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그건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리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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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01 Apr 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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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LgunX


교실 뒤편의 내 사물함. 몇 년에 걸쳐 몇 명의 주인을 거쳐 손때가 치덕치덕한 문짝을 열자, 그 안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러브레터가 들어 있었다.

어김없이, 라고 얘기는 했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사정이 있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내용물을 확인해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것이 러브레터임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음, 글쎄. 뭐 별 대단한 건 없다. 교과서 몇 권이랑 매일 들고 다니긴 뭐해서 넣어 둔 후줄근한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남자 고등학생의 사물함 안에, 겉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데다 빨간 하트 모양 스티커로 봉해져 있는 - 그야말로 러블리한 - 소녀스러운 분홍색 편지봉투가 혼자 분위기 파악 못 하고서 다소곳이 놓여 있다면 어떻게 봐도 분위기적으로 그렇지 않나 하고 되물을 수밖에.

이해를 돕기 위해 첨언하도록 하겠다. 상세한 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사흘 전부터 아침에 학교에 와서 사물함을 열어 보면 매일 이렇게 러브레터가 들어 있다. 다만 방금도 말했듯이,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이걸 누가 보냈는지, 나한테 보낸 게 맞는지, 그 안의 내용은 무엇인지 등등은 여태껏 확인한 바가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지 대략 짐작은 하고 있다. 더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략이 아니라 전부일지도 모르지만.

“흠, 크흠, 흠!”

그리고 딱 적절한 순간에 주의를 끄는 헛기침 소리.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헛기침의 주인인 같은 반 여학생이 - 이름은 여시진이라고 한다 ― 아직 찬 기운을 머금은 봄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창가에 허리를 기댄 채 막 이쪽으로 뛰어와서 잡아먹지나 않을까 싶은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는 쉬는 날이니 교복 대신 시원스러운 파란색 재킷을 걸치고 왔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얼굴은 새빨갛게 홍조를 띄고 있다. 위는 빨갛고 아래는 파란 것이 애국심이 투철한 소녀구나- 내지는 얼굴은 따뜻한 색이고 입은 옷은 차가운 색이니 핫 앤 콜드한 그야말로 인간 자판기로군- 하는 따위의 실없는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토요일인데 웬일이야? 동아리?”

헛기침까지 굳이 해 가면서 내 주의를 끌려고 시도한 사람을 세워 두고 마냥 두서없는 머릿속 1인 개그만 하고 있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 짓인 것 같아 이쪽에서 일단 말을 걸었다. 이 여시진이라는 아이는 평소의 Cooooool한 품행이나 그를 뒷받침해주는 지적·육체적 능력에 힘입어 주위의 신임을 받고 있고, 그 덕에 필요로 하는 곳도 많아 여러 동아리에서 양다리 세다리 문어다리를 걸친 채 대활약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아마 오늘도 그런 동아리 중 하나에 볼일이 있는 거겠지 -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티를 내 보인다.

“어? 아, 뭐, 응! 그렇지! 하하하.”

여시진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좀 과하다 싶은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바닥에 난 땀을 옷자락에 맹렬히 비벼대는 걸 보면 내심 긴장하고 있다는 게 다 들여다보이지만서도.

“그래, 그럼 수고하고. 난 이만.”

좀 전이 새빨간 홍조였다면 지금은 시뻘건 홍시가 된 얼굴로 입을 묘하게 뻐끔거리고 있는 시진에게 인사를 건넨 뒤, 나는 손에 든 분홍색 편지봉투를 교복 안주머니에 넣고 교실 뒷문으로 향했다.

“아, 잠깐! 잠깐만!”

그렇지만 문을 열고 교실에서 나가기 직전에, 시진이 황급히 불러세우는 소리에 멈춰서게 되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저, 저기 그……. 그 방금 주머니에 넣은 그거! 그거 말인데!”

시진이 손가락으로 내 교복 상의를 가리킨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막 집어넣은 편지 이야기다.

“이거?”

안주머니에서 다시 편지봉투를 꺼내 보였다.

“그, 그래! 그……. 그거, 그……. 그 편지 말인데!”

“이게 왜?”

“그거를 그, 아, 아아아, 안 읽어보나 해서!”

느닷없는 직구가 날아왔다. 사실 뻔한 게 뻔한 거다만서도 이건 너무 티나지 않나. 시진 본인도 알아차렸는지, 달아오른 나머지 반경 30센티미터에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르지 않을까 싶은 얼굴을 해가지고서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니 그게 저기 그 있잖아 얼마 전부터 쭉 봤는데 며칠 동안 편지가 몇 통씩이나 계속 오는데 한 번도 읽어보는 것 같지는 않고 해서 왜 그런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보낸 사람이 참 속이 타겠구나 싶기도 하고 너무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고 그래도 뭔가 사정이 있는 걸까 싶으면서도 딱 부러지게 굴지 않고 사람 애태우는 건 참 그렇지 않나 이런생각에 말이지 아아아아아 내가 참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궁금해서!!”

변명이라기보단 자백에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요컨대, 편지가 들어 있는 걸 봐놓고선 왜 안 읽느냐는 거지?”

“……응.”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한 적 없는데 편지가 자꾸 오는 걸 참 잘 알고 있구나- 하는 이야기라도 해 볼까 했지만, 창피한 건지 쑥스러운 건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눈앞에 두고 있자니 속내를 뻔히 알면서 상처를 너무 후벼파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 짓인 것 같아 그건 그만두고, 질문을 받았으니 적절한 대답을 제공하는 기브 앤 테이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뭐, 간단하게 대답을 하자면……. 정말 간단한데. 안 읽는 게 아니라 못 읽는 거야.”

“어? 못 읽는다……니?”

안경다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해 주자, 시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알잖아, 나 글 못 읽는 거.”

좀 전에 사정이 있어서 편지의 내용물을 확인해 본 적은 없다고 했었는데, 그 사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물론 글을 배운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문맹률이 얼마나 낮은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겠지. 오히려 한창 때는 남들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만큼 국어나 외국어 성적도 뛰어난 편이었다. 읽고 쓰고 듣고 말하고 하는 언어생활에 한 점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던 그런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아니, 그건 알지만……. 하지만 네 ‘결여’는 그 안경으로 해결된 거 아니었어? 그걸 쓰면 글자도 읽을 수 있다고 전에 그랬잖아…….”

결여(缺如). 작년 말, 계단에서 화려하게 굴러떨어져서 머리에 타박상을 입은 이후로 나에게도 그것이 찾아왔다. 이름 그대로 마땅히 있어야 할 – 또는 있었던 – 인간으로서의 기능이 사라져 버리는 것. 결여증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지만, 질병이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까운 재앙이다. 발병 원인이 일정한 것도 아니고, 증세(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또한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기에 사실 개개의 현상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는지조차 논란의 여지가 많아 아직 구체적인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버리니까 결여라는 간단한 작명법으로 정해진, 그런 알 수 없는 것에 붙잡힌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음……. 이제 와서 하는 소리지만 전부 다는 아냐. 아니지, 전부 다 읽지는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론 그것보다 더 심해. 사람 손으로 쓴 글씨는 거의 다 못 읽는다고 봐도 되니까. 컴퓨터로 깔끔하게 인쇄되어 나온 글자나 간신히 읽는 정도지. 뭐, 반대로 생각하면 그 정도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쓴 글이라면 인식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원래대로라면 안경이 필요한 시력이 아니지만, 결여가 발병한 이후로 나는 두껍고 묵직한 안경을 항상 쓰고 다니고 있다. 카메라 기능이 달린 렌즈가 내 시선을 분석해서, 내가 바라보고 있는 글자를 파악하고 전기 신호로 변환해서 안경다리에 부착된 전극을 통해 관자놀이로 쏘아 주는 방식을 통해, 카메라가 잡아낼 수 있는 글자나마 간신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구조다. 구체적으로 그게 대체 어떤 기술인지는 나도 잘은 모른다. 그저 21세기 과학은 굉장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지.

