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1. 발단ㅡ 첫 번째 날. “신비한 능력의 전학생과의 위험한 로맨스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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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09 May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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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호성軍

“듣고 있어?”

“응?”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첫마디를 놓친 현상은 고개를 들어 대화중인 상대를 바라봤다. 태열은 투덜대며 “니가 그렇지”라고 웅얼거린 후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태열과는 작년까지만 해도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으나, 올해 태열이 문학부에 가입한 이후로 꽤나 친해졌다. 다만 언제나 자고 있어서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든 게 문제지.

“그러니까, 오늘 우리 반에도 전학생이 왔다니까. 좋겠다. 너희 반은 미소녀라서. 벌써 인기 끝내주더라. 다른 반에서도 구경 간다며? 우리 반은 완전 전파녀야 전파녀. 거기다 옆자리라고. 오컬트도 아니고, 말 그대로 전파녀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대로는 잘 수도 없잖아. 수면 부족 걸린다고 이대로면.”

하루 18시간 자는 놈이. 그것보다 전파녀는 뭐야. 제발 부탁이니 한글어를 써줘. 이 녀석과 말하다보면 내 이해력이 문제인지 이 녀석의 어휘가 문제인지 궁금해진다. 아니, 그것보다.

“너희 반도 전학생이 왔어?”

“지금까지 내 말은 뭐로 들은거야? 그러니까 내가 자지도 못하고 이런 데에서 굴러다니는 거 아니야. 그것보다 너희 반 전학생 마법소녀라는 소문이 어디선가 들려오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이건 무시해주고.

“어떻길래 자지도 못한다는 거야?”

“머리는 치렁치렁 길러서 눈을 다 덮고, 인사도 조용조용. 침울해 보이는 거야 둘째 치고 접근하기 힘든 어두운 기운이 그득그득하다고. 수업 중에 미묘하게 혼잣말도 중얼거리고. 내 속성 중에 소심 속성은 있어도 전파 속성은 없다고. 뭐랄까, 거기에 접근하자니 미묘한 기운이 가득해. 옆에 있는 난 그 어두운 기운의 영향력 하라고. 아무리 나라도 그런 분위기 아래에서는 잠이 안와.”

“아, 근냐.”

머리를 눈까지 덮은 건 네놈도 마찬가지잖아. 현상은 얼굴의 반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왠지 여자애들에게 인기 있을 것 같은 스타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태열을 조용히 응시했지만, 태열은 그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여하튼간 너희 반은 좋겠어. 미소녀 전학생이라. 전교에 소문이 쫙 깔렸더라고. 누가 흘렸는진 모르겠지만 마법소녀라는 소문도 들리고 말이야. 어지간히 정신 나간 놈이겠지. 아니면 나 같은 덕있는 인간인가? 그건 그렇고, 너 그 전학생이 직접 다가와서 인사까지 했다며? 좋겠다. 도대체 이런 놈 어디가 좋다고.”

“차라리 그런 이유면 좋겠지.”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수상하게 바라보는 태열을 무시하며, 현상은 마저 주스를 마셨다. 시계를 바라보니 어느새 방과 후. 가방을 들어 올리는 현상을 보며, 태열은 마시던 주스를 내려놓고 말했다.

“어라? 오늘은 부실 안 들리는 거야?”

“부장이 오늘은 올 필요 없대. 그리고 정신 나가서 미안하다.”

“엉?”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내일 보자.”

“내일도 이대로라면 학교 쉴지도 몰라. 졸려.”

학교 매점을 나서 참으로 오랜만에 제 시간에 학교를 나서며, 현상은 교문에서 몸을 돌려 교정을 바라보았다. 슬슬 하늘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는 시간. 하교하는 아이들. 몇 명이 교문에서 몸을 돌려 교정을 바라보는 현상을 희한한 듯 바라봤다. 그러던지 말든지.

근데 너희들 그건 아냐? 지금부터 약 19시간 전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넘어져서 구경하는 현상을 남겨둔 채, 거대한 꽃게를 닮은 생명체(그냥 꽃게라고 하자)와 트윈테일 마법소녀는 공격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펑. 콰직. 콰광. 퍼버벙.

날아오는 거대한 집게발을 뒤로 높게 점프하며 피하고, 봉을 휘두른다. 그리고 푸른색 불꽃 덩어리가 날아오는걸 꽃게는 다른 쪽 집게발로 막는다. 폭발과 함께 주변으로 튀어나가는 푸른색 불꽃. 불꽃은 사방으로 튀어 바닥과 벽 등등 어디든지 붙어서 푸르게 타올라 세기말적 분위기를 더더욱 살려주기 시작했다.

머리를 가리고 있던 꽃게가 집게발을 치우는 순간, 어느새 다가간 그녀는 이번엔 봉으로 찔러 들어간다. 그러나 다른 쪽 집게발이 더욱 빨랐다. 콰광. 정통으로 들어갔는지 저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지만, 별 당황도 하지 않고 몇 바퀴 회전하며 착지. 그리고 어느새 다가와 내려찍는 집게발을 구르며 피하고, 빈틈을 노려 이번엔 봉을 바닥에 찌른다. 그 순간 봉의 앞에서 튀어 나온 바위가 콰과광 하고 굉장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 꽃게의 배를 가격했다.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괴상한 소리를 내며 꽃게가 경직된 순간, 소녀는 높이 점프해 수직으로 내리꽂기 시작했다. 그러나 꽃게도 쉽게 당할 생각은 없는지, 괴악한 소리를 지르며 입에 게거품을 물면서도 꽃게는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 다시 한 번 집게발을 휘둘러 소녀를 날려버렸다. 이번엔 좀 강하게 맞았는지, 소녀는 저 멀리 날아가 구교사 벽에 강하게 부딪치고 튕겨 나왔다.

UCC에 올리면 조회수 좀 벌겠군. 아니, 이게 아니지. 멍하니 구경만 하던 현상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전투의 박력에 몸은 명령을 듣지 않았다. 왜이래 이거. 몸아, 나 좀 살려주라.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고. 우린 운명 공동체야. 그렇지? 그러니까 좀 움직여! 여기서 죽기엔 아직 우리가 걸어갈 날은 멀고도 험하다고!

운동장은 이미 공사 견적이 계산되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거대한 꽃게가 움직이며 패이고 깨진 지면들. 소녀의 지면을 이용한 공격 때문에 망가지고 솟아오르고 깎인 부분. 아무리 봐도 지방 소식지가 아니라 일간지 3면쯤에는 기사가 날 것 같다. 아니,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머리고 몸이고 내 말을 안 들어주네.

소녀에게 마지막 치명타를 날리려는 꽃게의 공격을 피하고, 소녀는 몸을 최대한 낮추고 정면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어지는 집게발 공격. 가볍게 점프해 피하고, 바로 몸통의 아래로 들어간다. 이번엔 다리로 찍으려고 들자, 이건 예상을 못했는지 소녀는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그곳엔 기다리고 있던 집게발이 있었다. 지금까진 손을 쥔 채 내려쳤지만, 지금 집게발을 펼쳐져 있었다.

“!!”

소녀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마치 끌어당겨지듯 집게발 사이로 소녀가 들어간 순간, 집게발은 강하게 닫혀졌다. 안 돼! 콰직. 끔찍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질 줄 알고 눈을 돌린 현성은 다시 돌렸다. 다행히도 소녀는 박살나진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몸이 납작해지지 않게 막는 게 최고인 것 같았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가려져있던 달이 일순간 구름을 뚫고 밝게 비쳤다.

아름다운 미소녀였다.

지금은 고통 때문인지 온힘을 다하고 있어서인지 온 얼굴이 일그러져있었지만, 분명 맨 얼굴이면 어디 패션잡지의 1면을 차지해도 이상할 것 따윈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웃음이라도 지으면 안 넘어가는 남자가 없겠군. 아니, 이게 아니지.

“크…… 읏……!”

신음하며 소녀는 집게발이 닫히는걸 있는 힘껏 막고 있었다. 그 거대한 집게발을 어떻게 지금까지 막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한계라는 게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기기긱 하는, 봉과 집게발 날이 마찰되는 듣기 기분 나쁜 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 상황에서는 마법인지 뭔지도 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빨리 움직이자. 현상은 주위를 둘러봤다. 뭔가 무기, 무기는 없나? 어떻게든 해야 할 거 아니야! 점점 집게발은 좁혀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확실히 위험해보였다. 고개를 돌리던 현상의 눈에 청소함이 들어왔다. 재빨리 뛰어가 문을 열고 대빗자루를 하나 꺼내들었다. 그리고 대빗자루를 꽃게에게 강하게 겨누고 섰다. 제길, 다리가 떨리잖아. 턱도 떨리네. 얼씨구? 팔도?

특별히 내가 대단하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현상의 머릿속이 다시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길 생각은 없다. 애당초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조용히 있다간 소녀는 이대로 쥐포가 되어버리겠지. 그렇게 되면 단순히 안 좋은 광경을 보고 꿈자리가 사나워지는 걸로 끝이 아니다. 나까지 쥐포가 되어버리겠지. 애석하지만 저 괴물이 소녀는 쥐포로 만들고 나는 내버려준다는 편향적인 폭력성을 보유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즉 어떻게든 소녀를 구해서, 저 꽃게를 잡아서 꽃게탕이든 간장게장이든으로 만들어버려야 나의 밝은 내일도 보장된다는 뜻이다.

