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3. 쓰레기장의 아가씨, 싸우는 소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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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가는 길도 하수도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가씨는 돈을 많이 갖고 있었다!

 "쓸 수 있는 건 써야지." 

 아직 감시망이 도시 외곽까지 넓어질 정도로 영주성에 인력이 있진 않다는 아가씨의 말에 따라 우리는 대충 눈에 들어오는 옷가게에서 옷을 바꿨다. 아가씬 좀 고민하더니 기다란 천에다 자기 머리를 둘둘 꼬아서 등에 맨 배낭에 쑥 넣고, 짐을 있는 대로 쌓아올려 장거리 여행자처럼 꾸몄다.

 "내 머리는 묘하게 눈에 띄니까 말이다."

 "묘하게가 아니고 그렇게 길게 기른 사람은 별로 없어요. 아예 자르는 건 어떻습니까?"

 "쿠드, 여자의 머리를 그렇게 가볍게 여기면 저주를 받게 될 거다." 

 아가씨는 나의 말을 일축하고는 쌀쌀한 요즘 날씨에 맞춰 옷을 껴입었다. 겉으로 봐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가방이 좀 눈에 띄긴 했지만, 여기야 마법은 없어도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행색을 한 사람들은 자주 보이니까 괜찮을 듯 했다.

 참고로 나는 가게에 들어가기 전 아가씨의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상태였다. 용모 자체를 바꾸는 마법은 불법에다 상당히 어렵다고 들었는데, 아가씨는 약 두 가지를 섞더니 굉장히 간단하게 내 모습을 바꿨다. 건장한 수인족의 모습으로, 남서부에 있는 호랑이 종족의 한 갈래라더라. 아가씨도 연장을 하면 편할 텐데 자신은 용모를 바꾸는 게 싫다며 끝내 갑갑한 변장을 했다. 남자다운 모습에 흡족해하고 있는 내게 아가씨가 말했다.

 "마기를 있는 대로 부어넣었지만, 얼기설기 만든 몸이라 물 정도밖엔 못 먹는데다 저녁 여덟시쯤 되면 완전히 풀릴 거다. 신데렐라 같구나. 맘에 들어."

 훗훗훗훗. 아가씨는 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들썩거리며 웃었다.

 기타 다른 것을 사서 가게 밖으로 나온 나에게 아가씨가 말했다.

 "이제부터 중요한 건 자신 있게 행동하는 거다. 여기에 호족은 잘 안 오는 모양이니까, 비교할 대상은 딱히 없어. 안 익숙해도 당당하게만 다니면 딴지 거는 사람은 없을 거다."

 "저, 어디로 가는데요?"

 "어디로 갈 것 같나?"

 사실 예상되는 곳이 한 군데 있긴 했지만, 지금 그다지 입에 올리고 싶진 않았다.

 "흥. 말하기 싫다면 내가 말해주지. 네가 일하는 가게로 갈 거다." 

 역시 그런가……. 굳이 나한테 물어본 걸 보면, 아가씨와 내가 동시에 아는 곳일 건데, 후보라고 해 봐야 잡다한 걸 빼고 나면 따끈하스와 영주성밖엔 없었다.

 "그 전에 촉매부터 보충해야겠지만. 따라 오겠느냐? 이번엔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

 촉매라는 건 마법의 위력을 높여주는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마법을 쓸 때 같이 깨뜨렸던 유리병이나, 약 같은 것들이 전부 촉매나 희귀한 반응물이었다고 한다.

 몇 번이고 세계를 뛰어넘는 거창한 여행을 한 아가씨는 지식이나 기술은 많이 손실되지 않았지만, 마나를 모을 수 있는 용량이 굉장히 작아져서 원하는 위력을 낼 수 없고, 혼자서 대규모 마법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구도 하고, 돈을 왕창 들여서라도 마술반응을 격렬하게 만들어 줄 촉매를 여태껏 사왔다 카더라.

 "아저씨나 레나가 잡혀가기 전에 빨리 구해야 할 것 아니에요?"

 "무턱대고 피하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여차했을 때 싸울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는 게 현명하다."

 "그렇지만 늦으면 다 헛거잖아요?"

 "지금 가면 늦든 안 늦든 헛것이 될 확률이 높지 않나."

