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4. 절정ㅡ일곱째 날. “왼손의 악수는 싸움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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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49 May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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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호성軍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다. 평소 같으면 멍했을 머리가 순식간에 또렷해지며, 눈이 떠졌다. 눈을 두 번 깜빡 거린 다음, 창밖을 봤다. 해가 떠있다.

아침이다.

“오빠ㅡ 죽고 싶지 않으면 그만 일어……. 엉?”

오빠를 한바탕 두들길 생각으로 방문을 연 동생의 말에, 교복을 이미 다 갈아입고 미리 싸둔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현상은 말했다.

“먼저 나간다.”

“아, 아침은?”

“됐어. 패스. 아침에 볼일이 있어서.”

평소와는 완벽하게 다른 차분한 분위기에 어벙벙해진 동생을 지나, 현상은 신발을 신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밥 먹으라는 소리와, 오빠가 미쳤다고 외치는 동생은 무시. 문을 열고 나간다. 눈부신 햇빛, 화사한 거리.

현상의 표정은 계속해서 굳어진 그대로였다.

 

등굣길. 옆에 걸어오는 세영과는 말이 없었다.

“…….”

“…….”

서로 뭐라고 말할 수 없어 침묵하는 상황. 이상하게 어두운 기운이 둘 사이를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자 세영은 무거운 얼굴이지만 애써 밝게 뭔가를 말해보려 했지만,

“…….”

현상은 완벽하게 그 말하려는 의도를 무시하고 있었다. 한숨. 그리고 그 기분을 이해하고, 자신도 그런 기분이기 때문에 세영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나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으면 ‘바보’라고라도 한마디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기운이 나라는 의미로. 그러나 세영도 알고 있었다.

현상이 지금 대화하고 싶은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는 걸.

 

 

혼란스러운 기억은 단편적으로, 그리고 이상하게 무성(無聲)으로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피투성이의 레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런 레니를 끌어안고 있는 유이, 그런 유이가 부르는 두 명의 이름, 피투성이의 레니를 등에 업었을 때 느껴진, 따뜻한 액체,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운 핸드폰으로 외치는 다급한 말, 들리는 당황한 말, 도착한 병원, 외치는 의사들, 간호사들, 들것에 실려 가는 레니, 닫히는 수술실 문, 그때까지 울고 있던 유이, 그리고 유이가 부르던 두 명의 이름, 급히 달려온 세영, 붉게 칠해진 자신을 그제야 눈치 채고 당황한 세영을 달래는 사이, 계속해서 유이가 울부짖던 두 명의 이름.

하나는 자신이 도와줬으면 했던, 사랑하는 동생의 이름, 그리고,

하나는 믿었던 친구의 이름.

전자를 부른 이유는 명백하다. 그러나 후자를 부른 이유는? 설명을 듣기도 전에, 레니를 업고 뛰기도 전에, 이미 현상은 그 이유를 눈치 채고 있었다.

세영이 마실걸 사러 간 사이, 현상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답을 확인하는 목적. 그리고 유이의 입에서 그 답이 나왔다.

“이에나가 배신했어.

 

“여기서 기다리세요. 괜찮을 테니까요.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계세요. 아셨죠?”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그 목소리에는 약한 떨림이 섞여있었다. 수술실 안쪽에서는 “긴급수혈! 혈액 가져와 혈액!” “담당들 다 깨워! 어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다치는 거야?” 등의 외침이 들려왔다. 소란을 들어보면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모양이라는 걸, 아무것도 모르는 현상조차 알 수 있었다.

유이는 대기실 앞에서 울고 있었다.

치료를 거부하며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설득에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다친 곳의 절반 이상은 눈에 띄고 있었다. 얼굴을 양손 사이에 파묻은 채로 가만히 있는 유이를 보면서 현상은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었다.

“현상아!”

그 소리에 고개를 들자, 급하게 달려온듯한 세영이 이쪽을 눈치 채고 달려왔다. 어, 세영이다. 어쩐 일이지. 현상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세영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옷은 또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세영이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머리를 상하로 흔들며, 현상은 그제서야 옷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어쩌다……. 하고 멍한 머리로 생각하는 사이, 겨우 의식이 또렷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 피투성이가 된 레니를 업고, 그대로 시내를 질주해 이곳까지 왔다. 오자마자 레니는 응급실로 직행. 자신은 치료를 끝까지 거부하는 유이를 어떻게든 억눌러 치료받게 한 다음, 레니가 수술실로 향하는 걸 따라 이곳으로 왔다. 자신의 옷에서 나는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있다는 걸 느껴, 현상은 뭔가가 올라오는 느낌에 허리를 굽히며 입을 막았다.

“잠깐만, 정말 괜찮은 거야? 현상아! 현상아!”

“나, 난 다친데 없어. 괜찮아. 내 피가 아냐. 그보다 마실 것 좀 뽑아줘. 돈은 이따 줄 테니까.”

“아,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어떻게든 쥐어짠 말을 듣고, 세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다시 달려가 버렸다. 그쪽을 한번 바라본 다음, 현상은 유이의 앞에 섰다. 지금,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이 있고, 상황이 상황이지만 그 대답을 들어야겠다. 현상은 잠시 주저한 다음, 입을 열었다.

“이에나냐.”

동사도, 목적어도 생략된 말. 유이는 대답이 없었다. 현상은 숨을 한번 들이쉰 다음,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에나냐.”

고개를 들어올리지 않은 채 유이는 대답했다.

“이에나가 배신했어.”

충격은 없었다. 이미 예상했으니까. 현상은 말했다.

“어째서?”

“몰라.”

“그래.”

다시 침묵. 그 사이에 유이는 고개를 들어 현상을 올려봤다. 그 얼굴엔 가면을 쓴 소심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기색도, 원래의 장난치기 좋아하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잘 연마된 나이프 같은 날카로움. 상대를 찔러죽일듯한 기색만이 온 얼굴에 가득해있었다.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어째서,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온 거야.”

“내 마음이야.”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지만. 유이는 현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말했지. 이제 관심 갖지 말라고. 도와준 건 고마워. 하지만 이제 상관하지 마. 동정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지금까지 괴롭혔는데 꼴좋다 같은 비웃음이라면 더욱 사양이야. 어느 쪽이든 필요 없으니까 상관하지 마.”

“그럴 순 없는데.”

“장난한다고 생각해?”

다시 침묵. 유이는 눈에서 힘을 풀지 않은 채로 한참을 노려보다 다시 말했다.

“어째서 나한테 상관이야? 이제 다 끝났어. 마법소녀와 보내는 귀찮은 시절 재미있는 마법 쇼는 끝났다고. 귀찮게 굴지 마. 난 지금 매우 화났고, 그 대상에는 너도 포함되어 있어.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나한테 상관하지 마.”

그 말까지만 내뱉은 다음, 유이는 자리에서 일어서 복도 저편으로 발을 옮겼다. 현상은 한손을 뻗어 등을 돌리고 있는 유이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어딜 가는 거야.”

“상관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너도 마침 이 병원의 비어있는 영안실 한 자리에 들어가고 싶진 않겠지. 귀찮게 굴지 마.”

“안 돼. 난 너랑, 그 뭐시기냐, 계약했으니까.”

주저하며 한 현상의 말에, 유이는 약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현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침 음료 세 캔을 뽑아 달려오던 세영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유이의 시선이 세영에게 머문 다음, 유이는 미소를 지은 그 상태로 말했다. 세영은 보았다. 유이의 얼굴에서 뭔가 반짝인 것을.

“말해줄까? 진실.”

 

 

2학년 8반, 아침 조례가 끝나고 1교시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현상은 그 반에 들어서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처음 보는 녀석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학생들. 그리고 현상은 시선 한번 옮기지 않고, 목표물을 향해 다가가 말했다.

“이예나, 잠깐 나 좀 보자.”

그러나 이예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옆자리의 누군가가 일어나며 말했다.

“어, 현상아. 무슨 일이냐. 아침 조회도 시작하기 전에. 조금 있으면 1교시야. 조금 있다 다시 와라.”

긴장하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는 안색. 그러나 현상은 차갑게 말하며 이예나의 팔로 손을 뻗었다.

“태열이 넌 상관없잖아. 난 이예나랑 중요한 할 이야기가 있어. 잠깐만 나와.”

차갑게 말하며 현상이 이예나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태열은 현상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있으면 수업시간이야. 좀 있다가 다시 와. 아니, 이야기 할 때는 나도 있어야겠어. 점심시간에 보자.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당황하는 안색. 그 안색을 보며 현상은 눈치 챘다. 이 녀석도 알고 있구나. 현상은 쳐낸 태열의 팔을 뿌리치며, 태열을 강하게 노려보고는 다시 이예나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말해야겠어. 따라와.”

“현상이 너, 적당히 하지 않으면…….”

“좋아. 따라 갈게.”

약간 화난 목소리로 현상을 제지하려던 태열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하지만…….”

“괜찮아. 서로 할 말이 있는 거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어줘. 약간 길어질지도 모르겠지만.”

태열을 진정시키며, 이예나는 말없이 돌아서는 현상을 따라 교실을 나섰다. 멍하니 서있는 태열의 귀에, 주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거, 손이라도 봐주겠다는 건가?”

“그나저나 저렇게 어둡게 생겼는데 남자들한테 인기는 좋네. 아니, 나쁜 건가?”

“그보다 왠지 방금 태도가 평소랑 다르지 않았어?”

당연하지. 태열은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니들이 아는 그 이예나가 아니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니 짓이냐?”

복도 끝. 웬만하면 아무도 다니지 않는, 쓸데없이 커다란 신교사의 문제점이라고도 불리는 빈 교실 앞에서, 현상과 이예나, 아니 이에나는 정지했다. 이에나는 가발을 벗고, 컨택트를 뺀 다음, 조용히 말했다.

“맞아. 내가 한 짓이야.”

마치 ‘하늘은 푸르다’ 라는 말에 대한 대답처럼, 감정 없는 대답. 현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진짜로 물을 건 이제부터다. 현상은 숨을 한번 고르고 천천히 말했다.

“어째서야? 어째서, 배신 같은걸 한 거지?”

“배신은 좀 옳지 않은데.”

이에나는 팔장을 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난 반대쪽이었으니까. 혹시 영화 같은거 본적 있어? 느와르. 거기서 조직원이면서 경찰에 들어간 사람이 조직원으로서 행동한다면, 과연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궤변이야.”

“그럴지도.”

현상의 말에, 이에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생각해봐. 내가 첫 등장 할 때까지, 이미 난 이곳에 있었어. 유이는 아마 알고 있었을걸. 왜냐하면 자격정지든 뭐든, 어디 있는지 그 위치는 국제 마법사 연맹에서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난 내가 처음 정식으로 나타날 때까지, 도우러 오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자격정지 해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면, 빨리 유이를 도와 공을 세우는 게 순리 아닌가?”

현상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으나, 잠시 후 대답했다.

“국제 마법사 연맹 어쩌고 하는 곳에서 정식으로 지원하라고 명령서가 오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국제 마법사 연맹은 자격정지인 나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한 거지? 신참도 많고, 그 중에는 검증만 받으면 되는 실력자들도 있어. 어째서?”

“니 말대로 니가 가까운데 있었으니까.”

“자격정지인데도? 자격정지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닐 테지.”

“…….”

“설령 니 말대로 내가 정말로 국제 마법사 연맹에게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 뒤에 온 레니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

“처음부터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짓말에 멋대로 속은 것뿐이야.”

“그래서, 어째서?”

이를 보이며 분해하던 현상을 보며 웃던 이에나는, 그 말에 차갑게 대답했다.

“넌 알 필요 없어.”

“아니, 있어. 나도 계약을 맺었으니까, 끝까지 유이를 도와줄 의무가 있어. 말해.”

그 말에, 이에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현상은 이에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어째서 유이랑 레니를 공격한 거야. 같은 동료 아냐? 라이벌 의식 같은 걸로 하는 일 치고는 너무 거하고, 도대체 뭐야? 무슨 생각이야? 대답해봐!”

그리고 현상이 이에나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현상은 뒤에서 이에나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현상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내가 유이의 동료‘였던 건’ 맞아. 근데 계약이라고? 그런 것 때문에 너가 유이를 도울 의무가 있다고? 웃기네. 정말로 오랜만에 다시 듣는, 멍청한 소리야.”

이에나가 입을 귀에 갔다 대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와, 현상은 몸을 움츠렸다.

“계약이라고 했지. 재밌는 사실을 알려줄까? 정말로 니가 계약을 했어야만 했었을 것 같아? 아니, 정정할게. 정말로 유이가 우연한 사고로 너에게 들켰다고 생각해?”

“뭐……. 야?”

등 뒤에서 웃는 이에나의 얼굴이 현상의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어째서 유이는 그렇게 완벽하게 이중인격인척 성향을 바꾸는 걸까? 레니는 정상인데. 뭐, 내가 그랬으니 눈치 채기 힘들었을 수도 있겠긴 하네. 그래서, 어째서라고 생각해? 정말로 단순하게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도 그 이유를 말했어?”

뭔가 이야기가 뒤틀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나는 그런 현상의 속마음을 꿰뚫은 듯, 노래하듯이 말했다.

“옛날에 한 여자아이가 살았답니다. 어릴 때부터 타인과의 만남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던 여자아이는, 매번 이리 저리 여행을 다니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어요. 여자아이는 남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잘 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늘 외로웠기에 언제나 남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바랬죠. 하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 그래서 여자아이는 생각했습니다. 억지로라도 남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하자고. 그러나, 언젠가는 헤어질 사람들이니, 많은 사람들을 사귀지 말자고요. 그래서 여자아이는 가면을 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 자신에게 어쩔 수 없이 다가온 사람들에게만 그 가면을 벗어보였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지?”

“…….”

“모습이 드러나면 계약을 해야 하는 건 맞아. 하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일까? 기본적으로 정체를 드러낼 땐 전투공역이 펼쳐지지. 그리고 누구에게나 마나는 있으니까, 그 마나를 가지고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있어. 전투공역을 펼치기 전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어느 정도 크기로 펼쳐야 할지를 결정하지.”

그대로 굳어진 듯, 현상은 이에나의 말에 어느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억 조작마법이 그렇게 쉽게 풀릴 것 같아? 특이 체질? 맞아. 니가 특이 체질인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작마법이 풀리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기억 조작마법이 풀린 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진실을 알려줄 뿐이야. 알다시피 임무를 끝마치면 다시 귀환해야해. 즉, 많은 사람을 사귀어도 헤어지기 힘들 뿐이지. 하지만 유이는 어릴 때부터 사람을 사귀는걸 못하는 주제에 외로움을 타서 말이야. 아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못하고. 왜냐하면, 잊혀지니까. 그것조차 외로운 거지. 그래서 생각해낸게 그 방법. 한명에게 억지로 들켜서, 의도적으로 접근해 친해져.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사귀어봤자 곧 헤어질 테니, 일부로 소심한척 가면을 써서 관심을 끄게 하지. 변명으로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맞는 말이지만, 생략된 거야. ‘눈에 띄어서 친해지지 않기 위해서’. 이해가 돼?”

홱. 이에나의 손을 뿌리치고 마주서자, 이에나는 웃어댔다. 고음의, 비웃는듯한 웃음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현상은 눈을 부라렸다.

“아아, 즐겁네. 그 정도의 반응일 줄은 몰랐어. 혹시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면, 그 답까지 다 알려줄까?”

“시끄러.”

“넌 이용당한거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곰 인형 마냥.”

그리고, 즐겁다는 듯이 현상을 바라보는 이에나에게, 현상은 말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이에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현상은 이를 악 물며 말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그 녀석은 울었어.

“맞아, 그 녀석은 날 속이고 이용했어.”

내 앞에서 울었단 말이야.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내 앞에서 사실을 말하며 울었단 말이야.

손가락을 뻗어 이에나를 가리키며, 현상은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 말을 듣고 결정했다. 이에나,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너,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너 정도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보는 건 한손으로 꼽을 정도야. 니 얼굴에 던져줄 장갑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결투? 니가? 나랑? 단 30초라도 니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이에나에게, 현상은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은 9시, 장소는 학교 운동장. 원하면 몇 명이고 끌고 와도 좋아. 무서우면 오지 않아도 돼고.”

그 말에, 이에나는 웃었다. 아까의 어딘가 기분 나쁜 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웃기다는 웃음. 숨이 넘어갈듯이 배를 잡고 한바탕 웃은 뒤에, 이에나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현상을 바라보며, 웃었다.

