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성자의 딸기 #18

Write

Article Menu

facebooktwittergoogle pluspinterestkakao storyband
  • 00:52 May 22, 2019
  • 24 views
  • LETTERS

  • By Naufrago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갑자기 눈이 부셔서,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습니다.


  이오미시는 제 논문을 꼼꼼히 읽고는 참고자료까지 몇 권 골라 느지막하게 돌아갔습니다. 성스러운 시간을 몇 시진이나 넘긴 야밤중이었지요. 돌아가서 된서리를 맞지 않을지 걱정해 줬더니 신전에서 잔업이 있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라는 허튼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 계집애가 경을 치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 제가 잘 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다는 건 그야말로 별일입니다. 열여덟 인생 첫 늦잠인 만큼.


  얼떨떨한 나머지 삽시간 생각에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섶쇠로 칼을 벼려서는 안 되겠지요, 아무려면요. 전 우당탕탕 층계참에서 뛰어내리는 대신 차분히 침구를 치우고, 머리도 빗어 묶고 신민복도 잘 개 둔 걸로 꺼내 입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생각보다 잠으로 늑장을 제대로 부린 모양인지 아침장사가 얼추 끝나버린 시간인 것 같았습니다. 주방을 치우는 중이시던 아버진 참 덤덤하셨습니다. “별일이구나? 오늘은 장에 가서 복권이라도 하나 사봐야 될 모양이다.”라시는 걸 보니 재미있어하시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러게요. 허겁지겁 내려와 봐야 바보 같은 꼴이 더 추해질 것 같아서…….” “아침장사는 죽을 쒔으니 되레 잘 했다. 어제 어지간히 팔았으니 오늘은 좀 쉬어야지. 너도 쉬거라.” 설거지감이나 남아 있나 싶어 들여다보니 개수대는 텅텅이었습니다. “공쳤는데 씻을 그릇이 있겠니? 한가하거들랑 참말로 복권이라도 사오련?” 아버진 계속 농이셨습니다. 늑장이어서 죄스러웠는데, 괜히 손해본 듯싶을 정도로. “진담이셨어요, 복권 운운하신 거?” “아무려면. 네가 늦잠 자는 날이 어디 쉽게 또 오겠니?” 웃어넘기며 우체통이나 살펴보러 나갈 밖에요.


  어머나, 조막막한 우체통에 전단지가 거듭 쑤셔박혀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잠 찌꺼기가 바닥까지 달아나는 기분에, 저는 그 흉물을 하나하나 펴 보았습니다. 죄 한결같은 물건이었지요.



「범죄 제보는 영광의 나라에 결정적인 헌신이 될 것」

반성지주의 신성모독죄인 라모 수배전단, 현상금 전편 1000닢


  개요

  위 신민은 성지수복에 대한 거짓 진술로 뭇사람들을 현혹하고 영광으로의 달빛길을 의심케 한 혐의가 있음. 1871년 11월 1일, 신성모독죄로 수배령이 내려지자 거처에서 도주하여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임.


  인적사항

*성명: 라모 (남, 35세) → 원 거주지: 미시르미

*인상착의

             -6척으로 다소 큰 키, 곤돌라 사공으로 다부진 체격

             -곱슬머리, 콧수염이나 턱수염은 기르지 않음

             -도주 시 낡은 신민복을 입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음. 사공들이 신는 가죽신을 즐겨 신으며, 은으로 만든 실반지를 끈에 꿰어 목걸이처럼 착용함.


  ※ 체포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제보자에게는 현상금은 물론 미시르미 신전과 성기사단 미시르미 지부에서 감사패를 수여할 예정.

성기사단 미시르미 지부 사령관 상령 사사라엄



  이상하게 익숙한 이름이어서 뒤통수가 섬찟했습니다. 허나 그게 누군지, 끝내 기억나질 않으니 으스스한 대로 전단지를 치울 밖에요. 곤돌라 사공이 무어라고 대죄를 지을까요? 신성모독과 반성지주의가 동치인 데서야 어디 율법학자도 주둥이 잘못 놀리는 대로 죄인이 되겠지요. 하물며 신성과 신성모독을 철두철미 나눌 줄도 모르는 뭇사람이란 어련하지도 않을 게 틀림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라모 씨가 무사하기를 달바다에 비는 것뿐이었습니다.


