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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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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13 Aug 0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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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에르사예즈와 오르데나, 아롤터 지협의 이쪽과 저쪽. 그 양안 관계는 무려 육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원한으로 되어 있다.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앙숙이되 피차 체제 결속을 위한 고조로 그런 관계를 이용하던, 이중적인 공생이 에르사예즈의 사자심장 왕 프랑수아 세르피냥에 의해 무너지고 만 그 이후로.


프랑수아는 지협을 넘어 대곡창 폰테베드라를 포함한 세레네이 반도 서쪽 절반을 정복하여 서오르데나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이백 년 후 동오르데나의 레콘키스타가 종결된 그 날까지, 세레네이 반도에는 불완전한 두 개의 왕국이 공존했다. 이는 전통과 적통의 오르데나에 씻을 길 없는 오명이요, 그 신민들에 잊힐 길 없는 악몽으로, 흉터로 남은 것이다.


그런 역사가 지금에야 다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이제 이 나라에 앙시앵 레짐일랑 흔적조차 남지 않았거늘……. 따지고 보면 옛 왕가를 타도하고 일어선 자유 에르사예즈야말로 오르데나의 진짜 친구가 아니겠는가? 왜곡된 양안 관계는 이처럼 연쇄와 연쇄 속에 방향을 잃어버리고 만, 역사의 오리무중이나 다름이 없다.


그 넓은 자유의 홀을 떡하니 차지하고서, 베릴은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가을을 한껏 불러들였다. 연중 온화한 세르피냥과는 달리 변화무쌍한 이곳 라 오르데나는 다만 바람 한 점만으로도 가슴을 울리는 데가 있었다. 어제의 불볕더위가 오늘의 선선함으로, 또 내일의 강추위로……. 변화가 일상인 이들이야말로 꾸준한 것에 목매어 봄직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우글우글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외 파티에 임시 회장을 짓고 기물을 내며 장식까지 해 놓고서는 교민들을 다수 초청했으니 말이다. 여느 때처럼, 오르데나 신민은 단 한 명도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의미라고는 귀신의 허울마냥 옅어진 재수교 기념일 행사로 대사관 직원들의 노력이 가당찮아지지 않나, 그런 생각뿐이었다. 낭만주의자에게도 현실일랑 빠짐없이 안타깝고 가혹한 법.


개회사 같이 귀찮은 일을 마무리하고 늘어져 휴식을 취하노라니 기질이라는 놈은, 그런 때에도 감상으로 육갑하며 포기를 방해하고 시시한 희망 운운하고 마는 것이다. 먹먹하게 담배를 찾는 찰나 누군가 노크를 했다. 날붙이 같은 리듬, 방문자는 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본인이 절도 있게 들며 문을 닫았다.


“대령님, 루이입니다.”


대령은 맞경례 대신 답배갑을 튕겼다. 거수한 손을 치우고는 엉거주춤 비어져 나온 궐련을 물 밖에 없었다. 곧 점화기가 뒤를 따랐다.


루이는 연기를 피워 올리며, 보고서를 쭉 펼쳤다. 푸에르타 데 라 레이나 광장 인근, 소르티하 길의 구조도가 알맞은 축척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중앙의 붉은 점을 중점으로 선을 긋고, 마소 조영기로 찍은 초상을 하나하나 첨부하니 시각자료로 구색이 충실해 보였다. ‘왕실근위대 1’, ‘왕실근위대 2’, ‘왕실근위대 3’, ‘왕실근위대 4’ 따위 태그가 단호하며 일목요연한.


별반 설명할 게 없어 보였지만 그는 1과 3, 2와 4를 번갈아 가리키며 망꾼들의 조 구성까지 빠짐없이 묵언으로 일렀다. 담배 개비가 삼분지 일이나 타 들어가고서야 대화가 시작되었다.


“기자 아가씨 건입니다만, 사람을 바꿔 가며 주소지를 살핀 결과 아직 왕실근위대 끄나풀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아직 안 잡혔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왕실근위대 쥐잡이를 빠져나가? 그 인간들, 아무래도 체포에 성공하면 거꾸로 매다는 게 아니라 회유해서 왕실근위대에 들여야겠는데.”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대외안보총국 정보부조차 이곳에서는 여차할 때 정보원 보호에 성공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인정하기 싫더라도 정답이 무언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뒤 봐준 사람이 있구먼, 이건.”


“잘 못 들었습니다?”


“잘 들어 놓고 뭘 그래.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제 몸 혼자 간수했다는 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제하면 이것뿐이지 않겠어?”


루이는 주억거렸다. 그게 도대체 누구인지, 어떤 조직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끄고 보고를 이어나갔다.