“좋아. 받아들이지.”

현상은 이에나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왼손. 이에나 역시 그 손을 바라본 다음, 왼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왼손의 악수는 싸움의 악수.”

“재밌네. 정말로 재밌어. 이렇게 재밌는 건 몇 년 만이야.”

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야, 세영아. 현상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안 어울리게 폼이나 잡고.”

긴장한 동우의 목소리에, 세영은 단지 한숨을 쉬어보였다. 그 낙천적이고 아까 아침까지도 현상에게 농담을 걸던 동우였지만, 계속해서 당장 누구 한명이라도 패버릴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현상의 기세에 결국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버렸다. 뭐, 솔직히 말해 영 볼품없는 기세였지만.

“역시, 그거 때문이야? 유이랑 동생 교통사고 났다는 거. 동생은 실려 갔다며.”

아침에 결석한 유이는 일단 그런 식으로 변명한 모양이었지만, 세영은 사실을 알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숨. 쉬는 시간의 소란스러움이 교실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왜 그렇게 자기 일도 아닌데 난리인지. 뺨을 괴고 세영은 팔짱을 낀채 자신의 팔에 구멍을 뚫을 듯이 안광을 빛내며 생각에 잠겨있는 현상을 바라봤다. 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나도 속았다는 게 열 받고, 아무리 짜증난다고 해도 어쨌든 유이랑 레니가 당해서 병원에 있다는 건, 당장 내가 싸우고 싶을 정도로 화날만한 일이니 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뭐랄까.

속았으면서도, 그렇게까지 화낼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런, 복잡한 시선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사이, 드르륵 하고 뒷문이 열렸다. 쉬는시간에 흔히 있는, 아니 늘상 있는 일. 그러나 점점 잡담소리가 멈추고, 모두의 시선이 교문 뒤로 집중되었다.

왼팔에 깁스를 하고 팔걸이로 가슴 부근에 고정을 했다. 오른쪽 다리에도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서있었다. 왼쪽 뺨에는 거즈를 붙이고 코와 눈가에는 밴드를 몇 개인가 붙였다. 평소의 아름답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져있었다. 유이였다.

그 모습에,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한 채로 잠시 시간이 지나갔다. 잠시 후, 겨우 상태를 회복한 가까운 곳의 여자아이들이 주저하면서 말했다.

“그, 괘, 괜찮아? 많이 다친 거 같은데 조퇴하는 게…….”

“아니. 괜찮아.”

평소의 소심한 목소리가 아니라, 너무나도 또렷한 그 목소리에, 모두는 다시 몸을 움츠렸다. 그대로 모두의 시선을 말없이 받아들이며, 유이는 발소리를 내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잠시간의 반 전체 침묵.

“저기, 유이야,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어제?”

그리고 끝까지 분위기 파악 못하며 조심조심 다가가 조심조심 물어보는 동우를 보며, 세영은 이마를 감쌌다. 설마하니 동생이 사고당해서 우울해있으니 내가 풀어줘야겠다 뭐 그런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 맞으려나. 그리고 이번엔 번지수를 제대로 잘못 찾았다. 유이는 말 그대로 안광을 빛내며 동우에게 쏘아붙였다.

“알아서 뭐하게?”

“아, 아니, 뭐 할게 아니라, 그게…….”

“니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알아서 뭐하게? 그냥 호기심 때문에 물어보는 거잖아? 니가 뭔데? 나한테 뭘 해줬는데 그런걸 물어보는데? 관심 끊어. 너랑은 상관없어. 단순한 호기심이나 재미 때문에 귀찮아지는 건 질색이야. 날 좀 내버려둬.”

“아, 저기,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내버려두라고!”

다시 고요. 생각지도 못한 고함에, 아하하 하고 웃음을 짓고 있던 동우는 그 미소 그대로 몸을 돌려 세영을 바라봤다. 시선 회피. 주위를 둘러보는 아이들에게 “뭘 쳐다봐?” 하고 말하고 교실을 한 바퀴 둘러봐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들을 다시 자신들의 일로 돌려보낸 다음, 유이는 두 명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 유이를 보면서, 세영은 마찬가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현상은 유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교실은 다시 혼란으로 들어갔다.

 

 

“이런대로 불러내서 어쩌자는 거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날 귀찮게 하지 말라고.”

“어제 들은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신경 쓰지 않겠어.”

복도 구석. 유이는 현상의 말에 비웃음을 지었다.

“신경 쓰지 않겠다고? 그거야 니 자유야. 하지만 지금 내가 말을 마치는 이 순간 뒤로 다시 나한테 귀찮게 굴면, 정말로 가만두지 않겠어.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귀찮게 굴지 않아. 하지만 한 가지 언약을 받으려고 할 뿐이야. 너도 날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비웃음을 지으며, 유이는 현상을 놀리듯 말했다.

“너도 날 귀찮게 하지 말라고? 좋아. 귀찮게 하지 않겠어. 그러니 니 멋대로 해. 하지만 이 일에 관여하는 순간, 가만두지 않겠어. 이건 내 일이야. 내가 마무리해.”

“미안하지만, 내가 말했지. 날 귀찮게 하지 말라고.”

유이의 얼굴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현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밤, 이에나랑 결투한다.”

다음 순간, 현상은 자신이 복도에 나자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얼해지는 뺨과 흔들리는듯한 이빨을 점검한 다음, 현상은 눈을 들어 주먹으로(손바닥이 아니다) 자신의 얼굴을 친 유이를 올려다봤다. 폼 잡으려고 하긴 했는데, 아파 죽겠네.

“무슨 장난이야.”

“그러니까, 말했잖아.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에나랑……. 크헉!”

그대로 올려치는 구둣발 치기. 턱을 깨끗하게 얻어맞고 튕겨나가며 벽에 머리를 박고 앉은 그대로 고꾸라진다. 끝내주네. 머리가 울려서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무슨 장난이냐고 묻잖아!”

“에이씨, 폼 잡는 것도 이걸로 끝이야! 내가 싸운다고 내가!”

벌떡 일어나며 외치던 현상은, 그대로 얼굴로 날아오는 오른쪽 스트레이트를 보고 반사적으로 어설픈 가드를 올렸다. 운 좋게 그대로 가드에 강력하게 한방, 비틀거리며 물러서는데 왼쪽 훅, 겨우 막았다고 방심하는 순간 왼쪽 정강이에 통증이 느껴져 가드가 풀렸다. 어라, 할 틈도 없이 그대로 왼쪽 오른쪽 훅훅 스트레이트. 그 다음은 소위 스파르타 킥. 완벽한 콤보에 현상은 속절없이 날아가 버렸다. 엎어진 채로 기절하려는 현상의 앞에, 유이가 그 가슴을 구둣발로 짓밟으며 서있었다. 꿀꺽, 하고 자신도 모르게 여왕님이라고 부를 뻔했다.

“마지막으로 묻겠어. 무슨 장난이야. 참고로 말하면 요령만 알면 힘주는 것만으로 갈비뼈 몇개 부러트리는 건 문제도 아니야. 갈비뼈가 부러지면 무서운 건 그게 내장을 찌르는 거지. 내장파열은 치료하기도 힘들어. 자, 말해. 무슨 장난이야. 아직 내 경고를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줄지도 몰라.”

그 불타는 눈빛을 보며, 현상은 일단 침을 삼켰다. 꿀꺽. 움직이는 목젖을 보면서, 유이는 대답을 기다렸다. 현상은 유이의 감정이 얽혀 여러 색으로 빛나는 눈빛에 위압됐다. 분노의 색, 증오의 색, 그리고 뭔가 다른 색깔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까보냐. 현상은 결정했다. 오기로라도 말하겠어.

“그 말 그대로야. 내가, 이에나랑, 오늘 밤, 싸운다. 내 맘이야. 상관하지 마. 내가 이에나를 쓰러트린 다음에 니가 쓰러트리든 뭘 하든 그건 내 문제 밖이야. 하지만 내가 그거에 상관하지 않듯이, 너도 나한테 상관하지 마.”

그 말을 하는 사이, 가슴에 느껴지는 압력은 돌덩어리가 누르는 듯 묵직하게 느껴졌다. 진짜로 부러진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답답해지는 '가슴'과는 다르게 말할수록 현상은 '가슴'이 가벼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모르게 통쾌한 기분. 현상은 짓궂게 웃었다. 유이는 마지막으로 발을 돌려 짓밟으며 말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상관이야? 이제 관계없다고. 어제 말했고, 그 상태를 보니 이에나에게도 확인했겠지. 어제 내가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야. 처음부터 거짓말이었고, 이제 다 끝났어. 예전부터 바라던 대로 행복하고 평안한 생활로 돌아가라고.”

현상은 웃었다.

“거절이다. 멋대로 끌고 와 놓고선 돌아가라고? 막 이야기 재미있어지려는데 장난하나. 내가 남고 싶다면 남는 거야. 상관, 하지, 마.”

현상은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저 녀석이 울고불고 짜든 어쩌든, 내 알바 아니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티켓을 끊었으면 관람은 내 자유지, 공연은 하면서 보여주진 않겠다면 어불성설인거다.

유이는 발을 치웠다. 그리고 약간은 원래 같은 분위기로 질렸다는 듯 말했다.

“멍청하긴. 이번엔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아니, 진짜로 죽을 거야.”

“일주일동안 매일 죽을 뻔했어. 그동안 살았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아.”

“맘대로 해.”

유이는 그렇게 내뱉듯이 말하고 몸을 돌렸다. 현상은 그 어깨를 잡으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 가녀린 등을 본 손은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아까의 통쾌함은 그 광경에 어째서인가 죄책감으로 그 방향을 바꿨다. 혼자 걸어가는 그 등이, 뭔가가 짓누르고 있는듯한, 그리고 자신이 뭔가를 얹은듯한 쳐진 어깨가, 억지로 힘차게 하려는듯한 발걸음이, 그 모두가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현상은 빈손을 한번 쥐어본 다음, 유이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이해가 안 돼! 도대체 왜?”

씩씩거리며 계속해서 쫑알거리며 따라오는 세영의 말을 안듣기 위해, 현상은 양손으로 귀를 막은채 입으로는 ‘아ㅡ’하고 단음을 내 완벽하게 외부의 소음을 차단했다. 현상이 전혀 듣고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왜? 도대체 왜! 화나는 건 알겠어! 나도 열 받으니까! 당장이라도 이에나 그 년을 한대 갈겨주고 싶을 정도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 우리 범위 밖이라고!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잖아! 왜 그렇게 난리야? 애당초 유이는 우리를 속였고, 우리 일은 여기까지야! 자기도 그러잖아! 끼어들지 말라고! 근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자기가 도움이 필요 없다는데도 끼어드려는 이유가 뭐냐고! 유이가 뭐라고!”

현상은 머릿속으로 어제의 광경을 떠올렸다. 담담하게 진실을 말하는 유이. 그리고 그런 유이의 말에 화를 내며, 달려드는 세영. 현상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어 그 광경을 지워버리고는, 다시 ‘아ㅡ’ 하는 단음을 내며 바보처럼 걸어갔다.

성큼성큼. 결국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세영은 쾅쾅거리며 현상을 앞질러 나가 진로를 막은 다음, 양 팔을 억지로 귀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외쳤다.

“도대체 뭐 때문이냐고!”

주변의 학생들이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사실 아까부터 쳐다보긴 했다) 세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모든 정신이 집중된 건, 오로지 현상의 평소처럼 멍하지만, 어딘가 진지한 얼굴뿐. 그리고 그 입술 뿐. 그게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 소리는 차마 세영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입술만큼은 확실하게 봤다.

“그런 거야.”

“…….”

양 팔을 놔준다. 꽤나 아팠는지 애써 쿨해지려던 현상은 원래의 얼빠진 얼굴로 돌아가 양 손목을 문지르며 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세영은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할래. 너보다는 내가 도움이 되니까.”

현상은 다시 애써 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내가 나가야해.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너보다 내가 이 일에 관련된 게 길거든. 대신 너한텐 다른걸 부탁할게. 지금 레니 혼수상태인거 알지? 수술경과 완벽하게 안나온 것도. 그걸 대신 좀 봐줘. 누군가 옆에 있어줘야 하니까.”

“유이는?”

“당사자가 빠지면 안 돼지. 이에나에게 잠시 할 말 있어서 학교엔 온 모양이지만. 아까 먼저 조퇴했어. 하지만 아마 올 거야. 그녀석이라면 틀림없이. 그러니까 지금 마침 방과 후니까, 미안하지만 오늘 하루 종일 레니 곁에 붙어있어줘. 오늘 학원 없지?”

“그건 그렇지만……. 부장한테는?”

“내가 말해둘테니까.”

잠시 토라진 듯 자신을 바라보는 세영의 시선을 느끼며, 현상은 당황해 원래의 얼굴로 팔을 휘둘러가며 말했다.

“아니, 그게, 봐봐. 물론 둘이서 안 친한 건 알지만 일단 너도 끼겠다며. 하지만 누군 레니 옆에 있어야 하고, 난 벌써 이에나한테 한판 붙자고 했단 말이야. 응? 그러니까 이번엔 좀 봐줘. 내가 주인공 자리 차지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응?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누가 먹을 거 환장해서 이러는 줄 알아?!”

퍽. 정강이를 또다시 걷어차여 깡총깡총 뛰는 현상을 보며, 세영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알았어. 이번은 맡겨둘테니까. 대신 어설프게 하면 가만 안둔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깨지는 만큼 제대로 다음번에 맛있는 거 사야 해! 다른 사람 끼면 용서 안 할테니까. 알았어?”

그리고 세영은 달려가 버렸다. 정강이를 붙잡고 추하게 쓰러진 채로 주위의 시선에 손짓을 해서 관심을 푼 다음, 현상은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미처 하지 못한 말을 했다.

“땡큐, 세영아.”

그럼, 이제 나도 마지막 준비를 해야겠군. 현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계를 바라봤다. 결전까지는, 앞으로 4시간 45분.

 

 

문을 열자 안에 기대하지도 않던 사람이 서있던 것에, 부장은 깜짝 놀라며 맹렬한 베어허그를 하려고 양팔을 벌렸다.

“음? 무슨 일인가 김현상 작가. 이렇게 일찍부터. 오늘따라 타오르는 문학열 때문에 그 열정을 불살라야만이 그 몸을 유지할 수 있다 뭐 그런 감격적인 이유인가. 드디어 자네도 사람이 되었구만. 감격할 일이야. 이런 날에는 제사라도 지내야 하는 건가.”

“부장. 할 말이, 아니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부장의 장광설이 본궤도로 올라타기 전에, 현상은 일단 테클을 걸었다. 부장은 포옹하려던 자세를 풀고 팔짱을 꼈다.

“자네가 부탁할 일이라니 별일이구만. 그것도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이네. 뭐, 말해보게. 근데 한 가지 말해두자면 자네 그 뭔가 주인공 같이 분위기 잡으려는 거 어울리지도 않고 위화감만 조성하니 그만두게.”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요. 여하튼, 오늘만 좀 부탁할게요. 일단 승낙부터 해주세요.”

“뭐 돈 꿔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좋네. 승낙하지. 근데 내가 뭘 승낙해야 하는건가.”

현상은 허리를 90‘로 꺾으며 말했다.

“오늘만 부활동 쉬어주세요. 문학부 전체.”

“안 돼.”

너무 간단하다 했지. 당연하다는 듯 수긍해놓고는 당연하다는 듯 거부하는 부장을 보면서, 현상은 고개 숙인 자세 그대로 무리해서 목을 들어올렸다.

“중요한 일입니다. 한사람, 아니 어쩌면 두 사람, 합치면 세 사람, 아니 거기다 어쩌면 한사람까지 총 네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에요. 부탁합니다.”

“말이 너무 지지부진 하군. 좀 알아듣게 자세히 설명할 순 없는 건가.”

허리숙인 자세의 현상을 그대로 두고, 부장은 자신의 자리로 가서 털썩 앉았다. 현상은 일단 고개를 들었다.

“죄송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습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려고 하는 것도 안돼요. 제가 해드릴것도 죄송하지만 없어요. 부탁드릴 건 단 하나, 오늘만 부활동을 좀 쉬어달라는거에요.”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군. 협상의 자세로는 빵점이야, 김현상 작가. 부탁도 일종의 협상이지. 그리고 협상엔 두 가지 요소가 전제되어야하네. 이쪽의 조건, 그쪽의 대가. 이 경우엔 대가만 있고 조건은 없어. 적어도 내 지원을 원한다면 뭔가 재미있는 껀수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마법소녀 추적의 실마리가 잡혔다 라던가.”

