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1. 발단ㅡ 첫 번째 날. “신비한 능력의 전학생과의 위험한 로맨스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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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05 May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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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호성軍

사립 세평고등학교. 평산시 평산동의 언덕 위에 위치한 이 학교는, 34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사립고교로서 남녀 공학, 두발 자유, 우수한 교수진, 다양한 설비 등 다른 학교가 부러워할만한 요소 이외에도, 학생들은 자주적으로 학습하고 활발히 자기 개발에 힘쓰며 이 나라의 새로운 포석이 되기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열심히 자랑스러운 세평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인생의 한번뿐인 학창시절을 가치 있고 유익하게 보내고 있다.

라는건 신입생 안내서에나 나오는 뻥이고, 실제로는 소도시에 있는, 하다못해 예전엔 공동묘지였다던지, 지하에 뒷산과 연결된 비밀 연구소가 있다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사장이 신도시 개발로 학생 수가 늘어나 3년 전 신 교사를 세울 때 이런 저런 건설회사의 뇌물을 골라가며 받고 마지막엔 하청을 따낸 회사에서 시외의 ○△ 고급횟집의 모둠회(大. 25만 원 이상)를 대접받고 박하사탕과 이쑤시개, 라이터를 모두 챙기는 파렴치한 짓을 했다ㅡ라는 기분 나쁠 정도로 자세한 소문이 차라리 진짜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평범한 학교다.

굳이 특징을 찾자면 남녀공학이라는 점(+요소), 두발 자유라는 것(+ 요소), 야자가 없다는 것(+요소), 사립인 만큼 뺑뺑이로 가는 주제에 가격도 꽤나 세다는 것(- 요소), 부지 문제인지 뭔지 산중에 세워져 매일 체력증진은 걱정할게 없다는 것(- 요소)과, 3년 전 소도시엔 너무 과분한, 마치 5평 단칸방 구석에 달린 50인치 벽걸이형 LCD TV같은, 넘쳐흐를 것 같은 품질의 신교사가 있다는 것 정도. 아, 그리고 까먹을 뻔 했네, 부활동에 상당한 지원을 한다는 것 정도다.

학교 특활부란 다 고만고만하고, 특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의 부활동은 대다수가 내신이나 벌려고 설렁설렁 토요일 2교시쯤 기어갔다 기어 나오는 부서라는 걸 생각하면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그런 대세를 거슬러 오르며, 세평 고등학교는 웬만한 부서에는 고정부실을 제공할 정도의 지원을 하고 있다.

신교사가 앞서 말했듯이 ‘학교’라는 존재에 달리는 모든 옵션을 달아놓은 슈퍼 울트라 퍼펙트 그레이트 돈지랄 하이퀄리티로 완성된지라, 34년간 학생들과 교사들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 올린, 추억이 가득한 학생들의 포근하고 안락한 보금자리였던 구교사……. 미안, 이것도 뻥이네. 여하튼 그런고로 학교 측은 34년이나 발효되어서 벽엔 금이 가득하고 누렇게 뜨고 낡다 못해 삵아 안 그래도 쓸모가 없는, 그러나 해체를 하자니 또 조금은 미묘한 구교사를 부활동 건물로 제공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신교사가 울트라 캡숑 하이퍼 돈지랄 교사인지라 부활동을 위한 지역도 물론 존재했고, 때문에 난방도, 냉방도 계절에 따라서 리버스 옵션으로 자동 실행되는ㅡ쉽게 말해 여름엔 찌고 겨울엔 어는ㅡ최첨단 시스템의 구교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라고 하면 이렇게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지.

 

‘문학 창작부’라는 부서가 있다.

부원은 5명, 거기에 고문 교사가 1명. 총 6명의 아담하다면 아담한 부서.

작년 정식 인정을 받지 못했던 눈물의 1기를 지나, 올해 드디어 부원을 채워 정식으로 2기를 맞게 되는, 아무리 봐도 이름만 들으면 ‘그다지 눈에 안 띌 것 같은’ 부서.

일단 이 부서를 말하자면, 말 그대로 ‘문학 창작’을 하는 부서다. 전혀 사용되지 않고 창고로만 사용되는 구교사에 자리한 유일한, 말 그대로 유일한 학교 관련 부서. 구교사 시절, 학생들의 교육에 좋지 않은 선생들의 흡연이란 행위의 편의를 위해 흡연용 베란다를 만드는 탓에 보통 교실의 절반 사이즈의 방 하나가 남아버린 구교사 5층의, 바로 그 남아있는 절반 사이즈의 교실을 차지한 부서.

그 특징이나 부서가 일으킨 특이한 사건을 대라고 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자면,

이 부서는 방송실 점거 따윈 껌으로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는 ‘부장은’ 이지만.

   

“하아.”

방과 후, 바로 그 부실 안에는 문학 창작부의 부원 7명ㅡ동시에 학생부의 블랙리스트 1순위 학생들ㅡ중 3명이 모여 있었다. 북서향 창문으로는 황금빛 햇빛이 맹렬하게 침투하고 있었고, 그를 방어할 커튼도 없는지라 3명ㅡ정확히는 2명ㅡ은 방 이곳저곳에 쌓인 원고와 잡동사니가 기괴한 무늬를 만드는 석양빛을 받으며 과자와 음료수를 축내며 세상의 끝을 맞이한 것 같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제외된 한명은 2학년의 성태열. 머리카락이 눈을 가린다는걸 빼면 평범한 학생으로 보이지만,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18시간을 가볍게 능가하는 괴물 같은 사나이. 증명이라도 하듯 구석의 가죽이 다 헤진 낡은 손님용 소파 위에서 낮잠 중.

“나 왔다.”

끼익.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고문 선생인 이가람 선생님이 힘없이 낡은 문을 열고 들어와 구석의 자신의 자리ㅡ고정부실이니까ㅡ에 앉아 곧바로 과자로 손을 뻗었다.

작년, 부산에서 수도권으로 상경해 신입교사로 의욕이 충만하던 시절, 책을 좋아하고 젊어선 작가 지망생이었던지라 당시 2학년이던 부장의 꾐에 넘어가 문학 창작부 창설을 주장했지만, 그녀는 부장의 진정한 속셈을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은 부장의 난리수습 담당. 지나간 옛일을 후회하며 알콜과 친해져 알콜중독이 아닐까 싶을 경지에 도달했다. 부임 당시 좋은 머릿결의 어깨까지 오는 쇼트 컷도 스트레스 때문인지 지푸라기 같은 머릿결이 되어버렸고. 요새는 흰머리도 부분부분 보인다.

동안이라 그럭저럭 귀엽게 보일, 조금만 신경 쓰면 남학생을 설레게 할 청순한 외모를 마치 망친 원고지마냥 팍 구긴 채로 그녀는 입에 과자를 문채 서랍장으로 손을 뻗어 맥주 캔을 꺼내곤 호쾌하게 들이켜 버렸다. 신성한 학교에서, 지도해야할 학생들 앞에서. Please, Don't try this at school.

“(꿀꺽꿀꺽꿀꺽)푸하!”

“…….”

맥주 캔이란 생각보다 꽤나 양이 들어있는 존재다. 그 맥주캔 하나를 호쾌하게, 입도 안 떼고, 원샷으로 비워버리곤 그녀는 다시 서랍에서 캔 하나를 꺼내었다.

“저, 저기, 선생님?”

아직 모든 게 신기한 1학년생 권연아는 가람을 말리려 멈칫멈칫하면서 말을 꺼냈지만, 소심한 성격이 출력해내는 모기만한 소리는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글을 쓰고 읽는 게 너무 좋아 소심한 성격도 잊은 채 앞뒤 잴 것 없이 학교에 이런 부서가 있다는 걸 알자마자 가입했지만, 채 1개월도 안되었는데 맹렬히 후회중.

“내는 뭔 일이 일어나도 수습해주는 보라색 괭이 로봇도 아니고 뿔인지 콘지 달린 퍼런 파충류가 아이다. 내를 와 그리 몬 살게 구는데? 애당초 방송국을 점거할거면 바그다드나 저기 텔아비브에 AK랑 RPG라도 들고 가가꼬 하든지. 아 이건 내가 원하는 문학부가 아인데, 뭐고 이기…….”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이 베수비오 화산 AD 79 ver. 처럼 분출될듯한 말투로 맥주의 힘인지 쌓인 게 많은 건지 그녀는 끝도 한도 없는 신세한탄을, 본능에서 솟아 나오는 사투리로 자신이 신세한탄을 들어주고 이끌어야할 제자들 앞에서 MG-42, 아니 미니건 마냥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신세한탄은 그만하고, 그래서 부장하고 현상이는요?”

웬만한 랩퍼도 울고 갈 비트로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선생님을 부부장을 ‘자청하는’ 3학년 이예화가 단도직입적으로 씹으며 말했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이름에 걸맞게 남학생은 물론 여학생도 넘어갈 외모에 예의바른 말투, 기품 있는 몸짓, 거기에 뛰어난 지식으로 ‘여왕님’에 걸맞는 모습이지만, 밖에서는 기품 있어 보여도 실제론 70~80년대 여성 악역이나 내뱉을 ‘오호호호호호호호’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인기 아이돌그룹의 리더(남)과 팀원(남) 커플이 나을지 아니면 솔로가수(남)과 그의 라이벌가수(남) 커플이 나을지를 고민하는 기분파 동인녀 여왕님일 뿐.

