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1. 발단ㅡ 첫 번째 날. “신비한 능력의 전학생과의 위험한 로맨스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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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11 May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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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호성軍

“어, 현상이다!”

뒤에서 들려오는 활발한 목소리의 10대 중반 여성의 목소리에, 현상은 긴급히 반응했다. 성문 조회를 걸치지 않아도 저 목소리를 알아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 못 알아들으면 목숨이 위험해! 계단을 걷고 있는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현상은 반사적으로 몸을 벽 쪽으로 날렸다.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나며 몸 오른쪽이 굉장히 아파왔지만, 현상은 고통을 억누르며 살을 주고 뼈를 취한 용사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흥, 어떠냐.

방금 전 서있던 자리를 스치며, 부장의 여동생 홍성미가 RKO를 성공시키지 못한걸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쳇. 아깝네.”

“사람 한명 저승으로 보낼 뻔 하고 당당하게 그런 말 하지 마.”

“재미있잖아.”

허리에 팔을 얹고 자신의 살인미수 이유에 대한 증언을 ‘재미있잖아’로 끝내는 것으로 알겠지만, 부장의 재미 위주 인생관을 바로 가까운 곳에서 흡수하며 자라서일까, 성미는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남의 고생이나 고통 등은 생각하지도 않는, 어떤 의미로는 부장보다 나쁜 성격으로 자라버렸다. 부장이 정신적인 면에서 괴롭힌다면 성미는 육체적인 면.

“그것보다 존댓말 좀 써라. 어쨌든 난 니 오빠거든? 현상이가 뭐냐 현상이가. 중학교 때부터 벌써 5년을 알고 지냈잖아.”

“뭐가 어때서. 반년 차이구만. 오빠로서 인정받으려면 반년 더 일찍 태어나고 와. 반년 차이니까 동갑이잖아.”

“웃기고 있네. 넌 9월, 난 2월. 봐봐, 1년 차이 확실하게 나잖아.”

“밥팅아. 그건 내가 너보다 나이 많을 때 계산이지. 너 빠른 학번이지 해는 같잖아.”

이놈의 억지 논리를 보면 이 자식은 부장의 친동생임이 확실해. 아니, 아까 그런 짓을 하는걸 생각하면 친동생이 아니면 부장이랑 이런 것의 핏줄이 두 갈래나 있는 거겠지. 그런 건 인간 사회에 굉장히 부정적일 테니 있으면 안 돼. 그런 생각을 하며 성미와 계단을 오르던 현상은 머릿속에 떠오른 사실을 성미에게 물었다.

“근데, 그러고 보니 니가 왜 여기 있냐?”

“뭐야, 난 오면 안 된다는 거야? 매정하네. 다음 달 특활부 정할 때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입학한지 한 달도 안 된 게 어디서 까불어.”

“중학교 때도 다녔잖아. 거기에 일단 고등학교에 올라와 정식 부원이 되었으니 가끔 3대 문학 창작부 부장 예정자로서 얼굴을 비춰야지.”

능력주의를 외치던 부장도 핏줄엔 약한 걸까. 그것보다 어느새 내가 모르는 사이 이 녀석이 3대 문학 창작부 부장(예정)을 꿰찬 거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보니, 어느새 구교사 5층, 문학부 앞 통로에 진입했다.

글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현상은 생각했다. 늘 보는 광경이지만, 이 통로를 표현할 말은 이것 하나뿐이다.

전쟁터.

좁고 낡은 복도는 각종 학교 비품으로 가득 매워져있었다. 책상, 의자, 책장, 각종 상자들. 얼핏 보기엔 아무 생각 없이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이지만, 직접 걸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묘하게 이동 진로를 예상해서 앞으로 나가기 힘든 구조로 배치되어있었다. 또한 통로 저쪽에서 쌓아올린 물건을 넘어트리거나 조금만 배치를 바꾸면 한 장해물에서 몇 분씩은 시간을 벌수 있도록 주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이미 바리게이트라는 정의가 가능한 구조. 거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이곳저곳에 ‘부비트랩’ 이라고 불려도 상관없을 구조물이 배치되어있다. 얇은 와이어로 이어져 와이어를 끊으면 정확히 머리가 있는 위치로 넘어지는 대걸레라던가, 발사 스위치가 묶여있어 와이어를 끊어 안전핀이 뽑히면 바로 발사되게 되어있는 소화기 등등, 유사시엔 통로를 봉쇄하겠다는 의지가 너무나도 분명히 보이는 그 배치. 작년 말, 문학 창작부가 발촉은 했지만 학교 측에서 정식 부서로 인정은 안했을 때, 교장 선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정식 부서도 아닌 부서가 부실을 강제 점거하고 각종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으므로 이에 자칭 문학 창작부라는 부서를 강제 철거한다.’ 라는 학생부 선생님들과 선도부의 합동 작전을 근 60시간가량 방어한 작년 말의 소위 ‘문학 창작부 크리스마스 대방어전’ 후로, 부장이 작성한 문학 창작부의 ‘비상시 행동 매뉴얼’에는 부실 점령 저지 작전이 0순위를 차지했다.

덕분에 무지하게 지나가기 귀찮잖아 . 투덜대며 현상은 그 ‘바리게이트’ 사이를 지나 문학 창작부 부실 앞에 섰다. 다행히도 비상시가 아니라 부비트랩용 와이어는 연결 안 되어 있기 망정이지,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작년 말이나 올해 초 처럼 와이어까지 연결되어 있을 땐 이 복도를 안전하게 통과하는데 수십 분은 기본으로 잡아먹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왜 부실에 안 왔어?”

“부장이 어제는 나올 필요 없다고 집에 가라고 해서.”

성미의 질문에, 현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잠깐. 그럼 너 어제도 왔었다는 거냐?”

“말했잖아. 올해는 가입할 생각이니까 자주 얼굴 비출 거라고. 그리고 재미있는 일도 있고.”

방송실을 점거하는 그런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부실에 안온 주제에.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려던 현상은, 새로운 의문이 떠올라 돌리려던 문손잡이를 잡기만 한 채 고개를 돌려 성미에게 물었다.

“잠깐, 재미있는 일? 그게 뭐야.”

“어제 신입부원이 들어왔는데, 몰랐어?”

“어엉?”

멍하니 얼어버리는 현상의 표정을 보고, 성미는 약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잠깐, 세영이 언니가 말 안했어? 같은 반이니까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지금이라도 들었으니 상관없으려나. 여하튼 어제 새 부원이 들어왔어. 여러모로 꽤나 재미있게 생겼던데?”

부장의 방송실 점거 해적방송을 듣고서도 이 부서에 가입하려고 하다니, 그런 나사 빠진 놈이면 분명 이 녀석에게는 더럽게 재미있겠지. 미묘한 표정으로 이상야릇한 미소를 짓는 성미를 보며 현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장의 그런 방송을 듣고도, 아니 어쩌면 들어서 이 부서에 가입을 한다면, 이 폭탄 그득한 부서에 하나의 폭탄이 더 들어온다는 소리다. 그나마 정상인에 속하는 나랑 세영이는 더더욱 소수파에 속하게 되었다는 소리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선생님을 합치면 50%는 차지했는데. 유이도 그렇고 뭐도 그렇고 왜 갑자기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더 머리 아프게 된 건지 원. 빨랑 문이나 열라고 뒤에서 재촉하는 성미의 목소리에, 현상은 일단 문을 열었다. 에이 모르겠다. 혹시 이 미친 부서를 갱생시키려는 투철한 사명감의 소유자일지도 모르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말자.

문학부 부실의 좌석 배치는 회의 테이블에 가깝다. 가운데 공간을 두고 사무용 책상(구교사 교무실에 있던 낡은 비품)이 입구 쪽으로 구멍이 뚫린 ㄷ자 모양으로 삼면에 배치되어있다. 가운데 자리를 부장이, 그리고 가입 순서로 입구 쪽으로 배치가 되어, 신입 부원은 문을 열면 바로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문을 여는 현상의 눈에는 논스톱으로 신입 부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현상은 15분전, 매점에서 부활동을 하며 먹을 간식을 사기 전 유이와 대화할 때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저 녀석이 어째서 내가 문학 창작부 라는 거에 그렇게 놀랐겠어?

“아, 현상아 안녕? 또 보네.”

유이의 작업용 미소가 이제는 지겹다. 부장의 “왔나! 김현상 작가!” 라는 호탕한 인사와, 기타 부원들의 인사를 단도직입적으로 무시하며, 현상은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투척하고(정확히 책상을 미끄러져 의자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부장은 박수를 쳤다) 유이의 한쪽 손을 잡아서 방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강하게 닫았다. 쾅! 하는, 잘하면 이 낡디 낡은 구교사 건물에 치명적인 금 정도는 갔을 굉음과 함께 문에선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너머로 타다다다 하는 두명의 발소리와, 유이의 ‘이거 놔’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거?”

현상의 재빠른 돌격에 급하게 길을 비키고 멍하니 서있던 성미의 질문에, 부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랄까, 꿀꺽, 현상이에게도 저런 적극적인 면이 있을 줄 몰랐는데?”