짖궂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장의 시선에, 현상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점을 감안하면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제발 아무 말 묻지 말고 오늘 하루만 부활동을 쉬어주세요. 부탁입니다!”

“뭐, 그 자세를 보아하니 어지간히 중요한 일 일 것 같긴 하니 별 상관은 없겠긴 하지만, 난 자네가 들고 있는 물건이 매우 신경 쓰인단 말이지. 뭔가, 그 야구배트는. 정말로 마법소녀라도 때려잡을 생각인가.”

부장의 지적에, 현상은 옆에 놓여있던 우그러진 야구배트를 바라봤다.

“그래, 그거. 뭔가 도대체. 우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뭔가에 뚫리기도 했고. 재활용 센터에 가져가도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 수 있을까 의문이군.”

“뭐, 낡긴 했지만…….”

“아니, 내가 궁금한 건 어째서 자네가 그걸 들고 있냐 하는걸세.”

“비밀입니다.”

“보게, 또 협상의 자세가 안 된 거 아닌가. 뭐, 이런 건 이제 됐고, 그래서 뭔가. 나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인가?”

웃으며 말하는 부장의 얼굴에, 현상은 머리를 긁적였다. 말이 없는 부실 안으로 봄의 산들바람이 살짝 들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한숨을 쉬며 현상은 생각했다. 곧 있으면 애들 오겠지. 어쩔 수 없다. 그 작전은 포기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이 몸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부장이 입을 열었다. 현상은 다시 부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부부장, 연아, 성미, 그리고 선생님이 짠하고 튀어 들어왔다. 태열이는 없음. 현상은 약간 이를 물었다. 그리고 부장은 그대로 척척하고 걸어가, 여성진 네 명을 문 밖으로 몰아낸 다음 자신도 나가며 문을 닫았다. 그 전에, 현상에게 한번 윙크를 하곤.

“자자, 오늘은 부활동 없음. 착한어린이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세요.”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성호야! 선생님인 난 그런 말 들은 적 없다고! 학교에서 근무시간 채우면서 술 마실 장소는 여기뿐이란 말이야!”

“기껏 나를 추종하는 추종자들이 놀러가자는 걸 뿌리치고 오늘도 왔는데 이게 뭐야! 성호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예화 언니랑 선생님 말이 맞아! 요새 막 재밌어지는데 오빠 왜 그래! 저녁 안 해준다!”

“저, 저기, 일단 다들 진정 좀…….”

시끄러운 소리가 문에서 멀어져가며, 구교사는 다시 조용한 침묵으로 들어섰다. 속으로 부장에게 감사한 다음, 현상은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창밖으로 떠들며 하교하는 부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유이랑 세영이랑 레니, 하는 김에 끼워서 이에나랑 태열이와 같이 자신도 저 대열에 낄 수 있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하는 일이지 뭐. 현상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손에 쥐고 있는 야구배트를 살짝 끌어안았다.

결전까지 앞으로 3시간 42분.

 

 

9시의 운동장은 깜깜했다. 구름이 낀 하늘엔 흐린 달이 살짝 떠올라 있었고, 그 외의 조명은 아무것도 없었다. 계절을 착각한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감 속에서, 현상은 말없이 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벅서벅. 모래를 밟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와, 현상은 고개를 돌렸다. 교문 앞에 있는 가로등의 불빛을 등에 받으며, 검은 실루엣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펄럭거리는 옷자락과 치맛자락,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두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손에 든 것은 기다란 막대기. 기다리던 사람 1호군. 현상은 야구배트를 어깨에 걸치며 한가하게 외쳤다.

“방해는 안 할 거지?”

“누가 할 소리.”

차갑게 응수한 유이는, 현상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걸어와 옆에 나란히 섰다. 평소의 전투복 위에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아래에는 이런저런 장비들이 매달려 있었다. 방어구로 보이는 것도 몇 개 장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본격적으로 준비했네.”

“오기로 덤비는 누구랑은 달라. 넌 목숨 유지하는 거에나 신경 써.”

차갑기는. 툴툴거리며 현상은 고개를 돌려 유이와 나란히 정면을 바라봤다. 다시 침묵. 그리고 바람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다섯 걸음 정도 앞에 두 명이 서있는 게 보였다.

한명은 금발의 여성. 옷은 유이와 마찬가지로 전투복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있다. 자세히 보이진 않겠지만 몸 안에는 마찬가지로 뭔가 주렁주렁 달아놨겠지. 손에는 레이피어. 그리고 그 옆에는 요 근래 깔끔하게 머리를 친 친구 녀석이, 목도를 들고 서있었다.

“아까부터 눈치 채기는 했지만 정말이었구나.”

“이제 와서 말하긴 뭐하지만.”

현상은 물었다. 그 대답을 이미 알면서, 그럼에도 YES라는 답이 나오길 바라며.

“빠질 생각 없냐?”

태열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너한테 이유가 있듯이, 나한테도 이유가 있어. 그보다 시작하지?”

그 말에 네명은 기다리고 있다는듯 무기를 꺼내 서로에게 겨눴다. 유이는 이에나, 이에나는 유이, 현상은 태열, 태열은 현상에게. 다시 잠시 동안의 침묵.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오는 순간, 봉과 검, 배트와 목도가 맞부딪혔다.

 

유이와 이에나는 그 한 합을 부딪친 다음, 서로 멀찍이 떨어져 서로에게 주문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현상이 그쪽에 신경을 쓰는 사이, 태열은 뒤로 물러난 현상에게 목검을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깜짝 놀라며 어떻게든 쳐냈지만, 야구배트는 휘둘러서 맞추기 위한 물건이지 싸우기 위한 물건이 아니다. 거기에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현상은, 정말로 맞지 않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얌마, 좀 봐줘가면서 하면 안 되냐!”

“울면서 짤꺼면 처음부터 나오지 말았어야지!”

말은 맞는 말이군. 계속되는 충격에 점점 손이 얼얼해져갔다. 다음번에 부딪치면 놓친다, 하고 생각한 순간, 튕겨 나온 주문이 현상과 태열의 사이에 작렬해 둘은 일단 서로 거리를 벌렸다. 이거 도탄 맞아도 저승행 아니야. 태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힐끔 힐끔 신교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 현상은 아예 행동으로 옮겨 신교사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태열이 쫓으러, 그리고 피하러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잠기지 않은 신교사 문을 열고 안으로 튕기듯 들어간 순간, 태열의 일격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다행히 휘두른 야구배트로 막았지만, 자신의 행동과 태열의 강력한 공격에 몸이 날아가 겨우 무릎으로 미끄러지며 정지했다. 태열은 기다려주지도 않고 그 사이 이미 달려와 있었다. 급한 대로 배트를 올려, 꿇어앉은 현상과 일어선 태열은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친구 사이에 봐주는 것도 없냐!”

“무기를 겨누고 서있는데 무슨 친구야!”

태열은 외치며 오른발로 현상을 걷어찼다. 이 자식이! 공격에 비틀거리는걸 이용해, 현상은 뒤로 한 바퀴 구른 다음 일어섰다. 태열은 그 동작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내가 어떻게 이런걸 했는지 궁금해.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현상은 배트를 겨눴다. 약간 떨리는 손을 숨기며, 현상은 이를 악물었다.

이 녀석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두렵지는 않다. 이미 싸우기로 마음먹었고, 솔직히 말하면 지난 며칠 동안 집채만 한 괴물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았다. 설마하니 이 녀석이 그 정도로 무서울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문제는, 태열은 자신의 친구라는 점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다지 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친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 무기를 맞대고, 죽일 각오로 싸울 사이도 아니라는 뜻이다.

어째서, 이렇게 무기를 겨누고 서있어야 할까. 친구인데도.

그렇다고 무기를 놓을 수도 없다. 자신은 유이를 위해, 이 녀석은 이에나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했으니까.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고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그렇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다. 현상은 결심을 굳혔다. 피투성이가 된 레니를 떠올린다. 울고 있던 유이를 떠올린다. 더없이 차갑던 유이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모든 원인을 한명에게 집중한다.

공격은 태열이 달려드는 것으로 다시 재개되었다. 날카로운 내려치기. 어렵사리 그 공격을 막아낸다. 그러나 태열은 검과 배트가 마주치는 순간의 반발력을 이용해 약간 방향을 바꾸며 다시 내려친다. 현상은 배트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그 공격을 막아낸다. 그 틈을 이용한 태열의 밀어차기. 다행히 이번에는 예상해서, 현상은 뒤로 뛰는 것으로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태열의 자세가 무너진 것을 이용해서 배트를 휘두른다. 그러나 태열은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그 공격을 다시 튕겨낸다. 그대로 옆으로 비껴진 검을 이용한 찌르기. 그 공격을 막지 못해, 날카로운 목도의 끝이 현상의 배에 박힌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의 충격과 동시에 현상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태열의 베기. 현상은 이를 악 물고, 다시 한번 몸을 굴려 그 공격을 피해냈다. 거리는 벌렸지만, 엄청난 고통에 연신 기침을 해대며 현상은 어렵사리 몸을 세웠다.

“좀 아팠겠지? 더 이상 아픈 꼴을 보기 싫으면 그만 항복해.”

“쿨럭, 놀고, 콜록콜록! 있네. 너 같으면 항복하겠냐.”

“그건 그렇네.”

대화하는 사이, 현상은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신이 특별히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그래, 아무래도 태열을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해야만 한다. 현상은 짧은 기합을 내고는 태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태열의 검 끝을 노리고 달려든다. 첫 번째 공격은 횡방향, 그리고 그 첫 번째 공격을 목도 끝으로 흘리며, 태열은 현상의 배트의 곡선을 바꾼 다음 역으로 현상의 손목을 내리쳤다. 현상이 짧은 신음을 흘리는 사이, 배트는 힘이 빠진 손에서 떠나 바닥에 떨어졌다. 재빨리 들어 올리려 했지만, 이미 태열이 발끝으로 저편으로 굴린 후였다. 이런!

“무기도 없어졌고, 이르긴 하지만 항복하지?”

숨을 고르며 태열은 목도를 겨눈 채로 말했다.

“나도 어쨌거나 친구인데,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집으로 가도 되고, 꼭 여기 남아있어야 한다면 안 아프게 기절시켜줄게. 적어도 저쪽 일에 끼어들지 마.”

태열의 목검 끝을 응시하며 현상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일단 시간을 벌면서 빈틈을 노리자.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현상은 어설프게 웃었다.

“근데, 설마하니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은 몰랐네. 검술 했었냐? 몰랐는데.”

“이유가 있어서 좀 했었지. 빈틈 노리려는 거면 어설퍼. 그렇게 간단하게 흐트러질 정도로 무르진 않아.”

그 말에 현상은 표정을 굳혔다. 농담은 안 통한다. 저 녀석도 진심인거다.

“넌 왜 이 일에 끼어든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었잖아. 갑자기 왜 이렇게 하는 거야?”

“끼어들 이유가 없는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적어도 여친에 관련된 일이니까.”

“그 관계가 거짓인건 알아?”

현상은 침울하게 말했다. 가능하면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도 말해주지 않을 정도로 착하지도 않다. 그러나 현상의 기대와는 다르게 태열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

태열은 비웃음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설마하니 내가 그렇게까지 바보인줄 알았어? 애당초 하루 만에 그렇게 관계 진척이라니, 아무리 내가 하는 연애 게임이라도 그런 전개는 안 나온다. 그런 거에 기대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지.”

생각해보면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태열이도 바보는 아닌 거다. 현상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차라리 변명거리가 된다. 하지만,

“그럼, 그렇게 속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에나의 편을 들겠다는 거야? 이젠 모든 걸 알면서도?”

“그래.”

태열의 말은 짧지만 강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 말. 현상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야? 레니를 그렇게 만들고, 친구였던 유이를 공격한 것도 알고 있을 것 아니야. 만약 니가 정말로 이에나의 남친이라면, 그런 일을 하면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옳은 일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 아니야.”

현상의 말에 태열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너에겐 뭘 말해도 무리야. 어차피 듣지도 않을 테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테니까. 다만 한 가지만 알아둬, 옳고 그르고 이전에 사람에게는 모두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야.”

“그 사정이 뭔데?”

“이런 때 악역이 꼭 해야 할 말이 있지. 날 쓰러트리면 들려주겠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만약 니가 날 쓰러트린다면, 그때 말하라고 이에나가 부탁했지. 그러니까 난 그 부탁을 들어줄거야. 뭐, 지금으로 봐서는 무리겠지만.”

태열은 이야기는 거기까지라는 듯 눈매를 날카롭게 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괜히 움직이거나 하면 정말로 죽을수도 있으니, 차라리 가만히 있어. 정신을 차리면 모든 일은 끝나있을 테니까, 그때 다 알려줄게. 만약 니가 기억한다면 말이지만. 그럼, 잠깐 자라.”

태열은 그렇게 말하고 검을 천천히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위험해. 현상의 머릿속은 포화상태였다. 어떻게 한다. 무기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고, 함부로 도망쳤다가는 진짜로 죽을지도 몰라. 그렇다고 맨몸으로 돌격할 수도 없는 거고. 저 녀석이 갑자기 쓰러져주면 좋을 텐데. 니 사정 같은 건 모르지만, 이쪽도 이쪽 사정이 있다고. 여기서 잠잘 순 없단 말이야. 그리고 현상이 그렇게 생각하며, 몸으로는 맞아도 괜찮도록 머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태열의 몸에 이변이 생겼다.

비틀, 하고 태열의 몸이 흔들렸다. 눈동자엔 '어라' 하는 눈빛이, 잠시 후엔 '설마' 하는 눈빛이 들어왔지만, 몸을 가눌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잠깐, 하필이면……. 이럴……. 때에…….”

첫 생각은 계산 착오였다. 태열이 기면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은 6시간. 그리고 오늘, 태열은 억지로 그 한계를 늘리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학교에는 현상이 있고, 유이가 있고, 그 공격 대상인 이에나가 있으니까. 태열은 최대한 깨어 있기 위해 노력했다. 누가 뭐래도 유이는 동생이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놓였고, 만약 자신에게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동생은 없지만) 상대를 똑같은 처지로 만들려고 하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약간의 여유시간은 있었을 텐데?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

그러던 순간, 태열의 머릿속을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떠오르는 순간, 비틀거리던 태열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태열은 버텼다. 평소 같으면 벌써 쓰러졌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켜야 할 것이, 이겨야 할 상대가 있었다. 억지로 눈을 뜨며, 몸을 움직여 조금이나마 잠을 쫓으려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사이, 현상은 배트를 다시 쥐고 있었다.

강하게 소리 지르며 뛰어간다. 베기, 그러나 몸이 느리다. 확연하게 그게 보인다. 현상은 다만 약간 슬픈 눈으로 그 공격을 막았다. 다음 공격, 더욱 느려졌다. 막는다. 다음 공격, 힘겨루기를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쓰러질듯한 몸을 이용해 억지로 뒤로 민 다음, 최후의 선택을 한다. 의식을 잃는다 해도 쓰러지며 체중을 실어 휘두르면, 아마 쓰러트릴 수는 있을 것이다. 양쪽 모두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질수는 없다. 태열이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목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무언가가 머리를 강타했다.

사실 강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꿀밤 정도, 말 그대로 툭 쳤을 뿐. 그러나 그 충격에, 태열은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어째서인지 머릿속에는 한 가지 말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게 옳은 일이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 아니야.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난 해야 했어.

태열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현상은 몇 초 동안 움직이지 않는 태열을 보고 숨을 고른 다음, 중단으로 내밀고 있던 배트를 내렸다.

이겼다.

그러나 후련하지는 않았다. 승부도, 그 결말도, 그 사이의 말도, 모두. 뭔지 모를 것이 몸 이곳저곳에 붙어있는 끈적함을 느끼며, 현상은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그 사이에 운동장에서 들려오던 소음은 사라져있었다. 대신, 학교 안에서 이런 저런 소리가 복도를 타고 현상의 귀를 간지럽혔다. 현상은 배트를 강하게 쥐었다. 태열을 한번 힐끔 바라본 다음, 현상은 마음속으로 진정한 승자에게 사과를 보낸 다음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쪽의 사정 같은 건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사정이라는 게 있단 말이야.

