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3. 위기ㅡ댓째 날. “뭐야ㅡ 그런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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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46 May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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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호성軍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7일에 한번 돌아오는 날이 있다. 그 날은 신의 날이라고도 하고, 단순히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라고도 한다.

일요일이다.

뭐, 중요한건 이 날이 인간의 기준으로 일요일인지 어쩐지 하는 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편성되는 7일제의 1주일 안에서, 이것은 약속된 승리의 날 이라는 점이다.

노는 날이다.

때문에 현상은 침대에서 정말로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애당초 잠이 많은 편도 아닌 전형적인 야행성 고등학생이건만, 왠지 어제는 늦게 들어온데다가 왠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겠는 우그러진 데다 상처투성이에 구멍까지 뚫린 야구배트를 가지고 왔다고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듣는 그 순간부터 벌써 의식의 80%는 본부의 명령을 듣지 않고 맹렬히 잠으로 투항해갔다. 아마 이번 주 내내 마음도 몸도 피곤해서겠지, 하고는 꿈결에 하는 것 치고는 냉정한 판단을 내리곤, 그대로 일요일이라는 이점을 이용해서 수마(睡魔)와의 찐한 데이트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높은 곳에 떠올라 다른 사람들은 슬슬 하루의 두 번째 식사메뉴를 고민할 시간쯤, 정말로 죽은 듯이 깊은 잠을 자는 현상의 귀에,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말해줘~ 말해줘~ 말말말말해줘~ 나를 사랑한다고~ 날 원하고 있……. 삑.’

“거 참 시끄럽네…….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누군진 모르겠지만 지금 김현상은 잠들어서 이 자리에 없으니 나중에 다시 전화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짜증 농도가 포화치 이상이라 적출돼서 나올 정도의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현상의 귀에, 몹시 경쾌하고 기분 좋은 듯 하면서도, 그래서인지 그 때문인지, 정말로 ‘더럽게’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구만. 이 귀중한 쉬는 날을 잠이라는 행위로 낭비하고 있는 건가 자네는. 이 일요일에도 굵고 아름다우며 영롱하게 빛나는 노동의 땀방울을 흘리는 이들이 쉬는날을 간절히 원하는 목소리가 이 봄날의 대지에 가득하건만, 그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자네는 그렇게 영양가 없는 일에만 종사하고 있을 것인가. 그만 정신줄을 다시 붙잡고 그 무의식의 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거 참 시끄럽네요. 그리고 누구나 휴식은 필요한 법 아닙니까. 제발 좀 자게 내버려둬요. 어차피 뭐 중요한 일도 아닐 거 아닙니까. 끊어요.”

“아아, 잠깐! 잠깐 기다리게! 원 자네도 잠에만 취하면 사람이 인사불성으로 변하는구만. 혹시 성인이 되거든 술은 꼭 삼가도록 하게.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과음은 신체와 정신 양면에 위험하니 말일세. 약간의 음주야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할지도 모르지만, 자네의 경우에는 그에 따르는 리스크가 너무 클”

“진짜로 끊습니다.”

“잠깐 기다리라니까!”

도대체 뭐야 이 사람은. 난 졸려 죽겠단 말이야. 현상은 온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하도 시끄럽고 제대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슬슬 잠이 깨오고 있었다. 안 돼, 깨면 안 돼. 난 피곤하단 말이야. 졸리고 잠이 필요하다고.

“자네, 오늘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을 예정인가?”

“예. 하루 종일 침대에서 잘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내일 뵙죠.”

“거 참 너무하구만. 아무리 잠에 취했어도 그러면 안 되는걸세. 그렇게 원한다면 용건만 말해주지. 오늘 신입회원 환영회를 할 예정이니 준비해서 나오게. 장소는 카페 ‘라임Ryme’. 30분 줄 테니 그 안에 준비해서 나오게. 이상.”

“잠깐만요! 끊지 마요!”

“뭐야, 언제는 끊으라더니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자네. 도대체 뭔지 확실히 말하게.”

부장의 대놓고 짜증난다는 목소리에 현상은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며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까는 자는 걸 방해하는 내용이었고 지금은 다르잖아요! 뭐에요 갑자기 환영회니 뭐니! 알아듣게 설명을 좀 해봐요!”

이 양반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되는데. 문뜩 잊고 있었던 생활의 지혜가 떠오르는 것에 현상은 약간의 두통을 느꼈다. 혈압도 안 높은데 뒷골이 왜이리 땅기지. 그러고 보니 아까랑 상황 정 반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부장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늘 해오던 행사 아닌가. 신입회원 환영회. 이번 달 초에도 했으면서 뭘 그렇게 놀라는 건가.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작가가 새로 우리 부서에 들어왔으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를 우리의 새로운 일원으로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열렬한 환영회를 열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뭐 원래는 어제 부활동 시간을 이용해서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자네들이 아주 멋지게 나의 계획을 파토내준 덕분에 오늘이 일요일이니 하게 된 거지. 어제 환영회를 위해 사둔 과자나 음료수 등은 뭐 예비식량으로 내버려두기로 하고, 그런고로 오늘 카페 ‘라임’에서 환영회를 열기로 계획했으니 당장 잠에서 깨서 집합하게. 복창.”

“예. 복창. 당장 준비하고 카페 ‘라임’으로 집……. 합이 아니잖아요!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현상의 외침에 부장은 깊은 한숨을 쉬고는 여전히 귀찮고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드는 생각이지만 거 참 시끄럽구만.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건가. 어떻게 하면 갑작스러움이 사라지겠나. 애당초 자네가 이 사건을 두고 갑작스럽다는 건 사전 통보를 안했다는 것 아닌가. 이제 와서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사전 통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결국 그런 불평은 의미 없는 것 아닌가. 거기에 여하튼 난 집합 시간 전에 통보를 했고 이는 엄연히 사전 통보의 영역에 속하는 행동일세. 추가로 말하자면 어차피 침대에서 시간을 죽일 바에는 나와서 같이 노는 게 대인관계 등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뭐, 그런고로 당장 준비해서 나오게. 이상. 아, 지각하거나 결번하면 뒷일을 기대 해봐도 좋을걸세. 이상.”

뚝. 뚜뚜뚜뚜뚜뚜…….

“잠깐만요, 여보세요? 여보…….”

쓸데없다는 걸 아는데도 계속하는 저항은 슬프다. 그 사실을 깨달은 현상은 입을 다물고 핸드폰을 닫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러움과 두통에, 현상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신입부원 환영회라…….”

신입부원. 이름은 듣기 좋지. 문제는 엮인 다음 한 번도 좋은 기억이 없는 신입부원이라는 것 정도이려나. 그렇군. 페이크든 뭐든 정식 부입이다. 그 부장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 하하. 하하하.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작가라. 확실히 자기 이야기만 써도 소설이겠군. 좀 부럽기도 한데.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근데 저 녀석이 언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되어 버린 거야.

현상은 갑자기 온몸에 피로감을 느껴 몸을 돌려 침대에 얼굴을 깊게 파묻었다. 그냥 이대로 자면 안 될까?

 

카페 ‘라임Ryme’.

평산역 앞의 번화가에 위치한, 어디의 가맹점도 아닌 오리지널로서, 젊은 20대의 사장과 여종업원, 그리고 파트타이머 몇 명이 운영하고 있는 특별할 것 작은 카페이다. 커피나 차는 꽤나 맛있어서 주변 지역의 마니아들까지도 찾아올 정도지만, 직장인 K모씨에 의하면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맛이 있는 것도 아닌’ 경식 때문에 ‘차라리 경식을 빼고 커피의 종류를 늘려라’ 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그렇지만 사장의 ‘내 요리를 먹어!’ 주의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한, 알고 보면 은근히 미묘하게 복잡한 카페. 그리고 그 복잡함의 한 포인트를 차지하는 게 바로 이 카페가 세평고교 문학부의 스폰서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어라? 먼저 와있었냐?”

자신에게 들려오는 말에 현상은 여전히 턱을 괸 상태로 힐끔 하고는 식탁에 앉으려는 상대를 바라봤다. 점심시간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워낙 악명 높은 맛을 자랑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깔끔하고 고풍스럽다면 나름대로 깔끔하고 고풍스럽다고 할만한, 즉 여전히 미묘한 카페 내부에 있는 사람이라곤 현상과 서너 명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중에서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이 환호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 알바냐.

“어, 뭐야 태열이 너냐. 나머지는?”

“엉?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난 그냥 부장한테 연락 받고 시간 맞춰서 좀 전에 온 건데? 근데 그 빈 쥬스잔은 뭐냐?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한 시간 전.”

여전히 턱을 괴고 창밖으로 역 앞 번화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대답하려던 현상은 깨달았다. 역시 그 양반이 엿 먹인 거구나, 하고. 되로 받으면 말로 갚는 양반 같으니. 이른 아침, 그것도 일요일 아침의 단잠을 방해 받아서 신경질 낸 것도 죄야? 그런 것 가지고 한 시간을 기다리는 고문을 가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세 번째 쥬스잔을 비우려던 현상은, 그제야 눈앞의 상대가 늘 보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열은 스스로 자신을 ‘대한민국의 덕있는 인간’으로 인정한다. 몹쓸 청소년의 정의는 2D 세계에 빠져있는 존재를 의미하니 스스로 자기 체크를 해보세요. 여하튼, 그 신분 성격에 걸맞게 태열은 늘 후줄근한 복장과 후줄근한 차림, 그리고 눈을 가리는 더벅머리를 자랑한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상대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일단 복장이 세련되었다.

나름대로, 아니 상당히 깔끔하고 쫙 빠진 세련된 복장. 유행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살리는 것을 잊지 않는 센스. 센스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맞춘 듯이 잘 맞아 떨어지는 복장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런 복장이면 돈도 제법 들였겠지. 아니 그보다 이런 사람을 누가 덕있는 군자라고 생각하겠냐. 현상은 자신의 캐쥬얼한 차림새를 보면서 생각했다. 봐라, 굳이 말하자면 이게 그런 종류의 인간의 복장이라고. 저런 복장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다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머리가 깔끔하게 잘려있었다.

단순한 의미로 짧게 쳤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전의 지저분한 머리에 비하면 깔끔하다는 뜻. 굳이 말하자면 한창 유행을 누리고 있는, 그런 화려해 보이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버해서 표현함으로서 불량한 이미지 등을 주는 게 아니라, 적당히 절제하면서도 세련되고 첨단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들어난 얼굴은 의외로 괜찮은 외모였다. 아니, 괜찮은 게 아니다. 등급제로 치자면 적어도 2등급 이상의 점수를 받을만한 얼굴. 평범한 자신의 얼굴과는 그 근본 자체가 달랐다. 날 봐라. 그에 비해 저건 뭐냐. 저런 얼굴을 지금까지 그 머리로 가리고 있었던 거냐. 도대체 뭐야.

“너, 누구야.”

“엉? 뭔소리야.”

벌떡 일어나 남은 쥬스를 벌컥벌컥 하고 들이키고는 쾅,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잔을 식탁에 내려치며, 현상은 외쳤다.

“뭐야! 그 옷과 머리와 얼굴은! 내가 알던 사나이 성태열은 그런 사나이가 아니야! 옷은 후줄근, 머리는 덥수룩, 얼굴은 미지수, 그러나 상상 보정에 의하면 적어도 잘생긴 얼굴은 아님! 그런 대인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인 이미지를 왜 뿌리부터 다 박살 내냔 말이야! 넌 도대체 누구냐! 선도부의 스파이냐!”

“어째 넌 날이 갈수록 부장을 닮아간다? 알았으니까 앉아. 주변에서 다 쳐다보잖아. 아, 종업원 누님, 저는 탄산음료로 주세요. 종류는 상관없어요.”

“말 갑자기 돌리지 마! 그보다, 정말 뭐야 그 차림은! 어떻게 사람이 토요일 하루 못 봤다고 그렇게 바뀐 거야? 그날 빠지고 뭘 한 거야?”

그 말에, 평범을 가장하던 태열의 얼굴이 약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시, 시끄럽다니까! 너랑 상관있는 이야기 아니잖아!”

“있어! 내가 궁금하니까 있는 거야!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그 변신 방법이 있다면 나도 제발 좀 듣자!”

“젠장……. 일찍 오지 말고 다른 애들이랑 같이 올걸…….”

머리를 벅벅 긁으며 붉어진 얼굴을 이리 저리 돌리고, 컵에 담겨 나온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 다음에야, 태열은 입을 열었다.

“이 일 입 밖으로 내면 가만 안 둔다.”

“내 입은 모두의 예상보다 꽤나 무거운 편이라서 말이지. 괜찮아. 불어봐.”

 

 

“하아.”

토요일 3교시. 마지막 시간. 하필이면 재수도 없어서였을까, 소년의 반은 체육이었고, 때문에 소년은 체육복을 입고 3월의 겨울이라고 해도 믿을 추운 날씨에 몸을 잔뜩 움추린채, 체육복을 입고 축구 코트 외각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성태열. 학년은 고등학교 2학년. 복합적인 이유로 교실에서는 본격적 아웃사이더의 정도를 걷고 있는 사나이.

졸음의 공격을 어떻게든 피하며, 태열은 멍한 얼굴로 운동장을 둘러봤다. 어차피 공이 이쪽으로 올 리도 없고, 그렇다고 심심한 심정을 누를만한 재미난 꺼리나 친구도 없는 고로, 결국 할 일은 추위에 나오는 입김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태열의 시선이 한 점에 고정되었다.

여학생들의 발야구가 펼쳐지는 운동장 구석.

뭐 정석이라면 정석대로, 자유체육에 가까운 체육시간은 남학생은 축구, 여학생은 발야구라는 행위로 불살라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특별할 것도 없는 고로 사실 시선이 정지할 이유도 없었지만, 단순히 심심해서 할 일도 없다는 이유 외에도 오늘은 태열의 시선을 집중시킬 무언가가 있었었다.

타석에 들어선 선수들을 응원하는 다른 여학생들과는 떨어져서, 혼자 조용히 벤치 구석에 앉아있는 한 소녀. 이틀 전에 해외에서 전학 왔다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소녀였다.

외관부터 느껴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력, 그리고 내면에서도 풍겨 나오는 압력 때문에, 소녀는 전학 이틀 만에 당당한 여성진 아웃사이더가 되어있었다. 뭐, 내 알바는 아니긴 하지만. 태열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옆자리에 앉은 저 소녀는 자신을 포함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한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름이 이예나라고 했었나. 새삼스럽게 이름을 떠올리며 태열은 아예 축구경기에서 관심을 끊고 발야구 경기장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리고 타석에 섰던 여학생이 파인플레이(Fine play)로 안타깝게 아웃을 당하던 바로 순간, 태열의 눈에는 나름대로 그녀를 제외하면 화목한 분위기를 내고 있던 여학생들 사이의 공기가 바뀐 것으로 보였다.

여학생 몇 명이 예나를 보고는 뭐라곤 가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녀들은 화를 내고, 예나를 떠밀다시피 해서 타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야유의 느낌이 강렬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뭐, 그런 거군. 쓴웃음을 지으며, 태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학 오던 첫 시간, 예나는 자신의 몸이 약하다고 했고, 그에 선생님은 예나에게 체육을 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꾀병이 아니라, 실제로 그녀는 이틀 사이에만 해도 두세 번은 양호실을 다녀왔다. 하지만 여학생들의 눈 밖에 난 처지에서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어쩔 줄 모르고 움찔움찔 하던 그녀의 앞으로, 배구공이 빠르게 바닥을 치며 스쳐 지나갔다. 원 스트라이크. 야유와 비웃음의 소리가 올라간다. 다시 한 번, 이번에도 여전히 예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투 스트라이크. 야유와 비웃음의 소리가 절정에 다다른다. 발을 휘두르라는 어떤 의미로는 조언이라고 할 수 있는 말에서, 말로 옮기기도 싫은 비난까지. 그리고 제 3구. 예나는 발을 휘둘렀다. 타이밍은 정확했다. 단지 방향과 각도가 틀렸을 뿐.

그녀가 발을 잡고 쓰러진 건 순간이었다.

절정에 다란 여유와 비웃음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이윽고 한명 두 명씩 웃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선생님을 부르러 뛰어가고, 몇 명이 가식스럽게도 예나에게 다가가 부축하려는 순간, 한명의 남학생이 그녀들을 밀치고 예나의 옆에 다가갔다.

“우, 으으, 우으으,”

상당히 아픈지 제대로 말도 못하고 발목을 잡은 채 쓰러진 그녀의 발목을 살피며, 태열은 말했다.

“됐어. 아프면 말 하지 마. 양호실 가자.”

어깨를 들어 목에 걸쳐 부축하고, 태열은 한발 한발 예나의 발목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아픈지 예나의 신음소리가 귓가로 들려오고, 등 뒤에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뭐,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여자는 생각보다 무겁구나. 운동장은 꽤나 멀어서, 둘은 꽤나 오랫동안 운동장을 가로질러 양호실로 향했다.

 

순간적인 정의감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겼다면, 과연 자신의 정의감에 뿌듯함을 느껴야할까 귀찮음과 불만을 느껴야할까.

다행히도 바닥에 정통으로 발을 후려갈긴 것에 비하면 뼈나 인대에 손상도 없이 단순히 발목이 삔 것뿐이었다. 그것도 심한 것도 아니라 아마 하루 이틀이면 완치될 것이라나.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단 오늘 하루는 발을 쓸 수 없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 집으로 데려다줘야 한다는 것인데…….

“왜 하필이면 나냐.”

움찔, 하고 자신의 한숨 섞인 혼잣말에 예나가 어깨를 움츠리는걸 보고, 태열은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옆자리. 처음에 구해줬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태열은 책임지고 예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게 되어버렸다. 여기까지는 좋다. 뭐 그 정도 책임이야 지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 이지, 이건 말이다,

“요즘 애들은 조숙하네.”