 젠장, 내 머리는 왜 이렇게 안 좋은 거지? 아가씨에게 반박할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래도 난 일단 그쪽으로 갈래요."

 "그래. 그럼 네가 따로 가서 아저씨란 사람을 구하면 되겠구나."

 아가씨는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시원하게 승낙했다.

 "먼저 가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보고 있거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니까."

 묘한 뉘앙스의 말이었다. 내가 아가씨를 부르려 하자 아가씨는 이미 들어가서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내가 문을 열자 깜짝 놀란 젊은 주부 한 분이 누구냐고 묻길래 당황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가 버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따끈하스로 달려갔을 때, 가게 앞은 그을음이나 깨진 도로포장으로 엉망진창이었고, 문은 닫혀있었다. 이런 문장이 쓰인 문패도 걸려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영업을 일시적으로 중지합니다'

 나는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레나! 안에 있어? 레나! 아저씨! 누구 안에 있어요?"

 안에서도 충분히 들릴 만큼 크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젠장! 누구 없어요?"

 내가 계속 잠긴 문을 잡고 거칠게 흔들자 옆집 꽃가게의 마롱 아저씨가 작은 화분을 하나 들고 나오며 나를 말렸다.

 "젊은이, 다른 날에 찾아오게. 거긴 지금 주인이 갑자기 잡혀가서, 딸내미도 누굴 볼 정신이 아닐 거야. 에잉, 이럴 때 남자가 있어야 되는데 그 놈은 어디로 날라버린 건지."

 "그것 때문에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인상을 쓰자 아저씨가 주춤했다. 그 표정 때문에, 내가 지금 문자 그대로 호랑이 같은 얼굴로 버럭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으, 응? 알고 있었나? 자네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어쨌든 조금 있다 오게나 그래."

 마롱 아저씨는 가게로 쏙 들어갔다.

 그야 이런 얼굴로 문을 열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 사지 멀쩡한 사람도 문고리를 못 잡을 터였다. 나는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들어갈 방법을 생각했다. 지금 몸은 키가 크니까, 잘 매달리면 2층 창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였다. 나는 창문을 안 잠그는 편이었으니까, 아마 조용히 들어갈 수 있을 거였다.

 가게 뒤편으로 돌아가 재료 상자를 조심조심 밟아 담을 오르고, 2층 난간에 뛰어 매달렸다. 좋아. 생각보다 간단하게 성공했다. 내 방의 창문도, 다행히 안 잠가두었던 건지 쉽게 열렸다. 나는 커튼을 젖히고 내 방 안으로 깔끔하게 착지했다.

 "아"

 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입을 꾹 다문 채 토끼눈을 한 레나는 펑펑 운건지 눈이 시뻘겋게 되어서 정말로 토끼 같았다. 평소엔 뒤로 짧게 묶던 머리는 풀어헤쳐져서-지금 말하긴 뭐하지만, 어울렸다. 침대에 상체만 엎드려 있었던 건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있는 상태였다. 근데 왜 여기서 울고 있었냐?

 그런 건 둘째치고서라도, 나는 일단 필사적으로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입을 뗐다. 레나가 비명이라도 질러서 주변의 이목을 모으면 좋을 게 없었다.

 "레나, 잠깐만. 나야, 나."

 "네놈은 또 뭐야아아아아아아아!"

 레나의 진심이 담긴 미들킥-박치기-명치 타격 후 관절기술이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컥, 컥,"

 아파! 몸뚱아리가 아파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몸이 바뀌어서 그런 건지, 정확하게 타격 당했다 치더라도 비정상적으로 데미지가 심했다.

 "네놈은 정체가 뭐냐! 빨리 말 해!"

 레나는 이런 여자였지. 이런 걸 잊다니 나도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었다. 깜빡깜빡거리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내가 아직도 회복이 안돼서 꺽꺽거리고 있자 레나가 한 층 더 내 팔을 꺾으며 정체를 밝히라고 윽박질렀다. 글쎄, 아파서 말을 못 하겠다고!

 잠시 후, 레나의 부끄러운 추억 베스트5 중 세 가지를 공개했더니 레나는 글썽거리면서 그만 하라고 애원했다. 좀 전까지 펑펑 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울먹거리니까 정말 불쌍해 보였다. 곧이어 영주성으로 갈 때 받았던 팬던트까지 돌려주자 레나는 의심을 완전히 걷었다.