“몰라.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는데, 성호는 되지도 않는 변명이나 지껄이지, 현상이는 쫄아서 찌그러져있지. 내가 학생부에 빌어도 들어주지도 않는 상황이었다고. 아아, 또 감봉이겠지. 아직 지난달 산 ‘엑박한바퀴’도 할부가 남아있는데……. 설마하니 부원들을 끌어드리고 문학부의 이름을 알릴 작전이라는 게 방송부 점거라고는…….”

하아. 어느새 냉정을 되찾아 표준어로 돌아온 선생님의 투덜거림에 전원이 한숨.

“이번에야말로 정학, 아니 퇴학일지도…….”

부부장 이예화의 중얼거림에 방에 있는 의식이 있는 3명ㅡ한명은 자고 새로 한명 들어왔으니까ㅡ은 전부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교칙에 ‘방송실 점거’같은 규정은 없겠지만ㅡ설마 진짜 하는 놈이, 그것도 ‘한두 번 한 게 아닌’ 미친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을까ㅡ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도 목숨을 유지할까.

덜컹. 바로 그때 문이 호쾌하게 열리며 커다란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강타했다.

“무르군 모두!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네!”

석양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친 사나이는 당당한 자세로 방 안의 전원을 한번 바라본 뒤 뚜벅뚜벅하고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방 가운데를 지나 창가를 향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어디서 구해 온 건지 알 수도 없는 우아한 마호가니 책상. 비치는 석양을 당당하게 마주하며 사내는 만천하가 들으라는 듯이 외쳤다.

“내가 죄를 지은 게 없는데 퇴학당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정의는 승리하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끝도 한도 없이 이어진 호쾌한 웃음소리는 방을 휘감고 구교사를 휘감고 학교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늘 있는 일이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고 그런 문학 창작부 부장이자 편집장, 동시에 학생회 블랙리스트 영구 0순위이자 SS랭크, 모든 세평 고등학교 학생들의 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자 장래희망은 악의 대마왕인 부장의 웃음소리 사이로, 부장 부하 No.1, 좋게 말하면 측근이고 나쁘게 말하면 똘마니인 김현상은 풀이 죽은 얼굴로 조용히 문을 닫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하아. 웃음소리 사이로 미니 사이즈의 한숨이 내뱉어졌다. 난 왜 이렇게도 운이 없는 걸까. 머리를 감싸고, 소년은 머리를 책상에 심었다.

폐활량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부장의 웃음소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름, 김현상. 나이 17세. 남성. 세평고교 2학년 재학 중. 양친 건재. 아래로 평산 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인 여동생이 하나.

외모 체격 성격 성적 신체능력 건강 대인관계 기타 등등 모두 평범. 자랑이라면 뭐든 대강은 한다는 점, 단점이라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점. 꿈 없음. 장래 희망은 얇지만 길고 굴곡 없는 평범한 인생. 지금의 희망 사항은 평화롭고 조용한 학창시절.

마치 바닐라맛 아이스크림 같은, 특징이 없는 소년. 이것이 그의 스펙.

작년, 아직 1학년일 때, 중학교 내내 같이 다녔던(라기 보단 이쪽이 끌려 다녔던) 1년 선배가 자신이 필요하다고 끌고 갔던 게 이런 저주였을 줄이야. 만약 지금 타임리프라도 할 수 있다면 그날 아침에 자신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라도 등교를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아니면 설사약이라도 먹여서 하교라도 빨리 시키던지.

이젠 한숨도 안 나온다. 아, 방금도 내뱉었지.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어제 방과 후 늘 그렇듯이 문학부에서 시간이나 분리수거 하고 있었는데, 부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래! 이 방법이 있었군!”

의아해하는 전원에게, 부장은 단순하게 ‘문학부 신입부원을 늘리고 문학부의 이름을 전교에 알릴 계획’이라고만 했다. 부부장과 세영, 선생님만 조금 더 물어봤을 뿐, 현상을 포함한 나머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 말릴걸.

당시만 해도 막연히, 어차피 신입생 안내회 난입사건 때문에 다 알 텐데…….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점심시간, 채 종도 치기 전 교실에 난입한 부장은 현상 끌고 갔다. 작전개시, 라고 짧은 설명만 했을 뿐.

최소한의 상식도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도, 도대체 어떻게 용서받은 거예요?”

작년부터 부에 소속되어있던 2학년 은세영이 겨우 웃음소리를 끊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예상도 못한 사태였는지, 놀라서 안 어울리게 말까지 더듬고 있었지만.

“음? 용서라니.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받는단 말인가. 난 교칙 따윌 범한 적 없네. 거기에 아무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았으며, 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도 하지 않았네. 즉 난 하늘 아래 떳떳하다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학생부장 선생님은 ‘두고 보자! 언젠가는 반드시 네놈을 이 학교에서 뿌리뽑아주마!’ 어쩌고 한 것 같군. 뭐 내 알바인가.”

억지논리에 말도 못하고 굳어버린 세영과 기타 사람들을 보고, 현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정신을 차린 이가람 선생님이 한숨을 푹 내쉬곤 부장의 앞에 섰다.

“저기, 성호야. 뭐 이미 학생부에서 이런저런 소리 들었을 테니까 크게 뭐라고는 안하겠는데, 아까 학생부에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우린 정식 부서야. 작년처럼 아무 짓이나 막 했다가는 이젠 부 해체도 가능하다고. 이번에야 어떻게 교장 선생님이 편을 들어주셔서 살아남았지만 계속 이렇게 하다가는 언젠간 정말로…….”

“여하튼, 이 이야기는 후일을 위해 묻어두고, 은세영 작가. 신입 부원을 몇 명이나 들어왔나? 100명? 200명? 아니지, 전교에 방송이 나갔을 테니 전교생인가. 곤란하군. 1000여명이나 되는 부원이라니.”

“임마!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 쳐무그라! 선생님의 권위는 생까는기가!”

모처럼만에 세우려던 선생님의 권위가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에(반은 자신이 부숴버렸지만), 부원들은 전부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꿀꺽꿀꺽꿀꺽. 반쯤 차있던 맥주 캔을 마저 비워버리고 캔을 강하게 책상에 내려치곤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선생으로서의 권위 같은 게 없는 거지. 서로를 바라본 뒤 아무 말 없이 부원들은 다 같이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애시당초, 니는 `적당히`라는 말도 모르나? 디질때까지 니 꼴리는 대로 하고싶은거 다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나? 내도 니나이때 그래 생각했는데 니는 이제 니 앞길 찾아야 되는 거 아이가. 사회 나가서 직장 생활할 때 니 꼴리는 대로 하면 사회에서 좋게 봐줄 것 같나? 니 하나 잘몬해서 부서가 날아가면 우짤기고, 대표면 이름값을 해야 될 거 아이가!”

그 이후로도 가람은 사투리로 잔소리의 폭포수를 쏟아내고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대강 그 긴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제 정식 부서니 해체라도 안 되게 제대로 좀 행동하자. 덧붙이자면 활동 내용도.” 헉헉헉. 그리고 부장은, 아무 말 없이 거친 호흡을 하는 선생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하튼, 은세영 작가. 신입은 몇 명이나 들어온 건가? 역시 전교 약 800명 전부인건가? 일단 부서 문제부터 고려해야겠군. 구교사 전체를 써야 할 텐데 말이야.”

“아무도 안 왔어요.”

우뚝. 격침당해 구석에 박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맥주 한 캔을 하나씩 처리해가는 선생님 따윈 무시한 채, 턱을 괸 채 부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김칫국을 마치 군용 짬밥 통으로 들이키듯이 벌컥벌컥 마시던 부장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마치 호러영화의 악마 들린 사람이나 할 듯이 목만을 천천히 돌려 입을 열었다.

“아무도 안 오다니?”

“말 그대로, 부입 0.”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그다지 재미없는 농담이군. 농담은 되었네. 신입부원들은 어디에 있는 건가?”

천천히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정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저항하는 사람의 필사적인 태도가 실려 있었다.

예화가 입을 열자, 부장은 이번엔 머리를 고정한 채 몸만을 돌리며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그다지 재미없는 농담이군. 마치 내가 아는 누가 하는 3류 개그 같아. 농담은 되었네. 신입부원들은 어디에 있는 건가?”

천천히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사실이라는 걸 알지만 그딴 거 믿지 않겠다는 기운이 가득 실려 있었다.

“저, 저기, 견학생이나 부입 희망자는, 저기, 몇 명 있었어요.”

오늘의 점심시간 부실관리 담당이라 견학생과 부입 희망자를 안내했던 연아가 머뭇머뭇 입을 열자, 부장은 당장 V-J day 사진이라도 연출할 듯 맹렬히 다가가 연아의 어깨를 잡았다. 반응이 느려 도망치지 못한 연아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식사 감으로 삼을듯한 부장의 표정에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그래서, 견학생은, 부입 희망자는? 에잇, 권연아 신입작가! 난 그렇게 참을성이 좋지 못하네! 시작부터 클라이막스가 좋단 말이네! 자, 그래서 어떻게 된 건가!”