“그러게요. 언제까지나 쑥맥일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부실에서 맥주 좀 마시지 마요.”

“김현상 작가도 의외로 패기와 혈기가 넘치는 청년이었군. 그런데 은세영 작가, 김현상 작 가는 신입 부원에 대해 모르는 것 같던데, 말하지 않은 건가?”

별 생각 없이 단지 현상의 놀라울 정도의 패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네 명은, 세영 혼자 멍 하니 문 밖을 내다본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시엔 절대 볼 수 없는 멍한 채로 “어어? 어엉?” 하는 괴악한 소리를 내며 문밖을 보는 세영을 보고, 부장은 피식거리며 웃고는 의자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한 모금 후루룩 소리 내며 마시곤 중얼거렸다.

“봄이구만.”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이 아가씨야!!

버럭. 그대로 복도 저편까지 질질질 끌고 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현상에게, 유이는 머리를 긁으며 헤헤 웃었다.

“아니, 저기, 그게 말하려고 했는데, 아까 니가 그냥 먼저 가버리길래…….”

“도대체 뭐야! 아까 점심시간도 그렇고 뭐도 그렇고 왜이리 쫓아다녀! 니가 스토커냐! 앙! 도대체 왜 방과 후에 그 난리 브루스를 추는 걸로 모자라 학교에서까지 1분 1초를 붙어 있으려고 하냐고!”

“우와, 아저씨 개그.”

“시끄러!”

이 아가씨가 열린 입이라고 단어를 전자동으로 배출하는 거냐! 있는 대로 화를 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현상을 보며, 유이는 한숨을 쉬고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 나도 그냥저냥 같이 밤에 있는걸 목격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만이면 돼. 점심시간은 그 일환이었지만 정말로 문학부 가입은 그런 목적이 아니었다고.”

“그럼 뭔데! 말해봐!”

“아까 말 했잖아. 부장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쳐들어왔다고.”

 

 

‘그럼 나도 가볼까.’

현상이 교실을 나가는걸 보고, 유이는 가방을 들어올렸다. 몇 명의 아이들이 진심인지 흑심인지 다가와 같이 가자거나 하는 제의를 했지만, 유이는 작업용 페이스로 모두 정중하게 거절했다. 호기심이든 뭐든 여하튼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그다지 짜증은 나지 않았다. 비록 내 외모가 반반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렴 어때. 단지 끈질기게 달라붙던 신동우인가 했던 그 녀석은 귀찮았지만. 덕분에 벌써 이름도 외웠다. 여자 친구를 바라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눈에 띄게 하면 넘어갈 나무도 안 넘어가지.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유이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며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미약하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내용은 교실 내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아니었다. 훈련을 받은 덕분에 좋아진 청력으로 들리는 발소리는 좁은 복도를 울렸고, 깊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자신이 내는 소리처럼 커다랗게 들려왔다.

1종 계약서에 작디작게 써진 조약. 내용은 시각과 청각의 일시적 공유화 동의.

시각 공유화는 걸으면서 하면 위화감이 들어 위험하지만, 청각이라면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는 기분으로 도청(?) 할 수 있다. 뭐 벌써 내가 마법소녀라는걸 몇 명에게는 말했겠지만, 저런 쑥맥은 ‘하지 마라’ 라고 말하면 잘 안하는 타입이다. 그만큼 다루기 쉬운 타입이지만. 하지만 만일의 하나 라는게 있지. 여하튼 1종 계약은 그렇게 강한편이 아니다. 500m 이상 떨어지면 공유화는 무효. 그다지 큰 마을이 아니니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미행하면서 어디 사는지 정도는 알아두는 편이 좋겠지. 거기에 신경 쓰이는 것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며 교실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교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뛰어 들어온 뭔가에 부딪쳐, 유이는 “꺅”하는 단말마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찌었다.

“허억, 허억, 미, 미안하네. 그런데, 허억, 김현상 작가는 벌써 갔나?”

우와, 위험한 사람이다. 유이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이마에서는 땀을 흘리며 호흡은 거친 그 사람은,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교실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움찔거리며 그 시선을 피하는걸 보던 유이는, 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걸 눈치 챘다. 뭐, 뭐야.

“자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런 질문을 해서 실례지만 혹시 오늘 전학을 왔다는 소문의 미소녀 전학생이 자네인가?”

그 사람 면전에다 대고 미소녀 전학생 운운 하다니, 더럽게 위험해 이사람.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유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약간 끄덕였고, 사내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나 옷을 털자, 사내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땀을 닦고 옷깃을 고친 뒤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말했다.

“흐음, 초면에 실례를 범해서 미안하네. 급하게 김현상 작가, 아니지, 자네를 찾던 중이라 말이야. 역시 들리는 소문대로 아름다운 미모군. 그리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환생한듯한 그 아름다운 미모를 보니 나의 미에 대한 관념이 재구성 되는 것 같아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아 생겨난 아까의 결례는 다시 한 번 사과하고, 갑작스럽지만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부디 급한 일이 있지 않다면 약간의 시간을 내어 나의 말에 약간만이라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겠나?”

“예? 아, 벼, 별말씀을……. 예? 예에…….”

뭐야, 이 바보 같은 대답은.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저 인간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나름대로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며 이런저런 경험을 해온 유이였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유이의 머릿속에서 알프스 산골짜기에서 들었던 요들송이 울려 퍼지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네의 이름조차 아직 들어보지 못했군. 초면에 이것도 어찌 보면 결례겠지만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네의 그 이름을 알아 이후의 대화나 대인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나에게 자네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나?”

“샤,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그나마 대화의 맥락을 알아듣겠는 사내의 말(사실 ‘근데 이름이 뭐야’라는 내용을 더럽게 늘린 거지만)에 유이는 겨우겨우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현상을 찾은걸 보면, 이 사람도 아마 김현상과 아는 사이일 것이다. 거기에 지금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는데도 교실 안은 비교적 조용한걸 보면 이런 사건은 자주 있는 일이라는 것. 그렇다면 관계가 꽤나 친밀할 가능성이 높다. 그걸 전제로 하면 약간 지나친 비약이긴 하지만 날 찾아왔다는 건 어쩌면 현상에게 내가 마법소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사실 그냥 ‘2학년에 미소녀 전학생이 왔다’ 라는 것을 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음,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이라. 그럼 샤마르니아 양,”

“아, 전 성이 앞에 나와요. 그리고 편하게 유이라고 불러주세요.”

유이의 정정에 사내는 “흠, 그런가?” 하고 중얼거린 후 헛기침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그럼 실례했고, 그러면 유이양, 이라고 부르겠네. 유이양, 갑작스럽겠지만 난 자네가 문학 창작부에 가입하기를 원하네.”

“문학……. 창작부요?”

도대체 뭐하는 부서야. 그것보다 정말 단도직입적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한 유이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사내는 당장이라도 유이를 맹렬히 포옹할 듯이(악수가 나와도 눈 하나 깜빡 안하는 유이였지만, 목숨의 위협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팔을 크게 벌렸다 유이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쥐었다. 꽈악. 약력은 상당한데? 아니, 이게 아니지. 당황하며 손을 빼려는 유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사내는 유이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꽉 쥔 채 속사포로 말을 이어갔다.

“그렇네! 우리 문학 창작부는 강압적이고 주입적인 현대 교육체계 하에서 학생들의 창의성과 창조력을 키우려는 유익한 부서로서 그 이름을 교내외에 널리 떨치고 있네! 학생들이 재미를 느낄만한 친숙한, 10대의 정서에 맞는 글 주제를 토대로 매일 양질의 간행물을 내고 있으며 기타 자유 투고를 삽입해 말 그대로 학생의, 학생을 위한, 학생에 의한 간행물이란 취지를 잘 살리고 있으며 내용도 학생들의 재미와 그 재미로 인해 발생하는 창의성을 자극하는 내용을 위해서 매일매일 정진하고 있네! 비록 이런 우리 학생들의 선량한 의지를 깨부수려는 많은 적들과 대립하고 싸우고 있으나, 주입적인 이후 사회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라는 존재보다 학창시절을 즐겁게 즐기고 후에 정말로 필요한 창의성과 독창성을 키우는 우리 문학 창작부에게 정의가 있는 이상 악의 무리들에게 그리 간단하게 패배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네! 지금 자네가 우리 문학 창작부에 가입 해준다면 우리 문학 창작부는 새로운 부원과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문학에 불타는 영혼을 맞아 더욱더 한보 앞으로 진보 할 수 있을껄세! 자, 이렇게 전학하자마자 가입을 원하는 부서를 만난 것도 일종의 하늘이 내린 기적이 아니겠는가! 어떤가! 우리 문학 창작부에 가입하여 자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문학열을 불태우는 것은!”

“에, 예?”

“지금의 ‘예’라는 것은 영어로는 Yes 일본어로는 はい 불어로는 Oui 라는 의미와 동의어로 받아들여도 문제없겠나?”