 "센, 어쩌다가 그런 모습이 된 거야?"

 "잠깐 마술로 바꿨어. 여덟시 쯤 되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마법? 센이랑 마술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나는 적당히 축약하고 중략한 이야기를 레나에게 들려줬다. 아가씨의 우주를 넘나드는 망상을 굳이 펼쳐줄 필요는 없었다. 아가씨가 나를 종으로 삼겠다고 박박 우기는 이유만 쑥 빼고 들려줬더니 레나는 벌컥 화를 냈다.

 "그 여자는 대체 뭐야? 자기 맘대로 그렇게 사람을 휘둘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그런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가씨는 이미 누군가가 잡혀갔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 해 준다고 잡혀갔던 사람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말 안 해주는 건 무슨 심보지?

 "그 사람 때문에 아빠는 잡혀가고(독살 혐의로 잡아갔댄다.), 센도 이렇게 이상한 꼴이 돼서는!"

 나는 꽤 맘에 들었었는데.

 "거기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센을 종으로 삼겠다고 하다니, 대체 어디를 용서 해 줘야 하는 거야?"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센, 치안대에 신고하자. 아빠가 독살 미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아무런 근거 없는 모함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그저 의혹이었기 때문에 발뺌하기도 쉽다는 것이었다.

 영지의 치안은 기본적으로 영주에게 있고, 정부에선 그걸 일정 선만 넘기지 않는다면 간섭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 솔브레이스에선 웬만하면 일단 잡아가두고 의혹이 풀리면 위자료를 준다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는데, 위자료란 게 꽤 두둑해서 그다지 별 불만 없이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증거를 들이대면서 추궁을 하는 것은 이런저런 법의 그물에 걸리기 쉬웠지만 '문답무용스러운 체포' 자체는 마왕침략의 잔재로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이 나라에서 안보상-인지 아닌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허용되고 있었다. 정부에서 유사시 전력으로 쓰기 위해 파견하는 치안대의 도움을 당장 바랄 순 없는 일이었다. 거의 다 아가씨에게 들은 말이었지만.

 "그런……."

 "괜찮아. 아저씨는 실제로 무죄니까. 그 놈들이 노리는 건 나고. 내가 가기만 하면 아저씨는 바로 풀려날 거야."

 "그럼 센은 순순히 목숨을 내 주겠다는 거야?"

 어느새 레나의 머릿속에서 나는 영주성에서 죽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야 그럴 순 없지. 그러고 보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가씨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온 거야? 나는 슬슬 불안해졌다. 생각해 두라고 하던 거, 설마 그때까지 아무 생각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나는 레나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누가 죽는다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안하다.

 "아가씨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오면 들어보자."

 "아가씨?"

 "아가씨."

 "있잖아 센……너 왠지 그 사람을 좀 친근하게 부르는 것 같지 않아?"

 "네?"

 의외의 타이밍에 의외의 소리를 들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그야 같이 하수구에서도 뒹굴고, 잠도 같이 잤으니까 어느 샌가 미운 정이라도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이것저것 따져가며 사람을 고를 순 없는 상황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치고는 그다지 화가 나질 않았다. 아 혹시 나 성인군자인 건가?

 내 말을 들은 레나는 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같이 뒹굴고……잤다……."

 "너무 생략했잖아! 지금 뭘 생각하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건 아냐."

 "그, 그거라니, 센 도대체 넌-"

 안되겠다. 레나의 자기 좋을 대로 필터가 심각하게 작동해 버렸다. 이대로 말 해봐야 아무 것도 안 통할 거야.

 그 때 귓전에서 아가씨의 음성이 울렸다.

 -쿠드, 뭐 하나. 문 좀 열어라. 어깨가 빠질 것 같단 말이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또 뭔가 마술을 부린 모양이었다. 이런 걸 보낼 거면 예고라도 해 주면 좋겠다. 심장에 안 좋아.

 "야, 레나. 아가씨가 온 모양이다. 문 열어주고 올게."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 건지, 레나는 이제 파랗게 변해 있었다.

