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2. 전개ㅡ네 번째 날. “울고불고 짜도 소용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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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43 May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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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호성軍

“오늘 너희 집에 놀러가도 돼?”

“…….”

토요일 방과 후의 학교 교실 구석. 아이들이 작고 작은 소그룹들로 분산되어 하교를 하는 사이에서, 한명의 물음에 세 명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물어본 한명은 세영. 나머지 셋은 당황하는 남정네 둘과 유이.

“우, 우리 집에, 놀, 놀러온다고?”

“응. 이사 와서 주말인데 아직 어디 놀러갈 곳이나 할 것도 없을 것 아니야? 혼자서 집에 있는 것도 슬플 테고. 그래서 나도 한가해서 같이 놀까 하고. 혼자서 산다고 들었는데 집에서 어떻게 지내나 하는 것도 궁금하고 말이야.”

싱긋. 당황한 목소리의, 그리고 긴장한 표정의 유이와는 다르게 세영은 싱글싱글 사람 좋게 웃으며 어디까지나 ‘전학 온 동급생의 소외를 걱정하는 모범생’의 태도를 유지했다. 자기 평가 200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완벽한 자세에, 세영은 자신감을 담아 유이를 싱긋 웃으며 바라봤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멋진 미소였던 덕분에, 유이는 움찔하며 더더욱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오, 오늘은 종일제 부활동도 있고……. 안 나가면 부장하고 선생님에게 혼날 테고…….”

“괜찮아. 수업은 다 들었으니까 부활동은 참가 안 해도 돼. 우리학교는 자율이거든. 거기에 부장 같은 타입은 좀 밟히고 무시당해야 하는 타입이라고. 선생님은 전혀 신경 안 써도 돼. 누가 오나 안 오나도 모를걸.”

“그, 그래도…….”

“현상아, 너도 와라. 아, 하는 김에 동우 너도 오고. 원래 이런 홈 파티에는 많은 사람이 와야 재미있는 거야.”

“어? 나도? 아, 아무리 그래도…….”

“가도 돼? 가도 되는 거지? 현상이 넌 뭘 그리 빼고 있냐. 괜찮지? 유이야?”

“아, 저기, 방도 아직 정리 안 되었고, 좁기도 하고…….”

“그럼 더 잘되었네. 가서 방 정리 도와줄게. 이사 온 거잖아? 빨리 정리해야 너도 편하지. 자, 그런고로 결정. 현상이 넌 부실에 가서 이야기 하고 와. 일단 연락은 해둬야 하니까. 자, 유이야 가자. 동우 너도 따라와.”

“진짜? 나도 가? 아싸!”

“아, 자, 잠깐…….”

어떻게든 말리려는 현상을 격렬하게 등으로 제제하며, 세영은 저항하는 유이의 손목을 잡고는 교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아무리 봐도 납치로밖에 보이지 않는 광경, 아니 사실 납치 그대로였지만, 세영의 표정을 본 순간 모두 두 걸음 반 정도 물러났기 때문에 제제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저기에 뛰어 들었다간 살해당할 거야. 그리고 그대로 세영과 유이,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아가는 동우의 삼인 세트는 현상의 시야 밖으로 실종되었다. 총소요시간 3초. 저 멀리에서 누군가의 표정에 놀라 꺄악거리며 도망치는 학생들의 비명소리와 유이의 당기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가 현상의 귀에 들려왔다.

“…….”

근데 이게 다 무슨 일이다냐.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현상은 천천히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이건 납치 일려나. 납치라면 납치겠지 이건. 자기 집으로 같이 가는 것도 납치라면야. 그런데 말이지,

“어제 말했던 계획이라는 게 이거였냐…….”

머리가 아파와 현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뭐 대단한 계획일줄 알고 기대했는데 집에 쳐들어가는 거라니. 어떤 의미로는 세영이답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건 집에 쳐들어갈 변명거리가 생겼고, 집에 가면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기막히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을지도…….”

성공률은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있다. 냉정한 판단을 내리며, 현상은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걸어갔다. 분명 집엔 뭔가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도 있으면 하는 소망이긴 하지만, 적어도 퇴치를 하러 온 녀석이 장비라고는 소환용 마법봉과 전투복인지 뭔지 하는 코스프레 물품 둘밖에 없진 않겠지. 거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하고, 거기에 같이 집에 가기까지 한다면 증거 인멸도 불가능할거다. 좋았어. 생각해보니 좋은 방법이잖아 이거. 거기에 꼼꼼하게 짐 정리까지 도와준다고 했으니 합법적으로 뒤질 수도 있지.

“거기에 가은이에게 부탁해서 도청기까지 심어놓으면…….”

집 안이라면 안심하고 한두 마디 정도는 하겠지. 그리고 그 즉시 증거는 이쪽에. 예방차원 치고는 괜찮은 대비이다. 좋아, 아주 좋아. 생각해보니 끝내주잖아 이거. 속담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고 했지. 증거를 잡으려 기다리는 게 아니라 증거를 찾으러 들어간다는 발상. 역시 세영이구나. 너밖에 없어. 믿을만한 같은 부서 동료인 세영에게 끝없는 고마움을 느끼며, 현상은 마음도 편하고 발도 편하게 휘파람을 불면서 부실로 깡총깡총 뛰어갔다. 물론 주위 판정은 영락없는 나사 빼놓은 미친놈이었지만.

 

 

“안녕하세요―.”

끼이익. 기름칠 안 된 부서의 문을 열고, 현상은 일단 빼꼼 하고 고개만 디밀었다. 안에 사람 없음. 좋았어. 부장이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에, 현상은 가볍게 오른손을 꽉 쥐었다. 부장이 있었으면 오늘 부활동을 빠진다 어쩐다 했으면 경을 치였겠지. 늘 누구보다 먼저 부실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하늘이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려고 하는구나. 빨리 쪽지나 쓰고 가야겠다.

“음? 김현상 작가. 왜 머리만 부실 안으로 넣고 있는 건가. 나에게 뭔가 죄 지은 거라도 있는 건가?”

뀛왍!

인간의 입에서 내는 소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겠는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현상은 문을 몸으로 열어젖히며 공중에서 180‘ 회전하는 멋진 묘기를 선보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간이 떨어졌다고. 등골이 오싹하다 못해 절대영도에 도달했고 말이지. 순간적으로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려 질식사 직전에 겨우 숨을 토해낸 현상은, 그제야 눈앞의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까, 까, 까, 까, 까, 깜짝 놀랐잖아요, 부부장.”

“오ㅡ호호호호호호! 꽤나 비슷했나보네? 이야, 진짜 웃긴다. 다시 해봐. 호호호호호호호!”

트레이드마크인 ‘70년대식 악역 웃기’를 선보이며, 학교의 아이돌이자 홍일점을 가장한 문학부 부부장(자칭) 이예화는 싱글싱글 웃으며 현상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부부장 호칭이 자칭인 이유는 부부장이란 자리 자체가 세평고교 교칙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 뭐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완벽하게 마이 페이스로 자신을 무시한 채 자리에 앉아 BL(Boys Love) 소설책을 펴보는 예화를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다, 현상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부장은요?”

“…….”

“……선생님은요?”

“……차.”

“네?”

“차 좀 타와.”

“차를 타오라고요?”

“어디 있는 진 알지? 쟈스민 티로. 물 온도는 70도. 아, 타오는 김에 옆에 보면 다과 있어. 그것도 가져와.”

“…….”

선생님이 차를 가지고 있었나. 자전거 등교였는데. 그럼 차를 사러 간다는 소리인가. 로또라도 맞으셨나. 그런 생각을 진행시키는 현상은 예화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뭐? 차를 타오라고? 작년에도 자주 당했지만 참 당황스러운 사람이야. 현상은 멍하게 생각했다. 작년에도 사람을 턱으로 부리는데 일가견이 있어서 이런저런 잡일을 담당했던 기억이 났다. 올해는 정신 차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마음 굳게 먹고 자리를 지켰다. 질까보냐.

“직접 타 마셔요. 그것보다 부장이랑 선생님은요?”

“…….”

“안 타올 거라니까요.”

“…….”

“저기요, 부부장? 예화 누나?”

“…….”

“…….”

이하 생략.

“…….”

“……. 지금 타 올게요.”

특별히 진게 아니야. 단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부장과 대면할 확률이 높아질 뿐. 스스로 어떻게든 패배의 상처를 감싸 쥐며, 현상은 전기포트의 뜨거운 물을 찻잔에 따르고 문학부 구석의 조리대 찬장을 열어 쟈스민 티백과 다과를 꺼냈다. 여담인데 문학부 조리대에는 싱크대, 그리고 옆엔 전기 가열기구도 있어서 가벼운 요리도 오케이.

“여기요. 쟈스민 티랑 다과요.”

“음? 어라,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뭐하고 있었어?”

“……. 아뇨,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신경도 안 썼다는 거군. 한숨을 쉬며 현상이 내민 찻잔과 받침을 들고 한 모금을 입에 댄 후, 예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건 인스턴트잖아.”

“그럼 제가 어딘가 있을 쟈스민 차밭 찾아가서 찻잎 따서 가져와서 우려내어 드립니까. 그 정도로 만족해요.”

“다시 타와.”

“아, 네. ……. 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했던 현상은 예화의 말뜻을 알아듣고 재차 물었지만, 예화는 컵을 저쪽으로 밀어놓은 채 다시 만화책으로 눈을 돌렸다.

“……저기요? 부부장? 예화 누님?”

“…….”

“…….”

 

“근데 아까 뭐라고?”

이제야 겨우 상대를 해주는구만. 입으로는 고풍스러운 동작으로 어디 귀족집 아가씨인 듯 우아하게 찻잔을 입으로 가져다대며, 눈으로는 반쯤 벌거벗은 중성적인 외모의 남자 두 명의 인물이 서로 얼싸안는 삽화가 들어간 소설책을 보는 언밸런스함의 여성. 그 존재와 그 존재에 휘둘리는 자신에 한심함을 느끼며 현상은 한숨을 내쉬고는 아까부터 물으려던,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한 질문을 다시 했다.

“부장이랑 선생님은 어디 갔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안 온 거예요?”

“성호는 간식거리 산다고 역 앞에 평산 상회까지 갔어. 아저씨가 팍팍 깎아준다고 거기밖에 안다니잖아. 앞으로도 10분쯤 걸릴걸. 선생님은 성호 설교하려다가 무시하는 거에 열 받아서 ‘어차피 나 같은 건 필요도 없잖아!’라고 울면서 외치고 어제 나온 신작 게임 사러 나갔어. 어린애도 아니고 나 참…….”

혀를 차며 싸구려 다과를 뜯어 참으로 우아하고 아름답게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좀 더 과격한 씬으로 페이지를 넘기는걸 보고, 현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나보고 어디 무의식의 마리아나 해구 바닥에도 없는 다도인 으로서의 본성을 꺼내려 하냐고. 그냥 이렇게 대답해주면 되잖아.

“아, 그리고 태열이는 오늘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 아까 오는 길에 만났거든. 나머지는 잘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세영이랑 유이는 어디 갔냐? 같은 반 아니야? 같이 안 왔어?”

“아, 사실 그것 때문에 온 건데 말이죠.”

간단한 사설 뺀 상황 설명. 찻잔을 티스푼으로 한가롭게 저으며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예화는 현상의 말이 끝나자 찻잔을 기울인 뒤 간단하게 정리했다.

“한마디로 집들이네 그건?”

“아니, 집들이라고 할 만한 대단한건…….”

고개를 가로젓는 현상을 보며 쿡쿡 웃고선, 예화는 남은 차를 깔끔하게 원샷으로, 하지만 우아한 몸동작으로 비운 다음 깍지를 끼고 현상을 올려다봤다.

“참가자는? 너랑 세영이랑 유이? 그럼 나도 가고 싶은데 말이지.”

“아뇨, 동우도 가요. 기억하시죠?”

현상의 말에 예화는 잠시 학교의 아이돌인 예쁜 얼굴을 약간 구기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잠시 후 겨우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치고 말했다.

“아, 기억났어. 작년에 처음 봤을 때 갑자기 데이트 안하겠냐고 했던 녀석이지? 내 황당해서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여하튼 그럼 그렇게 셋이랑 너랑 해서 넷이서?”

“네.”

“호홍.”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예화는 의자를 빙글 돌려서 현상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그 미묘한 도전적인 시선과 약하지만 강렬한 인상의 미모, 그리고 학교의 아이돌(외면상으론)답게 압도적인 외모에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 주춤하며 물러났다. 왠지 이 사람 앞에만 있으면 압도된단 말이야.

“알았어. 성호한테는 내가 잘 말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놀다 와.”

“……어떻게 경찰서 안 갈 정도로 끝나게 말려주세요.”

“그건 자신 없어. 차.”

“……한잔 더 끓여올 테니까요, 노력이라도 해봐줘요.”

현상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찻잔을 받아 포트에 남아있는 물을 마저 따르고 가볍게 우려낸 뒤 배달했다. 가볍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다시 만화책에 시선을 집중하는 예화를 보고, 현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 문을 향해 몸을 빙글 돌렸다.

“아, 근데 현상아. 잠깐 물어볼게 있어.”

“네? 뭔데요?”

막 문을 열고 부실에서 나갈려는 순간 들려온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라며, 현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뜬금없는 사람이야.

“근데, 너 유이랑 무슨 관계야? 진짜로 애인사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깜짝이야.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들려. 귀 아파서 원.

“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예화의 투덜거림에, 현상은 고개를 꾸뻑이며 사과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누구랑 사귀어? 내가? 그거랑? 여기서 그녀석이 아니라 그거라는 사실에 잠깐만 주목하시고, 왜? 아니 물론 외모야 좀 길거리를 같이 다니면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 광선에 꼬치가 될 정도긴 하지만 말이지, 내가 그 마법소녀랑?

“아니,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어제 부실에 같이 온 것도 그렇고, 갑자기 뛰쳐나간 것도 그렇고. 거기에 오늘 집에 놀러가는 것도 그래. 그래서 진짜로 사귀는 건가하고 말이지. 그래서? 사귀는 거야?”

“아까 대답 듣고서도 모르시겠어요.”

“그래? 어제 하굣길에 물어보니 유이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던데?”

“그거야…….”

당연히 연기 때문이죠. 라고 말하려던 현상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발언 금지 사항이지. 이 양반에게 유이가 마법소녀 어쩌고 떠들었다간 부장에게 말하는 것 이상이면 이상이지 그 이하의 효과는 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현상은 자신을 자제하고는 말을 삼켰다. 그 약간의 경직에, 예화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헤에? 그래? 난 그래서 당연히 둘이서 사귀는 줄 알고. 아니면 말고.”

“에, 예.”

방금 그 표정이 무지하게 신경 쓰이는데.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겠지. 애써 자신을 안심시키며, 현상은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다 예화가 보는 만화책을 바라봤다. 대화 사이에도 페이지가 넘어갔는지 이제는 만화 속의 두 남자(겠지. 아마)는 맨몸으로 부둥키고 19세 이하 시청 금지, 아니 영상등급위원회에서 상영 금지 처분을 내릴 정도의 행위예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 게 재미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냥 거부감이 드는 수준은 아닌데 말이지. 그런 현상의 반응에, 예화는 자신이 읽고 있는 페이지를 한번 힐끔 보고는 시선을 유지하며 페이지를 넘기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 그냥 보는 거지. 이번에 신간이 나왔다고 해서 구했거든. 근데 작가가 영 아니네. 여기서는…….”

 

모두 잠시 3분만 푸른 하늘을 보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옵시다.

 

“……라고 표현해야지. 그리고…….”

“……아뇨,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털썩.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에서 힘을 빼고 자비를 바라는 포즈로 주저앉았다. 슬슬 정신이 위험해져. 손과 다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현상의 떨리는 손을 본 예화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여하튼, 내가 잘 말해 줄 테니까 가봐. 유이랑 사귀는 거 아니면 세영이한테 잘 해줘. 아니면 그냥 유이한테 잘 해주던지.”

“네. 실례하겠습니다. 옥체 보존하시고 가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모른 채, 현상은 또다시 오호호호호호호 하고 웃기 시작하는 예화를 남겨두고 부실을 나가 힘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안 돼. 저 사람에게는 이길 수 없어. 현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바닥만 내려 본 채 걸어갔다. 근데 마지막에 부부장이 뭐라고 그랬지. 그리고 내가 뭐라고 했더라. 충격에 제대로 듣지 못한 부부장의 말을 생각하려 노력하며, 현상은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갔다.

 

 

“제발 좀 같이 가―. 가방을 전부 맡기는 건 너무하잖아―.”

저 멀리에서 따라오는 동우를 힐끔 바라보고, 세영은 동우를 무시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려 옆의 유이를 바라봤다. 미묘하게 불안해하는 표정. 가끔 이쪽을 힐끔 보려다가 세영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향한다. 귀엽잖아 이거. 아니, 속지 말자. 이건 악덕 마법소녀야. 퇴치해야할 적이다. IFF 코드는 레드라고.

“저, 저기,”

“응?”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유이의 말에, 세영은 반사적으로 하이 톤으로 높게 대답해버렸다. 그 탓에 유이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피며 조금 더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집이 정리가 안 되어서 저, 정말로 지저분하거든. 그러니까 나중에 정리가 끝나면…….”

“아니, 괜찮아. 그러니까 가서 정리 도와준다니까? 신경 쓰지 마. 자, 가자고.”

유이가 겨우 용기를 쥐어짜내 한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세영은 유이의 등을 밀며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등에 손이 닿을 때 깜짝 놀라는 반응이 꾸밈없이 손을 통해 온몸으로 느껴져, 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소심한 것도 그렇고. 진짜 현상이 말대로 사기꾼 마법소녀가 맞는 건가? 현상의 바디 랭귀지로는 영업용 성격까지 전달하는 건 무리가 있어 전달하지 못한지라, 세영은 유이의 이중가면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야, 집에 가기 싫어하는 건 뭔가 걸리는 게 있어서일 거야. 고개를 흔들고 세영은 생각했다. 현상이가 비록 바보 같고 한심해도 이런 사기를 칠만한 위인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그 녀석이 나한테 사기를 쳐서 얻을게 없잖아. 그러니까 아마 진짜겠지.

“그런데, 앞으로 어느 정도 걸려?”

“아, 응. 역 앞 오피스텔이니까 앞으로 10분 정도만 걸으면 될 거야. 아마.” “흐음. 그런 데에서 혼자 사는 거야? 쓸쓸하겠네.”