아마도 도움은 안 될거다. 그래도 나서지 않으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설령 짐이 되더라도,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왜냐하면, 난 약속했으니까. 태열이 거짓임에도 싸운 것 처럼, 자신도 그럴 의무가 있었다. 거기에 그 의무에는 이제 태열의 몫까지 얹혀져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현상은 다시 한 번 배트를 강하게 쥐었다. 먼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태열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태열은 얼마전 생긴 여자친구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예나. 며칠 전 전학 와 아웃사이더로 지내고 있었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친하게 되어 현재는 나름대로 연인이라는 관계로 발전했다ㅡ정확히는 했다고 믿는다ㅡ. 아무도 고백다운 고백을 하지 않은 게 걸리지만, 막상 하려면 부끄러우니까. 그 정도는 괜찮겠지.

태열이 달이 뜬 늦은 밤, 그것도 9시가 넘은 시간에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혼자 사는 태열은 늘 이 시간 식사를 한다는 점이었고, 둘째로 막 식사를 하려던 도중, 이예나 역시 혼자 산다는 것이 떠오른 점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유를 계기로, 태열은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고 권하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전화를 받지 않아서 혹시 자거나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간 거라면 몰라도 자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이 켜져 있으니까. 또한 이미 식사를 했더라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는 값어치는 충분히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예나의 오피스텔에 도착해 벨을 누를 때까지만 해도, 태열은 행복함에 젖어있었다.

방문은 금방 열렸다. 단지 문제는, 이예나는 이상한 옷을 입고 굉장히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옷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있었다.

태열은 그것들을 종합해서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그의 품으로 쓰러진 것에는 3초, 간호에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48분이 걸렸다.

 

유이와 이에나의 전투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 간에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으니까. 서로의 목적은 완벽하게 반대였고, 그 과정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싸우고, 상대를 때려눕힌다. 그 이후는 그때의 기분에 따라서. 각자의 이유는 둘째로 치고, 둘의 싸움에는 그 목적 이외에는 어떠한 요소도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특기인 공기로 된 벽을 전면에 만들어 놓은 채, 유이는 앞으로 전진했다. 이에나의 공격. 유이는 쓸수 없는 계열의 마법이다. 그러나 압축된 공기의 벽은 그 공격들을 온몸으로 막아내 무력화 시킨 다음 찢겨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유이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봉을 앞으로 향했다. 공격. 예전부터 18번인 이 불꽃 공격은, 유이의 최대의 자랑거리였다. 푸른색으로 보일 정도의 높은 온도의 순수한 불꽃 덩어리를 던진다. 목표에 도달하면 폭발, 열기로 타격을 주고, 선택에 따라서는 물체에 옮겨 붙은 다음 타오를 수도 있다. 거기에 수많은 연습으로, 자신의 봉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시전 할 수 있다. 연사도 가능. 보통 1급 전투요원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자신은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사용 가능한 마법의 수는 적더라도 범용성과 위력 면에서는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다.

불꽃 공격은 고속으로 이에나를 향해 돌진해나갔다. 이를 물며 이에나는 레이피어를 들어올렸다. 동시에 몇 개인가의 폭발. 파란 화염이 사방을 감싼다. 앞서 말했다시피 사용 가능한 마법의 가짓수는 이에나가 몇 절은 많다. 하지만 같은 수준의 마법이라면, 그 위력은 자신의 쪽이 몇 절은 높다. 이에나가 쓸 수 있는 방어마법 중, 방금 전의 공격을 막을만한 존재는 없다.

요컨대, 유이와 이에나는 상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둘의 싸움은 양쪽 모두 서로의 패를 내보인 채 하는 포커와도 같은 모습인 것이다.

들어갔어. 유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불안이 떠올랐다.

이렇게 간단하게?

화염의 뒤편에서 낮은 캐스팅이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멈춰서는 순간, 복도 양쪽의 벽이 갑자기 창처럼 튀어나왔다. 재빨리 공기의 벽을 양 옆쪽으로 이동시켜 막아냈지만, 동시에 정면에서 공격이 온다. 고수압포. 공기의 벽의 강도와 부유 상태를 유지하면서,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한다.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얼음의 벽. 그러나 공기의 벽은 점점 밀려들어오고, 고수압의 물줄기와 마찰로 얼음의 벽 역시 점점 구멍이 뚫려가기 시작했다. 양쪽의 공격을 막아내는 유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에나는 나에 대한 건 훤히 꿰뚫고 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에나에 대한 것은 다 꿰고 있을 터인데.

그랬을 터인데.

뒤로 튕겨져 땅에 착지하며, 유이는 동요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예상 밖이다. 승산이 없어진다.

“너, 언제 2종 계약을 체결한 거야?”

어느새 검은 전투복에서 하얀 전투복으로 그 색상을 바꾼 이에나가, 무표정한 눈빛으로 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은, 유이가 현상에게 말한것 처럼 단순한 감시를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감시, 그리고 보호의 역할이 우선하긴 하지만, 계약자는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탐색기의 역할을 한다. 마법사의 존재는 사회에 알려져선 안 되는 존재. 그렇지만 조사, 혹은 탐색을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때 움직이는 게 계약자. 청각과 시각, 이 둘의 공유화를 통해 계약자는 마법사에게 움직이는 카메라, 움직이는 마이크가 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성격은 마나, 혹은 기의 보조 서버 역할이다.

인간의 몸으로 감당 가능한 기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효율이 좋지 않다. 인간의 몸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졌지, 바깥의 기를 들이거나 자신의 기를 내보내기 위해, 혹은 그 통과 기점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무리 숙달되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양을 담당할 수는 없다.

이때를 위해 중계 기점으로 사용되는 게 계약자의 몸. 즉 기, 혹은 마나처리를 어느 정도 분담하는 것이다. 숙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그 양은 적겠지만, 둘의 관계가 친밀한 것에 의해 그 양은 어느 정도 보정이 가능하다.

1종 계약은 생활에 지장이 없는 수준의 중계 기지로서의 사용. 컴퓨터로 치자면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때 온라인을 이용해 약간의 처리량을 부담하는, 심한 부담이 없는 수준의 사용이다. 약간 피곤하다는 정도는 있겠지만, 그 이상의 피해는 없다.

2종 계약은 말 그대로 하드를 이어버린 듀얼코어와 동일하다. 마법사측이 처리 가능한 기의 양도 늘어나지만, 대신 계약자에게도 큰 부담이 된다. 즉, 어떤 의미로는 목숨을 맡긴 것과 동일한 관계. 그렇기에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1종 계약과는 다르게, 2종 계약은 심사숙고의 심사숙고를 거친 다음에도, 몇 명인가의 1급 마법사에게 재가를 받아야만 체결 가능하다. 둘만의 결정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걸, 어떻게.

경악으로 눈동자가 커져있는 유이를 향해, 이에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까지 됐으니 슬슬 알려줘도 좋겠지. 원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끝내주려고 했지만, 그건 니 입장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이 계획은, 벌써 수년전부터 계획된 거야.”

 

몇 년 전, 너도 알다시피 너희 할머니, 동양학파의 대표 격이시자, 국제 마법사 연맹 연맹회의의 수장이시던 샤마르니아 하레니이얀님이 돌아가셨지. 워낙에 나이가 나이셨으니 그 죽음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어. 문제가 있던건 그 시기였지.

마침 당시 동양학파와 서양학파의 대립이 격해지고 있었어.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회의에서 우위를 차지하던 서양학파가 2차 대전 때문에 그 자리를 동양학파에게 넘겨준 지 수십 년, 보수파 일부가 그때의 영광을 찾자고 나선거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는 없었어. 샤마르니아 하레니이얀님이 있는 동양학파는 굳건했고, 끝까지 평화를 주장하고, 결국 2차 대전이 터지자 선두에 서셨던 그분의 인품도 있었으니까. 서양학파에서도 그분에게 대항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고, 모든 게 평화로웠지.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거야. 이해가 돼?

거대한 주춧돌이 쓰러지자 곧바로 문제가 발생했어. 서양학파의 강경파가 당장 회의의 정통성과 공평성에 문제를 제기한 거지. 너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정착하여 국제 마법사 연맹 중심부와 연락이 없던 사이, 연맹은 난리도 아니었어. 수십 년 만에 다시 연맹은 이분될 뻔 했지.

이때 동양학파의 한명이 묘안을 떠올린 거야. 빛의 레니, 그리고 은발의 유이. 샤마르니아 하이레니얀의 성과 피를 물려받은 두 사람. 정통성과 함께 그분의 손녀니까 인품도 이용할 수 있다고 사료된 거지. 뭐, 서양학파만 나쁘게 이야기 했지만 동양학파도 지금까지 이뤄놓은걸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요컨대 거기가 거기였다는 거지.

왜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니가 한직에 있었는지 알아? 연맹이 그 모양이었기에 누구도 너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던 거야. 그리고 갑자기 얼마 전부터 다시 임무가 주어졌지. 널 다시 표면으로 끌어올려야 했으니까. 레니도 마찬가지였지. 그리고 그 계획은 서양학파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소식이었어. 너희 둘까지 처리하면, 이젠 정말 샤마르니아 하이레니얀의 이름을 이을 사람은 없어지는 거거든. 그 라이벌, 내 스승님만 제외하면.

 

“그, 그렇다는 건…….”

어느새 유이의 눈동자에서는 힘이 빠져있었다. 이에나는 그 시선을 보면서, 천천히, 하지만 잔인하게 말했다.

“그래. 이번 임무의 지령자가 누군지는 기억하겠지. 내가 자격 정지를 당하고 이곳으로 온 것도, 그리고 얼마 뒤 레니가 이곳으로 임무를 받게 된 것도, 레니의 부상으로 유이 니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도, 모두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거지.”

“서, 설마…….”

“샤마르니아 하이레니얀님이 돌아가신 후, 너희 자매에게 신경을 써준건 스승님 밖에 없었지. 그때부터야. 유이 니가 헬프를 넣으면 치료가 끝나가는 레니도 올 테니, 레니의 부상으로 계획이 틀어진 것도 깔끔하게 수정됐지. 그리고 마침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건, 자격 정지로 있던, 의심받지 않고 모든 일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던 나. 뭐, 애석하게 그건 실패했지만 말이지.”

한발자국씩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에나를 보면서도, 유이는 공격은 못하고 단지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사실, 레니는 제대로 처리했으니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너는 양녀였으니까. 하이레니얀님이 유명했던 요소 중 하나는 빛을 다뤘기 때문이지, 그 따님도, 그리고 레니도. 양녀지만 장녀 자리를 차지했지만, 넌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뭐, 샤마르니아 하이레니얀이 키운 최고의 애제자라고 하면 너겠긴 하지만.”

“그만, 거기까지만…….”

“그러니까 뒤처리는 확실하게 해야겠지. 원망하진 마. 나도 원해서 하는건 아니니까. 다만, 너와 한번은 제대로 싸워보고 싶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게 슬프긴 하네.”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물기가 가득한 눈가에 한 방울씩 물이 배어나오는 유이를 향해, 이에나는 레이피어를 겨눴다. 발사. 반응도 못한 채로 유이는 인형처럼 날아가 쓰려졌다.

끝났나?

아니다, 숨통이 붙어있다. 위력이 모자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이에나는 이를 한번 드러낸 다음, 걸어가 유이의 미간에 레이피어를 겨눴다. 이 거리라면, 태열이 기절한 지금이라도

“잠깐 거기서 스톱!”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에나는 재빨리 몸을 돌리며 검을 들어올렸다. 금속이 마찰하는 경쾌한 소리 직후, 끼긱거리는 끔찍한 마찰음이 복도를 채웠다.

“아까 2종 계약한 마력을 처음 쓸 때 태열이 쓰러졌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이정도로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여기서 싸우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사나이의 감, 이라는 건 뻥이고, 이렇게 조용한 학교 안에서 그렇게 장광설을 펼치면 귀가 있는 녀석이 못 찾아올 리가 있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현상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팔에 좀 더 힘을 줬다. 젠장, 분명 온 힘으로 내리 찍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이에나는 빗자루로 장난이라도 하듯이 힘을 준다는 기색은 전혀 없다. 이건 반칙이잖아.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배트를 밀며, 현상은 뒤로 점프했다.

“빨리 와서 판을 깬건 칭찬해줄게. 하지만 조금만 늦게 와줬으면 칭찬 대신 감사했을 텐데.”

“아군을 기절시키면서까지 하다니, 너도 참 나쁜 녀석이구나. 널 믿었던 태열이가 불쌍하다.”

“어쩔 수 없어. 이게 일인걸. 그리고 나쁜 녀석인 건 스스로도 알고 있으니 가르쳐줄 필요 없어.”

차갑게 웃는 이에나를 보며, 현상은 이를 악 물었다. 이마로 흐르는 땀이 싸우고 달려와서 생긴 게 아니라 식은땀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안 들킨 것 같다.

 

 

이봐, 이정도면 할 만큼 했잖아. 목숨을 거는 것도 좋지만, 인생은 한번이라고. 유이도 말했었잖아. 목숨 유지하는 것만 신경 쓰라고. 도망쳐. 해줄 만큼 해줬어.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지금 니가 하려는 건, 백 원짜리 동전을 튕겨서 천원이라는 표시가 나오는걸 기대하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영원히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1종 계약 2종 계약 위력차이 뭐 이런 건 너도 모르겠지. 하지만 대충 감은 오잖아. 지금 이 장소에는 세 명이 있어. 쎈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칠 듯이 쎈놈 약하디 약한놈. 수치로 따져주자면 100 1000 10. 110이랑 1000이랑 비교해서 어느 쪽이 큰지는 잘 알겠지. 자, 도망쳐. 할 만큼 했잖아. 최종보스까지 가서 포기면, 어디 가서 욕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바보 아니야. 최종보스까지 가서도 도망쳤다면, 어딜 가도 쪽팔릴 일인데. 그렇지?

그렇고말고.

떨리는 다리를 그대로 냅두며, 현상은 머리를 굴렸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이길 것이냐. 힐끔 쳐다보니, 유이는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아니길 빌 수밖에 없다. 다시 이에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래도 한방은 맞아주겠다는건지, 가드를 풀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맞아주겠다는게 아니다.

때릴 수나 있겠냐는 뜻이다.

현상은 무시당한 것에 손에 힘을 줬다. 나를 무시했겠다. 이성적인 판단보다, 본능 아래에 잠자고 있던 투쟁본능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평상시의 찌질한 자신이라면 생각도 못했을, 요컨대 무시당하는걸 견딜 수 없는 그런, 자존심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그 아래의 원초적 본능. 그 본능에 현상은 몸서리치며, 발과 손에 힘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모든 행동이 계산되어 있었다. 더 이상 다리는 떨리지 않았다. 현상은 달려들었다. 이에나가 예상치 못한 행동에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현상은 이를 드러내며 배트를 들어올렸다. 이에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현상은 그대로 이에나를 스쳐 지나갔다.

36가지 병법 중 가장 뛰어난 병법, 줄행랑.

이에나의 표정에 공허함이, 어이없음이, 짜증이, 이윽고 분노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이에나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에나는 현상의 행동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깡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복도에 흰 분말이 가득했던 것이다.

취이익 하는 김빠지는 소리, 꾸불텅 거리는 호스에서는 계속해서 연막이 뿌려진다. 그리고 복도는 흰색에 휩싸여간다. 기침을 하며, 이에나는 눈을 가리고는 분노했다. 요컨대, 자신의 등 뒤의 소화기 머리 부분을 있는 힘껏 때려 부숴 연막을 만든 다음, 넘어진 유이를 안고는 달려간 것이다. 저 멀리 들려오는 힘겨워 쓰러질듯한 발소리가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에나는 추격하는 대신, 일단 있는 힘껏 웃었다. 그 웃음에는 왠지 만족하는 빛이 섞여있었다. 이윽고, 이에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이에나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태열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에나 역시, 여전히 그 괴상한 옷을 입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 뿐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원룸 방 안에 한가득.

“에, 그러니까,”

태열이 뭔가를 말하려고 일단 입을 열었지만, 이윽고 다시 조용히 고개를 휘저었다. 머리는 영 어지러운 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소녀라니. 이게 무슨 애니나 게임도 아니고 말이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놀리는 거냐고, 이게 무슨 몰래카메라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태열은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

“알았어. 믿어줄게. 아니, 믿을게. 유이에 대한 거나 너에 대한 거 전부 다.”

그 말에, 이에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담고 있었다. 태열은 습관적으로 잘라낸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뭐, 속여서 된 거긴 하지만, 여자 친구가 하는 말인데 믿어야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근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뭐, 뭔데?”

“정말로, 유이와 레니에게 한 게 옳다고 생각해?”

“…….”