“히, 히이이익…….”

“그만해요! 연아 울려고 하잖아요!”

세영이 참다못해 연아를 부장의 마수에서 꺼내 예화에게 넘기자, 그제서야 연아는 예화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무서웠어요, 무서웠어요.’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걸 한번 힐끔 보고, 각오를 굳힌 다음, 세영은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부장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애당초,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데 구경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죠! 거기에 그런 방송을 하는 부서에 가입 하겠어요? 저 같으면 안하는데요! 거기에 특별히 부원이 많이 필요한 부서도 아닌데 왜 그리 부원에 목숨을 걸어요!”

그리고 그 박력 앞에서, 부장은 세영을 힐끔 쳐다보더니 마찬가지로 허리를 펴고 당당히 서서 대신 팔짱을 낀 다음 대답했다.

“사람이 많은 게 재밌잖나.”

비틀. 순간 세영이 정신적으로 강력한 펀치를 먹고 다운 했다는 게 모두의 눈에 보였다. 겨우 그런 거였나. 그리고 부장은 멍해진 모두를 보곤 귀를 후비며 말하기 시작했다.

“지식도 재산도 사람도 적도 뭐든 많을수록 좋은 거네. 카드 두 개 가지고 도둑잡기를 하면 얼마나 재미없겠나. 거기에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다는데 작가가 많을수록 양질의 작품이 나오지 않겠나. 많이 쏘다보면 한발은 맞는 법이네. 그건 그렇고 실망스럽군. 정말로 대한민국의 문학은 죽은 것인가. 예전 민주주의 조국을 꿈꾸며 화염병 대신 펜으로 강압적인 정부에 맞서 싸우고,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짓고 피어나는 새싹을 노래하며 높고 험난한 문학이라는 산을 거침없고 두려움 없이 등단하려던 소년소녀 열사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거란 말인가. 무덤 속에서 우리의 대선배들이 눈물짓고 계신게 이 눈에 선하군.”

부장은 이제 마치 연극배우처럼 넘치는 감정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이런 부서가 있다는 게 더 눈물지을 요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턱을 책상에 박은 채 부장을 바라봤다.

“여하튼, 부원들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언제나 위대한 사람이나 인물들은 역사가 증명해주었네. 분명 우리들도 그렇겠지. 시간이 지나면 늘어난 부원들이 그를 증명할걸세. 여하튼, 그건 그렇고 이번 달의 주제가 정해졌다!!

빽. 버럭. 콰쾅. 그런 의성어로 표현될 수 있는 부장의 외침에 겨우 진정된 연아는 다시 고개를 가리고 “꺄악”하는 비명을 질렀다. 부장은 그쪽엔 약간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자, 자. 이번 달의 주제도 정해졌으니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은 정해졌네. 지금 당장 작업에 착수하게나.”

“…….”

역시, 이번 달은 좀 늦었군. 현상은 이번엔 이마를 책상에 박았다. 쿵.

 

문학 창작부는 매달 문학부 간행지를 발매한다. 내용은 창작 소설 모음집. 가격은 책 한권 분량에 비하면 무지하게 저렴한 가격(이라고 부장은 주장). 공급은 문학 창작부 부서에서. 발간일은 매달 1일. 보통 단편 연작으로, 그달의 주제는 부장이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주제는 보통 매달 초반쯤에 결정.

문제는 그 주제의 내용.

“……그래서, 이번 달 주제는 뭐에요?”

추가로 지난달 주제는 마카로니 웨스턴, 그리고 전대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개학 전이라 제대로 교내에 풀리지 않았다는 거다. 현상의 생각엔 정말로 이만한 다행도 없었다.

“이번 달은 상당히 고민했지. 아무래도 신학기이고, 신입생들에게 우리 부서를 알려야하지 않겠나. 2월호는 재고가 상당히 남았으니 말이네.”

참고로 재고는 방이 넘쳐흐르는 구교사의 특징을 이용해 모두 보관중. 추가로 한마디 더 하자면 작년 4월 이래 11번이나 간행지를 발매한 이래 첫 회 최고 판매율 30%를 기록한 채 블랙 먼데이 마냥 하락 일로 중. 그런 주제에 찍어내기는 아낌없이 찍어낸 덕분에 옆의 풀 사이즈 교실의 반은 슬슬 간행지를 가득 담은 박스로 가득차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난국을 타개할 참신하고 획기적인 위대하고 대단하신 이번 달 주제는 도대체 뭐에요?”

세영의 잔뜩 비꼬는 말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부장은 어깨와 허리를 피고 당당히 외쳤다.

신비한 능력의 전학생과의 위험한 로맨스다!!

“…….”

 

정적.

“이야, 정말 이거다! 라는 기분으로 머리에 전류가 흐르더군. 누군가가 발산한 전파를 내 안테나가 제대로 수신한 거지. 아무리 요새 대세가 ‘막장’이라던가 하는 깨는 노선을 노린다고 해도, 역시 왕도가 위대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하여 오랜 시간동안 자리를 유지하고, 모든 사도의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점 아니겠나. ‘미소녀 최고! 전학생 최고! 로맨스 최고! 거기에 이능력 최고!’를 외칠 이 나라의 덕있는 어린이, 아니 인간들은 꽤나 많을 것 같지 않나. 성태열 작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나라의 덕있는 인간의 대표로서 자네의 고견을 나에게 들려주게.”

“역시 부장님이십니다. 덕있는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알고 계시는군요. 미소녀 최고! 전학생 최고! 로맨스 최고! 거기에 이능력 최고! 불타오릅니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태열이 벌떡 일어나 덕있는 인간의 대표로서, 마치 어딘가 우주거주민의 천재성과 자주성을 역설하는 공국의 구호를 외치는 자세로 부장의 외침을 제창하고 있었다.

“……이번 달이야말로 빠져도 될까요.”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말하는 세영을 보며, 부장은 콧김을 내뿜고는 말했다.

“아까도 말한 기분이 들지만, 재미없는 농담이로군, 은세영 작가. 해병대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

“풀 네임에다가 작가까지 붙여서 부르지 마요! 거기에 전 해병대가 아니라고요!”

“아무려면 어떤가. 그리고 자네는 우리 문학부의 자랑스러운 일원이자 작가 아닌가. 나의 풀 네임과 작가 호칭은 그런 존중의 의미일세.”

화를 내며 당장에라도 소리를 바락바락 지를듯한, 아니 지르고 있는 세영을 무시한 채 부장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책상을 두 손으로 내려쳤다.

“자아! 시간이 없네! 늘 그랬지만 마감은 월말! 빨리빨리 그 자랑스러운 회색 뇌세포를 굴려 나에게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게나! 마감일까지 원고를 제출 못하면 그 이후는 알아서 하게나! 여하튼 오늘은 이로 해산하네!”

어느덧 석양이 창문에서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떠한 태클이나 말도 소용이 없다. 부장의 폭주모드는 한번 온 되면 목표가 완료되지 않으면 절대로 오프 되지 않는다. 시속 50마일 아래로 떨어지면 폭발하는 버스나 탈선 고속열차도 이것보단 덜 저돌적일 것이다. 그 앞에 바리게이트 같은 건 세워봤자 세금 낭비일 뿐. 태백산맥을 일렬로 늘어놔 가져다 놔도 뚫고 지나갈걸.

드르륵 드르륵. 그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부원들은 모두 한숨을 쉬며 짐을 꾸렸다. 선생님과 세영만이 한숨을 푹푹 쉬었을 뿐. 부원 및 선생 등 전원은 각자 가방을 들고 부실을 나설 채비를 했다. 미리 부실에 가져다둔 가방을 들고 의자를 밀며 일어나려던 현상도 마찬가지였다. 드르륵.

“아, 자네는 잠시 기다려야지, 김현상 작가?”

“?”

현상의 머리 위에 경비를 서다 이상한 소리를 들은 병사처럼 물음표가 떠올랐다. 부장은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 한쪽 다리까지 꼬고 손은 깍지를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말했다.

“자, 아까 자네가 했던 반역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예?”

쾅! 책상을 강하게 내려치며 부장은 외쳤다.

“아무것도 안했다고? 부실 문을 닫아 선생님들의 신속한 진입을 막은 건 자네 아닌가!”

“!”

설마하니 그런 걸로 따질 줄이야. 중학교 이래로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몇 번 의외로 소심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쳐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애당초 당신이 시킨 거잖아! 너무 많은 말이 입으로 모여들어 병목현상에 얼어붙은 현상을 바라보며 부장은 말했다.

“자네에게는 벌칙으로 특별 임무를 맡기겠네. 아, 괜찮아. 어려운 일은 아니야.”

툭. 부장은 이상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부실의 열쇠를 책상 위에 올려뒀다. 늘 부장이 마지막으로 문을 잠그며 나갔던 그 열쇠를.

“오늘은 자네걸세.”