“아니, 괜찮아. 뭐,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려던 세영은 유이의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말 깊숙한 곳부터 쓸쓸한 감정이 담겨있어, 세영은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동생도 멀리서 혼자 살고. 좀 불쌍하긴 하군. 아니지, 값싼 동정 따윈 필요 없어. 고개를 홱홱 돌리고 뺨을 두 번 두드리고 다시 생각. 그거랑 이거는 별개지. 그거랑 현상이를 위협해서 봉으로 써먹는 거랑은 다른 이야기잖아.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협박이라니. 이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런고로 재확인. 옆의 인물은 적. 자신을 물끄러미 무슨 일 있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이를 바라보며, 세영은 각오를 굳혔다. 찔러보자. 이 녀석이 진짜로 마법소녀면 뭔가 반응이 있겠지.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며, 세영은 침을 삼켰다.

아, 근데, 그 전에 확인할게 있는데. 그런고로 잠시 딴 이야기.

“그런데, 정말로 현상이랑 사귀는 거야?”

“뭐?!”

깜짝.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만화에나 나올법하게 지면에서 10cm는 튀어 오르는 유이를 보고, 말을 한 세영 본인도 깜짝 놀라버렸다. 뭐야, 너무 놀라잖아. 예상 폭을 거침없이 벗어나는 반응에 세영은 추가타를 날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유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 아니, 그, 그런 게 아니라, 그, 뭐랄까, 에, 그러니까…….”

안절부절. 움찔움찔. 우왕좌왕. 기타 등등 혼란 상태를 나타내는 수식어를 몸으로 표현하는 듯이, 유이는 얼굴을 붉히며 주변을 바라봤다. 고개는 홱홱. 뺨은 붉그스레. 몸은 안절부절. 오호. 그렇군. 세영의 코에서 바람소리가 새어나갔다.

“뭐랄까, 상냥하다고 해야 하려나. 친절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리고…….”

“호오.”

얼굴이 빨개진 유이를 세영은 차가운, 아니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렇군. 그러면 더 문제가 있는 거잖아. 한번 심호흡을 하고 세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사귀는 건 아닌데 호감은 있다 이거네? 이야, 빠르네. 보자마자 바로 대시야? 대단하네.”

그것보다 호감이 있다는 녀석이 협박이나 한다니. 이건 뭔가 아니잖아. 아니, 좋아. 그 기분은 이해하겠어. 독점욕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봉쇄하는 건 좋은 자세가 아니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분노가 올라가면서, 세영의 입의 공격 강도는 점점 고화력으로 변해갔다. 물론, 이미 원래 주제는 어딘가 깊은 곳에 묻혔다는 자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정심? 그런 거 가진 적 없습니다. 호감? 그게 뭔가요?

“역시 외국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라서 그런걸까나. 난 그런 생각 할 수도 없는데 말이야. 떨린다거나 부끄러워하는 것도 없어? 그러고 보니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으면 이런 경험도 많았겠네. 뭐 익숙한 일이라 별수 없으려나. 역시 교육과정이 그래서 그런가. 나도 여행 같은 거 다니면서 컸으면 그랬을 수 있었을까나. 어떻게 생각해?”

“지금 우리 할머니를 모욕하는 거야?”

움찔. 별 생각도 없이 말 그대로 나오는 대로 입에서 내뱉던 세영은 생각치도 못했던 유이의 차가운 대답에 어깨를 움츠렸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유이의 표정은 부끄러워한다거나 소심한 기운은 찾아볼 방법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차가운 눈매의 유이에 세영은 속으론 침을 삼키면서도 입은 웃었다. 걸렸다.

“뭐 특별히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그렇게도 들릴 수 있겠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상대가 보이자마자 대시하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존경스러울 정도로. 보통은 못할 것 같거든.”

“몇 년이나 알고 지내면서 기회가 있어도 놓치는 것보다야 낫겠지.”

“뭐야?”

유이가 내뱉듯 한 말에 세영 또한 눈빛이 바뀌었다. 오른손에 약간 힘이 들어가는걸 본건지 유이는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그렇잖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도 용기도 없어서 이도저도 못하는 것보다야 처음부터 하는게 낫지. 그리고 뭔 이야기 하는 줄은 알겠는데 그런 건 아니야. 좀 알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너무나도 달라진 유이의 성격에, 세영은 화를 내는 것도 잊고 잠시 숨을 멈췄다. 이게 진짜 아까 3분 전의 그 녀석이야?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건지 소심한 건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던? 현상이를 협박한다는? 아, 그렇구나. 그제야 세영은 사태를 이해했다. 그리고 적의를 불태우면서도 역으로 키워지던 동질의식이 깡그리 채 사라지는걸 느꼈다. 남아있는 건 완벽한 적의. 더 이상 가릴 것은 없다.

“이런 식으로 나와도 되는 거야? 학교 가서 내가 다 말하면 어쩌려고?”

“괜찮아. 니가 말한다고 몇 명이나 믿겠어. 난 조용히 늘 하던 대로 하면 될 뿐인걸.”

“니가 마법소녀라고 소문내는 거랑 마찬가지로 말이지?”

씨익. 나름대로 준비해왔던 폭탄을 사용한 세영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자,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여기서 만약 모른 척을 한다면 이쪽의 이득은 이중인격을 알아차린 것 정도. 완벽하진 않지만 앞으로의 사태는 바뀐다. 분명 모른 척을 할 테니 이제 남은 건 이 새로 얻은 카드를 어떻게 쓰느냐지.

그리고, 세영의 기대와는 다르게 유이는 세영의 말에 잠시 굳었던 표정을 피며, 무서울 정도로 멋진 기세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언제쯤 그 이야기 나오는가 했는데 말이야.”

세영의 눈이 커졌다.

 

 

“아, 실례합니다. 여기가 유이네 집 맞나요?”

끼익. 평산역 앞의 오피스텔. 15층 정도 되는 낡은 오피스텔로, 전 방이 원룸으로 구성되어 대학생이나 이 지역의 가게에 종사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건물. 그 건물의 13층 한 방의 벨을 누르고, 현상은 약간 자신 없는 기세로 입을 열었다.

“아, 맞아. 열려있으니까 들어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유이의 목소리에, 현상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맨손으로 오는 건 뭐해서, 싼 걸로 휴지나 사온 상태였다. 뭐랄까, 너무 아저씨 같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방 안을 바라봤다.

이사온 지 며칠 안돼서일까, 방은 아직 반가량을 종이 박스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큰 박스 작은 박스 중간 박스 찢어진 박스 등등. 그 사이 사이로 옷 몇 벌과 책 몇 권, 그리고 이불과 베게 정도가 대강대강 처박혀 있었고, 쓰레기로 보이는 물체와 도대체 뭔지도 모르겠는 물체가 바닥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즉, 개판 5분 전이 아니라 개판 5분 후 수준. 이건 뭐 내방보다 심하네. 현상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 사이에 놓여있는 작은 책상에 세영과 동우가 앉아 있었다. 세영이는 왠지 기분이 약간 언짢은 듯 보였고, 동우는 약간의 환상이 깨진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난생 처음 들어와 보는 여성의 방에 행복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둘에 신경을 쓰고 멍하니 서있자 유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미안, 정리를 못해서 말이야. 혼자 살다보니 아무래도 정리하기 힘든 모양이라서. 자, 여기 앉아.”

“아, 응.”

유이의 안내에 현상은 유이가 가리키는 쓰레기 사이로 보이는 안전 지역에 앉았다. 그리고 현상이 앉는걸 본 유이도 옆에 대강 쓰레기들을 밀어두고 자리를 만들어서 앉았다. 작은 책상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포화상태. 책상 아래로 서로의 다리가 어떻게든 접촉하지 않으려 잠시 신경전이 벌어졌다가 잠시 후 종전.

그리고 잠시 동안의 고요. 뭐야, 분위기가 왜이래. 왠지 벌레 씹은 표정의 세영과, 반대쪽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마음의 평화 상태를 유지하는 유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현상은 고개를 들어 동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우는 현상의 시선을 보고 양손을 휘저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울려는 듯한 표정을 보니까 내가 오기 전에도 계속 이랬나보군. 빠른 상황 파악을 끝내고, 현상은 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보기로 했다.

“아, 저기, 이거. 다른데 에선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선 이사를 와서 집에 오면 선물을 가져오는 게 예의거든. 뭘 고를까 하다가 그냥 평범하게 휴지로 골랐어.”

“아, 고마워.”

유이는 고맙다는 얼굴로 현상이 건내는 휴지를 받아 자신의 자리 옆에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조용. 어떻게든 해달라는 동우의 표정이 이제는 울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그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는 듯한 눈빛은 그만둬.

“아, 그, 그런데 미안한데 혹시 마실 거 없어? 걸어오니까 목이 좀 마르네. 길을 좀 헤매서 말이야. 하하하. 하하, 하…….”

침묵. 제발 누가 좀 어떻게 좀 해봐줘. 현상이 막 동우의 표정과 비슷한 표정이 되려는 순간, 맞은편에 앉은 채 세영과 눈싸움을 하던 유이가 뒤늦게 현상의 말을 이해했다.

“아, 미안. 집에 마실 거 사둔게 다 떨어져서. 나가서 사와야하…….”

그 순간, 갑작스러운 세영과 유이의 표정 변화에 두 남성은 몸을 움츠렸다. 세영의 눈이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매처럼 날카로워졌고, 반대로 유이는 정통으로 한방 먹은 복서 같은 얼굴이 되었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현상과 동우를 무시한 채, 세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래? 그러면 짐 정리는 나랑 현상이가 하고 있을 테니 동우랑 간식거리나 음료수 같은 거 좀 사다줘. 요 주변에 가게 어디 있는지 알지?”

“아니, 우리 집이니까 내가 정리 해야지. 동우랑 세영이 니가 다녀와.”

“난 요 주변에 가게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걸?”

“역 앞 번화가잖아? 어디인지는 알거 아니야.”

“요 주변에 사는 건 너니까 니가 잘 알겠지.”

차가운, 온도로 따지면 -27도 정도 될 것 같은 기세로 두 여성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곤 입을 다물었다. 어느 사이에 저 둘은 저렇게 험악한 기세가 된 거야. 뭐 때문에. 그런 의문을 머릿속으로 띄우며, 현상은 일단 이 사태를 어떻게든 무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저기, 괜찮아. 그렇게까지 목마른 건 아니니까…….”

“아니, 내가 목말라. 동우, 유이랑 다녀와.”

“이 나라엔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속담이 있지? 동우야, 세영이랑 갔다 와.”

“…….”

이건 뭐 이제 그거구만. 한심함을 느끼며 포기하고 이 분위기가 깨지는 것을 기다리려던 현상은, 갑자기 자신의 발에 닿는 감촉에 고개를 돌려 옆 자리의 세영을 바라봤다. 눈은 여전히 유이를 노려보며, 세영은 눈짓으로만 말했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왜 내가 여기 왔는지 잊었어?

아. 그제야 현상은 그 빈약한 이해력을 발휘시켜 세영의 말을 이해했다. 그렇군. 그런 의도였냐. 알았어. 책상 밑으로 오른손을 꺼내 엄지손가락을 펴 보인 뒤, 현상은 지원사격에 들어가기로 정했다.

“그러면 미안한데 유이 니가 다녀와. 짐 정리는 걱정하지 말고. 동우, 넌 특별히 상관없지? 다녀와라.”

동우의 눈이 이상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현상은 눈치 챘지만, 별말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집 주인에게 음식을 사오라고 시키진 않겠지. 집을 손님을 둔 채 비우는 것도 뭔가 이상하고 말이야. 동우는 그런 생각을 하고 평소답지 않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지만, 내 알바냐. 현상이 눈으로 하는 재촉에, 동우는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하아. 현상은 고개를 가로로 휘젓고는 여전히 눈싸움에 바쁜 세영과 유이를 마음속의 포토샵으로 지워버리고 눈으로 말했다.

어차피 넌 상관없잖아. 잠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유이랑 둘이서 집 안에서 있는 것도 좋겠지만, 생각해봐라. 여긴 마을 최고의 번화가야. 그런 곳을 저런 미소녀랑 니가 걸어가 봐라.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사실상 이건 데이트라고 데이트. 어때? 나가지 않겠나 소년.

“아, 그래. 유이야! 나가자! 짐 같은 건 내가 다 들 테니까 말이야. 고생하는 일은 저것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먹을거나 사다주자고. 자, 나가자!”

“에?”

벌떡. 내심 동우에게 기대를 걸었던 모양인 유이는, 예상치도 못한 상황인지 동우가 일어서며 외치는 말에 깜짝 놀라며 돌아봤다. 씨익.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세영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좀 놀다 와도 되겠지. 허가한다 소년. 동우의 애타는 눈빛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걸로 현상은 대답했다. 단순한 놈이라 다행이야. 그래, 모른다는 전제 하에선 유이 저것도 괜찮지. 얼굴도 성격도. 세상엔 모르는 편이 좋은 것도 있는 법이야. 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유이랑 동우는 다녀와. 방은 우리가 깨끗하게 치워주지. 아, 쓰레받기랑 빗자루 어딨어? 야, 세영아. 넌 짐 정리해. 내가 쓸고 닦을 테니까.”

“아, 저, 저기.”

“에이,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다녀와. 쓰레받기랑 빗자루는 나중에 찾고, 일단 큰 것부터 주워. 동우 넌 뭐하냐 빨리 안 다녀오고. 아, 점심도 아예 같이 먹는 게 낫겠지?”

“자, 잠깐만.”

“알았어. 그럼 간식거리랑 식사거리까지 사올 테니까 수고하고 있어. 유이야, 가자.”

“저기, 잠깐……!”

“잘 갔다 와~.”

쾅. 당황한 얼굴로 동우의 손길에 딸려 나가는 유이가 문 밖으로 나간 순간, 세영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문을 부서지지 않나 싶을 기세로 콰앙 하고 닫아버렸다. 잠시 문 밖이 시끄럽다가 조용. 순간적인 상황전개에 어떻게 해야겠다는 판단이 안 선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현상을 보며, 세영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고개를 돌리게 만든 후,

척, 하고 멋진 엄지를 만들어보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그런 엄지를 무시하고 물어보는 현상의 질문에, 세영은 이를 악 물었다. 깜짝이야. 미간에 약간의 힘줄이 올라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영은 빠드득 하는 이 가는 소리를 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웅얼거렸다.

“용서 못해, 저것. 반드시 증거든 뭐든 잡아서 무릎 꿇고 ‘죄송함다, 살려주셈!’하고 외치게 해주겠어!”

뭐냐 그 초딩틱한 비명은.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이, 어느새 현상은 세영에게 멱살을 잡혀버렸다. 깜짝 놀라는 현상에게, 세영은 핏대 오른 눈으로 하악하악대며 외쳤다. 위험해! 그것보다 무서워!

“현상아, 증거 ‘만들어도’ 되는 거겠지? 응? 확실한 거겠지? 너도 무슨 수를 써서든 증거를 잡는 편이 낫겠지? 편안한 생활이 그리우니 약간의 악행은 상관없겠지? 앙?”

“아니, 그보다, 숨, 숨이…….”

“정의를 위해서라면 악간의 필요악도 존재하는 거겠지? 응? 그런 필요악이 있어야 이 사회 전체의 정의가 실현되는 거겠지? 확실하게 대답해봐!”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좀 놔!”

그제야 세영은 현상의 멱살을 놔주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거친 숨을 내쉬는 현상을 무시한 채, 세영은 고개를 쌓여있는 카드보드 상자들로 돌렸다.

“어떻게든, 찾아주겠어! 증거든 뭐든! 확실해, 내 몸속의 모든 세포가 외치고 있어. 저게 범인이라고! 뭐하는 거야, 바닥에 앉아서! 너도 도청기도 박고 카메라도 박고 짐도 뒤져봐! 봐줄 필요 없어! 상대는 절대적으로 적이야!”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저러는 거야. 교복 넥타이를 약간 풀면서 현상은 생각했다. 어느새 세영은 그 열기 그대로 박스로 달려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빼기 시작했다. 뭐랄까, 눈에 핏빛과 살기가 그득해서는 하악대며 그러니까 꼭 변태 스토커 같은데 말이야.

“그 잡것이 말이야, 감히,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그랬다고? 어차피 너 같은 게 한다고 해봤자 겁 안 난다고, 어디 할 각오가 있으면 머리를 굴려서 해보라고 말이야. 용서 못해. 날 바보로 봤겠다? 엎드려서 개처럼 빌게 해주지!”

“뭐? 잠깐, 유이가 먼저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했다고?”

분노에 가득찬 채 외치는 세영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듣던 현상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외쳤다. 그 소심 성격으론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프로정신이 투철한 이상 가볍게 까발려질 것도 아니겠지. 그렇다면 아까 하굣길에 뭔 일이 있었던 건데. 그런 현상의 질문을 풀어주기로 했는지, 박스 안에서 꺼낸 책들을 뒤지고 옷 안을 뒤지던 세영은 속사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체를 알고 있다고 했더니 얼굴이 싹 바뀌어서는, 그런 얼굴에 속다니 나도 참 어눌했지, 그러고 보니 반 전원이 속은 거 아니야, 하여간 성격 나쁜 대로 놀아서는, 여하튼 얼굴이 싹 바뀌어서는 ‘언제 그 말 나오나 궁금했네. 그래서? 알아서 뭘 어떻게 할 거지?’ 하고, 마치 우주에서 깔아보는 듯한 그런 어투로 말이야, 그래서 집에 가서 증거를 잡아 줄 테다, 라고 했더니 콧방귀를 뀌면서 ‘흥, 할 수 있으면 해봐. 말도 못하는 용기 없는 소심아 주제에’ 라고 말이야, 아 열불나! 살려두지 않겠어, 부장 말대로 묶어서 심문, 취조, 고문 한 다음에 해부실험까지 해서 박제로 만들어 자연사 박물관에 기증해줄 테다!”

“아니, 잠깐. 그걸 다 까발렸다고?”

말을 끝내고 다음 박스를 거칠게 뜯어 여는 세영을 보면서, 현상은 벙 쪄버렸다. 아니,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그걸 다 까발리셨다고요? 현상의 머릿속이 집단으로 파업을 외치며 일손을 놓는 사이, 현상은 멍한 눈으로 박스 입구를 잡아 뜯는 세영을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서, 세영이에게 맡긴 건 당연 주위에서 믿고 맡길 사람이 세영이 뿐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세영이의 냉정 침착함과 상황 파악, 그리고 대처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하게 도움을 요청한 거고. 그런데 이 비장의 카드, 이쪽이 알고 있다는 카드를 그렇게 냅다 써버려? 이거 세영이 맞아? 눈앞의 상대가 실제로는 세영이의 탈을 쓴 외계인이나 부장 아닐까 하는 괴악한 망상을 고개를 흔드는 걸로 날려버리고, 현상은 거칠게 박스 안의 물건을 빼서 던지는 세영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 어떻게 된 건지 좀 자세히 설명 좀 해줘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흠칫, 그러나 말 하던 도중, 현상은 고개를 돌린 세영의 얼굴을 보고 몸을 맹렬한 기세로 뒤로 뺐다. 호러영화에 당장 캐스팅 된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의 얼굴로, 핏발 선 눈으로 세영은 현상을 바라봤다. 우드득, 하는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를 입에서 내며, 세영은 차분하게 말했다.