“예에?”

“그렇다는 의미로 알겠네. 그럼 이 가입 신청서에 사인을 부탁하겠네.”

머엉. 폭포수와 같은 사나이의 말의 공격은 다소간의 딜레이(약 5초 정도)를 두고서야 제대로 유이의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도대체 뭔소리야. 알아들은 내용은 나보고 문학 창작부인지 뭔지 하는 괴집단에 가입하라는 내용 하나뿐이다(사실 그게 모든 내용 같지만).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유이는 어느새 자신의 이름까지 적힌 채 눈앞에 내밀어진 가입 신청서를 보고 있었다. 안 돼, 이런 집단에 들어가면 안 돼.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있는 힘껏 반대를 외치고 있어서, 겨우 유이는 정상적인 사고를 약간이지만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당황해서 출력 100%는 무리였지만.

“저, 저기, 죄송하지만 전 부가입 같은 건 그다지…….”

“음? 아깐 OK 하지 않았나.”

“그, 그건…….”

여기서 ‘당황해서 그랬다.’ 라고 대답하긴 참 미묘하겠지. 그런 유이의, 아니 보통 사람의 심리를 노렸던 건지 눈은 압박감을 주지만 무의식적으로 입 꼬리를 약간 올리며 남자는 말을 계속했다.

“분명 아까는 OK 하지 않았나.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고,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만 투자해주면 되네. 그다지 많은 시간도 아니지 않나. 거기에 유학생으로서 이 나라에서 여러 가지 힘든 일도 있을 텐데, 그런 것을 우리 문학 창작부의 든든한 동지들과 함께 해결해 나갈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돈이나 그런 것도 필요 없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사회관계는 넓으면 넓을수록 좋은걸세. 그리고 그것보다 부모님에게서 한번 한 말은 책임지라는 것은 배웠겠지?”

후반부는 숫제 빚쟁이나 입에 올릴 실례되는 협박조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록 당황한 상태였지만, 다른 사람보다 이런 저런 사태를 맞닥들인 적이 많은 유이는 빠르게 회복하여 대응법을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 안계신데요…….”

슬픈듯한 눈으로 신발 끝에 시선을 고정하며, 얼마 전 읽은 연애소설의 슬픈 이별장면을 떠올리며 눈가에 물기를 충전한다. 덧붙이자면 목소리는 약간 떨기. 부모님이 안계시다는 걸 이용한 필살 대응법 3식. 보통은 이걸로 상대는 대화 타이밍을 놓치고 이쪽은 빠져나갈 틈새를 얻는다. 워낙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에 위화감이 없었기 때문에 유이는 괜찮았다.

“그런가, 그거 미안하군.”

걸렸다ㅡ. 아까의 나불나불 거리는 말에서 잠깐 보통사람과 다른 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상대도 사람이긴 사람인 모양이다. 지금 생긴 약간의 틈새. 이 틈새를 노려 빠져나가는 거다. 잠시 신경을 놓고 있어서 현상과의 공유화가 끊겼지만, 아직 멀지 않겠지. 안되면 잠깐 시각 공유화로 위치를 확인하고 이동하면 돼. 예민한 사람이라면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설마하니 그 둔탱이가 위화감을 느낄 리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려는 순간, 유이는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다시 속사로 단어의 조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네에게 부모님이 계셨다면 분명 하셨을 말씀이네. 이 세상을 살면서 꼭 지켜야할 사항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말일세. 약속이라는 것은 상대의 믿음과 신의와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일세. 역으로 이쪽이 소비되기도 하지. 그런 약속을 깬다는 행위는 양측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는 것일세. 약속은 어디까지나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고, 그것이 불가한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경우뿐이지만, 지금 상황을 생각해보면 자네가 그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 거기에 자네에게 피해가 가는 내용도 아니네. 부담 없이 사인만 하면 돼. 문학 창작부는 해외 거주인의 한국 거주인과는 다른 관점에서의 시각과 생각이 필요하다네.”

“…….”

“가입 할 거겠지?”

여기서 늦어지면 추적은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으니, 여기서는 가입을 하고 도주를 하는 게 낫겠다ㅡ라는 자기 핑계보다, 솔직히 말해서 귀찮았다. 랭크 수정. 신동우라는 그 녀석은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 이 사내는 최저다. 가능하면 상대도 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타입은 자신의 목적이 완수되지 못하면 포기하지 않는 타입이다. 그렇다면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어울리는 척 하면 되는 거다. 속으로 한숨을 쉬고(아직 작업용 페이스니까), 최대한 불쌍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투로 유이는 사인했다. 주위의 남자아이들이 도와주는 경우도 약간은 기대해봤지만, 모두 불쌍하다는 듯 유이를 쳐다보며 쑥덕거리는걸 보면 앞의 이 양반은 원래 이런 캐릭터인데다 아무도 손을 쓸 수 없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그것보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일까.

그리하여 애칭은 유이, 본명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은 문학 창작부에 가입했다.

 

 

“뭐, 대충 이렇게 된 건데 말이지.”

유이가 막 말을 끝마쳤을 무렵, 현상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상체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뽑혀나간 머리카락이 다시 머리를 쥘 때마다 구교사의 난장판 복도로 떨어졌다.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부탁이니까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털썩. 머리를 쥐어뜯던 현상은 결국 무릎까지 꿇었다. 한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이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상은 고개를 바닥에 박고 대머리라도 되고 싶은지 머리털을 죽어라고 쥐어뜯었다. 정신이 정말 아득해지는 게 느껴졌다. 안드로메다? 돌파했다. M66 은하를 향해 돌진중이다. 웃을 일이 아니라고. 그런 식으로 엎어져있는 현상을 보여, 유이는 한숨을 쉬었다.

“뭐야, 내가 온 게 그렇게 불만이야? 이거 좀 상처네. 귀찮게 안 굴 테니까 신경 꺼 신경. 그다지 문학부인지 뭔지랑 엮기 고픈 생각도 없다고.”

“도망칠 곳이, 도망칠 곳이 없어…….”

“여보세요?”

“어째서 그렇게 나한테 달라붙는 거야! 점심시간이고 학교에서고 뭐고! 나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다고! 밤 9시부터 벌어지는 실시간 일일 마법소녀 액션물만으로도 내 괴상한일 편성표는 꽉 찬다고!”

“말했잖아. 어디까지나 난 ‘친밀한 관계’를 유지를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거라고. 난 적당히 ‘전학 왔는데 내 취양의 남자가 있네? 꺄악 좋아라~♡’라는 연기중이니까, 너도 ‘미소녀 전학생이 나에게 마음이 있나보네? 와아 럭키이~♡’라는 역할을 잘 연기하라고. 난 그 연기를 제대로 실행하는 거뿐인데? 그러니까 좀 괴로워도 참으라고. 연극이긴 하지만 너도 여자 친구 하나 생기는 거잖아? 니 녀석 면상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중’ 정도밖에 안되잖아. 나 같은 미소녀가 잠깐 동안 임시직이긴 하지만 여자 친구가 되어준다면 더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웃기고 있네! 두 얼굴의 폭력 양아치 강제계약 체결사 마법소녀는 골백명이 와도 사양이라고!”

현상의 외침에 유이의 눈썹을 움찔하고 움직였다. 하아. 이마를 붙잡으며 유이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여자 친구 없을 거다. 나 참, 굴러 들어온 복이구만. 이놈의 자식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웃기고 자빠졌네. 너 같은 건 채굴장에서나 쓰는 타이어가 자동차만한 초대형 트럭으로 가져다줘도 사양이다. 눈살을 찌푸리는 유이를 무시하며, 현상은 아까 땅바닥에 엎어졌을 때 묻었던 먼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에잇, 이젠 몰라. 그럼 나더러 니 남자 친구 노릇을 하라는 거냐? 니가 돌아갈 때까지?”

“그런 셈이지.”

벅벅벅. 유이가 눈살을 찌푸리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3월의 학교 복도에 한 9개월 정도 이른 미니 사이즈 눈보라를 내리게 만들던 현상은 마지막으로 거칠게 머리를 뒤섞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기랄, 이젠 모르겠다. 남 친구 구하는 거면 동우나 찾아가란 말이야. 이게 모두 부장 탓이야! 그 양반 때문에 내가 이런 처지에 빠진 거 아니야! 에잇 몰라! 괴롭힘에 지치다 못해 니가 죽든 내가 죽든 한판 해보자 라는 심정으로 현상은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남자 친구노릇 해주면 될 거 아니야! 에잇, 대신 귀찮게 굴지 말고 너무 친하게 달라붙지 마! 딱 남자 ‘친구’ 노릇으로 끝낼 거니까! 밤에 만나도 이상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좋아, 약속할게. 그렇게 귀찮게까지 굴진 않겠다고.”

“스토킹도 그만둬!”

“아, 그래. 스토킹도.”

“시각 청각 공유화인지 나발인지도!”

“아, 알았어 알았어.”