“보기 좋네.”

아무리 봐도 누군가의 악의에 찬 계획 아닌가.

교실에서 아웃사이더 둘이 사귀게 되었다던가 하는 소문이 퍼지는 거야 상관없다. 어차피 아웃사이더고, 조금 있으면 잠잠해질 소문이니까. 하지만 여긴 이 마을 최고의 번화가다. 역 앞 거리란 말이다. 참고로 지금 상황은 절뚝거리는 여자애를 부축하며 걸어 나가는 광경. 멀리서는 어깨동무나 팔짱을 낀 것으로 보인다. 어디론가 누구에겐가 뭐라고 외치고 싶은 감정을 억제하면서, 태열은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

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

“아, 저, 저기. 조금만 천천히…….”

“…….”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미, 미안해…….”

“……아냐, 됐어. 미안하긴 뭘.”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

“…….”

침묵.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저, 저기 말이야…….”

“……저, 저기 말이지…….”

화들짝.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머, 먼저 말해.”

“……아, 아냐. 먼, 먼저 말해.”

“으응, 먼저 말해.”

“아, 알았어……. 이쪽 방향 맞지?”

“……응. 아, 저기, 나는……. 그게, 저…….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러네. 안 그래도 내가 하려고 했었어.”

침묵.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이것 참 부담되네. 결국 태열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진정한 의미로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목적지는 역 앞 오피스텔. 거리도 짧고, 어차피 대화도 안 오고 갈 테니까, 이쯤 해두고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가자. 입은 열지 말고. 왠지 서로가 서로를 과하게 의식하다보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으니,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은데.

“그런데, 혼자 사는 거야?”

하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입은 너무 자동적으로 움직여버렸다. 어깨를 걸친 상태로 움찔 하는 예나의 반응에, 태열은 혀를 깨물 만큼 반성했다. 그걸 알아서 어쩌자는 거야. 설마하니 대답을 해줄 리도 없잖아.

“으, 응……. 가족은 없이 나 혼자라서……. 지금은 혼자 살고 있어.”

“……아, 그래.”

“으응…….”

다시 침묵. 태열은 정신적으로 땀을 닦았다. 좋아. 이제 그만 하자. 말 한번 하고 침묵으로 돌아올 때마다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너무나도 기분이 미묘하단 말이야.

“식사나 청소나 빨래 같은 거, 힘들겠네…….”

“아직은 오래 안됐으니까 괜찮지만…….”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 도대체 왜 이러냐. 태열은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머리는 왜이리 제 멋대로 움직이고 갈피를 못 잡는 거야. 심장은 왜이리 두근거리는 거냐. 누가 대답 좀 해줘. 그리고 그런 상태에 하마터면 머리털을 잡아 뽑으려는 순간, 예나가 말했다.

“저기, 도착했는데…….”

“아, 응.”

그리고 둘의 눈앞에 있는 건 역 앞의 오피스텔. 뭔가 거창한 이름이 있었지만 사실 의미는 없고, 그냥 역 앞 오피스텔 하면 다 알아듣는 존재. 나름대로 고층 고급이기 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 해도 호출이 필요하다. 집 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엘리베이터는 이윽고 지정한 층에 도달했다.

“이쯤이면 됐지?”

그렇게 묻는 태열에게, 예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 여전히 음침해 보이는 눈을 가리는 머리(자신의 머리 역시 저런 느낌이라는 것은 태열의 정신속의 암묵적인 비밀이었다)와 목소리, 그리고 소심한 태도였지만, 왠지 거기서 느껴지는 느낌은 이전의 기분 나쁜 느낌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분명 단순하게 모든 일에 소심하고 자신이 없는 타입이겠지. 앞으로는 같은 아웃사이더끼리라도 잘 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예나는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 순간,

“자, 잠깐만…….”

예나의 손이 열림 버튼으로 움직였다.

“데려다준 것도 고마운데,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하지 않을래……?”

“…….”

흔들던 태열의 손이 약간 떨리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잔을 꽉 잡아?”

“아냐. 특별히 후려치려고 했다던가 그런 건 아냐.”

 

아무 이유 없이 정좌를 한 상태로, 태열은 마루 가운데의 테이블에 조용히, 그리고 차분히 홀로 앉아있었다. 방 안을 가득 매운 박스들 사이에 남은 공간은 둘과 테이블 만으로도 가득 매워졌다.

참고로 예나는 옷을 갈아입는다고 화장실로 직행. 덧붙이자면 샤워도 하는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방음도 안 되는 오피스텔 벽을 뚫고 솨아아아 하는 물줄기의 소리가 태열의 귀를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개진채로, 태열은 고개를 화장실 반대방향으로 꺾은채로 넓지 않은 방안을 바라봤다. 지금 여자애 방 안에 들어온 거지? 거기에 여성과 단 둘이서. 덧붙이자면 집 주인은 지금 샤워 중. 우와, 이건 미소녀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같은걸 넘어서 청소년 교육에 지극히 좋지 않은 실사 동영상에 가까운 상황이잖아. 그쯤에서 태열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휘둘렀다. 정신 차리자 정신. 넌 그런 속물이 아니잖아. 겨우 정신을 확보한 태열은 한결 깨끗해진 마음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지금 짐을 푸는 중인지 싸는 중인지도 모르겠는 박스들. 집안은 지금 이 안에서 사람이 산다고는 믿어지지도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정말, 말 그대로 당장 먹고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이 나온듯한 광경. 당장이라도 떠나려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등 뒤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기, 오래 기다렸어?”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약한 김. 헐렁한 티셔츠와 체육복 바지. 그리고 젖어있는 흑발. 영화에나 나올법한 그 외모에 태열의 정신은 가출해버렸다. 급하게 뭔가가 뿜어 나오려던 입과 코를 막으며, 태열은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 아니야. 이, 일단 앉아.”

“으응……. 그런데 어째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이상하다는듯 갸웃거리며, 예나는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털썩.

“…….”

“…….”

조용. 태열이고 예나고 아무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서로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사방을 둘러보기를 한참.

“아, 저, 저기, 일단 물 끓일게. 그러고 보니 먼저 차부터 대접했어야 하는데. 내 정신 좀 봐.”

“아, 아냐. 처, 천천히 해.”

어떻게든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건지 예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에 물을 담고, 그래도 오피스텔이라고 달려있는 조그마한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린 후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

“…….”

조용. 잠시 후 삐익 하고 우는, 옮기기 쉬운 짐으로 보이는 작은 주전자에서 나는 스팀음.

“아, 지, 지금 따라줄게.”

“도, 도와줄게.”

그 소리와 동시에 둘은 같이 일어나 주방(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좁을 공간)으로 걸어갔다. 말없이 태열은 자동적으로 주전자를 불에서 내리고, 예나는 찻잔과 찻주전자를 준비해 그대로 쟁반에 차와 전병을 꺼내와서는 테이블에 놓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에 앉았다.

“…….”

“…….”

조용. 그리고 쪼르륵. 예나가 찻잔에 차를 따르는 맑은 소리가 나고, 약간 후후 하고 분 다음, 둘은 동시에 아직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동시에 헛기침, 그리고 다시 잔을 내려놓고 침묵.

“…….”

“…….”

태열은 결국 이건 아니다 라고 생각해버렸다.

“저, 저기.”

“아, 응.”

결심은 했지만 다시 침묵. 두어 번 입을 열었다 닫은 후에, 태열은 침을 삼키고 마지막 용기를 내보기로 결심했다. 괜찮아. 뭐든지 처음이 힘든 법이야.

“혼자 산다고…… 그랬지?

“응. 안 계셔. 나 혼자야.”

“……아, 그래.”

“……응.”

처음부터 질문을 잘못 골랐다고 태열이 후회하기도 전에, 예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돌아가신 건 아니야. 두 분 다 살아계셔. 단지 같이 살지 않을 뿐이지. 두 분 다 여러 가지로 바쁘시거든. 그래서 우리 가족 세 명은 다 따로 떨어져서 살아. 나도 어려서부터 여기저기로 이사 다니며 살아왔고.”

어떻게든 밝게 말하려던 예나는, 그러나 결국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애들하고 지내는걸 잘 못하겠더라고. 원래부터 소심하고, 취미나 취향도 이상했고. 그래서 혼자 지내는 게 편해졌어. 어차피 같이 지내도 뭔가 어색했으니까. 그래서 일부로 조금 더 이상하게, 조금 더 튀게 나 자신을 꾸미기도 했고. 외로운데도 말이야. 솔직히 애완동물 같은 거라도 키워볼까 했는데, 그것도 왠지 적성에 안 맞고, 예전엔 그것 때문에 또 놀림을 당한 적도 있었거든. 거기에 애완동물은 이리저리 옮겨 다닐 때 또 불편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쯤에서 말을 멈추고, 예나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확히는 싸는지 푸는지도 모르겠는 종이박스들을.

“봐봐. 여기선 어떨지 모르겠는데도, 습관적으로 짐을 안 푸는 거. 나도 모르게 어디로 또 가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곧 또 여기서 사라질 테니, 꼭 필요한 것만 풀어두자고.”

“…….”

예나는 아직 말이 안 끝났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런 식이니까 더더욱 못 사귀는 거야. 나도 모르게 또 떠날 거라고 생각하고, 이사 왔을 땐 가장 먼저 또 떠날 때를 생각하니까. 어디든지 그래. 잠깐만 왔다 가는걸. 그러니까 차라리 애들과 사귀지 않는 거야. 스스로 벽을 세우기도 하고.”

“……그래도 친하게 지낸 친구 없어? 한명이나 두 명 정도는 있을 것 아니야?”

자조적으로 웃는 자신을 보고 말하는 태열의 물음에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예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몇 명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잊어버렸어. 연락도 잘 안 되고, 실제로 나는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하지만 그쪽은 어떤 질 모르겠는걸. 예전에 한번, 다른 아이한테 연락을 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이름을 말하니까 기억을 못하다가 한참 있으니까 기억하더라고. 그게 슬펐어. 난 몇 안 되는 친구니까 기억하고 있었는데. 쭉,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애한테는 흔한 친구중의 하나였다는 거잖아.”

“…….”

별 말없이, 태열은 찻잔을 다시 한 번 기울였다. 수화기를 든 채 어색하게 웃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라, 태열은 고개를 휘저었다.

“그래도, 딱 한명은 있었어. 정말로, 정말로 친한 친구. 늘 붙어 다니고, 지금도 연락하는 친구가. 그런데…….”

거기서, 예나의 얼굴이 잠시 찡그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예나는 멋쩍다는 듯 헤헤 웃으며 말했다.

“아, 미안.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오랜만이라서. 이런 식으로 편하게 이야기 한건 말이야…….”

다시 굳어져가는 예나의 얼굴을 보면서, 태열은 찻잔을 마저 비웠다. 요컨대 그거다. 오랜만에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 상대. 그러나 상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은 안다. 즉, 기분 탓에 순간적으로 들떴을 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대로 내일이나 모래가 되어 얼굴을 마주치기가 더 겁나는 거겠지. 그래서, 태열은 찻잔에서 입을 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앞으로 그런 정말로 친한 친구가 되면 어때?”

“응?”

예나의 눈동자가 둥글게 바뀌었다. 태열은 다 비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니, 나도 마침 똑같은 처지라서 말이야. 요새 친구 대모집중이었거든. 나도, 뭐 이유는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그러니까 차라리 둘이서 같이 지내지 않을래?”

“…….”

“아니, 오해는 하지 말고. 내 생각엔 말은 그렇게 해도 너도 친구를 원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말 하는 내내 쓸쓸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무엇보다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만약 니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좋았다면 나한테 차나 마시고 가라고 할 리가 없으니까.”

“…….”

“혼자 혼자면 힘들지 몰라도, 둘이서 같이 찾아다니면 우리랑 어울려줄 녀석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 부서의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그래 줄 테고.”

“…….”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 서로 같이 지내면서 쓸쓸한걸 달래고, 가능하면 우리랑 같은 처지의 녀석들이나 모아서 우리끼리 지내자고.”

“왜?”

계속 침묵을 지키는 예나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태열은, 갑자기 들려온 예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나한테 그렇게 해주는 거야?”

“글쎄, 첫 번째 이유는 나랑 비슷해서이고, 두 번째 이유는 말했다시피 나도 할 일 없는 아웃사이더니까 그렇고, 세 번째 이유라면 이 상황을 적당히 즐겨서야. 원하는 이유를 1순위로 생각해도 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 말에, 예나는 입을 막고는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뭐가 웃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태열을 앞에 둔 채 꽤나 오랫동안 웃던 예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왠지 이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거기까지 말한 순간, 태열은 잠시 움찔하고는 쓰러지는 듯이 보였다. 아니, 쓰러졌다. 테이블에 쿵 하고는 팔을 짚으며 몸을 유지하는 태열을 보고, 예나는 깜짝 놀라며 외쳤다.

“왜 그래! 괜찮아?!”

“아, 아니…….”

태열은 약간씩 끊기는 말로 조용히, 겸연쩍다는 듯 대답했다.

“뭐, 랄까, 너무, 졸, 리달까……. 조금만, 자고, 갈, 게…….”

그 말만을 남기고, 태열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설마하니, 그거 재발이냐?”

현상의 질문에, 태열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 그게, 토요일이라서 4교시 수업이잖아? 그래서 나름대로 낮잠도 안자고 버텨봤다고. 그런데 그 뒤에 시간을 너무 소비했어. 뭐, 내 계산 착오지.”

“잠깐, 4교시 끝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래? 집으로 옮기고 차 마시는데 아무리 오래 쳐도 1시간이면 남겠다.”

“부상자라고. 같이 가는데 시간도 꽤 들었고, 학교 가기 전에도 깨서 준비해야 하잖아.”

“……그것 참 불편하네.”

그 말만을 남기고, 현상은 리필한 쥬스를 마저 비웠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사항. 태열의 평균 수면시간은 18시간이다. 그리고 이는 습관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사항이다. 즉, 태열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18시간 이상을 자야만 신체가 유지되는 특이체질이며, 이를 채우지 못하면 기면증마냥 시도 때도 없이 바로 잠에 빠져버린다. 때문에 평일에는 알아서 적당히 조절해가면서 수면을 취하지만, 가끔 계산 오류가 발생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돼 버린다. 이건 무슨 만화 같은 상황이냐, 하고 현상은 늘 생각했지만.

그러다 현상은 생각해냈다. 이 녀석은 18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사용 가능한 6시간을 벌써 앞에서 다 써버렸다면?

“설마하니 너, 그대로 아침까지 거기서 자버린거냐?”

현상의 질문에, 태열은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버렸다.

“…….”

“…….”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데헷♡”

“데헷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데헷♡이야!! 거기에 ♡는 뭐야 ♡는!!”

퍽, 하고 메뉴판이 태열의 얼굴로 날아갔다.

“얌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얼굴을 문지르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당당하게 내려 보며, 현상은 테이블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임마! 할 말 있으면 해봐!”

현상은 특별히 여자친구가 끌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옆구리가 시리지도 않았고, 커플을 보고 질투하는 일도 없다. 남이 잘되는데 내가 배 아플게 뭐냐. 하지만 말이지, 누군 깡패 같은 여성에게 매일 휘둘리는데 누군가는 행복한 삶을 산다니 용서할 수 없다! 위대한 솔로부대의 혼이 깃들어온 주먹을 꽉 쥐며 분노를 폭발시키려던 현상은, 거기서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잠깐, 그럼 그 머리랑 옷은 언제 한 거야? 어젠 잤다며? 설마하니…….”

현상의 턱이 서서히 벌어짐과 비례해서, 얼굴을 문지르던 태열의 얼굴은 다시 천천히 창밖으로 향했다.

“너, 설마하니…….”

“……맞아. 사실 연락 받은 건 여기서 놀다가 받은 거야. 그래서…….”

“……그래서 ‘같이 못 놀겠어요♡’ 하고 말하려고 들어왔는데 이렇게 됐다 이거군.”

“…….”

무언의 긍정. 현상의 일방적인 시선과 그를 명쾌하게 무시하는 태열의 구도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 잘나신 여친께서는 어디 계시냐.”

“아니, 아직 여친은……. 그리고 그렇게 말해도…….”

이 녀석, 즐기고 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말을 더듬으면서도, 괜스레 입 꼬리가 올라가는 그 모습을 보며, 현상은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누구는 말이지, 매일 밤 9시만 되면 안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애한테 끌려선 학교로 나가. 그래서는 괴물이랑 그 여자애가 싸우는걸 구경하지. 참고로 말하자면 그런데 어째서인지 죽을 뻔 하는 건 늘 나야.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녀석은 어떠한가. 역시 알기 시작한지도 얼마 안 되는 여자애랑 잘 맞아서 모든 고등학교 남학생의 꿈 데이트를 하고 있지 않는가. 뭐냐 이 갭은. 도대체 뭐냔 말이다.

“너 말이야…….”

혈관이 이마에 솟아오르기 때문인지 현상의 목소리가 험악하게 변하려는 순간, 한명의 여성이 카페 문을 열고 뽀르르 달려왔다. 왠지 모르겠지만 얼굴을 거의 다 가린 검은색 머리. 머리와 맞춘 듯한 검은색 계통의 수수하지만 약간 촌스러운 옷. 모든 것을 경계하듯이 쭈뼛거리는 모습. 설마하니, 설마하니. 현상의 눈이 커졌다.

“어? 밖에서 안기다리고 왜 들어왔어? 예나야.”

역시.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현상의 눈이 놀라운 현실을 본 듯이 커졌다.

여러모로 뭔가 미묘하게 핀트가 안 맞는다는 느낌의 그 여성은, 냅다 태열의 팔을 붙잡고(현상의 이마의 혈관이 하나 더 도드라졌다)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낑낑거리며 태열을 끌고 나가려고 했다.

“왜, 왜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저기, 그러니까…….”