“그, 그렇구나……. 그런 건 줄은 몰랐어. 수업시간에도 별 얘기가 없었으니까…….”

“학교 선생님들은 일단 다 알고는 있을 거야. 그래서 올해부터 프린트 쓰거나 아예 컴퓨터로 프레젠테이션 하면서 수업하는 선생님이 꽤 늘었는데, 몰랐어?”

“아! 그렇구나, 그게 그래서…….”

“뭐 남들만큼 빨리 읽을 수가 없으니까 힘든 건 힘들지만 말야. 여전히 칠판 필기만 하는 수업은 필기 내용은 하나도 못 알아보겠고. 그래서 이렇게 주말엔 재활반 나오는 거잖냐.”

결여는 일반적인 장애와 달리,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 제도를 통해 일괄적으로 보조하기 힘든 증상이 특징이고,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결여증 환자들을 위한 특수학교가 따로 조직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도움도 없이 일반적인 수업만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학교처럼 결여증 환자가 발생한 곳에서는 재활반을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편성하여 수업보조 등의 활동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뭐, 결여에 걸린 사람이 모두 나처럼 공부하는 데 불편을 겪는 증상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업보조보다는 말 그대로 육체적인 재활치료 같은 걸 더 중점적으로 하는 곳도 있다는 것 같긴 하다만서도.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계속……. 난 그것도 모르고…….”

시진이 크게 좌절한 듯 고개를 푹 떨군 채 중얼거렸다. 모처럼 들인 수고가 물거품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음, 하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단 말이지. 나는 속으로 메롱 하는 효과음을 틀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그래서 이 편지 얘기를 계속하자면, 나 혼자서는 읽을 수가 없으니까 재활반 선생님한테 읽어 달라고 하려고.”

“어……. 어, 뭐? 잠깐, 뭐라고……?!!!!”

“며칠씩 계속 편지를 넣어두는 걸 보면, 누군지는 몰라도 급한 사정이 있거나 나한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거나 하는 거겠지. 그럼 그냥 안 읽고 넘어가기도 미안한 일이고, 내용은 확인을 해 봐야겠는데 아무한테나 막 맡기기도 그렇잖아? 재활반 선생님은 나 같은 결여증 환자에 대해서는 비밀유지 의무도 있고 하니까 믿을 수 있거든. 그러니까 오늘 재활반 가서 이 편지가 무슨 내용인지 좀 읽어 달라고 할 생각인데.”

좌절 분위기로 들어가며 후끈했던 열기가 잠시나마 식었던 시진의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위는 빨갛고 아래는 파란 것이 애국심이 투철한 소녀……. 이 이야기는 아까 했던가.

“아아아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남이 보낸 편지를 그렇게 막 다른 사람한테 까발리면 좀 그렇지 않니 보낸 사람의 마음이란 것도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다고 그걸 보낸 사람의 마음을 내가 안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고 그냥 일반론적으로 말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편지가 몰래 왔는데 그걸 뜯어서 남들 막 보여 주고 그러면 안 좋지 않을까 아아아아아 내가 참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말야!!!”

그리고 다시 아지랑이가 피어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뭐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말이지…….”

“그치? 그런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래도 방금 말했듯이 나 혼자선 어쩔 도리가 없는걸. 방금 너도 말했다시피 계속 안 읽고 있는 건 보낸 사람 속만 태우는 일이잖아? 그럼 이젠 믿을 만한 사람한테 부탁하는 수밖에.”

“윽…….”

자기가 했던 말에 되레 발목을 잡힌 꼴이 되자, 시진은 말문이 막혔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시뻘건 홍시가 되어 입을 뻐끔거릴 따름인 그녀를 보며, 나는 마음 속 어딘가가 좀 찔리는 걸 느끼면서도 가차 없이 추가타를 날렸다.

“정 그러면 네가 읽어 주든가.”

“으으……. 편지……. 어? 뭐라고?”

“어차피 지금 이 편지에 대해서는 나랑 너밖에 모르니까. 더 아는 사람이 생기는 게 좋지 않다는 네 말도 일리가 있고, 그럼 아예 네가 지금 읽어 주면 되겠네.”

“어? 아니, 그, 잠깐만, 난 그게, 그…….”

“자, 사흘 전부터 온 거니까 전부 해서 네 통. 여기.”

(아마도) 전혀 예상외였을 내 반응에 놀란 시진이 어버버거리는 사이, 나는 자연스럽게 그간 받았던 편지를 모두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손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아주 뜨끈뜨끈하다. 이런 걸 두고 생체 난로라고 하는 거로군.

“어, 윽……. 이…….”

“아, 맨 밑에 그 가로로 뜯겨 있는 게 제일 처음으로 온 거야. 그것부터 읽어 줘.”

“이, 이, 편지, 나, 그, 이게, 그게…….”

감정의 고조에 따라 편지를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이윽고 뭔가의 게이지가 쑥쑥 차올라서 화산마냥 펑 터지는 듯한 박자로,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진은 부끄러움 가득한 소녀스러운 비명소리와 함께, 손 안의 편지들을 북북 찢어 허공에 날려버리고선 그대로 교실을 뛰쳐나갔다.

“이 바보! 해삼 똥개! 밥통! 폭발해 버려!!!!!!!”

려어어어어어어어어어-------- 하는 울림이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주말이라 학교에 거의 아무도 없다는 게 다행이군. 교실 뒷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시진이 달려간 방향을 확인해 보았지만, 이미 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온갖 동아리에 양다리 세다리 문어다리를 걸치고 다닐 만한 실력자답다. 나는 다시 교실로 돌아와 방금 그녀가 갈기갈기 찢어버린 편지 조각들을 잘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내용을 공개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웠으면 마지막까지 제대로 치우고 가야지. 마음속에서 가벼운 훈계를 했다.

 

 

 

재활반이 사용하는 교실은 별관 맨 윗층 – 5층이다 – 에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별관 5층의 반절 정도는 모두 재활반이 사용하고 있다. 딱히 우리가 교내 단체들의 권력 관계에서 상위에 자리하고 있어서라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옛날에 비하면 출산율도 떨어지고 해서 해가 갈수록 학생 수가 급감하는 탓에 별관을 거의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수업을 하는 교실은 모두 본관 건물에서 소화하고 있고, 별관은 교실이 남아도는 나머지 온갖 동아리에게 제공하고도 빈 곳이 워낙 많아 아예 신규 동아리 설립을 권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흐름에서 재활반은 우리들의 재활치료라는 명목 하에 은근슬쩍 온갖 장비를 다 집어넣게 되기도 했고, 타 학생들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을 필요로 했던 것도 있고 해서 이런 압도적인 자리선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에 매번 계단으로 꾸역꾸역 올라갈 때마다 그냥 지하로 가지 그랬냐고 마음속으로 타박하고 있지만 말이지.

늦봄인 것 치고는 날씨가 꽤 춥긴 했지만, 그래도 한달음에 5층까지 걸어 올라왔더니 목덜미를 타고 땀이 약간 흘러내렸다. 운동부족……은 아니겠지. 손으로 땀을 닦아낸 뒤 잠시 숨을 고르고, 복도 모퉁이를 돌아 안쪽 끝에 있는 재활반 상담실을 향

하는 순간, 목덜미에 무언가 서늘한 것이 날아와 꽂혔다. 푹 하는 소리가 목 근육 안쪽에서 울려퍼진다. 깜짝 놀라는 바람에 순간 몸이 굳었지만, 그래도 같은 일을 몇 번 겪다 보니 나름 익숙해진 모양이다. 금방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뒤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왠지 오랜만에 뵈는 것 같네요.

내가 가려던 방향과 반대편 복도에서 후배 여학생 - 이름은 반우리라고 한다 ― 이 다가왔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장발이 걸음에 맞춰 리듬감 있게 흔들린다. 아까 여시진도 그랬지만, 이쪽도 휴일이라서인지 교복 대신 자줏빛 원피스에 구두 차림이다.