귀찮다는듯 내뱉는 유이의 대답에 한숨을 후우 내쉬고 현상은 머리를 휘둘렀다. 아아, 어머니, 방금 제가 저 위험한 마법소녀랑 남자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한 겁니까? 아니죠? 어머니, 어머니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자식 놈을 어째서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말을 내뱉는 머저리 같은 놈으로 키우신 겁니까. 아니, 밑바탕이 이런 녀석을 이렇게 길러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죠. 생각해보면 지금 이런 미친 상황에 시달리는걸 보면 저를 제정신으로 길러주신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모든 건 이 상황 때문이겠죠. 그러면 이건 누구에게 따져야 하나. 어이, 거기 높은 데에서 모든 걸 내려다본다는 잘나신 양반, 대답 좀 해보시지?

속으로 종교계에 투신한 사람이라면 당장에 지옥으로 편도배송 시키고 싶은 마음이 가득 들 정도로 맘껏 신성모독적인 말을 쏟아 붓는 현상을 보며, 유이는 잘 숨겼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녀석이라 다행이야. 이야기를 하며, 몇 번 실수를 했다는 느낌을 가졌었는데, 아무래도 생각한 것처럼 날카롭거나 머리가 좋은 녀석은 역시 아닌 듯싶었다. 다행이야 다행. 이렇게 되면 안 들키고 ‘제 2의 목표’도 달성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유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불만이야? 응? 그렇게 스토커 노릇 해먹고 싶었어?”

“뭐, 뭔 소리야. 자, 여하튼 이야기도 끝났으면 부실로나 가자고. 근데 정확히 가서 뭘 어떻게 하는 부서야?”

재빨리 말을 돌리는 유이의 속셈을 알아차린 건지 모르는 건지, 현상은 유이와 함께 천천히 부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말을 돌리든 뭐든 내 알바냐 라는 생각이 강했다는 건 현상밖에 모르겠지.

“글쎄, 월말이 되면 마감에 맞추느라고 전부 글 쓰느라 바쁘지만, 지금은 가면 다 놀아.”

“논다고?”

“뭐하고 노는지는 니 자유. 책을 읽던 글을 쓰던 TV를 보던 게임을 하던 레슬링을 하던 뭘 하던 자유야. 부장은 그런 데에선 관대하니까.”

사실 관대하다기보다는 그거 말고 할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거 참 알 수 없는 부서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니까.

“즉,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부활동 같은 건 없이 걍 노는 거네?”

“니가 월말까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있을 생각이라면 월말 마감은 지켜야한다. 그리고 그게 사실은 맞지만 부장에게 말하지 마.”

“흐응.”

뭔가 대단한 반정부적 교육체계 혁명 활동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약간은 기대했는데 그냥 애들 놀이방 고등학교 버전이잖아. 입 밖으로 꺼냈다간 부장과 입식타격전이라도 벌일만한 생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유이는 현상을 따라 5층으로 올라가 부실 앞 바리게이트를 돌파했다. 어느새 복도의 창문으로 보이는 남동쪽 하늘은 진한 청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그럭저럭 밖에서 시간 좀 보낸 모양이었다. 들어가서 뭐라고 변명하지. 필사적으로 뭔가 대처할 말을 떠올리며, 현상은 부실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걸 보면 오늘의 노는 방법은 수다인 모양이다. 어쩌면 내가 도마 위에 올랐을지도 모르겠군. 저런 마법소녀랑 엮이기 싫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문을 마저 열고 부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 부실 구조를 말할 때 말 하지 않았는데, 부실 입구 왼쪽 구석에는 회의나 문학부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한 테이블과 소파가 있다. 보통은 태열의 침대로나 사용되지만, 일단은 테이블이고 소파이기 때문에, 가끔은 문학부 오프라인 대화방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소파의 자리는 충분. 안되면 자기 자리의 의자를 가져오면 되기 때문에 좌석은 최소 10명은 앉을 수 있는(물론 상당히 비좁고 괴롭겠지만) 정도의 공간은 나오게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과 유이는, 들어오자마자 문학부 관계자 전원과 두 명의 손님이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역으로 현상과 유이 쪽으로 시선이 쏠리기도 한건 당연지사. 잠시 양쪽 모두 침묵. 그리고,

“오빠 여친이다!”

“부내 커플 탄생이구나!”

벌떡 일어나며 외치는 두 손님의 외침이 부실을 가득 매웠다.

“웃기지마아아!! 자, 잠깐! 뭘 찍는 거야! 그 카메라는 어디서 꺼낸 거냐!”

 

 

“처음 뵙겠습니다. 문학 창작부 명예 부원인 김현지 라고 합니다. 오빠 김현상이 많은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고, 부족하지만 남친으로 잘 삼아주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문부의 촉망받는 기자이자 문학 창작부 명예 기자인 류가은 이라고 합니다. 현상이가 비록 인생막장이지만, 부디 불쌍하게 여겨주세요. 아, 여기 명함.”

“아, 아하하하…….”

고개를 숙이는 현지와 가은을 보고 깜짝 놀라 같이 고개를 숙이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유이를 보면서, 현상은 가슴속의 응어리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덧붙여서 머릿속의 뭔가가 부글부글 끓는 기분도 들었다. 젠장, 그릇 태워먹겠네. 아니, 지금 내가 뭘 끓인다는 거야. 계속되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드디어 대뇌가 전면적으로 파업이라도 시도하나.

“그런데, 오빠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머리도 나쁘고 소심하고 책임감 없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비록 오빠지만 정말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9등급 아래의 불가촉천민인데.”

“아, 아하하…….”

문학부 정식 멤버들은 저 멀리에서 한명을 빼고 피식피식. 어째서인지 세영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었다. 테이블은 네 명이 점령하고 마치 결혼을 위해 부모님을 만나는듯한 분위기를 가득 내고 있었다. 근데 내가 지금 이런 분위기를 참고 있어야하나. 오늘 집에 돌아가면 두고 보자. 동생에 대한 분노로 이를 빠득빠득 갈아대는 현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지와 가은의 관심은 유이에 집중되어있었다.

“언제 처음 만난 거예요? 오빠는 이야기 안하던데. 그러고 보니 전학 오셨다고 했으니까…….”

“에이, 현지야,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이야, 그래도 빠르네. 이제 전학한지 겨우 이틀째인데. 근데 진짜 저 녀석 어디가 좋아?”

“아, 아니, 특별히 사귀는 건…….”

얼씨구. 아까까지는 남친 흉내 내달라면서.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꾸 대뇌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현상은 고개를 내젖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글쎄 말했지만 사귀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냥 같은 반인데 갑자기 부실에 있어서 놀라서 그거 물어보려고 간 거뿐이라고.”

“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류가은 판사님?”

“피고는 현재 어설픈 변명으로 본 법원을 농락하려고 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김현지 판사님은 어떠신가요.”

“비록 제 친오빠지만 사형을 받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자, 그런고로 판결.”

“둘이서 죽이 맞아서 노는 건 좋지만 사람 말 좀 들어라 좀.”

원래부터 죽이 잘 맞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 맞을 줄은 몰랐는데. 그것보다도,

“도대체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거야! 아니라니까 그러네! 애당초 이틀 만에 사귀는 게 말이 되냐! 이게 어디의 삼류 드라마 각본인줄 알아!”

“그, 그런 거야?”

갑작스러운 대답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 외침에 놀라 전원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유이가 ‘갑자기 놀라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가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다.’ 라는 왕도 전개를 보이고 있었다. 꿀꺽. 현상은 정신적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부실의 전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면의 두 명(현지, 가은) : 헤에. 이거 참 몹쓸 남자일세. 부장 : 나는 자네를 그렇게 키운 적 없네. 실망일세. 김현상 작가. 이가람 선생님 : 선생으로서 너에게 실망했다.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하지 마. 부부장 : 그런 녀석일 줄 몰랐는데. 여자를 울리면 안 돼지. 현상아. 태열 : 배드엔딩을 그렇게 보고 싶냐. 평생 가도록 플러그 꼽긴 글렀구만. 성미 : 내 니놈이 그럴 줄 알았지. 에라이 천하의 몹쓸 놈아. 그리고 세영 : …….

“…….”

현상은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남자친구인 상황’ 이란 전제 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방금 자신의 행동은, 그런 맥락 아래에서 ‘창피해서 어떻게든 말을 돌린다는 게 여친에게 상처 입히는 말을 한’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 참 돌아버리겠네. 현상은 그대로 허탈함에 힘이 빠져서 소파 깊숙이도 파묻혔고, 놀라서 외친다는 행동을 성공리에 달성한 유이도 조용히 다시 고개를 돌리고 다소곳이 소파에 앉았다. 고개를 소파 뒤로 젖힌 채 부 천장을 보는 현상을 보고, 세영을 제외한 부원 전체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지간히도 재미있으신 모양이어들? 짝짝. 그때 박수 소리가 들리고 전원의 시선을 모으는데 성공한 부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 자. 부내 커플 탄생이니 뭐니 하는 건 그만 두도록 하지 않겠나. 아무래도 김현상 작가와 유이 작가 모두 충분히 당황한 것 같으니 나중에 이 이야기를 계속 하기로 하세나. 일단 그런 건 사실상 두 사람의 문제니까 말일세. 여하튼 오늘의 이야기는 이쯤으로 마치고 부활동이나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하세. 오늘은 우리 문학부의 앞으로의 행로를 결정지을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말일세.”