“현상아, 지금까지 날 무시하거나 한 사람과 바보취급한 사람은 많아. 그런데 유이라는 저 잡것은 지금까지 누가 날 무시하거나 바보 취급한 것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의 최고 기록을 세워버렸다고. 심지어 부장조차도 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끙끙대는 정박아 취급은 안했지. 그런데 유이는 그걸 해냈어. 세계 기록이라고. 월드 레코드야. 덧붙이자면 내가 받은 모욕도 월드 레코드지. 그런데 내가 저걸 용서하거나 눈곱만큼, 정말로 눈곱만큼이라도 봐줘야할 납득 가는 이유가 있다면 두 개, 아니 한개만 대봐. 지금이라도 천사같이 관대한 내 모습을 보여주지.”

꿀꺽.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켜버렸다. 이번 달은 뭔가 씌인게 틀림없어. 요 근래 나타나는 괴물 따위와는 비교도 불가능할 정도로 두려운 물체가 지금, 겨우 주먹 하나 거리에 앉아있었다. 뒷골이랑 등이 근질근질한건 기분 탓이겠지. 왠지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그런 현상의 표정을 읽었는지, 세영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리고 잠시 후,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세영은 손에 쥐고 있던, 너무 꽉 쥐어서 다리미로도 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티셔츠를 던져버리고 돌아앉았다.

“저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봐도 실례가 안 될까요?”

“…….”

말없이 자신을 올려보는 세영의 눈길에, 현상은 입을 다물었다. 지긋이, 그럭저럭 슬슬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현상이 말하려던 순간, 세영은 시선은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뭐라고?”

“귀까지 어두운가보네. 설마하니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던 거야? 너무 순진한데?”

얼굴은 여전히 소심 전학생의 탈을 쓴 채 말하는 유이에, 세영은 잠시 유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멍한 얼굴의 세영을, 유이는 싸늘한 시선으로 입은 웃으며 바라봤다.

“왜? 많이 놀랐나보네?”

그 말에, 세영은 겨우 정신적 그로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카운트에 정신적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세영은 고개를 휘두르고는 정신을 재조합했다. 그래, 어쨌던간에 마법소녀인가 뭐랬지. 거기에 현상이랑 계약인지 나발인지를 맺었고. 스토킹이라도 할 수도 있을 테고 뭔가 괴상한 거라도 있을 수 있겠지. 어떻게든 상황을 납득하며, 세영은 정신적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한방 크게 먹었는데.

“그런데, 그런 것까지 까발려도 되는 거야? 불리할 텐데? 이쪽엔 하나의 히든카드가 있거든. 쓰면 못 말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세영의 역공에, 유이는 잠시 눈썹을 움찔거렸다. 분명 히든카드가 뭔지 알아들었겠지. 한 학년 위의 뭘 저지를지 모르는 폭탄. 하지만 곧 냉정을 찾았는지, 유이는 흥 하고는 콧방귀를 뀌고 앞을 보며 말했다.

“뭐, 내가 말했다고 꼭 그쪽이 기억하란 법은 없지.”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군. 세영은 눈을 좀 더 가늘게 떴다. 협박이다. 기억조작 같은 건 별다르게 놀라운 소재도 아니지. 현상이도 비슷한 말(정확히는 몸짓)을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건 미리 보험을 들어놨다고.

“내가 왜 동우를 끌고 왔는지 모르나보네? 뭐, 귀찮을까봐 떨어트려놓긴 했지만 뭔가 하면 보이긴 하겠지. 뭐, 그것 말고도 몇 개 보험 들어 논게 있으니까. 하고 싶으면 해도 돼. 나야 책임질 것도 없지. 기억을 못하니까 말이야.”

“……생각보단 제법이네.”

“참새가 아무리 동급으로 생각해봤자 봉황에게는 안 되는 법이지. 실례라고.”

잠시 서로 간에 말없는 시선 교환. 3월의 햇살은 반짝거리고, 길가의 가로수에는 새싹이 돋으려고 봉오리가 피어나오고 있었다. 사람 하나 차 하나 없는 빌라 사이 골목골목으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모퉁이마다 들려오고, 아스팔트는 적당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람은 3월답게 선선하고, 하늘엔 구름하나 없어 담벼락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을

“그래서, 넌 원하는 게 뭐야? 역시 그거?”

유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세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주어도 목적어도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알아듣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거한테 부탁을 받았는데 당연히 그거지. 귀찮겐 안 굴겠어. 이쪽이 원하는 건 하나야. 앞으로 이쪽도 귀찮은 일에 말려들지 않는 거. 덧붙이자면, ‘이쪽’이라고 한건 물론 그거 말고 나도 귀찮은걸 원치 않는다는 소리야.”

즉 교환이라던가 하는 협상은 애초부터 결렬, 이라는 소리다. 당연하지. 세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니가 뭔 짓을 하던지 내 알바 아니야. 하지만 내 평화로운 학원 라이프에 태클을 걸어온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리고, 세영의 말을 듣던 유이는 고개를 돌리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증거는?”

“엉?”

그 말에, 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넋 빠진 대답을 해버렸다. 뭐? 잠깐만, 이제 와서 증거? 무슨? 그리고 그런 세영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유이는 안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가득 채우며 노래하듯이 말했다.

“마법소녀인지 뭔지가 나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고. 뭐 우리 학교에 그런 게 있다는 소문은 어제 들었고, ‘뭔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게 ‘그거’에다가 귀찮게 안 굴겠다는 것도 알았어. 그런데, 내가 그 마법소녀인가 뭐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데?”

“……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세영의 얼굴을 보며, 유이는 비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머리 나쁘네. 증거가 있을 거 아니야. 아니면 심증이라도. 뭐 소문이야 그렇게 났을 수도 있겠네. 외국에서 전학생이 왔는데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면, 한두 명 정도는 그런 소문을 퍼트릴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진짜고, 그 대상이 나라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 있는 건데? 내가 내 입으로 한번이라도 인정한 적이 있나?”

“지, 지, 지, 지…….”

지금 와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하고 멋지게 외치고 싶었지만, 너무 당황하다보니 입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니, ‘당황했다 라기 보단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솟구쳐 올라, 좁은 목구멍을 막아버렸다고 해야 하려나. 수백도 온도의 사우나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세영을 보며, 유이는 기분 나쁜, 정확히는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 이 성격? 이런저런 나라 돌아다니면서 살려면 피곤하지. 착한 성격으로 사는 것도 피곤해. 괄괄한 성격이 편하지. 뭐,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것도 내가 입 다물면 그만이지.”

“…….”

뭔가 말해야하는데. 입안에 몰려든 단어들은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 뭐가 입에서 튀어나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세영은 시뻘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안 돼지. 참자 참아. 심호흡을 하며, 세영은 모든 분노를 입 대신 눈으로 끌어 모았다.

“좋아, 그렇다면 잡아주겠어. 그 증거인지 뭔지를.”

“할 수 있으면 해보지 그래?”

“흥, 집에만 가면 간단하지.”

세영의 대답에, 유이는 피식 하고 웃고는 싱글거리며 말했다. 분명 이쪽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즐기고 있는 거겠지.

“집에 간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뭐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자리를 비워야지? 그리고 그런 빈틈을 보일 정도로 한가하진 않아.”

“만들어주겠어.”

세영의 독기어린 시선을 재수 없는 시선으로 받아치며, 유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빠직, 하고, 세영은 머릿속에서 그나마 근성으로 남아있던 얇고 얇은 실이 끊어졌다는 걸 느꼈다. 하긴 지금까지 붙어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지.

“울고불고 짜도 소용없을걸.”

“울고불고 짜게 해봐.”

 

“울고불고 짜게 해줄 테다. 반드시.”

“…….”

많이 침착해진채로 짐을 풀어헤치는 세영을 보며, 현상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이제야 대충 뭔가를 알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걸 말이다. 도대체 왜 갑자기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원.

여하튼 간단한 정세 파악은 되었다. 지는걸 죽는 것만큼이나 싫어하는 게 세영이고, 세영이의 꼭지를 부장 이상으로 돌려버린 건 유이가 처음이다. 거기다 그것만이면 다행일게, 도전장까지 내밀어버렸고, 그 도전은 일단은 세영의 승리로 돌아갔다. 집을 안 비우려던 유이는 결국 동우와 나가버렸고, 집은 무방비. 그리고 세영이는, 골키퍼가 없으면 기다려준다거나 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골키퍼가 없을 때야말로 골을 있는 대로 넣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아니, 필요가 있다면 골키퍼를 두들겨 패 쫓아내고 골을 있는 대로 넣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가볍게 한숨을 쉬고, 현상은 일단 세영이가 내팽개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찾는 거야 알아서 세영이가 잘 할 테고, 정리 안하면 왔을 때 시끄럽겠지. 투덜대며, 현상은 엎어진 책을 정리해서 쌓아두고, 이리 저리 널려진 옷을 개어 종류대로 포개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그 옆에서는 세영이 아까보단 덜했지만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물건을 날려대고 있었기에, 일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좀 잘 좀 꺼내면 안 돼?”

“…….”

자신의 말을 무시한 채,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더 확확 짐을 사방으로 휘날리는 세영을 보면서, 현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한테 화풀이냔 말이야.

“하고 싶은 말도 못한 다라…….”

“응? 뭐라고 말했어?”

세영이 뭐라고 말한 듯한 기분에, 현상은 갸웃하며 고개를 돌렸다. 잘 들리지 않던 세영의 목소리는 다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묻히더니, 잠시 후 겨우 집중하면 알아들을 정도로 들려왔다.

“저기, 지금 우리 둘밖에 없는 거 맞지?”

“어, 응? 그, 그렇지.”

이젠 어째서인지 짐을 정리해가면서 풀어 현상의 수고를 덜고 있던 세영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작년 12월 기억해? 그, 크리스마스 언저리에 그거.”

“작년 크리스마스?”

그거야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지만, 그게 갑자기 왜?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상은 기억의 창고에서도 강렬한 인상으로 창고 입구 메모판에 붙어있던 작년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떼어내 바라봤다.

작년 크리스마스 언저리, 정확히는 12월 24일부터 26일. 아마 평생을 가도 못 잊을걸, 하고 현상은 생각했다. 건물 하나를 점령하고 2박 3일간 농성을 하는 게 과연 보통 사람이 평생을 가도 한번이나 해볼 경험일까. 아니겠지.

 

사건의 개요는 간단했다. 작년, 문학부는 분명 고문 선생님도 있긴 했지만, 학교의 정식 부서는 아니었다. 부원은 4명뿐이었고, 학교에서 인정하는 부의 최소 인원은 5명, 즉 문학부는 부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고문 선생님도 사실은 그런 직책 따위 없었지만, 자신도 세뇌든 뭐든 고문 선생님이라고 했으니까 그것은 사소한 문제이리라. 문제는, 여하튼 문학부는 정식 부서가 아니었고, 학교는 정식 부서 외의, 학교 규칙상 관대하게 봐줘도 학생들의 스터디 그룹 이상 이하도 아닌 집단에 부실을 제공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평시에는 괜찮았다. 뭔 이유인지 부장은 교장 선생님과 사이가 좋았고, 어차피 구교사는 쓰는 교실도 하나도 없었다. 교감 선생님과 학생부, 그리고 선도부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학교의 대장, 교장이 허락하겠다는데 도대체 누가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평시에는 눈의 가시긴 했지만, 여하튼 문학부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 24일. 일이 벌어졌다. 재단 연말 회의로 교장이 학교를 떠난 것이다. 2박 3일의 짧다면 짧은 일정. 거기에 사이에 하루는 법정 공휴일.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2박 3일 동안, 세평 고등학교는 중재자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꼈다.

12월 24일. 방과 후. 수업을 끝내고, 현상은 아무 생각 없이 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장의 주최로 할 일 없는 사람들끼리 크리스마스 파티나 벌일 계획이었고, 어차피 집에 가도 부모님과 재미없게 보낼 것이 틀림없었기에 현상은 처음으로 친구들끼리, 정확히는 동료들끼리 보내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길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선생님이야 솔로라고 또 엉엉 울면서 술을 마실 테고, 부장이야 분위기에 휘말리는걸 좋아하니 고깔을 쓰고 징글벨이라도 부르고 있겠지. 부부장이 왜 평소의 가면을 쓰고 남학생들과 놀러 안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참가하겠다고 말했었고. 상당히 많이 까칠하고 신경질적이긴 하지만 세영이도 올 거다, 아마. 이때까지만 해도 세영이는 부서에 불만이 많았고, 꼭 털이 곤두선 고양이 마냥 신경질을 하루에 3번씩은 내고 있었다. 대상은 부서의 전원. 매일 술만 마시는 선생님도, BL 만화책이나 보는 부부장도, 사고만치는 부장도, 그리고 자기주장 없고 믿을 구석 없는 현상이도.

그리고, 막 전원이 모여서 이브를 축하하며 케익을 절단 하려는 순간, 일이 터졌다.

세간은 이를 ‘문학 창작부 크리스마스 대방어전’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학생부, 선도부, 내신에 끌린 검도부, 축구부, 신문부, 기타 부서 vs 문학부. 인원 비는 거의 30 : 1. 명백하게, 전투는 상대가 안 되어 보였다. 문학부가 믿을 것이라고는 현재 사용가능한 구교사의 사용가능한 입구는 1개뿐이며, 계단도 1개뿐이라는 것. 이 기형적인 구교사의 구조에 의한 병목현상 이외에 문학부가 믿을 지원군은 없었다. 뒤늦게 사건을 듣고 구경 온 학생들은 모두 생각했다. 이걸로 ‘그’ 문학부도 끝이겠구나.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고 있는 거야, 라고. 그리고 문학부는 그 기대를 철저하게 부숴버렸다.

12월 26일, 아침. 떠오르는 해와 동시에 교장 선생님이 학교로 돌아왔고, 전투는 끝났다. 모두가 생각한 결과와는 다르게 끌어진 이 전투는, 문학부의 수성(守成) 성공으로 끝이 났다. 연합군의 피해는 12월 26일부터 방학식인 28일까지 결석률이 90%를 넘는다는 형태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문학부 또한 많은 피해를 치렀다. 바리게이트로 막힌 문학부 부서 안에 최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생존율 40%. 생존자 목록은 1학년 6반 김현상, 그리고 1학년 8반 은세영.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의,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물론 기억하지만, 그게 왜?”

자신을 바라보는 현상의 눈빛을 등으로 받으며, 세영은 말없이 짐을 꺼내 포개어 놨다. 잠시 침묵. 두근거리는 가슴이 슬슬 식어가는 순간, 세영이 입을 열었다.

“기억해? 그 전에 나 상당히 짜증스러웠던 거.”

“뭐 기억이야 하는데, 근데 그게 갑자기 왜?”

“그때, 부실에 마지막까지 남은 건 우리 둘 뿐이었잖아. 부장이랑 부부장, 선생님은 중간에 연행되고. 우리만 부실에 남아서 책장으로 문 막고 버텼잖아.”

“아아, 그랬지.”

세영은, 여전히 천천히 느릿느릿한 자세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에 선생님 끌려가고, 부부장 끌려가고, 결국엔 그 난리를 치던 부장도 끌려갔잖아. 너랑 나만 남아서 부실로 도망가고. 학교 밖에서는 학생부에서 잘됐다고 웃으면서 ‘지금이라도 나오면 봐주겠다.’ 라고 확성기로 동네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말이지.

사실 말이야, 그때 난 부서 따위 어찌되든 좋았어. 내가 원해서 입부한 것도 아니었고 말이야. 입부 이유도 선생님이 ‘이대로 가다간 부서를 다룰 수 없다’ 하고 무책임하게 끌어들인 거였고, 애당초 글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말이야. 말 그대로 끌려서 입부한 거였으니까 의욕도 없었고. 거기다 제대로 된 부서도 아니었고 말이지. 선생님은 매일 학생에게 놀림당하고 무시당해서는 학교에서 술이나 마시고, 부장은 자기 멋대로 일 벌이는걸 좋아하는, 자기만 좋으면 다라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인데다가, 부부장은 나름대로 멋진 선배라고 존경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단순한 공주병 내숭 동인녀였고 말이야. 다 마음에 안 들었어.”

세영은 이윽고 한번 숨을 내쉬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거기에 현상이 너도 그랬고 말이야. 처음엔 솔직히 많이 무시했어. 자기주장도 없고, 부장이 하면 그냥 따라서 휘둘리고, 그러면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면 해결하려고는 안하고 도망치고 숨으려고만 하고, 남 탓으로 돌리고. 솔직히 말하면 싫어했어. 그나마 부에서 나름대로 정상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랬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땐 부서가 정말 싫었어. 그렇다고 퇴부하고 다른 부서로 가자니 선생님이 허락도 안 해주고 말이야. 정식부서도 아니어서 다른데 가입해도 문제도 안됐겠지만, 일단 리스트에는 ‘문학 창작부 대기자’여서 다른 부서에서 받아주지도 않고 말이야. 어찌 됐든, 문제아 집단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처음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 드디어 다 끝났구나, 하고. 그래서 다들 부실을 지키겠다고 나설 때 나 혼자만 부실에 남아있었지.”

그 말에 현상은 기억을 되돌려보았다. 그때, 모두가 부실을 지키겠다ㅡ물론 좋아서 나간 건 부장과 부부장이고, 선생님은 울면서, 나는 울 듯한 얼굴로 나서긴 했지만ㅡ나설 때, 5명밖에 안 되는 부에서 한명이 말했다.

‘나는 여기에 남아있겠다. 잘 해봐라’ 라고.

세영이는 혼자 부실에 남아있었었다. 모두가 1층 입구로 내려가, 부장의 지휘에 따라 진입을 저지하는 동안 말이다.