심호흡을 깊게 했다. 다리도, 턱도, 팔도 떨리지만 어쨌다는 거냐. 할 수밖에 없잖아.

“우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간다. 지면이 울퉁불퉁해서 넘어지지 않는 것도 힘들지만, 최대한 고속으로 달려들었다. 소녀가 일그린 얼굴로 힘을 주다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말로 형용 불가능한 표정을 지었다. 구해주려고 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 반한 거 아니고 반할 생각도 없어! 폭력마법소녀 따위 이쪽이 거절이다! 난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휘둘리는 건 부장한테 만으로도 충분해! 에잇 생각해보니 이게 전부 그 양반 때문이잖아! 거대한 꽃게의 뒤에 도달한 순간, 현상은 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있는 힘껏 빗자루를 휘둘렀다. 퍼걱! 둔탁한 소리를 내며 대빗자루 앞부분이 저 멀리 날아갔다.

꽃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온몸이 롤러코스터가 내려올 때처럼 쏴 해졌다. 등골이 서늘했다. 다리에 힘이 빠질 것 같았다. 있는 힘껏 휘둘렀는데?

꽃게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꽃게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전히 집게손에는 소녀를 쥔 채로.

“이이잇!!”

퍽! 퍽! 퍽! 부러진 대빗자루를 있는 힘껏 여러 번 휘둘렀다. 손에는 선명한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지만, 꽃게는 반응도 없었다.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온몸이 싸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도망가야겠다, 라는 생각이 계속 현상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지만 다리는 뿌리를 내린 듯 그대로 박혀있었고 손은 계속해서 무의미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바보야! 도망쳐!”

소녀가 외쳤다. 내가 할 말이다. 너나 빨리 도망가라고. 그리고 도망쳐야 하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다리가 안 움직이는걸. 지금 내 몸은 관성의 법칙을 너무 잘 이행하고 있다고. 외부 충격이 필요해. 우라질, 난 문과인데 왜 이과적 설명을 하는 거냐. 여하튼 발이 안 움직인다고! 그러니까 니가 빨랑 도망가서 나 좀 구해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꽃게는 다른 쪽 집게발을 휘둘렀다. 맞으면 사망이다! 피하자!

근데 왜 이리 빨라. 다리는 또 왜 안 움직여.

“쿠엑!”

맞았다ㅡ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현상의 몸은 저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순간적으로 빗자루로 막긴 했지만, 그래도 배에 정통으로 거대한 집게발이 돌격해온 건 사실이었다. SUV급이 아니라 트럭 급에는 치인 것 같군. 이젠 완전히 작살난 빗자루가 하늘을 가르고, 현상은 저 멀리 축구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네트에 강하게 걸린 후, 이곳저곳 네트 사이로 들어가 구르고 꺾이며 현상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앞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이젠 골해도 되겠지. 아, 벌써 했군.

눈이 침침했다. 멀리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아팠다. 속도 안 좋았다. 내가 의학에 대해선 모르지만 저 자동차만한 집게발에 두들겨 맞았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원통하다. 사나이 김현상, 꿈도 못 이루고 이렇게 밤에 뭔지도 모를 꽃게 손에 뒈지는구나. 사실 꿈도 없지만 그게 중요하냐. 중요한건 18년 인생이 이걸로 끝이라는 거지. 인생 뭐있냐. 이제 그만 골 하자. 아니 하기 싫은데 하게 된 상황이구나. 아, 벌써 골 했지 참. 이것 참 정신없네.

쿵쿵 거리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외에는 조용했다. 아무래도 꽃게가 숨통 절단 서비스라도 마저 해줄 모양이었다. 그거 좋네. 제대로 안 해줬으니 A/S라도 해주겠다 이건가? 고맙긴 한데, 가능하면 한 80년쯤 있다가 A/S 해줘. 솔직히 아직 삼도천을 도하하고 싶진 않단 말이야.

있는 힘껏 가물가물한 눈을 크게 떴다. 구름이 가득한 달밤 아래에 거대한 꽃게가 서있었다. 진짜냐.

꽃게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눈을 감을까 생각했지만, 억울했다. 좋아, A/S 서비스 받아주마. 그래도 어떻게 내 몸을 해체하는지는 봐야겠다 이거다. 너 임마 얼굴 봤어. 내려치기만 해봐.

눈앞에 서있는 꽃게 앞으로, 뭔가가 서있었다.

 

아까 그 소녀였다.

소녀는 오른손에 봉을 들고 당당하게 현상의 앞을 가로막고, 아니 지켜서고 서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녀린 등에는 힘이 넘쳤다.

“너…….”

“말하지 마. 가만히 있어. 빨리 끝낼 테니까, 아파도 조금만 참아줘.”

뭐라곤가 말하려는 현상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녀는 봉을 붕붕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그리고, 효과는 없었지만 구해주려고 해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현상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은걸 아는지 모르는지, 꽃게는 아무 말 없이 소녀를 향해 오른쪽 집게발을 내려쳤다. 현상이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귀찮다는 듯 봉을 들어올렸다.

쾅!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바닥에 붙어있어 피하지도 못하고 입으로 흙먼지가 들어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현상은 눈을 비비지도 못하고 눈을 깜빡거리고 앞을 쳐다봤다.

집게발을 빛나는 반투명한 푸른색 육각형 물체들이 몇 번씩 겹쳐지며 막고 있었다. 꽃게가 당황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까지는 준비 운동이었다고. 뭐, 방심하다가 좀 위험하긴 했지만. 슬슬 파악도 끝났겠다, 본격적으로 가봐야지. 어이, 그쪽의 남학생, 지금까지 구경해줘서 고맙고 이제 클라이막스인데, 솔직히 지금부터는 재미없을 거야. 좀 더 놀면서 구경시켜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네. 용서해주고, 금방 치료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소녀가 즐기듯 웃었다, 라는 느낌이 든 순간, 소녀를 지켜주던 육각형 물체들이 펑 하고 깨졌다. 꽃게의 오른쪽 집게발이 하늘 높이로 엄청난 기세로 튕겨져 나갔다.

그 이후는 순간이었다.

꽃게는 지금까지의 선전이 마치 꿈이었던 듯 힘도 못쓰고 소녀의 연속공격에 시달리다 결국 마지막 소녀의 바위 공격에 배부터 등껍질이 꿰뚫려 박살나며 쓰러졌다. 소녀는 그 광경을 보며 가벼운 운동이라도 끝낸 듯 봉을 안은 채 양손을 탁탁 털며 현상에게 다가왔다. 그 너머로, 꽃게의 잔해들은 재가 된 듯 사라져갔다.

“조금 더 화려하게 끝낼걸 그랬나? 관객이 있는 건 오랜만이라서 봐주면서 했는데, 역시 방심하면 안 되네. 일류인 이 몸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말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소녀는 다가와 현상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어이, 그거 보이잖아. 어차피 죽을 거긴 하지만 마지막까지 사나이답게 매너를 지키다 가고 싶다고. 그런 현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이리 저리 움직이며 현상의 상태를 천천히 확인하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니네. 다행이야. 운이 좋았네. 제대로 당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그럼 잠깐만.”

소녀는 그리곤 일어서 봉을 들고서는 뭐라고 빠른 속도로 웅얼거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현상이 아는 언어는 아닌 듯 했다. 어차피 너무 빨라서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이윽고 소녀가 말을 마치자, 지금까진 아파서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낑낑대고 있던 현상은 온몸의 고통이 서서히 사라지는걸 느꼈다.

“어디 특별히 아픈데 없지? 있으면 말해. 없어? 그럼 저 운동장 좀 어떻게 해봐야겠네.”

얼떨결 한 채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로 앉아 온몸을 훑어보던 현상은 소녀의 말에 고개를 들어 운동장을 바라봤다.

뭐랄까, X 스포츠 구장으로도 못써먹을 광경이었다. 초소형 그랜드 캐넌이라고 해도 먹힐 것 같았다. 포크레인이 몇 개 대대로 있어도 복구하는데 사오일은 걸리겠군.

“걱정 마. 금방 끝내 줄 테니까.”

독심술이라도 쓰는 거냐. 어느새 몸이 멀쩡해져 정신도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현상을 무시한 채, 소녀는 이번에도 뭔가를 웅얼거리고 봉을 강하게 바닥에 박았다.

“좀 놀랄지도 모르는데,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소녀의 말을 듣고 마음을 편안히 먹으려고 각오했지만,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움찔 해서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소녀의 경고를 듣고 현상은 몸을 억지로 바닥에 고정시켰다.

운동장이 아니라 잔잔한 수면에다가 동전을 던져 놓은 것 같았다. 소녀의 봉을 중심으로 물결처럼 땅이 파도치자, 운동장은 수면처럼 사방으로 물결이 뻗어나간 후 평평하게 바뀌었다. 지면 공사 관계자가 이 광경을 보면 무지하게 좋아하겠네. 그것보다 저 봉으로 못하는 게 뭐야.

“건물이 부서졌으면 좀 곤란했을 텐데, 다행이네. 창문도 안 깨지고. 운이 오늘따라 따르나보네. 뭐, 대신 하나가 곤란하지만.”

뭔 소리야. 엉덩이를 털고 현상이 일어나자, 어느새 소녀는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쁘긴 무지하게 예쁘구만. 길거리 등에서 봤다면 설레일 정도로. 하지만 방금 그 살벌한 판타스틱 파이터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난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고. 그런 현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슬픈듯한 붉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이름이나 좀 알려주겠어?”