갸우뚱. 전원의 고개가 좌측 혹은 우측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부장은 아무 말 없이 벽으로 걸어가 구석의 화이트보드를 자신의 자리 뒤의 창문틀에 걸어놓고는 마커의 뚜껑을 벗겼다. 뽁 하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펜 뚜껑이 뽑히자, 부장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상당한 달필로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뽀득뽀득 뽀드득 뽀득 뽀득. 그리고 잠시 후, 부장은 마커를 닫고 자신의 글을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고는 자리를 비켜 모두가 화이트보드를 볼 수 있게 하였다.

“…….”

잠시 정적. 모두의 시선이 화이트보드에서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현상은 침을 삼켰다. 꿀꺽. 이중창으로 들린 건 분명 내 기분 탓은 아니겠지. 옆에서 신호가 느껴져 고개를 돌릴 순 없지만 말이야. 떨리는 팔을 들어 부장의 시선을 확보하고, 현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근데 저건 뭡니까?”

“뭐냐니. 김현상 작가. 설마하니 갑자기 난독증이라도 앓고 있는 건가. 가까운 정신과병원에 상담을 요청해보게. 정신과병원이라고 부담을 가지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어. 애당초 현대인은 누구나 정신질환 하나쯤은 앓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아니, 제 정신 상태는…….”

무지막지하게 정상인데요. 라고 하려다가 현상은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무래도 요새는 내 정신이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다소 방향은 다르지만 부장의 조언대로 정신과에 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니지. 잘못했다가는 진짜로 구속복이라도 입게 될지 모르니 자제하는 게 나을지도. 현상이 입을 다물고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 사이, 책상을 내려치곤 세영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저걸 보고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길 가야겠죠! 부장이야말로 미친 거 아니에요? 저게 뭐에요 저게!”

세영이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화이트보드에는 어떻게 마커로 궁서체를 썼는지 모를 ‘교내 마법소녀 수색 및 확보 작전’이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쯧쯧쯧. 그러니까 자네는 안 되는걸세. 은세영 작가.”

마치 머리 나쁜 학생을 가르치는 듯, 부장은 혀를 차며 다시 마커의 뚜껑을 땄다. 뽁.

“간단하게 사태를 설명하지. 며칠 전, 정확히는 이틀 전을 기점으로 학교에 기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네. 대강 내용은 학교에 마법소녀가 있다는 내용이었지. 마법소녀가 뭐냐고 한다면 성태열 작가가 더 자세히 알겠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런 건 여기 앉아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 아닙니까 부장. 그보다 그래서요?”

용어 해설자로 선정된 태열의 말에 그런 집단과 어울리기 싫은 세영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지만, 부장은 그런걸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계속했다.

“뭐 그건 그렇군. 여하튼 사태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겠네. 이틀 전 1교시 끝났을 때를 기점으로 이야기가 퍼져 나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나의 귀에 그 소식이 들려온 건 3교시 쉬는 시간이었네. 평소 같으면 도시괴담이라던가 그런 것으로 처리했겠지만, 묘하게 리얼한 자료에 나도 관심이 갔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문의 첫 시작점은 2학년 남학생으로, 그 정체는 애석하게도 듣지 못했네. 모두들 내가 물으면 웃기만 하더군. 뭐 그런고로 주변의 정보망을 통해 이야기를 계속해봤네. 마법소녀는 일단 소식에 의하면 그저께, 즉 3일전 첫 목격되었고, 학교에서 괴생명체와 접전을 벌인 것 같네. 그리고 소문의 시작지점인 그 남학생은 그 광경을 목격한 모양이더군. 때문에 나는 점심시간, 즉 어제의 ‘소리치는 구교사’ 사건이 벌어지기 약간 전 학교 운동장과 구교사 주변을 조사해보았네. 그러고 보니 그 목소리가 묘하게 귀에 익었는데 말일세. 기분 탓일까. 뭐 그 건은 나중에 조사하기로 하고. 운동장과 구교사를 조사해봤지만 애석하게도 싸움을 벌인 증거라고 생각할만한 존재는 전혀 없더군. 거대한 괴물체와 접전이 일어났으면 운동장에 파인 곳이 있거나, 아니면 파인 곳을 매꿰 무른 곳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더군. 구교사에도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네. 벽에 상처도 없었고, 유리가 깨진 교실도 없었어. 약간 실망이었지.”

두근두근두근두근. 부장의 조사 보고를 들으며 현상은 손에 땀이 점점 차오르는걸 느꼈다. 아니, 근데 그것보다 저 양반은 내가 말한 건 귓잔등으로도 안 들은 건가. 분명 내가 면상에 대고 저런 이야기를 했을 텐데 ‘2학년 남학생’ 이라니. 무시당한 것 같아서 약간은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만약 저 양반이 눈치를 채서 정체를 밝힌다면 나에게도 자유로운 나날이 올지도 몰라. 적어도 부장이랑 엮이면 이놈도 곤란하겠지. 눈길로 유이의 시선을 가리는데, 의외로 유이는 ‘헤에’라는 표정으로 부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표정. 이것이 연기의 프로인가. 왠지 대중이 저 녀석을 원할 것 같은 연기력이군. 그것보다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점점 증거가 없다는 걸 보면 애석하게도 녀석의 알리바이는 당분간 깨지지 않겠네. 슬프다. 그렇게 현상이 좌절하려는 순간.

“하지만 말이지, 조사를 하다 보니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더군.”

휘번뜩. 순간 옆자리에서 뭔가가 강렬히 빛났다는 생각에 현상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유이는 다시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건 다른 거지. 현상은 약간의 긴장감과 기대감에 섞여 물었다.

“흐, 흥미로운 점이라뇨? 뭔가 증거라도?”

“뭐 증거는 아닐세. 단지 내 기분 탓 일수도 있지. 하지만 일단 의문점이 있었네.”

“그게 뭔데요? 빨리 말이나 좀 해봐요.”

갑자기 천천히 말하는 부장에 짜증이 난 가은의 재촉에,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꽈악. 뭔가를 꽉 쥐어짜는듯한 소리에 현상은 고개를 돌렸다. 작게 유이가 양손으로 치마를 꽈악 쥐어짜는 게 시야에 약하게 들어왔다. 표정은 유지한 채 손으로 치마만 꽉 쥐어짜는 게 좀 웃기게 보였지만, 뭐 중요한 게 아니지. 현상은 한숨을 쉬었다. 내 평화로운 생활은 다가오지 않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부장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한꺼번에 좀 할 것이지.

“사실 좀 미묘한 건데, 구교사의 물건 몇 개가 떨어져있더군. 겹쳐놓은 책상이라던가 트로피라던가. 옆 부실의 간행물더미도 넘어져있었네. 하나 두 개만 떨어져있었다면 그런가보다 했겠지만 한두 건이 아니니 이상한거지. 지진 같은 것도 없었는데 말일세.”

“…….”

“거기다 더 재미있는 건 운동장 청소도구함의 대빗자루 한 개가 사라져있더군. 그래서 쓰레기 수거함에 가봤더니 반 동강난 하나가 버려져있었네. 그저께 운동장 청소 담당이었던 반에게 물어보니 아침에 오니 하나가 박살나서 운동장에 뒹굴고 있었다더군. 그쪽은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과연 어떨지.”

“…….”

꽉. 꽈악. 치마 찢어진다 임마. 일단 입 자체는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유이의 눈은 분명 ‘방심했다고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서는 현상을 힐끔 보면서 비난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보내곤 다시 시선을 부장으로 이동시켰다. 대충 시선의 의미는 '니놈이 그때 괜히 알짱거려서 내 평정심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그 뒤처리도 잊지 않았을 텐데'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순간적으로 머리 꼭대기를 향해 치솟는 억울함에 현상은 소리라도 지를까 했지만 꾹 하고, 아주 꾹 하고 겨우 자신을 억누른 끝에 유이처럼 바짓단을 찢어져라 구겨 쥐는 것으로 그 분노를 일단 해소할 수 있었다. 이 녀석 두고 보자. 그리고 그런 둘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부장은 화이트보드에 뭔가를 적어가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뽀득뽀득 하는 소리가 현상에겐 왠지 기분 좋다는 듯이 들렸다.

“뭐, 상당히 애매모호한 증거지만 대강 그런고로 나는 이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 사실이라는 중간과정에 도달했네. 마침 어떻게 이번 달 우리 문학부의 주제와도 잘 어울리는 사건 아닌가. 그런고로 이번 달의 제 2 임무는 교내 마법소녀 수색에 두겠네. 각 부원 및 명예부원들은 전력을 다해 수색작전에 참가하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중요한 제보를 가져온 부원 및 명예부원에게는 착한 어린이 스티커 20장 정도는 포상하겠네.”

