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간판소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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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43 Jul 1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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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세이즌
협업 참여 동의 아니오

태양이란 나날이 떠오르되 그저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 아침볕은 스모그를 달구고, 그렇게 흐드러진 가스가 광선을 산란하여 기실 그 원천을 집어삼켜 버리니 말이다. 아침이 다 무얼까? 유독한 대기에 숨이 막히고 몸이 뒤틀린다면, 도시가 충분히 데워져 안개가 아주 흩어질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모든 일이 시작되나 죽어 있음과 다름없는 시간, 그것이 바로 <벌통>의 아침인 것이다. 하지만 앙헬리카는 꽁꽁 틀어막은 창틀과 문틈으로 비실비실 빛이 널브러지기 무섭게 얼른 깨고 만다. 피곤을 다스리자면 다만 십 분, 이십 분 수면이 아쉽겠지만 이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습관인지, 악에 받친 몸부림인지는 모를 일이다.


싸늘한 거실, 마리아는 잔뜩 옹송그린 채 담요를 껴안고 있었다. 소싯적 생각이 났다. 그게 이 년 전 일이니 아주 턱없는 흰소리겠지만……. 독백이 절로 입술 끄트머리에 흐르고, 바닥에 떨어져서는 도로 다리를 타고 올라 심장을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이젠 아니야, 그리고 아니어야 할 거야. 그 뿐이었다.


그녀는 가슴팍을 꼭 움켜쥐었다. 도담한 앞자락이 그저, 흐느끼며 사각사각 비명을 내질렀다. 괜스레 가슴이 차고 쓰라렸다. 아침부터 쓸데없이 감상적으로 구니 힘만 빠지는 법, 다만 마리아를 책잡고 싶지는 않았다. 이 바닥 생리가 그렇고, 그런 숙명일랑 죽어도 벗어날 수 없게 되어 것이다. 이 <벌통>의 하층민이라는 숙명 말이다.


열선에 불을 넣고, 팬을 올리고, 식용유를 둘렀다. 기름은 곧 닦아내고는 반죽을 꺼내 한 국자 넉넉히 부어 넣었다. 멜랑콜리하게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또 허기라도 면해야 잡생각에 힘을 빼지 않겠지. 그렇게 팬케이크를 굽다 보니 어느새 마리아가 잠에서 깼다. 그녀는 눈치를 보며 소파에 걸터앉은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안녕, 마리아.”


"아, 안녕……. 앙헬리카……."


능청스레 인사를 건넸다. 불호령을 겁낸 걸까? 마리아는 잔뜩 주눅들어 있었다. 다행히도 존대하지 말라는 요구는 잊어버리지 않은 모양이지. 


강단을 가장했지만, 낯모르는 사이에 반말이 멋쩍긴 마찬가지여서 앙헬리카의 말꼬리는 꽈배기처럼 뒤틀리고 있었다.


"취직은 어떻게 됐어? 사회복지사가 몇 군데 소개해 줬을 건데.”


"응……. 통조림 공장이랑 엘 코르테 콜메네스랑, 간판협회……."


"뭐, 간판협회? 너 자격증은 미리 따 놨어? 면접 신청은?”


앙헬리카는 반죽을 새로 부어 넣으며 채근했다. 어색하건 겸연쩍건 일자리는 중차대사에 해당한다. 벌어먹지도 못할 식충이를 끼고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으레 성인이 된 원생을 내쫓을 때, 양육원에서는 최소한의 직업 알선 정도는 해 준다. 공순이건 판매원이건 또 시원찮은 다른 무슨 직업이건. 심지어 사회복지사가 뒷돈을 받고 썩 좋지 않은 곳에 팔아 넘기듯 보내 버리기도 한다. 그마저 팔자라면 팔자겠지. 그래, 등 떠밀리건 아니건 이제 자기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 되는 것이다.


발버둥쳐야 한다. 버둥질을 멎었다간 매음굴이든 도시 원뿔 최하층의 방제 시설이든 장기 매매 센터든, 곧장 <벌통>의 막장으로 움푹 빠지고 말게 된다. 간판 일 정도라면 고아가 당장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는 좋은 축에 든다. 저런 맹탕이 용케 시험에 붙었구나 싶어 이것저것 더 캐묻게 되었다. 마리아는 몇 번 주억거려 대답을 대신했다.


"다른 덴 사람이 다 찼고, 시르쿨로 아술에서 한번 보자고 하던데……. 오늘 오전에……."


"사회복지사, 그 개 같은 새끼. 나한테 데려온 이유가 있었네. 알았어. 데려다 줄 테니까 밥 먹어. 어제처럼 나 두 그릇 먹게 만들지 말고."


따끈한 팬케이크 두 그릇이 두 그릇이 테이블에 올랐다. 한 그릇은 앙헬리카, 한 그릇은 마리아. 이 일의 전말은 생각보다 시시껄렁했던 것이다. 검은 소녀는 빵쪼가리를 쿡쿡 쑤시며 내내 구시렁거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저자세인 마리아에게 빨리 먹으라고 손짓했다. 한 개뿐인 샤워실을 두 명이 쓰자면 빡빡할 테니.