“어, 그래. 안녕. 나도 왠지 그런 것 같다. 지난주에 보고 못 봤었나?”

-월요일에 조회 끝나고 잠깐 봤었어요.

“그랬던가…….”

-그나저나 이제는 그다지 놀라지 않으시네요.

“아니, 놀라긴 하는데……. 이젠 나름 익숙해졌으니까 그런 것도 있고. 그보다 정말 어디 가서 그렇게 등 뒤에서 함부로 막 쏴대지 마라?”

-선배님한테 말고는 안 그래요.

“아, 그러냐…….”

안심해야 할지 타박을 해야 할지.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잠시 고민했다. 결국은 아무것도 안 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첨언하도록 하겠다. 1학년 반우리 양이 나한테는 함부로 쏴대지만 다른 데 가서는 그러지 않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손에 굳게 들려 있는 한 자루 권총이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총은 아니다. 그 총 – 같이 생긴 것 – 에서 발사되는 것은 몇 밀리네 뭐네 하는 그런 탄환이 아니라, 사람의 피부에 꽂혀서 작동하는 안테나다.

아니, 잘못 말한 게 아니다. 안테나다. 반우리가 들고 다니는 것은 안테나를 사람 피부에 효율적으로 팍팍 꽂을 수 있게 해 주는 발사기다. 지금 내 목덜미에도 그 5센티미터 정도 되는 안테나가 꽂혀 있다. 그럼 이 안테나는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 하면, 그게 이 반우리 양의 결여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생필품 같은 것이다.

반우리는 말을 하지 못한다.

지금 멀쩡히 대화했잖아,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녀가 한 말은 모조리 이 안테나를 통해서 전송되어 온- 말하자면 텔레파시 같은 것이고, 반우리 자신은 성대를 조금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결여는 ‘성대를 진동시켜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탓에 항상 이렇게 남과 대화하기 위해 안테나를 몇 개씩 상비하고 있다. 거기다 손으로는 안테나를 사람 몸에 꽂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안테나 부착용 권총 – 같이 생긴 것 – 을 함께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사용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총기류 소지가 안 되는 나라였기에 망정이지, 미국 같은 데였으면 꺼내는 순간 경찰한테 총 맞고 요단강 건너갔을지도 모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 달쯤 전에는 얘가 자기 몸에 송신용 안테나를 꽂는답시고 큰길 한복판에서 관자놀이에 총 대고 쏘려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바람에 참 큰 소란이 나기도 했고 그랬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역시 이렇게 막 함부로 총으로 쏴대는 건 하지 못하게 훈계라도 하는 게 나을까.

“우-리-야-, 아-궁-아-”

그런 식으로 또 시시콜콜한 것까지 생각이 멋대로 진행되려던 참에, 방금 반우리가 다가온 저쪽 복도에서 또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니, 날아왔다.

“잡-아-줘-.”

SF영화에서 보면 우주기지에 있는 사람들은 기지 내부를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무중력 상태에서 마냥 둥둥 떠다니는 것으로 묘사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는데, 지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인물 – 이름은 조나래라고 한다 ― 이 딱 그런 상태였다. 허공을 헤엄치는 듯이 앞으로 두 손을 쭉 내밀고 이쪽으로 둥둥 떠서 날아오는데, 레이스 달린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으니 정면에서 보면 꼭 사람 머리 달린 배드민턴 공이 날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얍!”

내가 왼손, 우리가 오른손을 잡아 정지시켰다. 날아오는 걸 멈췄으니 땅에 착지해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거 없고 그대로 공중에 둥둥 떠 있다.

“나이스 캐치!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나래 선배가 천진한 미소를 띤 채로 물었다. 선배라는 호칭에서 짐작하겠지만, 그냥 보면 반우리보다 키도 작고 훨씬 어려 보여서 중학생, 아니 요새는 초등학생도 엄청 빨리 크니까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 사람은 우리 중에 가장 선배인 3학년생이다. 잘 알고들 있겠지만 세상은 불공평한 거다.

“저희도 막 만나서 인사하던 참이에요. 그리고 저 아궁이 아닙니다.”

“뭐 어때-! 아궁이가 얼마나 좋은데-! 따끈따끈하고-!”

“아궁이가 아니어도 따끈한 건 넘쳐흐르는 세상이거든요……. 그리고 애초에 남의 이름 갖고 장난치지 말라는 소린데 따끈하건 후끈하건 그게 무슨 상관이래요.”

“흥, 메-롱-이-다-”

나래 선배는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더니 내 어깨를 밀어젖히고선 그 반동을 이용해 앞쪽으로 붕 떠갔다. 이쯤 하면 첨언하기도 민망하지만, 그녀의 결여는 ‘땅에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의 말로는 ‘중력이 부족한 나는 앉지 못했다’는 모양인데, 그게 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건 둘째치고, 개인적으로는 하늘도 맘대로 날아다니는 걸 보다 보면 그다지 페널티로 느껴지지 않아서 내심 부럽기도 하다. 물론 당사자의 입장은 또 다르겠지만, 아무튼 글을 읽고 싶어도 못 읽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하지만 낙운 선배님 이름이 좀 이상하긴 하죠.

“그치-? 아궁이가 훨씬 귀엽고 부르기 편하고 유익해.”

이번엔 반우리가 사람 가슴을 후비고, 어느 샌가 안테나를 부착한 나래 선배가 협공한다. 아니, 감낙운이란 이름이 뭐가 어때서…….

-소리내서 부르면 발음이 이상해지잖아요. 전 처음 들었을 때 ‘강나궁’이라는 줄 알고 활 종류인 줄 알았는걸요.

“아하하하! 활! 하하하하! 활이래! 아하하하하!”

좋댄다.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난 안 웃었지만), 우리는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목적지인 재활반 상담실로 향했다. 나와 우리, 나래 선배 세 명으로 구성된 재활반의 주말 일정은 우리를 담당하는 전문의 – 편의상 그냥 재활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 와 정기적인 상담을 마친 뒤, 그때그때의 일정에 따라 과목별 보충수업(주로 나만)을 받거나, 재활 내지는 치료를 위한 커리큘럼을 이수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늘-은- 뭐 새로 나온 게 있-으-려-나-”

나래 선배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상담실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려고 했지만, 문 손잡이를 잡은 손 말고는 몸이 고정된 부분이 아무 데도 없었기에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나래 선배의 몸이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꺄- 살려줘-”

우리가 잽싸게 나래 선배의 한쪽 다리를 붙잡아 정지시키고, 대신 내가 앞장서서 상담실의 문을 열었다. 결과적으로 나, 우리, 우리의 손에 붙들린 나래 선배 순으로 입장.

“안녕하세요-”

“…….”

“좋-은-아-침-”

직접 소리를 낼 수 없는 우리를 제외한 우리들의 인사소리가 상담실 안에 울렸다.

“그래, 어서들 오렴.”

그리고 언제나처럼 재활반 선생님 – 참고로 30대 중반 여성 – 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아, 안녕하세요…….”

어째서인지 여시진이 그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엥?”

“와- 새로운 동료가 나타났어-”

“…….”

예상치 못한 손님의 존재에 나는 그저 당황할 따름이었고, 나래 선배는 ‘오늘의 새로운 즐길거리는 이 아이구나’라는 듯한 말투의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으며, 반우리는 말없이(그야 말이 없을 수밖에 없지만) 시진과 선생님에게 안테나를 발사했다.

“어머, 우리는 갈수록 사격 실력이 좋아지는구나. 제대로 겨눈 것 같지도 않았는데 정확하게 맞추고.”

“아얏! 뭐, 뭐야 이게! 아파!”

어느 쪽이 누구의 반응인지는 굳이 서술하지 않겠다.

“아니 뭐……. 그래서 시진이 넌 왜 여기 와 있는 거야?”

열고 들어온 미닫이 문을 다시 닫으며 내가 질문을 던졌다. 좀 전에 우리 반 교실에서 헐레벌떡 뛰어나간 뒤로 어디로 갔나 했더니, 재활반에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왜냐니, 어, 으음……. 그게…….”