힘없는 연한 목소리. 그 목소리로 여성이 뭔가 말하려던 그 순간, 현상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그리고 현상은 깨달았다. 아, 저것 때문이구나. 그래서 이러는 거구나. 생물의 본능적인 위험감지수단이 발휘한 거였구나. 그렇지만 어떻게 하리. 이미 오늘의 데이트는 쫑난걸.

딸랑 거리는 벨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부장과 문학부 멤버들이 카페 안으로 진입했다. 에누리 없이 전원이. 심지어 어째서인지 선생님까지 껴서 전원이.

“형! 이형 The 카페 점장! 김현상 작가는 어디에…….”

창피함이고 나발이고도 모른다는 그 원래 성격 그대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카페 주인의 이름을 막 부르며 부장은 고개를 사방으로 돌렸다. 한숨을 쉬는 부부장도 마찬가지. 만사 귀찮다는 선생님도 마찬가지.

거기에 부장에게 뭐라고 하는 세영과 접대모드(혹은 소심모드)의 유이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 모두와 현상과 태열과 그 옆의 예나의 눈이 마주쳤다.

짤그락, 하고 녹은 얼음이 쥬스잔에서 움직였다.

 

“그래서, 어제의 결석은 이를 위한 포석이었다 이거군. 다시 보겠네 성태열 작가. 지금까지 자네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게 단적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증명되었군. 아무래도 나는 사람 보는 눈이 내 생각 이상으로 없을지도 모르겠네. 여하튼 축하하네. 아마 평생 가도 이런 기회 생기긴 힘들 테니 울리지 말고 잘 해보게.”

“탈영 죄는 총살감이다. 기억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예로부터 전우를 버리고 도망쳐서 잘 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 한건도 없었던 것을. 커플제국에선 자네를 환영할지 몰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그들은 자네를 착취하고 언젠가 다시 이쪽으로 보낼 텐데, 그때를 기대하지. 뭐야 그 저주라도 말한다는 듯한 표정은. 저주 맞아. 부두교 인형이 없다는 게 슬프군. 미소녀 게임과 현실은 다르단 말이야! 제길!”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어째 현상이 너 말투고 캐릭터고 전부 변한 것 같다?”

이쪽은 남자 집단.

“그래서?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자세히 말해봐.”

“역시 젊다는 건 좋네. 저렇게 젊음을 불태우기도 하고. 잘한다 청년 청녀 커플! 결혼식 주례는 내가 서마! 아, 형! 알았어, 알았어, 이형 점장님! 여기 맥주 한잔 더! 오늘은 마신다!”

“자기가 20대 말이 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것에 분노해서는 일요일 낮부터 제자들 앞에서 술 마시지 마요 좀. 선생님이란 사람이 말이에요. 형 오빠도 이런 사람한테 대낮부터 술 팔지 마요 좀. 그보다 왜 카페에서 술을 파는 거예요? 아, 유이, 넌 왜 그렇게 구석에 있는 거야? 덕분에 오늘 자리의 주연 자리를 뺏겨버렸잖아. 자, 좀 전면에 나서라고.”

“아, 야, 세영아, 잠깐, 밀지 마…….”

이쪽은 여자 집단. 덧붙이자면 이 두 집단으로 인해서 카페는 개점폐업상태.

“그래서, 오늘의 계획은 결국 뭐였어요?”

태열의 머리를 꽉꽉 소파에 묻어 넣으며 묻는 현상의 말에, 그제야 부장은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이어지는 장광설을 끝냈다.

“아, 그러고 보니 새로운 화젯거리에 끌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뻔했군. 안 되는 일이야. 글을 쓰고 문학을 한다는 사람으로서 눈앞의 새롭고 재미있어 보이는 것에 눈이 멀어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는다면 그것은 주객전도의 극치 중에서도 상급에 들어가겠지. 각설하고, 다들 이쪽을 좀 주목해주게. 거기 여성 집단도 태열군의 피앙세를 그만 괴롭히고 이쪽에 집중해주게나.”

총 12개의 눈이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초점을 부장에게 모았다.

“고맙네. 뭐, 말했다시피 오늘은 문학부의 새로운 멤버 환영회일세. 이번 학기 초에 열고선 이번이 두 번째로군. 지난번과는 다르게 이번은 단 한명의 부원을 위해 준비된 행사일세. 자, 다들 따뜻한 박수로 환영해주기 바라네. 우리 문학부의 새로운 멤버,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작가일세. 자, 박수.”

짝짝짝.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부원들+한명의 외부인은 아무 생각 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유이는 당황해버렸다.

“자, 거기서 그렇게 두리번두리번 거리지 말고 이리 나오게. 뭔가 한마디는 해야지 않겠나. 자기소개라던 지 말일세. 자네 말하는걸세 자네. 자, 빼지 말고 어서 나오게.”

“에? 자, 잠깐…….”

그러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이는 세영에게 밀려서는 주춤주춤 우당탕 하고는 부장의 옆에 나란히 서게 되어버렸다.

“…….”

순간적으로 유이의 눈빛이 세영에게 흉흉하게 빛났지만, 세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버렸다. 유이가 무의식적으로 이를 갈며 몸을 앞으로 향하려던 그 순간, 그 어깨에 부장의 손이 턱, 하고 올라갔다.

“자, 전원 다시 한 번 박수. 그럼 유이 작가, 자기소개라도 해보게. 귀를 열고 경청하도록 하지.”

“예? 아, 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접대모드로 돌아간 유이가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하려는 순간, 세영을 주축으로 한 커다란 박수소리가 그 목소리를 가로막아 버렸다. 저 잡것이ㅡ하는 표정이 순간적으로 유이의 얼굴에 들어났다가 그대로 숨어버렸다.

“저, 저기, 그러니까……. 샤,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이라고 합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이정도면 되나요?”

우우ㅡ 그리고 또다시, 세영이 주축이 된 야유가 서있는 유이에게 쏟아졌다. 씰룩, 하고 붉어진 얼굴로 유이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게 현상의 눈에 들어왔다.

“좀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봐! 취미라던가 그런 걸로!”

“취, 취미?”

저건 가히 관심 있어 하는 남자애의 장난 수준인데. 알리는 없겠지만 세영과 혼자서 웅얼거리며 맥주잔을 기울이던 선생님을 제외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취미, 취미라. 그러나 그런걸 알 리 없는 유이의 머릿속이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1초, 2초, 역시 그것밖에 없나, 3초.

“그, 그럼 마술을 약간…….”

짝짝짝, 세영이 쟤 진짜로 관심 있는 거 아냐? 백합 탄생이라니, 이것은 좋은 것이다. 갑자기 저거 왜 저래. 그 외 기타 등등의 각자의 생각을 묻어둔 채, 다시 문학부 멤버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고, 유이는 늘 차고 다니는 색에서 손수건과 동전을 하나 꺼내었다

“저, 저기, 간단한 마술이니까 기대는 하지 마세요.”

동전을 손수건 사이에 넣는다. 물론 미리 보여준 손수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접었다 펼치자 동전은 온데간데없다. 그리고 손을 펼치자, 동전은 그 안에서 나온다. 짝짝짝. 말 그대로 무난한 자기소개용 마술. 이 정도면 됐겠지ㅡ하고 손수건과 동전을 넣는 순간, 세영은 외쳤다.

“뭐야, 좀 더 화려한걸 해봐! 불쇼라던지 그런 거! 어제는 잘만 하더니!”

그 말에, 유이와 현상이 동시에 움찔했다. 저 녀석이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경악하는 현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머지 부원들은 같은 대사를 전혀 다른 의미로 외쳤다. 불쇼? 어제?

“저, 저기, 그게 무슨…….”

“응? 기억 안나? 어젯밤에…….”

빠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래서 현상은 깨달았다. 아, 그런 거였군. 그런 거였구나. 그런 거였어. 현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며 유이는 외쳤다.

“아 진짜! 그쯤 해둬 좀!”

“…….”

“진짜 뭐야 도대체! 임마! 그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지! 거기다 왜 그리 사사껀껀 시비야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뭐가!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라고! 그렇게 관심 있는 남자애가 어설프게 작업 거는 것 같이 하지 말고! 도대체 무슨 생각이…….”

두리번. 두리번. 후다닥.

“아, 저, 저기, 그러니까, 세, 세영아? 그, 뭔지 모르겠는 말은, 저기…….”

“……너무 늦었어.”

현상이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 저기, 그러니까…….”

어떻게든, 어떻게든 둘러대야 하는데, 둘러대야 하는데ㅡ하지만 주위의 시선을 본 유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안되는데, 어떻게든 둘러대야 하는데. 안되는데. 입가가 씰룩거리고, 눈초리가 씰룩거렸다. 어디론가 당장에 도망치고 싶은, 울렁거리는 듯한 말로 할 수 없는 감정. 그리고,

“뭐야ㅡ 그런 거였어?”

철렁, 하는 소리가 가슴에서 난 것 같았다. 등골 끝, 꼬리뼈 부근부터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차가운 무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 유이는 눈을 꽉 감았다.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 그 기억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아, 끝이네. 세영이 저거, 역시 우습게보면 안됐었어.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유이는 애써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늘 듣던 억양과는 다른데ㅡ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교실에서야 뭐 그렇다고 쳐도, 부에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건 그렇고 공격에 그렇게 쉽게 풀리면 어떻게 해? 나한테 좀 배워야겠네.”

부부장의 목소리에, 유이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그곳에는, 경멸도 뭐도 아닌 늘 그대로의, 웃고 있고 싱글거리는 모두가 있었다. 현상이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에, 그러니까, 세영이 저 녀석 때문에 까발려는 졌지만, 사실 우리 부서는 그런 거 별로 상관없거든? 뭐,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면 뭣하지만 우리 부서 내에서는 차라리 원래 성격 그대로 미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잠깐, 그보다 현상이 넌 저런걸 알았다고? 미리 말해주지 그랬냐. 뭐, 내숭도 모에 요소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난 어떤 면에서는 실망인데……. 아, 나쁘다는 건 아니야. 음. 소수파지만 수요는 있어. 오히려 공급이 수요에 비해 적으니 희소가치가 있으니까 좋다면 좋은 거지. 음. 여하튼, 앞으로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그런데 되게 놀라더라?”

“듣고 보니 그렇군. 성태열 작가. 뭐, 나름대로 자기 딴에는 열심히 숨킨 건데 들켰으면 얼마나 창피하고 쪽팔리고 기타 등등 하겠나. 그 정도는 이해하고 감안해야지. 여하튼, 이 나의 눈도 속이다니, 확실히 자네의 연기력 하나는 수준급이군. 이예화 부부장의 말대로 그 발끈하는 것만 어떻게 하면 누구든 어디에서든 속일 수 있겠어. 아, 그게 원래 성격이라면 어쩔 수 없겠군.”

“도대체 부장은 또 무슨 논지도 안 맞고 문장 앞과 뒤도 서술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고선 어떻게 문예부 부장인지……. 여하튼, 말 그대로 우리 부서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뭐, 그 내숭 떠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었지만. 특히 아까 들키기 직전의 모습은 가히 예술이셨어?”

킥킥킥, 하고 심술궂게 웃은 다음, 세영은 이제는 새빨개진 얼굴으로 서있는 유이에게 쥬스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가면까지 쓰고선 사람을 사귄다는 건, 어떻게 보면 사귀어지는 입장에선 기분 나쁜 거라고? 특히 부부장처럼 인기를 끌려는 게 아니라 일부로 ‘나한테 다가오지 마!’ 라는 느낌이면 더더욱. 뭐,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그런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아니, 좋지 않아. 그러니까, 그런 가면 같은 건 던져버려도 된다니까? 왜냐하면 여긴 사립 세평고등학교 최고의 싸이코 부서 ‘문학창작부’ 니까.”

“싸이코는 뭐야, 싸이코는.”

주위의 불평불만과 야유를 손짓으로 조용히 시키고, 세영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린 다음 얼떨결에 사이에 아까 내민 것을 들고 있던 유이의 잔과 쨍, 하고는 가볍게 부딪쳤다.

“그러니까, 우리 세평고교 문학창작부에 잘 오셨습니다, 가면을 벗은 진짜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양.”

“…… ㅡ.”

“자, 잠깐, 뭐야! 왜 그래! 왜 울려고 그래!”

“어이, 세영아. 감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좋은데 왜 애를 울려? 그것도 환영식에서.”

“아, 아니, 나도 울리려고 울린 게 아니라……. 그보다 누가 좀 달래 봐요.”

“말만 하지 말고 좀 행동으로 보여 봐. 꿀꺽, 푸하.”

“선생님도 선생님이나 되어서 애들한테 훈계하면서 맥주 마시지 마요!”

“그러니까 일단 다들 유이부터 진정 시키자니까? 현상이 너도 말 만이잖아! 유이, 좀 진정 좀 해봐. 응?”

“성태열 작가……. 뭐, 상관없겠지. 내가 할 말은 결국 전부 자네가 대신 해버렸구만, 은세영 작가. 뭐, 이번은 용서해주지. 자, 그럼 다들 잔을 올리고, 거기 성태열 작가가 바람 펴서 삐진 여학생 양. 그래, 자네 말이네. 뭘 얼굴이 빨개지고 그런가. 자네도 괜찮다면 기왕 이 자리에 참석한 거 같이 잔을 올리지 않겠나? 그런데 자네도 어지간히도 소심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구만. 아, 그렇게 노려보지 말게 성태열 작가. 알겠네, 잘못했네. 여하튼 자네도 잔을 올리고, 자, 유이 작가도 그만 눈물 닦고 잔을 올리고, 선생님도 좀 잔 올려서 부딪치고 마저 마시시죠. 자, 그럼 다들 준비 되었으면, 하나, 둘,”

“건배!”

눈물을 닦으면서 웃으며 잔을 올리는 유이와 같이, 문학부 멤버들은 바보같이 잔을 올려 쨍, 하고 화려하게 부딪쳤다. 그리고 시작되는 시끄러운 파티 분위기. 조용한 방관자 같은 외부 인원 한명과 같이, 그들은 웃고 떠들기 시작했다. 방관자의 얼굴에, 약간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응? 왜 그래?”

“아, 아니야.”

“괜찮아. 말했다시피 이 부서는 그런 부서니까. 이대로 있어도 괜찮아.”

“응…….”

그러나 그 쓸쓸한 빛은, 그 어깨에 올라오는, 얼굴이 붉어지는 누군가의 팔에, 같이 얼굴이 붉어지면서 금방 메워졌다.

잠시 후, 그 아래에 일시적으로 묻어둔 감정이 아주 잠깐 떠올랐지만.

 

 

그대로 식사를 하러 갔다.

말했다시피 카페 ‘라임’은 음식맛 하나는 여러 의미로 기가 막힌 것으로 유명하기에, 전원 합의로 마저 쥬스잔을 비우고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학생들인지라 돈이 없으니 합리적인 선택. 단 한명, 나중엔 카페를 점심시간에 깽판 쳐서 개점휴업으로 만들곤 쥬스만 마시고 가냐고 거의 애원조로 비는 카페 점장을 제외한 전원이 찬성했다. 카페 앞에는 한 바가지의 소금이 뿌려졌다.

햄버거를 먹으며 이야기꽃이 폈다. 대부분은 조금 전 까발려진 유이의 접대모드에 관련된 내용. 대부분이 놀리는 내용이었고, 처음엔 유이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소심하게 대응했지만, 접시 위의 마지막 감자튀김이 비어갈 때 쯤 해서는 거의 접대모드가 아닌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돌아갔다. 태열만큼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떨어져 새로 생긴 소중한 그녀와의 시간을 즐기려고 노력했다. 힘들었지만.

거리행진도 했다.

이때쯤 되어서는 분위기도 많이 좋아져서, 유이 역시 원래의 성격이 사실상 그대로 들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약간은 적응을 못하던 부원들도, 어느새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행진 대열은 삼등분 되었는데, 앞의 여성 그룹, 그리고 부장과 현상이 그룹, 최후미의 태열과 예나 커플 그룹. 사실 떨어져서 따로 놀아도 될 텐데 어째서인지 태열은 약간 꺼리는 예나를 끌고는 어떻게든 같이 다니겠다고 주장했다. 뭐, 상관없겠지.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름대로 둘만의 시간을 주면서도 소외하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유이가 자신의 정체를 밝혀서 소외된다고 느끼지 않도록 미묘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PC방도 갔다.

여성진이 대부분인데 어째서 PC방이냐ㅡ할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모두는 익숙하다는 듯 자리를 잡고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은 RPG. 정말로 모험이라도 하듯이 재미있게 즐겼지만, 꽤나 수가 되는 파티원이 우르르르 몰려다니니 이것도 문제가 있어, 나름대로 즐거웠지만 안타까워하는 유이와 예나(이쪽은 노골적이 아니라 은근히 였지만)를 달래고 다음 게임을 켰다. 총성이 스피커를 울리고, 포염이 모니터를 가득 매웠다. 어째서 우리 파티는 여성진 들도 이 모양일까, 하고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코어는 부장과 세영이가 탑을 달리고, 그 아래로는 맨 밑에 현상을 깔고는 적당히 예측 가능 범위로 배치되었다.

노래방도 갔다.

태열과 부장의 애니송 메들리와, 부부장과 선생님의의 댄스곡과, 현상의 철지난 노래와, 선생님과 부장의 롹 스피릿과, 유이의 팝송과, 예나의 박수가 방을 가득 매웠다. 처음엔 괜찮은 분위기로 가더니, 결국 후반에 가서는 부장을 주축으로 하여 일부로 괴악한 노래를 찾아 부르고 가사를 바꾸며 리듬을 바꾸는 막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로 환영회는 막을 내렸다.

 

 

밤하늘에 하나씩 별이 박히기 시작하는 늦은 저녁. 마을 유일의 번화가 역 앞 상점가엔 지상의 별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휴일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아, 재미있었다.”

