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이정표

#5. 결말ㅡ마지막 날. “라는 내용인데 말이죠,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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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50 May 0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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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호성軍

“라는 내용인데 말이죠, 어때요?”

원고 더미를 마지막 장까지 넘긴 부장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을 했다. 시간은 3월 말. 슬슬 창밖으로 보이는 벚꽃나무에는 슬슬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바람은 약간 쌀쌀하다. 부실 안에는 늘 그렇듯 한가한 8명의 남녀노소들이 각자의 딴 짓에 열중하며 시간을 버리고 있다. 뭐, 한명의 판정이 미묘하지만 적당히 ‘노’면 되지 않을까, 하고 현상은 쉬어자세로 부장의 반응을 기다리며 서있었다.

이윽고, 부장은 심사숙고를 끝내고,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벌떡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푸른 하늘, 하얀 구름, 어디선가 어째선가 들려오는 빼액ㅡ 하는 공간적 배경을 착각한 게 분명한 독수리 울음소리 같은 단음. 현상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딴 건 각하(脚荷)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피칭(Pitching) 포즈를 지은 다음 있는 힘껏 원고를 창밖으로 내던졌다.

“으왓! 뭐하는 짓이에요!”

“내용 전개도 주구장창 엇나가는데다가 묘사나 캐릭터 성격 묘사 모두 어설퍼! 특히 결말 부분에 다가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군! 난 자네를 이렇게 키우지 않았네 김현상 작가! 그 피와 눈물과 땀방울로 점철된 18년의 수련을 자네는 잊은 것인가! 대답해보게 김현상 작가!”

수많은 종이가 축구 경기장의 종이쪼가리 마냥, 혹은 곧 있으면 피어날 벚꽃 잎의 대형버전마냥 구교사 바깥쪽, 하굣길로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간다. 얼핏 보면 삐라로 보일지도 모르겠는 광경. 그 소동에 아래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이 이게 뭔가 하고 문학부실을 올려다 보이는 게 현상의 눈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으왓, 김현상 작가, 떨어지네! 떨어져! 좀 진정하게! 5층에서 떨어지면 에누리 없이 바로 저승행 익스프레스에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타는 것 마냥 승무원들이 대접까지 하면서 올라탄단 말일세! 일단 진정해!”

“이걸 어떻게 진정해요! 내 글이! 내 글이!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살라고요! 으악, 줍지 마! 읽지 마! 읽으면 안 돼! 죽을 겁니다! 잡지 마요! 말리지 마요!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떨어질 거니까…….”

“자기 글이 욕먹고 떨어져서가 아니라 창피해서였냐……. 아, 세영이 너도 차 좀 마셔봐.”

“뭐, 확실히 부장이 읽어주는 내용을 들어보면 좀 그렇긴 하네요. 홀짝. 아, 부부장, 차 맛있어요. 무슨 차에요?”

“눈앞에서 글을 읽어준다는 게 얼마나 창피한 건지 깨달았어. 아, 어떻게 지금까지 난 애들한테 교과서를 읽어준 걸까.”

“저, 저기, 일단 좀 끌어올리는 게…….”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엔 아마 안 죽을껄? 아, 혹시 모르니 119에 전화나…….”

“드르렁ㅡ 씁, 아아, 예나야…….”

“거기 자네 곱하기 7! 좀 와서 도와달란 말이네! Give me some hands! 참고로 여기서 hands란 단순히 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도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help’와 동의어로 쓰이지. 고로 해석하면 직역하여 ‘손 좀 줘’ 가 되는 게 아니라 ‘좀 도와줘!’라는 의미가 되네. 일상에서 나름 자주 쓰이는 표현이니 기억해두도록.”

“놔요! 죽을 거……. 으앗, 손에서 힘 빼지 마요! 왁! 떨어진다! 우왁! 왁! 빠, 빨리 안 끌어올려요? 부장! 부부장! 세영아! 기타 등등! 살려줘! 떨어진다! 진짜로 떨어진다아아아아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3월은 슬슬 그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법소녀라는 존재에 관련된 소문도, 2학년 3반과 8반에 전학생이 왔다가 돌아갔다는 것도, 모두 어느새 기억 속에 묻혀 그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머리를 자른 태열은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여학생들 몇 명에게 인기를 끈 모양이었지만, 그 본성을 눈치 채고 모두 떨어져 나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수면시간이 줄어들어 기면증 증세도 덜해졌지만, 대신 그 시간을 밤의 열정으로 불태우고 있다. 게임에. 그것도 건전하지 못한 게임에. 가끔 잠꼬대로 처음 들어보는 여자 이름을 웅얼거리는걸 보면, 아무래도 적당히 하는 게 낫지 않을까ㅡ하고 모두는 생각하고 있다.

