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4화 '터무니없는 지출을 하고 말았습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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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좋아! 상황 끝내주게 안 좋아! 이제 어떻게 해!?"

 "아무래도 저 화염계 능력자를 최우선적으로 무력화해야 될 것 같습니다. 슈퍼 악당 정도 되는 자는 분명히 무기 밀매를 누가 사주했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근데 우리가 놈을 잡을 수 있을까?"

 "숫자는 부족하지만 무장은 우리가 우세합니다."

 그 말과 함께 우리 머리 위로 소리도 없이 다가온 무인 드론이 적을 향해 붉은색의 레이저를 마구 난사했다. 드론의 표면에 총알이 몇 발 날아들었지만, 부질없이 튕겨나갈 뿐이다.

 "젠장, 아무튼 우리 이제 살았어! 네가 슈트를 벗기 시작할 때만 해도 모든 게 다 끝장일 줄 알았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드론이 펑 하고 터지며 화염을 뿜어대더니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 바닥에 처박힌다. 뭔가 하고 박스 위로 살짝 고개를 드니, 양 손에 커다란 불꽃을 단 돼지 녀석이 사방으로 불꽃을 쏘아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불꽃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폭발하자, 홍미나의 부하들이 스턴트맨처럼 팔을 휘저으며 허공을 날아가 처박힌다. 크리스의 드론조차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놈의 방정맞은 입 같으니라고……."

재빨리 상자 뒤에 숨은 나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초인 능력을 지닌 악당을 이 조건에서 상대하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박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미안하지만 그 녀석은 지금 코빼기도 안 보이거든? 이 송수신기가 고장 난 게 아니라면 말이지!"

 "도련님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사용하세요!"

 그렇게 대꾸한 홍미나는 치마 속에서 수류탄을 꺼내더니, 배 쪽으로 휙 던지고는 다시 몸을 숨겼다.쾅! 하는 폭음과 함께 적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파편의 폭풍이 한차례 잠잠해지자, 그녀는 다시 양 팔을 상자 위에 올린 채 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녀의 곁에 웅크린 채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박사?…크리스?……SOS? 젠장. 이 수신기가 정상인지조차도 모르겠어! 다른 중계기가 살아 있긴 해?"

 "서둘러 주세요! 도련님!"

 "나보고 뭘 더 어떻게 하란 말이야!? 혹시 크리스 이 녀석, 혹시 벌써 총 맞았거나 고장으로 추락해버린 거 아냐?"

"그러면 우린 죽은 목숨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폭발물 뒤에 숨어 있는 상태거든요!"

 젠장, 뭔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뭔가 다른 방법이….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소리쳤다.

 "이 망할 꼬맹이가! 들었으면 대답을 해!"

 [꼬맹이라고 하지 마! 바보야!]

 "크리스?"

 나는 눈을 크게 뜨고는 귀에 손을 대었다.

 "크리스 너 맞아? 여태까지 뭐하고 있었어?! 아무튼 짜식! 네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껴안고 뽀뽀해주고 싶을 정도야!"

 [으웩. 징그러~.]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우리 지금 엿 됐어! 아군 쪽 부상자도 다수! 그리고……알았어! 미나 씨가 불덩어리 날리는 돼지 녀석은 가급적 생포해야 된다고 알려주래!"

 [나도 들었어. 하지만 당장 저 놈을 상대할 무기가 없으니까 기다려! 신병기를 현장으로 수동 유도 중이니까!]

 "신병기라고?"

 홍미나가 갑자기 권총을 든 양손으로 내 얼굴을 움켜쥐더니, 입을 귀 쪽으로 가져왔다.

 후욱 하고 바람이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에 온몸에 힘이 빠진다.

 "박사! 부하들의 피해가 심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ETA 1 minute!]

 "하악…날 인간 전화기로 사용하지 마!"

 "라져. 모두 사격 중지!"

 홍미나의 외침에 곳곳에 엄폐해 있던 부하들이 몸을 숨겼다. 한 순간 아군의 사격이 멈췄지만, 상대의 사격은 탄창 하나 분을 전부 소진할 때까지 계속된다.

 "도련님. 제가 나가서 시간을 끌어야겠습니다."

 "뭐!? 안 돼! 지금은 너무 위험해!"