만족스러운 목소리의 유이에게, 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이곳저곳 놀러 다니면서 즐길 만큼은 즐겼으니까. 하지만 휴일에 노는 평균치 이상의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같이 다니는 파티가 파티인 탓이겠지.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환영회는 끝을 내리고, 부원들은 다음 목적지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현상, 유이, 세영 이 세 명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 재미있었다.”

“두 번이나 말 할 정도로 만족했냐.”

현상의 약간 시비조의 말에도, 유이는 안면 가득히 미소를 짓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런 식으로 애들하고 논건 거의 처음이니까. 상당히 즐거웠어.”

“알면 앞으론 바꿔 보는 게 어때? 역시 그런 성격을 포기하니까 훨씬 즐겁잖아. 여럿이서 놀고 즐기는 게 혼자 겉에서 도는 것보다 즐겁지 않아?”

그러나 세영의 말에, 유이의 미소는 약간 굳어졌다. 그걸 보고, 세영은 약간 눈썹을 올렸지만, 그 이상 뭐라고 하진 않았다.

“뭐, 즐거웠으면 된 거지. 그건 그렇고, 넌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넌 여기가 집이잖아.”

“누가 들으면 길거리에 산다고 오해하겠네. 괜찮아 괜찮아. 안 그래도 찬거리 좀 사야하고. 달리 볼 일도 있거든.”

다시 얼굴에 미소를 찾으며, 유이는 손을 휘저었다. 근데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나.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며 현상은 둘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너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는 거야? 직접 해먹는 거야?”

땡큐 세영아. 사실 별 상관도 없긴 하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이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에 현상은 귀를 기울였다. 어차피 난 할 일도 없다고.

“응? 동생하고 같이 지낼 땐 해먹었는데, 여기서는 그냥 레토르트로 때우고 있는데? 라면이라던가, 3분 짜장이나 카레라던가. 다들 처음 먹어보는 건데 맛있더라고. 거기에 간편하니까.”

“……그래도 되는 거야? 벌써 며칠째 인데?”

“김밥 같은 것도 먹어. 맛있더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이야기가 겉돈다고 생각했는지 세영은 왼손을 내밀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건 그렇고 참 알기 쉽지만 실제로 보긴 힘든 자세네. 그런 현상의 쓸데없는 감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영은 말을 이었다.

“왜 그런 걸로만 때워? 요리도 할 수 있으면 제대로 된걸 먹는 게 낫잖아? 영양 밸런스 같은 것도 맞으니까 건강에도 좋고. 특히 몸매 면에서도…….”

“몸매는 난 먹어도 안찌는 타입이라 괜찮아.”

“윽.”

한방에 세영과, 전 세계 30억 여성 인구를 적으로 돌리는 발언을 한 다음, 유이는 조용히 말했다.

“나야 곧 다시 떠나니까.”

“아.”

그 말에 세영은 입을 다물었다. 맞아. 현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잠시 이곳으로 ‘파견’ 온 거였지. 임무가(그 임무 자체가 좀 아리송한 것 같긴 하지만) 끝나면 돌아갈 예정이고. 즉, 이런 거다. 이 녀석은 오래 있지 않을 테니 애꿎은 조리기구나 요리재료 같은걸 가지 않고, 간단하게 그런 걸로 해결한다는 거다.

“미안. 생각해보니까…….”

“됐어. 거기까지만 해둬.”

뭔가 계속해서 사과하려던 세영의 말을 가로막으며, 유이는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차가운 분위기. 뭔가 말해야하는데. 뭔가. 괜히 부담감을 느끼며, 현상은 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내가 왜 부담감을 느끼는 거냐. 나도 모르겠다. 여하튼 느끼면 그 기분을 없애야지.

“오늘 제일 재미있었던 건 뭐였어?”

자신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두 여성의 뚱한 표정을 보면서, 현상은 차라리 그냥 찜찜한 부담감 그대로 지낼걸 하고 생각했다. 이뭐……. 하는 표정의 두 명의 시선에, 현상은 점점 아까와는 다른 부담감이 느껴지는걸 느꼈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글쎄, 나는 노래방이 제일 재미있었는데? 처음 가보는 거라서.”

“그런 것 치고는 노래 잘 부르던데? 근데 진짜로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난 한국에서 지내는 게 아니라고.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힘들어. 그리고 PC방도 재미있었고.”

둘이 어느새 아까의 굳은 분위기를 풀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에, 현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까의 상황에서 벗어난 것에 몸서리를 치고, 현상은 슬며시 다시 대화의 주체에서 빠져나왔다. 역시 난 여자들이랑은 대화 못하겠어. 요새 들어서는 특히 말만 하면 바보 취급에 휘둘리고 기타 등등. 평생 내가 여자한테 인기 좋을 일은 없지 않을까.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사고의 채널을 바꾸고 공상하며, 현상은 어느새 오늘 일로 세영과 떠들기 시작하는 유이를 바라봤다.

저렇게 보면 참 사이 좋아 보이는데. 왜 그리들 다투는지 원. 뭐가 문제이려나. 뭐 하긴 밤에 그 난리를 떨어야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혼자서 질문하고 혼자서 대답하며 현상은 두 명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정말, 이렇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장소는 오랜만이야. 정말로 마음에 들어. 이 마을, 이 부서. 곧 떠난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유이의 표정엔 읽을 수 없는 감정이 너무나도 많아서, 현상과 세영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유이는 즉시 다시 밝은 분위기로 말했다.

“뭐, 그래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조금만 봐주라. 추억이든 뭐든 밤마다 죽을 뻔한 고생을 하는 건 사양이라고.”

그 말에 세영 역시 기억났다는 듯 유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너, 뭔가 사태 해결을 위해서 하고 있기는 한 거야?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매일 나가서 퇴치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원인 해결을 위해서 노력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실례야. 나름대로 보이는 곳 안 보이는 곳에서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그리고, 오늘부터는 사태가 좀 변할지도 몰라.”

유이는 투덜대듯 그렇게 말했다. 뭐야, 매일 밤에 날 끌고 학교에서 난리만 치는 줄 알았더니 뭔가 하긴 하는 건가. 현상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사태가 좀 변할 거라고?

“그건 무슨 의미야?”

현상의 질문에, 유이는 영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섰다. 세영과 현상은 그런 유이의 태도에 의아해하며 같이 멈춰 섰다. 유이는 한숨을 쉬고는 돌아보며 말했다.

“저 녀석이 왔거든.”

돌아본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하지만 어디선가 본 느낌의 소녀가 서 있었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할까?”

 

 

살다보면 가끔씩 정말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그런 날일수록 태양은 빠르고 높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오늘은 축복받은 월요일. 새로운 한주의 시작. 지저귀는 새들. 시원한 봄바람. 피어나는 새싹들. 3월도 이제 그 끝자락으로 다가가고, 4월, 즉 본격적인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어도 안가! 안 간다면 안가! 내 목을 칠지언정 학교엔 갈수 없다! 오두가단차불가등교(吾頭可斷此髮不可登校)!”

“저거 뭐라는 거예요?”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가지고. 내 아들놈이지만 무슨 생각인지.”

한숨을 쉬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집안의 여성 두 명ㅡ동시에 집안 최고 권력기관ㅡ의 시선에, 현상은 잠망경처럼 살짝 열린 이불 사이의 틈으로 밖을 내다 봤다. 내 미쳤다고 학교를 가랴. 뭐가 있는데.

“너 며칠 전에도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더니, 도대체 뭐가 문제니? 학교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해? 아니면 이번에 본 모의고사가 걸리는 거니? 이 엄마한테 고민을 털어놓아보렴.”

갑자기 자애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파마머리의 아줌마 분위기가 나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아, 어머니 그거 정말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그렇지만 어머니, 세상엔 말씀 드릴 수 있는 고민과 말씀 드릴 수 없는 고민이 있답니다. 차라리 따돌림이나 성적 문제면 깔끔하죠. 근데 이건 도저히 남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답니다. 불효자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고 아들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아실 리가 없는 어머니는 집안 최고 권력기관으로서 지도세력에 반항하는 가증스러운 저항조직에 대한 마지막 인정을 끊어버렸다.

“말하기 싫으면 말던지. 여하튼 학교 가. 그렇지 않으면…….”

그리고 현상이 이 이후의 사태를 눈치 채는 순간, 어머니의 손에 물체가 들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주워 와서 어머니에게 혼났던, 상처투성이의 낡아 빠진 알루미늄 배트. 내가 도대체 왜 저걸 가지고 온 거지? 이불 사이에 들어있어서 그런 건지 관자놀이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현상은 침을 삼켰다.

“어, 어머니, 그러니까, 대화로, 아니 말로 할 수 없는 문제인데, 그러니까, 일단 그건 좀 놓고…….”

“엄마, 오빠의 말에 대한 대답은? 사자성어로.”

“鬻到盝捭(죽도록패).”

“그건 사자성어가 아니잖…….”

아들의 테클 따위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대학 한자교육과 출신 어머니는 정성들여 가죽이 묶여있는 야구배트를 들어올렸다.

 

 

날씬하고 길면서 적당히 볼륨감 있는 몸매. 불타는듯한 유이의 붉은 눈과는 반대로 냉정하게 고여 있는 푸른색 눈. 머리는 달빛을 반사하는 유이의 은발과는 반대로 스스로 빛을 내는 금발이 평산 꼭대기 공원에 부는 바람에 천천히 휘날리고 있었다.

“어, 저기, 그래서 누구신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묻는 현상에게, 금발의 소녀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에나 아인데른베른. 저기 있는 유이랑 같은 국제 마법사 연맹 대 악수(惡獸) 퇴치부대의, 단독 전투 허가증 소유에 2종 상급 마법사용 허가증을 지닌 2급 전투원이야.”

해가 진 평산 꼭대기의 평산 공원에는 아무도 없어 황량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뭐,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기는 좋았지만. 진작 편의점 말고 여기로 올걸. 현상은 한가하게 생각했다. 이에나의 대답은 한쪽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기. 아니, 애당초 이름 소개 후 첫마디를 듣자마자 아무것도 듣고 싶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에나 니가 여긴 왜있어?”

퉁명스럽게 묻는 유이를 바라보며, 이에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정리하곤 말했다.

“너 헬프 넣었잖아.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좀 더 감사를 해야지.”

“헬프? 너 좌천 아니었어?”

유이의 정말로 궁금하다는 질문에, 이에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실례잖아. 좌천이라니. 좌천이 아니라…….”

“좌천?”

눈치도 없이 물어본 현상 덕분에, 유이의 입꼬리는 위로, 이에나의 입꼬리는 아래로 향했다.

“예전에 한번 이런 식으로 파견됐는데, 피해가 워낙 커야지 말이지. 그래서 그 패널티로 좌천, 그래그래 알았어. 자격정지.”

유이는 거기까지 말하곤 해맑게 웃으면서 이에나를 바라봤다.

“뭐, 혼자서 한 것 치곤 잘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말이지ㅡ”

“시끄러. 그러는 넌 뭐 잘했을 것 같아?”

빈정대며 능글거리는 유이의 말허리를 자르며, 이에나는 인상을 더 찌푸렸다. 그쯤해둘 모양이었던지 유이 역시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입을 닫았다.

“에, 그럼 니가 유이를 지원하는 역할로 왔다는 거야?”

상황을 정리하려는 세영의 말에, 이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난 휴식을 즐기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어야 한다고! 근데 왜 내가 이 칠칠치 못한 것 때문에 갑자기 불러와야하냔 말이야! 가장 가까운데 있는 게 나니까 당장 가라니! 내가 왜 얘 뒤처리까지 해줘야하는지 원.”

“뭐야?”

“해볼래?”

당장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듯 으르렁 거리는 둘을 보며 현상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 다 큰 젊은 처자들이 왜 무기까지 들고 난리야! 에, 이에나라고 했지?”

“맞아. 이에나 아인데른베른.”

흥이 깨졌다는 듯 물러서며, 이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우리 어디서 본적 있어?”

“학교, 카페, 길거리, PC방, 노래방에서 봤지.”

“아, 그렇군. 어쩐지 어디서 봤다고 했어.”

역시 그랬군. 음. 어디서 봤다 싶었더니. 라기 보다 어디서 봤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현상은 머리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곤 이에나의 어깨를 잡으며 외쳤다.

“잠깐, 학교, 카페, 길거리, PC방, 노래방이라면 설ㅡ”

“마 니가 이예나였어?!”

내 대사 뺐지 마. 놀라움에 갑자기 현상을 밀치며 이에나의 어깨를 배턴터치 한 세영에게 이에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내가 이예나가. 지금은 태열이 여자친구 생활 중.”

“…….”

입을 벌리고 있는 현상과 세영에게(유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에나는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가 그렇게 놀라워? 이미 대부분은 다 눈치 챘을 꺼라 생각하는데?”

“누가?”

“아무것도 아니야. 여하튼, 내가 이예나 맞아. 그건 변장. 일부로 이름도 비슷하게 지었는데.”

“하지만 왜? 왜 그런 변장을? 설마 유이처럼ㅡ”

당황해서 묻는 세영에게 이에나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아니, 눈에 안 띄게 생활해야하니까. 뭐가 어쨌든 잠시 근신중이니까. 조용히 지내야한다는거지. 누구랑은 다른 이유라고.”

뭔 소리야. 현상이 고개를 까닥이는걸 보고 유이가 약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에나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여하튼, 덕분에 귀찮게 됐어. 뭐, 자격정지 풀어준다니 나야 좋기도 하지만. 여하튼, 앞으로 잘 부탁해. 아, 태열이에겐 말하지 마. 충격 강하게 먹을라.”

끄덕끄덕.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현상과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말한 이에나는, 저쪽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줄래?”

 

 

“…….그 눈 어떻게 된 거야?”

“신경 안 써도 돼. 특별히 어머니에게 맞았다던가 어머니에게 야구배트로 맞았다던가 어머니에게 야구배트로 있는 힘껏 맞았다던가 하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니까. 그런데 이 눈 이상해보여?”

“동물원에 가면 딱일것 같아. 팬더우리에.”

유이의 감상에 현상은 집에서 가져온 계란으로 눈을 문지르며 정면을 바라봤다. 차가워라. 아파라. 그런데 어째서 이런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만들어낸 녀석이랑 같이 있어야 하는 거야.

“괜찮아. 현상이 이 녀석에겐 가끔씩 있는 일이니까. 아, 가정폭력이나 그런 건 아니라고?”

“아,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한건 아니지만…….”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동우 때문에, 유이는 재빨리 영업모드로 전환. 뭐랄까, 어제 오전 일로 좀 사람 됐나 싶었더니 아직인 모양이다. 뭐 상관은 없지만. 현상은 동우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유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책가방에서 책을 꺼내 느긋한 독서를 시작했다. 아침조회시간의 소란스러움. 전쟁터 한복판에 있어도, 사람은, 책을 봐야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의 머리는 주변의 요란스러움과 책속의 아득함이 겹쳐져 말 그대로 무(無)의 경지로 빠져들어 갔다.

“아침부터 책이나 읽고, 사교성 참 안 좋네.”

갑작스러운 말에 겨우 무의식에서 빠져나온 현상은, 책을 내리고 정면의 상대를 바라봤다. 세영은 한가로운 투로 현상이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보고는 ‘헤에’ 하는 표정을 지었다.

“‘파우스트’? 이런 것도 읽을 줄 알았어? 너?”

“이런 것도 읽을 줄 알다니 너무하잖아. 뭐 머리가 멍해지긴 하지만. 요즘 내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영을 보며, 현상은 책을 덮었다. 세영의 시선이 뒷자리의 책상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유이와 동우에게 머물러 있다는 걸 안 현상은, 세영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유이는 여전히 영업모드로 부끄러운 듯 방실방실 웃는 중.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세영은 고개를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이해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저러면 더 심해만 질 텐데…….”

“뭐라고?”

“너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야. 야, 유이. 잠깐만 나 좀 보자. 동우야,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마. 응? 여하튼, 잠깐 유이 좀 빌려갈게.”

“아, 잠깐…….”

현상과 유이의 말을 자신의 말 앞뒤로 무시하며, 세영은 순식간에 유이의 팔을 잡아끌고는 교실 저쪽 구석으로 향했다. 곧 선생님 오실 텐데. 한가롭게 그런 생각을 하던 현상은 동우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토요일에 그렇게 사이 안 좋더니, 설마하니 본때를 보여주……. 그런 거 치고는 은근히 사이가 좋아 보이네.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사이 나쁜 이유는 또 뭐였고?”

대답 대신에 현상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미안해, 내 언어능력으로는 그걸 이해 가능하고 쉽게 전달하는 게 불가능해. 현상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동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뭐, 여하튼 알았어. 그래서,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일요일엔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고. 설마하니 둘이서 뭔 일이 있었다거나 한건 아니겠지? 응?”

갑자기 안경을 고쳐 쓰고는 동우는 얼굴을 현상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갔다. 인상은 팍 쓰고. 이마와 이마는 접촉상태. 얼굴 아랫부분은 근접조우. 어디를 의미하는지는 알아맞혀보세요. 그 부담감에 현상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적 방어자세로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잡고 밀었다.

“뭐, 뭔 일이라니. 무슨 뜻이야?”

“간단하고 심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데, 데이트라던가…….”

“돌았냐!”

퍽. 불의의 강습에 이마를 강하게 부딪쳐 목을 뒤로 강하게 젖혔다가, 동우는 후후후후 웃으면서 고개를 다시 제대로 가눴다.

“좋은 머리다. 상대하는 보람이 있군.”

“뭔 소리야.”

이마를 감싸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잠시 있다가, 동우는 가까스로 회복하고는 현상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너는 전혀 관심 없냐? 유이.”

“없어.”

“대답하는데 1초도 안 걸리는구만. 근데 왜? 얼굴 예쁘고, 성격 좋고, 돈 같은 거야 학생이 신경 쓰면 그놈도 막장이지만. 여하튼, 유이는 너에게 관심 있는 것 같던데? 넌 정말로 전혀 관심 없는 거야?”