“……김현상.”

“응, 기억해둘게. 몇 번 아까 같은 경우는 있었지만, 그렇게 뛰쳐 들어와준건 몇 명 안 되거든. 나중에 보면 인사라도 할게.”

안 그래도 되는데. 머리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으로는 부끄러워 정반대의 말을 하려는 순간, 소녀는 봉을 현상의 머리에 겨누었다. 깜짝 놀라며 몸이 경직된 순간, 소녀는 말을 이었다.

“미안해. 아프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나도 그다지 이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꼭 해야 하거든. 그럼.”

쾅.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안 아프다며. 털썩.

 

 

“다녀왔습니다.”

끼익. 집안으로 들어오며 현상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오랜만에 정상하교를 해서인지 시간은 꽤나 일렀다. 매일 6시 넘어 하교했는데, 이런 시간에 집에 오니 좀 희한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귓가를 지옥의 부름이나 다름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오냐.”

움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물체가 보였다.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드는데.

“어제는 그렇게 늦게 들어오더니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들어오는구나? 오늘은 그 부활동인지 뭔지 없는 거니?”

말투 자체는 평이했지만 현상의 귀에는 다른 의미로 필터링 되어 들어왔다. 아침은 조용하시기에 방심했던 탓인가. 부엌에서 몸의 절반 정도만 살짝 보이시는 어머니는 빙긋 웃고 계셨지만, 18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아왔고 그 이전에는 어머니의 일부였던 현상은 그 아래의 표정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오늘은 부장님이 하루 쉬라고 하셔서…….”

“그래? 그거 마침 잘됐네. 근데 매일 두세 시간씩 추가 부활동을 시키고 어제는 9시 뉴스가 다 끝나서야 집에 돌아오게 만드는 그 부장이란 학생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는데 말이지. 뭐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이제 어디 안 나가는 거니? 그럼 오랜만에 공부 좀 하지 그러니?”

무념. 할 말도 없고 뭐라고 대꾸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현상은 정신적으로 눈을 꼭 감고 어머니의 잔소리 웨이브를 흘려보냈다.

끼익. 오랜만에 꽤나 길게 이어진 어머니의 잔소리 웨이브는 오늘도 “그만 들어가서 공부 좀 해라 공부 좀.” 으로 끝났고, 현상은 방에 들어가 가방을 집어 던지고 교복을 갈아입은 후 말 잘 듣는 착한 학생답게 수학책을 펼쳐 놨다. 하지만 곧 팔짱을 끼고 명상에 돌입.

9시까지 학교로 나오라고 했나?

일단 이야기의 과정을 먼저 생각해보자. 어제 밤 부장 때문에 늦게 학교에서 나오며 재수 없게 마법소녀랑 웬 거대한 꽃게의 싸움에 말려들었다. 그리고 잘은 생각 안 나지만, 여하튼 그 꽃게 덕분에 세인트 베드로는 아니더라도 삼도천의 카론 정도는 만날 뻔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여하튼 하룻밤 기분 좋게 푹 자고 일어났더니, 학교에서 그 마법소녀가 전학을 왔다. 이름은 샤르……. 샤……. 뭐더라. 여하튼 무지하게 복잡한 이름에 애칭은 유이. 미소녀에 수줍음을 많이 타는, 전학 직후 반의 아이돌로 전략한 소녀. 그리고 점심시간에 그녀의 부름에 옥상에 나갔더니, 갑자기 여자 사기꾼 깡패로 돌변해서 강제 조약을 체결했다. 강화도 조약이나 을사조약에 버금갈 정도의 강제 조약. 내용은 간단하게 요약하면 ‘입 다물고 내 주위에서 알짱거리면서 내 구경이나 많이 해라.’

차라리 그런 거면 동우를 시켜. 녀석이라면 인중을 자기키만큼 늘려서는 구경해줄걸. 아니면 태열이에게 시키던지. 마법소녀라는걸 알자마자 녀석은 좋아 죽을 거다. 아마 코스프레 화보집 10개 정도는 낼 수 있을걸. 장담할 수 있어. 그것도 아니면 부장은 어때. 그 막가파 마이 페이스 양반이라면 아마 마법소녀의 뒤를 이어 마법소년이 되겠다고 날뛸 꺼다. 이건 이것 나름대로 볼만하겠군.

그러니까 부탁이니 날 내버려줘. 현상은 마침내 팔짱을 풀고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려서부터 희한한 일은 많이도 당했다. 기가 허한지 만화랑 소설을 너무 봐서인지 뭔지 여하튼 내가 구경 못한 괴상한걸 찾는 게 더 적을 거다. 애석하게도 보기만 했으니 믿어주는 사람도 없었고 증명할 기회도 없었지만. 여하튼 덕분에 인삼이랑 산삼도 많이 먹고 무당도 자주 봤지. 아, 중요한건 이게 아니지. 여하튼 그런고로 이제는 좀 평안한 생활을 하고 싶은데, 이제는 구경 수준이 아니라 직접 내가 그 일에 휘말려든거 아냐. 농담이 아니라 울고 싶었다. 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이 시대의 평화롭고 소시민적인 삶을 살면 다란 말이야.

잠깐, 혹시 그 녀석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사실 어제 그 싸움이 꿈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제대로 집에 돌아와 잔소리 웨이브에 휘둘리다가 잠을 잔 기억은 난다. 그렇지만 그런 싸움에 휘말린 기억은 제대로 안 난단 말이야. 그러니까, 사실 난 꿈을 꾼 거고, 유이라는 그 녀석은 내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재미있어서 장난을 친 거 아닐까. 외국 애들의 장난은 꽤나 심하다고 들었다. 가능성이 있잖아. 사실 내가 녀석이 마법을 쓰는걸 봤냐 뭘 봤냐. 내가 본건 그 최강 급의 내숭뿐이잖아. 그 외의 건 꿈일지도 모르니 패스. 계약서? 난 내용 구경도 못했다. 뭔가 종이에 쓰여 있긴 하데. 근데 그게 단순히 학교 안내서인지 진짜 계약서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것보다 아무리 강제 계약서라도 그렇게 대충 할리가 없잖아.

맞아. 장난이야.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현상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기쁨의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뭐야, 그런 거였냐. 그렇겠지. 마법소녀라니.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다. 어제의 꿈도 부장의 그 괴악한 센스 때문에 시달리다보니 꾼 거뿐일 거야.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내일부터는 다시 평화로운 학교생활로 돌아가자. 부장이라는 이 우주의 악의 축이 주변에 있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지만, 무엇보다 같은 반의 미소녀 전학생이 마법소녀라는 정신 나간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야 괜찮겠지. 여하튼 일단 9시에 나가보자. 녀석은 분명 내가 속았다고 생각하고 장난을 칠 준비를 하고 있겠지. 내 알바냐. 가서 놀려주자. 내가 그런 말을 정말로 믿었다고 생각 하냐고. 그리고 내일부터는 그 괴악한 성격을 이쪽이 역으로 약점 잡아서 놀려 주는 거다. 한동안 심심하진 않겠군. 좋아.

그리고 그날 저녁 9시, 저녁을 먹고 운동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의기양양하며 학교로 향한 현상은, 이번에는 왠 도마뱀과 싸우고 있는 유이를 발견했다. 마법소녀복? 물론이지. 마법봉? 물론. 괴상한 마법도 그대로.

울고 싶다. 정말로.

 

 

“아, 왔네? 좋아좋아. 오늘은 시작이 좀 빨라서 말이야. 좋은 구경은 못시켜줬네. 뭐 앞으로 눈요기는 하게 해줄 테니까.”

어제와 마찬가지로 도마뱀을 때려잡은 후, 이마의 땀을 닦으며 유이는 교문에 멍하니 서있는 현상에게로 다가왔다. 뒤로는 도마뱀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중.

“음? 뭐야? 여보세요? 괜찮아?”

눈앞에서 손을 왔다갔다. 그러나 반응이 없는 현상을 보면서, 유이는 잠시 턱에 손을 대고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몇 번 튕겼다. 탁, 탁, 탁.

“우왓!”

펄쩍. 웬만한 고교 농구선수 뺨칠 정도로 공중으로 뛰어 올랐던 현상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정면의 유이를 보고서는 움찔 하고 몸을 멈췄다.

“괜찮아? 저녁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우……. 우웃…….”

주춤주춤. 유이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현상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주춤주춤. 현상은 두걸음 후퇴.

“…….”

“…….”

스슥. 잠시 발을 끄는듯한 소리가 나더니 바로 코앞에 와있는 유이를 보고, 현상은 자지러질듯 놀라며 소리를 지르곤 뒷걸음질을 치다가 넘어졌다.

“우와아아앗!!”

“푸하하하하!”

그 꼴을 보고 배를 잡으며 웃는 유이를 보며, 현상은 여전히 어벙한 채 넘어져있었다.

“아, 미안미안. 멍하니 있는 게 너무 웃겨서 말이야. 그래도 너무 놀란다. 아, 어제는 안 썼구나 이걸. 근거리는 괜찮은데 이동 거리가 멀면 많이 피곤하거든. 괜찮아?”