“아래는 시끄럽고, 부실에선 할 게 없고, 솔직히 난 빨리 학생부나 선도부가 이기고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대로는 집에 갈수도 없으니까 말이야. 아래에서 고함을 지르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 책장을 둘러보면서 선도부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책장과 책상을 집어 던지고, 책을 꺼내가서 부실을 텅 비우는 상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어. 근데, 그러다보니 생각났어. 그럼 내 1학년 시절은 어디 가는 거냐고. 좋든 싫든, 부실엔 추억이 있었어. 글도 썼고, 조사도 하고, 놀기도 하고. 쓰는 것도 쓰다 보니 재미있었고, 쓰려고 준비해둔 것도 있었고, 여하튼 1년 내내 시간만 나면 부실에 왔었으니까.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랬던 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생각이 바뀌더라. 이 부실을 지켜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세영은, 부실 문을 박차고 복도의 잡동사니를 되는대로 들고 계단으로, 입구로 뛰어갔다. 그 갑작스러운 심정의 변화는 납득 가능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 그대로, 그건 ‘되어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결국엔 선생님도, 부장도, 부부장도, 다 끌려갔어. 현상이 너랑 나만 남았지. 벌써 4층까지 점령당해서 이젠 계단하고 5층뿐이고. 솔직하게 말해서 무서웠어. 당시엔 허세를 부렸지만 말이야. 이대로 끝난다고 생각했어. 내 고등학교 1년의 추억은 그냥 이대로 사라진다고.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친하게 지내는 건데. 선생님도 매일 당하고만 살아서 그렇지, 괜찮은 선생님이었고, 친구처럼 재미있었고 말이야. 부장은, 뭐 솔직히 영 좋아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부부장도 그렇고. 그리고, 현상이 너도 말이야. 생각보단 좋은 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어. 늘 도망만 치고 잘난 것도 없고 끌려 다녔지만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등으로 어떻게든 책장을 밀어서 입구를 막으면서 고개를 돌렸어. 그리고 니 얼굴을 봤어.”

한번 다시 숨을 고르고, 세영은 입을 열었다.

“의외였어.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하고. 필사적인 얼굴이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그런 표정 지을 줄 몰랐는데 말이야.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뭐든지 하겠다는 그런 얼굴이었어. 그리고 고개를 한번 젓고, 내 팔을 잡고 말했어. ‘안되겠어. 일단 부실로 가자.’ 라고. 그리고 그대로 뛰었어. 책장은 무너지고, 뒤에서는 학생부랑 선도부, 기타 등등 부서 부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말이야. 다리는 꼬이고, 넘어질 것 같은데, 니가 끌어줬어. 너도 위태위태하긴 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부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말했어. 내가 떨고 있는걸 보면서,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라고. 놀랐어. 잘난 것도 없고, 자기주장도 없고, 늘 끌려 다니는 줄 알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멋있는 녀석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런 말을 하다니, 많이 놀랐었어.”

그리고 약간의 공백과, 심호흡 후에, ‘그래서 말이야, 나는…….’ 이라고 세영이 더듬거리며 말하는 순간, 현상이 입을 열었다.

“저기, 근데 말이야.”

깜짝, 바로 그 순간, 세영이 앉은 자세 그대로 공중으로 펄쩍 뛰어 올랐다. 어깨를 약간 떨면서, 세영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뭐랄까, 현상은 생각했다. 열이라도 나나. 세영의 얼굴은 F-1 레이싱 카가 전속력으로 달리다가도 멈춰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빨개져있었다. 어디 용광로에 들어가도 저렇게 빨개지진 않을 텐데. 그보다 말이야, 한숨을 쉬고, 현상은 입을 열었다. 꿀꺽, 하고, 현상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방금 침을 삼킨 사람이 어깨 너머로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집중되고, 눈이 커지고, 현상의 입은 천천히 벌어지고, 안 돼, 잠깐만, 내가 생각해도 내가 갑작스럽긴 했지만, 너무 직구로 던지긴 했지만, 그래도 말이야, 잠깐, 잠깐만 기다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야?”

“에?”

순간, 세영의 빨개졌던 얼굴이 무지하게 웃기게 바뀌어, 현상은 웃음을 참는데 전력을 다해야했다. 입은 벙하니 벌어지고, 두툼한 눈썹은 처지고, 커졌던 눈은 그대로 멍 하니 풀려버리고.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며, 현상은 고개를 살짝 돌려 세영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게 시선을 이동하고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이야기가 지금 상황이랑 무슨 연관인가 해서. 작년 크리스마스 이야기랑, 문학부 싫어했다는 거랑, 내가 그렇게 별 볼일 없는 녀석이라는 건 알았어. 그런데 그거랑 지금 상황은 전혀 상관없잖아. 마침 유이도 동우도 없고 둘밖에 없는데, 빨리 뭔가를 찾아내야지. 아, 그러고 보니까 도청기 안가지고 왔어? 그것도 빨리 설치해야지. 슬슬 시간이 없네. 요 주변엔 슈퍼 같은 것도 많으니까 금방 올 텐데.”

“…….”

와르르르르. 우탕탕. 퍽. 쿠광, 우수수, 휙. 기타 등등 의성어.

“야! 갑자기 뭐하는 거야!”

아까는 그래도 박스에서 하나씩 짐을 꺼내더니, 이제는 박스를 통째로 휘둘러 짐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박스 입구를 열고, 거꾸로 들어서 쏟아낸 다음, 박스를 내던진다. 그것도 하필이면 현상이 옷을 정리하고 책을 쌓아놓은 곳에. 그리고 물류센터에서 보면 박수를 치며 당장 헤드헌팅을 해갈 그 정확성에, 현상이 몇 분 동안 고군분투한 흔적은 역사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방은, 아까는 개판 5분 후라면, 지금은 개판이 3분 주기로 30년은 계속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야, 은세영! 갑자기 왜 그래! 도대체 뭐가 불만이라서…….”

시끄러! 이 단세포가!

듣기만 해도 공포에 질릴 듯한 목소리로 현상에게 으르렁 거리며 외치곤, 세영은 책이 가득 들어있어 건장한 청년도 들어올리기를 주저할 상자를 공기놀이 하듯 가볍게 들어 올려 입으로 박스 입구를 봉하던 테이프를 물고 화끈하게 뜯어버린 다음 그대로 박스를 휘둘러버렸다. 물론 원심력으로 책은 사방으로 날아갔고, 몇 개는 세영의 외침에 깜짝 놀라 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치던 현상에게 날아갔다. 퍼버벅, 하고 몸 이곳저곳과 코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정통으로 맞고 별을 구경하며 혼절하는 현상에게 관심도 없다는 투로, 세영은 그대로 박스의 내용물을 전부 쏟아버린 다음 박스를 휙 하고 집어던졌다. 꼴사납게 쌍코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진 현상의 얼굴 위로, 훨씬 가벼워진 종이박스가 마치 죽은 사람에게 씌워주는 흰 천 마냥 떨어졌다.

아아아아아아아!

영화 속의 괴수나 지를법한 괴성을 내지르며, 세영은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린 방에서 일어서 양손을 벌린 채 포효했다.

“불쌍하네.”

“응? 뭐가?”

“아냐. 아무것도 아냐. 빨리 돌아가자.”

기절해서인지 소리가 몇 겹으로 메아리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유이는 청각 공유화를 끊었다. 오전에 갑자기 생겨난 적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유이는 작게 가슴에 성호(聖號)를 그었다.

 

“그럼, 난 슬슬 가봐야겠다. 늦었는데 너희들은 안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하는 동우의 말에, 전원은 시선을 시계로 돌렸다. 시간은 많이 늦었다곤 하기 그렇지만, 어쨌든 슬슬 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타이밍.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고 생각하며, 현상도 짐을 꾸렸다.

결국 수확은 제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코피를 막은 다음 세영이랑 한참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옆집에서 두 번 정도 찾아오고, 행복한 표정의 동우와 어째서인지 측은한 표정의 유이가 먹을걸 가지고 오고,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질러진 방에 놀라고, 잠깐 동안 다툰 다음, 네 명이서 방을 정리하고, 과자와 음료수를 꺼내서 아까보다는 훨씬 침착해진 분위기로 나름대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이가 마법소녀다’ 라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증거는 애석하게도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화난 표정으로 자신을 양치기소년마냥 바라보는 세영의 시선에서 어떻게든 고개를 돌리며, 현상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니, 난 집에 오면 뭔가 있을 줄 알았……. 그보다 집에 오자고 한건 너잖아. 왜 그런데 내가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거지. 영문을 알 수 없네. 다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세영의 눈길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현상은 결국 포기하고 방을 둘러봤다.

도청기 8개. 소형 카메라 5개. 사각 없음. 어디서 뭘 혼잣말로 중얼거리든 들을 수 있도록 도청기를 아낌없이 설치한 결과, 도청기는 TV에도, 침대에도, 교복 외투에도, 심지어 화장실(현상은 제발 그건 그만둬달라고 했지만)에 까지 설치되었다. 카메라는…….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한숨을 쉬면서, 현상은 세영이가 그 정도로 진실을 밝히고 싶은 건지, 그보다 아무리 무시당했어도 왜 그리 화를 내는 건지 고민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나한테. 뭔가 증거를 잡아야했는데.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당장이라도 좌절로 쓰러질 것 같은 정신 상태를 고쳐 매고 어떻게든 외관상 평정심을 유지하며, 현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가볼게. 세영이 너도 그만 나가자.”

“…….”

여전히 퉁퉁 불은 표정으로, 현상의 말에 세영은 거칠게 가방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훌륭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유이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안은 어쨌던 네 명이 정리한 끝에 꽤나 깔끔하게 변해있었다. 이건 거의 러브하우스 수준인데. 그런 감상을 하며, 현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미 입구로 가는 동우를 보고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이, 가방을 집어 들고 일어서는 세영에게, 유이가 살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불쌍하네.”

빠직,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며, 세영은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돌려 유이를 바라봤다. 말 그대로 이를 박살낼 기세로 세영은 말했다.

“뭐야?”

“아니, 이거 말고. 나름대로 노력도 했고 마침 둘밖에 없었는데. 뭐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그보다 뭔가 나오긴 하셨나? 그 마법소녀인지 뭔지 하는 증거.”

피식 웃으며 말 그대로 재수 없는 투의 유이의 말에 세영의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당황함과 창피함에 못 이겨, 세영은 유이에게서 떨어져 현상에게로 달려가 헤드락을 걸어버렸다.

“잠깐, 도대체 뭐…….”

“아무것도 없잖아! 도대체 뭐야! 오면 뭔가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애당초 마법소녀 맞아? 너 저거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예쁜 미소녀니까? 성격이야 나빠도 넌 그 부장하고도 지내는 성격이니 상관없겠지. 아아, 그런 거냐? 응? 많이 실망했어. 김현상.”

엉? 갑자기 왜이래. 세영의 말에 당황함과 공포를 느껴 현상은 고통을 느낄 수도 없었다. 당황함은 갑작스러운 세영의 변화 때문이요, 공포는 갑자기 그 믿음직하던 세영이 손바닥을 뒤집어 발을 빼려고 한다는 것. 너 없으면 아군이 없단 말이야. 그보다 누가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 저거한테 그렇게 당했다면서 뭔소리야. 갑자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마인드 컨트롤이라도 당한 거냐. 대답해라 은세영!

“하여간 나도 너한테 속다니! 증거도 뭐도 안 나오잖아! 괜히 나만 창피 당하고, 거기다, 거기다…….”

“잠깐, 도대체 갑자기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 좀……. 그보다 이 팔 좀 풀…….”

현상은 어떻게든 헤드락을 풀고(숨이, 숨이!) 오해를 풀려고 했으나, 잘 익은 사과 색깔로 점점 얼굴이 붉어가는 세영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모처럼 단 둘이었는데. 모처럼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데 이건……. 거기다 저 재수 없는 것한테 창피나 제대로 당하고!

“진짜, 진짜 죽…….”

마지막으로 걸레라도 짜듯이 있는 힘껏 현상의 목을 조르고는(현상은 강 건너의 꽃밭을 보며 뱃사공에게 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세영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며, 그 사이 유이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동우에게 달려가 목 뒷덜미를 움켜줬다.

“그럼 월요일에 보……. 쿠엑! 야, 갑자기 이게 무슨 짓…….”

“시끄러! 집에나 가자!”

“잠깐, 잠깐 잡아당기지 말고 기다려! 현상이는 어떻게 하고?”

“알아서 하겠지! 좋은 시간되시죠!”

“잠깐, 도대체 무슨……. 꽥! 숨 막혀! 잡아당기지 말라니…….”

쿵. 영문을 모르겠는 소란과 동시에, 세영과 동우는 문을 열고 사라져버렸다. 문 밖에서 켁켁거리는 동우의 신음과, 세영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목을 어루만지며, 현상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봤다. 도대체 갑자기 왜 저래. 에라 모르겠다. 기껏 집에까지 왔는데 성과도 없고. 다음 작전이나 생각해야지. 뭐 수확은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문으로 다가가는 현상의 어깨에 척, 하고 손이 올라왔다.

“……뭐야.”

약간 흠칫했지만, 있는 힘껏 필사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현상의 표정에 코웃음을 치며, 유이는 입을 열었다. 어느새 동우를 위해서 짓고 있던 최소한의 가식적인 표정도 사라져있었다.

“생각보다 대담한 수를 쓰셨어? 동료를 꼬드겨서 집까지 쳐들어온다니. 솔직히 이건 좀 놀랐는데 말이야. 어제 편의점에서 도대체 무슨 역적모의를 하나 했더니. 생각보단 머리가 잘 돌아가네. 놀랐어.”

“이건 내가 짠 계획이 아니라고. ……그보다 잠깐, 니가 어떻게 어제 편의점에서…….”

별 생각 없이 말하던 현상의 얼굴이 일순간 급변했다. 경악한 현상의 얼굴을 보며, 유이는 코웃음을 쳤다.

“머리 어지간히도 나쁘네. 내가 한번 이야기 했을 텐데? 거기다 여긴 우리 집이야.”

“…….”

“뭐, 시도는 좋았어. 솔직히 나도 어제 혹시나 해서 짐을 정리 안했으면 꼼짝 못했었을 테니까. 하지만 시도가 좋은 것과 결과가 좋은 건 다른 문제지. 뭐 일단 칭찬은 해줄게. 근데 너 참 어지간히도 둔하다. 뭐 이건 나랑 상관없나.”

“…….”

“그보다…….”

유이는 목소리를 침착하게 바꾸며 말했다.

“왜 어제 학교로 나오지 않은 거야?”

“응?”

그 말에, 현상은 어제를 생각했다. 그래. 어제는 8시까지 세영이와 작전회의를 하고 집에 들렸다 나가려고 했지만, 부모님에게 걸려 잡혀 나갈 수가 없었다. 모처럼 아버지가 일찍 퇴근했는데 운동하겠다고 또 나가냐, 오늘은 가족끼리 외식이라도 하자ㅡ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고, 오랜만의 외식이라 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었다. 고기도 맛있었고 말이야. 그리고 보니 연락을 못했구나.

“아니, 그게…….”

“분명 말했지? 매일 나오라고.”

현상의 변명을 뚝 잘라먹으며, 유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뭐야, 겨우 하루 못 나온 것뿐이잖아. 어차피 내가 안 나간다고 뭔가 심각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현상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특별히 말하면 안 된다는 일이란 느낌도 들지 않았다.

“뭐야, 겨우 하루 못 나온 것뿐이잖아. 어차피 내가 안 나간다고 뭔가 심각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짐이 될 뿐이잖아.”

거기에 애당초 난 나오기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이렇게 된 거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내버려 두면 안될…….

“중요한건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유이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현상은 입을 다물었다.

“약속했잖아! 매일 나온다고! 사정이 있다면, 적어도 나오기 전에 연락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이야기도 없이 안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 나, 전화번호도 뭐도 모르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일이 생기면 못 나갈 수도 있는 거잖아.”

“약속했잖아! 매일 나온다고!”

유이의 외침에, 현상은 숨을 삼키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 분명 내가 연락하지 못하고 안 나간 건 미안해. 사과할게. 하지만 말했다시피 어차피 내가 나가봤자 뭐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내가 문제로 삼는 건 그게 아니잖아! 왜 약속했는데 안 지켜? 매일 나오는 게 계약이라고 말했잖아! 어쨌든간 사인했잖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유이의 태도에, 현상은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이 도대체 뭐에 그렇게 화가 난건지 원. 약속을 어기는 게 분명 잘못된 행동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날만한 일 인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유이는 아직도 분이 식지 않았는지 잠시 씩씩거리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말했다.

“너무 큰 소리 질러서 미안해. 하지만,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든지 일단 연락부터 해주기 바래. 전화번호 알려줄 테니까.”

“아, 응. 미안해.”

현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는 쓸어 올린 머리를 좀 흔들어 푼 뒤에, 현상을 바라보지 않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냐, 나도 소리 질러서 미안해. 그래도,”

유이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현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약간 물가에 젖었는지 붉은 눈동자는 살짝 일렁이고 있었다. 그 표정에, 현상은 숨을 삼켰다. 이를 물고, 유이는 여전히 약간 떨리는 호흡으로 말했다.

“나말이야, 그런 거 정말 싫어하니까.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 배신하는 거, 정말 싫어하니까. 정말, 정말로 싫어하니까. 적어도 안 되면 다음날 처음 볼 때라도, 그때 미안하다고 라도 해줘. 이렇게 내가 이야기 하게 하지 말고. 알았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용하게 말하는 유이는, 어딘가 자신이 한 짓에 대해 후회하는 분위기가 들었다. 때문에 현상은, 그 이상 자세하게 물어보거나, 변명을 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지금까지의 유이와는 완벽히 다른 반응에, 다만 현상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어, 응.”

 

“근데, 도대체 유이랑 뭔 일이 있던 거야?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몰라도 돼. 별거 아니야.”

투덜대는 동우를 무시하고, 세영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역 앞의 길거리는 벌써 퇴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해, 세영은 어깨를 부딪치며 나아갔다.

바보취급 당했다. 오늘은 평생의 굴욕의 날이야. 세영은 무의식적으로 학생가방의 손잡이를 꽉 움켜줬다. 그 부장에게도 이정도로 바보취급 당한적은 없는데. 하고 싶은 말도 못하는 정박아 취급을 받았고,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소리를 듣고 하겠다고 달려놓고선 속아서 말 한마디도 못하고 다시 바보취급 당했어. 거기에 현상이 그것에게도 무시당하고. 점점 손잡이에 힘이 들어가면서, 이까지 악 물어버렸다. 분해. 아무것도 못하는 게 제일 분해. 눈가를 한번 비비고 세영은 일단 한번 다시 등 뒤의 동우를 바라봤다. 뭔가 불만스러운 모양이었지만, 워낙 좋은 녀석이라서인지 관심 없다는 투로 주변의 가게를 바라보고 있었다. 착한 녀석이야. 세영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패배를 했으면 다음은 몇 배로 갚아서 승리할 차례지. 세영은 각오를 굳혔다. 실패는 패배를 의미하는 게 아니며, 패배가 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지. 전투에서 져도 전쟁에서 승리하면 되는 거니까. 지금의 굴욕을 배로 쳐서 이자를 붙이고 수고비와 감사비, 보증금까지 붙여서 갚아주면 돼. 그렇게 생각하며, 세영은 신호등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정면을 응시한 채 말했다.