니가 만약 그 녀석 본성을 안다면 과연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있을까, 나의 친구 신동우군.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지. 암. 아무려면. 그리고 관심은 무슨.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현상에게서 시선을 돌려 저쪽에서 세영과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이를 바라보며, 동우는 세상이 너무나도 행복해 미칠 것 같다는 목소리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저렇게 예쁜데 말이지. 성격도 좋고 말이야. 왠지 모르게 너에게 관심도 있는 것 같고. 아아, 나에게도 저런 여성이 대시해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네 녀석에게 꿀릴게 뭐냔 말이다. 아아, 저 은을 녹여서 만든 것 같은 아름다운 머리카락, 조용하지만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루비 같은 빛깔의 눈동자, 새하얀 눈밭 같은 깨끗한 피부, 그리고 저 아름다운 매끄러운 입술, 비단 같은 그 윤기 흐르는 수줍게 묶은 두 갈래의 머리카락, 거기에 저 조각상 같은 완벽한 몸매와 아름다운 목소리, 아아, 그대는 너무나도 아름답소. 그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나의 영혼은 그대의 소유물, 나의 시선은 그대의 몸에서 나오는 빛에 멀어버렸고 나의 귀는 그대의 목소리에 홀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소. 아아, 어째서 그대는 나의 이런 마음을 몰라주는 거요. 아아, 아아아…….”

수백년 전 중세 문학에나 나올법한 진부한 표현을 들으며, 현상은 참으로 미묘한 표정을 동우에게 지어줬다. 뒤통수에 지어줬으니 보진 못했겠지만. 여하튼 이 녀석 어지간히도 빠졌구만. 평소의 1.5배 정도 중증. 원래 연애문제에 있어서는 솔로생활 80년의 만기 제대 같긴 했지만 이번엔 특히 심한데……. 멍청히 그런 생각을 하며 이어지는 동우의 표현들에 더더욱 미묘한 표정을 짓던 현상은, 갑자기 동우가 돌아보는 것에 급히 안면근육을 풀었다.

“결심했다. 현상아, 정말로 관심 없는 거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뭘 할 생각이길래 그러냐. 여하튼 난 관심 없어. 알아서 처리해.”

다시 한 번 현상에게 쐐기를 박은 다음, 동우는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유이를 위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악하악……. 유이짱…….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주겠다능……. 하악하악…….”

“…….”

뭔가 위험한데. 드디어 임계점을 돌파해서 맛이 가버렸나. 현상이 묘한 표정으로 동우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동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의에 찬 눈동자가 안경 렌즈를 통과해 더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잠깐,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위험하다고. 많이 위험해. 아니, 유이가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니가 잘못하면 죽는다고. 그러나 친구의 걱정을 모르는 동우는 각오에 차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결심했어. 오늘, 한다. 멋지게 해주겠어.”

“뭐, 뭘 하겠다는 거냐. 미리 말해두자면 우린 미성년자고 일순간의 충동에 책임을 질수 없으며 한순간의 실수가 평생을 좌지우지하고 이건 전 연령 이용가야. 제발 좀 자제를…….”

“엉? 뭔소리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현상을 바라본 동우는, 의아해하는 현상에게서 고개를 돌려 유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더욱 꽉 쥔 다음 멋지게 들어올렸다.

“오늘, 고백하겠어.”

 

 

“……뭐?”

잠시 정신이 장면전환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진 다음, 현상은 이제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경악하며 동우를 바라보았다. 동우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유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유이가 아무래도 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네가 없다면 상관없겠지.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며 승리는 용기 있는 자의 것. 나는 싸우겠다. 그리고 승리를, 사랑의 꽃의 만개라는 형태의 승리를 이 손에 거머쥐겠다. 용기, 이것이 승리의 열쇠다!”

어딘가의 지구방위대 사령관 같은 대사를 내뱉는 동우를 보며, 현상의 머릿속은 다시 백색으로 물들었다.

위험하다. 아까 내가 했던 걱정 이상으로 위험하다. 이건 목숨의 문제가 아니야. 인생의 문제다(둘 사이의 차이는 해석 가능하다고 믿는다). 친구의 인생을 걱정해서, 여기서 나는 적극적으로 저 행동을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우정 아니겠는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을 말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현상이 하는 사이, 동우는 어느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화를 마친 듯 보이는 세영과 유이에게, 동우는 포부도 당당히 걸어갔다.

“어, 동우냐? 왜? 안 그래도 대화 끝났으니까…….”

세영의 말을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멈추게 한 다음, 동우는 유이를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유이, 긴히 할 말이 있어.”

유이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아, 가자. 동우는 숨을 깊게 들이 쉰 다음, 내뱉으면서 말했다.

“저기, 오, 오늘 끝나고 시, 시간 좀 내줘. 에, 그러니까, 교문……. 아니, 교문은 너무 눈에 띄고. 으흠, 아, 그, 그래! 청소 끝나고 교실에서 좀!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꼭 좀…….”

“왜? 무슨 일인데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말하기 힘든 이야기가 있으니까…….”

“에이, 귀찮아. 그냥 뭔 일인지 말해. 그다지 대단한 일도 아닐 거 아니야. 부실에 늦게 가면 또 부장이 난리 칠거라고. 그래서, 도대체 뭔데?”

“에, 그러니까, 그게, 분위기 문제도 있고 넌 수줍어하니까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잠깐, 엉?”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듯 말하던 동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정면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은빛 머리카락. 빨간 눈동자. 모델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과 몸매. 그리고 트윈테일. 이상하네. 분명 맞는데. 그러나 뭔가가 다른데.

“곧 선생님 오실거야. 그래서? 도대체 뭔데? 실없는 거면 가만 안 둔다?”

“아, 그게, 저기, 그러니까…….”

변한 유이의 분위기에 압도되며, 동우는 필사적으로 말을 찾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현상은, 시선을 세영에게 돌렸다. 보이는 것은 안면 가득한 환한 미소와 엄지손가락. 짐작이 간다. 그런데, 도대체 왜? 왜 그렇게 유이 본성을 들어내게 하려고 하는 건데? 대답 없는 질문을 머릿속으로 날리던 현상의 눈에, 드디어 결의를 다시 갖춘 동우가 보였다. 심호흡. 그리고,

“저, 저랑 사귀어 주십시오! 쭉 좋아해왔습니다!”

“…….”

주변 모두의 정적. 모두의 시선이 3초 정도 동우에게 머물렀다가, 그대로 제 갈 길로 흩어졌다. 교실은 다시 조회 전의 소란상태로.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분명 이렇게는 안됐겠지만, 동우니까. 현상은 한숨을 쉬면서 관객의 자세로 돌아갔다. 교실 구석의 여자애들은 ‘또냐’ ‘나한테도 그랬어’ 등등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남자애들은 ‘또냐’ ‘개학부터 지금까지 15번째인가’ 등등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기,”

“아, 응!”

“그거, 나한테 한 말?”

“으, 응.”

약간의 정신 데미지. 거기에 생각했던 대응과 다른 혼란함도 섞여있겠지. 현상의 냉철한 판단대로 당황해있는 동우에게, 유이는 대답했다.

“싫어.”

큰 정신 데미지. 통산 새학기 시작부터 15회째로 동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잠시 그런 동우를 동정의 눈빛으로 쳐다본 다음, 유이는 쪼그려 앉아 동우에게 말했다.

“저기,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여자친구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하면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다고? 뭐랄까, 나를 좋아해서 그렇게 조바심 내는 것과, 어떻게든 여친 하나 있었으면 해서 조바심 내는 건 전혀 다르게 보여. 한마디로 말해서, 그런 식으로 해서는 넘어올 리가 없어. 이 기회에 좀 마음을 갈고 닦아봐.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왜 나는 여자친구를 가지고 싶어 하는지 등등. 응?”

유이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고, 저쪽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동우와 위로하는 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설마하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훌쩍, 그런 거라던가…….”

“아냐 아냐. 뭔 생각 하는지는 알겠는데 아니야.”

“난, 훌쩍, 진심이었는데, 으흑, 흑, 훌쩍.”

그리고 현상이 정신을 차리자, 유이는 어느새 옆에 와있었다.

“……어이, 괜찮은 거야?”

“뭐, 차버린거?

“아니, 그건 일상이니까 상관없어. 내가 말하는 건, 그런 식으로 본성 들어내도 괜찮냐는거야.”

현상의 물음에, 유이는 별 말 없이 무표정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걸 그만두고 유이는 입을 열었다.

“글쎄. 사실 난 아직도 꺼려져. 좀 무섭기도 하고.”

“무서워? 뭐가?”

“넌 모르는 거. 여하튼, 난 솔직히 꺼려지지만……. 편하긴 하지만, 불편하기도 하고……. 그래도, 어제 일로 약간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시험 삼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한데 불편하다는 건 무슨 소리야.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도 현상은 일단 이 문제는 밀어두기로 했다. 뭐, 상관없겠지. 저 녀석 일이니까. 그런 현상의 속을 들여다본 건지, 유이는 헛기침을 한두 번 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어제 그 녀석, 어떻게 생각해?”

“뭐, 이에나 말이야?”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뭐 나쁜 녀석은 아닌데, 뭐랄까, 성격 나쁘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어서 말이지. 하긴 너랑은 상관없겠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확실히, 태열이한테 하는 거 보면 그다지 호감은 안가지만,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으니까. 재미도 있는 것 같고.”

어제 일을 회상하는 현상을 보며, 유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뭐, 일단 도우러 온 거니까, 니 입장에서는 고마운 거 아니야? 어쨌든간 힘들다며.”

“뭐, 그건 그렇지만…….”

“거기에 친해 보이던데.”

“절대 아니야!”

버럭. 그 큰 소리에 이곳저곳에서 시선이 유이에게 집중되었지만, 웃으며 손을 올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대부분은 고개를 돌렸다. 왠지 긴장된 표정으로 그런 반응들을 바라보는 유이는, 잠시 후 현상에게 얼굴을 압박될 정도로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했다.

“누가, 누구랑, 친하다는 거야? 그 녀석이랑은 그다지 친하지 않다고. 흥, 제멋대로에, 성격 나쁘고, 일 저지르는 거 좋아하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그리고, 그리고 또…….”

딱 너네. 입으로 내뱉지는 않은 채, 현상은 그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여전히 저편에서는 세영이 동우를 위로하고, 옆에서는 아무리 봐도 동족혐오로밖에 보이지 않는 친구 험담을 나열하는 유이의 말을 들으며, 현상은 별말 없이 책을 열었다.

평화로운 시간이 또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졸리다.

숫자는 언어가 아니다.

나는 문과다.

그런 이유로, 현상은 수학 노트를 펴놓은 채, 앞에서 담임선생님이 수업을 하던 농담을 하던 어쩌던 시체와 유사한 꼴로 입에선 혈액 대신 타액을 내뱉으며 책상 위에 참으로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으아, 침…….”

축축한 느낌에 입가를 문지르며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졸리다. 앞에서는 담임의 뭔지 모르겠는 외래어를 이용한 주문이 계속되고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 주문 때문인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의식을 잃고 행동불능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런, 안되겠어. 아이템으론 모자라. 상태회복이 가능한 캐릭터가, 아니, 이 경우에는 수면을 넘어서 행동불능이니 부활이 가능한 캐릭터가, 아아, 그런데 MP가……. 마나포션이…….

안 돼. 정신 차리자. 다시 저 멀리로 떠나가려는 정신줄을 강하게 붙잡으려 노력하며, 현상은 고개를 쫓아 잠을 흔들려 했다. 잠시 쿨타임. 겨우 가동률 10% 미만으로 재기동 성공.

“흐우와아아아아ㅡ”

두뇌 냉각과 내부공기 환기를 위해 괴악한 소리를 내며 온몸을 차에 치인 개구리마냥 쭉 뻗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린다. 눈앞의 수업에 관심을 가지기도 싫고, 다시 잠들기도 싫은 고로, 현상은 일단 일말의 기대를 걸고 옆 자리의 동우의 옆구리를 찔러봤다.

“야, 일어나봐. 나 심심해. 같이 좀 놀자.”

“…….”

“어이, 좀 깨봐. 계속 자면 동우처럼 바보 된다. 정신 차리라니까.”

“…….흑, 으흑.”

“…….”

별말 없이, 현상은 옆자리의 친구를 건드리는걸 그만뒀다.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평소에도 울긴 하지만, 이건 신기록인데. 정말 진심이었나. 뭐 내 알바는 아니지.

“야, 김현상, 깼으면 공부 좀 해.”

뒷자리에서 들려온 소리에, 현상은 고개를 돌렸다. 생활엔 지장 없으나 그렇다고 눈이 좋은 편도 아니라 공부할 때만 끼는 안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경을 고쳐 쓰며, 세영은 잔소리 투로 말했다.

“너, 안 그래도 수학 성적도 안 좋잖아. 담임선생님 설명 잘 하시는 편이야. 학원도 안다니면 수업시간에라도 집중해야지. 부장처럼 머리가 좋아서 공부 안 해도 기본 실력으로 버티는 것도 아니고. 이제 고2이니까 수능에서도 지금 배우는 부분 나온단 말이야. 어쩌고저쩌고…….”

이하는 생략. 올해 들어서 같은 반이 되고, 뒷자리가 된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챙겨주는 세영의 관심에, 현상은 별말 없이 머리에서 청력 관련 신경의 두꺼비집을 내려버리고, 어깨를 으쓱 하고는 결국 할 일없이 정면의 칠판을 바라봤다. 하아.

심심하다.

창문으로는 봄바람이 선선히 불어오고, 담임선생님의 자장가 선율은 아늑하고, 사각거리는 연필 움직이는 소리가 조금씩 귀를 간지럽혔다. 어떻게든 정신을 집중해 세영의 말대로 공부에 집중하려 했지만, 선천적으로 뇌와 수학이 전압이 맞지 않는지 계속해서 물과 기름처럼 눈과 머리는 따로 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도 한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수는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야. 대부분은 다양한 모습으로 널브러져있었고, 나머지는 수다, 문자, 낙서, 기타 등등. 뭐 고등학교 수업이 다 그렇지. 스스로가 이제 고2 올라온 지 1개월도 안된 학생신분이라는 걸 잊은 채 그렇게 생각하며, 현상은 시계를 바라봤다. 다행히도 수업이 끝날 시간이 멀지 않았다. 음. 어느새 쉬는 시간에 맞추어 잠에서 일어날 정도로 숙달된 건가. 이유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현상은 턱을 괴고는 다시 정면의 칠판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문뜩 뭔가가 떠올라 힐끗 돌아보자, 유이는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으로 담임선생님의 판서를 열심히 베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공부에 대한 열의보다는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베끼고 보자’에 가까웠다. 하긴 저 녀석에게는 어려우려나. 딱 각잡힌 자세로 열심히 필기를 하는 그런 유이의 모습에, 현상은 미소 지었다. 물론, 약간 비웃는 느낌으로.

담임선생님은 판서를 마치고는 반의 아이들을 둘러보다,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에,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몇 분 남지도 않았으니까. 다들 수고했다.”

담임선생님이 교실 문을 나감과 동시에, 행동불능에 빠져있던 반 전원은 즉시 눈을 뜨고는 쉬는 시간에 맞춰 날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났나. 오늘도 충실한 수업이었군. 마치 처음부터 집중하고 있었다는 투로 기지개를 켜고는 책을 덮는 현상을 보면서, 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상은 그런 세영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옆자리에 있는 동우에게 친절하게 물었다.

“그만 잊고 매점이나 다녀오자. 주스 사줄게 주스.”

“겨우, 흑, 주스 따위로, 흐윽, 이 슬픔이, 잊혀질까보냐.”

“빵 추가.”

“다녀올까.”

드르륵. 동우의 기상과 동시에 나가려 현상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복도 쪽에서 뭔가 탄성 비슷한 것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반에 있던 모두의 고개가 빙글 돌아갔다.

“뭐냐 저건.”

“글쎄?”

현상과 동우는 서로 마주보고는, 세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세영 역시 왜 나를 보냐는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보자, 셋은 호기심에 천천히 복도로 나아갔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은 계속되었다. 음, 소리를 들어보니 싸움은 아닌데. 굳이 말하자면, 뭔가 신기한 것을 봤을 때 들려오는 탄성소리와 비슷한, 거기까지 생각한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등에서 느껴지는 가려움에 고개를 돌렸다. 유이는 핸드폰을 책상 아래로 살며시 내려다보고는, 공황상태의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현상을 바라봤다. 현상이 멈춰선 사이, 동우와 세영은 문을 잡고는 빼꼼 하고는 복도를 내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누가 온 모양인데? 저쪽에 애들 가득하다.”

“누구 학교에 올만한 사람 있나? 그보다 누구기에 저렇게 모여 있어?”

그때,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약간은 곤란해 하는 소녀가 두 명의 시선에 들어왔다. 분홍색 원피스의 사복. 아마 학교의 학생이 아니라, 역시 누군가 외부인인 모양이었다. 소녀는 자신을 바라보고 말을 거는 학생들 사이를 어렵게 거절하면서, 반을 보면서 동우와 세영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빨간색 단발머리. 갈색 눈동자. 중학생이나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 키 역시 그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였다. 누군가의 동생인가. 소녀는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 강했다. 뭐랄까, 외국의 풍경을 찍은 비디오에 나올법한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면, 저 빨간 머리 역시 학생이 하고 있을 머리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염색이라기보다는 천연, 원래 자기 머리 색깔이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동우와 세영은 다시 고개를 집어넣어 은발의, 이국적인 느낌의 동급생을 바라보았다. 그 동급생은 지금 막 현상이 어깨를 붙잡고 흔드는 통에, 고개를 크게 휘두르고 있었다.

“너, 뭐야 그거, 또 뭐야! 뭐냔 말이야!”