“이 아이가 자기도 결여가 생긴 것 같다고 좀 봐 달라고 얘기하던 참이었단다.”

시진이 얼른 대답을 못 하고 웅얼거리는 사이에 선생님이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없는 동안 일어난 일을 폭로했다.

“아아아아니 그게 저기 그, 난 그냥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그게 그……. 그랬습니다…….”

얼굴이 빨개져서 횡설수설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해졌다. 뭐 하는 건지.

“결여라니,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말도 없었잖아.”

지극히 상식적으로 이상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지적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당황하면서 횡설수설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아냐! 그게 그, 나도 갑자기 안 되는 게, 있는데, 그, 그 뭐냐……, 그래! 이거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시진이 잽싸게 주워든 것은 앉은 자리 바로 앞, 선생님 책상에 놓여 있던 시력검사용 눈가리개였다.

“어, 어제부터 갑자기 숟가락을 쓸 수가 없게 됐어! 한국인의 식습관을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심각한 결여라고!”

딴에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지 열심히 항변하고 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뭐라 할 말이 안 나온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애초에 그거 숟가락도 아니고.

“그래, 그래서 숟가락을 못 쓴다는 게 무슨 말인데? 지금은 멀쩡하게 들고 있는 거 아냐?”

“어, 그……. 뭐냐……. 이렇게?”

설명을 요구하자, 시진은 눈가리개를 손에 쥔 채로 엄지에 힘을 넣어 중간부터 구부려 버렸다.

“…….”

“와-! 대단해-! 차력사였구나-!”

-저걸 단숨에 구부리다니, 보통 악력이 아니시네요.

“어머, 그렇구나. 숟가락을 들면 구부러져 버린다니……. 밥 먹을 때 많이 불편하겠네.”

눈앞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사태에 내가 뭐라 할 말을 찾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순수하게 괴력에 감탄하고 박수를 치거나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금방 속아 넘어가거나 하고 있었다. 아니, 앞의 둘은 그렇다 치고 선생님은 왜 뜬금없이 속고 그러세요.

“……장난은 그만 하고, 진짜 용건은 뭐야?”

“요, 용건이라니, 지금 얘기했잖아. 나도 이렇게 되었고 하니까 재활반에 들어올 수 있나 싶어서…….”

“아니, 거짓말인 거 빤히 보이니까 그거 그만하고.”

“윽…….”

정곡을 찔린 시진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분위기가 좀 싸해지는 감이 없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이미 추궁하기로 한 건 어쩔 수 없다. 평소엔 알기 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대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내가 결여증 환자가 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예민한 것뿐이라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만약 결여를 가지고 함부로 장난치려 든 거라면 정말로 화를 내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하지만 나도, 그, 으으…….”

시진은 어째선지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붉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숙이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젠 슬슬 갑갑해져서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데,

목덜미에 따끔한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조용히 내 등 뒤에 다가와서 아까 꽂아두었던 안테나를 뽑아낸 것이다. 갑자기 무슨 짓인가 싶어서 우리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내 시선을 받아낼 뿐이었다.

“아프잖아. 갑자기 왜 그래?”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어차피 안테나가 없는 상태에서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우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다른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뭐?”

텔레파시 – 같은 것 – 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하- 그렇-구-나-, 이제 알았다-.”

옆에서 나래 선배가 손뼉을 짝 치더니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무엇에 대한 맞장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 아, 아냐! 아아아아아아니야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 솔직히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냐!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어떻게 하니! 꺄----악! 그만해! 넌 대체 뭐하는 애니! 어쩜 그렇게 낯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안테나가 없는 고로 알 수가 없지만, 그걸 듣는 시진의 반응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얼굴이 곧 폭발할 것 같은 폭탄 아이템처럼 빨갛게, 원래 얼굴 색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올라서 화끈거리고, 그런 얼굴을 해가지고서는 우리에게 곧 달려들 것 마냥 양팔을 허공에 휘휘 저으면서 뭐라뭐라 외치고 있다. 나래 선배와 선생님은 왠지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런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는 우리는 이쪽에 등지고 서 있기 때문에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것들 봐요, 무슨 얘기들을 하길래 그렇게…….”

“아- 안 돼, 이제는 여자들만 있는 시간이야-! 아궁이는 나-가-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좀 물어보려고 했더니, 나래 선배가 말허리를 자르며 날 상담실 밖으로 밀어냈다. 정확히는 공중에 뜬 나래 선배의 몸으론 날 밀어낼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양 주먹으로 머리를 투닥투닥 때려서 쫓아낸 거지만.

“뭐예요, 제대로 들려주지도 않고 막 쫓아내고.”

“몰-라-도-돼-! 여자애들도 흑심을 품을 때가 있는 거니까-!”

뜻 모를 소릴 하며 미닫이문을 쾅 닫는 나래 선배. 그 문 닫히는 소리 직후, 신나서 호들갑을 떠는 나래 선배의 환호성에 섞인 시진의 한 마디가 상담실을 넘어 복도에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아, 그래! 맞아! 그래도 부활동 하나 정도는 같이 하고 싶어지는 거잖아아아아아아!!!!”

거잖아--------------------------- 하고 메아리가 별관을 통째로 뒤흔들 듯한 기세로 퍼져나간다.

흑심.

부활동 하나 정도는 같이 하고 싶어지는 거다.

연이은 두 말이 머릿속에 들어와 엉키더니 머릿속에 사정없이 어퍼컷 같은 것을 날리고,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되었다. 이해했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내 얼굴에도 피가 몰려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래, 그렇구나.

 

이거 아까의 연장선이구나.

 

 

 

결국 상담실에는 다시 들어가지 못하고, 옆의 옆 교실에서 혼자 자습하거나 재활훈련 기기(<남극 펭귄과 악어 친구들의 한글 공부> 비디오 세트)를 사용해 보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원래대로라면 주치의 – 재활반 담당 선생님 – 와의 정기 상담을 먼저 끝마치도록 되어 있지만, 뭐 좀 나중으로 미룬다고 크게 탈나는 것도 아니고.

“어머, 여기 있었구나. 바로 옆 교실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없길래 집에 갔나 했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잠깐 상담 빼먹은 걸 생각했을 뿐인데 선생님이 교실 문을 덜컥 열고 들어왔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더니 진짜였군.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아직 오늘 상담을 안 받았으니까요.”

선생님은 좀 전과 같은 흐뭇해 보이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고, 나는 책상 위에 늘어두었던 책이나 잡동사니들을 한 쪽으로 밀어내 빈 공간을 만들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 양 팔을 올리고 턱을 괴더니, 이쪽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상담이라고 해도 결여 자체에 대해서는 이제 더 할 만한 이야기도 없지 않니? 현재 상황에서 국내에선 더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다는 말만 몇 번씩 반복하는 것도 지쳤고.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더 뭘 해 보고 싶다면야 이제 저쪽으로 건너가서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는 수밖에.”

“이제……, 라고 하시면, 확정된 건가요.”

“토론토에 있는 언어습득 연구소에서 받고 싶어하더라. 애초에 영어 사용자가 아니니까 거기 커리큘럼으로 얼마나 큰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고도 하더라만은. 한다면야 지푸라기는 붙잡아 봐야지?”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이겠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무겁게 느껴지는 말이다. 지푸라기라도 있는 게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결여다.

“그보다 이렇게 서둘러도 괜찮겠어? 전에도 말했지만,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시작해도 늦지 않아. 꼬맹이들 외국어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빨리 치료해야 좋은 병 같은 것도 아니니까. 근본적으로 나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데다, 솔직히 환자라기보단 실험대상인 셈이니까 이것저것 시험하다 보면 지금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여전히 턱을 괸 채, 가벼운 말투로 선생님이 말을 이어 나갔다. 말이야 가볍게 하지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건 잘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뢰하고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제가 거기 가서 열심히 하면 그만큼 저 같은 사람들이 나을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지는 거니까요…… 같은 폼잡는 소릴 하고 싶긴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까지는 말 못 하겠네요.”