“야, 동우야. 아까 유이랑 나갔을 때 유이가 별말 안했냐?”

“응? 아, 뭐 별말 안했어. 약간 투덜거리긴 하던데, 니 앞에서랑 내 앞에서랑은 완벽하게 대하는 게 다르던데. 넌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유이랑 그렇게 싸우냐.”

“아니, 그보다 유이 그 성격, 어떻게 생각해? 나한테 대하는 거랑 너한테 대하는 게 그렇게 다르잖아. 어느 쪽이 원래 성격일까. 나한테 하는 거 보면 은근히 성질 더러운 거 아닐까.”

살짝 찔러보는 세영에게, 동우는 귀를 후비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뭐 나야 특별히 상관없는데. 어느 쪽이든. 괄괄한 성격이라도 상관없잖아? 특별히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래도 왠지 속은 기분 아니야? 난 처음에 굉장히 기분 나빴는데. 현상이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저렇게 대시하고. 뭐 상관이야 없지만.”

“아, 그러고 보니까 나 그제 밤에 현상이랑 유이 봤는데. 까먹고 있었다.”

“뭐 현상이에게 관심이 있든 없든 나랑 전혀 상관이 없……. 잠깐, 뭐라고?”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던 세영은, 동우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동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세영을 마주 바라보고 말했다.

“아니, 그제 간식 떨어져서 편의점으로 사러 가는데 현상이랑 유이랑 학교 쪽에서 와서 편의점으로 들어가더라고. 같이 컵라면이랑 이것저것 사서 수다 떨면서 있던데?”

“그래서, 그래서?”

“너무 그렇게 달려들지 말고. 뭐 그래서 안에 들어가거나 하면 보이고, 분위기 깰 것 같기에 그냥 집으로 왔지. 그때가 9시 반 좀 더 지나서 같은데. 그러고 보니 도대체 무슨 일이었으려니. 그 시간에 학교에서. 뭐 아무러면 어때.”

“…….”

“신호 바뀌었는데 안 가냐?”

파란색으로 변한 신호등에 모두가 걸어가기 시작했지만, 세영은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이 가만히 섰다. 동우는 건너가려다 한숨을 푹 쉬고 돌아오고, 신호등은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다. 머릿속에는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유이의 방에서 누군가의 바보짓을 안주삼아 웃음을 짓고 있는 두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학생가방의 손잡이가 구겨졌다.

“야, 은세영. 어디 아프냐? 괜찮…….”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서있는 세영을 걱정해 내미는 동우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잡으며, 세영은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그 이야기, 좀 자세하게 들려줘봐.”

 

 

현상은 멍하니 학교 입구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바라봤다. 시간은 8시 50분. 검은 하늘 아래로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반짝거리는 불빛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여, 현상은 훌쩍하고 코를 들이마셨다. 그 뒤에 바로 집을 떠났지만, 역시 그렇게까지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데 다시 안 올수는 없었다. 오기 싫었는데. 정말 오기 싫었는데. 저 아래엔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소소한 삶의 방식이란 얼마나 멋진 것일까. 아무런 걱정 없는 그 삶은 얼마나 멋진 것일까. 며칠 전만 해도 자신도 저 일상 속의 작은 불빛 하나였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현상은 다시 코를 들이마시곤 눈가와 코 아래를 문질렀다. 훌쩍.

추운 밤의 봄바람을 맞으며, 현상은 멍한 시선을 손목시계로 돌렸다. 내가 왜 이렇게 일찍부터 와있는 거냐. 뭐가 좋다고. 도대체 뭐 때문에. 빼먹지만 않고 오면 되는데. 학교 시계의 시침이 슬슬 9시에 가까워지는걸 보며 현상은 생각했다. 도대체 왜 내가 먼저 와있는거지. 왜일까.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면서, 현상은 학교 전체를 한번 훑어봤다.

하아. 낮에는 그렇게 활발하고 밤엔 저렇게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하건만. 어째서 인류는 서로 싸우는 걸까. 어째서 서로를 오해하는 것일까. 저 평화롭고 평화롭기만 한 학교에 도대체 뭐가 있다고 매일 9시마다 왠 정체도 뭐도 모를 괴물과 정체도 뭐도 모를 마법소녀가 싸우고, 왜 정체도 확실하고 뭔지도 알 수 있는 내가 껴들었을까. 한숨을 쉬면서, 현상은 생각을 그만두고 다시 정문으로, 어째서인지 매일 늦는 누군가를 기다리려 돌아섰다.

 

야밤에 학교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며, 세영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밤은 깊었고, 봄바람은 그래도 여전히 추웠고, 반달은 떠있고, 별은 반짝거리고, 언덕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주변엔 가정집에서 나오는 정다운 웃음소리뿐이라, 세영은 왠지 짜증났다.

“아잉, 자기 왜그래~”

“에이, 좋잖아~”

뭐가 좋다는 거야. 옆에 지나가는 닭살 커플을 사납게 노려보며 세영은 생각했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그 둘을 보면서, 세영은 동우가 들려준 말을 떠올렸다.

밤, 학교, 밀회. 그리고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결국, 난 가지고 놀아졌을 뿐이다. 장난감이다. 둘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날 보면서 즐기기 위한, 일종의 안주. 찰싹 붙어 낄낄거리고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유이와, 현상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세영은 순간 울컥하는 느낌에 눈물을 흘릴 뻔 했다. 그런 녀석을 위해서 자신이 그 고민을 하고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 화가 나서.

진심으로 걱정했는데. 진심으로 어떻게든 해주려고 했는데.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마음을 억눌러 눈물을 다시 담아 넣으며, 세영은 눈빛을 고쳐먹었다. 그 눈빛은 사냥꾼의 눈빛, 전사의 눈빛, 맹수의 눈빛이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슬슬 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걸 모른 채, 세영은 주위에 눈으로 보이고 만져질 듯한 투기를 발산시키며 학교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살려두지 않겠어.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리고, 마침 고개를 돌린 현상의 눈에, 언덕을 올라오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가녀린 몸. 따라서 남자는 아니지. 키는 나보다 약간 낮고, 옷은 평범. 가로등의 역광이라 얼굴은 잘 안보였지만, 이 시간대에 올라올 사람은 딱 하나뿐. 그런데 몸 주변의 저 이상한 기운은 뭐냐. 뭐 상관없겠지. 그래서 현상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이냐? 왜 이제와?”

빠직, 하는 소리가 강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적어도 현상의 눈에는 몸 주변의 오오라가 증폭된 것처럼 보였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뭐랄까, 사자 우리 안의 토끼가 이런 기분일 것 같은데. 자신의 눈앞에 거대한 거인이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현상은 시선을 집중했다.

없다. 뭐가? 트윈테일이. 대신 보이는 건, 귀 앞부분으로 머리를 남기고 나머지를 뒤로 넘긴 흔한 포니테일 스타일. 그리고 그 헤어스타일의 주인 중 가장 잘 알고 지내는 사람, 그 사람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현상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걸 느꼈다.

“아, 아아, 아아아…….”

그 넋 빠진 목소리에, 그 사람은 멋지게 싱긋 웃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세영이 와쪄여 뿌우. 왜에? 기대했던 사람이랑 달라서 놀랐쪄? 그것 참 유감이네. 그런데 그 사람이랑 여기서 뭘 하려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거야야?”

애교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등짐을 한 채 한발자국 앞으로 저벅. 한발자국 뒤로 스슥. 다시 한발자국 앞으로 저벅. 다시 한발자국 뒤로 스슥. 그러나 앞으로 걸어 나가는 속도와 보폭이 큰 탓에, 점점 그 사람은 현상에게 다가왔다. 위험해. 그보다 무서워. 며칠 전 죽기 전 느꼈던 공포나 방금 전 유이의 협박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말, 지금 당장 머릿속 한곳에서는 산산조각 나는 자신이 보이는, 그 정도의 압박감. 왠지 주변이 밝아 보이는 건 저 오오라의 힘이려나. 그렇겠지. 그런데 왜이리 손에 땀이 차냐. 등골이 왜이리 서늘하지. 그리고 어느 순간, 눈앞에는 세영이 서있었다.

“왜에? 왜 그렇게 긴장한 얼굴을 하는거야아?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그래에?”

털썩.

“뭐야아? 기분 나쁘게 왜 쓰러져어? 근데 누굴 기다리고 있던거야아? 내 이름을 뭔가 다른 걸로 부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에? 내 귀가 잠깐 이상하게 된건가아? 어떻게 생각해에?”

“마, 말투가, 뭐,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래에? 평소랑 똑같은 거 같은데 말이지이. 아, 일어서봐아. 자, 이 손 잡고.”

천사와도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내민 세영의 손에,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세영은 단지 그림속의 천사마냥 싱글싱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에, 현상은 정말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어, 유이는? 아직 안 왔쪄?”

뜨끔해서, 현상의 대답은 몇 초 늦었다.

“어, 어엉? 유, 유이라니? 유이가 여길 왜와? 거, 거참 이상한 소리도 하네. 하, 하하하.”

“그래에에? 희한하네에. 너랑 유이가 밤에 학교에서 만난다는 소문을 듣고 나도 어디 그 꼬락서니나 보자고 이 야밤에 힘들게 발걸음을 했는데 헛소문이라니.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났나 몰라아? 죽고잡냐. 똑바로 못 씨부리지.

“시정하겠습니다.”

털썩, 하고 현상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느새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눈초리를 올린 채, 세영은 팔짱을 끼고 현상을 내려 봤다.

“어디 한번 똑바로 씨부려보시지. 첫 번째로 내가 듣고 싶은 건 유이한테 매일 시달리고 휘둘린다면서 어째서 매일 밤마다 학교에서 밀회를 즐기느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래서 도대체 매일 밤마다 학교에서 만나서 뭘 하냐는 것이야.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듣고 싶은 그 내용에 일말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난 정말로 꼭지가 돌아버릴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러니 생각 잘 해서 말의 내용을 잘 씨부리도록. Do you understand?”

“아니, 잠깐만, 내가 자세하게 설명을 해줄 테니까 지금은…….”

뭐라고?

당장에 얼굴에 구멍 두 개가 주먹만 한 사이즈로 아담하게 뚫릴 것 같은 박력 넘치는 세영의 시선에 떨면서도, 현상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계속하려했다. 진실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세영이의 저 시선도 그렇게 되면 풀릴 테니까. 하지만 여긴 위험하다고. 지금 시간대를 생각해보면 슬슬 시간이 되었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어울리지 않는 기특한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세영에게 있어서, 그 태도는 당장에라도 단두대에 목을 걸어버리고 싶은 죄악 행위였다. 이렇게까지 숨긴다는 건 확실히 안에 있다는 거네.

막 현상이 입을 열고, 세영이 사자후를 토하려는 순간, 학교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현상과 세영의 표정이 서로 정반대로 바뀌며 학교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저기, 누군가 있는 거지?”

이를 드러내며 주먹을 불끈 쥐는 세영.

“세, 세영아. 내가 잘 설명 할 테니까, 지금은 일단 다른 데로 가자. 응? 내, 내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응?”

그리고 얼굴에 당황한 기색과 걱정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현상. 그리고 현상의 그 발언은, 세영의 귀를 향하여 들어가 뇌 안쪽의 전투 본능의 스위치를 정확하게 올려버렸다.

아하, 그런 거군. 저 안에 있는 거구나. 그렇다면 원래 뭘 하려고 했는지도 뻔하네.

운동장 구석에 버려져있는 우그러진 알루미늄 야구배트를 들어 올리는 세영을 보면서, 현상은 기겁했다. 저건 그거지? 싸우겠다는 거지? 세영이 진실을 모른다는 사실 따위는 기억해내지 못한 상태로, 현상은 세영의 전투본능에 끓어오르는 오오라를 보면서 침을 삼켰다. 안 돼, 도망가야 한다고!

세영은 웃었다. 입 꼬리가 너무 올라가서 그걸 숨기려 왼손으로 얼굴 반쯤을 가린 채로, 세영은 야구 배트를 손잡이에서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쥐었다. 좋아. 손맛 좋고 묵직하고. 그 상태로 두어 번 휘둘러본 후, 세영은 어떻게든 웃음을 감추며 현상에게 말했다.

“안에 누구 있나본데, 확인하러 가보지 않을래?”

“그, 그만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모,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휭! 하는 굉장한 소리를 내며 배트를 있는 힘껏 다시 휘둘러보고, 세영은 배트를 어깨에 얹고는 말했다.

“가보자.”

 

현상은 세영이 도망치길 원했다. 세영이의 전투력이 높은건 알지만, 어쨌든간 세영이는 평범한 여고생 2학년이고, 평범한 여고생 2학년은 산더미 같은 괴수와 당당하게 싸울 수 없다. 평범한 남고생 2학년이 그를 적절하게 증명해보였으니까. 뭐 세영이가 나보다 몇 배는 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괴수와의 갭은 미국 메이저리그의 투수와 초등학교 리틀 리그의 투구와의 갭만큼, 또는 우주 이쪽 끝과 저쪽 끝만큼이나 벌어져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생명의 문제라고. 빨리 도망가야 해.

세영은 학교안의 누군가와 대면하기를 원했다. 현상이가 착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지. 전부 그 (검열삭제)의 탓이다. 그러니 현상이가 저렇게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진실을 숨기려고 눈에 뻔히 보이는 수를 쓰는 거겠지. 밤의 학교에서 만나? 뭘 하려고? 그러면서 그 (검열삭제)는 바보짓을 하는 꼭두각시 현상이와, 거기에 놀아나는 나를 보고 즐기고 있겠지. 그래, 좋아. 지금까지는 내가졌어. 변명할 거리도 없을 정도로 깨졌지. 하지만 인생의 묘미는 대부분 반전에서 오는 법이라고. 가만두지 않겠어. 그놈이고, 이 등 뒤의 현상이고. 화끈하게 가자고.

그런 고로, 한 쌍의 남녀와 우그러진 알루미늄 야구배트는 학교 신교사의 복도를 걸어갔다.

다행히도 문이 열려있어서 침입은 문제가 없었다. 그렇기에 현상은 더더욱 미칠듯한 기분을 느꼈다. 문이 잠겼으면 그를 토대로 해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린걸 보곤 수위 아저씨라고 우기는 것으로 그 전술을 바꿨으나, 얼마 전부터 병가를 받고 수위 아저씨가 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로 그 역시 빠꾸. 결국은 알루미늄 배트를 든 세영의 뒤를 쉴 새 없이 돌아가자고 회유하며 소독차 뒤의 아이들 마냥 졸졸졸졸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뚜벅, 뚜벅.

텅 빈 밤의 학교 복도에 소리는 몇 배나 크게 울려 퍼졌고, 그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현상은 조금씩 몸을 움찔했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세영이고 뭐고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사나이로서 도망칠 순 없는 것 아닌가. 이미 여성의 등 뒤에서 덜덜 떨고 있다는 사실은 잊은 채, 현상은 제발 아까 본 게 잘못 본 것이기만 을 바라며 세영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건 그렇고 유이 이건 진짜 뭘 하기에 이렇게 매일 늦는 거야.

세영은 등 뒤에서 덜덜 떠는 현상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배트를 들어 올린 채로 계속해서 전진했다.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저렇게 떠는 거야. 하긴 지금이라면 변명거리라도 있지, 들키면 그걸로 끝이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이를 찾으면 어떤 방법으로 화를 내줄까나. 그건 그렇고 진짜 이건 주말 드라마네. 불륜남과 남편의 애인을 습격하는 부인. 흠, 나름대로 괜찮은데.

그리고 앞서가던 세영의 눈에, 뭔가 희한한 물체가 들어왔다.

흐릿한 달빛에 비친 실루엣만이 눈에 들어왔지만, 어째서인지 세영은 그 물체를 딱 본 순간 어려서 봤던 공룡대백과의 한 페이지가 떠올랐다. 그런게 지금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고 스스로도 생각했긴 하지만, 기억속의 도서관에는 공룡대백과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릴 때 여자애답지 않게 달달 외웠던 공룡 이름은 다 까먹었지만, 일단 그 당시 봤던 공룡과는 해당이 없음. 굳이 말하자면 티라노사우러스와 벨로시랩터 사이 정도. 크기는 인간과 비슷. 컬러는 검은색. 그래서인지, 세영은 더욱더 고개를 갸웃했다.

왜 학교에 저런 인형이 돌아다니는 거지? 그보다 인형이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나? 평범한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세영으로서는 인형 이외의 다른 요소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고, 때문에 의문은 증폭되어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 실루엣은 어째서인지 열려있는 교실 문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금, 봤어? 저거.”

별 생각 없이 물으며 뒤를 돌아본 세영은, 등 뒤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했으나, 자세히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현상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것을 보았다. 하아, 하고 깊디깊은 한숨을 쉬고, 세영은 야구배트를 움켜쥐고 정면을 응시했다. 수상한 것이 있으면 눈으로 확인하자ㅡ세영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격언을 떠올렸다.

때문에 현상은 돌아버릴것만 같았다.

안 돼, 나왔다. 비교적 아담한 사이즈이긴 하지만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걸 안전하다고 부를 수 있는 거냐. 사람 하나만한 사이즈의 공룡을? 그보다 저것들은 도대체 뭐야. 게고 공룡이고. 어린이 햄버거 세트에 딸려 나오는 장난감이라도 되나. 내일은 뭐가 나올지 참 기대도 되는군. 아, 이게 아니지. 고개를 홱홱 저어 날아가려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고, 현상은 세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절망했다. 오, 안 돼. 당장 달려가서 싸우겠다는 기력이 역력하잖아. 양손으로 배트를 꽉 쥐고 얼굴을 긴장과 기대로 상반되게 가득채운 그 얼굴을 보고, 현상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버렸다. 안 돼, 정말로 위험해. 어떻게든 말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리고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머리로, 어찌할 바도 모른 채, 현상은 앞으로 한걸음씩 걸어가는 세영의 뒤를 쫓아갔다.