"아, 그리고 어제오늘 먹은 건 너 월급 나오면 청구할 거야."


물론 지금까지 베푼 친절이 자선사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두는 걸 잊지 않았다. 남이건 동거인이건, 계산은 계산이니까.


스모그가 차츰차츰 해소되며 햇빛이, 이지러진 가운데 힘을 되찾아 갔다. 얼음장처럼 싸늘하던 이 강철 도시는 그만큼 순식간에 끓어오르게 된다. 출근 준비를 마친 소녀는 현관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보았다. 가스며 분진이 아직 세를 유지하고 있어 칼칼했지만 이 정도라면 출타할 만했다. 슬렁슬렁 더 내버릴 시간도 없고.


그녀는 새 친구의 손을 붙들고 재빨리 밴쉽으로 뛰었다. 배 안에 들기가 무섭게 엔진을 점화하고 비행정을 띄웠다. 몇 분 이른가, 아니면 늦는가를 경계로 하늘길의 아침 정체란 아주 다른 일이 되니 말이다. 낡은 밴쉽에 언제나처럼 위로 반 쪽짜리 호선을 그리며 솟구쳤다. 난폭 운전에 익숙하지 않은 듯, 마리아는 의자를 붙들고 기겁했다.


<27구역>이라는 홀로그램이 두 소녀를 맞이했다. 드문드문 꼬리를 잇는 대열 속에서, 두 소녀는 말이 없었다. 그런 침묵이란 불안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한 시진쯤 지났을까, 비행정은 어느 건물 앞 공터에 사뿐 내려앉았다. 크고, 세련되며, 자과적이라고도 할 만한 곳. <CÍRCULO AZUL>, 그 열한 자 간판의 존재감일랑 독보적이었다.


마리아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긴장한 건가, 아니면 주눅들어 버린 건가? 어느 쪽이건 귀여운 낯짝이 새까매진 건 썩 보기 좋지 않았다. 저 간판이 드리운 그림자에 깔려 버린 것처럼……. 앙헬리카는 허리를 양쪽으로 와락 움켜쥐었다. 펄쩍거리며 동그래진 눈이 자신을 향하자, 이번에는 두 뺨에 손을 얹었다. 


그 보드라움을 직시하며, 앙헬리카는 달큼쌉싸름하게 속삭였다.


“이래서 어디 쓰겠어? 마리아, 간판사는 웃음을 파는 치들이라고. 어디 장사가 되겠냐는 말이야. 양육원에서 어떻게 굴렀든, 어떤 취급을 당했든 엿이나 먹으라고 해. 주눅 들지 마. 눈치 보지 마. 여기 붙으면 너 괴롭히던 미친년들이랑 안녕인 거야.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그러니까 좀 웃어. 예쁜 얼굴 잘 팔아 볼 생각이나 하란 말이야.”


"……응, 앙헬리카. 고마워."


앙헬리카는 의외로 진심어린 자신에게 놀랐다. 그리고 그 몇 마디나마 주워들은 마리아의 변화란 더 놀라웠다. 탈피였다. 시시껄렁한 껍질이 찢기고, 그 자리에 한 명의 미소녀가 서 있었다. 발그랗게 생기가 오르고, 푸른 수정체는 까마득히 비쳐 보였다. 이게 연기라면 정말 조심해야 쓰겠고, 원래 이랬다면 담당 사회복지사의 고간을 까버릴 일이 아닌가 싶었다.


두 소녀가 계단을 올랐다. 희한하리만치 리듬이 맞아, 마치 하농의 연탄 같았다. 앞장선 앙헬리카가 슬그머니 이끌어 주는.


그녀는 문을 열어젖히며 발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어제 보고 없이 후닥닥 내뺀 일이 생각나 잠깐 멈칫했다.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안녕하십니까…….”


"앙헬리카! 너 어제 그 고물 간판 건, 엄청 일찍 끝냈다면서? 그런데 말 한 마디 없이 도망가 버리고 말이야. 너 그러면 섭……."


"사정이 좀 있었어요. 여기, 오늘 면접 본다는 애.”


아니나다를까 고래고래 잔소리가 쏟아졌다. 앙헬리카는 뻔뻔스러웠다. 잠깐이나마 대비를 했고, 또 적절한 변명거리가 지금 손을 잡고 있지 않은가?


“이게 무슨 소리야? 뭐가 어떻게 된……. 아하, 그렇구먼. 반가워요. 난 후아나, <시르쿨로 아술> 27구역 지부장입니다. 앙헬리카, 내 자리 전화 좀 받아! 사실 우리가 며칠 전에 예상 외의 결원이 생겨서 모집 공고를 냈어요. 열댓 명 지원한 것 같은데, 그쪽이 마지막 면접잡니다. 양육원 쪽으로 보내 드린 요강 보셨죠? 이쪽 업계는 실무면접 말고는 별다를 게 없습니다. 자격증 있으면 간판 일은 곧잘 하니까요, 다들. 요는 센스죠. 간판 멋지게 뽑아도 광고나 홍보 센스가 꽝이면 그건 산통 다 깨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걸 시험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 시험 본다고 뭐가 되는 일도 아니고. 직접 불러다가 어떻게들 하는지 직접 봐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곧 간단한 일 하나 당겨서……. 왜, 앙헬리카? 응, 25구역, 입간판 2종에 홍보대행? 수습 연수차 대금 할인해준다고 말했다고? 평소에도 좀 이렇게 빠릿빠릿 일 해 보라고, 알겠어? 마리아 씨, 갑시다."


