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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대] 소꿉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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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1 Oct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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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폰은정
협업 참여 동의

# 1787. 7.22


"나 강간당했어."

그녀가 말했다.
밥 먹었어? 라고 묻는 것보다도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로.

"누구?"

"옆집 알랭."

알랭? 한 살 위의 형. 내가 알기로는 착하고 좋은 아이다.
어릴 적 함께 어울려 놀기도 했다.
세상 일은 모른다지만 알랭이 그런 짓을 할 인물은 아니지.
나는 별 믿음 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녀도 알고 있다.


# 1787. 7.22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술주정뱅이고 폭력적인데다가 생계마저 책임지지 않는다.
아름답지만 초췌했던 어머니는 그녀가 일곱 살 때 떠나갔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녀가 떠오르는군.

"리타."

그녀의 이름이다.

"왜?"

"전에 만나던 남자친구는?"

"응, 헤어졌어."

알고있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일주일 이상 간 적이 없다.
마을의 남자는 거의 다 거쳐간 것 같은데.
내 친구의 아버지인 푸줏간 토마스 아저씨까지도.

"아."

나는 아니었군.
알랭도.
알랭에겐 결혼을 약속한 소꿉친구가 있으니까.


# 1782. 10.23


열세 살의 나.
긴장으로 덜덜 떨며 말했다.
손에는 고르고 고른 꽃 한 송이.

"리타. 나는 널 사랑해." 

"응, 알아." 

"남자친구가 있는 건 알고있어. 하지만......"

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용기.
그녀는 손을 천천히 뻗었다.
희고 고운 실크 같은 감촉이 내 얼굴을 감싼다.
모르겠다.
그녀의 얼굴을 한 번도 놓친 적 없던 나조차도 처음 보는 표정으로.

"미안해, 루디." 

"아."

그 때 알았다.
아마 앞으로도.


# 1787. 7.22


그녀는 남자친구 앞에서 웃는다.
그녀는 아버지 앞에서 웃는다.
그녀는 친구 앞에서 웃는다.
그녀는 선생님 앞에서 웃는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웃는다.
그녀는 모든 이들 앞에서 웃는다.

보석같은 미소.
미소짓는 리타. 친절한 리타. 아름다운 리타.

내 앞에서는.


# 1785. 2.11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후회할거야."

"알아."

나는 아버지의 술을 몰래 먹었다.
여긴 나의 방.
그녀는 내 아래에 깔려 있다.

"후회할거야......"

나는 대답 대신 입으로 그녀의 입을 덮었다.
어쩔 수 없잖아.
같은 반의 래드는 내게 그녀와의 잠자리가 얼마나 황홀했는지에 대해 내게 자랑하듯 떠벌렸는걸.

"흐회흘거야."

입맞춘 와중에 그녀의 눈이 보인다.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비난한 적 없지......
나는 그녀를 놓아주고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미안해."

이보다 더 궁색한 말은 없을 거다.

"술 냄새나. 나 갈래."

그녀는 방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드물게도.

"술은 먹지 마."

그녀는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 1785. 2.13


슬프게도, 래드는 징검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죽었다.
비온 뒤에는 물살이 세니까 조심해야지.


# 1787. 7.22


나에게도 여자친구가 두엇 있었다.
이 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집 아들이기도 하니까.
여기 여자아이들은 그런 것을 좋아한다.
백마 탄 왕자님, 우아한 삶.
도시에서 내려온 부잣집 도련님.
비루한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줄 무언가.
나는 인기있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동네 여자아이들은 나를 피하기 바쁘다.
나와 사귀었던 앨리, 잔나.
그녀들은 모두 죽었다.

그 뒤 내게는 여자와 잠자리한 뒤 죽이는 괴상한 취미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난 그녀들을 사랑해서 사귄 것은 아니었으니.
리타는 그 때 어떤 반응을 보였더라.


# 1786. 9.30


슬프게도, 옆 동네 신사 제임스 아저씨는 말안장이 끊어져 낙마해 죽었다.
말을 타기 전에는 잘 확인해야지.


# 1787. 7.22


"알랭."

"아...... 루디. 오랜만이야." 

인사하는 알랭은 어색한 표정이었다.

"별로 오랜만같지는 않은데? 사흘 전에도 봤잖아."

"그런가? 하하......"

알랭은 기억력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다.
적성을 살려 동네 촌장 밑 행정관이 되고 싶다던가?

"알랭. 오늘 밤에 뭐 해?"

"음, 책을 읽을 것 같은데." 

"부모님은?"

"수도에서 내가 읽을 책을 사 오신대......왜?"

그렇군.
나는 돌아서서 걸었다.

"저기, 루디!"

"응?"

돌아보니 알랭은 우물쭈물하는 표정이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듯 괜히 열렸다 닫히는 입.
흙을 헤치는 발. 주먹 쥔 손.
알 바 없다.
잠시 기다리던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행정관이라......


# 1787. 7.22


칼. 밧줄. 포대. 복면. 장갑. 신은 적 없는 신발.
부잣집엔 없는 게 없지.
불합리하군.


# 1784. 6.4


슬프게도, 대장간 도제 찰스는 술을 먹고 쇳물에 빠져 죽었다.
대장간에선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지.


# 1787. 7.23


"루디, 루디우스, 들어봐 리타네 아저씨가 술을 먹고 지나가는데말야, 우리집 담벼락에 붙어서는, 봐봐 내 방 창이 담벼락 위에 있는데 그쪽에서는 술 먹고 말야 리타가 열한 살일 적에 자기가 여자로 만들어 줬다면서, 오, 아냐 제발. 루디 아, 아니야 난 이걸 떠벌리고 다닐 생각 전혀......"

아, 이해했다.

알아 알랭. 넌 좋은 사람이야. 

나도 알아. 


# 1787. 7.23


슬프게도, 알랭의 집에 강도가 들어 귀중품을 훔쳐 달아나는 와중에 알랭을 죽였다.
어머나 부잣집 도련님은 돈도 많은데 강도짓을 할 이유가 없지.


# 1787. 7.23


그녀가 나를 보았다.
나도 그녀를 보았다.
나도 알아.


# 1787. 8.19


슬프게도, 리타네 아버지가 술을 먹다 쇼크로 죽었다.
부잣집엔 없는 게 없지.


# 1787. 8.20


그녀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웃었다.

"사랑해, 루디."

나도 알아. 

나도 알아. 

Writer

폰은정

폰은정

comment (1)

olbersia 19.10.13. 00:27
사쿠라를 향한 「진심」ch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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