여전히 멍한 채로 있던 현상은, 피식피식 웃는 유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 옷을 털었다. 유이는 고개를 돌려 학교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오늘은 예상보다 일찍 나타났네. 정확히 정각에 나타날 줄이야. 뭐 덕분에 나는 편했지만. 아무래도 앞으론 너도 정각에 째깍째깍 와야겠네. 뭐, 오늘은 조용 할 테니 일부로 왔는데 미안하지만 그만 가도 돼.”

“잠깐만.”

갸웃. 현상의 말에 유이는 고개를 돌려서 현상을 바라봤다. 주먹을 꽉 쥐고, 현상은 조용히 물었다. 좋아, 결심했다.

“너, 정말로 마법소녀냐?”

“…….”

정적. 유이는 아무 말 없이 현상을 지긋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니 눈을 믿어봐.”

역시냐. 미간을 문지르며, 현상은 조용히 말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럼 어제 그것도 꿈이 아니겠군? 지금 이것도 꿈이 아니고.”

“증명 하라면 해줄 수도 있…….”

“아니, 내가 봤으니까 증명은 됐어.”

한손으로 마법봉을 들고 왼손을 허리에 올리며, 유이는 정면으로 현상을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문지르며, 현상은 조용히 말했다.

“나 지금 머리가 좀 아파오는데, 일단 두 가지만 물어보자. 첫 번째. 이제 난 발을 뺄 수 없다는 거지?”

“응. 미안하지만.”

“아, 근냐…….”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대답하는 현상을 보고, 유이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목격당하는 경우는 몇 번 있지만 대부분은 기억 조작이 가능해. 어제 했던 것처럼 꿈으로 생각하게 한다든지, 기타 등등. 그런데 애석하게도 니 경우에는 조작했는데 풀렸거든. 이건 보기 드문 경우인데, 이럴 경우에선 뇌가 그 상황을 더 뚜렷하게 기억해. 이제 조작 같은 건 안 먹힌다 이거지. 뭐,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런데 남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건 그렇다고 쳐도, 왜 앞으로도 계속 니가 싸우는걸 구경해야하지?”

“음, 이야기 해줘도 상관은 없지만…….”

미묘하게 말꼬리를 늘이는 유이의 말에, 현상은 고개를 들었다. 유이는 고개를 돌리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상관은 없지만?”

“이야기가 좀 길어질 텐데…….”

“상관없어.”

“나 추워.”

“…….”

휘잉. 그러고 보니 아직 3월 중순이지. 제법 쌀쌀한 날씨에 중무장 까진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무장을 한 현상과는 다르게, 유이의 마법소녀복(?)은 꽤나 얇아보였다. 노출도 좀 있고. 그래도 낯부끄러울 정도는 아닌 게 다행이었지만, 여하튼 3월 중순에 꽤나 추울 복장이라는 건 이해가 갔다.

“알았어. 그럼 기다려줄 테니까, 빨리 갈아입고 와. 그건 그렇고 왜 그런 옷을 입는 거야.”

투덜대며 고개를 돌리는 현상을 보며, 유이는 눈을 깜빡이며 약간 부끄러운 듯 말했다.

“아, 오래 기다릴 필요 없는데, 한 3초만 저쪽 보고 있어줘. 이쪽으로 고개 돌리지 말고.”

뭐야, 여기서 갈아입을 생각이냐? 저기 학교 가서 갈아입으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려고 고개를 돌리려 하는 순간, 현상은 번쩍이는 불빛이 눈에 들어오는걸 보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유이의 날카로운 비명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뭐야, 도대체 뭐냐. 일단 여기서 돌아보면 변태가 될 것 같군. 호기심과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사회적 권위 아래에서 갈등하며 정면만을 바라보는 현상의 어깨를 뭔가가 툭 건드렸다. 그러나 현상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가자. 추워.”

아, 근냐. 그 말에 현상은 고개를 돌려 유이를 바라봤다. 아까의 정신 사나운 옷은 어느새 깔끔하게 사라지고, 흰색 카디건과 연갈색 바지를 베이스로 한 평범한 옷으로 바뀌어있었다. 아니, 평범한 옷이었지만 워낙 옷걸이가 초특급 나이스인지라 그다지 평범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저렇게 입혀만 놓으면 볼만한데. 정말로. 아니, 지금은 그게 아니지. 현상은 잠시 멍하니 유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휘휘 젓고는 말했다.

“잠깐, 아까 그 정신 사나운 옷은 어디 갔어?”

“응? 전투복 말이야?”

“전투복인지 뭔지는 내 알바 아니고. 뭐야, 변신 그런 거냐?”

“그런데.”

“아, 근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려던 현상은 잠시 주춤하고 멈춰 섰다. 엉? 변신? 죄송한데 지금 혹시 변신이라고 하셨습니까? 마법소녀라면 누구나 한다는, 잠시 누드 되었다가 어느 순간 옷이 짠하고 바뀌는 그 변신이요? 아아, 그래서 고개 돌리라고 한 거였냐. 멍하고 서있는 현상을 발견하고, 유이는 다가와 현상의 팔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질질 끌려가면서, 현상은 생각했다.

이거 진짜 스페이스 판타지 아니야.

 

학교 언덕 아래에 위치한 편의점. 늦은 시간인데다 이 늦은 야밤에 긴 언덕을 오르고 내릴 사람도 없을 테니, 아마 내일 아침까지 찾아오는 손님은 한손으로 꼽을 수 있겠지ㅡ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상은 옆에서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컵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유이로 고개를 돌렸다. 춥고 배고프니 사달라고? 거 참. 그런데 정말 외모랑 주위랑 옷은 신경도 안 쓰고 맛있게도 먹는구만. 후루룩 후루룩. 고개를 돌려보니 종업원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대부분 유이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가끔씩 현상을 바라봄으로서 둘의 관계를 추측중 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유이의 시끄럽게 후루룩 거리는 소리를 BGM으로 틀어둔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의 아무도 없는 거리를 바라보며 현상은 생각했다. 진짜로 무슨 관계냐 우린. 내가 알고 싶은데.

“이거 맛있네. 앞으로 자주 먹어야겠는데? 이거 비싸?”

그다지 비싸진 않지. 근데 난 그 고생을 강제로 하는데 니 식비까지 대줘야하냐. 한숨을 쉬며, 현상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밥도 사줬고 시간도 있겠다, 슬슬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데.”

“그래, 후루룩, 얼마든지, 쩝쩝. 근데 넌 안먹냐? 후룩. 여하튼 대답해줄 수 있는 건, 꿀꺽, 다 해주지.”

“아니, 난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첫 번째로 아까 했던 질문의 대답을 좀 듣고 싶은데.”

꿀꺽꿀꺽. 현상의 질문을 들은 건지 못들은 건지 유이는 사발을 들어 국물까지 다 끝내버린 후, 입가를 닦고 말했다.

“사실 그건 별거 없는데.”

아깐 길다며. 하지만 지금은 듣는 게 먼저지. 현상은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고 조용히 유이를 바라봤고, 유이는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못 챘는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아마 진짜로는 그게 궁금한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궁금한 거겠지? 내가 누구인지, 뭘 하는 건지, 왜 네가 휘말린 건지,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움찔. 그리고 방금 너무 속이 보였다는 생각이 든 현상은 진정하려고 했으나, 유이는 턱을 괴고 창밖을 보며 한가하게 말했다.

“뭐, 별로 말 못할 것도 없으니까 말해줄게. 어차피 다들 그것부터 물어보기도 했고, 특별히 넌 컵라면 사준 값도 있으니까. 근데 설명이 좀 길고 알아듣기 힘들지도 모르는데, 상관없어?”

젠장. 다 들킨 거냐. 나름대로 슬금슬금 물어보려고 했던 현상은 각오를 굳혔다. 어차피 어떻게 들으나 마찬가지지. 모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돼.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은 그거 들으러 나온 거니까. ……그래도, 늦게 들어가면 안 되니까 가능하면 짧게 부탁해. 나머진 나중에 들으면 되겠지.”

“오케이.”

그리고 유이는 히죽 웃으며 현상을 바라보곤 말했다.

“근데 나 많이 말해야 하니까 마실 것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니 전속 지갑이냐.

 

“일단 자기소개부터 다시 할게. 내 이름은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표면적으로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세평고등학교 2학년 3반에 온 수줍어하는 전학생. 그리고, 솔직히 이런 말 하긴 쑥스럽지만, 실제 정체는 국제 마법사 연맹 대 악수(惡獸) 퇴치부대의 2급 전투원. 단독 전투 허가증 소유에 2종 상급 마법사용 허가증을 지닌 여성 전투원이야. 마법소녀라고 해도 되겠네.”

“…….”

약간 쑥스러워 하면서 유이가 나열하는 단어의 모음을, 현상의 머리는 약간의 쿨타임을 거친 후에야 제대로 이해가 가능했다.

“뭐야, 언제는 일류라고 자랑하더니. 그리고 뭔 연맹?”

“시끄러. 아직은 2급 전투원 자격증밖에 없지만 그건 나이 때문이고 실력은 일류라고. 여하튼 마법엔 수십 수백 가지 종류가 있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한 마법도 있고, 전혀 생각도 못했던 황당한 마법도 있지. 종류는 다양해. 그리고, 이런 마법을 연구하는 학파는 크게 동양학파와 서양학파가 있지. 동양학파는 말 그대로 동양에서 발전된 마법, 그리고 서양학파는 서양 쪽의 학파야. 그리고 마법의 연구를 위해 모든 학파와 마법사가 모여 마법을 세상의 질서와 유지를 위해 사용하기 위해 모인 단체가, 바로 국제 마법사 연맹.”