“아니, 이것 좀, 놓고, 말해, 이건, 나도, 잘, 모르는 거란, 말이야, 머리아파, 그만 좀…….”

“저기, 죄송한데요…….”

그 순간, 바로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동우와 세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시선보다 살짝 아래에, 소녀가 자신들을 보며 묻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여기가 2학년 3반 교실 맞나요?”

“…….”

떨떠름한 표정으로 끄덕끄덕. 소녀는 약간 안도하며 여전히 문을 붙잡고는 고개를 살짝 내민 두 사람에게 물었다.

“저,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이 반에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이라는 분 계시지 않나요?”

“…….”

살며시 손가락을 펴 교실 안을 가리킨다. 소녀는 고개를 내밀어, 둘의 몸 너머로 교실 안을 바라봤다. 그곳에 보이는 건 여전히 유이의 상체를 잡고 다급하게 흔드는 현상과, 락커와도 같이 머리를 헤드뱅잉 하는 유이의 모습. 그리고 시선을 눈치 채고, 현상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얼굴이 환해지는 게 동우와 세영의 눈에 들어 왔다.

“아, 언니!”

“레, 레니…….”

설마, 현상의 입이 구겨졌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어제 하나 또 등장했다고. 너무 자주잖아. 하하,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잖아. 우연의 일치가 그렇게 자주 있을 리도 없고. 설마, 설마하니, 설마하니ㅡ

“레니? 니가 어째서?”

너무 흔들었는지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며 하는 유이의 말에, 소녀는 밝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동우와 세영의 옆을 지나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교실 안의 모든 학생들의 시선, 그리고 복도에 나와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두 명에게로 집중되었다.

“오랜만이야. 언니.”

“……언니?”

설마하니, 설마하니, 굳어져가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 챘는지, 소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현상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저, 아, 안녕하세요. 어, 언니가 많이 폐를 끼치고 있네요. 동생인 샤마르니아 레니세피레닐이라고 해요. 자, 잘 부탁드립니다.”

“…….”

뭐 이딴 게 다 있ㅡ

 

 

“아, 저, 저기, 아, 안녕하세요……. 동생인, 샤, 샤마르니아 레니세피레닐이라고 합니다. 레니라고 부르시면 돼요.”

“…….”

“저, 저기, 제 얼굴에 뭐라도…….”

“…….아냐, 됐어. 네 잘못은 아니니까. 잘 왔어. 만나서 반가워.”

“그러면서 왜 날 노려보는 거야?”

레니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세영의 날카로운 눈빛에,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그 눈빛에,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레니 역시 몸을 움츠렸다. 세영은 현상을 잠시 지긋이 노려보고는 낡은 소파에 앉았다.

“그건 그렇고, 왜 니가 여기 있는 거야?”

그 말에, 세 명, 아니 유이까지 합쳐 네 명은 고개를 돌려 이에나ㅡ지금은 이예나ㅡ를 바라봤다. 눈 밑까지 내린 앞머리와 치렁치렁 기른 뒷머리가 참으로 기분 나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네 명은 또다시 몸을 움츠렸다.

“그보다 너 그거 어떻게 안 돼? 악취미도 정도가 있지.”

“학교에서 안 들키게 신경 써서 주문 건거라 지금은 안 돼. 뭐, 나도 솔직히 좀 답답하긴 하지만.”

지금 모습과는 안 어울리게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쓸어 올리는 자세를 보면서, 네 명은 말없이 생각했다. 그보다 애당초 도대체 왜 그런걸 하고 있는 거야…….”

현재 장소는 부실. 시간은 점심시간. 운동장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 사이에서, 다섯 명은 식후 간식을 즐기며 임시 작전회의를 열고 있었다. 참가자는 현장 책임자 유이, 현장 보조자 1 이에나, 현장 보조자 2 레니, 참관인 현상, 참관인 세영.

“근데, 그러고 보니 태열이 온다고 안 해? 나름 커플인데 좀 불쌍하게.”

“뭐, 온다고 우기긴 했는데 들킬 순 없으니까. 점심 같이 먹어줬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좀 놀아주는 건데 제대로 넘어가서 말이지. 아아, 양심의 가책이여. 뭐, 여기서 떠날 때까지 계획은 완벽하니까 괜찮겠지.”

연극 투로 말하는 이에나를 보며, 네 명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악취미도 저렇게 나쁜 악취미가 있을까.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다니. 유이는 이미 많이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레니는 우물쭈물하며 같이 고개를 돌렸다. 특히 열 받은 세영이 튀어나가며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현상이 팔을 잡고 멈추게 해서 일단은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뭐야, 왜 말려. 난 저런 꼴 죽어도 못 봐.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다니.”

“일단은 참아. 지금 판 깨봤자 태열이만 상처 받아. 떠날 때까지 계획했다면 아무것도 모르게 한 봄날의 추억으로 남겨 두는 게 좋잖아. 다 끝나면 맘대로 해. 나도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거기, 뭘 그렇게 속닥거려? 뭔가 할 말 있어?”

“아, 아냐. 아무것도.”

이에나의 말에 놀라면서도 현상은 재빨리 대꾸했다. 깜짝이야. 들린건 아니겠지. 이에나는 단지 ‘흐흥’하고 작은 콧소리를 내고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 왠지 모를 무거운 공기가 부실 안을 떠돌아다녔다.

“그, 그래서, 갑자기 모이라고 한건 왜야?”

어떻게든 공기를 환기하려는 현상의 말에, 유이, 이에나, 레니는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그 박력에, 현상과 세영은 약간 표정을 굳혔다.

“뭐, 당연히 모인 이유는 요 근래 이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 때문. 요전에 보고를 넣어서 지원도 왔으니,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처’가 아니라 ‘해결’을 시작해야하니까. 이에나는 여기서 있었으니까 어떻게 되는 건지 대강은 알고 있겠지.”

“뭐, 밤에 여기 오진 않았지만 전투공역 정도는 느낄 수 있으니까.”

“레니는?”

“아, 응. 파견 되기 전에 간단한 브리핑을 받았으니까. 근데, 아까부터 신경쓰이던건데…….”

레니의 조용한 목소리에, 유이는 현상과 세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들 이야기라면, 뭐, 짐작 하겠지만 그런 거야.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이것들이 뭐야 이것들이. 애당초 난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고. 표현 존칭으로 못 쓰냐. 한국어도 잘 알잖아. 응?”

“세, 세영아, 좀 진정하고,”

“아니, 그게 아니라…….”

조용하고 차분한 그 목소리에, 모두는 움직임을 멈추며 레니를 바라봤다. 뭐랄까, 똑같이 조용하고 소심한데 왜 연아한테서 느껴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걸까. 이쪽의 분위기에는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현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레니는 이에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이에나 언니까지 여기 있는 거야?”

그 말에, 전원의 시선이 캔 홍차를 마시는 이에나에게로 집중됐다. 현상과 세영은 레니에게로 머리를 돌리곤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 어제 유이가 지원요청을 해서 왔다고…….”

“보통 지원 요청을 하면 한명 정도 파견돼요. 두 명 이상이 지원 역으로 파견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사태이거나 할 때거든요. 근데 어째서…….”

“아아, 뭔가 했더니 그 이야기였어?”

캔을 내려놓으며 말하는 이에나에게 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뭐야, 그 눈초리는. 어제 말 했잖아. 가까운데 있어서였다고. 지원은 보냈지만 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보고서에는 매일 대형 악수가 나온다고 했으니까 긴급 백업으로 보내진 거지. 뭐, 내가 자격 정지였다는 것도 있고. 요새 일손은 모자란데 사람은 없으니까, 빨리 뭔가 건수를 만들어서 이 몸의 자격 정지를 풀어 줘야하지 않겠어? 이 몸이 나서면 걱정 따윈 없으니까 말이야.”

“아, 그렇다면 그럴수도…….”

“웃기고 있네. 너같은 건 없는 편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된다고. 이번엔 창고가 아니라 공장정도는 말아먹게?”

“뭐야? 자기는 저번에도 제대로 못해서 이번으로 헬프 부른 게 올해 들어서만 세 번째면서. 그거 알아? 세 번 다 채우면 진급 심사에서 마이너스 작용한다? 그것도 대ㅡ폭. 지원요청이라는건 제 할 일도 제대로 못한다는 거니까, 심사에서 좋은 점수를 줄 리가 없지. 안됐네. 평생 2급 전투요원으로 썩으렴.”

“뭐라고? 자기는 자격 정지면서! 그리고 내가 파견된건 전부 A급 임무니까 그렇지! 맨날 B급 C급 처리하면서 사고 벌리는 주제에!”

“해볼래!”

갑자기 아웅다웅하기 시작한 유이와 이에나를 보면서, 현상과 세영은 단지 입을 벌리고 둘과 레니를 바라봤다. 레니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 둘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무안해서 그러는걸 테니까.”

“무안해서?”

이제는 일어서서 꽥꽥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둘을 보면서 세영은 몸을 기울였다. 레니 역시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고, 현상도 이야기를 슬쩍 들으러 몸을 기울였다. 뭐, 저쪽 싸우는 것도 꽤 볼만은 하지만, 젊은 처자들 싸우는 거 보는 것도 좀.

“네. 예전부터 둘이서 친했는데, 늘 저렇게 겉으로는 서로 싸워서요. 둘 다 프라이드 같은 게 둘 다 강하고 죽어도 지는걸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같은 성격인 만큼 더 그러는 거겠죠. 지금도 언니가 의심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미안하다던가, 그런 말은 못하겠으니까 저러는 거예요. 사실은 친하면서.”

그 순간 귓가에서 울리는 강한 소리에, 세 명은 일제히 귀를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누구랑 친해? 사실을 전할 거면 똑바로 전해!”

“맞아! 누가 이런 거랑! 아무리 언니가 이 모양이라도 레니 너는 똑바로 커야지!”

“뭐야? 이런 거? 이 모양? 이게 진짜!”

그리고 다시 저쪽으로 가서 싸움. 가장 귓가에 큰 소리를 들은 세영은 귀를 막고 끙끙거리기 시작했고, 가장 멀리 떨어진 현상조차 가슴을 누르고 튀어나올 듯 뛰어다니는 심장을 억눌렀다. 목도 안 아픈가.

“킥.”

“아무리 그래도 비웃는 건 좀 심하잖아.”

현상의 볼멘 소리에, 레니는 깜짝 놀라 이제는 입식 타격전 비슷한걸 벌이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손을 가로저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역시 사이좋구나 해서.”

“……저게? 어떻게 봐도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뭐, 확실히 겉에서 보기엔 그렇게 보이지만…….”

애매하게 웃는 레니를 보면서, 현상은 다시 한 번 얘가 정말 저기서 품위 없이 머리끄덩이 잡으려고 기싸움하는 그거 동생이 맞나 고민했다.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그런 현상의 생각을 모르는 레니는 여전히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저런 친구라도 있는 게 어디에요. 보통 사람은 가지기 힘든 친구잖아요?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싸워도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할 필요 없는 친구는.”

“뭐, 그건 확실히 그럴지도. 그런 면에서는 사이좋다는 거 알겠어.”

“할머니랑 이에나 언니 스승님이랑 친분이 있으셔서요. 두 분도 서로 라이벌이랄까, 그런 존재다보니, 제 1 제자였던 둘도 자연스럽게 친하면서 투닥거리게 됐어요. 스승님들끼리 짜고서 둘이서 같이 훈련을 받게 한다던지, 같이 임무를 수행하게 한다던지 하면서요. 그러니까 서로 서로를 잘 아니까, 인정하면서도 각자 질수는 없으니까 저렇게 우기는거에요. 스승님의 명예도 있고, 자기 자존심도 강하니까.”

“흐음. 뭔가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사이인 것 같아.”

현상의 감상에, 레니는 킥킥거리고는 손가락을 피며 말했다.

“그럴 것이, ‘마법소녀’ 라고요? 이미 만화 속의 존재잖아요.”

“……맞아. 그랬지. 어느새 익숙해져버렸어.”

머리를 감싸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현상을 보며 레니는 웃음을 지었다. 별 생각 없이 히쭉 하고 웃어준 후 현상은 여전히 두 사람을 구경했다. 이제 둘은 서로 양쪽의 머리를 한 움큼씩 잡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언니는 이쪽에서 어떻게 지내요? 잘 지내나요?”

“뭐, 먹고 사는 문제는 난 모르겠지만, 잘 보내는 게 아닐까 싶어. 제 성격 드러낸 다음엔 부원들하고도 친해졌고.”

“에? 저 성격 드러냈어요?”

깜짝 놀라는 레니의 목소리에, 현상은 고개를 돌렸다. 뭐, 확실히 내숭 하나는 최고였었으니까, 보통은 안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뭐, 정확히는 ‘들켰다’ 라는 게 맞겠지. 여기 있는 세영이가 다 까발려버렸거든. 아아, 괜찮아. 적어도 이 녀석 주변에 있는 아이 중에는 그런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알고 있는 이 몸에게 들킨 이 녀석은 행운아야. 뭐, 안 들켜줬으면 더 고마웠겠지만.”

“그래서, 언니의 반응은요?”

“글쎄? 처음엔 꽤 겉돌더니, 잘 적응한 것 같아. 뭐 이제 들킨 지 하루밖에 안됐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 어제 부에서 놀러가서 그렇게 된 거였거든. 꽤 즐거워하는 것 같던데.”

현상의 말에, 레니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좀 이런 저런 이유가 있어서, 주변에서도, 그리고 스스로도 계속 쉬지 않고 임무에 나갔으니까요. 작은 거라도 즐거울거에요. 같이 말하는 정도만으로도. 그러니까, 정말로 고마워요.”

“엉?”

예상하지 못한 말에 현상이 고개를 돌리자, 레니는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우와, 갑자기 왜이래.

“가, 갑자기 왜 그래? 고개 들어 고개. 응? 내가 뭐 대단한 것 한 것 같잖아.”

“아뇨, 대단한 것 하신 거 맞아요. 적어도 언니에게 있어서는. 그러니까, 이건 동생으로서의 그 보답이에요. 이 정도밖에 못하는 건 죄송스럽지만. 그러니까, 그냥 제가 감사하게 해주세요.”

그 말에, 현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 뒷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건지. 레니는 꽤나 오랫동안,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세영이 양쪽 귀를 막은 채로 고개를 들고, 유이와 이에나가 서로의 머리 뜯겨진 머리 한줌을 들고 헉헉거리다 그 광경을 눈치챌 때까지.

 

 

“아, 안녕하세요. 동생인 샤마르니아 레니세피레닐이라 합니다. 잘 부탁 드립…….”

“유이 작가의 동생인가! 환영하네! Welcome to 세평고교 문학창작부! 이곳은 학생들의 꿈과 희망과 낭만이 숨 쉬는 곳으로서 문학열이 가득한 학생들이 매달 그들의 지식의 샘에서 나온 정기로 새로운 글을 창조하는 건설적 행동의 최전선에 선 장소일세! 어때! 자네도 언니와 함께 이 성스러운 지식의 성전에 참가하여 창작과 자유의 깃발을 높게 들어 올리지 않겠나! 참고로 참가는 연중무휴 365일 24시간 언제든 자유에 제한 조건 없음일세.”

“……니다. 언니가 신세를 지고 있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양팔을 벌려 베어허그라도 할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부장을 보며, 레니는 한번 움찔 한 다음 그대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리버리하고 둔해 보이면서 은근히 사람 보는 눈은 날카롭군. 자기 자리에 앉은 채 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양이 반짝이는 방과 후 구교사 부실. 7인의 부원과 선생님과 1명의 신입부원과 1명의 손님과 1명의 견습생은 좁은 부실을 가득 매꾸며 각자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럽고 지저분하며 어지러운 부실은 덕분에 정말로 포화상태.

“으흠, 저 유이 동생이라 이거지? 이야기는 들었는데 어떻게 온 거야?”

“저희는 아직 학교 개학 안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지내나 하고 보러 온 거에요.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났으니까 잘 지내고 있는것 같네요.”

밝은 얼굴로 대답하는 레니의 얼굴을 보며, 부부장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분들이라니, 부끄럽게. 근데 설마하니, 너도 유이처럼 내숭 떠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에요. 언니야 그런 성격이지만 전 순수하다고요.”

“순수한 사람은 스스로 순순하다고 안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보다 누가 ‘그런 성격’이라는 거야? 레니 너 말 제대로 못해?”

“우와, 어제 본성 들어나더니 이제 숨기려는 노력조차 안하는구나. 꿀꺽, 동생양도 참 힘들겠어. 하긴 이런 것들+저런 것까지 관리해야 하는 나보다야 낫지만…….”

꺄악꺄악거리며 재잘거리는 여성 일동을 보며, 현상은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는 태열이가 이예나와 찰싹 달라붙어서는 뭔가를 두런두런 이야기 중. 왠지 짜증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잘됐나 하는 느낌이 들은 다음, 현상은 한숨을 쉬며 턱을 책상에 박았다. 뭐, 모르는 채면 얼마나 보기 좋은 광경이냐. 내 알바 아니지. 그보다 낄만한 곳이 없어서 참 심심한데. 군중 속의 고독은 보통 고독보다 더 슬픈 법이다. 그리고 결국 현상은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여성진은 유이와 레니 자매를 데리고 꺄악거리고, 태열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표정을 가장한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예나와 겉보기엔 러브러브를 즐기는 사이, 부장은 화이트보드에 뭔가를 적는 것을 끝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다음, 부장은 화이트보드를 꽝 하고 쳐 주위를 집중시키며 말했다.

