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카운터 신드롬-[1. Encounter 소녀-‘유하임’이라는 바보에 대해서](2)
Write- 16:34 Apr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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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TTERS
- By Leth
협업 참여 동의 |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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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제일의 독설가가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낀 채 양호실을 나가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갑자기 긴장감이 풀려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는 녀석이다. 한숨을 쉬며 흐트러진 교복을 고쳐 입던 중 왼쪽 가슴에 있는 ‘이 시 호’라는 녹색 이름표와 새를 모티브로 한 학교의 인장이 새겨진 은빛 배지가 눈에 띄었다.
괜히 기분이 씁쓸해졌다.
방침을 바꾸기 전에는 금빛 배지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은 배지는 일반 학생과 ‘우리들’을 구분하기 위한 표식이다. 단지 구별을 위한 표시지만 이것은 낙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교내에서는 반드시 이 배지를 착용해야한다는 교칙은 솔직히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한 구분’이라고 할지라도 내면이 미숙한 학생들에게는 민감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무리들 중 하나다.
-정상이 아니다.
별로 크게 이상하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도 분명 ‘증상’은 있다. 집에서 가까울 뿐이어서 온 학교지만 상담과정에서 난 이쪽으로 분류됐다. 나 같은 경우에는 증상을 자각하지 못 한다는 모양이다. 덕분에 난 상담사들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 했다. 오히려 내가 왜 정상인이 아닌지 항의했다. 그렇다고 원망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배지를 달고 있어도 웬만한 녀석들은 의외로 평범하다. 어렸을 때부터 지내온 요한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생각해보니 이건 내가 익숙해져있는 것뿐인가? 혹시 이게 내가 비정상인 이유?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코 주변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휴지를 빼냈을 뿐 깨끗이 씻지 않았다. 청결에 심히 문제가 있다.
“일단 세수라고 해야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매우 자극적인 향기가 코를 찔렀다.
찡 하는 아픔이 콧속을 맴돈다. 코 안 쪽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들어온 것 같은 아픔이다. 묘하게 데자뷰를 느꼈다.
맡아본 적이 있는 향기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적인 향이 나를 이끈다.
“뭐야! 최근에는 잠잠했는데!”
코를 감싼 채 다급하게 하나뿐인 출구로 향했다. 얼른 이 자리를 빠져나가지 않으면 ‘귀찮아진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확신이 섰다. 하지만 급히 양호실의 문을 열자 향기가 더욱 강해졌고 코는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크윽!”
바로 양호실을 나온 그 때
“꺄앗!”
가슴 쪽에 무언가가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코를 감싸 쥐고 있던 손에서 익숙한 감촉이 느껴지며 아픔이 멎었다. 그 의미를 아는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려놓았다.
이미…늦었다.
“히익! 죄, 죄송함다! 죄송함다! 죄송함다!”
한 가지 사실을 체념한 후 난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입학식이 끝난 학생들이 교실로 돌아가고 있는 도중인 게 보였고 이목은 내 쪽에 쏠려있었다. 이쯤에서 가슴에 부딪친 게 무엇인지를 확인했을 때 난 그 자리에서 굳었다.
“꺄악! 또 코피가 철철! 저 부딪친 검까?! 또 저질러 버린 검까?!”
예능에서 캐릭터 만들기 용으로나 써먹을 법한 특이한 말투로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며 주저앉은 채 손을 마구 휘젓고 있는 것은 작은 소녀다. 크게 봐야 중학생이다.
혼란스러워하는 커다란 눈과 붉게 물든 뺨, 전혀 정리가 안 돼 이리 저리 삐져나온 갈색 머리카락은 주저앉은 자세에서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다. 다리를 감싼 검은 스타킹은 올이 나가 있는데 당황한 나머지 교복 치마가 상당히 위험한 부분까지 올라가 있는데도 전혀 수습하지 못 하고 있었다.
“분홍색.”
기억에 있는 색깔이었다. 내 중얼거림에 조금 정신을 차린 소녀는 자신의 치마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 학생들이 술렁인다.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다 봤으리라.
“우으으! 이래서 전 안 되는 검다. 오늘 같은 날 이런 색깔은 미스매칭이었던 검다.”
그쪽을 신경 쓰는 거냐? 라고 심히 딴죽을 걸고 싶었지만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이 붉어진 얼굴을 봐서 정면으로 말하는 것은 사양했다.
“신경 쓰지 마. 네 탓이 아니야.”
거짓말이지만
“아님다! 제 탓임다! 아침에 전력으로 받아주신 선배님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전 천하에 나쁜 사람인 검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숙이는 소녀. 솔직히 여자애로써 말투가 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 역시 보류해두었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할 대화가 아니다. 일단 상황을 진정시킬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조금 있다 얘기하지 않을래? 이거 씻으러 가야해서.”
“아앗! 죄송함다! 바로 따르겠슴다!”
“남자 화장실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 애 뭔가 이상하다. 혹시나 해서 이름표 쪽을 살펴보자 은빛으로 빛나는 배지가 보인다. 예상대로다. 무슨 증상인지를 몰라도 ‘이상자’다. 확실히 언행부터가 평범하지 않다.
“저기, 얘기할 게 있으면 이따 얘기하자. 교실로 돌아가야 하잖아?”
“아! 네! 선배님 말씀을 따르겠슴다!”
“그럼 점심시간에 양호실 앞에서 보자고."
이후 난 도망치듯이 화장실로 향했다.
이것이 나 이시호와 소녀-유하임의 정식적인 첫 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