  “미호누.” 하마터면 뜨악하여 딸꾹질이 나올 뻔했습니다. 하필이면 이런 때 말을 걸었을까요? 민망한 마음에 거진 분노를 담아 쏘아보니, 시모였습니다. 아니 하던 늑장에, 아니 바른 전단에 이제는 아니 오던 사내놈까지. 잘못한 건 없을 텐데 괜한 성질머리인가 싶어 불쑥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못 올 데 온 건 아닌데. 


  사내애라 그런지 그새 신수가 영 딴판이었습니다. 근래 성기사단에서 말단 사무 일을 한다던가. “요즘 군무원 일 한다면서, 낯빛이 다 훤해졌다?” “짜긴 해도 꼬박꼬박 나오거든. 어머니 고생 그만 시켜드리겠구나 해서.” 사람이 느닷없이 철도 다 드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팔장을 끼며 우체통에 삐뚜름하게 기대어 섰습니다. 시모가 철이 들었든 구리가 들었든, 재밌는 얘기하러 오진 않았을 것 같아서. “사람 다 됐네. 그래서, 웬일이야? 평일 댓바람에 멋대로 들이닥쳐서는.” “아, 제안이 하나 있어서.” “제안?” “응, 제안.” 눈이 절로 동그래졌지요. “부업으로 식재료 도소매라도 하는 거야?” “뭐라는 거야, 경 칠 일 있어?” “그럼, 귀한 신학책이라도 한 권 구했어?” 시모가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그제사 아차 싶었지요. 댓바람에 사람을 개무시한 셈이니까.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겠다.” “무시하는 건 아니야, 미안해. 그래도 달리 뭐가 있겠어?” “부탁이 있다는 말이야.”


  “무슨 부탁인데? 어디 한 번 들어 보실까?” “왜 어디 도둑놈 들이닥친 것처럼 인상이 인상인지 알겠다.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결혼하자며 이 따위로 들이닥쳤을까?” “원체 천부당만부당한 사건이었어야지.” 시모는 썩 태연자약했습니다. 이 년이면 그럭저럭 사람 구실할 말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속에 태양비가 내리는 일을 면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요. “미하모 형님 입대하실 즈음 말씀 좀 들은 게 있어서.” “오빠랑 무슨 작당을 했다고? 하여간 사내들이란 똑똑이나 머저리나…….” 적잖이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시모는 그저 웃는 낯이었습니다. 되레 제가 심통이 날 정도로. “말 그렇게 할 것까진 없잖아. 나도 허튼 소리나 하자고 비번일 때 부득부득 시간 낸 거 아냐.” 턱을 슬그머니 치키며, 한 번 말 해 보라고 할 밖에 없었습니다.


  “형님은 네가 고등마니학교 지원할 게 틀림없다고 하셨어. 아닌게아니라 참말이었으니 난 놈은 난 놈이다 싶었지. 그 때 합격해도 문제, 불합격해도 문제겠지만 어느 쪽이 더 심각한가 하면 전자라고 하시더라. 네가 성국에 삼켜져 버릴 거라고.” “별꼴이야. 사방에 오지랖이었네.” 시모 주제에 저런 헛소리를 날조할 수는 없겠지요. 오빠가 친히 그랬다면 한 수 접을 밖에 없습니다. 미하모라는 사내가 그 정도는 잘난 사람이니까. “이 나라는 괴물이 돼 버릴 거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우린, 그러니까 우리 집이랑 너희 집은 그 와중에 떨어내기 딱 좋은 약자들이라는 거야. 서로 지켜야 한다고.” “얼씨구. 그래서 우리 집 성기사님이 그땐 또 뭐라시던?” 이젠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고, 또 여기서 오빤 왜 나왔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모 치고는 일사천리였다는 말입니다.


