똑같은 인간이 되진 않으니까." 

 유전자?

 "됐다. 여기엔 그런 개념은 없는 모양이더군. 여러모로 균형도 안 맞고 빈틈이 많은 세상이야. 어쨌든 육체를 다시 받았으니까 같을 리가 없다는 소리다."

 "그런가요……." 

 아가씨는 빠르진 않지만 너무 자신 있게 걸어 나갔다. 앞이 안 보이는 어둠 속을 이런 속도로 파고드는 건 꼭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 등은 굽고 머리는 푹 숙여선, 자신감이라곤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살도 쪘었지.  그러면서 한 번씩 하늘이라든가 가로등을 둘러보면서 푹푹 한숨을 내쉬는 녀석이었다."

 "그다지 듬직해보이진 않아 보이는데요."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그 땐 싸움을 걸어온 어떤 멍청이를 상대해주다가 우연히 지나친 것뿐이었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상세히도 기억한다 싶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당시에 길을 걸으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으니까. 나는 그 잔챙이를 대충 처리해 날려버린 다음에 목격자를 없애려고 그 놈 앞으로 갔었지."

 "네? 없애려고?"

 "그래. 그때 지구에선 문명생물은 인간 외엔 용납되지 않던 때였으니까. 역사 뒤쪽에서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은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소문거리가 되긴 싫었으니까. 깔끔하게 없애주려고 했지."

 난 머릿속에서 아가씨의 폭력성 등급을 두 단계 상승시켰다.

 "그런데 쿠드 그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아냐?"

 "뭐라 했는데요?"

 "보고 싶었다-라고 했다! 웃기지 않느냐?"

 "확실히 웃기네요."

 처음 본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해 대면 미친 놈 취급받을 게 뻔하다.

 "뭐, 사실 그런 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래 살다 보니 대충 그런 유형의 인간을 볼 기회도 좀 있었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서 제 힘이 약한 것에 절망해서는, 자기 대리만족을 시켜 줄 존재를 찾는 그런 사람 말이다."

 "짜증나는 인간이네요."

 조금씩 기분이 가라앉는 나와는 달리 어쩐지 아가씨는 즐거운 듯 웃음기를 한껏 띄고 말했다.

 "그래. 죽여줄 가치도 없는 인간 부류였다. 그래서 난 기분이 나빠져서 그냥 가버렸지."

 "그래서요?"

 "그랬다."

 하수도를 두루마리 휴지 풀듯 뚜벅뚜벅 걸으며 이야기가 일단락되었다.

 "끝입니까?"

 "당연히 후속편이 있긴 하지만. 뭐 어찌하다 보니 종으로 삼게 됐는데 생각보다 쓸 만했다는 이야기다."

 서두에 비해서 심하게 간단하게 정리되어 버렸다. 그거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굉장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저랑 동일인 이라고 하는 겁니까?"

 "음? 화 난건가?"

 "그야 화 안 났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별 상관없는 사람으로 착각돼서 말도 안 되는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요."

 "걱정 말아라. 그 뒤 쿠드는 내가 제공한 수라장을 거치면서 어엿한 종으로 거듭났으니까."

 뭔가 들긴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어떤 놈인 건데?

 "그리고 말이다. 내가 보기엔 너나 처음 봤을 때 쿠드나 별 다를 건 없어 보인다. 그저 출발선을 벗어났느냐 아니냐는 차이지. 길고 긴 여정에서 중요하면서도 너무나도 사소한 한 발짝 차이로구나."

 나와 아가씨 사이에 침묵이 끼어든 채 하수도를 채워갔다. 걸음소리만 간간히 멀리서 울리는 쥐의 울음과 같이 생겼다 사라졌다. 가까워진 적도 없었을 그녀와 내가 어쩐지 좀 멀어진 것 같았다.

 "나한텐 쿠드가 있기 전에도 종이 둘 더 있었다."

 얼마 후 아가씨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 남은 건 너 하나였다. 쿠드."


 한참 더 하수도를 헤매자, 끝엔 도시 외곽을 지나가는 강줄기에 다다랐다. 하수가 나오는 곳이라 그런지, 주변엔 쓰레기가 쌓여있고, 인적은 없었다. 하늘을 보니 달이 꽤 기울어 있어서 좀 더 있으면 동이 틀 법한 시간이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겠지?

 "우선 쉴 곳을 찾자."

 아가씨는 입으로는 자신이 희대의 마녀 어쩌구 해도 결국 여자아이였는지 얼굴색에 완연히 지친 기색을 띄고 있었다. 다만 목소리는 아직도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하수도에서 아가씨가 한 마지막 말의 무게에 아직도 눌려서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주변을 살폈다.