오싹 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끼이익. 그때 들려온 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부실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아까 먹고 마신 과자와 맥주 캔조차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 저 멀리에 타다닥 하는 재빠른 발걸음 소리들만이 들려왔다.

멍한 표정의 현상을 냅두고, 부장은 현상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어, 잠깐만. 현상의 손이 의미 없이 전방을 향해 뻗어나갔지만, 그 손을 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황금색 석양빛이 사라진 청색 하늘이 창문 위쪽부터 진한 그라데이션 효과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익, 쿵.

 

“그래서, 벌칙이 뭐야?”

“지난 원고 분류 작업. 언제 날 잡아서 모두 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됐다고 하데.”

“……오늘내로는 집에 못가겠네.”

“……부모님에게 늦는다고 전화는 해뒀으니까.”

아무도 없는 학교. 아무도 없는 구교사. 온통 불이 꺼진 그 적막함 사이로, 구교사 5층의 보통 사이즈 절반 사이즈 부실만이 밝은 빛을 창밖으로 발하고 있었다. 시계는 이미 1시간 빠른 뉴스가 끝나고 제시간에 하는 뉴스가 중간쯤은 했을 무렵. 현상은 어깨와 뺨 사이에 핸드폰을 낀 채 산더미 같은 원고를 분류하고 있었다. 11개월 동안 아무도 정리하지 않은 원고는 북한산 사이즈는 못되더라도 남산정도 사이즈는 이루고 있었다. 물론, 뻥 좀 쳐서.

“그래서, 어떻게 용서받았던 거야?”

“교장선생님이 마침 지나가다가. 그 정도야 학창시절의 청춘 아니냐고 하니까 마리오도 할 말이 없나보더라.”

“그 할아버지는 한두 번도 아니고 왜 그리 부장을 감싸고도는지 원…….”

참고로 지금 대화 상대는 세영. 그나마 제정신인 부원은 둘 정도뿐이라 상당히 친한 두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친하냐고 묻는다면 서로 잊어먹은 준비물 정도는 빌려줄 정도. 올해는 같은 반이라 불가능하지만, 뭐 그 정도로는 친하다는 말이다. 덧붙여 왜인진 모르겠지만 교장은 부장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상태. 추가로 ‘마리오’는 학생주임 별명.

“아, 미안. 학원 수업 시작할 것 같으니 슬슬 끊어야겠다. 못 도와줘서 미안해.”

“아냐아냐. 그럼 내일 보자.”

뚝. 전화가 끊기고, 전파 사이로라도 연결되던 링크도 끊긴 채 현상은 완벽하게, 철저하게, 퍼펙트하게 혼자가 됐다. 무인도의 표류인보다도 더 혼자인 상황. 차라리 윌슨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부실 안을 둘러보고 한숨. 그렇게 사투를 벌였건만, 도대체 이놈의 종이는 증식이라도 하는 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때려치우고 싶다. 아니, 지금까지 버티면서 한 게 대단한 거다. 보통 사람이라면 30분도 안되어서 때려치우고 갔겠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서. 그런 잔대가리가 없어서 지금까지 버텼지만, 이만큼이면 충분하겠지.

때려치우자. 그런 생각을 마치고 현상은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반 정도는 해치운 것 같으니, 설마 뭐라곤 안하겠지.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마지막으로 문을 잠그는 것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 하지만 구름이 끼어서 달빛도 들지 않는 구교사와, 그 구교사에 얽인 이런 저런 전설이 생각나 다시 문을 따고, 문을 열고 불을 켠 뒤 부장의 서랍에서 비상용 플래시 라이트를 꺼내고 위의 작업을 한 번 더 반복하고 나서야 현상은 부실을 나섰다.

컴컴한 구교사를 플래시에 의존하며, 구교사에 얽힌 각종 소문들이 머릿속으로 침투하는걸 막으려 그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밤의 학교라는 존재는 무지하게 무섭다. 낮의 활기찬 학교와는 정 다른 냉정하고 차가운 분위기. 다른 생각을 필사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딜 정도로 밤의 학교는 위험하다.

이능력 전학생이라. 거기에 로맨스 추가. 아차, 위험한 로맨스였지.

어떤 의미로는 지난달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내용이다. 참고로 지난달 현상이 쓴 내용은 정통파 웨스턴 스토리였는데, 부장은 ‘창의력과 독창성이 없다’라며 맹비난을 했다. 그래놓고선 자기의 작품을 보여줬는데, 솔직히 어디가 마카로니고 어디가 웨스턴이고 어디가 전대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뭐 내 것은 내가 보기에도 뻔한 내용이지만 저런 물건보다는 내 글이 더 낫지 않을까ㅡ 하고 현상은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부장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여하튼 이번 달은 구상만 해도 시간을 꽤나 잡아먹을 것 같은데.

애당초 도대체 신비한 능력이라는 게 뭐냔 말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역시 초능력이라던가…….”

현상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번엔 부장이 좀 피곤했나보군. 뻔한 내용. 하긴 부장도 지난달에 ‘올해는 좀 사람들에게 친근한 주제로 가보지’ 랬으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작년은 정말 파탄파탄 파탄의 연속이었으니까. 차라리 나을지도ㅡ가 아니지. 여하튼 뻔한 내용일수록 창의력이 없는 나에겐 유리하지. 현상은 자괴감인지 자신감인지를 가득 채우고 생각을 시작했다. 깜깜한 구교사에서 라이트 하나에 의지한 채 길을 걸어가면서 하자니 잡생각이 들긴 했지만.

사실 문학부라고 꼭 주제에 얽매이는 건 아니다. 부장의 기분에 의해 왔다 갔다 하는 독재정권부서인 이상, 특례도 많고 의외로 인기가 많은 글도 많다. 대표적으로 부부장인 이예화는 매달 주제와는 관계없는 팬픽을 써내고, 은근히 부녀자(腐女子)들ㅡ이라기 보단 대다수의 여학생ㅡ에게 인기가 많다. 이가람 선생님도 주제와는 관계없이 대하장편역사소설을 쓰는 중이지만, 읽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 태열이는 두어 달에 한번 쓰지만 그 정말 의외인 글 솜씨 때문에 인기는 좋고, 세영이는 그냥 부장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자유 주제로 글을 쓴다. 문제는 이렇게 이리저리 빠지는 사람이 많다보니 제대로 주제대로 쓰는 건 부장과 연아와 현상정도라는 것. 그만큼 현상은 주제에 얽매이게 된다.

 

마법소녀다.

부장이 말하는 전파를 수신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두려워졌다. 축하한다. 김현상. 18년 인생 끝에 드디어 미쳤구나.

 

마법소녀,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장르가 발전하여 현재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는 소재. 초기에는 마법으로 벌어지는 각종 사건등 여성아이용 일상물에 가까웠으나 시간이 지나며 여자 유아층과 애니 오타쿠층에게 어필하는 쪽으로도 발전하여 마법으로 사랑을 이루거나 인간을 유혹하는 악의 세력과 맞서는 종류도 탄생했다. 그에 따라 현재 적어도 매니아층에게 마법소녀라는 존재는 보통 단순히 마법을 사용하는 소녀라기보다는 변신과 싸움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며, 5명의 세일러복을 입은 여전사 집단은 이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놓였다고 한다. 하지만 90년대만 해도 미소녀 = 마법소녀라는 공식이 성립했으나 이후 학원 연애물에 밀려 현재 청년 남성층을 노린 마법소녀물은 그다지 나오지 않고 있다. 지식 출처 부장과 태열이. 그런데 이걸 써먹자고? 드디어 니가 미쳤구나.

 

잠깐, 깊숙이 생각해보자. 어차피 창의력 따윈 없다. 필력도 없다. 그렇지만 끌려와서든 뭐든 문학 창작부 부원인 이상 뭔가 써야한다. 그럼 귀찮은데 사삭 하고 끝내버리자. 이대로 머리를 굴려봤자 이 뻔한 머리에선 뻔한 것만 나오겠지. 그럼 어쩌다 주파수가 맞아 수신한 전파나 써먹자.

시작은 야밤에 마법소녀와 마주친 주인공. 음. 좋았어. 어차피 단편이니까. 이런걸 길게 연재할 생각은 없다. 이런 게 인기를 끌어 연재 요청이 올 리도 없고 말이지. 만약 온다면 정말로 대한민국에 미래란 없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구교사 입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휴우. 그 사실을 눈치 챈 현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4년이나 역사가 되고, 고등학교면 이런저런 무서운 소문도 꽤나 있다. 흔히 보이는 7대 불가사의도 그렇고. 거기에 사람의 손길이 요새 거의 닿지 않아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구교사면 더하지. 내가 아는 7대 불가사의만 해도 과학실에서 자신을 해부하는 인체인형이라던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로 연주하는 4층 여자 화장실이라던지, 층을 오를 수 없는 계단이라던지, 도서실의 목매단 소녀라던지, 옥상에서 뛰어 내리는 소녀라던……. 지…….

그런데 저 구교사 옥상 난간 위의 소녀는 누구야?

 

“…….”