평상시에 들었다면 ‘도를 아십니까?’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정도, 즉 무시로 일변했겠지만, 어제와 오늘 내 눈이 집단 파업에 돌입하거나 러다이트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면 내 눈앞의 이 녀석은 분명 진짜 마법소녀다. 솔직히 그쪽보다는 내 머리가 돌아버렸던지 눈앞의 이 녀석이 만화를 너무 봤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돌팔이 약사라도 만난 기분이었지만, 현상은 어쨌든 설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슬펐지만.

“내 스승님은 동양학파에 속하신 분으로, 덕분에 나도 이름도 동양식으로 성이 먼저 나오게 되었고, 그분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 덕분에 지금도 나이 때문에 1급 허가증이 안 나온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지. 그런 나와 알게 되다니, 넌 좀 운이 좋은 거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난 빨리 이 일을 끝내고 평화로운 생활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고. 아차, 그럼 먼저 물어봐야할게 있지. 무의식중에 유이의 설명에 끌려가던 현상은 정신을 차리고 진짜로 궁금한걸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근데, 어제랑 아까 나왔던 그 괴물은 뭐야? 도대체 그게 뭐 길래 학교에서 돌아다니고, 왜 니가 그걸 때려잡는 거야?”

“악수라는 건, 5대수 중의 하나로서 인간의 악의가 농축되어 생겨난 괴수야. 보통은 주변의 악의를 끌어 모으는 존재가 있기 마련인데 말이지. 여하튼 말했다시피 난 국제 마법사 연맹의 대 악수 단독 조사 및 전투부대라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서서 괴수를 때려잡으니까 세상이 돌아가는 거야. 마법의 유지와 계승, 그리고 세상의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우리 국제 마법사 연맹이 해야 할 당연한 일중의 하나지. 그래도 옛날 마녀 사냥할 때를 생각하면 각국이 지원도 잘 해주고 스스로 퇴치도 개시하니까 우리가 할 일은 많이 줄었지. 여하튼 내가 여기 파견된 이유는 말했다시피 악수를 퇴치하기 위해. 사실 드물긴 하지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거든. 이 경우 잠시 이곳에서 살면서 퇴치하고 돌아가는 거지. 그때까지만 같이 행동해주면 돼. 2종 계약을 맺으면 일이 달라지겠지만, 그럴 필요도 없고, 너랑 맺을 생각도 없어.”

“다행이군. 나도 그럴 생각 없어. 여하튼 그러면 앞으로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이건가?”

겨우 현실 감각을 찾은 현상은 대답했다. 2종 계약인지 나발인지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이 달라진다는데 그럴 생각은 없지. 거기에 언어 자체가 위험한 뉘앙스를 풍기지 않아?

“가능하면 나랑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필요하면 다른 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지금은 시간이 좀 늦었네.”

시계를 보며 하는 유이의 말에 현상은 같이 시계를 바라봤다. 확실히 들어가면 까이기 적절한 시간이었다. 음, 그럼 마지막으로 아까 대답 안 해준 질문을 마저 해야겠군. 편의점 문을 같이 나서며, 현상은 유이를 불러 세웠다. 추운 밤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돌아본 유이에게, 현상은 아까부터 말하려던 것을 털어놨다. 멋지다 김현상. 가라 사나이 김현상. 아자.

“근데 어째서 내가 너와 같이 행동해야 하는 거야? 말하지 말라는 거면 그걸로 되는 거잖아.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재미있는 경험이겠긴 하지만, 난 평범하게 지내고 싶다고. 누가 구경하길 바라는 거면 적당히 내가 괜찮은 사람을 추천해주지. 부장이나 태열이, 아니면 우리 반에 있는 동우나 찾아가.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해 난 마법소녀 같은 건 사양하고 싶다고.”

약간 거친 투로 투덜거린 탓일까. 현상의 말에 유이는 약간 표정을 어둡게 바꾸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자신의 말이 약간 심하다는 생각을 한 현상은 사과하려 했지만 유이는 곧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게, 일단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건 역시 안 돼. 떠벌리고 다닐 수도 있으니까. 너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너에겐 더 이상 기억조작이 안 먹히는 시한폭탄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와 가능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사실 말해주면 안되지만 말이지…….”

도대체 뭐냐. 목젖까지 올라온 사과의 말을 삼키고, 현상은 얼굴을 붉히는 유이의 입술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말하면 안 된다는 게 뭐야. 뭔가 창피한 것 같긴 한데 말이지. 설마하니 사실 날 좋아한다 이런……. 아니, 정신 차려라 김현상. 주제를 알아라. 하지만 진짜면 어떻게 하지. 이런 외모면 사실 옆에 끼고 다녀도 나쁠 것도 없……. 현상은 유이의 입술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정신을 집중했다. 좋아, 날 좋아한다면 사귀어주지. 나쁠 것 없잖아?

“깊이 관여할수록 떠벌리고 발 빼기 힘들어지잖아?”

헤헤 웃으며 한 그 말을 끝으로, 유이는 추운지 저 멀리 달려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서있는 현상을 남겨두고. ……어라? 잠깐만, 그게 다야?

“잠깐만 기다려!”

“내일 학교에서 봐~”

그 외침을 끝으로, 유이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현상은, 자신이 마신 김칫국의 양을 확인했다. 확실히 미친것 같아. 아니, 어제 이후로 내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긴 하지만. 그것보다 저게 다야? 나를 이 정신 나갈 것 같은 세계로 끌어들이는 이유가, 내가 홧김에 못 불게 하려 한다는 거야? 내가 이것저것 봐서 설명이 자세해 질수록, 나는 더 제대로 미친놈이 되는 거니까?

현상은 얼굴을 감싸며 무너져 내렸다.

 

 

아침. 그것은 23시 56분 4.0905초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평균항성일 기준) 당연한 자유의 섭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며, 긴 잠에서 깨어나 오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살기 시작하는 거룩한 순간. 새들은 지저귀고, 사람들은 또다시 기운차게 하루를 시작한다. 깨끗한 공기, 맑은 봄의 하늘, 상쾌한 기분.

이렇게 화려하게 쓸 수도 있지만 고교생에겐 그냥 가기 싫은 학교에 가야만 하는 시간.

“그만 일어나! 지각한다!”

“5분, 아니, 가능하면 50분만 있다…….”

“현지야, 가서 오빠 좀 깨워라.”

“죽여도 돼요?”

“처리하는데 힘드니까 그러진 말고.”

벌떡. 그 말에 현상은 이불을 냅다 걷어차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적대 개체, 2개. 적대 정도, 살인미수.

“딸내미가 아들내미 죽이겠다는데, 말리는 이유가 겨우 ‘처리하기 힘들다’에요?! 엄마 맞아요?!”

“그거 말고 말릴 이유가 뭐 있니. 여하튼 빨리 일어나서 씻고 옷 갈아입어. 오늘도 학교 가야할 것 아니야.”

“학교요? 당연히 가야……. 잠깐.”

그대로 다시 이불을 온몸에 둘둘 말고 침대로 직행. 일부로 기침을 두어 번 하고 현상은 자면서 마른 목구멍을 악용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콜록, 콜록. 어제 밤바람 쐐서 그런지 감기 걸렸나봐요. 학교 쉴게요.”

“누가 그렇게 늦게까지 싸돌아다니다 오래? 웃기지 말고 일어나.”

이불을 걷어내려는 어머니에게서 어떻게든 이불을 사수하며, 현상은 감기의 무서움과 그 유행성, 전염성과 감기로 인한 몸에 오는 각종 악영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 돼, 여기서 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어머니, 하루만 봐줘요. 아니, 솔직히 가능하면 좀 더 오래 봐주셨으면…….

“현지야, 죽여.”

“네~”

쿵. 뭔가 묵직한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허리에 심각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리곤 순간 정수리 끝으로 강렬한 전류가 전달되었다. 찌리리릿 하는 전류의 종류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이름은 고통.

“크하악!”

허리는 남자의 생명인데. 여러 가지 의미로. 그런 생각을 하며 반사적으로 허리로 손을 뻗다 현상은 이불을 빼앗기고 말았다. 침대에서 허리를 잡고 부들거리는 현상을 내버려두고, 어머니와 현지는 이불을 챙겨서 방을 나갔다.

“자, 그만 일어나. 이제 정말 시간도 없어. 아침도 굶고 가야겠구만. 빨리 씻고 옷 갈아입어. 아침은 가면서 먹게 만들어 줄 테니까.”

세상엔 왜 내 적밖에 없는 걸까.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허리를 붙잡고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떠나는 어머니와 동생을 보며, 현상은 세상의 진실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다.

 

이대로 1년만 더 버티면 내 체력은 걱정 없을 거야. 매일 산 하나를 등하산 하는 셈이니까. 거기에 무거운 가방까지 짊어지고 말이지. 어떻게 난 여기서 이미 1년을 지낸 걸까. 한숨은 또 푹푹. 학생은 결국 어떻게 되든 나침반의의 N극이 북극을 가리키듯, 연어가 강을 찾아가듯, 태양이 서산으로 기울듯 학교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슬픈 세상의 진리. 그리고 현상이라고 그 진리가 벗어날 리는 없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클리어 블루. 바람은 기분 좋을 정도로 적당히 싸늘. 햇볓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어제에 비하면 날씨도 상당히 풀려서, 이젠 정말로 봄날의 날씨다. 나무에 자라는 새싹들. 지저귀는 새들. 길거리는 오늘도 적당히 너저분. 학생들은 오늘도 겉으로는 웃으면서 등교. 직장인은 속으로는 한숨을 쉬며 출근.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겠지. 나만 빼고.