드르륵. 그때 자신의 자리에서 부장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세영이 손을 들고 의자를 밀고 일어서며 말했다.

“잠깐만요, 그런걸 왜 우리가 조사하는 건데요? 그런 건 그냥 소문이잖아요. 지금이 무슨 마녀사냥이 벌어지던 때도 아니고 왜 그런 말도 안 되는걸 찾아다니는데 시간을 낭비해야 해요? 주제에 맞춰 글 쓰는 것만 해도 이미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발견하면 뭐하게요? 사인이라도 받고 코스프레 화보집이라도 내보게요?”

“오늘따라 더더욱 냉소적이군 은세영 작가. 칼슘이 부족한 거 아닌가. 우유나 멸치, 사골탕 같은 음식이 칼슘 섭취에 좋지. 현대인은 서구화된 식습관과 생활양식으로 무기질이 만성적으로 섭취 불량한 상태에 놓여있다네. 생활하는 내내 영향상태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계산하길 바라네. 어릴 때의 영양섭취는 성장과도 연관이 있지. 편식은 좋지 않네. 특히 칼슘은 뼈를 형성하고 그 강도를 유지하는데도 중요하니 더더욱 신경써야하네.”

쾅! 오늘따라 확실히 기분이 안 좋은지 세영은 책상을 강하게 내려치고는 말했다.

“제 영향상태는 제가 알아서 조절할 테니까 신경 끄시죠! 그건 그렇고 도대체 왜 우리가 그런 짓에 휘말려야하냐고요! 작년도 그렇고 입학식 때도 그렇고 며칠 전 방송실 점거도 그렇고! 늘 사건을 일으키기만 하잖아요! 좀 학생답게 학창시절을 보낸다는 생각은 못해요? 왜 그렇게 눈에 띄고 사회를 갈아엎으려고 안달이냐고요!”

세영의 외침에, 부장은 눈도 깜빡 안하고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자네는 오늘도 날 유쾌하게 만들어주는군. 은세영 작가.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싫증나지 않았나? 어제와 오늘이 바뀌는 건 식사 메뉴와 수업진도뿐인 이 따분한 생활이 지겨워지지 않았나? 난 그러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재미를 끌어내려는 것뿐일세. 매일매일 입시위주 교육의 희생양이 되어서 대입제도의 모르모트가 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와 같은 시대의 선구자들이 얼마나 그들에게 희망을 주겠나. 우리는 십자가를 들고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와도 같이 이 세상의 많은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과 재미를 주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타고 태어난 것일세. 그리고 그것보다 궁금하지 않나 자네는? 호기심이라는 기관이야말로 인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걸세. 누군가가 호기심에 무서워하면서도 불을 향해 손을 내민 덕택에 우리 인류는 원숭이와 달라진 걸세. 만약 우리가 마법소녀를 발견한다고 하면 어떻겠나? 이건 새로운 종과의 만남일세. 외계인과의 접촉만큼이나 쇼킹한 조우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 속의 마법사를 보고 신기해하는 건 그들이 현실에 없기 때문일세.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이 있다’ 라고 누군가 외치고 증거를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나. 인류 사회는 어쩌면 산업화 혁명 이래로 제 4의 물결을 맞이할지도 모르네.”

“그래서, 장광설은 됐고요, 만나서 뭐하게요 그 마법사인지 뭔지를?”

“체포. 구속. 취조. 조사. 그 이후는 상황 봐서. 당연한 거 아닌가.”

“…….”

떨고 있다. 현상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손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 새로운 종에게서 고개를 외면해버렸다. 아무래도 이 녀석도 눈치 챈 것 같다. 부장이라는 사람은 전혀 신기해하지 않은 채 저 4가지 사항을 실행할 사람이라는 것을. 해부실험이 안 들어있는 게 다행이지. 아니, 그 이후 상황 봐서 째보자고 벼를지도 몰라. 바꿔 말하자면 저 양반을 부추기거나 하면 나의 자유는 더 확실시 된다는 것이다. 현상은 고개를 외면한 채, 벽을 보면서 조용히 입 꼬리를 올렸다. 미안. 적어도 해부는 하지 말자고 해줄게. 그러니까 니가 이해해라.

“여하튼, 시간이 늦었으므로 일단 오늘은 이로서 폐부하겠네. 류가은 명예부원 겸 특별기사 조사 담당원은 지금 즉시 조사에 착수하도록. Class 3의 장비 사용을 허가하네. 신문부보다 이쪽이 더 중요하네! 특히 그 너구리같은 신문부에게 공을 양보하지 말도록! 수단방법 및 사회질서의 무시 또한 허가하네. 상대는 제 3종이다. 이쪽의 상식이 통할지 몰라.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Aye, Sir!”

우와아. 가은의 힘찬 대답을 들으며, 현상은 방금 부장의 명령 내용을 생각했다. 무슨 특수부대도 아니고. Class 3는 도대체 뭔지. 그보다 가은이 너는 신문부잖아.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여도 되냐. 그리고,

중요한건 수단방법과 사회질서의 무시.

이래봬도 부장은 수단방법은 몰라도 사회질서 하나는 확실하게 지키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냐고 말한다면 평생 살면서 무단횡단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쓰레기를 쓰레기통 외에 버린 적이 없는 사람이다. ‘질서는 지키라고 만들어진 것. 맘에 안 들면 고쳐야지 어기는 것은 안 된다’ 라는 어울리지 않게 제대로 된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로는 사회질서의 수호자가 저런 말을 내뱉다니. 지금의 부장은 텐션 500%다. 그리고…….

유이는 이제 테이블 아래, 다른 사람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바들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뭐랄까, 힘내라. 그 말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결국 오늘의 부활동은 그것으로 끝.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의견과 미친 거 아니냐는 의견으로 나뉘었지만, 부부장, 성미, 가은에 현지까지 낀 재미있을 것 같다 파가 너무나도 강력하여, 이쪽의 소수파는 말 그대로 소리 소문 없이 묻혀버렸다. 결국 개념파인 세영, 이가람 선생님, 그리고 현상은 깊은 한숨을 쉬는 것밖에 대응법이 없었다. 유이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이 없다는 연기를 끝내주게 보여주고 있었지만, 글쎄. 연기인지 진짜 정신이 없는 건지 현상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가장 마지막에 부를 나서는 게 부장의 임무라며 자신의 자리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진 보라색 하늘을 조용히 바라보는 부장을 제외하고, 전원은 차례대로 부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상은 아까부터 생각했고, 방금 전의 사건으로 결심을 굳힌 것이 있었다.

“잠깐만.”

“뭐야. 현지랑 같이 안가?”

어깨를 잡는 현상의 손에, 세영은 귀찮다는 투로 내뱉듯 말했다. 1년 이상 알고 지내면서 이렇게 기분 나쁜 적은 몇 번 본적 없는데. 현상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미안하지만 지금은 세영의 기분까지 생각하면서 행동할 정신머리가 없었다. 어깨의 손을 쳐내며 고개를 돌린 세영을 바라보며, 현상은 막 부실 문을 나가는 유이를 힐끔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아니, 그 녀석은 내가 같이 가면 화내니까. 그것보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데. 유이에 대해서.”

“니 애인에 대해서? 그러고 보니까 유이랑은 안가냐. 여친인데.”

“아니라니까 그러네.”

“내 알게 뭐야. 잘 어울리는 것 같던데. 근데 너도 참 손 빠르다? 이틀 만에 저렇게 예쁜 전학생도 낚고. 그 외모로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건지 참 존경스러워.”

오늘따라 정말 저기압인 모양이네. 아까 화를 낼 때 알아보긴 했지만, 오늘 세영의 기분이 장난 아니게 나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지. 세영이에겐 미안하지만. 현상은 세영과 같이 부실을 나서며 말했다.

“혹시 내가 어제 유이 전학 오자마자 말했던 거 기억해?”

“뭐 말이야.”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진짜로 모르는 건지. 현상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그거 말이야. 유이가 마법소녀라는 이야기.

“뭐야. 입만 뻥끗거리고. 말로 해.”

아니, 그러니까 유이가 마법소녀라고 했던 거. 헛소리라 기억 못한다는 거냐?

“슬슬 기분 나쁘다? 사람을 잡았으면 말을 해 말을. 왜 자꾸 입만 뻥끗거려.”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세영을 보며, 현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뭔 소리야. 난 분명 제대로 말했다고. 근데 뭔 입만 뻥끗 거린다는 거…….

‘간단한 계약이야. 1조. 나의 정체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 2조. 이후 임무가 완료될 때까지 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아, 참고로 이제는 1조 2조 3조 다 못 어기니까 기억해두고…….’

…….

“아아아아앗!!”

갑자기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빽 하고 고함을 지르자, 저어어어기 앞에서 유이와 같이 하교하며 주제를 다시 되돌려 현상과의 관계에 대해 이것저것 정보활동을 전개하는 부부장과 성미, 그리고 얼굴이 빨개진 유이(연기겠지. 설마) 등등이 대표를 맡고 있는 문학부 여성그룹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곧 관심을 잃고 다시 유이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그리고 그 정도로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던 세영은 갑작스러운 고함에 귀를 막으며 펄떡 뛰며 말했다.