사고정지. 신교사의 교무실에 부실 열쇠를 가져다 두고 설렁설렁 걸어 나오는 길에 눈에 띈, 구교사의 옥상에 보이는 물체. 불어오는 봄의 산들바람에, 커다란 보름달을 배경으로 삼은 채 서있는 소녀의 짧은치마는 살짝 펄럭이고 있었다. 밤인데다 멀리 떨어진지라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은색 트윈 테일의, 가냘픈 선의 소녀라는 건 두 눈에 확실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7대 불가사의 마지막이 7대 불가사의를 목격하면 죽는데 7대 불가사의가 전해지는 거였지.

어머니, 불효자는 여기서 죽나봐요. 악질 부장 때문에 잔업에 시달리다가 운 없이 타이밍 좋게 오늘도 번지점프를 하려는 유령소녀를 구경한 죄로. 차라리 달빛이라도 밝으면 죽기 전에 눈 보신이라도 하지. 잘하면 보이겠는데.

소녀는 기다란 봉을 들고 있었다.

그 아래, 구교사 앞엔 뭔가가 거대한 물체가 있었다.

정확한 정체는 파악할 순 없었지만, 여하튼 처음 보는 물체인건 확실했다. 크기는 코끼리 정……. 어라? 코끼리?

그리고, 그 순간 소녀가 뛰어내렸다.

“우, 우와아앗!”

만감이 교체한다는 건 이런 거겠지. 순간 현상의 머릿속에는 달려가서 받는다, 무시한다, 119에 신고를 한다, 도망간다, 소리를 지른다, 시간을 달린다, 워프를 한다, 거미줄을 쏜다, E=mc² 등등의 수백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평범한 소년은 단지 입을 어벙하게 벌리고 구경할 뿐.

그리고 그 사이, 뛰어내리던 소녀가 자기 키만한 봉을 휘두르자, 코끼리만한 물체 주변에 파란색 폭발이 일어났다. 퍼버벙.

상식이란 게 파괴되는 건 순간이다.

그대로 폭발 사이로 착지, 그 순간 그녀의 등 뒤로 2차 폭발이 화려하게 일어났다. 펑 펑 퍼버벙 퍼벙 펑펑 퍼버버버버벙. 콘서트의 폭발 이펙트는 이미 가뿐하게 초월한, 엔간한 액션 영화의 중간 삽입씬으로 넣어도 충분한, 아니 넘칠 이펙트.

쓰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현상은 자신의 정신력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구교사의 앞뜰에 가득한 푸른 불꽃. 건물과 나무는 태우지 않는 모양이지만, 대신 그 위에 달라붙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몽환적인 백 스테이지를 등 뒤에 두고, 소녀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뒤의 강한 빛 때문에 은빛 트윈 테일과 펄럭이는 망토의 검은색 실루엣만 보였지만, 그 사이로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꿀꺽.

위험하다. 여러모로 위험하다. 특히 목숨이. 현상의 머리는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유령이든 뭐든 상관없다. 적어도 상식이라는 내용과는 그다지 연관 없는 상황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위험하면 도망치라고. 소시민적 삶이라고 비웃었지만 아버지는 현명하셨다. 아버지, 나 오늘부터라도 아버지를 최고로 존경하기 시작할래요. 근데 어떻게 할까요. 저 지금 발이 안 떨어지는데.

소녀는 현상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걸음 또각, 꿀꺽, 두걸음 또각, 꿀꺽. 목구멍은 이렇게나 잘 움직이는데 발은 왜이리 안움직이는걸까. 머리가 슬슬 지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젠장,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위험한 상황을 만나면 재빨리 피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는데, 상상훈련은 도움이 안 되는구나. 영화의 그건 연출이었어!

그리고 그 순간 푸른 불꽃 사이로 뭔가가 튀어나왔다. 아니, 솟아올랐다. 소녀는 재빨리 등을 현상의 쪽으로 돌린 채 그 물체와 대면했다.

어머니, 이건 꿈이겠죠. 빨리 좀 깨워주시죠. 학교 늦겠습니다. 아니, 이게 예지몽이라면 깨우지 말아주세요. 이대로 자면 내일이 오지 않겠죠.

정확히 표현하긴 힘들지만, 굳이 말하자면 게였다. 꽃게. 보통 꽃게탕이나 간장게장이 되어서 뱃속으로 들어갈 꽃게. 문제라면 아깐 코끼리만 했다면 지금은 고래만했다. 흰수염고래만한 울트라 슈퍼 사이즈는 아니더라도, 포경선이 노릴만한 슈퍼 사이즈는 나올 것 같았다. 구교사 건물은 박살나지 않았네. 다행이야.

털썩. 현상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가랑이 사이는 안 젖었네. 다행이야.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잘 버틴 거겠지. 아니, 어차피 꿈일 텐데 뭘. 오늘 꿈자리는 좀 사납군. 푸른 불꽃 사이로 커다란 게는 집게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컥철컥. 소녀도 봉을 고쳐들었다. 휭휭휭. 현실도피를 시작한 불쌍한 고등학생 하나를 관객으로 둔 채, 아무도 모르는 학교에서의 방과 후 전투가 마악 2라운드로 돌입했다.

어머니,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현상이 100% 온전한 제정신으로 생각한 마지막 단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지구는 좋은 별이다. 꿈자리가 사나워도 반드시 다음날은 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았다. 아침 만찬의 참가자는 아버지, 어머니, 현상, 그리고 중3 여동생. 그건 그렇고 어제 그 꿈은 뭐였으려나. 애석하게도 프로이드나 융과는 인연이 없기에, 현상은 자신의 꿈을 해석할 순 없었다. 단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을 뿐. 첫째, 만화 좀 그만 보자. 두 번째, 부장은 악의 축이다. 하지만 둘 중 한 가지는 해결 가능하더라도, 하나는 아무래도 한동안은 해결하기 힘들 것 같았다. 힘든 인생이야.

“하아.”

지구는 나쁜 별이다. 꿈자리가 사나워도 반드시 다음날은 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원주택촌 사이로 뻗어있는 긴 통학로. 그 길을 수많은 학생들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오르고 있었다. 매일매일 하이킹이라니.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런 데에 학교를 낸 건지 원. 아마 초대 이사장은 새디스트 아니면 하이킹 매니아,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차량의 파워에 꽤나 자신이 있는 양반이었겠지.

“아침부터 뭔 한숨이야?”

“크악!”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강렬한 통증에 현상은 허리를 숙였다. 짝, 하는 엄청난 소리. 아마 지금 현상의 옷을 벗기면 붉은 손자국이 등짝에 문신마냥 새겨져 있겠지. 그리고 문신의 화가는 그런 현상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 자리를 퍽퍽 하고 두들겼다.

“어라? 미안미안. 특별히 고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분노로 연결되었다. 에잇, 너도 죽어봐라. 막 다시 팔이 닿는 순간, 현상은 재빨리 상대의 목을 잡고 조였다. 훌륭한 헤드락 기술. 그러나 한 가지 생각 못한 것이 있다면, 이 허우대가 생각지 못한 공격에 한쪽 발을 공중으로 들며 볼만한 공중제비를 돌았다는 점. 휘리릭 쿵. 현상도 같이 쿵. 무슨 헐리웃 영화마냥 깔끔하게 공중을 돌며, 둘은 서로 얽혀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상한 게 상상된다면 인생을 돌아보세요. 주위의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두 명의 슬랩스틱 콤비, 아니면 그냥 바보 둘은 고통에 몸서리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위 여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에 의해 당장에라도 쥐구멍, 아니면 가깝고 편리한 하수구로라도 숨고 싶었다.

“빨랑 비켜 이 자식아! 무거워!”

“그러니까 왜 등을 후려쳐! 아프잖아!”

투덜대며, 둘은 일어나 잠시 신경전을 벌이곤 같이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바보짓 제대로 했네 젠장. 이건 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현상은 툴툴거리느라 친구인 신동우의 말의 초반부분을 놓쳐버렸다.

“……제는 뭐야?”

“응?”

“사람 말은 좀 들어라 좀. 이번 달 주제는 뭐냐고. 슬슬 부장이 주제발표를 할 때가 되었는데? 거기에 니가 아침부터 한숨을 팍팍 쉬며 가면 그것밖에 이유가 없고.”

눈치는 좋아요. 신동우. 작년에 이어서 2년 연속 같은 반. 사실 처음엔 어쩌다 자기가 가까워 친해졌는데, 2년 동안 지내고 몇 번 등굣길에 만나다보니 꽤나 친한 사이가 되었다. 안경까지 쓴 모범생 얼굴임에도 글이나 공부는 더럽게 싫어하면서도 소설은 좋아해서 문학부 간행물의 몇 안 되는 애독자중 한명이기도 하다. 굳이 단점이라면,

“오, 저 여학생 좋은데? 몇 학년 몇반 누구 일려나? 혹시 넌 아냐? 에잇, 근데 친구랑 같이 있으면 말도 걸 수 없잖아. 여하튼, 이번 달 주제가 뭐야?”

잘난 점도 없는 주제에 솔로부대 탈출에 목숨을 건다는 점.

“이번 달 주제라……. 말 해주, 기 싫어. 안 해줄 테다. 나중에 읽어.”