침착하게 하는 태열의 말에, 이에나는 고개를 돌렸다. 웅얼거리는 그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태열은 이에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태열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해줄 일은 뭐야?”

그 말에 이에나는 다시 주저하는 모양이었다. 태열은 재촉하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침묵 사이로 작은 알람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얼마나 기다렸을지 모르는 시간 후에, 이에나는 말했다.

“내 마나 보조역이 되는 거야. 아마 몸에 큰 무리가 갈 테고, 특히 태열이 니 경우에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기면증도 있으니까. 원래는, 몰래 계약을 체결할 생각이었지만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상관없어.”

태열의 말에 이에나는 긴장하며 말했다.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어.”

“괜찮아, 왜냐하면 난,”

이에나의 긴장한 목소리를 끊으며, 태열은 진지하게 말했다.

“널 좋아하니까.”

“…….”

“에, 예전부터 말해보고 싶은 말이었는데 막상 하니까 쑥스럽네. 이해해줘.”

머쓱하다는 듯 웃는 태열을 보면서, 이에나는 결국 소리를 질러버렸다.

“왜 그렇게 되는 거야?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다고! 내가 너하고 친해진 것 역시 모두 가짜였어! 넌 속은 거라고! 사실을 말해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어. 널 선택한건 문학부에 들어있어서야. 유이랑 현상이랑 가까우니까. 단지 그러기 위해서 골라진 것뿐이라고. 너한테 그런 마음을 품게 한 것 모두 연기였어. 가짜였다고! 그런데도 왜 그러는 거야! 속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어, 역시 눈치 챘었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거.”

얼빠진 태열의 말에, 이에나는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처음엔 오타쿠라서 그냥 미소녀다 하고 좋아라 하는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으니까. 장단 맞춰 주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거든. 여하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런 말 하면 멋있어 보일 줄 알아? 아니면 그냥 오타쿠라서 이런 상황에 끼어든 게 재밌을 뿐인 거야?”

“그럼 나도 묻자. 어째서 넌 내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니까 중단한 건데?”

이에나의 독설이 멈췄다.

“그렇잖아? 누구라도 상관 없다는 건 바꿔 말하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는 거야. 자기 친구랑 친구 동생을 없애는 일인 정도인데, 제 3자야 신경 쓸 바 아니지. 근데 왜?”

“…….”

“뭐, 속이고 속이는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보는데, 나는. 중요한건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지. 니가 날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가 좋아졌거든. 그것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태열은 슬쩍 이에나의 옆으로 가 손을 잡았다. 이에나의 얼굴이 빨개지는 게 태열의 눈에 들어왔다.

속여진건 아무렇지 않다. 악역이라고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난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단 며칠간의 인연이라도 상관없다. 첫눈에 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정도야. 그건 그래도 진짜 연애 게임 같네. 태열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카사노바도 아니고.”

“날 이렇게 만든 니가 할 말은 아니지.”

두 사람은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갑자기 왠 닭살이 돋지.”

별 생각 없이 속마음을 내뱉으며, 현상은 양 팔을 문질렀다.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새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숨어있었던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교실 창문 밖을 내다본다.

“슬슬 나오지 그래에? 꽤나 기다려줬잖아아. 어디 있어어?”

그 이후로 수시간. 바로 추격이 올 줄 알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아무 교실에나 대충 구겨박힌지 한참이지만, 어째서인지 이에나는 바로 공격해오지 않고 저 난리 중이다. 뚜벅뚜벅 하는 걸음소리와 늘어지는 말소리 때문에, 정말로 꿈에 나올지 무서울 정도로 심리적 압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 새벽에 저건 잠도 없나.

근데 그것보다 문제는 이쪽인데 말이지. 현상은 생각의 진로를 바꿔 옆에 쓰러져있는 유이를 바라봤다.

설마 위험한 건가. 기절한지 한참이 지났는데.

일단 호흡 같은 건 이상이 없는 것 같았지만, 수 시간 동안 기절해있는걸 보면 확실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의사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 포위당하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구나, 하고 한가롭게 생각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이에나는 공격해오지 않는 거지?

그로부터 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공격은 하지 않고 오로지 협박 중. 왜? 이 학교가 좀 넓긴 하지만, 맘먹고 찾으려고 들면 10분도 걸리지 않을 텐데, 어째서?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힘이 쭉 빠졌지만, 현상은 억지로 정신을 바로 세웠다. 정신 차려. 어떻게든지 뭔가를 하고 유이를 데리고 여기를 빠져 나가야한다고.

그때, 유이가 갑자기 눈을 떴다.

“우왓, 까, 깜짝 놀랐잖아. 다음부터 깨어날 때는 깨어나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허락 받은 다음 깨어나. 그보다 괜찮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현상이 같잖은 농담을 던지며 가까이 가려고 하는 순간, 유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와, 이건 도대체 뭔 시추에이션이야, 하는 사이, 유이는 눈물이 펑펑 흘러나오는 얼굴을 감싸며 현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뭐, 정확히는 앞으로 쓰러지는데 그 자리에 현상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나, 흑, 난 어떻게 하면 돼? 응? 흐윽, 흑,”

“아니, 잠깐만 좀 진정하고…….”

뭐야, 갑자기 왜이래? 현상이 곤란하다는 듯 자세를 바꾸려고 했지만, 유이는 그 자리엔 자신밖에 없다는 듯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것도, 나에게 기댔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불현듯 현상의 머리를 스쳤다.

유이는 계속해서 울었다.

 

아주 어려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범위는 늘 혼자였던 순간부터 시작한다. 아무도 없는 폐허. 그 속에서 혼자 살아가던 자신. 당시의 자신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언제였는지도, 몇 살이었는지도. 주변엔 소중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아무 미동도 하지 않고 쓰러져 썩어가고 있었고, 자신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를 움켜쥔지도 오래, 이제는 자신이 먹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로지 빨리 편해지기를 기다리며 바닥에 누운 채로 귀를 기울이면, 저 멀리에서 쿵쿵하고 울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갔다. 늙은 노파. 데려 간곳은 왠 마차였다. 그 안에는 자신보다 작은, 붉은 머리의 소녀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자신을 데려간 노파는, 어째서인지 자신을 할머니라고, 그리고 소녀를 동생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지금부터 자신이 돌봐주겠다고 하며.

치료를 받고 음식을 먹으며 건강은 회복해 갔지만, 그 사이 색이 빠져버린 머리, 하얗게 변해버린 피부, 빨갛게 충혈된 눈의 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은빛 머리카락, 이라고 하면 신비하게 들리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흰색과 다를 것이 없다는 걸 눈치 챌 것이다. 노파는 그것이 매우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 뒤에도 늘 노파는 말을 걸어왔지만, 자신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작은 소녀도 귀찮았다. 빨리 편해지고 싶었는데. 그렇게 언제나 자신은 혼자였다. 마차는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고, 풍경은 계속해서 바뀌어 나갔다.

어느 순간이 기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모든 풍경이 바뀐 것 같았다. 자신은 어느새 작은 소녀와 뛰놀고 있었고, 노파를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의 기억은 없지만, 자신의 몸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오랜,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었으리라고.

여행을 계속하며 마법이라는 걸 배웠다. 만약 자신이 다르게 태어났다면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백지나 다름없던 상태였던지라 그것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마차는 계속해서 움직였고, 할일은 없었기에 자신은 할머니, 아니 이제는 스승님으로 변한 그녀에게 배운 몇 가지 마법만을 언제나 연습하고 있었다.

마차는 여행을 계속했고, 언제나 만나는 사람은 바뀌었다. 둘도 없을 친한 사이가 된 다음날, 흔적도 없이 그 사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람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런 이별이라는 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우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어느 순간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보고 싶고, 다시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아주 어려서의 기억 때문일까,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스승님은 은인이니까. 그리고 분명 그것이 나쁘다고 차마 생각을 하고 있지 못할 테니까. 분명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많은 사람을 알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실 뿐일 테니까.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헤어질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되니 첫 발자국을 내미는 것이 힘들어졌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되는지가 신경 쓰이게 되었다. 더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접근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마법사로 임무를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다.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들과는 친해질 수 있었다. 자주 만날 수 있으니까. 그 중에는 마차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금발의 소녀도 있었고, 동생도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점도 있었고, 자신이 인정받는다는 점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과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밖에, 즉 임무를 위해 만난 사람들과의 접촉은 힘들어졌다. 얼마 후면 영원히 만날수 없게 되니까. 그러니 자연히 임무에도 지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나, 즉 기는 지역마다 다르다. 기는 그 지역을 형성하는 요소들. 자연환경, 사람들 간의 관계 같은 것들. 새로운 사람은 알 수 없다. 때문에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이 1종 계약자.

일종의 ‘친구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친구들’을 사귀는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당연하다는 듯 친해지고, 서로 아쉽다는 듯 헤어졌지만, 자신은 그런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민을 하던 사이, 자신, 즉 유이는 생각해냈다. 결국 요컨대 임무만 수행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단 한명이라도, 억지라도 자신과 관계하게 하면 되는 거라고.

즉, 유이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자신을 아는 사람들과 동료들이지, 임무 부임지에서 사귄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유이는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에나는, 흑, 배신했어. 다른 동료들도, 아마, 흑, 각자 대부분 내 적일 꺼야. 서양학파는 날 노려서, 동양학파는 하레니이얀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결국, 난 믿을 사람이 없었던 거야.”

“…….”

“레니도, 내 동생이 아니잖아? 난 단지 중간에 끼어든 사람일 뿐이야. 가짜 언니야. 그런데, 나에겐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어.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진짜 동생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

“나, 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 다시 나 혼자야. 새로 사람을 사귈 순 없어. 그럼 난 어떻게 하면 좋아? 어떻게 하면…….”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유이는 울면서 현상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불안. 길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길을 알려주면 될 것이다. 유이는 그것을 기대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자신 역시 그 길은 모른다. 불안을 지워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된다, 하고 알려줄 사람이 있을 리 없는 문제니까. 오히려 자신도 그 답을 알면 좋겠으니까.

울면서 앉아있는 유이의 모습에, 현상은 자신 역시 가슴이 답답해지는걸 느꼈다. 타인과 친해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와는 다르니까. 어떻게 해도 같아질 수 없으니까. 사람은 영원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자기 자신조차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단지 자신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할 뿐. 결국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보면 자기만족일 뿐이다. 당장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사실은 자신과 지낼 때 불편해 한다고 해도, 같이 있기 싫어한다고 해도,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말해야만 해.

현상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유이에게 소리쳤다.

 

“그래서, 어, 쩌, 라고!!”

 

생각치도 못한 폭언에 유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현상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현상은 그런 유이를 내려 보며 계속해서 외쳤다.

“소중한 사람? 배신?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저쪽 생각은 달랐나보지! 속인 놈만큼 속는 놈도 나쁘다는 말에는 보통 찬성 안하지만, 맞는 말 아니야! 바보같이 속는 쪽도, 정신을 차리면 속지 않을 수 있었던 거 아니야! 자기가 당하고서는 징징 거리는 바보가 세상에 어딨어! 애당초 너도 날 속이고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친구 사이에도 서로 속이는 경우는 많다. 장난삼아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정말 모든걸 걸고 상대를 속이는 경우도. 대인관계니까,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물이니까. 정말로 중요한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남을 속이는 경우도 있는 거다. 물론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지만, 누구나 다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정당하다는 건 아니다.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 뿐. 그리고 그 방법은 누구나 한번은 택하는 것이라는 것 뿐.

“자신은 끼어든 사람이라고? 세상에 끼어들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태어나자마자부터 부부인 사람이 있어? 동생?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면 동생이지! 같은 배에서 나왔다고 특별히 친한 줄 알아? 내 동생하고 나는 매일 자웅을 겨룬단 말이다! 그럼 내 동생은 천하의 원수냐! 끼어들었든 뭐든 소중하면 되는 거 아니야!”

소중한 사람은 사람마다 다르다. 생기는 방법 역시 천차만별이다. 부모님의 결정으로 어려서부터 약혼자가 된 사람도 있는가 한편, 전철에서 구해준걸로 사귀게 되는 커플도 있다. 치고받고 싸우다가 서로 정이 든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같은 배에서 나온 동생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친하게 된 동생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역사책을 펼치면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피를 보기 위해 싸운 경우도 많은 반면,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임에도 피를 나눈 사이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 경우도 있다.

“마지막으로, 새로 사귈 수 없어? 그럼 우리 문학부 멤버 일동 + 동우 등 기타 엑스트라는 뭐냐!”

사귐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친구의 기준, 애인의 기준, 가족의 기준 등. 어느 정도의 공통분모는 있겠지만 자세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상대가 자신을 적이라고 생각해도,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하면 친구일 것이다. 요컨대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고, 그 기준의 선정자는 자신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 맘대로 하면 된다는 뜻이다.

“지난 일 가지고 울고불고 짜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네가 여기 와서 사귄 사람 모두 널 소중히 생각하고 있어! 할 수 없다고 왜 울면서 포기하는 거야!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 단지 무서워서 변명하면서 도망치는 것뿐이잖아! 헤어지는 게 무섭다고? 하지만 만나지도 않을 수는 없어! 지금 이 순간 친하게 지낸다면 그걸로 충분하잖아!”

헤어지는 건 무섭다. 당연한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설령 피한다고 해도, 새로 만나지도 못할 수는 없다.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니까. 살아가다 보면 사람은 만나고 헤어지는걸 언제나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이 녀석은 그 순간마다 손을 내미는걸 주저할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아무도 자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고, 그게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현상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야단맞는 어린아이처럼, 정말로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유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난 이 녀석이 변명하지 못하게 해주겠어.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 못하게 해주겠어. 무서워서 고개를 돌린다면, 억지로 손을 잡아주겠어.

“만약 헤어진다고 해도, 난 너에 대한걸 잊지 않아. 나뿐만이 아니야. 동우도, 부장도, 부부장도, 연아도, 성미도, 선생님도, 태열이도, 세영이도, 반의 모두도, 그리고 지금까지 니가 헤어진 사람들도, 너에 대한걸 잊지 않아. 설령 잊는다고 해도, 함께 지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도, 그건 확실히 있던 일이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혼자서 걸을 수 없다면, 강한 척 하지 마. 기대는걸 두려워하지 마. 손을 내미는걸 주저하지 마. 분명 주변에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줄 거야. 혼자 걸어갈 수 있게 해줄 거야. 혼자 걸어가기 시작하고, 다시 그 사람을 보고 싶어도 볼 수는 없겠지만, 그 사람이 걷게 해줬다는 건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니가 하고 싶은 걸 해. 그리고 필요한건 뭐든지 나에게 말해. 도와줄 테니까.”

 

유이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현상을 바라봤다. 그리고 내밀어진 손을. 아마 유이는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저 손을 잡아도 될 것인가. 다시 한 번 언젠가는 혼자가 되어야 할 텐데, 그래도 저 손을 잡을 것인가. 현상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내밀고 있을 뿐.

“슬슬 질리네. 그만 끝내고 싶으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유이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지만, 현상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여전히 곧은 시선으로 유이를 바라볼 뿐.

유이는 그 시선을 마주보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떨리던 눈빛이 점점 초점을 맞춰가고, 이윽고, 현상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어느새 표정은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기운 났어?”

“폐를 끼쳤네. 괜찮아.”

풀려진 머리를 정리해 묶으며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은 아까까지의 유이와는 다른 빛을 내고 있었다. 현상은 별 말 없이 유이에게 마법봉을 내밀고 배트를 들어올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원하는걸 말해봐.”

“내가 뭐라고 할 것 같아?”

씩 웃으며 마법봉을 받는 유이를 보면서, 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지 않는 은빛 눈동자. 피에 부분씩 물들었지만 여전히 찰랑거리는 두 갈래의 은발. 거대한 건물의 기둥과도 같이 서있는 그 몸. 그 모든 것이 자신이 기대고 싶을 정도로 강대한 모습이었다. 진짜 아까 나에게 기대라고 해줬던 그 사람 맞으려나. 유이는 마법봉을 잡고는 현상과 함께 자세를 낮췄다. 복도 저편에서는 계속해서 뚜벅뚜벅 하는 소리.

“어떻게 할까? 내가 시간을 벌까?”

“아니, 나한테 좋은 작전이 있어. 좀 도와줘.”

현상의 말에 유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진지하게 바보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유이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현상을 바라봤다.

“지금 그걸 작전이라고 짠거야?”

“더 좋은 계획 있으면 말해봐. 난 나름대로 진지하다고.”