 분명히 망상 속에서 지어낸 이야기일게 분명한데 나는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아가씨가 일반인과 남다른 점이 있어서 망상마저 그렇게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어느 샌가 그 쿠드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소름이 돋았다. 정말로 성가신 아가씨다. 이런 사람이 이 상태로 영주성의 권력을 물려받으면 어떻게 될 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음, 찾았다."

 나보다 아가씨가 먼저 외딴 집을 발견하고 종종 달려갔다.

 "뭐 하나, 쿠드? 빨리 오거라."

 망토를 쓴 냄새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가, 나를 재촉했다.

 아가씨가 찾은 집은 헛간도 아니었고, 사람이 살 만 한 집이라기엔 좀 허술한 폐옥이었다. 어쩌면 파수꾼이 한 번씩 쓰는 거처일지도 몰랐다. 다만 꽤 오래 사용하지 않은 건지 흙과 먼지가 쌓여있었다. 달빛에 사방에 걸린 거미줄이 커튼처럼 쳐진 게 보였다.

 "으음. 차라리 노숙을 하고 싶게 만드는 방이로군."

 아가씨는 곰팡내 나는 이불을 들추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불은 그냥 들었을 뿐인데도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쿠드, 원한다면 이 침대를 주겠다. 나는 도저히 이 침대는 못 쓰겠군."

 아가씨는 하수도에서 붙은 건지 머리에 걸린 거미줄을 떼며 방구석에 앉았다.

 "그렇게 말하면 침대에서 편하게 잘 것 같습니까?"

 "아니."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나는 이불을 밖으로 가져가서 세게 털었다. 마법처럼 먼지가 날렸다. 몇 시간 전에 봤던 아가씨의 마술인 열 증기가 생각났다. 이쪽 지방에선 마법을 볼 일이 별로 없었다. 영주의 정책 상, 마법보단 상업이나 육체적 행사에 훨씬 지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좀 더 동쪽으로 가면 일상적으로 마술을 쓰는 도시도 있다고는 하지만, 여기선 가끔 열리는 무투대회 때 외엔 볼 일은 없었다.

 한참을 털었더니 더 이상 먼지는 나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아가씨는 벌써 눈이 반쯤 맛이 가 있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침대에 몸을 기댔다. 그랬더니 아가씨가 날 불렀다.

 "쿠드……춥다."

 "침대에서 주무실래요? 어차피 하수도까지 들어갔다 나왔으니."

 "이리 와……쿠드……."

 "저, 그건 좀."

 왠지 상상해버린 풍경은 정말로 내키질 않는 광경이었다. 닮기라도 했으면 오빠 여동생이라고 하면 될 테지만, 누가 봐도 연고가 없는 어린 여자애와 남자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잔다니.

 "쿠드……빨리……추워."

 난 왜 이렇게 이 사람한테 약하지.

 결국 내가 옆으로 가서 앉자 아가씨는 잠결 속에서도 이불을 들어 나까지 덮고는 나에게 기댔다. 성에서 달라붙었을 때 났던 향은 이제 시궁창의 냄새로 바뀌어 있고, 망토는 먼지를 뒤집어쓴 건지 퀴퀴한 냄새가 났다. 아가씨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잠들어서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도 생각보다, 아니 전혀 당황한다거나 하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생각보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쿠드, 일어나라!"

 나를 깨운 건 쌩쌩한 아가씨의 목소리였다. 피곤이 가시질 않아서 부스스하게 눈을 뜨니 아가씨는 햇살을 등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가씨……안 피곤하세요?"

 "정신이 받쳐주면 인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늘어난다. 너도 알 텐데?"

 그렇긴 한데요…….

 아가씨는 머리엔 거미줄이 아직 남았고 피곤에 절은 눈에, 다크서클까지 있었지만 표정과 목소리는 살아있었다. 문득 그런 모습이 새벽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음, 새벽?

 "아."

 "왜 그러나?"

 "따끈하스에 돌아가야 하는데!"

 정신이 번쩍 개었다. 확실히 이번엔 아가씨의 말이 맞았다. 몸에 순식간에 힘이 들어가서 나는 빠르게 몸을 추슬렀다. 이불을 대강 침대에 던져놓는 날 아가씨가 이상한 걸 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하게 보고 있었다.

 "돌아갈 생각인가? 그 가게에?"

 "그럼요! 오늘부터 다시 일하겠다고 말 했는데."