 "……레나, 너 괜찮냐? 아니, 상당히 안 괜찮아 보이는데." 

 레나는 굳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센."

 "어? 굳이 안 내려가도 괜찮은데? 어차피 올라올 거 아냐?"

 "아니, 내가 직접 보러 가겠어!"

 센이 반 년 전쯤에, 아저씨를 정말로 거꾸러뜨리기 30분 전에 보여줬던 눈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그렇게 긴장해 있었던 적은 그 앞으로도 뒤로도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레나와 아저씨의 격투는 어제 봤던 싸움 이상으로 치열했다. 결국 레나가 아저씨를 벽에다 부조처럼 박는 걸로 따끈하스 최강자의 자리를 당당하게 거머쥐는 걸로 (레나에게만)훈훈하게 마무리 되었었다.

 "레나, 너 뭘 그렇게 투지를 내뿜고 있는 거야."

 "상대가 누구든지 지지 않아."

 레나는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무서운 상상이 뇌리를 채워서 레나를 설득했다.

 "레나, 아가씨랑 내가 도대체 무슨 관계라고 그러는 거야? 단순한 가해자와 피해자잖아? 난 결과가 어찌 되든 여기에 있을 거라고.

 "지지 않아. 지지 않아."

 레나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모아 뒤로 묶고 있었다.

 -쿠드! 어깨 아프다니까!

 "……."

 이제 나도 몰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가게 정문을 열자 선선한 것과 추운 것 사이에 있는 초겨울 날씨인데도 땀을 뻘뻘 흘리는 아가씨가 쓰러지듯이 나한테 푹 안겨왔다.

 "무, 무거워……."

 가방에서 머리카락을 빼고 가방을 들었더니 정말로 무거웠다. 분명히 가벼운 천으로만 채워놨었는데, 지금은 돌덩이라도 하나 든 것 같았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자 이런저런 통과 가죽 케이스들이 아무렇게나 들어차 있었다.

 "이게 다 뭐에요?"

 "촉매를 사러 갔더니, 돈을 준다는데도 그놈들 건방지게 덤벼들길래 수업료로 받아왔다."

 수업료?

 "그런 게 있다. 오, 네가 쿠드가 말한 레나라는 여잔가. 초면은 아니지만 반갑구나."

 "오자마자, 센과 껴안고, 피곤한 직장에서 돌아온 여자처럼 센이랑 대화를 했어……."

 "응? 쿠드, 이 여자 뭐라고 하는 거지?"

 아가씨는 천에 말려있던 머리를 풀어내며 물었다.

 "글쎄요. 참고로 저 상태인 렌은 사람 말을 잘 못 들어요."

 나는 문을 닫고 아가씨에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아, 고맙다. 눈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구나."

 "다다, 다다당신은 대체 왜 여기 와서―!"

 레나의 노호성이 가게를 쩌렁쩌렁 울렸다.

 "쿠드, 저 레나라는 사람한테 사정을 설명 안 했나?"

 "하긴 했는데 말이죠."

 "그런가. 부친이 잡혀간 건 납득하기 힘든 일이니까. 사과해야겠군."

 "무시하지 마!"

 "무시를 누가 했다는 건가? 아무튼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 곧 해결하러 갈 테니 너무 걱정 말아라. 하루 장사 못 한 보상 정도는 넘칠 정도로 받을 테니까. 나는 아무한테나 사과하지 않으니 솔직하게 사과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다."

 그게 무슨 사과야! 대사만 뚝 떼놓고 보면 대놓고 무시하는 것 같거든요? 

 아가씨가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이다. 내가 사과를 하다니, 나를 아는 사람들이 봤다면 경악할 만한 대사건이다."

 "당신, 센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마술로 세뇌 같은 걸 한 건 아니겠지!"

 "으으응?" 

 아가씨는 찡그린 얼굴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쉬울 것 없는 내가 어째서 그런 술수를 부려야 한다는 건가?"

 "그치만 너, 센이랑 껴안고 뒹굴ㄱㄱ고, 같이 잤다고-"

 ?

 ?

 아가씨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생겼다 사라졌다 했다. 글쎄, 레나. 너무 앞뒤 다 잘라먹었다니까.

 "흐음."