세영이는 요새 들어서 좀 쓸쓸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영이 말대로 친구가 떠나간 것처럼 한숨을 쉴 때도 있고, 적이 없어진 것처럼 후련한 얼굴을 할 때도 있다. 가끔씩 현상이 앞에 와서 “어, 그러니까, 그게…….” 하고 뭔가를 말하려고 하기도 하지만, 늘 혼자 뭔가를 열심히 하다가 결국 현상이를 한 대 때리는 걸로 끝을 내고 있다. 뭔가 복잡 미묘한 문제인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현재 이를 두고 벌어지는 내기에서는 다양한 가설들이 다양한 액수의 판돈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부장은 요즘 한 달마다 다가오는 짜증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요컨대 마감 날이라는 거다. 이쯤만 되면 매일 원고더미와 데이터 파일에 붙어서는 살아가며 계산기를 꺼내 머리를 쥐어짜는 나날이 되니, 짜증이 안날 리가. 부원들의 글을 비평하는걸 가지고 매일매일의 낙으로 삼는 것 같은데, 자기 글도 잘 쓴게 아니면서 스스로에 대한 비평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바쁘니, 월중의 소문에 대한 건 이미 깡그리 잊어버린 걸로 보인다.

나머지 부원들은 늘 그렇듯 평안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부부장은 늘 내숭의 황제로(그 모습을 보면 뭔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선생님은 늘 알콜과 함께, 연아는 늘 소심하게, 성미는 늘 폭력적으로.

그리고…….

 

 

“됐다. 이걸로 끝.”

의미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유이는 원룸 방 안을 바라봤다. 지난 한 달 동안 지내던 집. 이제 그 방은 완벽하게 비워져, 누군가가 있었다는 증거조차도 없어져있었다.

사건이 모두 끝난 지도 며칠. 이제 뒷정리까지도 모두 끝나고, 남은 건 떠나는 것 뿐.

유이가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은 남겨질 것이다. 서류상의 문제나 데이터의 문제는 간섭하기 어려우니까. 다만 어디까지나 ‘1주일만 있었던’, 눈에 띄지 않았던 전학생으로서 그 기록이 남겨지지, 그 이상의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갈 것이다.

이곳에서 지냈던 기억들도.

그 증거들도, 모두.

이곳의 사람들은 이제 유이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세평고교 2학년 3반에 한 여학생이 전학 왔다가 곧바로 다시 떠났다’ 라고 그 존재를 기억할 뿐.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이었고, 이름이 무엇이었고, 무엇을 좋아했고, 어떤 비밀이 있었으며 누구를 알고 지냈는지에 대한 내용은 전부 사라질 것이다.

늘 겪어왔던 일. 그리고 이번엔 다르기를 바랬던 일.

유이는 한참을 운 다음에, 젖어서 무거워진 소매를 끌고 방문을 나섰다.

방 안은 비어있었다. 기록상으로는 지난 한 달 동안 계속해서 비어있던 방. 아무것도 변화한 것이 없는, 벽과 바닥밖에 없는 방이었지만, 한가지의 변화가 생겼다.

아마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사소한 일이지만, 원룸의 부엌으로 쓰이는 공간의 수납장 맨 아래, 바닥과 거의 붙어있는 벽면에는 네임 펜으로 쓴 작은 글자들이 써져있다. 명백하게 쓰여서는 안 되는 글이, 둥글고 귀여운 여성의 글씨체로.

 

ㅡ샤마르니아 유이세피레닐 다녀감.

 

 

오늘은 노는 토요일. 그래서인지 역 앞의 상점가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물론 그 중에는 2학년 3반 학생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유이가 직접 몇 명의 얼굴을 보고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그중 어느 누구도 유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일부로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용히 보냈으니까. 이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아,”

그 순간, 정면에 익숙한 상대가 보였다. 신동우. 같은 반의, 친하게 지내던 친구중의 하나. 하릴없이 혼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주변의 여성들에게 시선을 던지는 모습을 보니, 며칠 전 있었던 일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혹시, 혹시 지만,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동우는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가버렸다.

시선을 끌만한 외모이기에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쓴 상태라서, 인건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모르는 사람이니까.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이니까.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을 모두 신경 쓰는 한가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되었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얼어버린 다리 때문에, 유이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서있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액체가 흐르기 시작해서, 신발 위로 떨어질 때까지. 유이는 재빨리 그것들을 훔쳐내고,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분명, 동우만이, 그리고 같은 반의 아이들만이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 마을의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다.