해외의 연구시설에서 나와 같은 언어 인식 능력에 관련된 결여를 치료 - 치료라는 단어가 과연 적절한가 하는 논란은 항상 있지만 - 하기 위한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있으니, 피험자로서 협력해 보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올해 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지만, 고민한 끝에 이대로 결여를 안고 사는 불편함이 더 클 것이라 생각해 지원하기로 했었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뭐, 아직도 무르려면 얼마든지 무를 수 있으니까 실컷 고민해보렴. 어차피 쉽게 모을 수 있는 피험자가 아니니까 저쪽에서 그렇게 세게 나오지도 않을 거야.”

“네…….”

“그리고 의사로서가 아니라, 선생으로서 말하자면 역시 별로 권하고 싶지 않구나. 학교 문제도 있거니와 거기 커리큘럼이 아직 그렇게 믿을만한지 확신도 안 서고. 그야 후자는 너 같은 피험자가 꾸준히 늘어야 효과적인 개선안이 나오겠지만……. 거기다 사랑스런 제자를 내 손으로 피험자로 넘겨야 하나 생각하면 나도 켕기거든.”

“무슨 도살장 넘기는 것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내가 한숨을 푹 쉬면서 타박하자, 선생님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웃어넘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가 바깥 풍경을 내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의사로서도 선생으로서도 아니라, 그냥 십 몇 년 더 산 아줌마로서 말하자면……. 너희들이 좀 더 떠들썩하고 재미있게 청춘을 즐기는 걸 보고 싶구나.”

선생님이 내려다보는 학교 운동장에는 각종 체육계 동아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내일을 향해 정진하는 청춘드라마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다. 이런 거 정말 좋아하시는구나.

“우리랑 나래……. 그리고 오늘 온 저 아이, 시진이라고 했던가? 다들 네가 없어지면 많이 섭섭해 할 거야.”

선생님이 몸을 돌려 창가를 등진 채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교실 하나 건너 있는 상담실에서는 어느 새 친해진 모양인지, 여자들 셋이서 신나게 웃으며 담소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소리가 들리는 건 두 명이지만.

“저라고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딱히 앞으로 영영 못 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어머, 낙운이도 생각보다 꽤 성격이 쿨하구나. 멋있는데.”

“멋있기는요. 그냥 뭐…….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고,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아니, 비꼬는 거란다.”

“…….”

의외의 공격에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하자, 선생님은 멋지게 씨익 웃어 보이더니 이쪽으로 다가와 주머니에서 캔 커피를 두 개 꺼내 하나는 나에게 주고, 하나는 자신이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되게 슬림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데 이런 게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조용히 캔 커피를 따서 홀짝거리고 있자니, 방금 나눈 대화 탓인지 그간 겪었던 일들이 아련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뒤 병원에서 깨어났던 것, 한동안 입원해 있어야 한다고 말하던 의사의 명찰에 쓰인 글자를 하나도 읽을 수 없었던 것, 병원을 몇 군데씩 돌고 나서야 간신히 결여라는 판정을 받았던 것,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재활반 입반에 떨떠름해하면서 입학 후 처음으로 별관에 발을 들였던 것, 그 때까지 전교에 단 한 명이었던 결여증 환자가 천장 높이에서 떠다니는 꼬맹이란 걸 보고 당황했던 것, 그 꼬맹이가 한 학년 위라는 얘길 듣고 더욱 당황했던 것, 해가 바뀌고 재활반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미스테리어스한 분위기의 후배가 들어왔던 것, 그 후배의 사격연습용 표적처럼 취급당했던 것, 여자가 셋에 남자가 하나인 재활반에서 머슴이나 다름없는 역할에 분통 터뜨렸던 것.

그리고-

-여시진과 알고 지내게 된 것.

2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되기 전까지는, 유명하니까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는 정도였다. 체육대회에서도 가을 축제에서도 대활약. 1학년이면서도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붙임성이 좋아 학년을 막론하고 인기가 많고, 온갖 동아리나 학생회에서도 눈독 들이는 인재. 아마 저쪽에서는 감낙운이라는 인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그러던 어느 겨울날, 나는 어느 동아리 물품인지는 몰라도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계단을 한창 올라오고 있는 여시진과 마주쳤다. 그땐 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조용히 옆으로 비켜서서 그녀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낡은 종이상자의 옆구리가 터지면서 내용물이 계단에 쏟아지는 작은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시진은 서둘러 쏟아진 물건들을 주워담기 시작했지만, 워낙 상자에 들어 있던 것이 많았던지라 그리 금방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뻘쭘하기는 하지만 이럴 땐 도와주는 게 예의지, 하고 생각하며 나도 주위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고, 고맙습니다- 라는 그녀의 인사를 들으며 저 아래쪽에 떨어진 물건을 주우러 계단을 한 단 내려간 순간,

그만 고무공을 밟아 굴러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다시 처음부터 설명하지 않아도 문제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여시진과 아는 사이가 되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작년 말은 온갖 병원을 돌아다니느라 학교에 거의 나오지도 않았고, 사실상 말을 트게 된 것은 2학년이 되고 나서였지만 말이다. 내 결여에 대해 들은 시진은 몇 번이고 사과했지만, 애초에 누가 잘못한 일도 아닌지라 내가 특수 안경을 사용하면 크게 불편하지 않다고 약간 부풀린 말로 안심시켜서 그냥저냥 넘어갔다. 그 뒤로 그녀와 어느 정도 친해져서 종종 대화를 나누고, 접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여느 때와 변함없는 여시진이 나와 단 둘이 되면 평정을 잃게 되고, 가끔 둘이서 밑도 끝도 없이 투닥거리기도 하는 시간을 지나 오늘에 이른다. 무엇을 어떻게 투닥거렸는지 같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오늘 있었던 일을 통해 재주껏 짐작해 주기 바란다.

캔 커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목구멍을 따라 식도로 흘러내려간다. 달콤하구나. 달달한 맛을 혀 끝으로 느끼며 실없이 달콤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달콤한 맛. 청춘의 맛. 그런 맛인가. 뭐 이쯤 이야기했으니 다들 비슷한 것을 짐작했으리라 생각한다. 달콤한, 알콩하고 달콩한 뭐 그런 것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아니 아마도보다는 조금 높은 확률인가. 애초에 확률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아마도, 십중팔구, 거의, 대략, 틀림없이,

여시진은 나를-

“아-궁-아-!!”

교실 문이 벌컥 열리고 나래 선배가 날아들어왔다.  뒤따라서 우리가 들어오고, ……시진은 문 밖에 얌전히 서서 시선으로만 교실 안을 살피고 있다.

“아궁이 아니라니까요.”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를 뱉어 주는 자판기마냥 항상 하던 타박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세좋게 교실 안으로 들어온 건 좋은데 멈출 수가 없어서 공중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래 선배를 붙잡아 세운다.

“아궁이-! 너 딱 걸렸어-! 여자의 적-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에요.”

“뜬금없다니 괘씸한 소릴 하는구나-! 네가 네 죄를- 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야?”

나래 선배는 물구나무서기를 한 듯한 거꾸로 뜬 자세로 날 향해 삿대질을 아낌없이 베풀더니, 뭐가 걸렸는지 흠칫 하면서 자체검열에 들어갔다. 선배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우리가 검지를 세워 입술에 바싹 가져다 대고 있다. 참고로 아직 안테나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텔레파시로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뭐, 굳이 듣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뻔히 알 것 같긴 하지만 말이지. 슬쩍 복도 쪽을 내다보니, 귀끝까지 새빨갛게 물든 시진이 반쯤 닫힌 미닫이문 뒤에 숨어서 이쪽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까? 간만에 기분이 좋으니까 선생님이 한턱 낼게!”