한숨. 이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진 것처럼, 현상의 한숨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올라오고 있었고, 왠지 등의 가방은 오늘따라 더 무거운 것 같았다. 길거리를 웃으며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자, 왠지 현상은 배알이 꼬였다. 그래, 오늘은 평화롭고 좋은 하루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봐라, 우매한 중생들아. 나도 이틀 전까지만 해도 오늘도 내일도 모래도 평화롭고 좋은 하루가 될 줄 알았다고(부장이라는 존재를 해마를 두들겨 패 지운다면). 하지만 봐라, 난 지금, 에, 그러니까, 말로 하긴 참 뭐 같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마법소녀’ 라는 정신 나갈듯한 존재에게서 도망치면서도 도망칠 수 없는 불쌍한 인생을 살기 시작했단 말이다. 일상이랑 비일상은 글자 하나 차이라고.

다시 한숨. 머리가 아파와 현상은 어디선가 들은 림프선 마사지를 시작했다. 좋아. 적어도 학교에서는 조용하겠지. 위장인지 나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심한 소녀 역할 하는 것만 해도 바쁠 것이다. 설마하니 학교에서 마법 쓰면서 돌아다니겠어. 난 그냥 조용히, 늘 하듯이 교실에서 조용히 살면 돼. 학교에선 부장에게, 방과 후에는 그 마법소녀인지 뭔지 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게 상당히 짜증나지만 어쩔 수 없지.

아 슬프다. 하늘은 왜 저리도 푸른 것일까. 누구 좋으라고.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저렇게 푸르단 말인가.

“저기…….”

“응?”

어디선가 간지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현상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젊은 나이의 여성. 추정 연령은 10대에서 20대 초중반. 고운 목소리를 생각하면 외모도 나이스. 성격도 나이스 하겠지. 짧은 시간동안 가능한 모든 추리(왜곡된)를 해낸 뒤 현상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등 뒤의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가씨. 이 사나이 김현상이 무슨 고난이든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아…….”

주춤. 움찔. 하지만 고개를 돌린 순간, 현상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명탐정을 자처하는 누군가를 피를 볼 때까지 추궁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젊은 연령에 나이도 맞고 외모도 나이스. 다 맞긴 하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저런 마법소녀는 그 추리 대상에 맞지 않는다고. 비록 지금은 부끄러운 듯 주춤주춤 거리며 나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난 그 본성을 알고 있지. 아니, 너도 알고 있잖아 임마. 저런 걸로 그런 행복한 추리하지 마.

“저기, 괜찮으면, 학교 같이 가지 않을래……?”

“……뭣?”

당황해하는 현상 앞에서, 유이는 창피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려 현상의 얼굴을 바라보곤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우와, 반칙이다. 현상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꽃밭이 펼쳐지는걸 느꼈다. 귀엽다. 귀엽구나. 태열아, 지금이라면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현상은 곧 정신을 차렸다. 아차, 정신 차려라 대뇌야. 저건 위장이야. 장미 줄기에는 가시가 있단 말이야. 찔린다고. 그리고 찔리면 아프지. 정신 차리자.

“잠깐. 왜 갑자기 나랑 사이좋게 등교하겠다는 거야? 벌써 학교 코앞이라고. 거기에 미안하지만 난 방과 후에만 해도 충분하……. 아야!”

“아, 미……. 미안!”

앞으로 살짝 넘어지며 현상의 품으로 안기면서 구둣발 찍기 어택. 발에는 살기가 담겨있어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애써 참았다. 아프다. 무지하게 아프다. 현상의 가슴 안쪽에 살포시 안기듯 기대어있던 유이는, 아무에게도 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끄러. 알았으니까 장단 좀 맞추라고. 말했잖아?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해달라고. 난 적당히 ‘전학 왔는데 내 취양의 남자가 있네? 꺄악 좋아라~♡’라는 연기중이니까, 너도 ‘미소녀 전학생이 나에게 마음이 있나보네? 와아 럭키이~♡’라는 역할을 잘 연기하라고.”

그 말을 끝으로 유이는 부끄러운 듯 후다닥 제자리로.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 어느새 목소리는 평소의 약간 허스키한 ‘평시 모드’에서 가녀린 ‘접대용 모드’로 돌아가 있었다. 현상은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방금 귀로 들어온 단어를 재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점점 표정을 굳혀나갔다.

“……뭐? 저기, 농담이시겠죠?”

급격하게, 메두사의 머리라도 본 듯이 굳어지는 현상을 보며, 유이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아무도 안보이게 살며시 구두코를 발 위로 올렸다. 그대로 발 앞쪽에 강하게 힘을 주자, 현상은 상당히 아픈 듯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 시방 이 여성이 뭐라고 하는 거냐. 벌써 보청기라도 껴야하나. 슬슬 그런 현상을 바라보며 짜증이 치밀어 오르던 유이는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갈구하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

“현상아아아~ 너마저 솔로부대를 탈출하려는 거냐! 그런데 상대는 누…….”

현상의 눈에는 보였다. 눈앞에 여성을 세워둔 채 서있는 현상을 보고, 당장에라도 달려와 이단 옆차기를 시전 하려던 동우가. 그리고 마악 ‘홉 스텝 점프’의 삼단계중 ‘점프’의 단계를 밟고 있다가,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경악하며 스텝을 억지로 엉키게 하며 턱관절이 고장날 정도로 입을 벌리는 것을. 그러고 보니 저 녀석에겐 등이 보여서 유이인걸 몰랐겠군.

유이는 뒤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 동우의 얼빠진 표정을 보고는 다시 후다닥 현상을 바라봤다. 하지만 곧 뭔가가 떠오른 듯 얼굴을 펴고 현상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헤헷 웃고는 고개를 돌려 동우를 바라봤다. 작업용 얼굴에 약간 수줍은듯한 미소를 띤 채로.

“아, 안녕. 이름이……. 신동우……. 였었나? 틀리다면 미안. 아직 전학 온 지 하루밖에 안되어서…….”

“아, 아니야! 이, 이름 기억해줘서 기, 기뻐!”

갑작스러운 미소녀와의 등굣길 조우에, 동우는 당황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몇 명인가가 동우를 쳐다봤지만. 약간 안절부절못하는 동우에게, 유이는 기쁜 듯 말했다.

“어제 전학 와서 등굣길은 약간 적응이 안 되서, 마침 같은 반에 있는 현상이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우도 만나니 다행이야. 혹시 괜찮다면, 같이 학교까지 가지 않을래?”

움찔. 유이의 그 말에 두 명은 몸을 움츠렸다. 동우는 굴러 들어온 ‘미소녀와의 등교’라는 복이 믿겨지지 않아서. 그리고 현상은 이제야 유이의 속셈을 알아서. 이럴 수가. 타이밍도 이렇게 안 좋을 수가.

“혹시……. 싫은 거야?”

유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멍하니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있던 동우는 유이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동우는 유이의 얼굴을 봐버렸다. 약간 눈시울을 붉히면서, 손에 드는 방식의 학생가방을 꽉 쥐고 동우를, 뭔가를 애절하게 바라는듯한 그 얼굴을. 참고로 미소녀다. 길거리 캐스팅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머릿속에서 꽃밭을 열심히 달려 나가며, 동우는 혼에서부터 우러나와 외쳤다.

“시, 싫을 리가 있나! 당연하지! 유이를 위해서라면 우주 끝까지라도 같이 가주마! 우와악!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여하튼 가자! 어이, 현상아! 빨리 가자! 유이가 같이 가달라고 부탁하지 않냐! 아니, 부탁 안 해도 당연히 같이 가야겠지만, 아악! 뭐라고 말해야되는진 모르겠지만 여하튼 빨리 가잔 말이다!”

흥분도 20000%의 동우는 큰 소리를 내며 유이와 현상을 재촉했다. 부끄러워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유이를 바라보던 현상은, 유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감췄다. 저것이!

“임마! 유이는 벌써 올라가잖아! 자! 가자!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학교로!”

“우왓!”

멍하니 서있던 현상의 손을 잡고 끌다시피 하며, 폭주하는 동우는 부끄러워하는 유이와 담소를 나누며 학교를 올라갔다. 얼굴은 광채가 나오는듯한, 종교화에 후광이 비치는 성자의 얼굴에 가져다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동우에게 오늘은,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 최고의 날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 기쁨을 만들어준 대상이 단순히 자신을 도구로 이용해먹고, 도구로 쓴 그 결과를 ‘헤헹’하면서 비웃는 얼굴로 현상을 노려보는 데에 썼다고 하더라도.

 

“…….”

“…….”

“…….”

“저, 저기…….”

침묵. 침묵. 침묵. 그리고 침묵이나 다름없는 작은 소리. 시간은 점심시간. 2학년 3반 교실의, 가까운 위치의 네 명은 각자 다른 이유로 침묵하며 점심을 노려보고 있었다.

첫 번째는 인생을 살면서 줄 곳 기다려온 행운이 오늘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비록 그것이 조작되고 악의로 가득 채워져 있더라도)이 기뻐 당장이라도 승천할듯할 남자.

