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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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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2:16 Jun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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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갈채가 시작되었다. 어디 건국기념일이나 전승기념일 행사 즈음의 비류(飛流)가 아니었다.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네 명, 네 명에서 여덟 명……. 그렇게 인상의 상승이 모종의 급수처럼 차근차근 환호와 박수를 키우고 있었다. 이따금 격정이 쏠리어 비바 오르데나, 베네딕토 전하 천세, 위대한 오르데나 만세 등 외침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살리기도 했다.


썩 만족스레 웃으면서, 베네딕토는 증폭기를 뽑아 손에 들고 연설대를 벗어나 연단에 걸터앉았다. 소탈하지만, 수리 같은 위엄은 여전했다. 그런 모습은 그 자체로 오르데나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비바 오르데나, 그렇게 말할 밖에 없는 것이다. 


격식 있는 연설은 끝나고 그 다음 행사를 진행하자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제복 외투까지 벗어 대강 내버려두고는 예사롭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비바 오르데나. 여러분, 사실 요즈음 왕립 콘벤시온 대학이니 성 알바로 대학이니, 이어 레이나 발렌티나 대학까지 왕국 유수 최고학부들을 순시하는 겸 학생과의 대담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왕태자가 젊은이를 홀대한다며 워낙 쓴소리들을 해서 말이지요. 만약 제가 형님처럼 날 적부터 국저이었다면 이런 허술한 실책을……. 이런, 실언입니다, 실언. 무려 고인이신 형님의 모교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감상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왕위계승권자에게 묻고 싶다, 직언하고 싶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여러분이 오르데나의 내일이니 내일의 목소리를 듣는 셈으로 하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수 십 명이 와르르 손을 치켜들었다. 순간 이 전당에 우레라도 터졌는지,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울려펴졌다. 왕태자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래서야 오늘 이 전당에서 나가지도 못하겠군요. 아쉽지만 열 명 정도만 집어 봅시다.”


베네딕토가 어드메를 가리키기가 무섭게 몇 명, 손을 든 한쪽 무리에서 사내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수행 중 한 명이 여분 증폭기를 건네자 또박또박 청산유수로 내뱉기 시작했다.


“베네딕토 전하, 마도학부 4학년 가엘 가르시아라고 합니다. 먼저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해 주셔 감사합니다. 저는 마도학 전공자이면서 일인의 신민으로서, 오르데나의 앞날이 기대되면서도 염려스럽습니다. 이에 전하께서 천명하신 마도강국 9개년 계획 수립과 추진이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자이며 학생이지 행정가가 아니다 보니 전하께서 그 계획의 완성을 어찌 보고 계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왕위계승권자이자 총리대신으로서 대답해 주신다면 그보다 든든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엘 가르시아, 훌륭한 질문 고맙습니다. 마도강국 9개년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6년 전 공표한 대로 ‘9년간 매년 오르데나의 다이달라이트 생산량을 두 배씩 높인다’ 그 자체입니다. 계획의 세안은 오로지 실현을 위한 이론 혁신, 기술 혁신, 설비 혁신, 생산 혁신에 방점을 찍기 위한 것뿐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우선 총리대신인 베네딕토 오르데나에의 질문이니 그 방면에서 답하자면, 계획의 주축인 알레프 마소 연구소에 합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충분한 재원을 투입하며 불필요한 규제를 해소하는 데 행정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최고 연구 기관이 9개년 계획 현실화 그 이상의 역량을 이미 수 년 전에 갖추어 국가와 체제가 괜한 장해만 일으키지 않으면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이쪽을 보십시오. 이렇게 자신할 수 있는 건 이 마티아스 아드리안 아벨 같은 최고의 마도학자들이 알레프에 있는 덕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마티아스 주임의 모교도 바로 여기였지요. 가엘 가르시아, 여길 보십시오. 오르데나의 보물인 마티아스 아벨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알레프 마소 연구소에는 또 다른 마도학자들이 있습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까?”


그 후로 학생과의 대담은 줄곧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판박이였다.


행사가 끝났다. 무관들이 방청석 후열부터 사람을 흩어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 연단은 흑색 무복이며 수행복으로 검은 벽에 둘러싸였다. 그 소우주에서 재차 박수로 순시의 성황을 감축하며……. 마티아스와 이리스는 그런 명예와 영예의 한데에 덩그러니 밀려나 두 손바닥을 갉작거릴 뿐이었다.