“좋아, 인사는 그 정도로 하게. 대인관계증진도 좋겠지만 목적을 잊으면 곤란하지. 그리고 그쪽의 성태열 작가는 러브러브 행태는 공공장소에서 건전하게 즐기거나 사적장소에서 은밀하게 즐기도록 하게. 이렇게 반응하기 힘든 장소에서 그러지 말고. 여하튼, 오늘 자네들을 부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부른 적 없는데. 모두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화이트보드를 본 순간 강력한 충격에 어이가 비상탈출 버튼을 누르고 사출식 좌석으로 베일아웃 해버린 덕분에, 그 생각은 채 0.02초를 버티지 못하고 부실에서 사라져버렸다. 부장은 모두의 표정을 훑어보고 만족했는지 다시 화이트보드에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뭔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화이트보드에서 글자가 가운데에 대문짝만하게 쓰여진 ‘2차 마법소녀 탐색 회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구석에 멀티를 짓기 시작했다.

“지난 금요일에 말했었지. 교내에 마법소녀가 있는걸 누군가 목격한 것 같고, 그것이 아무리 봐도 사실 같다고. 그래서 우리 부서는 탐색을 결정했고, 자네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와 한명만큼은 주말동안에도 착실히 탐색을 계속했네. 뭐, 덕분에 진귀한 정보는 잔뜩 모을 수 있었지.”

레니의 날카로운 시선이 차례대로 유이, 현상, 세영을 스쳐지나갔고, 세명은 고개를 말 그대로 홱 돌려서 외면해버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예나ㅡ아니 이 눈빛은 이에나로서ㅡ의 날카로운 시선이 눈에 박혀, 세 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레니를 바라본 다음, 각자 취향대로 시선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주, 주말에도 계속해서 조사했던 거예요?”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며 물어보는 세영의 질문에 부장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화이트보드에 뭔가를 적어가며 말했다. 이제 화이트보드는 글씨에 거의 점령상태.

“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네. 탐문조사만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보가 모였지만 말일세. 뭐, 일단 들어오게.”

“들어오라니, 누구한테 말하는 거예요?”

“나.”

문이 열리며 들리는 소리에, 현상은, 그리고 전원은 깜짝 놀라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한손으로 인사를 하며, 신문부 소속 명예문학부원 류가은은 한가롭게 들어와 부장의 옆에 섰다. 이마에는 ‘취재 중’이라는 의미로 쓰고 다니는 두건이 묶여져 있었다. 설마하니 아까부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왠지 시선은 레니에게로 집중되어있었다.

“으흠,”

헛기침으로 운을 떼고 나서, 가은은 부장을 보고ㅡ서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ㅡ부장이 미리 칠판에 써놓은 내용, 즉 시간표를 가리켰다.

“시작해도 좋네.”

부장의 말과 동시에 가은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시간표는 첫 소문 개시 이후 현재까지의 조사 및 소문 전파 상황에 대한 내용입니다. 일단 지난주 목요일 오전 중 소문이 전파 개시. 정확한 시간대는 1교시 끝~2교시 끝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소문 발생 시작 지점은 2학년 문과 반과 3학년 문과 반 일대로서, 정확한 소문의 근원지는ㅡ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거짓말. 가은이 한 박자 쉬고 말하는 사이, 현상과 유이와 세영 세 사람은 롤러코스터가 급강하 하는 기분을 맛봤다. 다 알고 있으면서 무슨 놈의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냐.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셋이서 그렇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웅얼대는 순간, 유이의 눈이 고통에 가득찼다. 비명이 흘러나오는 목구멍은 재빨리 혀로 커버. 치마와 함께 허벅지 살이 강하게 꼬집혀 있었고, 꼬집고 있는 팔의 주인은 태열이 에너지보존ㅡ즉 수면ㅡ에 들어간 사이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이에나. 레니는 옆에서 말 그대로 애증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는 중.

도대체 저게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자세하게 설명해봐.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봐도 난 할 말 없다고. 물어볼 거면 옆 자리의 이 바보 녀석에게 물어봐.

왜 나한테 총대를 메게……. 우와, 잠깐, 그런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난 필사적이었다고. 이런 녀석에게 휘둘리기 싫었단 말이야.

“이윽고 소문은 일단 목요일 방과 후까지 확대. 그러나 금요일 오후 무렵을 기점으로 급속하게 열기를 식어갔습니다. 분명 상식적인 내용과 반대되기 때문에, 호기심과 재미로 퍼지던 소문의 한계였던 것이겠죠. 이후 현재는 소문으로서의 가치는 완전히 0, 파묻혀진 존재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 구석의 아수라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은은 어느새 손에 쥐고 있는 차트를 한 장 넘겼다.

“류가은 명예부원, 그럼 그 건은 되었고, 우리 문학부의 조사 내용을,”

“네. 우리 문학부는 다음날 부장의 선언으로 소문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시점인 금요일 오후 조사를 개시했습니다. 일단 금요일 오전 부장의 조사로 밝혀진 바는 구교사 비품이 몇 개 쓰러져 있었던 것과 쓰레기장의 부러진 빗자루 등이었습니다. 이 이후 부장과 제가 독자적인 조사를 개시. 금요일 오후 여러 정보망을 통해 소문이 상당히 사실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정확한 소문의 내용은?”

“소문의 내용은 교내에 마법소녀가 있다 라는 것. 여기서 마법소녀는 애니메이션에 나올듯한 코스프레 소녀와 말 그대로 마법을 사용하는 정통파 마법사 소녀 이 두 가지 의미 중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정보통들의 의견에 의하면 그 중간쯤 되는 형태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보통의 소식에 의하면, 요 근래 전학 온 여학생이 그 마법소녀라는 소문이 교내 마법소녀 소문의 시초였다는 것 이었습니다.”

딸꾹.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한 레니에게 연아가 차를 내미는 사이, 유이의 허벅지와 치마는 이제 거의 걸레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하얀 실내화 역시 하도 짓이겨져서 이제는 진회색. 소리 없는 고통의 비명을 어설프게 웃고 있는 얼굴 아래로 숨기고, 눈으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항변하는 사이에도 가은과 부장의 거의 일대 일 조사 내용 브리핑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학교 외의 누군지 이름을 밝히지 않겠는 제 정보통 중 한명이 용의자 학생, 즉 요 근래 전학 온 학생의 집에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보통은 저에게 몇 가지 법적으로 하자가 있는 물건을 가지고 가서 설치했습니다.”

“좋군. 성과는?”

“없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일상적인 내용뿐이더군요. 특별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밤중에 9시 무렵부터 10시 무렵까지 외출을 한 것 뿐.”

“그렇다면 조사 대상에서 제외해도 문제가 없겠나?”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너무나도 일상적인 내용이 걸립니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제 과대망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판단은 부장에게 맡기겠습니다.”

“알겠네. 일단 계속 감시하도록. 다음은?”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둘만의 즐거운 회담에 이미 문학부원들은 전부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작은 소란의 안에서는 흥미ㅡ아니 위기감이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저거 분명 우리 이야기 아니야?

마, 맞는 것 같은데?

위험하다. 진짜 위험해. 유이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어? 집 안에 도청기와 몰카를 들고 들어오게 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벌써 꽤나 진상에 도달해 있잖아!

이, 일단 진정해 진정.

거기 모든 사건의 주범은 조용히 해. 도청기와 몰카 설치도 네가 한 거 아니야? 어떻게 숙녀의 집에 교양 없이 그럴 수가 있어? 인간 이하의 짓이야. 추잡해. 천해.

내가 한 거 아니야! 그건 얘가…….

그걸 그렇다고 다 불어 제끼냐! 사내녀석이라는 놈이! 그래, 내가 했다! 교양 없고 인간 이하에 추잡하고 천해서 미안하다!

지금 뭘 잘했다고 역으로 큰소리야? 어떻게 책임 질거야?

생각해보니 이렇게 핀치에 몰린 건 너희 둘 때문이잖아. 어떻게 책임 질거야? 응?

유이 너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책임? 내가 왜? 자업자득이지. 흥. 이제 부장에게 걸렸으니 울고불고 짜도 소용없어. 해부나 하지 말아달라고 빌어봐.

“ㅡ입니다. 이상이 조사한 내용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보고는 끝나고, 부장과 가은은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화이트보드를 바라봤다. 그 사이에 글씨는 지워지고 새로운 글자가 써지고 도형이 그려지고 그래프와 각종 메모가 휘갈겨져서 마치 아방가르드풍 예술 작품으로 보였다.

“으흠, 그렇다는 건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실로 아방가르드틱한 형이상적 대화를 나누는 두 명. 우와, 위험해. 진짜로 위험해. 옆에서 이젠 오로지 서로 치고 박는 데에만 몰두하는 여성 세 명과 말리는 한명을 힐끗 쳐다보고, 현상은 그들을 즉시 전력에서 제외시켰다. 어째서 가장 중요한데 도움이 안 되냐. 저것들은. 여하튼간 위험하다. 소란 밖에 있던 현상은 부장과 가은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미 저 둘은 진실을 밝혀놓고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자아, 어떻게 한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심장이 쿵쿵거리는걸 느끼며 고개를 돌린다. 다행히도 나머지 부원들은 이제 긴 말에 관심이 완전히 사라져 각자 일을 하고 있는 걸로 보이니 괜찮을 것 같고, 문제는 저 둘이다.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미 답을 알아버렸거든. 생각하다가 손에 답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걸로 끝이다. 에누리도 할인도 포인트도 아무것도 없다. 컨티뉴도 로드도 모두 불가. 왜 내가 이런 위험한 일에 혼자서 총대를 메야 하냐. 난 어디까지나 평범한 소년ㅡ

“그렇다는 건 역시ㅡ”

“으우와아아아아아아아!”

괴성을 빽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현상에게 반 안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전히 자고 있는 태열만큼은 예외였지만, 턱을 괸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부장마저도 그 기세에 움찔 하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김현상 작가, 무슨 일인가. 그 뭔가 주변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때 말허리를 자르는 듯한 비ㅡ”

“왁! 왁! 으우오아아아아악!”

조용. 헉헉대는 현상의 거친 숨소리 이외에 부 안의 모든 사람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채 오로지 현상만을 바라봤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오른쪽 검지를 관자놀이 부근에서 빙글빙글 돌리는 선생님에게, 차례대로 부부장, 연아, 성미, 세영, 유이, 이예나, 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는 생각했다. 드디어 저 녀석이 미쳤구나.

“부장, 그런 어떠한 근거도 무엇도 없이 하는 마녀사냥식 언론몰이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 안 해요? 옛 나치스의 선전대장을 맡았던 괴벨스는 한 마디만으로도 어떠한 사람이든 범죄자를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이는 그의 악마성을 증명하는 말이 아니라 언론과 왜곡의 힘을 알리는 말이지요. 어떠한 증명이나 목격자료 없이 단지 재미를 위해서 누군가가 책임감 없이 내뱉은 말에 의해 우리 자랑스러운 세평고교 문학창작부가 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이 이리저리 움직여야겠습니까. 우리의 임무는 저 가증스러운 신문부와 같이 그때그때의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몇 십 몇 백 몇 천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진실을 전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해요 부장.”

일단 막아야한다. 어떻게든 막아야한다. 왜 내가 막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막아야한다. 이젠 머릿속에 오로지 그 생각만을 가진 채로, 현상은 스스로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른 채 일단 말 그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어째서 내가 이딴 일에 총대를 메야 하냔 말이다. 빠른 사고의 급류 속에서 잠깐 그 생각이 표면으로 나왔다 사라졌다.

“아니, 자네 의견도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동안 조사로 밝혀진 사실까지 왜곡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조사로 인해서 그 마법소녀가…….”

“왁! 왁왁! 아 글쎄 사람 말을 왜 그리 못 알아들으십니까 부장. 애당초 그 조사라는 게 모두 심증, 책임감 없는 발언, 정확한 이름 없는 목격자 A의 증언, 그런 것에 기초를 둔 내용 아니에요. 그런 것은 모두 3류 가십지에나 나올 흥미 위주의 내용 아닙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고요.”

“아니, 현상아. 나름대로 나도 조사 열심히 했다? 그리고 3류 가십지라니 말이 심하잖아. 의외로 그런 게 진실을 전하는 법이라고. 그리고 그런 기자들도 발에 땀띠 나도록 달리는 경우도 있어. 나도 그런 조사를 해서 그 마법소녀가…….”

“명예부원은 그 입 다물라 다물라 다물라! 여하튼 난 이 조사 반댈세! 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는 안…….”

퍽퍽. 부장과 가은이 어디서 준비했는지 던진 흙을 얼굴에 잔뜩 맞은 현상은, 한 순간 “마이 아이(Eye)! 마이 아이!”를 외친 다음, 침착하게 얼굴을 훑고, 눈을 비빈 다음, 주춤주춤 손짓으로 냉장고를 찾아가 냉수를 꺼내 눈에 부운 다음, 약 열일곱 번 눈을 깜빡거리고, 얼굴에 있는 물기를 닦은 다음,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여하튼 전 이 조사 반대입니다. 이건 우리와 맞지 않는 내용이라고요.”

“자네도 은근히 터프하군. 좋아, 김현상 작가. 자네의 의견이 맞다고 치지. 그렇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맨 처음에 말하지 않은 건가. 왜 조사가 다 끝난 지금에 와서야 그 의견을 밝히는 건가. 이건 세간말로 나와 류가은 명예부원을 엿 먹이려는 의도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사건은 회의실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일어나는 법이거든요.”

“뭔 소리인지. 여하튼 알았네.”

의외로 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에 전원이 놀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당황해하며, 부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가. 난 이래봬도 부하를 존중하고 자율성을 인정한단 말이네. 비록 이 경우엔 김현상 작가가 다른 사람의 수고를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인간 이하 말종의 태도를 아낌없이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를 존중할 정도로 관대하단 말이네. 여하튼, 김현상 작가, 좋아. 자네 의견을 존중하지. 그렇지만 그럼 나와 류가은 명예부원이 쏟은 수고를 없애버린 책임은 져야겠지.”

꿀꺽. 현상의 목구멍이 움직였다. 부장은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고 엉클 샘과 같은 자세로 현상을 가리켰다.

“이 사건, 자네가 담당하게. 자네 말대로 심증, 책임감 없는 발언, 정확한 이름 없는 목격자 A의 증언, 그런 것에 기초를 둔 내용 따위는 용납하지 않겠네. 완벽하게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잡아 오도록. 잡지 못하면 구워서 잡아먹겠네. 알겠나? 기한은 다음 주까지. 취재 방법은 자유. 자, 그럼 전원 해산.”

“…….”

짝짝 하는 부장의 박수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끼이익. 그때 들려온 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부실엔 아무도 없었다. 부부장이나 선생님, 연아, 성미등은 물론이고 세영, 유이, 그리고 오늘 처음 온 이예나와 레니, 심지어 자고 있던 태열조차도. 본능적인 살기를 감지한 건지 저 멀리에 타다닥 하는 재빠른 발걸음 소리들만이 들려왔다. 잠깐, 이거 얼마 전에 본 광경인데. 현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부장이 현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툭툭. 그렇게 두 번 두드리고, ‘너도 한번 엿먹어봐라’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다음, 부장은 문을 닫고 나갔다. 저 멀리 들려오는 발소리.

거의 내려앉은 석양에서 나오는 마지막 주황빛만이 현상과 함께 부실에 남아있었다.

 

 

아무리 전투공역 응용으로 커버한다고 해도, 4명이나 편의점 안에서 노닥거리는 건 그렇지 않냐 는 의견에 따라, 방과 후의 회의는 카페에서 하기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늘 그렇듯 한가한 카페 ‘라임’ 구석에서는 지금 나름대로 진지해 보이는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 응? 까짓거 한명만 좀 나 좀 도와줘!”

“달라붙지 마! 이제 겨우 자격정지 풀렸는데 또 자격정지 된단 말이야.”

“뭐……. 저희들을 위해서 노력해주신 건 알겠는데, 그런 눈으로 쳐다보셔도 좀…….”

“사나이라는 건 인정해줄게. 그러니까 그냥 가라앉아. 수고했어, 사나이 김현상.”

쾅. 결국 참지 못하고 책상에 머리를 박은 현상을 보면서, 세 여성은 별말 없이 각자 시킨 주스를 빨대로 한 모금씩 마셨다. 꿀꺽.

“그러고 보니 세영이는?”

“오늘 학원 있어. 시험도 있어서 밤늦게까지 있으니까 오늘은 안 나온다던데.”

“으흠.”

현상의 말을 듣고 주스를 한모금 더 마신 다음, 유이는 진지하게 얼굴을 바꾸며 말을 시작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일단 사태는 전부 알지?”

“아까도 말했지만 다들 아니까 서론은 빼자고. 이래봬도 바쁜 몸이야.”

“알았어 알았어. 그럼 시작하자고. 요 주변 사건은 심상치 않아. 거대 악수가 자주 나오는 현상이며, 소형 악수는 한 번에 몇 마리씩 나왔어. 보통 악의 집중 포인트는 한곳정도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분명 뭔가, 아니면 누군가가 있는 거야.”

“언니는 뭐 짐작가는거 있어?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지, 악의의 양이 비정상적으로 많은걸 보면 잘 알순 없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등장 형태와 전투 방식이 바뀌는걸 보면 일단 뭔가 보다는 누군가 같아. 지능이 있는 뭔가야.”

“흐음.”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세 명을 보면서, 현상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카페 점장을 바라봤다. 서빙과 범위설정 때문에 오늘은 전투공역을 펼치지 않아서인지, 이쪽의 시선을 눈치 챈 건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저쪽으로 서빙 하러 가버렸다. 저렇게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 때문에 부장이 여기를 믿는 거겠지. 나도 믿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고, 현상은 턱을 박은채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의도는 모르겠어. 단순한 파괴행위라고 보기에는 위험도에 비해 피해가 너무 적어. 까놓고 말해서, 안되면 대형 악수 소환한 다음에 그냥 마을로 밀고 내려가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늘 이쪽이 나타나면 이쪽에 대응하려고 했단 말이지.”

“그런걸 보면 사람이 아니라 뭔가 유물 같은 거 아닐까? 악수가 스스로 위협을 느끼고 본성대로 자기방어를 위해 움직이는 거잖아.”