 "그러고 다시 밤에 습격 받으려고?"

 나는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가씨의 비밀이란 걸 목격한 이유로 쫒기고 있는 몸이었다.

 "갑작스러운 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건 알겠는데, 좀 더 생각을 하는 건 어떤가."

 나는 아가씨의 말에 발끈해서 빈정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원인 제공자님."

 "쿠드. 원인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원인은 내가 아니고 걱정도 팔자인 영주성 사람들이지."

 "당신도 영주성 사람이잖아! 그리고 애초에 날 부르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고!"

 아가씨는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화가 치밀었다. 피곤하다.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약속도 했다. 그걸 갑자기 나타나선 너무나도 쉽게 망쳐버렸다. 그러고 보면 여태껏 왜 화가 안 났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쩌면 이리저리 도망 다닌 것도 내가 딴 생각을 못 하게 하도록 계산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할 말은 많지만 그건 나중에 차차 하지. 지금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니까."

 "대체 왜 날 갖고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우문. 이번엔 도와주러 온 것 아닌가."

 "그래. 그래서 잊고 있었지. 당신이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이렇게 된 거 말야!"

 아가씨는 내가 으르렁거리든 말든 시종일관 침착할 뿐이었다. 이 태도가 나를 더 도발하는 것 같다. 자기는 어떻게 되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원래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으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삶의 근간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말이 진행이 안 되는군."

 "정말로 왜 이러는 건데? 내가 쿠드인거 아니라고 어제 말 했잖아? 당신도 납득 했잖아."

 아가씨는 묵묵히 헛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구멍이라곤 몇 개나 있는 집이었는데도 나름 집이었다는 건지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바람에 역한 냄새가 같이 실려 왔다.

 "아니." 

 아가씨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아가씨가 뒤돌아봤다.

 "난 포기한 적 없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힘은 옳고 그름을 떠나 너무나도 올곧아서, 누구의 반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너는 쿠드 이노센트! 나의 곁에 남은 마지막 시종이다!"

 선언문을 읽는 것 같은 그 모습은, 어느 것도 그녀를 바래게 하지 못할 힘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더러운 옷도, 역한 바람도, 살풍경한 풍광도, 나조차도 그녀와 다른,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많은 착오가 있었지만, 이번만은 확실하다.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어."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전설 속에나 나올 것 같이 빛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말 미쳐서 십년 간 영주성 안에서 책만 읽은 사람이 맞는 건가?

 "그것만은 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압도당한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아가씨는 예의 그 위용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말대로 어쨌든 해결하려면 저 안으로 가야겠지." 

 얼마간 도시 쪽으로 향하던 아가씨가 날 돌아봤다.

 "뭐 하나? 빨리 오거라, 쿠드."

 나는 주춤거리다 그녀의 옆에 따라붙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사실? 그런 건 궤변이다. 성 안에서 풍족하게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난 다만 아가씨의 희대의 사상가라도 된 것 같은 모습에, 우선 얼이 빠져서 실없게 말했다.

 "아가씨, 정말 생떼 하나는 세계 제일인 것 같네요."

 "생떼가 아니고 신념이라 하는 것이다."

 "아니, 사실이 아닌 걸 인정 못하는 사람보고 보통 떼쟁이라고 하는데요."

 "뭐, 됐다. 지금은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을 날이 올 거다."

 "……그런데 인정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시 내 시종으로 삼아야지."

 "끝인가요?"

 "그 외에 뭐가 있나? 넌 내 종이라니까? 종에게 종이 할 일 외에 뭘 더 시키겠나?"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럼 혹시 제가 쿠드라고 인정하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아도 되는 겁니까?"

 아가씨는 감시 고개를 갸웃했다.

 "상관없으려나."

 하고 중얼거렸다. 

 난 왜 사서 왜 사서 이 고생을 한 거지……?

 나는 걸어가다 말고 맨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가씨는 쿡쿡 웃었다.

 "종도 종 나름이겠지만. 그건 그렇고, 네가 무슨 선택을 했던지 빵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면 결과적으론 이렇게 됐을 것이다. 너를 못 믿은 시종장이 입을 막으려 사람을 보냈겠지. 뭐 지금처럼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랬다. 어떤 선택지를 골랐든 내가 밖에서 살려고 했으면 내 입을 막기 위한 제약이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냥 제가 쿠드라고 치고요."

 "드디어 인정하는 거야?"

 아가씨가 반짝반짝, 나에게 매달려왔다. 구린내 납니다. 아가씨.

 나는 아가씨의 머리카락에 붙은 눈에 거슬리는 거미줄을 떼면서 말했다.