세영은 사실 배트를 휘두를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당연하지. 살인사건 낼 일 있냐. 단지 배트를 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보통 이런 분위기라면 뭔가를 손에 드는 게 자연스럽겠다고 생각했던 탓이고, 단지 배트를 쥐고 교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면 유이가 놀랄 테고, 그 얼굴을 보고 즐기려는 생각뿐이었다. 즉,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배트를 휘두를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변하는 법이지. 땀 때문에 미끄러지는 배트를 다시 움켜쥐며 세영은 생각했다. 도대체 뭐에 부딪친 건지, 배트 윗부분 절반가량이 30‘ 정도 구부러져있는 알루미늄 배트. 손잡이 부분엔 가죽 띠가 꽤나 촘촘하게, 그리고 정성들여서 묶여져있었다. 야구부의 비품이겠지. 누군가가 꽤나 소중하게 생각하던 배트 아닐까. 뭐 어쨌든 상관없지. 별 의미 없는 잡상을 끝내고, 세영은 살그머니 교실 안을 바라봤다.

도대체 저건 정체가 뭐야. 사람은 아니고, 괴물이 돌아다닌다는 건 부장센스니 제쳐두면 인형이거나 인형옷 정도가 그나마 생각할만한 일인데, 인형은 혼자서 돌아다닐 리가 없고 인형옷을 입은 누군가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저건 도대체 뭐냐. 정말 괴물이라도 되는 거야? 이게 도대체 무슨 부장 같은 이야기야. 검은색 공룡(일단 달리 부를 바가 없으니 공룡이라고 쳐두자)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텅 빈 교실을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좋아. 어떻게 한다. 고개를 돌려 겁에 질린 현상을 바라보며 세영은 생각했다. 1번. 화끈하게 도망친다. 사실 가장 적절한 방법이고 지금 다리 아래에서 벌벌 떨고 있는 짐을 생각하면 가장 좋은 방법.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과연 순순히 잘 도망칠 수 있느냐 하는 점. 사실 접근이야 어떻게든 해왔지만 도망치는 것도 수월하다는 보장은 없지. 이쪽이 움직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2번. 조심스럽게 공격을 가한다. 사실 위험하기로는 이쪽이 더 위험. 아무리 봐도 저 공룡은 순진하게 보이지는 않고, 얼마나 강할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사실 제대로 싸운다면 이쪽이 훨씬 불리. 그렇다면 역시 도주가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역시 지금 여기서는 도망치는 게…….

“세영아, 응? 도망가자. 아무리 봐도 위험해보이잖아. 위험한건 피하는 거야. 응? 애당초 싸워서 이쪽이 이득 볼게 없잖아. 누가 뭐 주는 것도 아니고. 일단 여기서 피하자. 응?”

분명 맞는 말이긴 하지만 울 듯한 목소리로 한심스럽게 말하는 현상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고, 세영은 결정했다. 그래, 확실히 말은 맞는 말이지. 일단은 도망가자. 가서 경찰을 부르던지 누굴 부르던지 하자. 알아서 하겠지. 저게 처음 발견되는 동물이라면 나랑 현상이 이름으로 사전에 실리려나? 돈은 받으려나? 머리에서 전투 본능을 끄고, 세영은 장난이라도 치듯이 이런저런 망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주변정황을 파악할 정신도 남아있지 않던 현상은 떨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저기 말이야, 세영아, 저게 그냥 보기에는 뭐 공룡이나 그런 걸로 보이는데, 사실은 ‘악수’라는 괴물이거든? 무지하게 위험해. 그러니까 도망가자고. 유이가 알아서 처리할거야. 말했잖아, 그녀석이 마법소녀라고. 사실 그 녀석이 여기 온게 저걸 처리하기 위해서라고. 응? 그러니까 유이한테 맡기고 우린 도망가자. 응?”

보통 사람이라면 드디어 이놈이 공포에 질려서 정신착란을 일으켜 현실과 가상을 구별 못하는 중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말들. 그러나 세영의 생각은 달랐다. 아아,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구나. 거기다 거기서도 유이를 찾는 거구나. 마법소녀? 악수?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그런 꿈같은 이야기나 하고. 거기다 유이? 거기서 그 이야기가 왜 튀어나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었던 장난 같은 이 이후에 대한 소박한 행복의 상상은 깨끗하게 사라지고, 세영의 뇌가 다시 전투모드로의 스위치가 들어갔다.

아아, 안 되는데. 저러면 안 되는데. 벌어진 입을 양손으로 막으며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지르는 현상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세영은 자세를 숙이고 앞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적의 위치는 교실 가운데. 거기다 후문 쪽을 향한 상태. 즉 앞문으로 들어가면 완벽하게 후방을 노릴 수 있다. 전투의 기본은 후방을 노리는 것. 그렇게 생각하며, 세영은 배트를 다시 고쳐 쥐었다. 유이? 마법소녀? 웃기지마. 그런 게 있을 리가 있어? 악수? 그게 뭐야. 그런 게 뭔지도 모르겠고 저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해주겠어. 유이? 어쩌라고. 화끈하게 가주겠어. 내 힘을 보여 주겠다고.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겨우 정신의 평행상태를 회복하고, 현상은 세영을 말리기로 결심했다. 지금이라면 말릴 수 있다. 일단 나를 진정시키고, 세영이를 진정시키고, 여기서 나가자. 안전이 최우선이지. 방금은 내가 말실수를 했을지도 몰라. 침착하고 진정하고, 다시 한 번 설득해보자. 그래. 아직은 늦지 않았어. 마른 입술과 입안을 적시고, 현상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앞에 기어가는 세영을 향해. 그리고 막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현상은 다리에 통증을 느꼈다. 아차,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있었…….

쾅.

큰소리는 아니었다. 작은 소리였다. 어느 정도냐고 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헐렁한 창문 정도의 소리였다. 그래서 비틀거리다 뒷문에 몸을 부딪친 순간, 현상은 온몸의 피가 사라지는 기분에서 돌아와 안도감을 느꼈다. 뭐 이정도 소리면 괜찮지 않을까. 깜짝이야. 다리에 쥐가 나서 욱신거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걸을 순 있을 것 같다. 괜찮아. 빨리 말리는 거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현상은 몸을 일으켰다. 일단 녀석이 눈치 못 챈 건지나 확인해야지.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고, 현상은 허리를 숙이고, 살짝 고개만 올려서 창 안을 바라봤다. 허탈함에 약간의 웃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눈이 마주쳤다.

하하, 하하하, 하고 현상은 웃어버렸다.

북극해의 빙하 한가운데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웃고 있는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악수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현상은 악수의 등 뒤에서 두 개의 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우그러진 야구 배트가 전속력으로 악수의 뒤통수로 날아가 박혔다. 소리를 지르려다 공기 빠지는 소리로 그 외침을 끝내고, 악수는 충격에 고개를 깊히 숙였다. 완벽한 클린 히트. 그리고 여전히 웃고 있는 현상에게, 충격으로 좀 더 우그러진 배트를 들고 거친 숨을 들이 쉬던 세영은 외쳤다.

도망쳐!

다음 순간, 세영은 날았다. 현상의 눈이 커졌다. 꼬리에 얻어맞은 세영은 교실 앞의 칠판에 강하게 등을 부딪쳤다. 꺄악,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작은 소리만이 들여왔을 뿐. 채찍같이 휘둘리는 두꺼운 꼬리 사이로, 우그러진 배트가 튕겨져 나갔다.

현상은 문을 열고 달렸다. 목표는 의자. 손에 잡힌다. 그리고 몸을 옆으로 돌리며 강하게 손 안의 물체를 던진다. 고개를 올리던 악수의 머리에, 정확하게 의자가 부딪,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악수가 올려치는 머리에 부딪쳐, 나무와 파이프로 만든 평범한 학교 의자는 박살나 휘날렸다. 그리고 그 사이, 현상은 있는 힘껏 책상들을 밀었다. 그 묵직한 충격에 악수가 약간 휘청했다. 콜록거리고 기침을 하는 세영이 교실 앞에서 일어서는 게 눈에 들어온 순간, 현상의 손에 튕겨 나온 배트가 잡혔다. 무기는 확보. 현상은 있는 힘껏 몸을 휘둘렀다. 목표는 딱 배트의 최대 허용범위, 동시에 최대 위력범위. 휘두르면 된다. 쓰러트리는 게 목표가 아니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버는 거다. 그렇다면 한방이면 된다. 제대로 들어가는 한방이면 된다. 온 몸의 힘을 손끝에 집중하면서 현상은 마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현상의 눈에 이쪽을 향하는 악수의 머리가 보였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의 찰나의 시간. 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교실 뒤의 사물함과 강하게 부딪쳐 숨도 못 쉬고 쓰러진 자신이 느껴졌다.

“콜록! 쿨럭! 쿨럭 쿨럭!”

괴롭다. 머리가 아팠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된 거지. 한 대 맞은 건가? 게에게 맞았을 때는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애당초, 그 사건 전부가 꿈같은 분위기에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맨 정신에 직접 몸으로 느끼는 충격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컸다. 얻어맞은 부위인걸까. 배가 뒤틀릴 듯이 아팠다. 사물이 일렁이며 흔들려보였다.

“현상아! 콜록, 현상아!”

기침을 하면서, 고통을 억누르면서 외치는 세영의 목소리가 멍멍하게 들려왔다. 보아하니 그나마 괜찮은 모양이네. 근데 어쩌냐. 난 안 괜찮은데. 첫 충격에서 벗어나 조금씩 의식이 확보되어가고, 덕분에 아픈 통증도 조금씩 더 느껴졌다. 그리고 그 통증 때문인지 의식은 조금씩 조금씩 선명해져갔다. 즉, 점점 의식은 선명해지고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길 수 없다.

아니, 정정하자. 당할 수 없다.

어떻게 하지. 이가 자신도 모르게 맞물렸다. 상대도 안 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다. 저건 괴물이다. 인간의 상식 이상의 물체다. 정규 훈련을 받은 군인쯤이라도 되면 모를까, 평범한 고등학생 두 명이 대응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시간도 못 벌 정도라니 이건 좀 슬프네. 어떻게 세영이 정도는 도망가게 해야 하는데.

또렷했다 흐려졌다를 반복하는 의식 사이로, 몇 개의 이미지가 보였다. 넘어진 채로 신발과 방금 전의 소동으로 책상에서 쏟아져 나온 사물을 던지는 세영이, 그리고 그쪽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악수. 아아, 이번에는 어떻게 좀 해볼 생각이었는데. 요 며칠 사이 이런 사건만 계속 보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야. 악수는 한걸음씩 현상을 향해 다가왔다. 우는 세영. 날아다니는 물체들. 악수에 부딪치는 물체들.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악수. 그리고 악수는 현상의 앞에 섰다. 아아, 끝인가. 세영이 너는 뭘 울고 있어. 빨랑 도망 안가냐.

악수의 몸에 뭔가 파란 줄기가 박혔다. 그리고,

“여기도 있었냐아!!”

펑!

폭발. 그 번쩍거림에 현상은 눈을 찌푸렸다. 직격으로 맞은 악수는 강하게 걷어차인 모양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한발만이 아니었다.

펑! 펑펑펑! 펑펑!

몇 발인가의 빛줄기가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교실에 박혔다. 그리고 그때마다 들려오는 유리창의 파열음. 그리고 폭발하는 굉음. 시야는 파란 불빛으로 물들었고, 그때마다 악수의 괴로워하는 소리가 귀를 가득 매웠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끝나고 현상이 눈을 뜬 순간, 교실 은 푸른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책상과 벽과 바닥에 붙어 타오르는 파란색 불꽃들. 그러나 뜨거운 감각은 전혀 없는,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광경. 얼마 전에 봤던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과 우그러진 새시 사이로, 하나의 그림자가 창틀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었다.

“매번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주인공은 원래 늦게 도착해야……. 미안. 그런 눈으로 보진 말아줘.”

현상의 강렬한 눈빛에 주춤하면서, 유이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유이를 본 세영의 눈이 커졌다.

세영이를 본 유이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악수는 포효를 내지르고는 뒷문을 강하게 들이받았다.

그 소리에, 세 명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너, 좀 있다 두고 봐! 오늘은 가만 안 있겠어!”

“잠깐, 이게 어떻게 된……. 에이씨! 도대체 뭐야!”

“니, 니가 어째서 여기……. 에엥?”

혼란스러운 각자의 외침을 끝으로, 세 명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이럴 리가 없는데. 저게 왜 여기 있어. 아니, 있기야 했겠지. 하지만 저런 모습으로 저렇게 등장할 리가 없는데. 1번 가설. 저건 유이랑 똑같이 생겼지 다른 사람이다. 좋아. 믿을만해. 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아까 날 알아본 건? 그럼 나랑 아는 사이라는 거 아니야. 즉 1번 가설은 제외. 그럼 2번 가설은, 그건 하나뿐인데. 근데 그 가설이 말이 될 리가 없잖아. 아무리 현상이도 그렇게 말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사실 내가 따라 준 것도 그냥 호기심에, 아니, 그것도 아니지. 그냥 하도 현상이가 울고불고 짜길래 같이 따라 준거지, 눈곱만큼도 믿는 마음은 없었다. 사실이 그렇잖아. 이 세상에 마법소녀 어쩌고 하면 그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그럼 저건 뭐야. 저 눈에 띄는 트윈테일에, 모델이라도 할법한 외모에, 안 어울리는 검은색 괴상한 복장에, 오른손엔 왠 기다란 막대기. 도대체 저건 뭐냔 말이야.

혼란함에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오로지 앞의 두 사람을 따라 달리기만 하는 세영을 잊은 채로, 현상은 유이의 옆을 달렸다. 도대체 앞의 저 공룡 비슷하게 생긴 녀석은 얼마나 빠른 거야? 죽어라고 달리는데도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현상은 무의식적으로 모르게 계속 쥐고 있던 야구 배트를 전투태세로 들어 올리며 소리 질렀다.

“얌마! 도대체 왜 매일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앙! 진짜 누구 죽는 거 보고 싶은 거야 뭐야!”

“아아, 시끄러!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시끄러? 내가 시끄럽고 싶어서 시끄러운 줄 알아! 안 시끄럽게 하란 말……. 잠깐만.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눈치 챘어? 영 바보는 아니네. 맞아.”

“아아. 그런 거구나. 이해했어.”

“니들 너무 침착하잖아! 뭐야 도대체! 저게 뭐냐고! 현상이 너 알고 있었으면 말을 했었어야할 것 아니야!”

등 뒤를 바라보며 외치는 세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상은 무시하고 아까보다 좀 더 빨리 전속력으로 발을 움직였다. 어느새 두 마리의 악수가 등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앞의 놈이랑 같아서 저놈들이 나보다 빠르잖아. 이것 정말 미치겠네.

“도대체 이건 뭐냔 말이야! 여기가 무슨 쥬라기공…….”

“거기까지만 해! 저작권이 있단 말이야!”

맨 앞엔 도주 중인 악수, 그리고 그 뒤엔 그를 추격하는 유이, 현상, 세영. 그리고 다시 그 뒤에는 그런 세 명을 추격하는 악수. 추적하는 상대가 추적중인 상대의 동료에게 추적당하는 기괴한 구도를 그리며, 세 명과 세 마리는 복도를 질주했다.

“지금까지는, 헉, 한 마리 한 마리씩 나오더니, 헉헉, 갑자기 왜 세 마리나 나오는 거야! 큰 거 하나 아니면 작은 거 세 개 같은 세트메뉴라도 되냐! 입이 있으면, 헉, 대답을 해봐! 그리고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면 빨랑 빨랑 구하러 와야 할 것 아냐!”

현상은 달리는 중이라 숨도 쉬기 힘들다는 사실 따윈 잊고 온 학교가 떠나가라는 듯이 고래고래 외쳤다. 그 목소리에 같이 짜증을 내며, 유이는 달려가는 그 스피드 그대로 고개를 돌려 현상을 바라보며 외쳤다.

“시끄러! 나한테 묻지 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냐!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뭐임마! 어쩔 수 없었다고? 어쩔 수 없으면 사람 죽여도 되냐! 그게 과실치사 아니야! 장난 하냐! 언제는 뭐? 무슨 일이 있든지 지켜 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위험하면 빨랑 빨랑 와서 구해줘야할것 아니야! 계약 위반이다! 당장 계약 파기야! 이게 진짜 뭐 애들 장난인줄 알아!”

그리고 그 소리에, 유이는 살기가 넘치는 눈으로 현상을 돌아봤다. 그 기세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악에 받쳐 있던 현상마저도 움찔하고 말았다.

“아아 거 참 시끄럽네. 닥쳐! 진짜 애들 장난이나 치고 있으면 그냥 주둥아리 닥치고 앉아있어! 아까부터 쫑알쫑알 시끄러워 죽겠네! 너도 사내 남정네라면 창피한 줄이나 알아라! 그런 주제에 쫑알쫑알 아까부터 시끄러워 돌아가시겠네! 그럼 니가 저거 때려잡던지! 아무것도 모르면 주둥이 닫고 가만히 있어!”

“그보다 저거 출구로 가고 있어!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고!”

세영의 외침에 폭언에 움찔하는 현상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유이는 이를 악 물며 마법봉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봉의 끝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하고, 저 멀리 앞의 악수가 무슨 벽에 부딪친 모양으로 뒤로 넘어졌다. 벽? 벽이라 굽쇼?

“뭐야, 멈춰야 하는 거야 달려야 하는 거야!”

“당연히 멈춰야지!”

세영의 외침에 대한 유이의 답외침에, 세영과 현상은 동시에 발을 멈췄다. 그러나 제대로 멈춰선 세영과는 다르게, 현상은 정지하려 내뻗은 발이 주륵 하고 미끄러지며 보기에도 꼴사납게, 그리고 아프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두 여성을 알지도 못한 채, 현상은 작은 신음을 내며 배트를 쥐지 않은 왼손으로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어설프게 일어났다. 현상의 눈에 정면의 악수가 어느새 충격에서 회복을 하고 일어난 것이 띄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현상은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이거 포위된 거 아닌가요?”

“너 말이야! 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럼 죽도 밥도 안 되잖아!”

현상과 세영의, 같은 의미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의 불평을 들으며, 유이는 입술을 한번 핥고는 앞과 뒤를 동시에 커버할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그러게. 그 생각을 못했네.”