  “그뿐이야. 그땐 이게 무슨 소린가, 피차 신민 신세니 네놈 어디 한 번 잘 해봐라, 그런 뜻인가 싶었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미하모라는 양반이 그까짓 시시덕을 했을 리 없을 것 같네.” “허튼 소리 아닌 거 맞지?” 제가 으르렁거리니 요 사내애가 다름 말을 망설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대수롭잖게 들어넘긴 말은 아닌 모양이지요. “널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던 것 같다. 이 년 전 들은 신탁이 참말이라면 지금 와서 이럴 리는 없지 않을까?” 제가 끼어들 새 없이 빠르게 말이 이어졌습니다. “신탁이 뭘까? 넌 똑똑하니까 알지도 모르겠다. 난 보통 사람이라 신학이다 교리다 하는 건 잘 몰라. 그런데 적어도 달에 계신 위대한 분이 친히 어디 애들 짝짓기나 하시진 않겠지, 그저 그렇게 넘겨짚을 뿐이야.” 그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오빠고, 이번엔 신탁이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제안이라고 했잖아. 난 말이야, 네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렴풋하지만, 분명하게. 난 거기 어울리는 놈이 아니야. 나도 그 정돈 알아. 왜, 그런 거 있잖아. 평범한 사람일수록 더 잘 알 수 있는 거. 그러니 어느 쪽이 옳은가 하면,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물러서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지.”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야. 지금 모란제 성국에서는.” 시모는 켁켁거리더니 물이나 한 잔 주면 안되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그러고보니 차 한 잔 대접하지 않았었지요. 미호누, 싹쑤머리없는 년 같으니. 곡차를 데워 내고, 따르는 동안 거북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시모는 곡차를 단번에 들이켜더니 그 길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북쪽에서는 총각들 우선으로 성전사 입대를 끈질기게 종용한다더라. 미하모 형님 말씀대로 이 나라가 점점 무서워진다면 북쪽이 남쪽이 되고 종용이 명령이 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성지 좋다지만, 난 죽기 싫어. 누구 죽이고 싶지도 않고. 네가 가르쳐 줬잖아? 히나마니는 태양어로 시네 디오르라고. 달의 성지이면서 태양의 성지인 곳이라고.” “네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정말 무서운 세상이 오면 가엾은 신민 처녀들은 어떻게 될까? 그래, 미하모 형님이 서로 지키라고 말씀하신 건 이런 걸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싶어.” 들은 척 만 척하며 끝맺은 말은 참으로 참으로 좋은 게 좋은 말이어서 무어라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썩 입밖으로 나오질 않는 말을 고르고 골라 내뱉었습니다. “참……. 뜬금없이 알쏭달쏭하네. 하고 싶은 말이 서로 돕고 삽시다, 그런 거야? 아무려면 안면 있는 사이인 만큼 돕고 살려고 하지 않겠어?” “그런 아무래도 좋은 이야긴 아니야. 미하모 형님이 이 년이나 전, 그러니까 참 평시 같던 그 때 그런 충고를 하신 건 미리미리 준비 안 하면 안 될거란 거라고 생각해. 이제 슬슬 반성지주의자들이 어쩌구 하며 솎아내기를 시작했으니 다음 수순으로 반쪽짜리 쌍것들을 쓸어내려고 하겠지. 막상 그 때 발버둥친들 어떻게 되겠어? 늦어버리는 거지.” 시모는 숫제 절을 하듯, 제게 허리를 꾸벅 숙였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 우물쭈물할 밖에요. “날 좀 지켜줘. 울 어머니도. 우리 집은 개 같은 세상 헤쳐나갈 힘이 없어. 그럼 나도 어떻게든 널 도우려고 해볼게. 그래서 무슨 부스러기라도 주워올 수 있을 것 같은 직장 찾은 거야.” “……네가 이런 놈이었는진 몰랐는데. 무슨 바람이야? 열여덟쯤 되니 갑자기 오빠 말이 새삼스럽든?” “그런지도 모르겠네. 왜, 네가 그랬잖아. 그럭저럭 살려다가 진짜 그럭저럭 살지도 못하게 될 거라고.” 꽤나 생각 못한 말이었습니다. 그땐 욕이나 저주처럼 악다구니를 썼던 것 같은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데서야 야박하게 굴 수도 없는 일이고, 한 발 빼려 들 수도 없는 일이고. 이게 무슨 오지랖이냐며 달암호를 휘갈겨서 기무라제까지 날려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무슨 부탁인진 잘 알았어. 결혼해 달라고 하면 부지깽이로 두들겨서 쫓아내려고 했더니 그 점에선 뜻밖이네. 또 요즘 내가 시험 부담에 정신병이 좀 든 것 같은데, 그게 그럭저럭 잊힐 정도로 황당하기도 하고.” “미, 미안…….” “한 번 생각해 보자. 오빠가 왜 그랬는진 나도 모르겠다. 어디 내가 인간 미하모랑 가뤄서 이겨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제가 성기사로 공을 못 세울 때를 대비하라는 건지, 아니면 위태위태한 일은 가능한 갖은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건지.” “고맙다, 정말 고마워. 참, 그러고보니 선물을 샀는데 깜빡하고 있었네.” 시모는 거의 눈물콧물을 빼면서 굽실거렸습니다. 선물이랍시고 내미는 걸 확인도 안 하고 받은 뒤에 부득부득 가서 쉬라며 등을 떠밀어 버렸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요즈음 극성이던 신경증이 쏙 달아날 정도로. 역시 나무는 숲에 숨겨야 하는 법일까요?