 "네 네. 저는 센이자 쿠드입니다."

 "역시! 내 눈은 틀림없어. 나는 정말이지 악운에 강한 여자라니까! 봐라, 내가 말 한 게 몇 분도 안 돼서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정말 입으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산도 뒤집을 것 같은 사람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생각입니까? 영주님의 딸인데 좀 어떻게 안 됩니까?"

 "간단하다. 내가 시종장을 해고하면 끝이지."

 "간단해! 아니, 그렇게 쉽게 잘라도 됩니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다.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 사람까지 신경 써 줄 정은 없다."

 냉정한 아가씨네.

 "그 좀 더 원만한 해결책은 없습니까?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이 단칼에 해결해 버리면 좀……."

 "왜? 그 여자의 미모에 신경이라도 쓰이는 거야?"

 "아니,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로써……여자요?"

 "모르고 있었나? 너도 사람 보는 눈이 없군 그래."

 "아니 그야 체구도 작고 선도 가늘고 얼굴도 갸름하고 이목구비도 남자답진 않았고 목소리도 굵진 않았지만." 

 난 왜 그 사람을 남자라고 생각한 거지???!?!

 아가씨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 옷 좀 입었다고 못 알아보다니, 너도 참 상당하구나. 아, 혹시 구분하는 기준이 가슴인 건가? 너도 참, 오랜만에 만나니 이런저런 새로운 면을 보여주는구나. 괜찮다. 이 몸도, 벗으면 볼 만 하다. 너도 알지 않나."

 "뭘 알아요?"

 아가씨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계집애 같은 소리 하기는."

 나는 쇼크를 받았다.

 요사이 며칠간 남자로서의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있어……나름 스스로 남자답다고 생각했는데, 도시 여자들은 너무 무서웠다.

 "일일이 침울해 하지 마라. 아마 몇 시간 뒤면 일이 더 커질 게 분명하다. 내가 말했던 것도 낙관적인 해결책이야."

 "네?"

 "생각해 봐라. 네 목숨까지 노리던 자들이다. 수단방법을 별로 가리지 않을 거야. 사냥감을 놓쳤으면 미끼로 불러들인다. 사냥의 기본이지."

 미끼? 나에게 있어서 미끼가 될 만 한 걸 살펴보면,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었다. 레나와 아저씨. 등골에서 식은땀이 내달렸다.

 "설마!"

 "이상한 죄목을 들어서 네 가족 같은 사람들을 잡아갈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데?"

 "목적은 너에 대한 시위일 뿐이다. 아마 네가 제 시간에 오면 시치미 떼고 풀어줄 것이다. 만약 오지 않으면,"

 "오지 않으면?"

 온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래도 풀어 주겠지. 네 말마따나 영주라 해도 없는 죄를 만들어 재판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니까."

 잠시지만 안심한 나에게 아가씨는 다시 쐐기를 박았다.

 "대신 너에게 직접 죄목이 붙을 거다. 날 납치한 죄라던가 하는 식으로."

 몸에서 핏기가 가셨다.

 "물론 내가 돌아가서 해명을 하고, 주변의 증언을 모으면 얼마 안 가서 무죄가 될 테지만, 그 때까지 전력으로 너를 잡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 외에도 방법은 생각하는 만큼 나온다. 상대는 거대한 집단이고 너는 개인이니 전략의 차이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물이 있다는 사실부터, 그걸 짚어나가는 아가씨까지.

 "그리고, 내가 보기엔 말이지. 너."

 "예?"

 "오늘 낮이면 그 빵집 주인이 잡혀갈 텐데, 뭐라고 하든지 갈 거 아닌가."

 부정할 수 없다. 아가씨는 며칠 만에 나를 상당히 파악하고 있었다. 내 유일한 가족이 무고하게 잡혀가서 인질이 되었는데, 방법이 있고 없고를 떠나 나 한 몸 보전하자고 숨어있을 순 없었다.

 "그럼 결정됐군. 자, 해결책은 가면서 생각하자고.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니까."

 아가씨는 또 다시 웃었다. 이상했다. 이 자신감이 폭발할 것 같이 넘치는 웃음만은 거역하기 힘들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끝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위험한 미소였지만, 어떻게든 될 지도 모른다는 그런 헛된 믿음을 심어주는 미소였다. 결국 나는 장난 반으로 진심을 말했다.

 "아가씨는 사기꾼 하면 대성할 것 같네요."

 "흥, 사기꾼은 본업으로 삼기엔 너무도 시시한 직업이다."

 부업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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