“조사 결과 한 가지 다른 단서를 입수했습니다. 알마스 기자가 자택 인근 단골 카페에서 물은 말을 점주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티투시온 광장으로 가는 길이 어떻게 되나요?’.”


“콘스티투시온 광장. 그게 쫓기기 전인 거야, 후인 거야?”


“추가로 정보원을 물색 중입니다. 그 점주가 기억하는 건 그런 질문을 했다는 사실뿐이라……. 콘스티투시온 광장이 중요한 건지,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아직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콘스티투시온 광장. 아무런 맥락 없이 등장한 그 지명은, 실마리는 실마리되 썩 도움될 게 없었다. 광장에서 누군가와 접선한 걸까? 그곳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말인가? 혹은 저 말 자체에 어떤 다른 의미나 암시가 있는 걸까? 갑갑함을 느끼기에는, 이미 가슴이 멀거니 굳어 덤덤했다. 무던한 의무감으로, 먼저 떠나보낸 자들에 대한 비통함으로…….


그 때, 자유의 홀의 문이 벌컥 열렸다. 회의 중이라며 돌려보낼 틈도 없이, 불청객은 황망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대사님! 비상이에요, 비상!”


“뭐야, 샤를로트. 또 낙서범이나 돌팔매꾼이라도 쳐들어왔어? 거, 참. 전통 어쩌구 하면서 근성은……. 행사가 코앞인데, 좀 신사적으로 하지.”


“지, 지금 대사관 정문 앞에 오르데나 왕실근위대가 포진하고 있다고, 무관부에서!”


베릴은 두 개비째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부리나케 자리를 박찼다. 이런 날에 왕실근위대라니, 엿 같은 일도 정도가 있지……. 라 오르데나 기후의 다채로움에 방정을 떨어 놓은 지 다만 반 시진도 안 되어, 이제 기울어 버린 가을볕이 참 우라지게 보였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대사관 사람들이며 초청객들의 표정만으로도 무슨 농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으니.


정문 바깥에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왕실근위대는 예의 시커먼 차림으로 십 수 미터 떨어져 포진해서는, 숫제 검은 벽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몇이 나와 경비 무관 두엇을 제압하고 보란 듯이 땅에 짓누르고 있어 푸른 제복이 함부로 짓뭉개질 정도였다. 폭거도 이런 모욕적인 폭거가 있을까? 그는 얼른 나서 목청을 높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여긴 에르사예즈 공화국의 치외법권지외다! 당장 물러나시오!”


“귀국에서는 왕태자 시해 미수범을 옹호하겠다는 말인가? 왕국과 왕실에 대한 능멸도 정도가 있는 것이오!”


“왕태자 시해 미수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변명이든 해명이든 올바로 통할 리 없었다. 실제로 상대 사관은 베릴이 나서자 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 무관들이 베네딕토 오르데나 전하께 간드를 겨누었다는 말이외다! 그런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달리 어찌 말하라는 말이오?”


“주 오르데나 에르사예즈 대사관의 경비 원칙은 양국 관계의 특수성에 근거하여 쌍방의 이해를 득한 바, 왕실근위대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을 것 같소만.”


“대사.”


그 자리가, 얼어붙었다.


언쟁이고 나발이고 그 한 마디 말에 우뚝 멎고 만 것이다. 왕실근위대 사관은 즉시 두어 걸음 물러나 섰다. 베릴 역시 거스를 길 없이 예부터 표했다.


“왕태자 전하.”


“그대 말이 맞소. 다만 에르사예즈 대사관 무관부가 이현령비현령하면 아니되듯, 왕실근위대 역시 그러하리라 보오. 왕족 수호라는 의무에 충실해야겠지.”


왕태자는 연극투로 왕실근위대 대열을 가리켜 보였다. 자색 망토가 모로 물결쳤고, 계급장이며 훈장, 보검의 폼멜 끝 흰죽지수리가 번뜩였다.


“적어도 우리 오르데나는 그런 점에 더 민감하고 또 그래야 한다 보오. 더. 그대는 모르지 않을 터.”


“지당하십니다. 다만 저희 어려움도 헤아려 주십사 여쭙는 말씀입니다.”


이 자가 왜 여기까지 행차했을까, 툭하면 에르사예즈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자가? 가리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무관 몇이나 잡아 족치자고 온 건 아니겠지.


저자세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베네딕토 오르데나는 곧 얼음장처럼 서느렇게 웃어 보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물론이오, 대사. 체포된 병사들을 석방하리다. 모양이 나쁘게 되었지만, 나는 친선 행사에 참여하러 왔으니 말이오. 이런 기념비적인 날에 한 자리 차지 안 하고 쓰겠소?”