“나도 그 생각을 해봤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말했다시피 그럼 매번 악수의 등장형태가 바뀌는 게 설명이 안 되니까. 그렇다고 이쪽을 노리는 누군가도 아닌 것 같아. 본격적으로 공격하지 않았어.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면, 오히려 그냥 소환해놓고 방치했다고밖에 볼 수 없어.”

“언니가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대부분 현상이 오빠를 노렸다던데, 그건?”

그 말에, 세 명의 시선이 갑자기 집중되어서 현상은 재빨리 턱을 책상에서 떼고 근엄한 듯한 자세를 잡았다. 각자 원하는 크기와 깊이로 한숨을 쉰 다음, 유이는 현상에게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보고서에 적어놨다시피 이유는 모르겠어. 뭐 고의로 노렸다고 생각하기엔, 또 너무 봐줘. 이 녀석은 이미 죽이려고 했으면 몇 번이고 죽었을 테니까. 뒤처리 해주는 나도 힘들었다고ㅡ. 사내 녀석이 칠칠치 못하지, 약하지, 그리고 또…….”

“거기서 스톱. 애당초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난 정상적인 삶을 영위했을 거라고. 여하튼, 그래서 뭐라고 보는 거야?”

현상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유이는 의자에 등을 받치며 양팔을 과장되게 벌렸다.

“말 그대로, 모르겠어. 사회혼란을 노리는 것도 아니야, 이쪽을 노리는 것도 아니야, 이 녀석을 노리는 것도 아니야, 말 그대로 그냥 소환하고 끝이야. 그냥 실험삼아 소환 해보는 게 목적이라고 보는 게 더 좋을 정도로.”

“그럼 위험하지 않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 어쨌든 상대는 대형 악수를 거의 매일 소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야. 그냥 실험이라고 보는 것도 그런 면에선 이상하지. 정말로 모르겠어. 뭐 때문에 이런 구석 지역에서 이런 큰일을, 그것도 아무 목적도 없이 벌이는 건지. 여하튼, 그 진위를 알 수 없기에 더 위험해. 차라리 뭐 하나로 밝혀지면 그것만 대비하면 되지만, 뭘 저지를지 모르니까.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뭐, 괜찮지 않을까? ‘은빛의 유이’에, ‘금빛의 이에나’, 2급 전투원 투톱이 여기 다 모였으니까.”

“거기에 ‘빛의 레니’까지 있으니까. 뭐, 괜찮겠네.”

하하하 웃으며 이야기 하던 순간, 그들은 한명의 시선을 눈치챘다. 잘그락, 하고 잔 속의 얼음이 위치를 바꿨다.

“‘은빛의 유이’……? ‘금빛의 이에나’……? ‘빛의 레니’……?”

“……어, 저기, 그게…….”

“풉.”

온 얼굴에 ‘유치해 돌아가시겠네’ 라고 써넣은 표정으로 입을 보이도록 가리고 본격적으로 비웃는 현상의 눈빛에, 세 명의 몸짓이 굳어졌다.

“헤에ㅡ ‘은빛의 유이’씨에 ‘금빛의 이에나’씨에 ‘빛의 레니’씨라. 그것 참 화려한 네이밍 센스네요. 푸훕. 어째서 마법사 어쩌고 하는 녀석들은 만화 속이고 현실이고 이렇게 유치하고 쓸데없이 거창한 앞 이름을 다는 걸까나ㅡ 까나ㅡ. 푸하하하하하. 앞으로 3박 4일은 웃는데에 지장 없겠네. 푸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아ㅡ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말 그대로 ‘재수 없게’ 웃는 현상을 보면서, 가장 먼저 행동한건 유이였다.

“시, 시끄러! 뭐, 뭐가 유치하다는 거야! 경의를 표하는 이름이라고! 너, 너는 그런 이름 같은 거 있어?!”

“아뇨. 없습니다 ‘은빛의 유이’님. 푸하하하하하. 그래.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는 그걸로 불러주지. 아, 세영이한테도 연락해야겠다. 학원이라도 문자는 받을 테니까. 어디보자…….”

“꺄악! 끼야아아악! 끼약! 꺅!”

니가 무슨 까마귀냐. 양팔을 크게 벌리며 마구 소리치는 유이를 보면서, 현상은 득의만만한 미소를 온 얼굴에 지었다. 드디어 잡았다, 약점. 세영이에게 들려주면 아마 저 녀석은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지. 카페 저쪽에서 한줌도 안 되는 손님이 이쪽을 쳐다봤으나, 이윽고 나름대로의 배려인지 큰소리가 들려도 고개를 돌려줬다.

“너, 너! 그거 세영이한테 알리기만 해봐! 개구리로 만든 다음에 공주님의 키스를 받아야 돌아오게 만들어 줄 테다!”

니가 무슨 동화 속 마녀냐. 씩씩거리며 새빨개진 얼굴로 달려드는 유이를 이에나가 말리는 사이, 레니가 살며시 다가왔다.

“저, 저기, 부, 부끄럽긴 하지만 이, 일단 나름대로 유명해요, 언니랑 이에나 언니 두 사람. 말했다시피 스승님이 두 분 다 유명하신 분이라 그 수제자로서 유명한 것도 있고, 둘이 실력으로 유명한 것도 있고요.”

“근데 설마하니 금발이라 금빛이고 은발이라 은빛이다 하는 허접한 네이밍은 아니겠지.”

“죄, 죄송해요…….”

“…….”

이어지는 레니의 설명에 의하면, 둘은 여하튼 ‘은빛의 유이’와 ‘금빛의 이에나’ 라는 이름으로 저쪽 업계에서는 꽤 유명하다는 듯 했다. 둘 모두 2급 전투원이면서 1급에 필적할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단독으로, 그리고 둘이서 같이 몇 번이나 어려운 임무에 투입되어서 실력을 보여줬었다. 유이는 다루는 마법의 수는 채 10종이 안될 정도로 매우 적은 편이지만 마법 하나하나의 깊이는 굉장히 깊으며, 반대로 이에나는 다루는 마법의 깊이는 약간 떨어지나 다루는 마법의 수는 모든 전투요원 중 가장 많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여하튼 낯 뜨거운 그 네이밍은 어떻게 해줬으면ㅡ하고 현상이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레니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쪽은 전통과 그런걸 중시해서 꼭 거창한 뭔가를 달게 한다’라는 내용을 웅얼거렸다.

“그리고, 레니 넌 왜 ‘빛의 레니’ 야?”

“저기, 그게…….”

“레니는 엘리트거든. 그것도 장난 아닌.”

어느새 회복한 유이가 대화에 끼어들어, 레니는 얼굴을 더더욱 붉히며 몸을 뒤로 뺐다.

“엘리트라니?”

“보통 마법사에게는 ‘속성’이라는 게 있어. 뭐, 다룰 수 있는 속성 없는 속성 가려지는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특화되는 뭔가는 있지. 어떤 사람이 잘하고 못하는 건 있어도, 절대 할수 없다 라는건 없잖아? 요리를 못하더라도 그건 잘한다 못한다의 차이지, 아예 요리 그 자체를 못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뭐, 그렇겠네. 그래서?”

“근데 절대로 다룰 수 없는 속성이 있어. 빛이 그거야. 불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바람을 일으킬 순 있어도, 마법사는 빛을 내는 건 불가능해. 근데 레니는 그게 가능하거든. 마력도 강해서 위력도 세고. 내 동생이지만 내 자랑이야. 마법사 역사 중에도 몇 명 없는 인재라고?”

“알았으니까 그 곰 인형 껴안는듯한 자세는 좀 어떻게 해봐라. 갑자기 장르가 바뀌잖아.”

입을 삐쭉 내밀며 더더욱 끌어안는 유이에게 한숨을 쉬어주며 현상은 말했다.

“그래서, 여하튼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일단 상대는 꽤나 위협적이지만, 이쪽도 어쨌든 2급 전투원 3명이 있으니까, 지금부터는 좀 공격적으로 나가야겠지. 오늘밤부터는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거야. 누군지도 모르는 강력한 상대와 맞서야 하니까. 작전은……. 글쎄, 일단 레니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악수를 처리하고, 이에나 너랑 나는 주변을 순찰하자. 아마 주변에 누군가 악수를 소환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강한 상대니까 잘 하고.”

“내가 넌 줄 알아? 걱정 하지 마.”

“레니 너도 무리하지 마. 뭐, 특별히 걱정 할 필요 없겠지만. 위험해지면 바로 연락해?”

“응, 알았어 언니. 맡겨줘.”

“그럼 난 뭘 하면 돼?”

현상의 말에, 세 명은 시선을 모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 그리고,

“오늘부터 넌 나오지 마.”

유이는 그렇게 말했다.

 

 

뭐야, 언제는 제 멋대로 나오라하더니 이제는 제 멋대로 나오지 말라고 하고. 이건 뭐 동네 똥개훈련도 아니고. 툴툴거리며, 현상은 침대에 누워 발을 굴렀다. 시간은 분침이 점점 9시로 다가가 이제 채 15분이 남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슬슬 집을 떠날 시간.

앞으로 오지 말라, 라.

 

“오지 말라고?”

“오늘부터는 위험할 수도 있어. 오늘만이 아니야, 앞으로도 사건이 끝날 때까지 오지 마. 계약 종료야.”

“멋대로 체결하더니 멋대로 해약이구만.”

현상의 투덜거림에, 유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만두고 싶다고 툴툴거렸잖아? 잘됐네. 앞으로는 그 바라 마지않던 평화로운 생활로 돌아가서 지내라고.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것도 특별히 할 필요 없어. 그냥 자연스럽게 지내. 마법소녀 어쩌고 하는 거에 휩쓸린 건 다 잊고.”

“그런 건 이야기 끝에 하는 거야. 납득가게 설명을 해봐. 위험하다고 해서 그만두게 할 거면 처음부터 아예 안 시키는 게 나았었잖아.”

뭐라고 농담조로 말하려던 유이는, 현상의 눈을 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 들려오는 소리는 다른 손님들의 말소리와, 주스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뿐.

“일단, 말했다시피 지금부터의 상대는 정확히 뭔지 모를 미지의 존재야.”

악수인가 뭔가 하는 것도 충분히 미지의 존재라고.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미묘했다.

“물론 악수도 네 입장에서는 미지의 존재겠지. 하지만 이번은 달라. 뭔진 모르겠지만 확실한 목적이 있고, 그게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야. 뭘 의도하는 건지, 뭘 노리는 건지 몰라.”

“그러니까 더더욱 왜 내가 빠지냐는 거야. 아까도 니가 말했잖아. 내가 목표일수도 있다고.”

도리도리.

“아니, 말했다시피 아무리 생각해도 넌 대상이 아니야.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으니까. 즉, 너는 그냥 이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민간인, ‘외부인’ 이라는 거야.”

“…….”

“지금까지는 이쪽 사정에 맞게 멋대로 끌고 다녔어. 미안해. 사과할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사과하지 않도록 할 테니까. 일상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같이 지내줘서 고마웠어.”

“내가 말 하는 건? 처음에 내가 이쪽에 끼어든 건 너희들 존재를 밝히지 않기 위해서 아니었나?”

그 말에, 침울한 얼굴로 말하던 유이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것도 말이지, 벌써 넌 낄 대로 다 꼈다고? 맨 처음에 말한 거 기억해? 널 데리고 돌아다니는 건 니가 말 못하게 감시하는 목적도 있지만, 이쪽에 끼어들어서 완전히 ‘공범’으로 미는 것도 있었다고. 이제 와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어디 가서 말 할 건데? 누가 믿어줄꺼고? 그렇게 ‘하라면 내가 못할 것 같냐’ 라는 얼굴 하지 마. 이젠 됐어. 신경 안 써줘도 돼.”

“…….”

드르륵. 현상을 제외한 유이, 이에나, 레니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시큰둥한,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현상은 뭔가 울컥하는 게 느껴졌으나, 가만히 앉아있는 그 자세를 가까스로 유지했다.

“계산은 하고 갈게. 지금까지 이쪽에 신경 써준 건 국제 마법사 연맹에서 근시일내로 포상할거야. 아, 걱정하지 마.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전달될 테니까, 숨긴다거나 하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연스럽게, 아무도 의심하지 않게 전달될 거야. 그럼,”

“잠깐.”

자리를 뜨려는 유이의 등이, 현상의 말에 주춤하고 멈춰섰다.

“정말로ㅡ”

“빨리 가자. 작전 회의랑 할것 많아.”

그러나 옆에서 끼어든 이에나의 말에, 유이는 그대로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여전히 등을 현상에게 보인 상태로, 고개는 돌리지 않고.

딸랑, 하는 종소리 뒤에 남겨진 건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운 카페 특유의 소란과, 점장과, 직원 둘과, 현상과, 비어있는 잔 3개, 그리고 반쯤 차있는 잔 하나였다.

 

맘에 안 든다고, 그 멋대로 하는 게.

그로부터 한참동안이나, 현상은 꽁 해진 상태로 듣는 사람도 없는데 마음속으로 폭력 양아치 강제계약 체결사 마법소녀에 대한 분노를 대서사시로 노래했다. 처음부터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었어 그게. 지 멋대로 하는 거. 지가 도대체 뭐길래 그 난리야? 세상의 왕쯤이라도 돼? 뭐가 그리도 잘났어? 제 멋대로 계약 체결이다 제 멋대로 해결이다 밤에 나와라 말하지 마라 컵라면 사달라 먹을거 사달라 마실거 사달라 놀아달라 기타등등. 이건 뭐 귀족 여왕님인지 3살 먹은 징징대는 거 외에 할 줄 아는 거 없는 꼬맹이인지. 어려서 오냐오냐 자란건가? 할머니랑 같이 다니다보니 그렇게 된 거야? 어려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으니 저렇게 됐지. 이래서 사람은 제대로 교육을 받아야 해. 하여간 정말.

왜 그렇게 제 멋대로 서둘러서 뭐든지 결정하냔 말이야.

나야 안가면 좋지. 안 나가면 좋지. 솔직히 나가라고 하면 그것도 반대다. 한명도 아니고 오늘밤부터는 3명인데. 거기에 이야기 결말 부분이라서 가장 위험한 부분이고. 요 근래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것만 도대체 몇 번이냐고. 사양이야 사양. 암. 사양이고말고. 나가래도 안 나가. 다 때려쳐. 나야 좋지.

하지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뭐랄까, 그 뭐든지 서두르는 것도 그렇고, 그 이중인격도 그렇고, 동생이며 친구며 하나같이 그 모양(레니에겐 좀 실례군)인 것도 그렇고, 사람 이렇게 멋대로 부리는 것도 그렇고, 매일 밤 싸우는 것도 그렇고. 왠지 걸린단 말이야.

유이의 그 어딘가 위태위태해 보이는 모습이.

아냐, 정신 차려라 김현상. 넌 세뇌당한거야. 밤이면 밤마다 목숨이 위협받는 아슬아슬한 선상의 너가 더 위태위태한 거 아냐? 학교에서 그 이중인격에게 휘둘리는 게 재미있냐? 부장이 오랜만에 어처구니없는 뻥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데 목숨을 걸고 막는 건 또 어째서야? 그런 녀석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내버려둘 수는 없는걸.

이상하게 들리지만, 하기 싫고, 때려치우고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이는걸. 비일상을 하도 겪어서 이젠 그만두고 싶다고? 그래도 녀석과 얽혀서 재밌었잖아? 늘 있는 평범한 일보다는 이런 게. 다른 사람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라고?

제발 정신 차려라. 호기심이 가장 큰 적이야.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좋아.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서 애들과 노닥거리다 집에 와서 노닥거리다 잠든다. 자, 얼마나 보기 좋고 깔끔하냐. 이젠 유이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 어떠한 위협도 없는 삶, 변화는 없지만 위기도 없는 삶. 좋잖아?

좋은 건가?

좋은 거야?

글쎄, 적어도 부장이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서 책장을 덮는 건 더 이상 후회할 것도 없는 바보짓이라고.

현상은 코트를 걸쳤다.

“잠깐만, 또 어딜 쏘다니려 나가는 거야!”

문을 열자마자 강적의 출현. 잠시 당황하지만 어떻게든 정신세포를 진정시키며 외친다.

“운동하려고요!”

“공부나 해! 뭘 맨날 나가? 그래서 얻는 게 뭐라고.”

뭐랄까, 오늘따라 날카로우시군. 아무래도 월화 드라마 전개가 잘 안 풀려가나보다. 그렇게 냉철한 상황 판단을 하고, 어머니의 물음에 어떻게든 재치 있는 대답을 찾으려 하던 현상은, 포기해버렸다. 난 그런 순발력 없다고.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친구가 기다리니까요.”

그 리고 분노한 집안의 우두머리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직전 재빠른 동작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늦은 밤거리를 약간 빠른 발걸음으로 달려가면서, 현상은 생각했다. 소도시의 밤하늘엔 그래도 별이 떠있었고, 그 아래로 건물들의 불빛이 멋지게 빛났다.

별로 끼어들려고 가는 게 아니야, 이야기의 마지막 정도는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자, 영화관에 갔어. 2시간짜리 영화야. 1시간 50분 보고 나갈래? 10분만 보면 끝인데? 아니지.

중간에 끼어들었든 어쨌든 표를 끊었으니 결말은 봐야 할 것 아니야. 관객으로 초청 받았으면 쫓아내려고 치면 영화관장을 두들겨 패서라도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 거라고. 도착하면 좀 난리치겠지. 내 알바냐. 화내는 그 얼굴을 보면서 놀려주지.

그리고 도착한 학교 운동장엔, 피투성이가 된 레니가, 역시 피투성이가 된 언니의 품 안에서 쓰러져 있었다.

구름에 가려 별빛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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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軍

호성軍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친구 우리들의 친구 게으른 호성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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