따뜻한 미소로 제자들을 지켜보던 - 적당히 좋은 말로 묘사해 봤다 - 선생님이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나래 선배는 환호성을 지르며 공중제비를 몇 바퀴 돌았고, 우리도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반가운 소리라는 듯이 양팔을 번쩍 들어올려 만세 포즈를 취해 보였다.

“아니, 오늘 한 게 뭐가 있다고 이만 가볼까예요? 전 와서 펭귄친구들 비디오 본 거 말고는 딱히 한 일도 없는데?”

“그거 백날 봐 봤자 소용없는 거 뻔히 알잖니. 오늘은 그냥 뭐라도 먹으면서 즐겁게 보내자꾸나. 아니면 네가 비밀로 해달라던 거 다 말해 버린다?”

“예?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선생님은 웃는 낯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내 항의를 받아넘겼다. 내가 해외 연구시설에 지원했다는 사실은 아직 다른 학생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괜히 다 까발려 놓았다가 전부 없었던 일이 되기라도 하면 입장이 난처해질 따름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감낙운 출국 D-며칠’ 하는 식으로 묘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한테도 비밀로 해 달라고 말을 해 두었던 것인데, 이렇게 협박용으로 써먹을 줄이야. 신뢰도가 몇 포인트씩 깎여나간다.

“와-! 비-밀-이-래-! 선생님, 말해줘요-! 아궁이의 비밀-! 아궁이는 사실 구들장이 아니라 서까래에 충성하는 적의 첩자였다-!”

나래 선배가 비밀이란 단어에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공중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표현법은 그렇다치고, 이런 재미있어 보이는 화제가 나오면 정말 신나하는 사람이다.

“후후, 농담이란다. 비밀 같은 건 없어요.”

“에이-”

“그리고 그런 얘기를 들었어도 선생님은 환자의 비밀은 엄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단다. 그래서 말해줄 수가 없구나- 낙운이의 비-밀-”

“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있나 보구나- 뭔데요- 나도 알려줘요-”

“후후, 안 돼요.”

“에이-”

선생님은 그렇게 나래 선배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교실을 나섰고, 우리와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솔직히 방금 느낀 불안감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이 진짜로 그 얘기를 아무렇게나 흘릴 만한 사람은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설마.








그리고 닷새쯤 지났을까.

시진이 느닷없이 내 책상을 내리치면서 외쳤다.

“캐나다 간다는 게 사실이야?!”

쉬는 시간 끝나기 직전, 복도에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자연스럽게 반 아이들 전체의 시선이 몰리고 말았다. 그래, 이런 게 싫었던 건데. 이것 참.

“……누가 그래?”

“나래 언니가!”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나래 선배와 우리는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꽤 전부터 심상찮은 낌새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비밀 운운한 것이 결정타였는지, 두 사람은 작당을 하고서 선생님의 입을 열기 위한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는 나래 선배의 애교와 우리가 만들어 온 생크림 케이크 앞에서 비밀 엄수에 대한 의지 같은 건 산산조각이 났다나 뭐라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거기다 선생님은 ‘사실 법적으로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건 검진기록이나 뭐 그런 것들이지 네가 외국에 나가려고 생각중이라는 정보가 아니니까 난 법적으론 깔끔해! 무죄야!’ 라면서 사람 속을 긁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건 뭐 나중의 이야기이고.

“뭐…….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다 들었다면야 별 수 없지. 다음달 초에 출국이야.”

“그게 뭐야! 왜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러니까 나중에 얘기하려고 했다니까. 아직 얘기하긴 좀 이르다고 생각한 것 뿐이야.”

“그게 아니잖아! 그게, 그, 왜 하필, 왜, 왜……. 그래! 학교는?! 학교는 어떻게 할 건데? 이대로 졸업도 안 하고 갈 거야? 부모님은 뭐라고 안 하셔?!”

“학교는 휴학이야. ……다시 복학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정 안 되면 검정고시도 있으니까. 부모님이랑도 그렇게 얘기 끝냈어.”

“윽……!! 그게,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시진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언성을 높였다.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책상을 짚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니, 그럼 뭔데?”

사실 무슨 얘기인지 뻔히 알고 있지만, 일부러 의문문을 고집한다. 

“너, 너어……. 그걸,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이제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시진이 다시 묻는다.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눈물 방울을 보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꺾일 것 같다. 충동적으로 이쪽에서 말해버리고 싶어진다. 모를 리가 있나. 지금껏 뻔히 다 봐 왔는데. 지금도, 이렇게 뻔한 짓을 하고 있는데.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런 얘기가 아니면 대체 뭔데?”

그리고 또다시, 일부러 의문문. 

“……너, 너……!!!”

가능하면 이 정도쯤 되어서는, 직접 말해 주는 걸 듣고 싶었다.

“알았어! 이제 됐어! 멍청이! 말미잘! 똥강아지! 밥통! 폭발해 버려!!”

그리고 시진은 마지막까지 본론을 밝히지 못하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눈물 젖은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퍼지고, 나는 반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파묻혀 이루 말할 수 없는 찝찝함에 사로잡혔다.




이후 한 달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서류 문제도 있었고, 짐을 챙기는 것만도 상당한 수고를 필요로 했다. 선생님을 비롯한 재활반 멤버가 도와 주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고생했을 것이다.

시진과는 그 뒤로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워낙 바빠서 수업을 자주 빼먹은 것도 있었고, 어쩌다 마주쳐도 어색하게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그런 찝찝한 한 달 동안, 사물함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고, 숟가락을 사용할 수 없는 결여에 걸려 식생활에 큰 곤란을 겪는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이걸 ‘난다’고 표현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떠 있는 거긴 한데 말야.

“아궁아-! 다시 연료 분사-!!”

나래 선배의 활기찬 구호에 맞추어, 나는 아래 방향으로 손에 든 추진제 통 - 소화기다 - 를 아래로 겨누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소화용 분말이 거세게 뿜어져 나오고, 그 반동으로 나와 나를 뒤에서 껴안듯이 붙들고 있는 나래 선배의 몸이 다시 하늘로 솟아올랐다.

“아하하하하하! 더, 더 올라가자-!!”

“이제 이거 거의 다 비었어요! 이러다 추락하는 거 아녜요?”

“하하하하하, 아냐! 괜찮아-! 여러 번 해 봤으니까 안심해-!!”

‘땅에 닿을 수 없는’ 결여를 가진 나래 선배이기에 가능한 괴상한 비행. 단순히 작용 반작용의 법칙만으로 이토록 자유롭게 움직인다. 평소에도 압축공기 캔을 분사해서 묘하게 날아다니는 걸 자주 보긴 했지만, 소화기 정도의 출력이 되면 사람 하나를 매달고도 날 수 있게 되는구나. 점점 더 나래 선배의 결여가 페널티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

“와아-! 저거 봐, 학이 날아간다-! 이 근처에 학-이- 있었구-나-!”

멀찍이서 하얗고 큰 새가 날아가는 것이 보이자 나래 선배가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지른다. 처음엔 한 마리만 눈에 들어왔지만, 이윽고 어디선가 두 마리, 세 마리 하는 식으로 비슷하게 생긴 새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떼지어 비행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새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어-! 왠지 득 본 것 같아-! 아궁아, 경치 좋지-?”

머리 위에서 나래 선배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출국일 겸 마지막 등교일, 교실에서 인사를 마치고 나온 나를 나래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별 선물을 주겠다고 하더니 느닷없이 복도에 놓여 있던 소화기를 건네기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이렇게 하늘을 날며 학교 주변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오히려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예-! 좋네요! 아주 좋은 선물이에요-!”

마찬가지로 소리쳐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머리 위라 보이진 않지만 나래 선배가 키득거리며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소화기의 내용물도 소진되어, 우리는 천천히 활강하며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궁아-!”

조금씩 건물이 커져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나래 선배가 나지막히 말을 걸었다.

“예?”

“결국 시진이랑은 화해 안 한 거야-?”

신나게 잘 날아다니고 분위기 좋게 마무리하다가 뜬금없이 나온 발언에 당황해 하마터면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나래 선배가 잘 붙잡아 주어서 시멘트 바닥에 으깨진 시체가 되는 것만은 면했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릴…….”

