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반쪽 날개의 종이학과 허세 부리는 니체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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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03 Feb 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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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MIN
스포일러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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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돈다.

 

중학생 시절의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변인들의 시선은 모두 나를 향하기에,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거창하며 입 끝에선 무거운 단어들이 쏟아져야만 했습니다.

 

제가 청소년기에 느낀 전능감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사상적 기반 없이도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무엇으로든 자라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매일, 스쿨 카스트 속에서 대면하는 초라한 나는, 이 왜소한 중학생은 아득히 갉혀나가는 전능감의 끝단을 애써 붙들며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이유를 되뇌였습니다.

 

유일한 나를 사랑했었습니다.

 

* 반쪽 달은 떠오르지 않는 야산에서

 

주인공 연수는 모순적인 캐릭터입니다. 앞으로의 행복과 불행의 총량을 검토하여 심사숙고한 결과(연수 씨 본인의 주장) 결정한 자살을 예리와의 만남으로 고민 없이 뒤집어버립니다.

 

지금까지 해보고 싶은 거 아무 것도 못해봤는데 이렇게 죽기는 억울하지 않아? 하면서 연수가 제안한 건 버킷 리스트입니다. 어디서 본 건 많아가지고... 이야기에 재갈은 이렇게 물려집니다.

 

* 어이~~ 다들 모여~

 

그렇게 자살을 시도하는 여자아이 앞에서는 (엄격, 진지, 근엄)한 목소리로 버킷 리스트에 대해 강변한 연수였지만 급우들이 모인 학급 내에선 한없이 허약한 급식 먹는 중학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수의 친구 주연은 많이 다릅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고 운동도 잘하는데다가 시노자키 아이처럼 뻥뻥한 여자 친구까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나마 친구는 잘 둬서 다행이네요, 하는 생각을 하기엔 섣부른 것이었읍니다. 어째 묘사가 심상치 않았건만. 요놈은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던 것이었습니다.

 

가슴 만지고 싶어서간단히 그녀와 사귈 수 있는 주연은 천사에게 속앓이 하였던 마음의 무게를 무가치하게 만듭니다.

 

* 악의 꽃

 

연수와 예리의 버킷 리스트는 차근차근 진행됩니다. 니체의 저작을 빌리고, 연수 생애 특이점인 종이접기를 모두 버립니다. 그리고 교실을 물감으로 물들이고 책걸상을 내팽개치면서 엎어버립니다.

 

하지만 연수는 고결한 다혜의 책상만은 더럽히지 못합니다. 도리어 다혜의 가방에 든 체육복의 시큼한 땀내음을 맡으며 몰래 챙겨 집으로 돌아옵니다.

 

남은 체육복은 연수가 그 날 밤, 침상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나의 마음은 주연의 가슴을 만지고 싶어하는 욕망보다 못한 것이었다.”(실제로 한 말)

 

* 반쪽 달이 가라앉는 하늘

 

그러면서도 연수는 예리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나의 마음은...(중략)...못한 것이었다.(엄격 진지 근엄)”하고 독백한 주제에 여자랑 말 좀 섞었다고 반하는게 엥? 이거 완전...

 

하지만 예리 쪽에서는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어차피 자살 동지일 뿐인데 굳이 애착 관계 형성이 필요한지? “...중략...(엄격 진지 근엄)”한 발언을 한 연수지만 못내 그 부분이 아쉬웠나봅니다. 여자 아무나 만나나요!

 

*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좋아합니다. 작중 중반부가 되면서부터는 덜하지만 프롤로그에서 연수와 만날 때까지만 해도 인용병에 걸린 거처럼 니체가 쓴 문장으로 말의 온점을 찍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진행하면서 왜 중반부로 가면서 인용조 문장이 적어지는지 밝혀집니다.

 

니체는 껍데기입니다. 예리는 보잘 것 없는 자아를 둘러싼 방패로 니체를 사용하였습니다. 심리적 장벽이 적어진 연수에게 굳이 방패를 들이밀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야기 안에서 산산이 해체되어가는 연수처럼, 예리라는 캐릭터도 이 시점에서 완전히 조립됩니다.

 

* 내가 작가 글 좀 아는데...

 

버킷 리스트를 마무리 지으려 지방으로 내려간 그 날 밤 연수는 예리와 한 방에서 잡니다. 연수는 예리가 자는 동안 이 시큼한 코트를 맛있게 먹습니다. 억천만의 사랑도 식지 않을까요.

 

“...(중략)...”(실제로 한 말)이라고 읊은 분이라곤 믿을 수 없지만, 실제로 한 행동입니다. 으음... 같은 씬이 두 번 반복된 거 봐서 이거 완전...?

 

* 눈을 감아, 싱클레어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수에게 세계란 종이학으로 만들어져 오래 전에 빛바래고 닳아해진 것이었습니다. 예리에게 세계란 잔상처로 뒤덮여 매끈한 껍질을 감싸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자신이 범상하고 하찮아지는 세계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당초 약속한 대로 연수는 손목을 끊습니다. 뒤이어 예리가 손을 끊어요.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연수에게 예리는 한 마디를 함으로써 이 동반자살 신파극을 한 편의 보이 밋츠 걸 소설로 완성시킵니다.

 

예리는 연수를, 연수는 예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둘의 찌그러진 세계가 깨져나갑니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다소 평범한 남중생, 여중생의 학창 시절이 되지 않을까요. 굳이 엿볼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보이 밋츠 걸 소설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이제까지 읽은 보이 밋츠 걸 라이트노벨 중 재밌다고 생각한 소설은 ‘AURA~마류인 코우가 최후의 싸움~’ 밖에 못꼽겠어요.

 

그럼에도 글을 보면서, 감상문 서두에 적은 것처럼 제 중학생 시절을 자꾸 떠올리게 되더라구요. 작가 후기엔 저는 이런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지만~’하고 적으셨지만 아무래도 실제로 동급생 체육복을 흠흠...해본 듯한 리얼리티에 제 학창 시절의 자아와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6.02.05. 00:22
감상문 재미있게 쓰시네요.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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