 

만약 코끼리만한 육식동물이 지금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고 치자. 그 동물은 커다랗고, 강하다. 그러나 절대로 그 동물은 지상 최강의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이 그 나약하고 빈약한 육체로 지금의 위치에 섰는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사자는 작다. 물론 이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위에서 말한 상상속의 동물에 비교한 것이다. 만약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통한다면 사자는 아마 저 동물을 간단하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다. 몸이 거대한 만큼, 작은 쪽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공간이 많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면 클수록 표면적은 넓고, 그 표면적은 모두 빈틈이다. 빈틈은 죽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기동성의 문제가 있다. 커다란 동물은 그만큼의 체중이 나가고, 이는 이동에 어려움을 준다. 그리고 이 기동성의 차이는 빈틈을 만든다. 사슴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이유는 사슴이 사자보다 약하다는 이유 이전에 사슴이 사자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토끼는 잠들지 않는 이상 거북이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강력함에 뒤따라오는 단점이 있다. 강자는 안심한다. 자신의 강함을 믿는 자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강력하고 커다란 육체와 힘을 가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약하며 체격도 작다. 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두 사람이 처음으로 싸운 다음엔 어떻게 되겠는가? 말할 것도 없다. 큰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 싸움에서는 작은 사람이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다. 더 이상 올라갈 계단이 없는 자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적수가 없는 무기는 녹슬 뿐. 그러나 약한 쪽은 자신을 단련하고, 또한 만약 단련조차 불가능 하다면 머리를 쓴다. 지금의 나와, 지금의 적을 분석하고, 적을 쓰러트리기 위한 준비를 한다. 싸움에 비겁이라는 단어는 없다. 약자는 승리를 위해 모든 수를 생각해낸다.

악수도 마찬가지다.

물론, 커다란 악수가 강력하다. 많은 양의 악의가 모여야 생겨나는 만큼, 그 값어치를 해낸다. 커다란 악수, 대형 악수는 방어력도 강하고 공격력도 강하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상대하기 더욱 힘든 상대다. 하지만, 많은 대 악수 전투 요원들은 차라리 대형 악수와의 싸움을 선호한다. 공격의 틈이 크며, 이동의 범위도 커 빈틈이 나오기 쉽다. 덧붙이자면, 무엇보다 ‘쏘면 맞는다.’ 라는 점은 큰 메리트이다.

그래서 유이는 꽤나 짜증이 나있었다.

“에잇! 귀찮게 시리!”

달려드는 악수 한 마리를 봉으로 후려쳐 날려버린 순간, 다음 녀석이 달려든다. 목표는 자신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 미리 마법봉에 저장된, 늘 쓰던 주문을 무영창으로 시전. 파란 불꽃을 맞고 현상에게 달려들던 녀석이 저 멀리 날아간다. 그 순간, 등 뒤가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수의 기괴한 소리. 등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느낌. 그러나 다음 순간, 호쾌한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3번째 악수는 다시 저 멀리 날아갔다.

“명색에 괴물과 싸우는 마법소녀면 일반 소녀의 도움을 바라지 마!”

“너도 일반 소녀는 아니야! 그보다 왼쪽!”

자랑스러운 듯 외치던 세영의 얼굴이 급격하게 바뀌는 순간, 그 사이로 발 하나가 날아든다. 그대로 악수의 얼굴에 직격. 데미지는 한없이 0에 가까웠지만, 그 충격에 잠깐 악수는 주춤한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법봉과 우그러진 야구배트의 동시 후려침에 악수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이스 서포트!”

자신을 향해 펴 보이는 두 개의 엄지를 무시한 채, 현상은 다시 유이와 세영과 등을 마주한 채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일어나는 악수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보다 도대체 뭐야 이게! 왜 나만 노리냔 말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보다 넌 찌그러져 있으랬지!”

“방금은 나이스 서포트라며!”

현상의 외침을 개미 하품하는 소리 정도로 들어 넘기고, 유이는 말없이 다시 세영과 등을 맞대고 날아오는 놈들을 휘저어냈다. 가운데에 끼인 현상이 목표인 이상, 모든 방향에서 시간차 공격을 해오는 악수를 저지하려면 세영과 유이가 각자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적을 날려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신 차려도 도움 따위는 되지 않는 공격 목표물 현상에게서, 충격에서 벗어난 세영이 배트를 넘겨받아 요격 중.

“뭔가 센 걸로 한방에 날릴 수는 없는 거야?”

다시 한 번 날아드는 악수를 날리며 외친 세영의 비명 같은 목소리에 유이는 소리를 질렀다.

“센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이 상황에선 무리야!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도 학교 안이라서 힘들다고!”

사실 유이의 첫 아이디어부터 그거였다. 일정 지역 안에 몰아넣고선 대상지정 마법이 아니라 공역지정 마법으로 날려버리는 것. 보통은 전투요원은 알아보고 주춤거리니 그 동안에 영창하고 시전하면 됐는데, 문제는 어째서인지 녀석들이 말 끝나기 무섭게 현상이를 향해 달려들었다는 것. 뭐, 그리하여,

“마법소녀라는 타이틀 떼버려! 도움도 안 되잖아! 뒤!”

“적어도 야구배트 들고 휘두르는 조폭소녀보단 도움이 돼! 오른쪽!”

이런 식으로 현상이를 보호하며 여성 둘이서 남자 하나를 지키는 보통의 성역활 과는 정 반대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누가 누구더러 조폭소녀라고 부르는 거야? 왼쪽! 그보다 왜 자꾸 이것들이 달려드는 거야! 그것도 이 가운데의 쓸모없는 녀석한테만!”

세영의 외침에 유이는 무시로 대답하며 정면의 상대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까지는 가볍게 공격하고 빠지더니 슬슬 본격적으로 공격해오기 시작해서 정신을 팔 틈이 없다고. 그리고 유이 대신에, 현상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쓸모없는 녀석은 말이지, 방금도 나름대로……. 으앗!”

“아 글쎄 찌그러져 있으라니까!”

현상의 얼굴 5cm 앞 지점에서 악수의 발톱을 막아내며 외치는 유이의 목소리에, 현상은 그대로 찍 소리 한번 내고는 진형의 가운데로 찌그러들었다. 그렇지만 나도 나름대로 남자란 말이지. 이대로 여자들한테 보호만 받을 순 없단 말이야.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정론을 펼치며, 현상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양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유이는 무지막지하게 불만스러운,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양쪽을 바라봤다.

“안되겠어! 이 대로면 끝이 안나! 이쪽이 먼저 지친다고!”

“그걸 이제 알았어?! 마법소녀면 마법소녀답게 뭐 좀 해보란 말이야!”

대꾸로 외치는 세영의 목소리는 확연하게 지친 빛이 역력했다. 당연하지. 지금 이 구부러진 배트로 악수인지 뭐인지의 공격을 몇 번이나 막아내고 날려버렸는지 알아? 슬슬 팔에 감각이 없다고. 지금까지는 공격을 받아내기 전에 먼저 날려버렸지만, 지쳐버린 지금은 막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날아오는 이빨 사이에 야구배트를 구겨 넣어 버틴다. 견디는 세영의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딱 30초만 버텨줘! 딱 30초!”

“5초 견디기도 힘들어! 30초나 견디라고? 나 혼자?!”

이제는 이빨자국이 예쁘게 찍혀있는 배트로 다시 한 마리를 날리며 외치는 세영의 목소리는 이제 사실상 비명에 가까웠다. 장난이 아니라고! 지금 내 팔이 얼마나 떨리는지 알아? 그리고 그렇게 사고가 잠시 다른 방향으로 빠진 순간, 악수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재빠르게 야구배트로 막았지만, 힘이 빠진 손은 배트를 제대로 쥐지 못했다. 배트가 벽에 튕겨 날아간다.

“이런…….”

눈앞에 있는 검은색 공룡. 날카로운 이빨, 발톱. 창문으로 비추는 달빛에 그것들이 푸르게 빛난다. 꿀꺽, 하고 침이 넘어갔다. 위험해. 많이 위험해. 심하게 위험해. 힘들게 싸워서 생긴 땀인 걸까. 이마가 축축한 게 느껴졌다.

세영의 눈이 흔들렸다. 유이는? 그 녀석은? 등 뒤를 확인할 상황이 아니다. 싸우는 소리는 안 들린다. 공격 중지? 하지만 눈앞의 악수는 호의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무기도 없어. 아군도 없어. 저 망할 마법소녀인가 뭔가는 도대체 뭘 하는 거야. 30초는 훨씬 예전에 지났단 말이야.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눈앞의 악수가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는다. 자신도 모르게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마가 더욱 축축해졌다.

도와줘. 결국 참지 못하고 마음이 약한 말을 내뱉었다. 위험하단 말이야.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좀 도와달란 말이야. 눈앞의 악수는 공격의 의사인지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묘하게 풀어져 웃는 것처럼 보여 버렸다. 악수는 달려들었다. 세영은 양팔로 머리를 가리며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나이를,”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세영은 눈을 떴다.

“우습게보지 말란 말이야!!”

깡, 하는 강렬한 금속음과 동시에, 벌린 입 사이로 거하니 한 대를 맞은 악수는 날카로운 이빨 쪼가리를 흩날리며 날아갔다. 고개를 들어올리니, 어느새 떨어진 배트를 주운 현상이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구름에 가렸던 달빛이 다시 드러나고, 풀스윙을 해서 등을 보인 채 앞을 향한 현상의 옆모습을 푸르게 비추었다. 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약간 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바라봤다.

역시, 이 녀석은 믿을 만하다니까.

그리고 딱 0.5초 후, 현상은 배트를 급하게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펄떡펄떡 뛰며 외쳤다.

“아악! 마이 암(Arm)! 마이 암!”

“…….”

정정. 이런 녀석 믿었다간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모자라. 세영은 작지만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영의 본능적 전투 본능이 위험을 다시 알렸다. 저쪽은 분명 유이가 있는ㅡ

유이는 차렷에 가까운 자세로 선채로 차분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손에 쥐고 있는 마법봉은 앞으로 쭉 뻗은 채로. 그 모습은 칼 대신 창을 들고 있는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유이의 몸 주변으로, 파란색 빛나는 입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입자들은 유이의 몸을 한번 훑으며, 다리와 몸통과 팔을 지나 점점 마법봉의 주변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계속해서 아름답게 반짝였다.

척 보기엔 아름답고 환상적인 광경. 눈을 감은지 실제로는 약 20초가 지나있었다.

그리고 그런 유이를 향해 악수 두 마리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정도 늦은 타이밍. 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타이밍임은 틀림이 없었고, 지금 상황에서 유이가 그들을 막을 수 없는 것도 틀림없었다. 추가로 지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현상은 가랑이 사이에 야구배트를 끼운 자세로 양 팔을 붙잡고 괴상하게 펄떡거리는 상태.

세영은 결심했다.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세영은 일단 현상에게 주의를 했다.

“좀 아플지도 모른다?”

물론 현상이 들을 리도 없었으니,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일 뿐. 그리고 세영은, 펄떡 거리는 현상의 가랑이 사이로 삐져나온 야구배트 끝을 잡고, 강하게, 있는 힘껏 잡아 뺐다.

“크학!”

여기서 잠시 간단하게 상황이 이해 안가는 사람을 위한 자세한 상황 설명. 보통 야구배트는 손잡이를 쥔다. 따라서 그 자세로 야구배트를 가랑이에 끼운다면, 당연히 손잡이가 몸 앞쪽 위를 향하고 방망이 방향이 그 뒤쪽 아래쪽으로 길게 빠져나오게 된다. 거기에 야구배트는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손잡이 끝 부분에 막음새가 튀어나와있으며, 지금 상황에서 현상의 가랑이에 끼인 야구배트는 구부러져있다. 즉 야구배트를 잡아 뺄 경우, 손잡이 부분이 사타구니를 강하게 치고 나온다.

그리고, 민망한 이야기지만, 남자는 사타구니 사이가 약점이다.

“!!”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는 번역 불가능한 처참하디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현상은 무릎을 꿇으며 장렬하게 쓰러졌다. 쿵. 그리고 그런 현상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고, 세영은 배트를 고쳐 쥐고 몸을 날렸다. 어설프게 몸을 반쯤 구부린 상태에서 배트를 뽑으며 몸을 뒤로 돌린다. 그리고 스텝을 밟으며 유이의 두어 발자국 앞으로 전진. 그 순간, 첫 번째 악수가 달려왔다. 그리고 세영은, 드디어 짜증이 폭발해버렸다.

“정말, 뭐냔 말이야!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놈이고 저놈이고 이놈이고! 내가 왜 밤에 이 난리를 쳐야하냐고! 짜! 증! 나!”

그대로 체중을 실은 첫 방. 그 공격에 첫 번째 악수가 머리에 배트 풀스윙을 맞고는 찍소리도 낼 틈 없이 학교 벽에 부딪쳐 튕겨나갔다. 그리고 그 가려지는 시야 사이로, 두 번째 녀석이 튀어 나왔다.

“넌 뭐야! 이 부장 같은 녀석이!”

적어도 세영에겐 엄청난 욕(?)을 들은 악수는 불만이었는지 발톱을 강하게 내리쳤다.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며 야구배트로 막았지만, 팔이 후들거리는 게 느껴져 하마터면 배트를 놓칠 뻔 했다. 어떻게든 손에 힘을 넣으며, 세영은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리고 뒤로 물러나던 발걸음의 힘을 이용해 자세를 넘어지듯이 크게 낮추고 한 바퀴 돌며, 세영은 배트를 크게 휘둘렀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멈춘 그곳은 정확히 유이의 한발자국 앞.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주군과 그를 지키는 기사처럼 보일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에 마지막 악수가 다시 튕겨져 나가며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유이가 눈을 떴다.

“둘 다, 내 주변으로!”

“드디어 된 거야? 너무 늦는다고!”

유이의 외침과 동시에 세영은 일어서며 유이의 옆에 섰다. 그리고 아픔에 쓰러져있는 현상의 뒷덜미를 붙잡고는 다시 자세를 낮추었다. 그 사이 서서히 일어나는 악수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고통에서 벗어난 현상은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고 느꼈다. 입김도 보이고 말이지. 3월인데. 잠깐, 입김? 그 순간에야 현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얼음의 조각들. 갑자기 주변에 조그만 눈이 얼음조각으로 커져 가는 것을 보면서, 현상은 옷깃을 여몄다. 하아, 하고 숨을 내뱉자 새하얀 입김이 눈에 띄었다. 뭐랄까, 갑자기 냉동실에 들어온 기분인데.

그리고 주변의 악수들의 몸이 천천히 얼어갔다.

특별히 어디서부터다 라고 할 것은 아니었다. 몸에서 얼음이 돋아나듯이, 그렇게 부분 부분씩 얼음이 자라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몸을 가두기 시작했다. 괴로운 듯 풀려나려는 듯 악수는 버둥거리기 시작했으나, 그럴수록 오히려 얼음이 성장하는 속도는 빨라졌다. 빙하기가 다시 도래한 것처럼, 이윽고 마지막 악수의 단말마 외침과 동시에 악수들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얼음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추위가 걷혔다.

“지, 지금, 뭐, 뭐 한 거야?”

얇은 옷을 입고 있었던 덕분에 거의 동사를 경험한 세영의 떨리는 말에, 유이는 머리를 흔들어 트윈테일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뭐, 주위의 액체를 응결시킨 거지. 수증기나 작은 습기를 모아서 말이야. 눈 만드는 거랑 비슷한 요령이야. 지금 내 주변은 자동적으로 반마법(反魔法)영역이 되어서 그렇지, 만약 벗어나 있었으면 똑같이 얼음 기둥이 되었을걸? 여하튼 나라고 강한 마법 못 쓰는 게 아니야! 단지 주변 기 흐름 등에 간섭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그런 유이의 외침을 무시하며, 현상과 세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중에서 얼어붙던 얼음들은 바닥에 쌓여 달빛에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얼어붙은 악수들의 얼음 조각상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이대로 냅두는 건 아니지?”

“뒤처리도 해야지.”

그리고 유이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얼음 조각상들이 가루가 되며 부스러졌다. 물론, 안의 악수도 같이. 공중에 가득한 얼음가루들이 달빛에 반짝거리고 달빛을 일그러트려, 마치 오로라라도 핀 것처럼 주변이 아름답게 물들었다.

“이로서 또 한건 해결, 이네.”

그 목소리에는 만족감과, 자신감과, 피로와, 그리고 걱정이 담겨있었다.

유이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세영은 일어나 허리를 곧게 펴고 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

“저, 저기…….”

“…….”

양 옆에서 서로를 독기 어린 시선으로 마주보는 두 여성 사이에서, 현상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시간은 9시 하고도 반시간쯤 지난 무렵. 위치는 학교 앞 편의점. 늘 그렇듯 아무도 없는 편의점 안에는 네 사람만이 존재했다.

“…….”

눈앞에 컵라면이 다 익던지 불어터지던지 상관도 안하고 세영을 노려보는 유이와,

“…….”

눈앞의 따끈한 캔 커피가 식든 얼든 신경도 안 쓰고 유이를 노려보는 세영과,

“그, 그러니까 우리 말로 좀……. 응?”

애매한 청량음료 한 캔을 반쯤 마시다 남겨둔 채, 두 여성의 눈빛 싸움을 어떻게든 저지하려는 현상, 그리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 사태를 관찰중인 편의점 알바.

그래, 댁 입장에선 재미있어 죽겠지. 곁눈질로 주말드라마를 보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알바를 보며 현상은 생각했다. 조금만 오해하면 양다리 걸치다가 그게 들통 나서 달밤의 편의점에서 삼자 회담이 열린다고도 볼 수 있는 광경이니까. 하지만 거기 알바 아저씨, 아니 형. 이게 차라리 그렇게 귀엽고 화목한 분위기라면 차라리 낫겠지. 하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뭐랄까,

학교 최고의 성질배 여성과, 학교 최고의 재수 없는 여성과의 대결이랄까?

“너, 그래서 도대체 뭐야?”

세영의 한마디에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몸을 숙였다. 근데 내가 왜 쪼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움추린 몸을 펼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하아, 하고 한숨을 쉬고, 유이는 그 한숨에 더욱 화가 난 세영을 바라봤다.

“너, 다 아는 거 아니었어? 아까 오전에 그건 뭐였어 그럼.”

“너 같으면 그런 황당한 소리를 믿겠어? 단지 이 얼간이가 하도 쪼아대니까 같이 놀아준 거지. 설마하니 진짜라고 생각하겠어? 그래서, 아까 그건 뭐야? 그보다 넌 누구고, 왜 저런 게 학교에서 돌아다니지? 왜 현상이는 끌어들인 거야. 왜 어쨌든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도 학교는 멀쩡하고 주변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말이지.”