“갑자기라니-. 이 누나가 한 달 동안 너희들 때문에 얼마나 속썩였는지 아니-. 지켜보기만 해도 속이 바싹바싹해서 큰일-날- 뻔- 했는걸-.”

뭐, 사실 그렇긴 하다. 아까 교실에서 인사할 때도 여시진은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시진이가 재활반에 찾아오기도 전부터 다 알고 있었지-? 나랑 우리는 그 때 시진이를 처음 봤으니까 그 전은 잘 모르지만-.”

“…….”

“왜 끝까지 모르는 척 했어-? 시진이가 그 날 수업도 빼먹고 펑펑 우는 걸 달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래 선배가 특유의 해맑은 목소리로, 하지만 꽤나 엄숙하게 타박했다. 생긴 것도 평소에 하는 짓도 어린애 같으면서 이럴 때만 선배의 위엄이 팍팍 살다니, 반칙이다.

“뭐랄까……. 근본적인 이유를 따지자면, 역시 곧 떠날 거니까……겠죠.”

“에-이- 그게 뭐니- 맘에도 없는 소릴-.”

“아니, 맘에도 없는 건 아닌데요…….”

“그건 시진이랑 그렇고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될 지 몰라도 끝까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척 한 이유는 못 된다, 고 우리가 그랬어-.”

“윽…….”

“그래서-? 2차시 드립니다-. 대답은 뭐야-? 알량한 자존심-? 내숭-? 아, 아니면 다른 좋아하는 여자가 있나-?”

“그, 그런 건 아니에요…….”

“뭐니-, 그럼 그냥 확 남자답게 나가지 그랬어-.”

남자답게, 에 강세를 넣더니 나래 선배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남자답게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실토했다.

“……시진이가, 직접 말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에요.”

그렇다. 여시진은 그렇게 빤히 보이는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도, 정작 본론을 자기 입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했을 때에도, 그렇게 화를 내면서까지도 결국 한 마디도 진심을 꺼내 놓지 않았다.

“뭐야 그게- 결국 알량한 자-존-심- 이었냐- 실-망-!”

“그게 아니에요. 그냥……. 어차피 하지 못할 말이라면 굳이 끄집어 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어차피 자기가 스스로 묻어 버릴 말이라면, 내가 그걸 파헤쳐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보면 여시진은 자기 감정을 털어놓기보다, 그대로 마음에 묻어버리는 걸 선택한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묻혀버린 감정은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 그걸 애써 꺼내놓는들 어차피 나는 곧 떠날 수밖에 없고, 대상을 잃은 감정은 그 주인을 괴롭게 할 따름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마음속에 묻히고 끝날 감정이라면, 어차피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해지는 편이 훨씬 - 유익하다.

“우-와- 짜-증-나- 이 누나, 되게 짜증 돋구는 얘기를 들-었-어-”

“…….”

“후-. 아-무-튼-! 시진이라면 까-짓-거 얼마든지 기다리겠다고 할 것 같지만-! 그 본인이 제대로 고백을 안 하고 있으니 굳-이- 건드리지 않-겠-다-! 잘- 알- 았- 어-!”

“……네, 뭐, 이해해 주셔서 고맙네요.”

“흥-이-다-!”

나래 선배는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콧방귀를 뀌며 하강하는 속도를 높였고, 이윽고 우리는 인간 비행 쇼를 구경하느라 사람이 잔뜩 모여 있는 교문 앞에 나란히 착지했다.

‘그 동안 고마웠XX다. 보고 싶을 거X요.’

그리고 착지한 내 눈앞에는, 항상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을 한 우리가 양 손으로 작은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컴퓨터로 작업해서 출력한 인쇄물이 아니라, 붓과 먹으로 직접 공들여 반듯하게 쓴 글씨다. 그 탓에 안경이 미처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몇 글자는 뭉개져서 읽을 수가 없었지만, 얼마나 열심히 썼는지 우리의 열 손가락이 먹으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어, 어어……. 나도, 보고 싶을 거야.”

손으로 쓴 글씨를 읽은 게 얼마만일까. 물질적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차고 넘칠 감동적인 선물이다.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려고 한다. 뭐라고 대답해야 감사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순간, 우리가 한 발짝 더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그대로 양 팔을 둘러 나를 껴안았다. 오오, 하는 군중들의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덧붙이자면 지금은 안테나가 꽂혀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갑작스레 포옹을 해 왔는지 알 도리가 없다. 나는 마냥 당황해서 어리둥절하고 있었지만, 이내 우리는 내 등 뒤에 두른 손으로 내 등을 조금 센 정도로 탁탁 두드렸다. 그제서야 나도 이 포옹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이건 그거로군, 가족들끼리나 친한 친구 사이에 인사로 하는 그런 포옹이다. 여자애한테 이런 인사를 받아 보는 건 또 처음이네. 

어색하게나마 나도 우리를 가볍게 포옹해 주려고 팔을 드는데, 그 순간 우리가 번개같이 내 팔을 쳐내더니(상처받았다), 잽싸게 허리춤에서 항상 갖고 다니는 그 안테나 발사기 - 그냥 권총이라고 하자 - 를 꺼내 내 등 뒤, 비스듬하게 오른쪽을 향해 발사했다.

“아얏! 아파! 아야야야야야!”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이 되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양 미간에 안테나가 꽂혀서 옛날 어린이 프로에 나오는 텔레비전 인간과도 같은 생김새가 된 여시진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주저앉아 있었다. 

“잡-았-다-! 기껏 만회할 기회를 주는데 멋대로 안테나 빼고 도망치기야-?”

옆에 서 있던 나래 선배가 잽싸게 다가가 시진을 붙잡는다. 우리도 내 품에서 벗어나 시진에게 다가가서는, 나래 선배와 협동해서 시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완전히 붙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나래 선배가 킥킥 웃어 보이면서 자기 목덜미를 가리켰다. 그곳에 길쭉하게 박혀 있는 것은, 반우리 양이 평소에 마구 쏴대는 일반 안테나와는 조금 규격이 다른 송신용 안테나였다. 보통은 우리만 사용하는 송신용 안테나가 나래 선배에게 가 있다는 건……. 다시 말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렇구나, 이게 다 나래 선배랑 우리가 꾸민 함정이었구나! 

“그-러-하-다-! 너의- 자백은- 나님이- 낱-낱-이- 송신해 주-었-지-!”

나래 선배가 하 하 하 하, 하고 한 음절씩 끊는 악당틱한 웃음을 선보이며 말했다.

“막판에- 창피하다고- 시진이가- 안-테-나- 뽑아 버리고- 숨어 버려서- 위기였지만-! 우리 우리가- 긴-급- 질투 유발 작전으로- 목표물을 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 말- 씀-!”

하 하 하 하, 한 음절씩 끊는 악당틱한 웃음이 계속된다. 그렇구나, 그래서 갑자기 껴안은 거구나. 말을 듣고 나서 보니, 반우리 양은 어디선가 알콜 소독제를 꺼내 들고 온몸 여기저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일부러 상처받으라고 그러는 건가.

“자- 그런- 고로- 우리의 활약은- 여기- 까지다-.”

나래 선배가 시진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등을 떠밀었다.

“꺅!”

“엇!”

넘어질 뻔한 시진을 반사적으로 붙든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양 손을 마주 잡는 꼴이 되자 시진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진다.

“전진-!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전진-! 고- 고- 고- ! 말해 버려-! 말하면 상대는 거꾸-러-진-다-!”

나래 선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응원이랍시고 하는 거겠지만, 듣는 당사자인 시진은 더욱 긴장해서 손을 부들부들 떨게 되었고,

“아, 으, 저기, 그게, 그, 나, 아…….”

항상 그랬듯이 제대로 의미가 담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자 뒤쪽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우리가, 아무 말 없이 - 그야 당연하지만 - 두 손을 머리 위로 들더니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짝 하고 리듬감 있게 울려퍼지는 소리.