소중해진 사람도, 소중히 여겨준 사람도, 앞으로도 소중히 여길 사람도. 모두. 모두 자신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수 없으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가 말해줬으니까.

유이는 어렵게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동우는 뒤돌아봤다.

 

 

평산 시에는 외부로 향하는 대중교통수단이 두 가지 있다. 버스, 전철. 유이는 그중에서 버스를 골랐다. 왜냐하면 아는 사람이 같이 버스를 타고 도시를 떠날 일은 없을 테니까.

버스 터미널은 평산동이 아닌, 평산동 북쪽의 중앙동에 있다. 낡은 건물, 칙칙한 내부. 표를 끊으니, 버스는 조금 있으면 출발할 예정이라고 매표소의 직원이 알려줬다. 그대로 유이는 버스 좌석에 몸을 던졌다. 승객 수는 세네명. 텅 빈 버스의 구석의 자리에 혼자 앉으며, 유이는 심호흡을 했다.

 

정말로 떠나는 거다. 이 마을에서.

 

겨우 1주일을 있었다.

임무를 위해 흔히 들리는 마을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다를 게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랐다.

미리 한번 기억이 나는 장소를 돌면서 추억을 정리했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떠들썩한 교실이.

너저분한 부실이.

등하굣길의 언덕길이.

편의점의 컵라면이.

웃었던 기억이.

화냈던 기억이.

짜증냈던 기억이.

즐거웠던 기억이.

이제, 모두 끝나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도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역시 그날 마지막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으려나. 어차피 기억하지도 못할 말인데, 괜히 나만 아프게. 유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울었다. 계속해서, 소리 없이 울었다. 혼자 나아가라는 말은 쉽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쉽다. 언제나 말은 쉽다. 그러나 행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직접 그런 경험을 해보면 할 수 없는 말들. 그런 말들이, 너무나도 무겁게 유이의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 고통을, 계속해서 견디라고 말한 사람이 있으니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 한 말이니까, 그러니까, 그 무게는 더더욱 무겁다.

내려놓을 수도 없는 말.

“흐윽, 흑, 우우, 우윽, 흑,”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도, 자신에 대한 것은 잊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은 잊을 수 없다. 차라리 잊을 수 있는 쪽은 편하다. 언제나 남겨지는 쪽이 괴로울 뿐이다. 잊지 않는다고 말했으면서.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유이는 그렇게 말하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계속해서 울었다.

“누가 거짓말쟁이라는 거야?”

라는 말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릴 때까지. 유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잊지 않을게, 유이’

라는 8개의 글자가, 8개의 판에 적혀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 자를 들고 있던 소년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이겼지? 하는 승리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적어도 난 절대 잊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들. 각자 알아서 호응을 하던지, 한숨을 쉬던지, 고개를 숙이던지, 자유롭게 반응을 하는 7명이었지만, 유이가 바라보자 모두 웃으며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부장은 웃으며 엄지를 내밀었다.

부부장은 한숨을 쉰 다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은 어디서 꺼낸 건지 맥주 캔을 꺼내 딴 다음 건배를 하듯이 내밀었다.

연아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빨개져서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성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태열은 웃으면서, 약하게 손을 흔들었다.

세영은 약간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웃으며 가벼운 경례 자세를 취했다.

부원들과 선생님을 한번 쳐다본 다음에, 현상은 말했다.

“문학부를 우습게보지 마!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니까, 연락 하는 것도 잊지 말고! 넌 자주 옮기니까 연락하기 힘들 거 아니야. 편지는 부실로 보내면 돼.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니까, 너도 절대로 잊혀지지 말란 말이야!”

아아,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람들인지.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유이는 울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그리고, 버스는 천천히 문을 닫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유이는 고개를 내밀어,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꼭 다시 올 테니까, 반드시, 다시 올 테니까! 그러니까,”

그리고, 웃으면서 현상을 가리키며 외쳤다.

“다음번에 올 때는 반드시 대답을 들을 거야!”

“어, 으헝?”

그 말에, 단숨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정지하는 현상. 그 순간 세영의 눈에 불이 켜졌다. 등 뒤에는 붉은색 오오라. 그리고 들려오는 BGM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찬미가.

“너! 이상한 수작 부리지 마! 현상이는…… 그……. 아아! 몰라! 여하튼 접근하지 마! 현상이 주변 10m 이상 접근 금지! 소금 뿌린다!”

“누구 맘대로! 그러고 보니 너랑은 자웅을 겨루지 못했지…….”

“좋아, 덤벼! 상대해주지! 다음번에 오기만 해봐! 다리에 매달려서 울부짖게 만들어 줄 테니까!”