세영의 속사포 같은 말에, 유이는 아무 말 없이 세영을 노려봤다. 세영이라고 그 눈빛에 지지 않고 같이 노려봤고, 그 상태로 꽤나 긴 시간 동안 공중에서 두 갈래의 안광 빔은 서로의 힘을 씨름 질했다. 그리고,

“한번 이야기 했던 거 또 하는 건 싫은데……. 좋아,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대신 말하기 전에 너한테 약속 받을게 있어.”

한숨을 쉬고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후, 유이는 손을 더듬어 늘 가지고 다니는 색(sack)에서 한 장의 서류와 펜을 꺼냈다. 아, 안되는데. 저건 그다지 좋지 못한데.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현상과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세영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게 뭔지는 대충 이 옆의 얼간이에게 들었거든? 내가 어째서 그거에 사인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좀 들려주실까?”

“두 번이나 얼간이는 좀 심하잖……. 알았어. 입 다물 테니까 노려보지 마.”

찌그러지는 현상에게서 눈을 돌리고, 세영은 다시 유이를 노려봤다. 계약서와 펜을 내려놓고, 유이는 팔짱을 낀 채 세영을 보면서 말했다.

“사실 나도 그다지 하고 싶지 않거든? 계약은 한명이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세영의 새된 목소리에 유이는 컵라면 뚜껑을 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마 안에 들어있는 우동면발만큼 퉁퉁 불은 면발을 봐서 그렇겠지. 어떻게든 면발이 끊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유이는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다시 신경질을 내고 있는 세영을 곁눈질 하며 말했다.

“현상 경우랑 똑같은 거야. 경험이랑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함부로 삭제할 수가 없단 말이야. 잘못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수도 있으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지금 갑자기 네 기억을 조작하면 그와 연관된 사고나 현실, 행동까지 전부 얽혀서 더 복잡해진다는 거지. 그러니까 적당히 아까 오후에 그만뒀으면 좋잖아. 피차 귀찮게 원. 여하튼 내용은 현상이랑 똑같아. 발설 안하고, 매일 밤에 오고,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친하게 지내면 끝. 어려울 건 없어.”

“거부한다면?”

“미안하지만 거부권은 없어.”

딱 잘라 말하는 유이의 말에 세영은 눈초리를 추켜올렸다.

“그딴게 어디 있어. 난 거절이야. 여기까지 휘말린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 떠들고 다니진 않겠지만 이 이상 얽히기도 싫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간단하게 가능한 일이면 처음부터 여기에 사인하라고 계약서 꺼내지도 않아.”

다시 한 번 머리 위에서 맞붙는 두 줄기의 레이저에, 현상은 침을 삼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운터의 알바생이 작게 성호를 긋는 것이 보였다. 아아, 고마워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울 듯한 표정으로 현상은 시선을 둘 곳과 자세를 결정하지 못한 채 생각했다. 이런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 차라리 그것처럼, 그리고 저기 알바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맨틱한 분위기면 차라리 낫겠지. 도대체 이게 뭐야. 아니, 아까도 이건 고민했잖아. 다시 사고의 루프로 돌아가려는 정신을 흔들어 깨운 후, 현상은 일단 양쪽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 자. 일단 진정하고.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좀 더 들려줘도 되지 않겠어? 나한테도 간단한 이야기 정도는 들려줬잖아. 응? 그리고 나도 궁금한 것도 있고. 일단은 이걸로 휴전하자고.”

“…….”

잠시 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침묵. 미간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뻘쭘한 미소를 지은 현상만이 이도 저도 못하게 된 순간, 둘은 어깨에서 힘을 빼고 ‘흥’ 과 ‘쳇’ 정도의 소리를 서로 내뱉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현상은 저쪽을 보며 컵라면 국물을 마시는 유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늘은 세 마리나 튀어나온 거야? 지금까지 나오던 큰놈은 어디가고.”

“세 마리가 아니라 네 마리였어.”

퉁명스럽게 내뱉는 유이를 보며, 현상은 고개를 까닥였다. 뭔소리야 이녀석은. 분명 복도에서 만난 건 세 마리였다고.

“내가 왜 늦었을 것 같아? 오는 길에 구교사에서 한 마리를 처치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오늘은 이걸로 끝인 줄 알았던 거고. 여하튼 사태가 좀 이상해. 두 가지 정도.”

“잠깐, 그 전에 난 기본 전제 자체도 설명을 못 들은 것 같은데. 나도 관계자라고 우길 생각이라면 그 정도는 들려주지?”

아까의 화가 아직 안 풀린 건지 대화의 주역에서 밀린 게 분한건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세영에게, 현상은 간단한 상황정리를 했다. 매일 밤에 나타나는 악수와 악수의 정의, 그리고 유이의 소개.

“그래서, 진짜 마법소녀라고?”

“정확히는 국제 마법사 연맹 대 악수(惡獸) 퇴치부대의 2급 전투원. 단독 전투 허가증 소유에 2종 상급 마법사용 허가증을 지닌 여성 전투원.”

“뻥치는 거 아니지?”

“뭣하면 증명서라도 보여줘?”

“됐네요 그딴건.”

김이 빠졌다는 듯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유이를 보고, 세영은 관심 없다는 투로 턱을 괴며 현상에게 눈짓을 줬다. 알았으니까 진행하라는 소리. 뭐 나중에 설명해주면 되겠지. 갑자기 침착해진 분위기로, 현상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아까 물어본 거지만, 첫 번째로, 왜 갑자기 세 마리나 튀어나온 거야? 지금까진 큰 녀석만 나와서 난 당연히 그런 녀석만 나오는 줄 알았고 네가 특별히 안 그렇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말이지.”

“애당초 물어본 적도 없잖아.”

“…….”

나름대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마냥 멋지게 말해보려고 했던 현상은, 은근히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대사 같은 유이의 말에 한방에 정신적으로 넉다운 당해버렸다. 당당하게 굳어버린 그 모습을 보면서, 유이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과 말투로 말을 시작했다.

“말했잖아. 악수라는 건 ‘악의’ 가 모여서 되는 거라고. 일정량 이상이 모이면 생성이 시작되는 거야. 그때부터 많은 양이 모이면 크고 강한 놈이 나오고, 조금만 모이면 작은 놈이 나오는 거지.”

다운 당한 현상과는 다르게, 관심 없다는 투였지만 세영은 귀를 기울이고 유이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유이의 귀찮다는 표정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어떤 점이?”

세영의 질문에 잠시 세영을 바라보다가, 기가 죽은 듯이 식탁에 턱을 대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현상의 눈길에 피식 웃고는, 유이는 다시 날카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예전에 한번 말 했던 것 같은데, 악수는 그 날 모인 ‘악의’ 가 발현되는 거지. 때문에 나타난다고 해도 하루에 한 개체 정도만 나타나는 게 보통이야. 그리고 그 양도 미비하지. 사실 첫날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많은 양의 악의가 며칠 동안 계속해서 모일 리가 없어. 누군가의 강렬한 적의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그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이래봬도 그런 건 느낄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매일 악수가 커다랗게 나타나는 게 수상하다?”

“애당초 악수라는 존재가 비정상적인 존재니까. ‘악의’ 라는 게 실체를 가질 정도로 모이려면 얼마나 많이 모여야 할 것 같아? 보통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이 세상이 이렇게 제대로 돌아가는 것만 봐도 알 것 아니야? 그런데 갑작스럽게 이렇게 많은 양이 매일매일 모인다는 건 어불 성실이야. 거기에 이번엔 거대한 한 마리가 아니라 작은 여러 마리로 나타났어. 즉 악의가 모이는 포인트가 여러 곳이라는 뜻이지. 하지만 그렇다면 앞의 며칠도 그런 식으로 나타났을 거야. 즉, 오늘의 이 일은 많은 양을 가지고 누군가 분할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게 더 설득력이 높지.”

“즉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요 며칠 동안의 일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

“거기에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개입을 하고 있다고 까지 보는 게 옳겠지.”

거기까지 말하고, 어느새 대화의 중앙에서 밀려난 현상을 버려둔 채 세영과 유이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둘의 눈빛은, 어느새 처음의 으르렁 거릴 때와는 약간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져있었다.

“그럼, 쭉 현상이만 노린 것도?”

그 말에, 어느새 소외되었다는 느낌에 손톱을 차례차례 바라보던 현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어째서 나만 노리는 거야? 생각해보면 예전도 이상해. 왜 그 커다란 놈이고 작은 놈들이고 날 노리는 거야? 난 평범한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 정신 건…… 강한 고등학생이라고. 도대체 왜? 어째서?”

요즘을 생각하면 자신 있게 정신 건강하다고 말하긴 미묘해서 말이 흐려지긴 했지만, 여하튼 난 정상적인 소년이라고. 그리고 유이는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캔을 흔들며 말했다.

“그 이유를 모르겠어. 특별히 이 녀석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비정상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자연적으로 튀어나왔다, 라고 한다면 주변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붓거나 아니면 나 같은 마법사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격할 텐데, 현상이만 노린다는 건 지금까지의 걸로는 대답이 안 돼. 그러니까 현상이를 노리는 게 또 다른 누군가가 의도해서 만들고 있다는 증거도 되겠지. 하지만 그 목적을 모르겠어. 누군가 이놈의 목숨을 노릴 이유가 없잖아. 너, 원한 같은 거라도 산 적 있어? 누가 이런 비정상적인 방법까지 써가면서 노릴 정도로.”

“있을 것 같냐 그런 거. 도대체 뭘 어떻게 원한을 사면 이런 방식으로 내 목숨을 노릴지 내가 궁금하다.”

“그렇지? 그러니까 도대체 뭐가 목적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누군가가 뭔지 모를 이유로 여기서 뭔지 모를 목표를 가지고 악수를 소환한다고 해도 현상이를 노리는 이유는 뭔지 모르겠고 그 이유도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니 더 돌겠지. 차라리 뭔지 알겠으면 그 뭔지 알겠는걸 계산하면 될 텐데 전혀 그런 게 없다고.”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세영의 말에, 유이는 결국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아, 몰라! 난 마법사지 탐정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 건 인터넷 지식 란에 물어봐! 여하튼 지금 중요한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곳에서 악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고, 그 목적도, 누가 하는 건지도, 왜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거야!”

“잠깐! 좀 조용히 좀 해! 저기 카운터의 알바가 들을지도 모른다고!”

유이의 목소리에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세영과 현상과는 다르게, 유이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의아한 현상과 세영이 움직임을 멈추자, 그제서야 유이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그런 것도 모르겠어? 아까 중요한 이야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 주변 2m는 전투공역으로 설정해놨어. 밖에서는 안에서 뭔 난리를 쳐도 안보이고 안 들릴걸. 뭐, 그러면 역으로 의심할 테니 장난 좀 쳐놨으니 그 점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 말에, 세영과 현상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확실히 알바는 아까부터 이쪽에서 악수니 악의니 마법사니 어쩌니 하는 누가 들으면 의사를 부를 이야기를 나눔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흔들어보고, 팔을 흔들어보고, 깡충깡충 뛰어보고, 괴상한 춤을 추기 시작하는 현상을 정신 속에서 지워버린 다음, 세영은 이마를 감싸 쥐고 흔든 다음 현상의 괴상한 춤을 보고 폭소하고 있는 유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전투공역이라는건 뭐야? 그러고 보니 오늘 말고 전에는 커다란 녀석들하고 싸운 것 같은데, 어째서 그걸 주위 집이나 행인들이 모르던 거야?”

“음, 뭐라고 설명하기 좀 힘들긴 한데…….”

잠시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던 유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다.

“전투공역은 마법사 주위 일정 지역에 둘러지는 일종의 결계야. 뭐 물리적인 저지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밖에서 안의 상황을 알 수는 없지. 만약 니가 밖에서 안으로 돌을 던진다고 하면, 갑자기 돌이 사라진 걸로 보이게 되는 거지. 안으로 들어간 물체는 안보이니까. 그리고 그거에 의아해서 가까이 다가와 경계선을 넘는 순간, 갑자기 악수와 싸우는 전투요원이 보이는 거지.”

“헤에, 편리하네. 이런 것에도 사용 가능해? 근데 해제는?”

세영의 감탄에 이어 나온 질문에, 유이는 씩 웃고는 여전히 창피한 줄도 모르고 괴상한 춤을 추는 현상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현상을 본 세영은, 다시 유이를 보고, 눈빛으로 말했다. 해버려. 오케이.

예전부터 이런 일 한번 해보고 싶었지. 사람 앞에서 뭔가 괴상한 일을 해보는 것. 어쩌면 부장에게 전염당한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뭐,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이쪽을 보지도 못하는데. 그리고 그 순간, 알바생이 만화책을 덮었다. 다 읽은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잖아. 보이지도 않는데. 등 뒤에서 여성 두 명의 웃음이 들리든 뭐든 뭔 상관이냐. 그리고 알바생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현상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약간 움찔하면서도, 여전히 반응 없는 알바생의 표정에 현상은 더더욱 기가 살았다. 역시 안 보이는 거구나.

“…….”

그리고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왠지 뭔가 어색해져서 차렷 자세로 돌아왔다.

“……풉.”

설마하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발광하듯이 웃는 두 명이 보였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알바생의 입이 결국 움직였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ㅡ!

 

“기운 내봐.”

여전히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자신의 어깨를 잡는 세영의 손에, 다시 열이 뻗쳐버렸다. 손을 쳐내고 앞으로 튀어나가며 현상은 아동용 만화의 매편 당하는 악당처럼 외쳤다.

“시끄러. 언젠가 반드시 복수할 테다! 두고 보자 둘 다!”

그 모습에 다시 폭소를 시작하는 두 명을 보고 다시 이마의 힘줄이 돋아 올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현상은 애써 참았다. 웃음을 참으며, 유이는 너무 웃어서 나온 눈가를 닦고는 말했다.

“아아, 실컷 웃었다. 설마하니, 설마하니……. 푸하하하하!”

“뭐, 너무 불쌍하니까 그만 웃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하는 세영의 말에, 유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상이 방금 전의 사건으로 알바생의 장난감이 된 뒤부터는 평범한 일상 회화를 나눠서인지, 둘은 나름대로 친해진 모양이었다. 현상이 보기에도 아까처럼 불꽃이 튀는 일은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네.”

막 생각났다는 투로, 유이는 손을 뻗어 엉덩이 부분의 색에서 접은 종이와 펜을 꺼냈다. 세영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약간 움찔 하긴 했지만, 유이도 당당하게 종이를 펼치고 펜과 함께 세영에게 내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써야한다고?”

말없이 끄덕. 어째서인지 약간 긴장하는 분위기도 났다. 세영은 별다르게 대꾸를 하지 않고, 접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어두운 거리에서 작은 글씨를 봐서인지 약간 눈을 가늘게 뜨고, 세영은 종이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세영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종이를 돌려줬다.

“미안하지만, 쓸 수 없어. 이런 조건 받아들일까보냐.”

그 말에, 유이는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무슨 일이 있어도 써야…….”

“됐어. 그런 거 필요 없어.

딱 잘라 말하는 세영의 말에, 유이는 양손을 꽉 쥐었다. 세영은 그걸 보면서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뭐든 그렇게 안달하지 마. 천천히 해도 되잖아?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다급한 것도 아니고. 사인은 안하지만 앞으로도 어울려는 줄 테니까.”

“에?”

놀라는 유이의 얼굴을 보며, 세영은 씩 웃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 뭐, 저녁에 잠깐 나오는 거야 쉽겠지. 말했다시피 이거에 관련된 이야기도 안 할 테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계약은 안하겠지만 내용은 그대로 지켜 줄 테니까.”

“뭐야, 그럼 계약 하나 안하나 똑같은 거 아니야.”

“거기 계약서도 안 읽은 바보는 입 다물고.”

뭐야, 계약서도 안 읽었다니. 뭐가 어떻기에 그러는 거야? 자기는 앞뒤도 안 맞는 말이나 하면서. 투덜거리는 현상을 무시하고, 세영은 유이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다. 잠시 후, 그 말에 유이가 급격하게 굳는 게 보였다.

“뭐, 그럼 내일 밤에 보자. 주말 잘 보내~.”

“아, 주말 잘 보……. 잠깐, 왜 나까지 끌고 가는 거야?”

굳은 유이를 남겨두고, 세영은 발버둥치는 현상의 팔을 잡아끌었다. 편의점 창문에서 나오는 빛이 비춰주는 거리에 홀로 남은 유이가 점점 멀어지는 게 보였다. 골목을 돌아 곧 사라졌지만.

“야, 야! 팔! 팔 좀 놔라! 안 그래도 따라 간다니…….”

그 정도까지 말한 순간, 세영은 미련도 없다는 듯 매정하게 현상의 손을 놓고 걸어갔다. 뭐야 도대체. 투덜거리며 현상은 약간 발걸음을 빠르게 해 세영의 옆에 나란히 섰다.

“……쿡!”

“……아까 그게 아직도 웃길 정도로 그렇게 웃기냐?”

“어라? 너 언제 옆에 왔어?”

“……아냐, 됐다.”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 세영의 얼굴을 보고, 현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다시 작게 웃고는, 세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역시 별이 많네.”

“여긴 이래봬도 도시보다는 촌에 가까우니까. 신도시인데다가, 외각이기까지 하잖아.”

“너도 참 여자한테 인기 없을 타입이다.”

“……자주 들어.”

퉁명스러운 자신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현상의 말에 다시 크게 웃음을 터트린 다음, 세영은 퉁퉁 불은 현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저 녀석, 생각보단 재미있는 녀석이야.”

“나쁜 녀석은 아니지. 날 가지고 논다는 점만 빼면.”

“그것도 합쳐서 하는 말인데?”

“…….”

고개를 내려 소리 없이 꿍얼대는 현상을 보며, 세영은 조용히 말했다.

“저 녀석에게 좀 잘 대해. 휘두를 때도 좀 휘둘려지고.”

“엉? 내가 왜?”

“하라고 하면 해!”

“네가 죽으라면 죽어야하냐!”

“쳇, 재미없다니까 정말. 다른 대답도 아니고 말이야.”

현상의 지적에 김이 빠졌다는 듯 툴툴거리며 걸어가는 세영을 보며, 현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발이 빨라진 세영을 쫓아가며 왜 화났냐고 묻는 눈치도 없는 짓을 하는 현상과, 그런 현상에게 살며시 강렬한 로우킥을 날리고 달려가는 세영의, 다정하다면 다정한 모습이 보기 좋은 꼴로 어두운 거리를 가득 매웠다.

보는 사람은 전봇대 위의 한사람뿐이었지만.

Writer

호성軍

호성軍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친구 우리들의 친구 게으른 호성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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