그게 몇 번 반복되자,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손을 모아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은 공연장 관객석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고, 그 한가운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셈인 나와 시진의 얼굴은 누가 더 훌륭한 붉은빛인지 경쟁하는 것마냥 달아올랐다.

“아, 알았어! 말할게! 말한다고!”

시진이 두 눈을 꼭 감은 채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뚝 끊기는 손뼉 소리.

시진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자기 양 손으론 내 양 손을 붙잡은 채로 심호흡을 하고 나서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 기다릴게!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그냥 빨리 다녀와! 졸업해서도! 대학 가서도! 기다릴 수 있으니까! 알았지!!”

오오, 하는 환호성이 주변에서 터져나왔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고, 휘파람을 삑삑 부는 사람도 있다. 다들 자기 방식대로, 지금 온 힘을 다해 용기를 낸 그녀를 축하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직이다. 나래 선배와 우리가 만들어준 기회는, 이걸로 끝내선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가장 중요한 한 마디를 아직 듣지 못했다.

“왜에-?”

잔인하지만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 나래 선배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큰 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씩 웃는 눈이 마주친다. 귀여운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은근히 능글맞은 점도 있고 말이지.

“왜, 왜냐니……. 왜긴, 그, 저, 그야, 그, 당연히, 그…….”

시진이 다시 당황해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방금도 굉장한 소리를 했는데, 그것보다도 굉장한 소리를 요구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야, 그, 나, 내가, 내가, 너를-”

어느새 다시 시작된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힘입어, 시진이 힘들여 입을 떼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

그리고, 내 발밑이 폭발했다.

니까, 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폭발이 일어난 시점은 좋-에서 -하- 사이의 어딘가다. 폭발에 휘말려 공중에 붕 떠서 날아가는 동안, 나는 멍해진 머리로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억!”

“꺄악!”

손을 맞잡고 있던 탓에 시진도 나와 함께 허공을 날았고, 먼저 땅에 떨어진 나를 시진이 깔아뭉개는 듯한 자세로 추락했다.

복부를 얻어맞은 격통을 참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모여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흩어지고 있는 중이었고, 한쪽에선 폭발의 충격파로 멀리 날려가버린 나래 선배가 반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컥, 쿨럭, 헉……! 이게 대체 무슨……!”

기침을 내뱉으며 간신히 입을 떼고 있는데, 옆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너……. 진짜였구나.”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거기엔 재활반 선생님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서 있었다. 그 시선은 내 옆에 주저앉아 있는 시진에게 향해 있다.

“예? 진짜라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방금 쾅 하고 터진 거 말야. 그거, 결여란다.”

2 더하기 2는 4죠? 2 곱하기 2도 4랍니다. 어머 신기해라, 하는 듯한 말투로 선생님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예? 무슨 소리에요? 이런 것도 결여로 쳐요? 아니, 애초에 누가 뭘 어쨌는데요?”

이해가 가지 않아 따지고 드는 나에게, 선생님은 항상 짓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시진에게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니?”

나도 그녀도 느닷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했지만, 시진은 얼굴을 다시 붉히고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저기……. 좋아한-----.”

‘-아-’와 ‘-한-’의 사이 어딘가에서 다시 폭발. 이번엔 아무 것도 붙잡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공중에 날아가는 건 나 혼자였다. 

“이걸로 확실해졌지? 재작년인가 학술회의 가서 본 적이 있단다. 이건 ‘연애감정을 솔직히 전달할 수 없는’ 결여야.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낯부끄러운 말을 하면, 그 말이 입으로 나옴과 동시에 상대의 발밑이 이렇게 펑! 하는 거지. ”

어깨부터 떨어져서 격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내려다보며 선생님이 담담하게 서술했다. 결여란 게 내 경우처럼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어떤 기능을 앗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래 선배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사람에 따라서는 특이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게도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것까지 생기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이미 결여가 어쩌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흉기 아닌가!

“흉기라니, 소녀심이 부족하구나. 이것도 다 애정표현인걸.”

“소녀도 아닌데 소녀심 같은 게 있겠어요? 아주 두세 번만 더 표현하면 사람 하나 잡겠네요!”

예상도 못 했던 목숨의 위기가 닥쳐왔음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선생님은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어깨만 으쓱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편의상 너나 우리랑 같은 언어인식 계통으로 분류되어 있는 결여긴 한데……. 보다시피 사실 많이 다르지. 감정을 물리력으로 바꾼다는 것부터가 굉장히 희소한 거니까. 있을 리 없는 물리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에선 오히려 나래랑 비슷하다고 봐야 맞으려나? 하지만 또 나래랑은 다르게 결여가 나타날 조건이 성립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또 마냥 그렇게 단정지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고. ……어머나, 나 좀 봐. 혼자 신나서 떠들고 있었네, 후후후.”

그러더니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머, 미스터 존슨. 네, 낙운 학생이요. 이제 공항 가려던 참이긴 한데~ 근데에~ 방금 우리 학생 한 명이~ 결여인 걸 발견을 했어요~ 네~ 전에 우리 일본에서 학술회의 했을 때 나왔던 그거, 그 뭐냐~ 츤…… 뭐더라? 아, 다른 거예요? 아무튼 그거 비슷한. 네, 대충 그래요. 이런 증상은 세계적으로 희소한 거니까~ 여기저기서 돈 좀 될까 싶어하는 스폰서도 엄청 붙고 그러겠죠~ 네~ 예? 같이 보내주는 방향으로 하면 어떻겠냐고요? 어머, 안 되죠~ 그쪽에서 비슷한 증세 있는 사람들 다 군사시설에서 실험에 동원되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 착한 아이를 무턱대고 그리로 보냈다가 무슨 꼴을 볼 줄 알고~ 예? 사실무근이라고요? 어머, 날더러 하얗고 코 큰 사람들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네? 아, 미스터 존슨, 흑인이시지 참~ 그럼 하얗고 코 큰 사람들 밑에서 고생하지 말고 이쪽으로 건너와요~ 우리도 이제 정부에다 막 찔러서 본격적으로 연구시설 유치해서 여기서 치료 시작할 거예요. 낙운 학생이요? 여기 연구시설이 생길 건데 뭐하러 힘들게 거기까지 보내요? 호호호! 네, 알았어요. 그럼 미스터 존슨도 몸조심하시구요.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친 선생님은 쭈그려 앉아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만면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자, 시진이 덕분에 다 잘 됐구나! 낙운이는 이제 해외로 안 가도 되고, 시진이는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이 선생님은 연구시설 하나 꿀꺽이예요!”

그러더니 나와 시진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는 만세 삼창을 실시한다. 놀랍기도 하지. 오락가락한 머리로 옆에 선 시진을 바라보자, 마찬가지로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 눈이 이쪽을 바라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원. 그렇게 중얼거리자, 시진이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그래도 이렇게 된 게 더 좋아.






……네, 그렇습니다. 폭발했습니다.


 

 

 







어찌어찌 해서 하나 만들었는데요 원래 쓰려던 목적대로는 쓸 수가 없게 되어서 이게 망한 건 망한 건데 이대로 묻어 버리기는 왠지 아쉽다고 할까 아깝다고 할까 그래서 한번 올려나 보자 이런 생각에 올려 봤습니다... 거기 그쯤에 깡통 굴러다니는 거 주워서 던져 주시고 그러면 고맙겠습니다

월요일 오는 거 싫네요....

Writer

LgunX

LgunX

엘건엑스라고 읽습니다. 엘군스, 엘건스, 엘군엑스 아닙니다.

comment (2)

xester
xester 12.04.17. 08:20
멋지네요! 이런 기발한 유쾌함이라니! 아직 프로가 아니시라면 어서 프로로 가버리세욧! (...다만 제목은 좀...)
LgunX
LgunX 작성자 xester 12.04.17. 11:33
제목 짓는 센스 같은 건 제가 어떻게 하기 어려운 부분이더라고요……
권한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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