팬서비스나 해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주제를 알려주려던 현상은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이놈에게 이번 달 주제를 발설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친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우는 해맑은 척 하는 눈동자로 현상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넌 예쁜 미소녀 캐릭터가 아니야. 얼굴 좀 치우고 말해. 쏠린다고. 치워. 치우라고.”

“뭐임마. 이 몸의 이 얼굴을 무시하는 거냐. 이 맑은 눈을 보며 말해. 어때, 입이 근질거리지?”

“시끄러. 태교에 좋지 않은 그 얼굴 치우지 않으면 내 친히 물세수 시켜준다.”

“나의 이 귀여운 얼굴이 뭐가 어떻다는 거냐. 자아, 망울거리는 눈방울 공격이다. 말해달…….”

“카악ㅡ” “오늘따라 날씨가 좋군.”

 

“자아, 모두 자리에 앉아라. 조회 시작하자.”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세평고교 2학년 3반의 전원은 자리에 앉았다. 물론 자리에 앉았다는 거지 조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은 선생님의, 일갈도 아닌 부드러운 말에 기가 꺾이지 않는다. 벌써 40년 이상을 교직에서 종사한, 명예퇴직 직전의 늙은 선생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굳이 정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방법이 없는 건 둘째 치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필요성도 방법도 있었다.

“일단 오늘은 몇 명은 벌써 들었겠지만, 전학생이 왔다. 부모님 사정으로 해외에서 왔다고 하더구나.”

몇 명의 학생들이 ‘오오’ 하는 작은 환성을 질렀지만,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떠들고 있었다. 전학생이라는 건 어느 문화권 어느 국가 어느 학년이든 화제의 집중거리인 것이다.

“가능하면 미소녀 전학생이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청춘 만화가 아니라고. 하물며 넌 러브 코미디 주인공이 아니야. 그만 꿈 좀 깨지?”

“시끄러. 사나이는 평생을 살면서 세 번은 인기절정일 때가 온다. 난 인기절정도 필요 없으니 36.5도 생체 옆구리 난로가 필요하다고. 미소녀 전학생, 미소녀 전학생, 미소녀 전학생…….”

옆 자리의 동우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현상은 한숨을 팍 쉬곤 교실 앞문을 바라보았다. 동우에겐 말할 수 없지만, 사실 내심으로는 그도 미소녀 전학생을 바라고 있었다. 말했다시피 전학생이라는 존재는 화제의 집중거리니까. 특히 여성이라면 더욱더. 미소녀 전학생, 미소녀 전학생, 미소녀 전학생…….

“덧붙여, 이번 전학생은 예쁜 여학생이다.”

교실 내 50% 정도의 인원의 환호. 좋아. 서로의 작은 목소리를 들은 동우와 현상은 각자 서로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로 엄지를 교환했다. 남자란 똑같은 짐승이다.

“잘 하는 짓이다. 입 찢어지는 거 봐라. 귀가 아니라 정수리에 입 꼬리가 걸리겠네.”

뜨끔. 그러고 보니 뒷자리는 세영이였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세영의 능글거리는 말투에 현상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표정을 누그리려고 했지만, 인간 본성을 억누르기엔 안면 근육은 본성에 충실했다.

“그럼, 들어오세요.”

선생님의 말에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고, 반의 50% 정도 인원은 당장이라도 앞으로 튕겨져 나갈듯 긴장하기 시작했다. 미소녀냐. 정말로 미소녀인거냐. 그리고 미닫이식 앞문이 마저 열리고, 한명의 여학생이 교실 안으로 들려왔다. 2학년 3반의 신동우군(17세. 남성)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날 나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믿음이 현실로 펼쳐지는걸 보았어. 그래, 러브 코미디 만화는 거짓이 아니야. 그리고 신은 존재해. 땡큐 갓. 미소녀 전학생 잘 수령했어요.”

화사한 걸음. 평범한 춘추용 교복이 마치 몸에 잘 맞춘 잘 만든 드레스 같이 느껴지게 하는 슬림하고 어딘가 여린 선의 몸. 허리 정도까지 오는 희귀한 은발의 트윈 테일. 붉은색 눈동자는 타오르는 듯이 빛나고 있었고,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 사이에서 매끄러운 입술은 아름다운 투명한 레드와인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어디에 내놔도 자신감이 있을것 같은 외모와, 약간 긴장한 듯한, 그러면서도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은 정말 반칙이었다.

즉, 무지막지한 미소녀였다. 약간 여린 선의, 남성의 보호욕구와 부성본능을 자극하는.

<SYSTEM>: 2학년 3반 남학생들은(는) 혼란에 빠졌다!

<SYSTEM>: 2학년 3반 남학생들은(는) 전학생에게 매료되었다!

<SYSTEM>: 2학년 3반 남학생들의 망상력이 100 증가되었다!

“우왓, 진짜 미소녀 전학생이다! 어이, 현상아. 보라고. 우리들의 신은 있었어!”

기뻐 죽겠다는 투로, 반의 모든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혼란 매료 망상력 100+ 상태의 동우는 현상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소리죽여 외쳤다. 소리죽여 외치기란 듣기엔 어려워보이지만 혼란 매료 망상력 100+ 상태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 아, 아아아!”

그러나 한명의 남학생의 시스템 연산 자료에는 저 내용이 추가되지 않았다.

“에, 소개하죠.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양입니다.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살아와 한국의 문화는 잘 모르지만, 다행히도 한국어는 잘 한다고 하니 의사소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자기소개 좀 해줘요.”

묘하게 해외 유학생을 의식한 탓인지, 담임은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걸 신경 쓸 리 없는 남학생들은 이젠 혼절 직전이었다.

“안녕하세요.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이라고 합니다. 유이라고 불러주세요. 외국에서 오래 살아와서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취미는 특별히 없지만, 마술을 좀 좋아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약간 쑥스러워 하며, 맑고 고운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고, 유이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웃었다.

<SYSTEM>: 2학년 3반 남학생들은(는) 심한 혼란에 빠졌다!

<SYSTEM>: 2학년 3반 남학생들은(는) 전학생에게 심하게 매료되었다!

<SYSTEM>: 2학년 3반 남학생들의 망상력이 500 증가되었다!

“우와, 우와. 난 지금부터 소심파로 전향한다! 유이! 나다! 결혼해주라! 이봐, 너무 조용하잖아. 어이 현상아, 너무 기뻐서 넋이 나갔냐?”

진짜로 입 꼬리가 정수리에 걸릴 것 같은 얼굴로 동우는 시선은 유이에게 고정한 채 현상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뒷자리의 세영도 작은 목소리로 “호오”라며 관심을 토론했지만, 현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외국? 마술?

“어, 어어, 아아, 아, 우아?”

“임마, 너무 기뻐도 그러지마. 이상해보이잖아. 괜찮아, 우리에게 신은 있었어. 지금부터 공략만 잘하면 돼!”

반의 전원을 둘러보던 유이는 현상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을 잠시 움찔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를 못 챌 찰나. 그러나 현상은 흔들리는 시선으로도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고, 그건 확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깨우지 말아달라니까요. 그게 예지몽이라고는 말 안하셨잖아요.

 

“마법소녀?”

“네. 마법소녀요.”

쉬는 시간에 겁도 없이 3학년 교실로 뛰어 들어온 현상을 앞에 세워놓고, 부장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현상의 말을 듣고 있었다. 미간을 주무르며 고개를 숙이는 부장을 보고, 현상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댁이 안 들어주면 이런 미친 사태를 누구에게 말하라고!

“아 글쎄 진짜라니까요! 아니, 저도 제가 미친 소리 하는 건 알겠지만, 진짜인걸 어떻게 해요!”

“마법소녀라……. 마법소녀…….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여전히 미간을 마사지하며 작게 중얼거리는 부장의 목소리를 듣고, 현상은 약간 움찔했다. 혹시 헛소리 말라고 하면서 화내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오토매틱으로 마른 목구멍에 침이 공급되었다. 꿀꺽.

“아니, 진짜라니까요! 어제 봤다고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꿈이 아니라니까요! 오늘 온 전학생이 구교사 옥상에서 휙 하고 떨어지면서 봉을 휙 하고 휘두르니까 파란색으로 불꽃이 퍼버벙 튀면서 그 안에서 코끼리만한 꽃게가 고래만한 크기로 커져 서로 죽어라고 싸웠다고요!”

“김현상 작가……. 정말이지, 정말이지 자네라는 자는…….”

부들부들. 주먹을 쥔 왼손이 떨리고 있었다. 현상은 침을 다시 삼키고 생각했다. 헛소리 말라고 화내는 건가. 그런 건가. 화냈을 때의 부장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비록 현상이 중학교 이후로 알고 지내며 단 한번밖에 본적 없지만.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온다고. 현상의 머릿속에 잠깐 그때의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저, 정말이라니…….”

“김현상 작가……. 김현상 작가!”

벌떡. 덥썩. 큰 소리로 현상을 부르며 일어나 부장은 자리에서 맹렬히 일어나 현상의 어깨를 잡았다. 꽉. 으스러지도록. 그 엄청난 충격에 현상은 말도 못한 채 몸을 이리저리 꼴 수밖에 없었다. 말을 못하는 건 당연히 대뇌가 강렬한 자극에 근섬유로 제대로 명령을 전달 못하기 때문.