왕태자가 지독하리만치 철두철미한 위인이 아니었다면 아주 영영 그랬으리라. 그는 곧 은별 두 개가 번뜩이는 제복을 어깨에 걸친 채, 두 학자를 향해 연극투로 양 팔을 벌려 보였다.


그는 잊을 필요가 없는 건 잊지 않는다. 그런 사람인 것이다.


“마티아스, 행사가 썩 만족스레 마무리된 것 같아 기쁘오. 역시 이런 자리에는 마도학자가 같이 와 있어야 빛이 나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니 말입니다.”


박장대소가 따랐다. 이런 자리에서는 정답을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좋소, 좋아. 마티아스, 아, 어제 건이 있었지. 나는 이제 레이나 발렌티나에서 다른 일정이 있을 예정이오. 부탁한 건은 학장을 통해 학과장에게 이야기가 되었다 들었소.”


“신경 써 주셔 감사합니다.”


“그대를 위해 성적 우수자들을 뽑아 면담 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더군. 시종장을 붙여 줄 테니 그쪽으로 가 보도록 하시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겠소.”


마티아스는 귀천한 스승의 자조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마도학은 광대놀음 위에서 빛난다, 마도학은 광대놀음 위에서 빛난다, 마도학은 광대놀음 위에서 빛난다…….


왕태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종장이 다가와 연대 뒤쪽 어드메로 손짓했다. 아마 맹인도 그 제스처를 따라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국저는 좋든 좋지 않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걸 썩 고까워한다. 학자 둘이 일이야 무슨 일을 벌이겠냐마는 자신의 명으로 잡힌 면담 자리에 다만 얼마간이라도 어긋나는 꼴을 보아 넘기지 아니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9월 초입의 교정은 여름빛의 마지막 단말마였다. 계절도 시간도 다르나 꿈결에 이 길은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곧 저 플라타너스의 너부죽한 잎사귀가 말라 비틀어지고 생명일랑 추위에 사그라지며 그나마 온기 만연했던 마지막 여름을 그리워하리라. 문득 마티아스는 곧 마도 올림픽이 열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5년 전 겨울의 그날처럼…….


시종장이 갑작스레 고개를 돌렸다. 한창 꼴값 중이던 마티아스는 움찔했다.


“마티아스 아벨 님.”


“아, 예, 시종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시종장은 송골매처럼 우아하게 수첩을 꺼내 펴 들었다. 그 베네딕토 오르데나를 모시려면 시종직조차도 맹금 부류여야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는 이 학자인지 먹물인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닙을 갉작거리며 할 말을 할 뿐.


“베네딕토 전하께선 알베르카의 일정이 끝나시는 대로 알베르카를 떠날 예정이십니다. 하여 마티아스 님의 여정을 따로 보살피라 언질을 하셨습니다.”


“세세한 배려에 몸 둘 바 모르겠다고 말씀 올려 주십시오.”


“원하신다면 궁내부에서 에스피나로의 부양선편을 수배해 드리겠습니다만.”


에스피나로 돌아가는 선편은 족히 몇 십 오르덴은 하겠지. 만날 다이달라이트 첨탑에 갇혀 마법 놀음밖에 못 하니 샐 구석이 없어 어디 궁할 수가 없는 신세라도 공짜라면 내키는 법.


하지만 아침나절의 멜랑콜리가 여진을 가하는지, 마티아스는 구태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마침 금요일이고, 오랜만에 알베르카에 왔으니 기분전환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아차차, 이리스가 있지. 제 동행 쪽은 아무래도 수고를 해 주셔야…….”


“아, 아뇨, 저도 주임님 모셔서 에스피나로 가겠습니다.”


이리스가 갑작스레 허둥거려 일이 좀 우스꽝스럽게 되었다. 시종장은 종이 두들기는 소리가 쩌렁쩌렁하도록 수첩을 치닫았다.


“알겠습니다.”