후아나의 표정은 오락가락했다. 언제는 상사요, 또 언제는 영업자로. 물론 마리아를 향한 것은 후자였지만 참으로 사근사근한 그 이면은 거칠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알아서 쪽이나 잘 팔아보라는, 그런. 몸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다만 웃음을. 허나 혈혈단신에 저학력자인 여자가 아무것도 팔아넘기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직업은, <벌통>에는 없다시피하다.


마리아는 속으로 천 번 만 번 곱씹었다. 주눅 들지 마, 눈치 보지 마, 예쁘게 잘 웃어. 되새기는 만큼 그렇게 우화되어 갔다. 앙헬리카가 슬그머니 곁에 와 살필 무렵에는 이미 간판소녀 하나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그마한 몸집에 금발로 치장하고는 이마팍에 ‘마리아’라고 써 붙인 간판소녀, 하나가.


지부장은 곧 마리아를 데리고 휑하니 사무실을 나섰다.


상전이 사라지자 간판사들은 신이 났다. 조회며 업무보고로 마음 졸이던 차라 더 그랬다. 당장 일거리가 없는 사람은 왁자지껄 잡담을 시작했다. 덕분에 사약같이 쓴 사무실 드립 커피가 품귀를 빚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문이 벌컥 열리면 일사불란 영업 태도로 전환하는 꼴이 제법 장관이었다. 대개 동료의 출입이어서 이내 긴장 풀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웬일인지 농땡이며 요령이라면 27구역 지부 제일인 앙헬리카가 오늘만큼은 제자리에서 기기묘묘한 표정으로 입력 단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물론 사우는 곧 경쟁자인 업계에서 마음 쓰는 사람은 적었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파티션 위로 말쑥한 얼굴이 솟구치더니 아주 모로 기댄 상체가 넘어왔다. 레오타드가 이상야릇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리카, 너 별일이다? 틈만 나면 요리조리 내빼는 게."


"그러게. 나 오늘 왜 이러냐, 소피아?"


앙헬리카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예사스럽고 희롱하는 투가 걱정과는 감감하다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간판 하는 치들이란, 저 사정 있을 때나 남 상관을 하는 법.


아니나다를까 소피아는 곧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주 물리쳐 버리기 전에 선수를 칠 모양이었다.


"앙헬, 앙헬. 너, 일 없어?"


"사실 어제 오후 일 일찍 끝나자마자 집으로 튀어서……."


앙헬리카는 대놓고 혀를 찼지만 없는 말을 지어내려 하지는 않았다. 피차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얼마 전 품앗이를 시킨 일이 있으니, 그 신세를 갚으라고 하면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그래도 구태여 입에 올리는 건 피차 입만 아프겠지. 그러니 드러내놓고 언급할 필요도 없다. 닳아 빠진 사람끼리의 워게임이라 할까?


"잘 한다, 잘 해. 너, 이번 주 건수 아직 못 채웠지? 그럼 나랑 좀 같이 나가자."


"나한테까지 왔다는 건 알 만한 일이란 거잖아. 골 때린다, 진짜.”


"어쭈, 앙헬리카. 치사하게 나오면 안 되지. 좀 도와줘. 지부장 올 때 눈에 띄면 너도 좋을 거 없잖아? 응?”


"알았어, 알았다고."


그저 청부업자에게 끌려가는 빚쟁이마냥 따를 밖에. 그래도 남의 비행정으로 현장에 나가니 하루치 유류비 즈음은 굳으리라. 그리고 소피아의 밴쉽은 제법 좋은 모델이어서 멀찍이 가는 길에 고생도 한결 덜할 것이다. 의식주에 들 돈을 줄여 뽑았다고 하니, 여러모로 악착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5구역까지 비행하는 와중 엔진 불안정으로 인한 진동, 선회 시의 좌석 요동 따위 일절 없었다. 러시아워를 훌쩍 지난 하늘을 그야말로 부드럽게 가로질렀다. 그러고보니 문득 실무 면접을 겸해 지부장과 동행한 마리아 생각이 났다. 후아나의 밴쉽은 족히 십 년은 더 된 고물이어서 여러모로 고생깨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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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세이즌

안녕하세요

comment (1)

까치우
까치우 20.07.18. 10:33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여갈수록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량이 많아지는 법이라지요
독자든 작가든. 같은 작가라도 후기로 갈수록 문장이 달라지는 것 또한 그런 까닭이리라, 같은 글이라도 나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그런 까닭이리라 싶습니다. 작가분들이 옛날 글 보면 괴로워하는 것또한 비슷한 연유겠죠.. ㅎㅎ

그나저나.. 앙헬리카의 피부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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