“깜짝이야! 뭐야 대체! 왜 자꾸 그러는 거야? 여친 생겼다 이거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단지, 단지!”

“단지 뭐! 참나! 갑자기 전학 이틀 된 미소녀나 낚더니 이제는 나까지 낚아서 양다리라도 걸치시게? 뭐야 아까부터! 할 말이 있다더니 입이나 뻥끗거리고! 그러고 보니 어제는 유이가 마법소녀라고 깽판을 치더니…….”

“그래, 그거!”

손가락을 꼽으며 바락바락 신경질을 내던 세영은, 다급히 외치는 현상의 말과 지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인식하고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현상을 힐끔 쳐다보았다. 잠시 정적. 복도는 앞의 문학부 여성 그룹의 수다소리와 발걸음소리만이 멀리서 울리고 있었다. 룰루룰룰. 말로 형용하기 힘든 소리를 휘파람이랍시고 입에서 내며 손으론 열쇠를 쩔렁거리며 부장이 어느새 현상과 세영 옆에 와 서있었다.

“분위기 좋구만. 김현상 작가, 다 좋은데 양다리는 그다지 좋지 못한 행동일세. 특별히 내가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양쪽의 허락 없이 진심을 숨기고 양다리를 걸치는 건 두 여성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며 어느 쪽을 선택하든 한쪽은 결과적으로 슬퍼지는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오네. 최악의 경우엔 나이스한 보트에 탈 가능성도 있지. 가능하면 그런 일이 오기 전에 잘 선택해서 가능하면 이른 시간에 한쪽으로 마음을 굳혀 어느 쪽의 여성도 슬프게 하지 말게 하게나. 덧붙이자면 여성을 울리면 부장 이전에 인생 선배로서 살려두지 않겠네. 특히 우리 부원이라면 더더욱.”

“아 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부장, 내가 이런 거한테 낚일 것 같아요? 농담 하지 마요.”

현상의 외침과 세영의 투덜거림을, 부장은 ‘내 알바 아니지’라는 간단한 표정으로 무시해버렸다.

“뭐, 다른 건 다 좋은데 적당한 시간에 집에 들어가게나. 휴식을 취해야 글도 나오는 법이지. 하긴 젊을 때니 같이 돌아다니며 노는 것도 좋겠지. 뭐 자네들 시간관념에 맡기겠네.”

그 말을 마치고, 다시 휘파람으로 ‘홍성호 조곡(組曲)’ - 제 1악장 ‘영웅 등장! 그 이름도 위대하도다 홍성호’ 와 열쇠의 짤랑거림을 BGM으로 깔며 부장은 복도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약간의 석양의 빛만으로 물체의 윤곽만 구분 가능한 정도의 복도에, 현상과 세영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열쇠의 짤랑거림과, 유쾌한 리듬의 부장의 휘파람이 완벽하게 사라지자, 세영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정신과라도 같이 갈까?”

“아니라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현상의 외침에, 세영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서며 말했다.

“그럼 뭐야. 난 뭔소리인가 했더니 어제 그 헛소리가 진짜다 뭐 그런 이야기 하고 싶은 거야? 설마하니 아직도 그걸 진짜라고 믿고 있었던 거냐. 부장도 그렇고 도대체 왜 그렇게 유이가 마법소녀라는것에 목숨을 거는 진 모르겠지만 너도 참 대단하다. 그냥 정신착란으로 벌어진 헛소리잖아. 착한 어린이 스티커 20장이 그렇게도 탐나?”

가슴이 답답해 뭔가 말하고 싶기는 했지만, 현상은 아무 말도 말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슬펐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리 말하려고 해도 그 형태가 제대로 소리로 갖춰지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슬펐다. 제기랄, 그 망할 녀석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무조건 사인하라고 하더니, 다 그런 이유가 있었구만. 당장 눈앞에 재수 없게 웃는(한 번도 그런 표정은 본적은 없지만) 유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크아아악. 마법소녀를 마법소녀라 부르지 못하고 사실을 사실이라 부를 수 없으니 이 어찌 아니 슬플쏘냐. 현상이 이런 울적한 마음으로 가득 차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영은 ‘별 미친놈 다보겠네’라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뭐야? 유이가 마법소녀니까 어떻게든 해 달라 이거야? 부장에게 넘겨줘? 방과 후에 뒤뜰로라도 불러 달라 이거야? 인간세계의 무서움이라도 보여줘?”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세영의 빈정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상은 고개를 홱홱 저었다. 첫 번째는 부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부장인 이상 먹히지 않을 것이고(설령 유이가 부원이 아니었다고 쳐도 부장은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증거를 내밀어도. 그냥 난리를 치는걸 좋아하니 실제로 난리가 수습되는 건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참 피곤한 성격이다), 세영의 전투력이 얼마나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상식으로 고래만한 꽃게랑 맞장을 떠서 이길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현상이 사색에 잠긴 사이 세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도대체 뭐야. 애시당초 유이가 마법소녀든 뭐든 내 알건 뭐고 니 알건 뭔데? 억지로 끌려 다니기라도 하는 거야?”

이 녀석도 예지능력이라도 있나. 아니면 모든 걸 꿰뚫어보는 관심법이라도 익힌 거냐. 현상의 당황한 열렬한 끄덕임에, 세영도 깜짝 놀라버렸다.

“뭐야, 진짜야?”

그렇다니까. 마법소녀인건 둘째 치고 날 잡고 뒤흔드니 그게 문제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아니 입으로는 말을 한 현상은 세영이 입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기랄, 잠시 생각을 하던 현상은 가방을 열고 노트에 뭔가를 쓰려고 했지만, 쓰려고 힘을 주는 순간 펜은 저항 0의 표면에라도 올라선 것처럼 퉁퉁 튕겨나갔다. 글도 제대로 못 쓰냐는 세영의 비아냥(펜이 튕겨나가는걸 보고 약간 의아해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이 귓가로 들려온다. 우이씨. 니가 이 상황 돼봐. 이게 얼마나 머리 아픈 일인지 아냐. 그것보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녀석에게 납득시킨다. 잠깐의 고뇌 후 현상은 입을 열었다. 그 방법밖에 없구만. 현상이 마음을 먹고 크게 심호흡을 하려는 순간, 세영이 손가락을 튕겨 현상의 주의를 돌리곤 말했다.

“일단 구교사 좀 나가자. 이런 분위기에서 뭐 말하고 싶긴 하냐?”

그렇군. 일단 이 어둡고 무서운 구교사에서 좀 빠져나가자. 왜 이런 데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지. '그런 사건'에 휘말리게 된 장소인데 말이야. 아아, 제길. 나에게도 제발 평화로운 일일이 펼쳐졌으면.

 

“잘 들어, 미안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입이랑 손이 안 움직이니까.”

편의점 시식 코너. 컵라면 대신 두 캔의 캔 커피를 둔 채,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점원의 시선을 무시하고(하필이면 어제의 그 점원이라 시선이 곱지 못했다. 분명 ‘저런 얼굴도 그냥저냥인놈이 양다리를 걸쳐?’ 라고 생각하겠지) 현상은 소리 죽여 말했다. 커피 캔을 손에 쥔 채, 세영은 물었다.

“그것도 유이 때문이야? 아까 입만 뻥끗 거리는 거랑 펜이 홱홱 날아가는 것도?”

끄덕. 이것도 대답 못하게 되어있는걸 보면 꽤나 융통성이 있는 마법 같았다. 존재 자체가 융통성 따위와는 마지노선을 쌓고 있는 주제에 이런 데에서는 이런 융통성이라니.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현상은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가능하면 내 입으로 말하고자 하는데, 막히는 부분은 고개끄덕이는 걸로 할 테니까, 미안하지만 잘 알아들어줘. 그리고 말이 안 나와도 난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내가 입만 뻥끗 거리면 입을 가리켜줘.”

끄덕끄덕. 아까의 장난이냐는 짜증나는 표정을 벗어버린 세영은 어느새 눈에 호기심과 재미, 그리고 기대감(도대체 뭐에 기대감을 불태우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소녀가 주위에 있다는 게 신기한 건가)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현상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제 밤에…….

“…….”

첫 단어를 내뱉기도 전에 NG. 세영이 양손으로 가위표를 만드는걸 보고 현상은 말없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하는 게 이렇게 괴로운 일인지 이제야 알았네. 그 망할 녀석. 속으로 유이에 대한 욕을 가득 내뱉는 현상을 보며, 세영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니가 말했던걸 종합해보면 일단 어제 말했던 것처럼 그저께 니가 부실을 나오는데 왠 마법소녀가 거대한 꽃게랑 싸우는 걸 봤다. 근데 그게 유이였다. 여기까지는 기억해. 그 다음에 뭐가 어떻게 되었기에 니가 꽉 잡혀서 그런 저주까지 받은 건데?”