두 번째는 어제 전학 온 학생이 두 명의 남자와 들어온 데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 이유를 두 명에게 물었다가 한명에게는 뭔지도 모르겠는 헛소리를, 한명에게는 관심 끊으라는, 평소라면 생각도 못할 말을 들어서 그 짜증의 반동으로 호기심과 분노를 동시에 가지게 된 여자.

세 번째는 앞으로의 고등학교 인생을 걱정하며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안되면 1분 1초라도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남자.

그리고 그 옆에는, 부끄러워하면서 점심을 노려보는 세 명을 곤란한 듯 쳐다보는 여성(접대용 모드 On).

“저기, 전부……. 점심 안 먹어?”

“아, 당연히 먹어야지! 아, 혹시 배고파? 뭔가 더 먹고 싶은 반찬 있어? 내꺼 얼마든지 줄 테니까 말만 해!”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는 동우. 주위에서 킬킬대는 소리도 무시한 채, 당당한 자세로 허리를 피고 자리에 앉았다. 그 소란이 부끄러운 듯 움찔움찔 하며 엉덩이를 움직이는 유이를 보며, 현상은 생각했다. 내숭도 저 정도면 천연기념물이야. 한편 세영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빤히 세 명을 바라보는 중. 그 시선을 의식하고 현상은 고개를 들어 세영을 바라봤지만, 세영은 관심 없다는 투로 젓가락을 입에서 빼고 식사를 재개했다.

어째서 이 네 명이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나ㅡ하는 건 지금부터 5분전. 점심시간이 시작되어서 모두 식사를 시작하는데, 자기 자리에서 움찔움찔 하던 유이가 뽀로로 하고 세 명의 쪽으로 다가왔다. 그 행동에 늘 뭉쳐서 밥을 먹던 동우, 현상, 세영 트리오는 각자의 동작을 유지한 채 시선 고정. 그 시선과, 반 전체의 시선에 노출된 유이는 몇 초 동안 몸을 배배 꼬더니 조용히 말했다.

“저, 늘 점심 같이 먹는 것 같은데, 괜찮다면 나도 같이 먹어도 될까? 늘 같이 먹다가 혼자 먹으니까, 뭐랄까, 좀 어색하달까. 그래서, 혹시 괜찮다면…….”

시선을 돌려 서로 마주보는 현상과 세영. 그리고 고개를 돌려 뭔가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동우가 책상을 뒤엎을듯한 기세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당연하지! 먼 나라로 전학 와서 고독할 텐데, 그 고독을 우리가 풀어줄수 있다면 얼마든지! 아니 그것보다 밥 같이 먹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래! 같이 먹자! 너희 둘 다 괜찮지?”

“난 특별히 상관은 없는데…….”

압도적인 동우의 박력에 주춤하며, 세영은 어투는 부정이지만 말 자체는 긍정하는 실수를 범해버렸다. 그리고 사실 세영은 별 상관없었다. 아니, 솔직히 안 될게 뭔가. 같이 밥 먹자는 거뿐인데.

하지만 현상의 머릿속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실 어제 밤에는 ‘앞으로 방과 후에도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끝이었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도 학교에서 안면이나 트는 줄 알았다. 아침의 등굣길에서 약간 이상한 감각을 느끼기도 했지만,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올 줄이야. 정말 예상치도 못한 습격이잖아 이건. 아무리 내가 까발릴 가능성이 높다고 쳐도 그렇지.

“그럼 현상이도 괜찮을 테고. 자 자, 앉아 앉아.”

“자, 잠깐 기다려!”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안내하는 동우의 목소리에, 현상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 외침에 유이는 움찔했고, 그 사태를 본 동우는 강하게 외쳤다.

“뭐임마! 특별히 상관도 없잖아! 뭐가 불만이냐! 앙! 한번 말해봐!”

“아, 아니 특별히 이유는 없지만…….”

“그럼 됐잖아! 다수결로도 2:1이다! 자, 쫑알쫑알 말고 앉아서 밥이나 먹어! 자, 유이, 저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앉아서 먹어. 밥 식겠다.”

동우의 이상하리만큼 강렬한 박력에 현상은 한숨을 푹푹 쉬며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뭘 어쩌겠나. 마법소녀인거 까발리라고? 한둘이면 몰라도 교실에서 그걸 외치겠냐. 세영도 “나도 특별히 찬성은 아닌데…….”하고 중얼거렸지만, 동우의 강렬한 눈빛에 말없이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5분 째. 네 명의 시선구도는 헤벌레 → 우물쭈물 주춤주춤. 그러면서 힐끔 → 날 보지 마. 안 까발릴 테니까 날 보지 마 → 현상이 너도 나 보지 마. 나더러 어쩌라고. 동우 저건 왜 저리 쪼개 → 이하 원형으로 시선이동. 그런 구도를 잠시 깨고 제 3자적 시점에서 셋을 바라보던 현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과감하게 접근해 같은 식탁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런 조용한 분위기다보니 어떻게 운을 띄우기도 참 미묘한 모양인지 유이는 조용히 세 명을 살피며 밥알을 한 톨 한 톨 세고 있었다. 내숭도 저 정도면 천연기념물을 뛰어넘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감이야. 한숨을 쉬며 현상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바랬다. 그것보다 누가 이 침묵 좀 깨줘.

“그, 그러고 보니 유이는 어디에서 온 거야? 외국에서 살다온건 들었는데, 정확히 어디에서 온 건지는 듣지 못해서 말이야.”

주춤거리며 힘겹게 입을 연 동우의 질문에, 유이는 깜짝 놀라며 움찔거렸고, 그 움찔거림에서 좌절하던 현상은 희망을 얻었다. 그래. 내가 안 까발려도 자기가 까발리게 만들면 되지. 동우야, 잘했다. 참으로 잘했다. 마음속으로 부장마냥 동우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자는 생각을 하며, 현상은 느글거리는 표정으로 유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마, 말하기 미묘한데…….”

“괜찮잖아? 말해봐.”

저 잡것이 -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이의 시선을 상콤하게 튕기며, 현상은 마음속으로 득의양양했다. 흥. 어쩌라는 거냐. 자, 그만 포기하시지. 우물쭈물하던 유이는 결국 죽어 들어가는 소리로 작게 말했다.

“……계를 돌아다녔어.”

“뭐라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어. 어려서부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 이곳저곳.”

흥, 드디어 꼬리를 들어내는군. 재촉에 마침내 입을 연 유이의 대답에 씨익 웃는 현상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동우는 점점 기가 살아 유이를 몰아붙였다.

“전 세계를? 왜? 부모님 전근 같은 거 때문이야?”

“뭐, 비슷한 거야. 부모님은 아니지만.”

조용히 대답하며, 유이는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그 행동에는 분명한 ‘말하기 싫다’라는 분위기가 실려 있었지만, 눈치가 없는 정도를 벗어나 개념이 없는 정도가 된 동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님은 아니라는 건, 친척?”

“아니, 그것도 아닌데…….”

우물쭈물. 딱 잘라서 ‘말하기 싫다’라고 대답은 할 수 없었는지 유이는 계속 애매모호한 태도만을 보였고, 동우는 신이 난건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이런 간단한 질문에 대답할 변명도 순간적으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닐 테고. 여하튼 일단 까발리면 나야 편하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구경하는 현상을 한번 노려보고, 참다못한 세영이 입을 열었다.

“그쯤 해두지?”

“사실은…….”

뚝. 두 명은 서로를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타이밍도 정확하게, 세영이 참다못해 나선 것과 동시에 유이가 입을 열기로 결심한 것이다. 약간 당황했지만, 세영이 먼저 그로기 상태에서 빠져나와 말했다.

“유이, 이런 잡것들 이야기 신경 쓸 필요 없어. 말하기 싫으면 안하는 거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는 거지.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자 밥.”

“아, 아니, 그래도 뭐 특별히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말하기 싫은 거 아니야?”

“세영아 왜 그러냐. 특별히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나 좀 듣자는 거…….”

“동우 You는 샷 유어 마우스. Call? 유이야, 괜찮겠어? 이 여자 밝히는 잡것 때문이라면 괜찮아. 이 자식은 언제나 이 모양 이 꼴이니까. 뭐 나도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듣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찍 소리도 못하고 씹힌 동우를 대신해 속으로 투덜댔지만 현상은 일단 사태를 두고 보기로 했다. 말하기 싫다는 상대 추궁하는 건 내 스타일도 아니고. 아까부터 계속 우물쭈물하던 유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말 못할 건 없어. 듣고 싶다면 말 해줄게.”

“봐. 괜찮다잖아.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뭐가 어……. 아야!”

로우킥이라도 맞은 건지 앉은 채 다리를 잡고 날뛰는 보기 흉한 퍼포먼스를 하는 동우를 남겨둔 채, 유이는 조용히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이는 할머니와 동생과 같이 살았다. 부모님은 본적 없음. 이야기도 들은 적 없음.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살았고, 부모님이 안 계시는 이유를 물어봐도 할머니는 대답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그다지 위화감을 가지지 못했고, 위화감을 가지지 못하는 그녀의 성장 과정과도 관련이 있었다.

할머니는 집시였다.