 "더 이상 부하들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홍미나는 무기 상자 위로 손을 흔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항복! 항복한다!"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나와!"

 그녀는 양손을 든 채 앞으로 나섰다. 내가 조심스럽게 상자 밖으로 고개를 들자, 서치라이트가 홍미나를 비추는 모습이 보였다.

 돼지 녀석이 양손에 불을 붙인 채 앞에 나와 있고, 똘마니들이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다. 비록 줄었기는 했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적에, 결정적으로 저 화염 능력을 지닌 돼지 놈은 그 격전에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게 문제다.

 "이거 제법인데? 네 년의 뒤를 조사해 봐야겠구만."

 "마음대로 하시지."

 "잠깐, 그 전에 후딱 그 치마 벗어! 아무래도 그 안에 무기를 숨기고 있는 모양이니까!"

 저 망할 뚱땡이가 뭔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어? 상식적으로 치마 속에 로켓포를 숨기는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 저 치마의 능력이 그거니까 결과적으로는 맞는 방법인가?

 잠깐, 그럼 홍미나는 팬티 차림이 되어버리잖아!

 설마 진짜로 할 생각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인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움 하나 없이 치마 한쪽의 단추를 풀고는 그것을 뒤쪽으로 훌쩍 던졌다.

 "…엇!"

 반사적으로 엄폐중인 상자 뒤에서 뛰쳐나와 치마를 양 손으로 받아낸 나는, 그만 돼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헉, 잠깐만. 지금 내가 제 발로 안전지대를 나온 건가?

 낭패다! 그것도 큰 낭패!

 팬티도 아닌 단순한 치마일 뿐인데 무슨 짓을 한 거야?

 잠깐…팬티여도 이런 상황에서는 안 되지!

 "거기! 너도 손 올리고 앞으로 나와!"

 "항복! 항복이야! 쏘지 마! 살려줘!"

 "걍 쏴버려! 저런 애송이는!"

 "잠깐!"

 그러자 홍미나가 재빨리 내 앞에 서더니 팔을 벌렸다.

 "이 분이 바로 우리 보스다!"

 "뭐라꼬? 저런 새파란 애송이가?"

 "정말이다. 이 분이야말로 조직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세계 정복의 야욕을 뽐낼 수 있는 분이시다! 쏘면 후회할걸?"

 "…지금 니, 사람 놀리나?"

 돼지가 옆에 있던 녀석으로부터 권총을 집어 들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서 있던 홍미나의 몸이 한 차례 흔들린다. 지켜보던 내가 처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었다.

 "윽……!"

 하지만 그녀는 맥없이 무너지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한쪽 팔을 잡고는 다시 선다.

 "미, 미나 씨? 괜찮아!?"

 "진짜여? 저 꼬맹이가 진짜 보스여?"

 타앙! 

 앞쪽으로 넘어지려는 것을 다른 쪽 발을 내딛으며 겨우 멈춘다. 다리를 맞은 듯, 핏물이 그녀의 새하얀 다리를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철저한 무력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내 앞에서 안간힘을 쓰는 홍미나를 어떻게든 지탱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가 선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겁에 질린 채, 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와, 이거 진짜 대단하네. 저렇게까지 하면서도 하는 걸 보니 맞긴 맞나 보네. 닌 저런 거 본 적 있나?"

 돼지가 낄낄거리며 옆의 부하를 바라보더니, 다시 이쪽을 향해 권총을 들어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홍미나는 여전히 넘어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뭘 그렇게 말하고 싶은 기고? 니 말이 맞음 어차피 쫄다구는 살려둘 필요 없으니까, 기냥 마지막 말만 들어줄게."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려는 듯 몸을 기울이며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이 분은."

 홍미나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듯 목을 세우더니,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주인님이시다!"

 "뭐꼬? 뭔 말을 하나 했더니…."

 뚱땡이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그의 앞쪽에 내리 꽂혔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앙!

 바닥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 때문에 정박해 있는 배까지 커다란 물결을 흩뿌리며 휘청거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돼지와 그 일당들, 그리고 우리들을 덮쳤다.

 "도련님!"

 홍미나의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먼지를 헤치며 쓰러져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 바보 멍청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습니다. 놈의 불꽃이 만약 무기 상자로 날아왔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요."