“하아, 알았어. 그럼 이제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한숨을 한번 쉬고, 유이는 보는 사람까지도 자신감이 가득 찰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멈칫. 그 동작에 현상의 움직임 역시 멈췄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있어.”

“뭔데?”

잠시 두어번 주저주저하다가, 유이는 현상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왜 나한테 손을 내밀어 준거야?”

“응?”

“왜 나한테 그렇게 잘 해준 거야? 난 분명 이젠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제 괜찮다고, 상관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 때문에 좋은 경험 한 적은 한 번도 없고, 맨날 귀찮고 힘든 사건에 얽매이고, 목숨을 잃을 뻔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어째서?”

곧은 눈동자. 하지만 볼은 약간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입술 끝은 심하게 긴장을 했는지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입 꼬리는 웃는 것처럼 일그러지고, 그러나 그러면서도 눈빛은 변하지 않는다. 창피해서 도망가고 싶지만 반드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래서, 현상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넌 내 친구니까.”

 

“……엥?”

고개를 끄덕이며 돌리려던 유이는 그 대답에 표정을 이상하게 바꾸며 현상을 바라봤다. 뭐야, 뭐가 문제야. 유이는 이젠 새빨개진 얼굴로 팔을 휘둘러가며 외쳤다.

“치, 친구니까? 그게 다야? 좋아한다던가, 반했다던가, 사랑한다던가, 소중한 사람이라던가, 그런 게 아니라?”

“나, 낯 뜨겁게 무슨 소리야!”

친구니까. 힘든 일에 휘말려도, 목숨이 위험해도, 나에게 이득이 없어도, 친구에 대한 일이니까. 저 녀석이 뭐라고 생각하든, 난 저 녀석을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현상은 아까 부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제 이야기는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제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 친구에게는 요즘 사귄 친구가 있어요. 성격도 나쁘고 늘 제멋대로인데, 어쩌다보니 저, 아니 그 친구한테는 그쪽이 먼저 다가와서 말이죠, 여하튼 요 근래 친하게 됐어요. 근데 그 친구한테 요새 문제가 생겼어요. 요새 하던 일이 잘 안돼서 말이죠, 좀 심각합니다. 근데 지는 죽어도 도움이 필요 없대요. 혀를 깨물고 죽으라고 해도 도움이 필요 없다는데, 그 친구는 어떻게 하는게 옳은지 모르겠대요. 싫다고 하는 녀석 억지로 잡아서 도와주겠다고는 했지만, 잘한 건지 모르겠다고요. 부장이라면, 어떻게 할래요?”

“내가 어떻게 하겠냐는 중요한 게 아니네, 김현상 작가.”

부장은 씩 웃으며 현상을 바라봤다.

“그렇잖은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겠냐는 중요한 게 아니네. 그 친구에게 전해주게. 중요한건 ‘내가 뭘 하고 싶냐’ 라고. 그 친구가 뭐라고 하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왜냐고? 행동하는 건 자신이거든. 잔인한 예를 들어보지. 그 친구의 친구, 에잇, 이렇게 말하니 힘들군. 자네의 친구를 A, 친구의 친구를 B로 두지. B가 A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A는 무시할 수도 있네. 반대로 B가 거부해도, 자네의 친구 A가 무시하고 도와줄 수도 있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중요한건 행동하는걸세.”

멍하니 있는 현상에게 부장은 양손을 벌리며 통쾌하게 말했다.

“애당초 친구라는 게 뭔가. 친구는 이거 해라해서 저걸 하고, 저거 해라해서 이걸 해주는 사이가 아니지. 그런 건 주인과 노예 사이겠지. 친구란, 남을 위해서 자신이 나서서 하거나, 하지 않는 거라고 난 생각하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거고, 어려운거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친구라면, 그건 친구가 아닐세.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A와 B는 친구가 아니야. 하지만 말일세, 반대로 말하자면 만들어졌어도 한쪽이 다른 쪽을 주인이나 노예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친구란 말이겠지. 아무래도 자네의 친구 A는 굉장히 사람 좋은 녀석인 모양이군. 멋대로 생긴 친구지만 친구로 생각하니 말일세.”

“…….”

“왜 자네가 얼굴이 빨개지는 건가. 자네가. 여하튼, 이 나는 이 자리에서 선언하지. 만약 그 자네의 친구 A군이, B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반발을 무시하고 오히려 역으로 두들겨 패는 한이 있더라도 도와줘야 하는걸세. 내가 생각하기엔 그게 친구야.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고? 허세도 작작 부리라고 전해주게. 만약 도움이 필요 없다면 아예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을걸세. 가서 도와줄 필요 없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게 해주라고, 그 친구에게 전해주게.”

 

그래, 유이도, 세영이도, 레니도, 태열이도, 그 외 모두도 소중한 사람이다. 소중한 친구다.

그리고 유이는 붉어진 얼굴로 계속해서 퍼덕거리다, 잠시 침묵했다가, 결국 깔깔깔깔 하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기 시작했다. 내 처지야. 현상은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듯 그런 유이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뭐, 뭐야 도대체. 불만이야?”

“아, 정말, 나도 참 고생이지, 어쩌다가, 푸하, 하하하하! 현상이 넌 정말 최고라니까!”

“뭐가 그렇게 웃겨! 나, 나도 그런 말 하기 창피하다고!”

“그,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푸하하하하하하!”

정말, 어쩌다가 이런 거랑 알게 된 건지. 그리고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스스로가 한심해지잖아. 유이는 마저 눈물을 닦아내고, 눈빛을 진지하게 바꿨다. 그리고 그 행동에 현상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교실 문이 통째로 날아갔다.

“슬슬 다시 시작해도 괜찮지?”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패닉에 고개를 돌리던 현상의 어깨를 잡고, 유이는 흔들며 말했다.

“계획대로 하자! 알았지?”

“아, 알았어! 오케이!”

교실 문 저쪽으로 현상이 뛰쳐나가는 순간, 이에나의 레이피어의 끝 역시 그쪽으로 옮겨졌다. 조준 완료, 발ㅡ 그러나 그 순간 눈앞으로 나가오는 불덩어리에, 이에나는 재빨리 마법을 캔슬하고 방벽을 만들었다. 굉음. 복도가 순간 안개로 가득 차고, 시야가 확보된 순간 현상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 대신,

“기다리고 있었어.”

유이는 마법봉을 한번 휘두른 다음 조준을 고쳤다.

 

세영은 침대에 기댄 채 졸고 있었다.

집에는 오늘 문병 때문에 하루 밖에서 자고 온다고 했으니 문제는 없을 테고, 특별히 할 일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새벽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 짓을 왜하나 하고 고민한 게 8번 정도, 때려치우고 집에 갈까 했던 게 5번이었지만, 코에 호스를 낀 채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레니를 보면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점점 누구 닮아서 착해 빠져가는 것 같아. 눈을 비비며 세영은 문뜩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 누구는 지금 뭐하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영은 레니를 바라봤다. 어떻게 보면 적의 동생을 간병하고 있는 거네. 그것도 그 적이 유리하게 만들어주면서. 작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 하긴 그때는 이런 감정을 느낄 줄도 몰랐으니까.

뭐, 그 녀석은 둔탱이니까. 세영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그 이상 걱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레니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채고 너스 콜을 누른 건 그와 동시였다.

 

 

“마지막 기도는 이제 끝난 건가?”

비웃는 이에나의 미소를 보며, 그러나 유이는 화를 내는 대신 살며시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 역시 즐거운 웃음보다는 이를 드러내는, 악역의 미소에 가까웠다.

“기도해도 아무도 안 들어주기에 때려치웠어. 무엇보다 널 좀 두들겨 패달라는 걸 누구한테 대신 해달라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말이야.”

그 말에, 이에나는 피식 웃어버린 다음 검을 한번 휘둘렀다. 유이와 이에나의 사이 통로에 불꽃이 번져, 어두운 신교사의 복도를 붉게 비추었다. 그 불꽃 사이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들어가며, 이에나는 말했다.

“이제 너도 슬슬 진심이 된 것 같으니까, 이제 더 이상 말하거나 할 필요는 없겠지. 이젠 진짜로 끝내겠어.”

유이는 그 말을 들으며 같이 이에나를 향해,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넌 날 배신했어. 레니를 배신하고 상처 입혔어.”

“솔직히 너보다는 레니가 더 문제였으니까. 목표로서도, 실력으로도.”

“너 만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용서받을 생각도 없어.”

불꽃 속에서 둘은 달려들어, 그대로 검과 봉을 맞부딪혔다. 유이는 그대로 몸을 돌리며 봉의 반대편으로 이에나를 가격하려 했으나, 이에나는 재빨리 뒤로 도약하며 캐스팅, 그대로 손끝에서 마나로 만들어진 화살이 유이를 향해 날아간다. 그러나 유이는 봉을 휘둘러 역으로 그런 화살을 이에나를 향해 날려 보냈다. 그러나 그 공격은 이에나가 만들어낸 방호벽 앞에서 허무하게 부서졌다.

유이는 그러나 그 틈을 놓이지 않고, 공기로 만든 벽을 응용해 공중에서 이리저리 튕겨가며 이에나를 향해 접근해갔다. 그리고 봉 끝에서 자신의 특기인 푸른 화염을 발사한다. 이에나는 춤이라도 추듯이 움직이며 그런 화염을 튕겨 내거나 피해냈다. 화염은 주변의 벽으로 튀어 옮겨 붙어, 복도는 붉은 화염과 푸른 화염이 넘실거리는 꿈속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로 변했다.

사격하며 이에나의 앞에 도착한 유이는 다시 한 번 봉을 이에나를 향해 찔러 넣는다. 그러나 그 순간, 이에나의 손끝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광역적으로 뿜어져나가는 전기의 채찍. 그러나 번개는 유이의 몸에 닫기 전, 공중에서 파바박 하고 불꽃을 튀기며 사라졌다. 그리고 대신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는 자리에는 물방울들이 있었다. 유이는 그대로 물방울을 이에나를 향해 역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나 이에나의 앞에서 튀어나오는 콘크리트의 벽. 전기는 그 벽에 맞아 방전되어버리고는 사라졌다. 유이는 달려들어가며, 벽을 향해 봉을 내질렀다. 박살나는 콘크리트의 벽. 그리고 그런 유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에나의 수압포였다. 재빨리 공기압의 벽을 만들어 막아냈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벽은 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유이는 채 비명도 내지 못한 채 복도 저 끝으로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왜 그래? 이게 끝이야?”

이에나의 비웃음에, 유이는 넘어진 자세 그대로 다리를 휘두르며 자세를 일으켰다. 평소 같으면 둘의 실력은 호각. 하지만 2종계약을 이에나가 체결한 이상, 이에나가 확실히 우세할 수밖에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직접 겪게 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마법사의 대결에서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사용 가능 마법의 수, 그 위력, 응용력, 발동 시간, 동시에 시전할수 있는 마법의 수, 그리고 마력의 양. 여태까지 둘의 관계는 서로의 장단을 따져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동등이었다. 그리고 지금, 사용 가능한 마력의 양의 차이 하나, 그 중요한 한 가지 요소의 결정적인 차이로 그 우위는 메울 수 없는 선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유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2종 계약까지 한 것 치고는 별로인데?”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그건 그렇고, 이게 전력을 다한 거 맞아?”

“그럴 리가.”

그 순간, 갑자기 느껴진 한기에 이에나는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너무 방심했나. 발아래를 보니 발목 정도까지 얼음으로 고정되어있었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게 대 마법사 전투 철칙이라는 것도 잊었나봐?”

놀리듯이 말한 다음, 뒤로 물러서며 영창을 시작한다. 유이가 영창을 할 정도의 마법은 단 하나. 발목에 있는 얼음을 녹이려고 했지만, 자세히 보니 부적이 붙어있었다. 얼음 구조를 물 구조로 바꾸려고 해도, 부적이 붙어있는 한 계속해서 얼음 상태를 유지시킬 것이기에 힘들다. 이건 좀 위험한데. 이에나의 이마에 드디어 식은땀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이에나를 보며, 유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봉을 겨눴다.

번쩍이는 강력한 번개가 복도를 말 그대로 가득 메웠다.

눈이 멀듯한 섬광. 그 사이에서 유이는 승리를 확신했다. 좋아, 현상이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겠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상함을 깨닫고 유이는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반성했다.

“마법사에게 응용성 또한 중요한 덕목이지. 솔직히 니 응용력이 아니었다면 이번 건 진짜로 위험했을 거야. 고마워.”

자랑스럽게 자세를 잡고 말하는 그 앞에는, 수증기 사이로 흐르는 전류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고 하나. 유이는 웃는 얼굴 그대로 이를 물었다. 복도를 여전히 가득 메우고 있는 붉고 푸른 불꽃들. 그 사이에서 천천히 기화되는 물웅덩이들과 콘크리트의 파편들. 그 사이로 삐져나온 철골의 흉측한 모습들. 저기 어딘가 먼 수돗가에서 제대로 잠기지 않은 수돗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나온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학교 안에서, 푸른 달빛을 받으며 내일의 소란을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있는 교실. 제대로 지우지 않았는지 분필가루가 남아있는 칠판. 아이들이 칼로 파낸 자국이나 낙서가 어지럽게 적혀있는 책상들. 제대로 들어가 있거나 슬쩍 나와 있는 의자들. 먼지가 수북이 쌓인 태극기와 교훈이 적혀있는 액자틀.

유이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있는 힘껏 뒤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이에나는 그 행동에 자신 역시 재빨리 달려 나갔다. 유이를 따라가며, 이에나는 허리춤에 매달아둔 포션 몇 개를 꺼내 던졌다. 벽에 맞아서 깨어지는 포션.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미리 주문을 걸어놓은 액체에 반응하여, 작은 골렘 몇 마리가 생겨난다. 수는 3. 동시에 소형악수 4마리가 그 사이로 질주해온다. 유이는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그 광경에 더욱 속도를 늘린다.

원래 서양학파는 시종과 함께 싸우는 것이 기본. 자기 혼자 나서기 좋아하는 이에나가 보조역할을 할 물건들까지 꺼냈다는 것은, 진심을 다하겠다는 상징과도 같은 행동. 유이는 일단 뒤를 향해 봉을 내밀고는 특기대로 불꽃을 몇 개 쏘아 보냈다. 그 순간 앞에 나오던 소형악수가 걸음을 멈추고, 튀어나온 골렘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충격. 학교 건물을 구성하는 콘크리트로 만든 골렘에게 불꽃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벽 뒤에서 달려오는 악수와, 날아오는 이에나의 공격.

“치잇!”

이에나의 공격을 몸을 트는 걸로 피하며, 그대로 춤을 추듯이 봉을 움직인다. 불꽃 공격인줄 알고 다시 앞으로 나서는 골렘. 그러나 그 순간 바닥에서 올라온 암벽들이 철창과도 같이 그 길을 막는다. 걸려서 정지된 골렘들. 겨우 생긴 구멍 사이로 악수가 튀어나온다. 바로 다음 순간 강력한 폭발. 그 폭발에 암벽들과 골렘이 같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진다. 그 불꽃과 연기 사이로 튀어나오며, 이에나는 검을 다시 휘둘렀다. 복도에서 튀어나온 암벽이 똑같이 유이의 앞길을 틈새 하나 없이 막은 순간, 아니 정확히는 그 직전, 유이의 속도가 순간적으로 빨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틈새 하나 없는 암벽이 제대로 짜이기 직전, 유이는 그 사이를 말 그대로 ‘마법처럼’ 통과했다. 악수의 진로가 막히기 전에 암벽은 이에나의 공격에 파괴되었다.

“어디까지 도망칠 생각이야? 도망쳐도 의미 없다는건 알텐데!”

“있는지 없는지는 니가 알바가 아니지!”

복도의 끝. 그곳에는 구교사로 이어지는, 지금은 열쇠조차 잃어버려 완전히 폐쇄된 통로가 있었다. 유이는 즉시 봉을 내밀고는 잠긴 문을 향해 불꽃을 날렸다. 폭발음과 함께, 유리와 샤시로 만들어진 미닫이문은 산산조각 나며 튕겨나갔다. 채 10발자국도 안되어 끝나는 통로의 다른 쪽 문 역시 날려버리며, 유이는 구교사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는 책상들로 만든 벽을 몸으로 부딪쳐 깨버린 다음,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그 잔해를 피하느라 악수들은 잠시 주춤한다. 그리고 시야가 가린 덕분에, 이에나 역시 특별히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 사이 어느새 구교사의 중앙계단까지 도착한 유이는 그대로 몸을 틀어, 계단을 급속도로 올라간다.