“영광입니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왕태자는 베릴과 대거리했던 사관을 비롯하여 몇 명의 호위를 데리고 관내로 들어섰다. 사단이라도 난 게 아닌가 하여 불안에 떨던 사람들은 전권대사 곁으로 보이는 풍채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 답하기라도 하듯, 호위 측에서 ‘오르데나 왕국 왕태자, 베네딕토 오르데나 전하 납시오!’라며 경호를 외쳐 입을 틀어막으려 들었다.


베릴은 샴페인을 두 잔 받아 하나를 베네딕토에게 권했다. 그는 엘 시드 궁 바깥에선 어떤 것도 마시지 않는다며 정색했고, 무안하게 치워 버려야 했다. 웃고 떠들던 행사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꺼림한 자리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베네딕토는 순간 박장대소하여 주의를 휘어잡고는 장기인 연설로 한 번 환기를 해 보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베네딕토 오르데나의 연설이라니, 그것도 적지 취급인 에르사예즈 관할지에서! 좌중이 무어라 수런거리든 말든, 왕태자는 근위대를 잠시 흩고는 연단에 올랐다. 증폭기를 점검한다, 테이블을 치우고 사람을 모은다며 잠시간 지체가 있었다. 다만 왕태자는 원고 따위를 보지도, 뜸을 들이지도 않은 채 대번에, 시작과 동시에 완전한 웅변을 했다.



「우리 오르데나의 국모 발렌티나 여왕께서는 입버릇처럼 세상에 멍청이가 셋 있다고 말씀하셨소. 첫째는 여신, 둘째는 건국왕 아마데오시며 세 번째가 바로 나, 발렌티나라고 말이오. 위업이란 이 우주 어딘가 우뚝 서 무던히 큰칼질을 함이오. 혼돈을 끊어 질서를 지음이란, 야만을 갈라 왕조를 쌓음이란, 또 분열을 깨부수어 통합을 이룸이란 그러한 것이지. 


위업이란 변혁이며 변혁은 곧 파괴이니 정반합을 위하여 부수어 버릴 수 있는 결단, 과단은 그 무엇보다 앞서오. 그 첫걸음에 서슴없는 존재란 일견 멍청이마냥 터무니없어 보일 것이오. 범인들이란 언제는 성직이 제일이라, 또 언제는 기사, 학자, 관료, 마도사라 하지. 허나 정녕 세상에는, 이 우주에는 그런 위대한 멍청이들이 있어 끊어지고 다시 맺어져 새로이 된 것이오. 


끊고 맺음, 그렇소. 어떤 변화도 이 두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하오. 지난 수백 년 절뚝발이로 걸은 우리 오르데나와 에르사예즈, 양국 관계 또한 마찬가지라 하겠소. 양안 간에 청산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소. 암군 프랑수아의 침략, 괴뢰국 건국, 괴뢰국을 통한 세레네이 민족 탄압 같은 일 말이오. 가히 중세와 근대, 근대와 현대에 걸친 슬픔이오. 


그럼에도 양국은 다시 지난 백 년간을 평화로이 걸었소. 이제 그 앞의 백 년을 위하여 멍청이 같은 결단으로, 끊고 또 맺는 큰칼질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그럴 것이오.」



무서운 정적이 야외 회장을 휩쓸었다.


베네딕토 오르데나의 달변은 유명하기 짝이 없다. 이 왕국의 사실상 독재자인 만큼 정보부에서 모든 행적과 발언을 낱낱이 추적하여 분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연설은 감히 마법이라 불리며, 일종의 경외가 되었다. 말 몇 마디로 정부를 장악하고 군권을 틀어쥐며 전 국민을 숫제 괴뢰로 만드니 어찌 달리 말하랴? 부득불 신비와 동격이라 해야겠지.


그리고 그 말이 자신들을 향할 때, 아롤터 사람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오르데나에 적을 두었다면 발작적으로 열광하였으리라고, 까마득히 매료되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헤로인 같은 말이었다. 대사관 외벽에 낙서하는 자, 투석하는 자, 척탄하는 자 모두가 그리 홀리어 올 것이며 그런 심정이 직접 사무치고 있었다. 이것은 경고요, 또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베릴 전권대사는 떨리는 손으로 샴페인 잔을 비웠다. 그는 소용돌이의 중심에 그저 선 사람이니까. 희망과 악의와 악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역사의 와동, 그 한복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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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20.08.07. 21:31
성자의 딸기는 당찬 서술자의 결기가 묘하게도 낙관을 심어줘 어딘가 지브리를 연상케 하는 느낌을 주었지만 다이달로스는 저 왕태자가 한 번 나올 때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날을 보는 듯해 조마조마하기 그지없네요
사랑은 비극이어라..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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