“김현상 작가! 지금까지 미안했다! 난 자네를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로군!”

손에서 힘을 빼고 대신 이번엔 어깨를 강하게 팡팡팡 치며 말한다. 아까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현상의 통신경은 비명을 내지르며 교통대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네가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줄은 상상도 못했네. 난 자네도 강압적인 교육제도에 독창성이라는 소중한 지적 자산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불운한 피해자라고만 생각했었지만, 아무래도 나의 그런 생각은 사물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소인배적 생각이었나 보군. 자네라면 적당한 초능력 같은 소재를 들고 와서 날 슬프게 할 줄 알았는데, 마법소녀라니. 자네 같은, 스스로를 평범하고 상식적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독창성이나 동심을 잃어버린 재미없는 사람이 생각해낼 소재는 아닌데 말이야. 아무래도 나의 자네에 대한 냉정하리만큼 잔혹하고 심했던 평가는 나의 무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행위였던 것 같네. 자네가 오늘 내가 나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줌과 동시에 나를 맹렬하게 감격하게 만들어주는군. 오오, 김현상 작가. 난 감격했네.”

“……네?”

“좋아. 매우 좋아. 이번 글 소재는 그것으로 계속 진행하게. 심지어 이 나도 아직 나도 제대로 아이디어가 생기지 않았는데, 자네가 이번엔 1등이로군. 그것도 나름대로 참신한 아이디어로 말일세. 아무래도 아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은 다른 부원들과 같이 있으면 방해가 되겠지? 오늘은 부실에 오지 않아도 좋네. 열심히 그 독창성을 유지하면서 창작활동에 매진하게. 아, 우리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자네의 그 말이 나에게 Inspiration을 부여하는군. 이번 글, 매우 기대하겠네. 음? 수업종이 치는군. 특별히 학생답게 공부를 하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활동함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는 행동하길 바라겠네. 그럼 수고하게.”

“아, 잠깐…….”

현상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못 알아들었어. 저 양반은 못 알아들었어.

입은 뭐라 움찔거렸지만 채 말을 못한 채, 현상은 부장에게 이끌려 교실에서 쫓겨났다. 복도의 학생들은 차례대로 자신의 교실로 들어가고, 귀에는 2교시 시작을 알리는 벨만이 들려왔지만, 현상은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가만히 서있었다. 교실? 갈수 있을 리가 있나.

교실에 돌아가면 그녀가 있단 말이야.

 

학교 안 무작위 카운셀링. 그 첫 번째 시간. 어젯밤 마법소녀를 목격했는데, 오늘 전학생이 아무래도 그 소녀인 것 같습니다.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화 좀 그만 보고 일찍 발 닦고 자라.”

“이번 달 글 내용이야? 재미있겠네.”

“그 농담 그다지 재미없어. 그런데 말이야…….”

“부장하고 놀 때부터 알아는 봤다만, 그만 부장이랑 어울려.”

“드디어 니가 미쳤구나. 뭐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리가. 가까이 오지 마.”

“그러니까 니 말은 어제 하교하는 길에 마법소녀를 봤는데, 오늘 전학 온 유이가 그 마법소녀다?”

끄덕. 그 반응을 본 세영은 일단 오른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왼손을 뻗어 현상의 머리에 대었다.

“열은 없는데…….”

“미친 소리로 들릴 거라는 건 알지만 진짜라니까.”

“너 주제를 너무 의식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좀 편하게 써봐. 그러니까 정신착란을 일으키지.”

“아니, 아까!

크게 외치려던 현상은 마지막 순간 소리를 팍 죽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며 세영은 고개를 돌려 현상이 바라본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전학생이라는 점, 그것보단 그 외모 때문에 많은 수의 남학생과 여학생들에게 부끄러워하며 둘러싸여있는 유이가 보였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난 아직 안 미쳤다고. 내 눈을 봐. 이게 농담하는 눈이야?”

지잉. 곧 세영과 현상은 서로의 눈을 노려보기 시작했지만, 지나가는 동우의 여러 의미가 담긴 시선과 미소를 느끼고 세영은 동우의 다리를 걸고, 현상은 동시에 등을 미는 것으로 눈싸움을 끝냈다. 쿠당. 조용한 비명, 하지만 둘은 듣기를 거부했다.

“흠, 흠! 여하튼, 진지하게 하는 말이라 이거지?”

“진짜라니까! 증거는 없긴 하지만, 정말로…….”

“응?”

절박한 투로 말하던 현상이 눈을 돌린 채 말을 늘이자, 세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책상 위에 올려진 두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고, 얼굴도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세영은 현상의 시선을 따라갔다.

유이였다.

유이가 서있었다. 약간 쑥스러워하듯 얼굴을 약간 내리고 붉힌 채, 양손으로 치마를 꼭 쥐고 있었다. 확실히 여성인 세영이 보기에도 남자애들이 왜 그리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건 반칙이잖아. 그리고 그 뒤와 유이의 자리 주변을 중심으로서 반의 전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이가 다른 아이를 먼저 나서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주위의 아이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현상의 떨리는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저, 저기, 김현상, 이라고 하나?”

“어, 어엉? 나, 나말이야?”

웅성웅성. 전원이 놀라움의 감정에 휩싸인 채 둘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전학생이 어째서?

“저기, 우리 반에서 너하고만 아직 이야기를 못해봐서……. 난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이라고 해. 유이라고 부르면 돼. 앞으로 잘 부탁해.”

쑥스러워하며, 유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창피한 듯 말한 뒤 손을 내밀었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귀에 들려오는지 안 들리는 건지, 현상은 그 손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여전히 무지막지하게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현상은 유이의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현상의 떨리는 손 때문에 유이의 손까지 같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기, 그렇게 안 떨어도 되는데…….”

“아, 미, 미안.”

여전히 당황해서 머리가 텅 비어버린 채로 현상은 입을 열었지만, 오른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잠시 어색한 침묵.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 꺄악!”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리려던 유이는 책상 다리에라도 걸린 건지 주춤했고, 무게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즉, 현상의 품속으로 안겼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높은 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봐, 봤어? 아, 아니. 이런, 원통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유이가! 저 녀석에게!

“미, 미안! 괜찮…….”

“조금 있다가 점심시간에 구교사로 와. 아무도 없는 거 아니까 걱정 말고.”

움찔. 당황하며 말하던 현상은 귓가에 들려온 작은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잠깐, 지금,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멍해있는 현상을 남겨둔 채, 그 말을 끝으로 유이는 벌떡 일어나 당황한 듯 “미, 미안…….”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자리로 뛰어갔다. 아이들 또한 현상에게 “변태!” “좋겠다!” 등등의 말을 남기고 그쪽으로 뛰어갔지만, 현상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헤에. 좋아 죽으려고 하네? 여하튼 니 말은 틀린 것 같은데? 분명 뭔가 착각한 거겠지. 저렇게 착하고 귀여운 애가?”

물론 능글거리는 태도로 현상을 바라보며 하는 세영의 말도 들릴 리 없었다.

어머니, 어째서 절 깨우셨나요. 아니, 이거 꿈이죠? 그렇죠?

……그렇겠죠?

 

점심시간. 혼란스러운 신교사와는 정 반대로 너무나도 평화스러운 이곳은 구교사. 덧붙이자면 옥상.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하게 공황상태인 현상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비장한 포즈로 옥상에 서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구의 운명이라도 짊어진 채 악의 대마왕과의 최후의 싸움에 나서는 용자처럼 보일듯했다. 실제로, 현상의 머릿속 상황은 더 심각했지만.

끼익. 그리고, 낡은 문소리와 함께, 유이가 조심스럽게 걸어와 현상과 대치하며 섰다. 거리는 약 10m. 분위기는 딱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사랑고백 따위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싱글거리는 얼굴의 유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상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뽑아라!”를 외칠 듯 경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특수상대성이론 정도는 가볍게 증명할 수 있을 정도의 연산 작업이 진행 중. 도대체 뭐야. 날 불러낸 건 무슨 의미지? 그것보다 진짜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마법소녀인거야? 그것보다 난 왜 불러낸 거야. 입을 다물게 시키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위험하…….

“저기,”

“와, 왁! 뭐, 뭐야?!”

유이의 한마디에 현상은 깜짝 놀라 온몸을 퍼덕거리며 외쳤다. 그 광경을 보고 피식 웃은 후, 유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현상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와, 안 돼. 살려줘.

“저기, 아까부터 궁금했었던 건데…….”

“자, 잠깐! 거기 서서 말해! 다가오지 마! 아, 아무에게도 말 안 할 테니까! 잘못했어!”

우뚝. 당황하여 외치며 손을 휘두르는 현상의 앞에서 유이는 멈추었다.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돌린 채 떨고 있던 현상은 아무 일도 없자 고개를 돌려 유이를 바라보았다.

“흐음……. 역시 기억하나보네. 아까 교실에서부터 설마라고 생각은 했지만……. 신기한 일이네. 분명 제대로 처리했었는데.”