“그렇게는 안 돼!”

그러나 이에나의 외침에 뒤를 돌아본 순간, 유이는 어느새 자신을 따라잡은 소형악수를 눈치 챘다.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악수의 발톱을 봉으로 튕겨내고, 다른 한 마리의 턱을 봉 반대쪽으로 올려친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하는 그 행동에, 유이는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순간 역시 따라온 이에나가 검을 유이를 향해 겨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계산된 행동인 듯, 유이는 공중에서 옆으로 한 바퀴 돌면서 봉을 이에나 쪽으로 향한다. 그 행동에 계단을 이루는 콘크리트 벽이 튀어나와, 이에나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이에나의 검에서 튀어나온 마법은 콘크리트 벽을 날려버렸다. 혀를 차며, 이에나는 그대로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교사에 도착했다는 건 작전의 시간. 그럼 사전 준비를 마저 끝내야겠지. 유이는 살짝 입술을 핥았다. 달려오는 악수. 봉으로 양쪽을 차례로 가격한 다음 공격하려 했지만, 그 순간 날아온 이에나의 마법을 앞으로 쓰러지듯 공중에서 한 바퀴 구르며 피해 그 기회를 놓쳤다. 동시에 튀어나오는 건 이에나. 뒤로 점프해 튕겨가며 지연 용도로 공기의 벽을 몇 개 만든다. 물론 이에나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회피.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이쪽 앞의 진로를 다시 막는다. 불꽃의 벽. 바로 몸 앞에 얼음 장벽을 만들어 온도가 떨어진 틈새로 통과한다.

조금만 더.

그 순간 이에나가 달려든다. 날아오는 이에나의 검. 몸을 비틀어 뒤로 날아가는 형세로 유이는 이에나의 레이피어를 막고, 흘려냈다. 그대로 봉을 한 바퀴 휘둘러서 반대편으로 스윙. 하지만 이에나는 놀라지도 않고 그대로 한 바퀴 돌면서 봉을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동시에 찌르기, 막고, 튕겨지고, 억지로 궤도를 꺾어 다시 휘두르고, 공격을 막은 유이에게 다시 한 번 공격을 넣고, 그 공격을 튕겨내며 공격하는 유이의 공격을 막는다. 말은 이렇지만, 여전히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하는, 사람의 눈으로는 보기 힘든 속도의 행동들. 검과 마법봉이 힘겨루기에 들어가,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왜그래? 그게 다야?"

이에나는 비웃으며 검을 막은 유이에게 발길질을 날린다. 긴 봉의 길이를 이용하여 유이는 그것 역시 막아낸 다음, 팔에 힘을 줘 이에나의 몸을 한 바퀴 돌린다. 이에나는 그 회전을 이용해 검 대신 짧은 거리를 감안해 연속으로 발차기. 봉을 사용하는 유이는 더욱 불리하다. 유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봉을 앞으로 던진 다음, 역시 주먹과 발길질을 날린다. 펀치, 흘려지고, 그 자리로 들어오는 이에나의 손날치기. 유이는 팔뚝으로 막으며 그 충격을 이용해 옆으로 한 바퀴 돌며 킥. 깔끔하게 이에나의 얼굴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됐어. 그대로 추가타를 먹이려는 순간, 이에나의 웃는 얼굴이 보인 것 같았다. 유이의 타격의 힘으로 백 텀블링을 하는 이에나의 발길질에 이쪽이 역으로 깔끔하게 한방 먹었다. 잠시 주춤하는가 싶은 순간 다시 날아오는 이에나의 주먹에 급히 반격하여 주먹을 날린다. 중간 지점에서 부딪쳐서 무효화. 그대로 물러서며 머리에 하이킥. 역시 서로 부딪쳐서 무효화. 유이는 마지막으로 발차기가 막힌 발을 강하게 밀며 뒤로 물러선다. 그 사이 앞으로 던진 봉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이의 손으로 들어왔다. 연속 사격. 불꽃이 튀긴 다음, 그 너머로 보이는 이에나는 역시 검을 들고 사각형의 마나쉴드로 그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봉을 휘두르고, 막고, 힘을 겨루다 강하게 밀쳐지고, 날아오는 검을 튕겨낸 다음, 춤추듯이 한 바퀴 돌아 복부에 두발. 하지만 그 사이 벌써 그곳에 펼쳐둔 방벽에 막힌다. 그리고 날아오는 이에나의 마법.

“치잇!”

이쪽의 방벽은 켜지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봉에 기를 통하게 한 다음, 그대로 마법을 튕기고 흘려낸다. 그 순간 옆의 벽에서 나오는 암석을 밟으며 백 텀블링, 1층을 2번 나눠둔 흔한 구조의 계단의 위쪽으로 향한다. 이에나가 코너를 도는 순간 그보다 먼저 나타난 건 악수 두 마리. 앞에 먼저 나온 악수의 발을 막는 순간, 다음 녀석의 앞발이 다시 날아온다. 발차기로 날리는 순간 그 자리를 메우는건 이에나의 마법 공격. 그러나 그 순간 이에나의 눈에 유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듯한 느낌에 발사를 한 순간, 자신이 엉뚱한 방향으로 공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기루 효과를 사용한 트릭. 얕은 꾀를 짜봤자! 광역범위로 공격을 한다. 유이는 이번엔 피할 수 없는 고로 등에 두르고 있는 코트로 막는다.

“꺄악!”

강하게 걷어차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막아냈다. 그대로 몸을 뒤틀면서 봉으로 아직 달려들고 있는 악수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그대로 입 안에 봉 끝부분을 넣고 발사. 악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동시에 아래층 도착. 동시에 이에나의 날아오는 마법을 보고, 몸을 옆으로 굴린다.

그 순간 이빨을 번쩍이는 악수. 발길질을 해 균형을 무너트리자, 이에나의 진로를 잠시 막는다. 이에나가 그것을 보정하는 사이, 유이는 재빨리 코트 안쪽의 부적을 몇 개 벽으로 던졌다. 조금만 더. 그리고 그대로 다시 도주 개시. 악수가 앞장서고 이에나가 뒤따라서 온다. 그리고 이에나가 부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순간, 앞서가던 악수가 부적 사이로 들어가자마자 몇 개인가의 베인 상처를 입더니 힘없이 쓰러져버렸다. 바람으로 만든 칼날을 이용한 트랩. 이에나가 잠시 걸음을 멈춘 사이, 유이는 문학부실이 있는 5층에 도착했다.

이에나는 계단을 올라가 코너를 돌았다. 그러나 그곳에 유이의 흔적은 없었다. 대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예전에도 본 적 있는 바리게이트의 천국. 앞으로 한걸음 내딛으려는 순간, 이에나는 눈치 챘다. 지난번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그곳에 있는 바리게이트는 모두 작동준비가 된 상태였다.

실이 끊어지면 머리로 쓰러지게 되어있는 대걸레, 바로 발사되도록 준비되어있는 소화기, 넘어지도록 배치된 가구와 교탁, 의자 등등. 지난번에도 지나가는데 힘들게 만들어져있었지만, 이제는 이곳을 지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이 보였다.

이에나는 그런 광경을 보고는, 큰 소리로 비웃고는 외쳤다.

“잠깐, 죽어라고 도망치더니 그 목표가 겨우 이거였어? 이런 애들 장난 같은 걸로 나를 막겠다고?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아무리 그래도 날 너무 우습게 본 거 아냐? 이건 날 무시하는 거라고!”

그 외침과 함께, 이에나는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에나의 검과, 거기에서 튀어나온 마법에 의해 박살나는 바리게이트들. 각종 잔해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소화기에서 뿜어진 연기가 복도를 가득 채운다. 쌓인 먼지와 밀가루, 기타 각종 물질이 그 연기를 더욱 증폭시켜, 이제 문학부로 향하는 복도는 한치 앞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에나는 여전히 망설임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는 문학부실 문을 걷어차 열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가 생겨 이에나의 등 뒤에서 몰려들어오는 연기는 열려있는 창문을 향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부는 바람에 커튼이 휘날리고, 각자의 책상 위에 있거나 한 종이들이 그 바람에 펄럭거렸다. 교실들과 마찬가지로 일과시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쌀쌀하다시피 한 부실.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던 물건들은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보여, 뭐에 쓰는 물건인지 순간적으로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었다. 벽의 게시판에 걸려있는 사진들 역시 일부로 생색내기 위해 걸어놓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책장에 가득 어지러이 꽂혀있는 책들은 생활감과 동시에 어딘지 모를 쓸쓸함을 함께 지어내고 있었다. 이에나는 잠시 그런 부실 안을 바라보고는,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있는 책상들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 순간 뒤에서 날아드는 유이의 봉 공격에, 이에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레이피어로 막아냈다. 이에나는 냉철한 미소를 날리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실망이야, 유이. 설마하니 낸다는 꾀가 이 정도일 줄이야.”

이에나의 머리 바로 위에서 벌어지는 힘겨루기. 양손으로 봉을 있는 힘껏 찍어 내리는 유이는, 그러나 그런 이에나의 반응에 절망감을 느끼는 대신 어딘지 모르게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이, 내가 이 정도 꾀를 가지고 끝낼 줄 알았어?”

그 말에, 이에나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유이는 온 힘을 다하며 이에나를 밀쳤다. 이에나는 그 기세에 밀리며, ㄷ자로 배치된 책상의 끝, 부장의 책상에 부딪쳤다. 유이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유이는 더욱 강한 힘으로, 이에나를 밀어냈다. 그 기세에 책상이 창가로 밀려나고, 이에나의 상체가 창밖으로 밀려나갔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괴성을 지르며, 유이는 계속해서 이에나를 밀쳐냈다. 그 기세에, 이에나의 몸이 뒤로 밀리며, 이에나와 유이는 창밖으로 떨어졌다. 서로 거의 완전히 밀착한 채로, 둘은 바닥을 향해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 유이는, 마지막 힘을 다해 이에나를 밀쳐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런 유이의 등 뒤에서, 뭔가가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게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덮쳐왔다.

그것은 ‘김현상’이라고 이름 붙여진 물체와 야구배트였다.

 

 

“넌 끝났어! 가만안냅둘줄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참고로 마지막 부분은 비명. 유이와 이에나가 치고 박는 사이 올라간 옥상에서 바라보는 1층은 생각보다 많이 딱딱하고, 단단하고, 튼튼하고, 튼실하고, 농담은 됐어 이런 제길 이젠 나도 몰라 너 죽고 나 죽자. 현상은 꽉 감은 눈을 뜨고 이를 악 문채 목표를 향해 떨어져갔다.

이에나는 서투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재빨리 레이피어를 현상에게로 옮긴 다음, 정신을 집중했다. 급하게 방어필드 전개. 바로 그와 동시에 현상은 이에나의 머리, 정확히는 방어필드를 내려쳤다. 방어필드를 내려친 채, 둘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력한 충격. 옥상에서 떨어지며 내리치는 공격은, 현상의 무게와 중력, 휘두르는 힘, 기타 등등을 가지고 엄청난 위력으로 행해졌다. 달리 현상이 튕겨나갈 곳도 없었기에, 이에나의 방벽은 그 충격을 계속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방벽에서 푸른빛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고, 현상은 정말로 온 힘을 다해서 계속해서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주춤하는 이에나를 느끼고, 현상은 생각했다. 잘될지도 몰라.

그러나 그 순간 현상의 눈에 공격을 막듯이 누워있던 레이피어가 자신을 향해 겨눠지는게 보였다. 이런 젠ㅡ 복부에 강력한 충격. 이에나는 그 사이 한 바퀴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현상의 몸은 공중을 떠올라 저 멀리로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닥에 털썩. 순간 머리가 띵해지며 숨을 쉬는 것을 잊을 정도의 충격이 온몸을 엄습했다.

“크학, 크흑!”

옥상에서 떨어지는데 그대로 배에 자동차가 들이받은 것 같은 충격. 아득해지는 머리로 몸을 어떻게든 가누려고 노력하는 사이, 이에나는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와 발 끝으로 배트를 치웠다. 배트는 스탠드석 아래 운동장으로 쇳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다.

“시도는 참 좋았어. 뭐, 니가 나한테 이기는 건 유이가 이기는 거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 정도 머리라도 써야지. 근데 어떻게 하나. 실패해서.”

“크흐, 흐어, 흐어억, 흐억,”

“똑바로 말해봐. 뭐라고 하는지 못알아듣겠잖아. 뭐, 보아하니 뼈 대넷개는 나간 모양이지만. 조금만 더 근성을 내보라고 근성을.”

뚫린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말 인줄 알지. 피를 토하는 기분으로 물같은 침을 뱉어, 아니 흘려내며 현상은 엎어져있던 몸을 어떻게든 돌렸다. 너무나도 아파서 오히려 현실적인 감각이 없다. 단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호흡이 힘들 정도로 아플 뿐. 그리고 눈앞에는 레이피어를 겨누고 약간 비웃는듯한 분위기로 쓸쓸히 웃는 이에나가 서있었다.

부실의 그 바리게이트로 유인해서, 이에나를 방심하게 한 다음, 유이가 이에나를 떨어트리면 현상이 강력한 공격을 통해 자신을 끝낸다는 계획이었던 모양이었지만, 그건 자신의 힘을 너무나도 얕본 행동이었다. 이에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현상을 보면서, 생각을 굳혔다.

“흐윽, 아파, 죽겠잖아, 으윽, 좀 인정을 발휘해서 치료라도 해주면 안 돼?”

“내가 왜? 그건 그렇고, 이제 승부가 난 모양이네. 수고했어. 너도. 그럼 이제 끝내야지.”

“크극, 큭, 크흑, 크흐흐흣,”

그 순간 들려온 현상의 신음소리, 아니 웃음소리에 이에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나도 아파서 정신이 이상해졌나. 그러나 현상은 침을 질질 흘린다는 추한 몰골임에도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크흐, 아직도 상황이, 으윽, 파악 안 되는 모양이네. 설마하니 유이가 시간을 벌고 내가 널 쓰러트린다는 작전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 말에 이에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이 눈앞의 바보가 멍청하더라도, 진심으로 자신보다 강력한 유이를 시간벌이용으로 사용하고 약한 자신이 끝을 낸다는 그런 전술을 짰을리가 없다. 그 유이가 이런 작전을 짰을 리도 없고. 애당초 지금 유이는 어디 있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 점을 잊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렇다는 건…….”

“더블페이크라는거지.”

이번 대답은 현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나는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와 눈만을 돌려 뒤를 바라봤다. 등에는 마법봉이 겨눠진 상태. 그리고,

"이제 다 끝났어."

그 마법봉 끝에 전기를 가득 충전한 채 미소를 짓는 유이.

그리고 온 건물이 밝은 불빛에 번쩍였다.

 

 

태열은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어두운 교실. 불이 꺼진 천장과, 창문에서 살짝 들어오는 달빛. 머리는 묘하게 맑았다. 평소 같으면 일어날 수 없는 시간.

“깼어?”

그리고 시야를 가득 매운, 금발과 파란 눈의 소녀의 순수한 얼굴. 그 얼굴을 보면서, 태열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끝난 거야?”

“응. 거의 끝났어.”

“그렇구나.”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태열은 물었다.

“그걸로 괜찮아?”

“나도 내키지 않았으니까. 이걸로 됐어.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니까, 유이라면 놓치지 않을 거야. 분명. 그 녀석은 밀리면 밀릴수록 힘을 내는 녀석이니까.”

이에나의 내민 손을 잡고, 태열은 몸을 일으켰다. 고요한 학교에는 이에나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이에나는 다만 웃었다. 태열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그리고 그 걱정을 지워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에나는 다만 웃었다. 그리고, 태열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이마를 드러나게 했다.

“고마웠어.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은 이거 정도밖에 없어. 니가 목숨을 걸어줬으니, 이번엔 내껄 줄게. 마나 연결이라는 건 언제나 쌍방향 공유거든? 완벽하게 치료해줄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복잡하게 얽힌 신체적 제약을 전부 풀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 짐을 덜어주는 것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 비록, 내 힘은 약해지겠지만. 원래 정도로 약해져서, 유이에게 지게 되겠지만, 그리고 그 피해로 인해 다시는 싸울 수 없어지겠지만ㅡ

용서받을 수 없는 친구에 대한 속죄와, 이젠 사라질 애인에 대한 감사라면야.

이에나는 태열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안녕. 날 잊어. 그리고, 잊지 말아줘.”