어려서부터, 유이와 동생, 그리고 할머니는 세계 각지를 유랑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북미, 이곳저곳. 오래 머문 곳도 있었고, 짧게 머문 적도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사귄 친구도 많았고, 생겨난 에피소드도 한둘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부유한편은 아니었지만, 짐마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먹고 살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은 있으셨다. 만약 여행 중 여비가 떨어지면, 할머니는 장기를 십분 살려 노래를 한다든지, 점을 봐준다던지 하는 일로 생활비를 벌었고, 다시 여행에 필요한 자금이 마련되면 여행을 떠났다.

히틀러, 처칠, 스탈린, 루즈벨트 등등 유명 인사의 사인을 한 노트에 가지고 있는걸 자랑으로 삼으신 할머니는, 당시 어려서부터 여행을 하셨고, 그 방대한 경험은 유이가 할머니와 함께 다녔던 16년 내내 매일 밤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물론 재미있는 이야기만 골라서). 벌써 젊어서 세계 일주를 두 번인가 끝내신 할머니는 유이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여행 중 특히 좋아하셨던 나라가 한국이었다고 한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행 중, 여비가 떨어져 잠시 점집을 운영하며 머물렀던 도시에서, 결국 고령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2년 전의 일이었다. 결국 힘들고 고난하기도 했지만 즐겁고 늘 축제 같았던 할머니와의 여행은 끝나고, 16살의 유이, 그리고 한살 아래 15살의 동생만이 세상에 남겨졌다.

신분증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법적으로 둘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학교를 다닌 적은 물론 없으며(할머니와의 여행으로 지식은 웬만한 어른보다도 나았지만) 어딘가에 자신들을 돌봐줄 지인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할머니의 친구 분들은 많으셨지만, 연락방법을 유이가 알 리가 없었다. 짐마차를 가득 채운 잡동사니와 할머니의 얼마 안 되는 유산만을 가지고, 유이와 동생은 여행을 포기했다. 아이 둘이서 여행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대로 도시에 정착, 짐마차에서 할머니에게 배운 점으로 점집을 운영해왔다. 힘든 일이 많았지만 사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2년을 살던 중 한국에 있는 할머니의 지인의 도움으로, 할머니의 말씀에 예전부터 한국에 관심이 있던 유이는 한국에 교환학생 자격으로 오게 되었다 - 라는게 유이의 이야기의 내용이었다.

“그럼 동생은?”

“그 할머니 지인 분이 보살펴주시고 계셔. 처음에는 동생이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져서 내가 오게 된 거야. 이사 하고 연락은 아직 못했지만, 아마 잘 지내고 있을 거야.”

현상이 이야기의 흐름이 끊긴 틈을 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주변은 아이들이 인간의 벽을 쌓고 유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몇 명은 재미있다는 듯이, 몇 명은 동정하는 듯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각종 질문이나 이야기 해달라는 요청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소심하던 유이는 활발하고 자기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겪은 사건들……. 재미있기도, 무섭기도, 감동스럽기도 한 이야기들. 한손엔 턱을 괴고 눈치 채지 못한 채 유이의 이야기에 빠지고 있던 현상은 생각했다. 그래, 이 녀석도 나름대로 고생하며 살아왔구나. 역시 저 녀석의 성격은 저런 아이들과 신이 나서 떠드는 활발한 성격이겠지. 마법소녀라는 정체를 감추기 위한 소심한 커버를 벗기고, 즐겁게 자신의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유이는, 싸울 때의 모습보다도 더 생기가 넘쳤다. 역시 저 녀석도 보통의 활발하고 떠드는걸 좋아하는 10대 소녀일 테니까. 그런 힘겨운 싸움보다는 아이들과 이렇게 즐기는 게 더 좋겠지. 웃고 떠드는 유이의 얼굴을 보면서, 현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라고 할까보냐.

“뻥치시네.”

방과 후 복도 구석 사각(死角) 지대. 하교하려는데 냅다 끌고 와선 한참 지나서야 대놓고 던지는 현상의 직구에 유이는 눈을 깜빡이다 머리를 좀 굴려 뭘 말하는 건지 기억해내곤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뻥이 뭐야 뻥이. 고풍스럽게 ‘사회와 만인의 안정을 위한 현실 재구성 능력’이라고 불러. 그것보다 난 갑자기 끌고 오길래 뭔가 했네.”

“시끄럿 이 위험물 처리반에 넘겨야할 1급 전범아. 아까 그 뻥은 뭐야.”

“말 해달라는데 억지로 숨기는 것도 이상하잖아.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어딘가의 스승님한테서 마법 전수 받았다는 마법소녀는 은퇴했냐? 아니면 할머니 돌아가시고 마법소녀 된 거냐?”

“할머니가 스승님인걸.”

그 말을 하는 유이의 목소리엔, 약간의 그리움과 쓸쓸함, 그리고 분함이 묻어났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현상은 기관총처럼 쏘아주려고 들이마신 숨을 억지로 삼켰다.

“친할머니는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양할머니. 어려서부터 둘밖에 없던 동생과 날 거두고 키워주셨어. 보통 다른 분들은 스승님으로 부르며 사제관계를 심하게 따지셨지만, 스승님은 당신을 스승님보다 할머니라고 부르는걸 좋아하셨어. 어머니나 할머니는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친할머니 이상으로 잘해주셨다고 장담할 수 있어. 같이 여행을 한 것도 사실이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것도 사실이야. 굳이 거짓말이라고 하면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가 거짓말이야.”

무감정으로 하는 유이의 대답에, 현상은 할 말이 없어졌다. 하여간 사람 다루는 데는 뭔가 있어.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과감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야기는 그것뿐?”

잠시 침울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평소처럼 밝은, 아니 밝으려는 대답에 현상은 “어? 으, 으응…….”라는 맥 빠지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코를 한번 훌쩍이고, 유이는 가방을 고쳐 매고 활발하게 말했다.

“그럼, 이만 실례할게. 어제 부서에 들어서 말이야.”

“뭐야, 부서까지 들었어?”

이 녀석 임무만 끝나면 돌아가는 임시직이라며. 약간 어이가 없어 표정이 풀어진 현상을 보며 유이는 눈을 껌뻑였다.

“뭐야, 난 부서 들면 안 된다는 거야? 위험물 처리반이 출동할 마법소녀에 곧 떠나니까?”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얼떨떨하며 얼버무리는 현상의 대답에 유이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그다지 부활동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부장이란 사람이 하도 사정을 해서 말이야. 아,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귀여운 디자인의 손목시계를 꺼내보는 유이를 따라 현상은 자신의 손목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대다수의 학생들은 하교를 끝냈을 무렵. 그리고 몇몇 부서(대부분 체육계)의 방과 후 부활동이 시작될 시간. 슬슬 문학부도 문을 열 시간이다(사실 여는 시간은 의미 없지만).

“늦게까지 미안. 하교시간 좀 지났네. 급한 일 있어? 아, 참. 오늘은 니가 부른 거였지.”

‘에헹’하고 작게 웃는 유이의 웃음에 울컥하며 현상은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끄러. 뭐 내 쪽에서 시간을 끌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럼 부활동 열심히 해라. 나도 부활동 해야 해서.”

“체육부서? 그런 타입으로는 안 보이는데.”

미안하게 됐군. 부실하게 생겨서. 별 상관도 없고 의미도 없는 농담에 툴툴거리며 현상은 대답했다.

“아니, 문학 창작부. 아마 부실에 가서 물어보면 화려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왜 그래?”

별 생각 없이 말하던 현상은, 유이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니, 니가 그 문학 창작부 부원이라고?”

뭐야. 갑자기 왜 저래. 괴물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던 유이가 갑자기 격발 직전의 폭탄을 보는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현상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그 ‘문학 창작부’에 나 같은 연약하고 델리케이트한 모범생이 있다고는 쉽게 생각 못하겠지. 인원수도 5명밖에 안되니까 더욱 눈에 띌 것에다가 이 녀석의 위장 성격이면 여기저기서 이야기도 들었을 테고, 얼마 전에 ‘또’ 방송실 점거도 했고. 현상은 괴악한 논리로 납득했다. 여하튼 슬슬 문학부로 갈 시간. 특별히 부장은 시간 개념도 없고 오든 안 오든 기본적으로 신경 쓰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현상에게 만큼은 매일 제시간 방문을 권장(이라 쓰고 강요라고 읽는다)하고 있었기에, 어제 같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현상은 매일 제시간에 문학부로 튀어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럼, 나 먼저 가본다. 너도 그 가입했다는 부서인가 어딘가 가봐. 근데 마술부는 방과 후 활동 안하는데……. 체육 관련 부서냐? 하긴 왈가닥 깡패 마법소녀에 잘 어울리는구만.”

“아, 아니, 잠깐만!”

“미안, 늦어서. 그럼 가본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뒤에서 소리치는 유이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현상은 문학부실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라고 소리치든 내 알바냐. 너도 미쳐있지만 부장도 만만치 않게 미쳐있다고. 너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난 벅차지만 그에 못지않은 부장이라는 적수가 있단 말이야. 늦으면 장난 아니게 까일 거라고. 걸어가며 현상은 편두통이 더 심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어째서 내가 이런 상황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신세가 된 거냐. 마법소녀와 나사가 두 박스는 빠진 폭주 열차 사이에서 저울질이라니. 아아, 이 어찌 아니 불쌍한 신세냐. 누가 손수건 있으면 좀 빌려줘. 눈가 좀 닦자.

Writer

호성軍

호성軍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친구 우리들의 친구 게으른 호성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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