유이는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며 현상을 바라봤고, 현상의 머리는 느리지만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유이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로딩 76%, 87%, 91%, 99%, 100%. 로딩 완료.

진짜였냐.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네……. 어제 뭘 실수한 건지 원…….”

이젠 현상을 무시한 채 유이는 자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고, 현상은 도망쳐야하나 어떻게 해야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친다고 어떻게 하라고? 유이의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며 남자의 가슴을 흔드는 목소리에서, 선명하고 평범하지만, 미묘하게 와일드한 느낌의 목소리로 바뀌어있었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미소도 어느새 사라졌다. 현상은 순간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아깐 기대했는데, 영업용 목소리에 영업용 미소였냐!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일단 뒷일은 그렇다 치고 도주다. 교실 안에서면 뭐라고 못하겠지. 그럼 조용히 살그머니 사라져야겠…….

“잠깐만 기다려. 아직 용건 안 끝났단 말이야.”

움찔. 팔짱을 끼고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며 자신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보이던 유이는 현상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말했다. 조용히 도망가려던 현상은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걷기 시작하려는 미묘한 자세로 멈춰 섰다. 유이는 어깨 앞으로 온 트윈테일을 젖히며 고개를 돌려 현상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랑 계약 좀 맺어야겠는데.”

“계, 계약?!”

이건 뭐냐. 이게 말로만 듣던 피라미드 기업이냐. 이제 난 열심히 세일즈 전설을 만들어야 하는 건가. 아니, 이게 아니지.

계약? 마법소녀랑? 나더러 뭘 하라고? 여러모로 위험하게 들린단 말이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난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

“니가 뭘 생각하는 진 알겠는데, 그런 건 아니니까 안심하고.”

다행이다. 독심술이라도 있는지 현상의 생각을 읽으며, 유이는 말을 계속했다.

“간단한 계약이야. 1조. 나의 정체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2조. 이후 임무가 완료될 때까지 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3조. 임무 돌입 시 옆에서 임무 수행 장면을 목격한다. 지원까진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상 3조. 미안하지만, 이건 강제로라도 체결해야하는 계약이니까 거절은 불가능해.”

잘됐군. 거절이 불가능하다니. 근데 딱 5초만 늦게 말해주지 그랬어. 마침 거절하려고 했는데. 현상의 머릿속은 이런 한줄기 연산 끝에 딱 한마디를 붙였다.

엿됐다.

“대신 이쪽은 니 안전을 보장해주고, 이후에도 1조를 지킨다는 조건 하에서 포상 등을 해주는 거야. 말했다시피 강제니까 거절하는 건 포기하고. 자, 이 계약서에 서명해.”

이런 강제 조약 따위 듣도 보도 못했다고.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도 아닐뿐더러 네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대부, 아니 대모인 것도 아니란 말이야. 열려라 입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 따위 때려치워! 하지만 현상의 바람과는 다르게 공황상태에 놓인 머리와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현상의 상태와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이는 허리 뒤쪽에 달려있는 작은 색(Sack)을 연 뒤 한 장의 종이와 볼펜을 꺼냈다.

“자, 빨리 서명해. 빨리 가지 않으면 반에서도 시끄러울 테니까. 아, 내가 이런 성격이라는 것도 말하면 안 된다? 소심한 편이 시간이 지나면 눈에 덜 띄니까. 그리고 나 배고파. 빨리 서명해.”

“잠깐, 난 벌써 모두에게 니가 마법소녀라고 말했다고! 이미 1조를 어겼으니 계약이 불가능하잖아!”

다행이다. 겨우 열린 입에 감사함을 느끼며 현상은 자신 있는 투로 가슴을 폈다. 그래, 넌 마법소녀다. 내가 봤으니까. 뭐하면 증명서라도 써주지. 보증인도 되어주겠어. 근데 그건 나랑 전혀 상관이 없거든? 다행이다! Viva다 나의 수다스러운 입! 자, 그러니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그러나 현상의 자신만만한 표정은 바로 풀어졌다.

당황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 유이가 눈살을 잠깐 찌푸렸을 뿐, 여전히 종이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으니까.

“…….”

“……서명하라니까?”

“아니, 말했지만 난 벌써 말했다니까?”

“그래서?”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라는 표정이 양쪽의 얼굴에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대응이 불가능하잖아. 유이는 정말로 배가 고픈 듯 허리를 약간 숙이고 배를 문지르며 투덜거리며 말했다.

“계약 이후에 계약 조건을 위반하면 문제지만, 그 전이면 문제가 안 되는 거 아니야? 거기에, 솔직히 나라도 마법소녀 같은 건 안 믿는다. 그리고 이래봬도 난 1급 요원이라고. 들통 나는 삼류랑은 달라. 목격한 사람도 없잖아. 거기에 앞으로 의심받아도 난 평범한 여학생인걸? 곧 의심 따윈 풀린다고. 그러니 걱정 말고 사인해.”

그런 일류가 왜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에게 걸려서 이러는 거야. 애당초 일류면 일류답게 나 같은 놈한테도 들키지 말라고. 그리고 설령 니 말이 맞다고 치더라도 난 서명 안 해. 절대로!

머릿속으로는 그런 당당한 멘트들이 떠올랐지만, 여전히 긴장한 몸은 말을 잘 따라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대는 마법소녀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어제의 꽃게 마냥 마법으로 두들겨 맞기는 싫다고. 그런 식으로 현상이 우물쭈물하자,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유이는 외쳤다.

“에에이! 사내놈이 그렇게 소심해서! 본 니가 잘못이야! 이젠 몰라!”

덥석. 그대로 유이는 손을 뻗어 현상의 손에 펜을 쥐게 한 뒤, 그 손을 잡곤 서명 란에 아무렇게나 쓰게 해버렸다. 당황한 채로 현상은 멍청하니 자신의 손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 행동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이래. 유이는 계약서를 바라보고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좋아. 서명 완료.”

“뭐라고?!”

깜짝 놀라 외치는 현상을 이상한 것 구경한다는 듯 바라보고, 유이는 말했다.

“음? 아, 걱정 마. 니가 니 이름을 썼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니가 펜을 쥐고 이 계약서에 뭔가를 썼다’가 중요한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굳이 불만이면 제대로 쓰게 해줘?”

“이건 사기잖아!”

지금까지 말 못하던 울분을 풀듯 외치는 현상을 바라보며, 유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어차피 거절도 불가능하다니까. 그냥 그런가 쳐. 그럼 난 밥 먹으러 간다. 아, 참고로 이제는 1조 2조 3조 다 못 어기니까 기억해두고. 그리고 앞으로 매일 밤 9시에 학교로 와. 준비물 같은 건 없으니까 그냥 오면 돼. 아, 카메라 등은 반입 금지. 뭐 찍어도 별것 없을 테지만. 그럼 교실에서 보자. 아 배고프다 배고파-.”

덜컹. 말하는 동안 계속해서 걸어가 문을 열고 고개만 빼놓은 채 말하던 유이는 그 말을 끝으로 정말로 사라져버렸다. 복도를 뛰어가는 타타탓 하는 작은 실내화 소리만이 들렸을 뿐. 아무 말 없이, 현상은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축구를 하고 야구를 하고 농구를 하는 운동장 사이로, 한명의 트윈테일 여학생이 신교사로 뽀로로로 달려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아까의 본성, 깡패 사기꾼 마법소녀 이미지는 없앤 채 어느새 소심하고 조용한 여학생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아무도 안 들어줄게 분명하군. 나도 저런 녀석이 깡패 사기꾼 마법소녀라고 하면 절대로 안 믿겠지.

그대로 현상은 터덜터덜 옥상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건 학교가 위치한 평산의 모습. 평평한 산이라 평산 이라는 심플한 네이밍에 맞게, 커다란 언덕 같은 이미지. 그 사이로 위성 소도시답게, 자연환경이 200% 살아있는 높은 나무들, 그리고 그 자연환경을 300% 죽이는 거대 송전탑 등이 보였다. 뭐랄까, 한마디로 해서…….

평화로웠다.

그 광경을 보니 뭔가 가슴속에 응어리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현상은 지금까지 평생 동안 해보고 싶은 일을 하기로 결의했다.

 

심호흡 하고, 하나, 둘,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 평화로운 세상에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까악까악. 온 산의 새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운동장의 학생들과 언덕길의 모든 거주민들이 구교사를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현상은 마저 소리를 지르고 터덜터덜 구교사 옥상에서 내려왔다.

후에 유일하게 실존이 확인된, 그리고 학교 밖의 사람들에게도 퍼진 ‘학교 7대 불가사의 그 7번째’, ‘소리 지르는 구교사’의 전말이었다. ‘7대 불가사의를 보면 죽는데 7대 불가사의가 퍼졌다.’ 라는 불가사의는 이 7번째 불가사의 때문에 퇴출.

물론 현상이 이 일에 대해 입을 여는 일은 이후에도 없었다. 단지 돌아간 교실에서 유이가 이쪽을 한번 힐끔 봤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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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軍

호성軍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친구 우리들의 친구 게으른 호성軍입니다.

comment (1)

Wankers
Wankers 13.12.15. 23:36
읽다가.. 손발이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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