  시모가 가져온 건 설탕기름과자였습니다. 끽차점에 과자가 웬말이고, 평일 대낮부터 튀김이 또 웬말일까요? 저는 그 느글거리는 걸 우물우물 씹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솜털이 쭈뼛 곤두설 정도로 달아 뇌에 기름칠하기는 딱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RECOMMENDED

Writer

Naufrago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19.05.24. 00:30
미호누 정말 ㅋㅋㅋㅋ
정말이지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네요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최종 글
공지 『경소설회랑 창작공간』 비영리 공간 선언 (1) file 수려한꽃 2012.05.17. 78555
공지 글 올리기 전에 꼭 읽어주세요!! (3) file 수려한꽃 2012.01.21. 84225
자유 성자의 딸기 #18 (1) Naufrago 2019.05.22. 24
827 이벤트 제6차 프롤로그 대회 닫는 글입니다. (2) file 까치우 2019.05.20. 57
826 프롤로그! [판프대 올리려 했는데 까먹음] 아싸녀한테 작업 치는 방법 스카포레 2019.05.20. 22  
825 자유 [판프대] 누구라도 내 불행에 끼어드는 건 인정할 수 없어 댕댕e 2019.05.20. 27  
824 자유 [판프대] 생명의 물 샤이닝원 2019.05.19. 33  
823 자유 [판프대] 로리스 아포칼립스 (lawless apocalypse) chany 2019.05.19. 29  
822 자유 [판프대] 스웨터 사냥 klo 2019.05.19. 52  
821 프롤로그! [판프대] 버킷리스트-죽기 전에는 못하는 일 투명한드래곤 2019.05.19. 20  
820 자유 [판프대] 부서진 세계의 미술부 (1) 넨린짱 2019.05.19. 45
819 프롤로그! [판프대] 재판 딸갤러 2019.05.19. 31  
818 자유 [판프대]모피를 두른 기사와 어리숙한 종자 네크 2019.05.18. 23  
817 자유 [판프대] 로버트 기동기 - 프롤로그 (1) -Umvlang 2019.05.18. 42
816 자유 금지된 연애 : 1화 - 하늘에서 내려온... (5) -Umvlang 2019.05.18. 27
815 자유 [판프대] 마녀의 아이 019 2019.05.17. 29  
814 자유 [판프대] 무기를 만드는 EX급 회귀자 (875자) chany 2019.05.17. 38  
prev
이동할 페이지 번호 입력 후 엔터
('57'이하의 숫자)
of 57 next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