 홍미나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대꾸한다.

 할 말을 잃은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녀의 상체를 억지로 내 몸에 기대게 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돼? 지혈? 모르핀? 여기 모르핀 같은 건 없다고!"

 "도련님. 진정하시고, 가지고 계신 제 치마를 이용해서 다리나 팔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꼭 묶어 주세요."

 "아, 알겠어! 하고 있어!"

 이빨로 치마를 물어뜯고는 그녀의 팔에 감고 꽉 조인다.

 그녀는 고통스러운지 약간 신음했지만, 곧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

 "그 다음에는…박사의 발명품 구경이나 하죠."

 홍미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자욱한 먼지가 내려앉자, 허공에서 날아와 박힌 물건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건…….

 그건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뭐꼬!?"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돼지가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야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보기엔 저거는….

 "드럼 세탁기네요."

 홍미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게 그냥 세탁기가 아님을 나와 그녀는 안다.

 저건 킬러 세탁기였다.

 그것도 크리스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한 것처럼 보이는.

 "가서 확인해 봐!"

 "예, 예…!"

 소총을 든 채 세탁기로 접근하던 똘마니의 가슴에 거대한 드릴이 박혔다. 삽시간에 투다다다닷 하고 눈먼 총알들이 비처럼 세탁기 표면을 강타했지만, 킬러 세탁기는 드릴을 휘둘러 희생자를 바다 쪽으로 던져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뭣들 하는 기가! 쏴라! 쏴!"

 "팔다리가 달려 있는 세탁기인데. 드릴이 추가됐네."

 "또 방탄 사양이고요."

 "아, 돼지 녀석. 필사적으로 불덩어리를 날렸어."

 "도중에 불덩어리가 꺼졌는데요."

 "세상에, 미나 씨, 봤어?! 방금 세탁기 안에서 회전하고 있던 물을 발사한 것 같은데?"

 "게다가 들어 있던 남성용 팬티 하나가 녀석의 시야를 절묘하게 가려버린 것 같군요."

 "잠깐, 저렇게 쳐도 안 죽는다는 게 말이 돼?"

 "일단은 초인이니까요…최상의 컨디션이라면, 저 드릴에 뚫려도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영웅들에게 강한 정신력이 중요한 이유죠."

 "정신력으로도 무리야. 저거 망치인가? 아, 강철 손이었군."

 "콘크리트 바닥에 묻어버릴 기세로 내려치고 있네요."

 "방금 저 로봇, 제풀에 한쪽 팔이 떨어져나간 거야?"

 "힘에 비해서 관절의 내구력은 별로군요."

 "조용해졌다. 끝난 것 같아."

 [지금 내려갈게!]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서 검은색의 종이비행기가 느리게 선회하며 접근하더니, 나와 홍미나 앞에서 미끄러지듯이 멈췄다.

 "다들 괜찮아!?"

 크리스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리더니 우리 쪽으로 달려온다. 그녀는 홍미나로부터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녀의 부하들도 하나 둘 이쪽으로 다가왔다.

 "출혈이 엄청 심해 보이잖아! 내가 늦은 건 아니지?!"

 "총상입니다. 그리 대단치 않습니다."

 "바보! 이 정도면 쇼크사 할 수도 있어!"

 크리스는 자신의 검은 종이비행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삽시간에 비행기의 표면이 모래처럼 일렁거리는가 싶더니, 평범한 종이비행기의 형태에서 좀 더 넓적한 형태로 바뀐다.

 "이 멍청이들아! 얼른 미나를 여기에 실어! 너희들도 부상자를 수습해서 아지트로 돌아가! 의료 시설을 준비해 놨으니까!"

 "알겠습니다!"

 부하들의 굵직한 손에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으켜 선 홍미나는 곧 크리스의 비행기 위에 눕혀졌다. 나도 막 거기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홍미나가 손을 들어올린다.

 "…잊지 마세요. 정보를 얻는 게 우선입니다."

 "맞다! 그 망할 돼지 자식이!"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돌려 녀석에게로 걸어갔다. 새빨간 피 웅덩이와 적들의 시체를 지나, AK소총 하나를 집어 들고는 녀석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ps- 손발이 오그라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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