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재와 환상의 그림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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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판타지 라노벨이 보이길래 샀습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표지도 판타지 느낌이 물씬 나서 샀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꽝이었습니다.


  대세에 순응하는 이세계물입니다. 이세계물이란 현실에서 이異세계로 환생하거나 차원이동을 하거나 하는 소설을 말하는데요. 이런 장르가 근 몇 년간 일본에서 유행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이야기고 이 작품 또한 그러한 유행에 편승한 내용입니다. 시작하자마자 낯선 천장이다, 가 나오더군요. 첫 부분을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주인공 하루히로는 어떤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 정신을 차립니다. 눈을 뜨니 동굴 같은 곳에 본인을 포함한 열두 명이 있는데, 굴 밖을 나가니 낯선 풍경이 보이고 어디선가 튀어나온 안내인이 도시까지 안내해 주지요. 안내인은 용병단에 열두 명을 던져놓고 사라져 버립니다. 어떻습니까, 익숙하지 않습니까? 책 잘못 샀어요.


  이러한 일련의 전개에 주인공 일행은 별다른 위화감이나 의문을 드러내지 않는데요. 동굴 밖으로 나오자 자기 이름 말고는 기억이 모조리 사라지는 사태를 겪고도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무척 침착한 사람들이지요. 게다가 밝은 분위기로 서로 통성명도 하고 말장난도 하는 등 라이트 노벨답게 유쾌한데 과연 황국의 민도..! 하고 일본인의 수준에 감탄을 하게 되더군요. 주인공 일행과 더불어 작가도 개연성이라는 걸 잊어버렸더라고요. 뭔가 참고할 만한 정보를 얻어볼까 하고 나무위키에 검색해보니 현실적이고 비참한 전개라고 써져있던데 누가 써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채널A 수준으로 왜곡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친절하게 안내받은 용병단에서는 수습 의용병으로 조건없이 받아주고 한 명당 은화 열 닢(10실버)씩을 건네주는데, 통화 단위가 1실버=100카파고 4카파면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금액이에요. 놀랍지 않습니까? 의용병이라고 해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돈 주고 하고 싶은 일 하라고 내보내는 게 다입니다. 자선 사업입니다. 경제 관념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에요. 게다가 뭐 전직을 하고 스킬을 배우려면 길드로 가보라니 하는 소리도 나오는데 이 소설이 이세계 (게임) 판타지라는 사실을 이쯤에서 밝혀둬야 할 거 같습니다. 다만 국내 겜판처럼 레벨이 있고 스탯창이 보이고 하는 수준은 아니고 게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정도예요. 판타지를 쓰는 건 어려우니 각종 개연성을 게임으로 얼버무리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지요. 작가가 생각없는 중고등학생은 아니니만큼 인물들 입을 통해서 마치 게임 같다는 소리를 몇 번 하는데요. 아마도 이걸 중심 복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모양이지만 편의를 추구하느라 어려운 부분을 피해갔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길드로 가면 해당 직업 길드 사람이 일대일로 일주일 간 교습을 해 주는데요. 길드 가입비는 8실버라네요(웃음).


  배경과 설정을 줄줄 설명하는 앞부분이 끝나고 나면, 이후는 주인공 하루히로와 그 일행들은 파티를 짜서 몬스터를 때려잡고 전리품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나가는 이야깁니다. 평범한 열도의 겜판소라고 할 수 있지요. 주인공이 잘나서 솔플로 다 해먹는 게 아니라 파티플을 한다는 게 이 작품의 유일한 장점입니다. 처음 같이 있던 열두 명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 중 다섯 명이 주인공과 행동을 함께 함께 하는데요. 보통 여섯 명이서 몰려다니면서 고블린 한두 마리를 숫자로 밀어붙여 죽이고 소지품을 강탈하는 강도짓을 합니다. 자고 있는 고블린을 덮쳐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물론 살생을 저질렀다던가하는 죄책감 같은 건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죽인 고블린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숙소에서 식사하고 몸을 씻으며 즐거워하는 주인공 일행의 싸이코패스 같은 면모가 소설의 주된 즐길거리예요. 비록 기억이 사라졌다지만 인물들이 거리낌없이 생명을 죽이며, 암흑기사 남캐는 악마에게 제물을 바치고 사냥꾼 여캐는 길드에서 가르친 애니미즘 동물신을 숭배하는 걸 보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공포스러운 변화지요.


  파티플 전투 묘사도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인데요. 1인칭 소설이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의도인지 전투 묘사가 대단히 난잡합니다. 나쁘게 말하자면 쓸데없이 어지럽고 좋게 말하자면 집단 전투의 혼잡함을 잘 살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통 1인칭이면 주인공 눈앞의 상황만 묘사하고 마는데 주인공 시점으로라도 전체 상황을 전달하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특색이라면 특색입니다.


  결말부는 지루해서 관성으로 읽게 되는데, 작가가 갈등을 만드려고 일행을 이끌던 남캐를 죽입니다. 주인공에 비해 뛰어나서 주인공 역할을 늘리기 어려운 탓인 듯한데 죽여서 해결해요. 인물이 죽는 건 좋지만 별로 좋은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죽은 남캐가 힐러인지라 주인공 일행은 새 힐러를 구인하는데 새로 온 힐러 여캐랑 친해지는 게 뒷내용의 전부입니다. 친해지는 과정에서 복수한답시고 전 힐러를 죽인 고블린 무리를 찾아 몰살하는 게 5단 구성 중 절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고블린 무리는 먼저 공격을 받아서 정당방위로 반격하다가 죽인 것 뿐인데.. 인간쓰레기들입니다. 그 후 다음 권 내용을 예고하고 글이 끝나지요.


  못 읽을 정도로 재미없지는 않지만 머리를 텅 비우지 않으면 짜증스러워서 읽을 수가 없는 소설입니다. 머리만 비우고 읽으면 그럭저럭 끼니가 되었다고 할 법하지만 그래도 돈 주고 읽을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인터넷 연재 소설을 출판한 건지 좀 읽다 보면 글이 툭툭 끊어지는데 이런 점도 별로였어요. 이야기는 괜찮은데 얼개가 형편없는 소설이라고 결론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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