말을 잘 알아듣는 사람이 대화 상대라는 건 참 기쁜 거구나. 저주 같은 부분에서 부분부분 조금씩 빗나가지만 이정도만 해도 어디냐. 내가 이런 상황이면 저런 이해는 불가능할걸.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필살의 방법을 쓰기로 결의했다. 아까 마음은 먹었지만 막상 하자니 무지하게 쪽팔리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눈 딱 감자. 현상은 참으로 비참한 감정을 느끼며, ‘그 방법’을 결행했다. 아까부터 자신에게 적의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던 편의점 종업원이 풉 하고 웃는 게 반사경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아 비참해라. 스스로 자신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한심스럽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아. 인생이란 힘든 것이야.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그 방법’을 계속했다.

 

세계 어디서든 통하는 언어. 외계인이 아니며 지구 문명권 내에 속했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 역사 이전, 구석기 시대보다 전부터 인류가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발전시켜온 언어. 다른 음성 언어처럼 완벽한 의미를 내포하고 공인화된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특유의 추상성으로 역으로 인간의 고정관념과 상식을 이용하여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에 나서는 언어. 그 이름도 거창하고 유명하도다 바디 랭귀지.

“에, 그러니까, 점심시간에, 오늘이 아니라 어제 말하는 거지? 응. 그러니까……. 유이가 갑자기, 옥상? 어디 옥상? 에, 구교사 옥상? 응. 거기로 불러내서……. 협박? 협박했다고? 응? 아니야? 아니, 맞다고? 어느 쪽이야! 에, 그러니까, 종이……. 사인……. 계약? 아, 계약을 하라고 협박했다고? 아아. 알았어. 그래서? 나는……. 에, 그러니까 너는, 어쩔 수 없이, 사인을 했고, 그래서, 유이한테 끌려 다니게 됐고, 그럼 말 못하는 건? 에, 종이? 계약서? 응. 계약서에……. 말 하는걸 못하게 하는 게 있었다고? 그리고? 자기……. 유이 말하는 거지? 응. 자기랑, 팔짱? 연인사이? 오케이. 연인사이가 되어달라고 협박했다?”

신이시어. 고맙습니다. 사실 난 당신을 존경했어요. 그리고 세영아, 니 이해력에 경의를 표한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말을 알아듣는 세영에, 현상은 잠시 쪽팔림도 잊고 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저 내용을 이해시키려 내가 얼마나 판토마임을 해야 했던가. 반사경으로 보니 점원이 웃겨서 배를 잡고 허억대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충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려는 것 같긴 한데, 영 갈피를 못 잡는 것 같네. 역시 세영이가 대단한 거군. 하긴 머리카락 양쪽을 쥐는걸 트윈테일 → 유이 라고 번역하는 건 어느 정도 센스가 있어야겠지. 현상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영은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아낸 탐정 같은 표정을 하고 현상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거야? 니 정체를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라고 라도 해줘? 나도 알고 있다고 하면 포기하지 않을까? 아니면 부장에게 꼰질러? 아니지. 그럼 사건이 더 시끄러워지겠구나. 음. 그냥 내가 가서 말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일단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도 좀 그러니까…….”

“넌 정말 왜 그리 애가 물러 터졌어. 물에서 한 30분 삶은 물만두도 너보다는 덜 불어 터졌을 거야. 그러니까 매일 부장한테 당하고 살지. 미안하다거나 그런 거 생각하면 관둬. 저쪽은 널 봉으로 삼고 있는 거라고. 세상은 전장이야. 먹거나 먹히거나 라고.”

어느새 신이 나서 눈에 열기를 담아서 말하는 세영을 보며, 현상은 잠시 주춤했다. 확실히 듣고 보니 그러네. 세영이까지 끌고 가서 말하면 녀석도 포기하지 않을까. 하지만 금방 현상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만 세영이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좋은 녀석이다. 지금 이 열기라면 몰라도, 앞에 가면 유이가 하는 말에 현혹될지도 몰라. 그런 위험은 둘째 치더라도, 사태를 파악당한 유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게 더 문제였다. 녀석 성격이라면 묶어서 지하 창고에다 가둔 다음 “사태가 전부 끝나면 풀어줄게.”같은 막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것 같단 말이야. 증인이 두 명이면 약간 불안하지.

“그것보다 조금 다른 생각이 있어.”

“어떤?”

정말 눈이 불타는 것 같은 열기로 가득한 세영을 보며, 현상은 아까부터 짜둔 계획을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증인 증식 계획이야.”

“증인 증식 계획?”

간단하게 말해서, 녀석이…….

“또 안 들려.”

거 참 귀찮네.

“아, 간단하게 말해서, 증거를 잡아서 퍼트리자 이거지.”

내 말에 세영이의 눈이 이제는 마그마 수준으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려나. 그런 현상의 생각과는 다르게, 정말로 마그마 수준으로 불타오르는 눈동자의 세영은 신이 나서 말했다.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하고, 현장을 잡고?”

“그런 거지. 그래서 니 도움이 좀 필요해. 난 녀석이 계속 붙어있으니까 증거를 계속 보고 있지만 잡을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니가 멀리서 촬영을 하던지, 아니면 가은이한테 부탁해서 어떻게든 해줘.”

“확실히 가은이라면 초소형 도청기라던 가도 가지고 있겠네. 생각보다 머리 좋은데?”

류가은. 부장의 앙숙인 신문부에 있으면서도 부장의 총애를 받는 특이한 여성. 그 특유의 성격도 한몫 한다고 보지만, 일단 가은이가 부장과 친한 건 가은이도 부장처럼 장난을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이라곤 생각도 못할 각종 장비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 보기엔 꼭 평범한 여학생 A로 보이는 주제에 늘 가지고 다니는 가방에는 최고급 소형 노트북이 들어있고, 초소형 도청기가 들어있고, 또 위치추적기가 붙어있으며, GPS가 붙어있고, 해킹 장치가 들어있으며, 위성을 통해 인터넷에 연결 가능한 특수 장비가 들어있다. 거기에 뽀대용이 아니라 그런 장비의 능력을 300%는 발휘한다는 게 더 무서운 점이다. 그걸 이용해서 녀석의 정체를 까발린다 ― 라는게 현상의 작전이었다.

“뭐, 그런 식으로 하면 녀석의 약점을 잡는 것도 쉽겠지. 그리고 그걸 무기로 난 이런 괴로운 생활에서 벗어나는 거고.”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하게?”

세영의 대답에, 현상은 아까 생각한 상세한 계획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하면서 어디서 말이 안 나오고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냈으니, 지금부터는 편하게 말할 수 있겠지. 잠시 심호흡을 하고, 현상은 입을 열었다.

“일단 내일 등굣길에 녀석에게 도청기랑 위치추적기를 붙이는 거야. 덧붙이자면 만일을 생각해 나한테도. 그렇게 하면 일차적으론 대화로 증거를 잡고, 이차적으론 녀석의 집을 알 수 있겠지. 설마하니 밖에서는 이렇더라도 집 안에는 뭔가 하나쯤 있지 않겠어?”

“집에 들어가는 건 그런 거 없어도 간단할 텐데.”

“응?”

예상도 못한 세영의 반응에, 현상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뭘 놀라는 거냐는 투로, 세영은 현상을 힐끔 보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뭐, 자세한건 말하면 일찍 말하면 재미없잖아. 내일까지 기다려봐.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을걸.”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벌이야 벌.”

“무슨 벌?”

“그냥, 벌.”

쿡쿡쿡. 기분 좋은 듯이 웃는 세영을 보며, 현상은 여러모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기분을 느꼈다. 뭐야 대체. 보통 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줬는데. 뭐 내일이면 알게 될 테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캔 커피를 마저 비운 세영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 시간이 이렇게 됐네. 거의 8시네. 슬슬 집에 가봐야지.”

세영의 말에, 현상도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확실히 꽤나 늦은 시간. 이야 이거 또 까이겠네. 그 사이 내려놨던 가방을 다시 챙겨 맨 세영의 말에, 현상은 고개를 들어 세영을 바라보았다. 평상시 이상으로 자신감과 활기에 찬 눈으로, 세영은 현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일단 알겠어. 앞으로 도와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나만 믿어.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그러면, 내일 기대해.”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딸랑. 작은 종소리를 뒤로 하고 3월의 길거리로 돌아오자, 차가운 겨울의 마지막 자락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멀리 먼저 가는 세영에게 손을 흔들고, 현상은 옷깃을 여미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후우. 그래도 세영이가 도와준다면 다행이지. 아까까지만 해도 더럽게 화가 나있더니 갑자기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겠지. 현상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주 약간, 유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상은 생각했다. 계약 어기려고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아무래도 생각 못한 사이에 입으로 그것을 말한 모양이었다. 계약조건에는 머릿속까지 읽는 내용은 없었으니까.

“미안하다는 걸 알면 하면 안 되잖아.”

Writer

호성軍

호성軍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친구 우리들의 친구 게으른 호성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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