 아가씨는 으으음, 흐음, 호오, 헤에, 후후후훗, 흐으으으응?, ㅎㅎㅎ 같은 나중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웃음까지 흘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뭔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나를 타악타악 치며 빙글빙글 웃었다.

 "그 때야 반쯤 농담이었는데, 진지한 사이었군 그래? 좋아, 좋아. 그래, 서로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던가 그런 건가?"

 "읏, 아직 결혼이라던가 하는 건."

 "너는 술인지 알콜인지 먹어봐야 아나?"

 무슨 비유가 그래?

 아가씨는 아직도 김을 펄펄 내는 레나에게 스스스스슥 다가갔다.

 "너, 저 녀석이 그렇게 좋은가?"

 "무, 무슨!"

 레나는 그 말은 또 들린 건지 화들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갑자기 이상하게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렸다. 레나도 거의 동시에 얼굴을 휙 돌렸다.

 나와 레나 사이에 껄쩍지근한 공백이 생긴 사이에, 아가씨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 재밌군, 재미있어. 라는 말을 연발하며 레나를 이리저리 살피던 아가씨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원래는 오늘 해결하려 했지만,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가야겠군."

 "네?"

 "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자리는 좀 더 품위를 갖추고 가야지."

 "그런 자리라니……무슨 소리에요? 아저씨를 빨리 구해야 할 것 아닙니까?"

 "난 그 사람을 빨리 구해야 한다는 판단은 아직 안 했다. 난 내가 판단한 것만 믿어. 그리고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석실에서 무슨 고문이라도 받는 줄 아는 건가? 걱정 마라. 쉬는 날이 길어질수록 이 가게는 번창할 테니. 그리고,"

 아가씨는 레나의 곁에 착 붙어 팔짱을 꼈다. 레나는 당황해서 뿌리치려 했지만, 아가씨는 덜렁덜렁 거리면서도 잘 달라붙어 있었다.

 "이 여자도 나한테 볼 일이 있는 것 같으니깐 말이다. 이런 건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지."

 "볼 일?"

 "그래. 그런 게 있다."

 레나는 아가씨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가씨는 따끈하스에서 일단 하루 묵고 가게 되었다.


 저녁을 남은 빵으로 해결하고, 레나와 아가씨는 몸을 씻었다. 나는 1층에서 작은 등을 켜두고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쿠드. 씻어라."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아가씨가 수건으로 머리를 비비며 나에게 다가왔다. 자그마한 아가씨에게 맞는 옷이 없어서 가장 몸집이 큰 아저씨의 티셔츠를 입혀놨긴 했는데, 노출도가 그리 높진 않을 텐데, 불빛에 비친, 그려낸 것 같은 곡선을 따라 뻗은 가느다란 다리는 이상하게 선정적이었다. 아직 피곤한 기색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다시 봐도 신기할 정도의 몸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가씨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묘한 눈이었다.

 "쿠드. 욕망에 충실한 건 상관없지만 그렇게 뭔가가 눈에 띌 때마다 이것저것 다 제쳐두고 잡아먹을 것 같이 보면 절조가 너무 없어 보이지 않나."

 "그렇게 본 적 없어요."

 "뭐 나를 그렇게 보는 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아가씨, 정말로 어떻게 할 생각인 거에요?"

 "쳇, 지금 쿠드는 재미가 없잖아."

 "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주세요. 설마 아무런 계획도 없는 건 아니겠죠?"

 "생각해 둔 건 있다. 간단한 거지."

 "그럼 말 해 주세요."

 아가씨는 나의 눈을 쳐다봤다.

 "쿠드. 너는 내 시종인 게 맞지?"

 "또 그 타령입니까. 일이 원만하게 잘 끝나면 시종이든 뭐든 해 드릴게요."

 아가씨는 나의 눈을 마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 잘 알겠다. 어찌됐든 너와 아저씨라는 사람에게 해가 갈 일은 없을 거다."

 아가씨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레나와 같이 잘 테니 그리 알아라."

 "방이라면 또 있는데요?"

 "이런 밤은 여자들끼리의 할 말이란 게 있는 법이다. 이런 누가 짠 것 같은 전개, 직접 확인해보는 게 예의지."

 아가씨는 지친 것 같은 웃음을 보이며 위층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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