그 사이 이리스는 양쪽으로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어느 쪽이든 별다른 생각이 없거나, 무심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두 연구원은 시종장을 따라 마도학부 본관을 가로질러 걸었다. 대규모 행사가 있은 직후 낯선 자들이 학내를 횡행하자 자연적 별의별 시선을 다 잡아 끌었다. 출신지가 이곳인 마티아스라면 슬그머니 숨어들 수도 있었겠지만 허투루 그런 생각을 입에 올렸다간 소위 채비를 중시하는 궁내부 사람에게 면박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시종장은 어느 강당에 다다르자 절도 있게 문을 열어 보였다. 학생 여덟 명이 중앙 원탁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학과장이나 다른 교수진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려면 지금 베네딕토 오르데나 친왕께서 친히 행차하셨는데 연구자 나부랭이가 무슨 소용일까? 그리고 그런 접대라면 외려 이쪽에서 사양하겠다고, 마티아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뒤에서 출입문이 닫히고 시종장은 수행 임무를 위해 떠났다.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두 마도학자는 예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마티아스 아벨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동료 연구자인 이론마도학자 이리스 비요르카.”


“이리스 비요르카예요. 반갑습니다.”


미리 연습이라도 되어 있었는지, 학생들은 차례차례 줄을 서 백지장부터 들이밀었다. 피곤하지만 이런 자리의 수속 비슷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 명 한 명 공들여 사인을 해 주자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잘 움키어 간수하는 게 보였다. 개중 이리스에게도 사인을 청한 사람은 겨우 두 명뿐이었다.


간단한 환영 자리가 끝나자 상석에 제일 가까이 앉은 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질문이 아주 희한하리만치 청산유수였다.


“무려 학부 4학년 특수마도학 강의 교재에 나오시는 분을 뵐 줄은 몰랐습니다. 늘 존경하고 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현재 연구 분야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그건……. 제 연구 분야는 하나같이 국가 지정 기밀이라서 말입니다. 정말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우주의 신비에 직접 도전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마티아스는 최고의 마도학자라는 평과 달리 우물쭈물할 밖에 없었다. 후배 학생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전형적인 질문을 이어다 붙였다.


“레이나 발렌티나에서 마도학부에서는 국방부 전략기술관이나 마도부 감찰관으로 행정부의 테크노크라트가 되는 걸 많이들 선호하는데, 순수하게 연구자의 길을 택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글쎄요, 전 딱히 그런 걸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어서. 스승님……. 그러니까 이제 고인이 되신 카예타노 캄피에레 전 연구소장께 발탁된 사람이기도 했고.”


주거니 받거니 이런 이야기나 늘어놓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박수를 두어 번 짝짝 치고는 묵묵히 서 있던 이리스에게 살그머니 손짓을 했다.


“그러니까 스승을 본받아 저도 인재 탐색에 나섰다는 말입니다. 아, 이리스. 고마워. 여러분, 우리 조국에서 기술관료를 선호하는 건 정체상, 정책상 자연적으로 발생한 현상일 겁니다. 마도학자는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마는 그게 시대영합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마도학은 곧 물리학이요, 이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이용하는 게 마도학자이니 자연적 현실주의자가 된 것뿐이지지요. 제 연구 분야가 궁금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단순히 마도학에 능통한 마도학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럼, 이걸 봐 주실까요?”


이리스는 마티아스의 마무리에 맞추어 종이뭉치를 좌중 앞에 하나씩 순서대로 놓았다. 표지는 그녀가 평소 차트에다 되는 대로 휘갈기던 굼벵이 같은 글씨로, ‘8,192진법의 재귀적 단락으로 알데바란의 표층 에너지를 측량하는 재밌는 유도식을 구성해봐요’라는 해괴한 제목이 달려 있었다. 학생들의 표정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저물어 가는 시간, 알베르카 대학가는 흥청거렸다. 베네딕토 국방위원장 전하 행차를 가십거리 삼아 충성이니 명예니 인의니 거드럭거리며 가을과 음주와 함께……. 제법 익숙한, 익숙했던 광경이어서 이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 낯선 백의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노을을 받아 이제 빨간 옷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지.


왁자지껄한 주요 가도를 벗어나 얼마간 한산해질 때까지 말없이 걸었다. 부양정 한 척이 두 사람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깐 멈춰 서서, 새삼스레 물었다.


“묻고 싶은 게 많지 않아?”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저희?”


마티아스는 이게 아닌데, 라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임님은 엄청 솔직하시다고요, 얼굴이. 정기 회의나 VIP 미팅 같은 데서도 그러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이런 등신 같은 놈들, 그런 표정이셨어요.”


