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카운터 신드롬-[2. Encounter 나-이시호는 한탄하면서도 손을 뻗는다.](3)
Write- 14:04 May 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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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TTERS
- By Leth
협업 참여 동의 |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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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앞에 그런 걸 붙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제일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란 말이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코피가 터지는 바람에 별명이 ‘코피 분수’가 됐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다니!
“코피? 어이. 시호. 이 애 그걸 알고 있는 거냐?”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애 저랑 비슷한 체질이라고요.”
“자, 잠깐! 왜 곧바로 말해버리는 검까!”
하임이 항의했다. 아무래도 밝힐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언제나 상처투성이로군. 여기 단골이 될 만도 하지.”
리첼 선생님 말에 따르면 하임은 무슨 일만 나면 그곳에 있었으며 계속 상황에 관여하는 바람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나보다.
“복도에서 무릎이 까진 채로 걸어 다니는 걸 강제로 끌고 오길 잘했어.”
리첼 선생님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는 게 느껴졌다.
“이건 내 추측인데. 네 목을 그렇게 만든 것도 얘냐?”
“에? 그게 정말임까?! 제 탓인 검까?!”
여태까지 내가 누워있던 이유를 몰랐던 하임이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왔다.
“그래. 네 멋진 돌려차기 덕에 한동안 고생 좀 했다.”
그동안 느꼈던 아픔을 생각하며 콕 집어 얘기했다.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바로 내 시야가 닿는 곳으로 온 하임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함다! 제가 심했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사과였다. 이 얼마나 올곧은 성격인가. 난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부정적인 감정이 솟아올랐다.
“너는 정말 착해빠졌구나. 내가 맞을 각오로 했던 말은 잊어버린 거냐?”
“…죄송함다. 그 말은 잊어버리기로 했슴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하임이 고개를 들었다. 창을 등진 그 표정은 더욱 어둡고 슬퍼보였다.
“그러냐. 그럼 됐어. 이 이상 말해봤자 듣지도 않을 테고 또 맞기는 싫으니까.”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계속 느껴왔던 감각을 무시하는 것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조건 반사를 일으키려는 본능을 억누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한동안 내가 그랬듯이.
더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눈을 감았지만 하임의 잔상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잔상은 색이 없어지더니 형체를 바꾸어 한 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깨달음’을 얻은 소년은 절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평범한 사람’이 됐다.
그것은 옳지는 않지만, 바르지는 않지만 평범한 이 세계 어디에나 있는 그런 사람의 길이었다. 못 맡은 척하고, 못 본 척하고, 못 들은 척한다. 그것만으로도 소년의 삶은 훨씬 편해졌다. 오히려 친구가 늘었고 하루하루가 충실해졌다.
그래서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기 싫다. 소년과 겹치는 그 모습을, 그 행동을, 그 마음을 부정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앞으로 만나면 무시해줘.”
그러니까 ‘소년이었던’ 나는 하임을 무시하기로 했다.
“나도 그럴 테니까.”
[우득!]
“끄악!”
갑자기 뒷목에 격통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손이 목뒤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목만 아니라 성격도 삐뚤어져 있었으면 진작 얘기를 해야지. 바로 교정해줬을 텐데.”
“선생님! 저는! 아악!”
“목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나? 미안하다. 이 녀석 나쁜 녀석 아니야. 오히려 좋은 녀석이야. 자기 배에 칼을 찔러 넣은 녀석을 용서하고 친구로 삼을 정도라고.”
“?!”
하임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날 쳐다봤다. 상당히 놀란 모양인데 결코 평범하지 않은 복합적인 사정에 의한 것이지 그냥 용서한 게 아니다.
“그건 특수한 사정이 있었잖아요! 우현이는 아무 잘못 없다고요!”
“정말 그 책장이 말 대로네. 난 그 녀석 싫어하지만 하는 말이 틀린 게 없어. 너한테는 자각이라는 게 없는 거냐?”
‘책장이’란 리첼 선생님이 요한을 칭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자각이 없다니. 왜 내 주변사람들은 다 똑같은 소리만 하는 건가. 대체 내가 뭘 모르는지 알고 싶다.
“너 말이야. 여자애한테 그런 말은 심하다 생각하지 않냐? 상처 입는다고.”
“저기, 전 괜찮슴다. 그리고 선배가 그러길 원하시면 그러겠슴다. 가보겠슴다!”
“어? 잠깐! 야!”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한 하임이 양호실에서 도망쳤다. 리첼 선생님은 하임이 나간 문을 보고 ‘으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
“당장 일어나. 이 녀석아!”
[짜악!]
“흐갸갸갹!”
내 등짝을 손바닥으로 강타한 리첼 선생님은 그 어느 때보다 험악한 얼굴로 날 몰아붙였다.
“너 쟤랑 화해해.”
“네?!”
“이 일 때문에 저 애가 여기 안 오게 된다면 네 콩팥을 적출시켜버릴 테니까 그리 알아!”
범죄수준의 협박을 한 리첼 선생님은 비틀거리는 나를 밀어 양호실 밖으로 내쫓았다. 쾅 소리 나게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본 나는 이미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문득 어제 요한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 누구든지 소녀를 싫어하게 돼버린다. 하지만 소녀는 누구든지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해도 좋다. 유하임의 비전에서 세계는 이미 완성되어있는 낙원이나 다름없다.-
분명 소녀에게 미움을 받는 건 익숙한 일일 것이다. 주변에게 부정당하고 설움을 쌓으면서도 소녀는 자신의 일을 해왔을 것이다.
“그래왔으면서 나한테 부정당했다고 그러지 말라고.” 심술궂은 말이 튀어나왔다.
“왜 나 따위의 말에 그렇게까지 반응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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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호. 구제할 길이 없는 바보란 건 알고 있었다만 너는 진짜 멍청이다! 얼간이다! 아메바도 너보다는 낫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 교실로 돌아온 나는 이 상황을 요한에게 상담했다. 요한에게서 돌아온 것은 여느 때보다 강도가 높은 매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