 

태열은 울었다. 눈물을 감고 바닥에 누워 기쁘고 슬픈 꿈을 꾸면서, 태열은 눈물을 흘렸다.

 

“괜찮아?”

“너 같으면, 크흑, 괜찮겠냐.”

“그건 그렇네.”

비틀거리는 현상의 대꾸에 씁쓸하게 웃으며, 유이는 자신의 발아래에 쓰러져있는 이에나를 바라봤다.

검게 그을린 코트, 안의 전투복은 상당히 찢어져있었고 몸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도 약간 나는 게, 이만저만 큰 데미지가 아니라는 게 현상조차도 척봐도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나는 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했어. 손이 움직인다면 박수라도 쳐줄 텐데 안 움직이네. 축하해. 이겼어.”

“왜, 진심으로 싸우지 않았어?”

유이의 질문에 이에나는 단지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유이는 재촉하지 않았다.

“나도 내키지 않았으니까."

결국 이에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스승님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결국엔 누가 중요한 요직 차지할까 가지고 정치 싸움 하는 건데, 그런 데에 휘말리는 것도 싫었고. 뭐 결국 사제지간이니까 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나라고 좋은 건 아니었거든. 솔직히 말해서, 연맹 회의 의장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유치한 말이긴 하지만, 어른들이라는 건 웃기지 않아? 별 대단하지도 않은것에 목숨을 걸고 말이야. 그런 의장 자리, 하면 어떻고 안하면 어떻다고. ”

“…….”

“뭐, 거기에 배신이나 속이는걸 하더라도, 나도 나름대로 철칙이라는 게 있거든. 완벽하게 상대가 모르게 속인다. 속이더라도 배신하진 않는다. 상처가 가지 않도록 속인다. 속일 상대만 속인다. 진심을 보인 상대에게는 진심으로 대한다.”

거기까지 말하고, 이에나는 약간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레니에겐 미안하다고 전해줘.”

유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말에 유이는 주저앉아 이에나의 넉살을 잡았다. 현상이 채 말리려고 움직이기도 전에, 이에나의 힘없는 상체가 그 동작에 딸려왔다.

“철칙이라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그렇게 만들어놓고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셈이야? 끝낼 셈이냐고! 지금 레니는 의식이 없는데,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미안하다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아?!”

강하게 이에나를 팽개치고 유이는 들고 있던 마법봉을 이에나에게 겨눴다. 정말로 화난 표정. 아까 싸울 때보다 더 순수한 분노를 그 눈에 모으며, 유이는 이를 물며 각오를 굳혔다. 이걸로, 정말로 모든 걸 끝내기로.

현상이 마법봉을 잡기 전까진.

“그만해. 그 정도로 끝내.”

분노로 가득찬 시선을 현상에게 돌리며, 유이는 강하게 외쳤다.

“그만하라고? 이 녀석이 방금 뭐라고 했는지 알잖아! 난 용서 못해.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아니, 맞아. 그러니까 그만 해.”

현상의 약간 지친듯한 말에, 유이는 다시 한 번 눈에 불을 켰다. 이를 악 물며, 유이는 살기를 담아 낮게 말했다.

“지금 나랑 장난 하는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아무리 너라도…….”

“그럼 이에나가 어떻게 되길 바라는데? 레니처럼 그렇게 만들면 만족하겠어?”

“…….”

입을 벌리고 뭐라 말을 못하는 유이를 보며, 현상은 마법봉을 놓고 유이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역시 약하게 떨리고 있다. 속으로 자신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현상은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말했다.

“이제 그만 하자. 다 끝났잖아. 꼭 그렇게 죽이고 없애야겠어? 어쨌든 간에 니 친구였잖아. 니가 말했잖아. 아는 사람이랑 헤어지는 건 슬프다고.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고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는 건 슬프다고. 비록 지금은 적이라고 해도, 아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더 있는 게 낫지 않겠어?”

뻔하고 흔한 말이지만, 복수는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복수를 하고 해도, 잃어버린 건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새로운 것을 잃을 뿐이다. 하물며 친구랑 싸우는 거라면 그건 더 심하다. 친구를 잃을 뿐이다. 비록 지금은 친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이라도, 철천지원수라고 해도, 그래도,

이 녀석이라면 나보다 더 잘 알 테니까.

사람의 소중함을 나보다 더욱더 잘 아는 이 녀석이라면 더더욱 잘 알 테니까.

“…….”

현상은 지친 눈빛으로, 하지만 강하게 말했다.

“용서하진 않아도 좋아.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봐. 지금은 용서할 수 없어도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잊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봐. 그 대신, 지금은 끝내기로 하자. 응?”

결국 지난 일이니까. 사과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니까.

“…….”

유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현상을 같이 빤히 바라봤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아직도 아프게 뛰고 있었다. 끝내자ㅡ 쉬운 말이지만, 어려운 일이다.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얼마든지 할수 있는 쉬운 말,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이상 힘들 수 없는 일. 간단하게 말해서 현상이 너는 니 동생이 태열이에게 당해서 의식불명이 되었는데 내가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둘 수 있겠어ㅡ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유이는 단지 현상을 바라봤다. 왜냐하면, 그걸 이 녀석이 모를 리가 없으니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게 얼마나 이치에 거스르는 말인지 알 테니까. 하지만,

현상의 눈은 흔들렸지만, 결코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약하게 미소 지었다.

하긴, 비교할 수 없지, 왜냐하면,

“에, 그게, 그러니까,”

처음 볼 때부터 느꼈다. 늘 약하고 주변에 휘둘리지만, 섬세하지 못하고 둔해 빠졌지만, 정말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찌질이지만, 이 녀석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모든 걸 걸 수 있는 녀석이다. 자기 생각이 틀렸고, 남이 옳고, 변명을 하려고 할수록 자기의 말이 모순이 된다는 걸 알아도, 빽 소리 질러 이야기를 무마시킨 다음 계속해서 자기의 갈 길을 갈 녀석이다. 왜냐하면,

“나, 날 봐서라도. 응?”

이 녀석은 이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녀석이니까. 그리고,

나는 이런 녀석을ㅡ

“……알았어.”

어째서인지 볼을 붉게 물들이며 유이는 마법봉을 거눴다. 왜 붉어지는 건데? 현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오늘따라 분위기가 이상하네. 그런데ㅡ

“잘 선택했습니다. 이 뒤는 이쪽이 알아서 하죠.”

오늘따라 갑자기 사람이 끼어드는 경우가 많군. 지쳐서 그런 건지 침착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상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 사이엔가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검은 망토와 후드를 둘러 쓴, 척 봐도 우울하고 위험해 보이는 모습들. 그러나 후드를 걷어 내리자 아래에는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얼굴들과 푸른색의 전투복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긴 검은 머리의, 붉은 제복의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서있었다.

“저기, 죄송한데 누구…….”

현상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현상을 바라보고 말했다.

“국제 마법사 연맹 관리조사부 부장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김현상씨. 사정상 제 이름은 밝힐 수 없는 건 감안해주세요.”

차분하지만 약간의 따뜻함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현상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유이와 이에나를 바라봤다. 잠깐, 지금 내 이름을 어떻게ㅡ 하고 질문 할 틈도 없이, 저쪽은 벌써 이야기에 들어가 있었다.

“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양. 수고 많았습니다. 이런 일로 뵙게 될줄은 몰랐군요.”

“어, 어떻게 되신 일이시죠? 이런 곳까지 오시고.”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는 유이의 말에는 긴장하는 기색이 섞여있었다. 약한 한숨을 쉬면서 그녀는 유이를 바라봤다.

“다행히도 연맹의회에 대한 파벌 싸움이 조기에 알려져서 말이죠. 저희 관리조사부에서 재빠르게 개입해서 사태는 안정되었습니다. 주요 관계자는 현재 전부 체포, 거의 모든 조사가 끝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지금 유이세피레닐양과 레니세피레닐양에 대한 것을 알아내서 곧장 달려온 것인데, 다행히도 너무 늦진 않은 것 같군요.”

“그렇다는 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예. 사태는 모두 종료되었으니, 이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행히도 주도자적 세력은 아인데른베른님과 두어 분뿐이었던 고로, 사건도 그렇게까지 심각해지지는 않았으니까요.”

안도의 화색이 도는 유이에게 가볍게 미소를 보낸 다음,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에나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나 아인데른베른양. 이런 사건에 연루된 상태로 뵙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지금부터 그쪽의 신병은 이쪽이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심문 등을 받을 수도 있는 점은 양보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사태에 책임은 있으니까요. 겸허하게 벌을 받겠습니다.”

이에나의 말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정상 참작을 될 겁니다. 단순 하수인이었으니까요. 뭐, 그렇다고 해도 처벌은 피할수 없겠지만…….”

“바라던 바에요.”

오히려 안도했다는 투로 이에나는 깔끔하게 그렇게 말하고, 자신을 부축하는 마법사들에게 몸을 맡겼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현상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제가 이름을 알고 있어서 놀라신 모양이군요. 김현상씨. 보고서를 통해 안 것뿐이니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런 사태에 연계되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 아뇨. 제가 뭘……. 하, 하하하.”

깍듯한 자세에 똑같이 (나름대로)깍듯하게 반응하며, 현상은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할 틈새가 없잖아. 물어볼 거랑 따질건 산더미인데. 속 아래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미소 일변의 아름다운 얼굴. 우와, 긴장된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래도 현상에게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슬슬 뒷정리를 시작하죠. 여러분은 학교 교사를 정리해주세요. 여러분은 유이세피레닐양과 아인데른베른양의 집을 정리해주시고요. 자, 빨리 움직이죠.”

“잠깐만, 집을 정리한다고요? 그렇다는건…….”

현상의 당황하는 목소리에, 그녀는 약간 미안한 기색을 나타내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네. 사태 조사와 기타 등등이 필요하니까요. 또한 이곳에서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할 이유도 없고 말이죠. 아인데른베른양은 물론이고 유이세피레닐양 역시 저희와 동행할겁니다.”

“에?”

잠깐만 기다려봐요. 그렇다는 건 말이죠, 현상이 그렇게 생각하며 저지하기도 전에, 그녀는 현상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유이와 부축을 받아 서있는 이에나를 바라본 다음 말했다.

“두 분은 아직 장거리 이동은 불가능 할 테니, 함께 이동하도록 하죠. 두 분, 준비해주십시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마지막 처리를 하고 떠나도록 하죠.”

“아, 잠깐만…….”

현상이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현상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야. 약간은 답답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여는 순간, 세영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동안의 대화. 그리고 현상이 핸드폰을 닫는 순간, 눈앞에 유이가 보였다. 현상은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레니, 의식 회복했대. 이제 안정만 취하면 아무 문제 없다나봐.”

“응, 느꼈어.”

유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결국 이에나한테 복수하거나 않는 게 나았네. 고마워. 끝까지.”

“감사는 내가 아니라 세영이에게 해야지. 아, 전화기 빌려줄까?”

도리도리. 유이는 그렇게 말하고 약간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현상 역시 미소를 거뒀다. 주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에, 현상은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가는 거야?”

“응. 다 끝났으니까. 맨 처음에 말했잖아? 임무가 끝나면 돌아간다고.”

“그렇구나.”

유이는 여전히 슬픈 듯이 웃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까, 현상은 뭐라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얼마나 헤어지는걸 슬퍼하는지 아니까.

“세영이는 계약서에 쓰여 있는 내용을 듣고 한 번에 니 사정을 알아봤었지. 난 몰랐는데 말이야. 그리고 그 다음에도 노력하고.”

그리고 자신도 노력하고. 모두가 노력했다. 알면서, 알지 못하면서, 모두가 이 녀석을 위해 노력해줬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도록. 혼자이지 않도록. 헤어지는걸 슬퍼하지 않도록.

이제 그게 전부 다 끝난 것이다.

“에……. 그러니까…….”

반응 없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유이를 보면서, 현상은 생각했다. 뭐가 좋을까. 뭐가 이 녀석을 기운 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 그래! 주소 알잖아? 연락해! 누구도 널 잊어버리거나 하지 않으니까. 다들 좋다구나 하면서 반길껄? 그러니까 언제든 사양 말고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

“정히 안 되면, 나한테라도 해. 난 언제나 니 편이니까. 응? 난 니 친구니까.”

그 말에, 유이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배를 잡고 깔깔깔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뭐야? 당황하면서 현상이 주변에 도움을 청하려고 하는 순간, 유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아, 정말로, 정말로 넌 최고라니까.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눈치 못 채네.”

“어, 엉? 뭐, 뭐가?”

“내가 왜 그렇게 우울해 하겠어? 설마하니 그런 것도 생각 못할까봐? 아니야. 왜 마법사라는 존재를 사람이 모를까? 누가 살짝만 잘못 말해도 모를 텐데.”

“……설마.”

입을 벌리고 하는 현상의 말에,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말이 이상하잖아. 현상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봐. 난 더 이상 잊을 수 없다며! 이젠 기억조작인지 뭔지 안 먹힌다며!”

유이는 약간 짓궂게 웃었다.

“어? 내가 거짓말 했다고 했잖아. 계약 할 때 말했던 건 다 뻥이라고. 당연히 가능하지. 마법이 발달해서, 옛날엔 시간이 걸려 까다로웠지만 이제는 간단히 가능하거든. 계약서의 그 조약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거 엄ㅡ청 옛날부터 갱신이 안됐으니까. 거기에 안심을 위한 내용이지. 임무를 위해서만 사용하고, 그 다음에 기억을 지우면 깔끔하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유이는 웃었다.

“내가 왜 우울한지 알겠어? 맞아. 너도 분명 잊어버릴 거야. 세영이도, 부의 전부도, 동우도, 기타 등등 내가 여기 와서 만난 사람 전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면 내일 아침까지 다 끝날걸.”

“그건, 그건…….”

너무 슬프잖아.

현상은 당장이라도 유이에게 달려들듯한 기세로 물었다.

“다 잊어버리는 거야? 밤에 만난 것도, 전학온 것도, 옥상에서 협박당한 것도, 밤에 매일 나와 당한 것도,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준 것도, 부서에 가입한 것도, 집에 놀러간 것도, 같이 놀러 나간 것도, 레니가 다친 것도, 같이 싸운 것도, 전부, 전부 잊어버리는 거야?”

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지워진다니. 지난 1주일동안의 기억이 다 사라진다니.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누구에겐가 따지고 싶었다.

괴롭고 힘든 1주일이었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1주일이었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후회한 게 한두 번이 아니고 귀찮았던 게 한 두 번이 아니고 짜증난 게 한두 번이 아니고 일에 휘말린 게 한두 번이 아니고 목숨이 위험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고, 그 외에도 다양한 감정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자.

즐거웠던 1주일이었다는 걸.

희한한 만남을 했다.

두려워했고, 곧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남들은 평생 가도 한 번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것도 이제 다 끝이다. 완전히 사라지는 거다.

그래, 유이가 슬픈 건 그것 때문이었다. 아무리 슬퍼도 차라리 잊어버리는 사람은 편하다. 자신이 뭘 잊어버렸는지도 곧 잊어버릴 테니까. 하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끝까지 슬프다. 다시 만났는데 처음 보는 사이가 된다면, 얼마나 슬플까. 그동안의 추억이나 기억을 모두 잃고, 단지 지나가다 만난 사람이 된다면. 그런 고통을,

그런 고통을 그런 일이 없을 거라 멋대로 단정했던 사람에게서 다시 한 번 느낀다면.

현상은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괜찮아. 모두, 모두 잊지 않을 거야. 세영이도, 부장도, 부부장도, 선생님도, 연아도, 성미도, 태열이도, 동우도, 상미도, 가은이도, 그 외에 만난 사람들 전부.”

우리 부서는 특별하니까. 내가 아는 사람들은 특별하니까. 이 도시는 특별하니까.

“그리고 나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모두가 잊어버려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억지 허세를 부리면서 기운을 주는 것뿐이니까.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잊는다면, 다시 힘들어 할 테니까. 지금까지 했던 일이, 했던 말이, 전부다 거짓말이 될 테니까. 힘이 되어준다는 말이 전부 거짓말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유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젠 괜찮아. 만날 수 없게 되어도, 떨어져 있어도, 잊어버려도, 다 괜찮아. 왜냐하면 말이지…….”

유이는 현상에게 다가갔다. 눈물이 약간 매달린 얼굴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한다고, 바보야.”

유이의 입술과 현상의 입술이 겹쳐졌다.

Writer

호성軍

호성軍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친구 우리들의 친구 게으른 호성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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