아닌 게 아니라 답을 내기는커녕 몇 십 소절이라도 해석한 학생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마티아스 역시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마도학부 수준이 떨어진다. 이미 십 수년째 연구 일선에서 되뇌어 온 이 문제는 기실 학력 저하가 아닌 사회 풍조에 근간을 두고 있어 어찌 손쓸 길이 없었다. 그 세태의 인도자가 다름 아닌 왕가인 데서야 더더욱.


마티아스는 이제 익숙해졌다는 게 서글펐다. 스승의 팀에서 현실일랑 모른 채 술식이나 끄적거리던 시절이 좋았다는 게, 대마도학자인 스승조차도 이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게.


“스승님이 그러시더라고. 오르데나에서 마도학은 광대놀음 위에 탑을 하나하나 쌓았다고. 순시니 강연이니 행사니 다 그런 거지. 뭐, 네가 눈에 쉽게 띈 건 완전 행운이었다는 말이야.”


“부, 부양선 태워 줘도 아무것도 안 나오거든요? 그래서 어디 가요?”


“여기 다닐 때 내 단골집.”


단골집. 소박한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이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듯한 길에서 후굴로 접어들어 플라타너스 인쇄 거리를 거닐자 세상이 뒤바뀌었다. 이곳은 퇴락한 뒷골목이 되고 만 것 같았다. 드문드문 마소 인쇄기 돌아가는 빛과 소음이 마치 숨 몰아쉬는 짐승의 그르렁거림으로 들릴 정도로. 한때 사치품이었던 수정 스크린이 이제 도서와 문서를 구닥다리로 내몰 만큼 보편화되어 그 충격을 오롯이 뒤집어쓴 것이다.


언젠가 테레사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인턴 취재 때 다이달라이트 시료 공장에 가본 적이 있다고. 노동자 상당수가 방직공이나 목공, 보석공처럼 마도 기술의 발전으로 몰락하여 내쳐진 직인들이었다고. 이제 인쇄공들도 새벽같이 도시 외곽지에서 분진과 파편이 휘날리는 작업장으로 행진하는 대열에 합류하게 된 걸까? 그런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시트러스 향이 새콤했다. 언제고 곁에 있었으나 이젠 영영 잃어버린……. 마티아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붙들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이리스가 있었다. 손아귀에 힘을 풀어도 그 자리 그대로 요지부동이었다. 잔뜩 옹송그리고는 배 고프다고, 빨리 가자고 채근하는 그녀를 두고 차마 손을 아주 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모질 수 있었다면 지금 이렇지도 않았겠지.


두 사람은 뻣뻣하고 엉거주춤하게 계속 갔다. 예나 지금이나 어두컴컴한 도토리 화실 거리 어귀부터는 그런 등신 같은 꼴도 어디 눈에 띄지 않았다. 애써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이, 그는 제 단골집 위치를 찾아냈다. 굳게 내린 셔터가 갑작스러웠고 또 싸구려 단칸방이며 하숙집이 지천인 이 골목에, 못난 걸 쉬이 내버리는 이 나라에 참 어울리지 않나 싶었다.


마티아스는 무심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헌데 헛숨 들이켜는 소리를 들을 새도 없이 돌연 마소 호출기가 삑삑거리며 적색광을 내뿜었다. 발신인은 블랑코 에르난데스. 


「에르난데스 주임님?」


「아벨 주임. 뭐, 조용히 있을까 생각도 했는데 지금 일 돌아가는 꼴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인가? 에르난데스 주임이 실없지만 허튼 소리 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엣것들이 역류하는 감각을 억누르며 태연하게 되물을 밖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랑 당신네 연구원, 지금 출장 중이지?」


「예, 알베르카에…….」


「소장이랑 몇 명이 당신네 연구실에서 마소 연산기 해체해서 뜯어보고 있는 건 알고 있나 해서.」


그의 손에서 마소 호출기가 굴러 떨어졌다. 가엾은 그 기계는 보도를 찧더니 몸체와 렌즈가 분리되며 금속으로 된 비명을 내질렀다. 


경황이 없어 그 자신도 그렇게 울부짖지 못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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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2)

까치우
까치우 20.06.25. 20:04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비단 이 글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에 연재하고 계시는 글이 있다거나 출판한 글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세이즌 작성자 까치우 20.06.26. 01:47
쓰던거 브릿g에 올려놓은거 빼곤 딱히... 직장인이라서 그렇게 많이 못씁니다 ㅠ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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