세영의 호전적인 외침을 들으면서도, 유이는 떠나가는 버스에서 계속해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눈물은 어느새 말라있었다.

버스는 이윽고 터미널을 떠나, 저 멀리로 떠나버렸다.

“갔군.”

“그러게요.”

여전히 씩씩거리는 세영의 옆에서, 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김현상 작가. 설마하니 소설에 썼던 내용이 그대로는 아니겠지. 그대로라면 모든 이야기가 맞아 떨어지는데…….”

“명백하게 픽션으로 실존하는 인물 지역 단체 사건과는 일절 연관이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재미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게 가장 슬픈 일이지요.”

뻥이지만.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며, 현상은 휘파람을 불었다.

“뭐, 잘 했네. 설마하니 자네가 여자를 위해 이렇게 힘을 낼 줄이야…….”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부장. 어찌 그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믿어버릴 심각한 중상모략을.”

“이야, 좋은 성장이야. 좋은 성장. 음음. 선배이자 스승이자 지도자로서 참으로 감개무량하네. 다음번에 올 때는 쪽 정도는ㅡ 아차, 실례.”

흥분하는 현상을 무시하며 말하던 부장은, 그 말에 현상과 세영이 각자 상반된 분위기로 굳는 것을 눈치 채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이미 늦었지만. 설마하니 노린걸 눈치 챈 사람은 없겠지.

“그러고 보니, 너…….”

“자, 잠깐! 그건 명백하게 픽션으로 실존하는 인물 지역 단체 사건과는 일절 연관이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뿐, 그보다 니가 왜 난리를 치는……. 으아아아아아!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부장님!”

“미안하다, 김현상 작가. 하지만 개죽음은 아니야.”

부장의 매정한 말을 들으며, 세영의 공격에서 팔을 뻗으며, 그 팔을 외면하는 부원들을 보면서, 현상은 흐릿해지는 정신으로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즐거운 한 달이었다, 라고.

 

 

친구, 라는 관계는 신기한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 마치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사이 같이 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주는 사이가 된다. 단순히 만났을 뿐인 사람, 피로도, 어떤 걸로도 서로 연결되지 않은 관계. 그러나 말로는 할 수 없는 무언가로 연결된 친구라는 존재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준다.

그러나 그만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어렵다. 무서운 일이다. 전혀 면식이 없는 사람과 단 한 번에 너무나도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것.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두렵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두렵고, 과연 친해질 수 있을지 두려워진다. 상대에게 다가간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어떤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친하게 되더라도, 헤어짐이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다. 자연적인 헤어짐, 의도적인 헤어짐. 다시 서로 모르는 사이로, 관계없는 사이로 돌아가는 것.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은 흐릿해진다. 그리고 아마 어떤 기억은, 이윽고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는 완벽하게 그 관계는 무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다가갈 때의 창피 역시 잊혀질 것이다. 그러니 과감하게 한 발자국을 내밀면,

헤어질 때의 괴로움은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니 웃으며 손을 흔든다면,

지금 함께 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지 않을까.

 

 

사립 세평고등학교. 그 중에서도 구교사. 학생들의 교육에 좋지 않은 선생들의 흡연이란 행위의 편의를 위해 흡연용 베란다를 만들어 보통 교실의 절반 사이즈의 방 하나가 남아버린 구교사 5층의, 바로 그 남아있는 절반 사이즈의 교실.

서류와 책들이 어지러이 널려있고, 생활의 흔적이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작은 부실.

실수로 열어둔 창문 사이로 들어온 봄바람이, 그 교실 안을 살며시 다녀갔다.

그 바람에, 게시판에 붙어있는 수많은 사진들이, 그리고 제일 최근에 추가된, 9명의 부원들이 찍혀있는 사진이 살짝 흔들렸다.

카페에서 찍힌 걸로 보이는 사진 안에는, 얼굴에서도 당당함이 느껴지는 소년과, 누가 봐도 아름다운 긴 머리의 소녀와, 안경을 낀 소심해 보이는 소녀와, 무지하게 활발해 보이는 소녀와, 살짝 취한 듯이 뺨이 붉어진 단발의 여성과, 짧게 친 머리의 소년과, 그 소년에게 눈을 덮는 앞머리가 살짝 치워진 파란 눈의 소녀와, 왠지 평범한 인상의 소년과, 은발을 가진 빨간 눈의 소녀가, 그리고 그 자리에 없어서 오려져 붙여진 걸로 보이는 조그마한 빨간 머리의 소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3월을 표시하던 달력이 바람에 살며시 넘어갔다.

Writer

호성軍

호성軍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친구 우리들의 친구 게으른 호성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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