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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요한과 말라깽이 노스페라투] NIGHT 1.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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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20 Nov 0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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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타니아
 

 

 

 

 

NIGHT 1.

 

 

 

 

요한은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창을 통해 들어온 푸르스름한 달빛이 얇은 천처럼 바닥에 드리워져 있었다. 창문 밖에는 커다란 나무의 그림자가 사르륵 사르륵 흔들렸다. 조용했다.

 

침대에서 사뿐히 내려온 요한은 다시 한 번 방 안을 찬찬히 둘러봤다. 차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수록 방 구석구석의 어두운 부분까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방 안을 종종걸음으로 쏘다니던 그는 곧 침대 앞에 엎드려 그 밑까지 확인했다. 침대 밑에 고개를 내밀자 둔탁한 고동소리가 들렸고 고루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깊은 어둠이 요한의 눈을 감싸며 꿈틀거렸다. 어슴푸레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험 삼아 요한은 손을 내밀어 침대 밑을 휘휘 저어보았다. 손에 잡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요한은 유령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요한의 윤기 나는 앞머리를 흔들었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연필이 돌연 데구르르 굴러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야 요한은 창문이 열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람이 모든 걸 흔들어놓은 것이다. 소리 없이 잔잔하고 서늘한 바람이.

 

커튼을 접어두어서 얼른 눈치 채지 못했나 보다. 열린 창문 너머에는 잎이 다 진 나무 한 그루와 구름 낀 밤하늘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담겨있었다.

 

요한은 한동안 방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그리곤 홀린 듯이 창문으로 다가섰다.

고개를 내밀고 좌우를 살핀다. 밖은 안뜰이었다. 주위는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너머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고 희미해서 귀를 바짝 기울여야 겨우 들리는 소리였다.

 

요한의 집은 산과 강, 그리고 도로가 함께 만나는 그 중심에 지어져있었다. 그래서 각 방의 창문마다 보이는 풍경이 달랐는데, 집의 뒤쪽에는 숲이 있었고, 앞쪽에는 삼거리로 이어지는 경사진 도로가 있었고, 요한의 방 창문이 난 옆쪽에는 강이 흘렀다. 강은 꽤 멀리 있는데다가 집 주위의 나무들에 가려서 요한의 방에서는 사실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물소리만은 밤이 되고 세상이 조용해지면 살금살금 들려오는 것이다. 요한은 항상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요한은 잠시 밖을 둘러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고운 맨발이 창틀의 뾰족한 부분에 눌려 아팠다.

 

안뜰에는 부순 벽돌을 이어 붙여서 만든 조그만 화단이 있었다. 요한은 지난봄에 여러 가지 먹을 수 있는 채소와 과일을 그 화단에 심었지만 아무 것도 제대로 자라나지 않았다. 뒤늦게 작은 새싹이 몇 개 돋아나긴 했지만 그것조차 겨울이 되자 꽁꽁 얼어서 다 죽어버렸다. 이제 화단에는 마르고 거무튀튀한 흙만 가득했다.

 

요한은 그 화단을 볼 때마다 무척 우울하고 슬퍼졌다. 식물이 열심히 자라나는 모습을 옆에서 응원하고 지켜봐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매일 딱딱한 흙에 말을 걸었지만 씨앗들은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요한은 뭔가를 기르거나 돌보는 일에 취약했다. 문방구 앞에서 산 병아리나 초등학교 때 학급에서 기르던 토끼. 모두 정성들여서 돌봤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애완동물을 세 달 이상 길러본 기억이 요한에게는 없었다. 전부 그전에 죽었다. 전부.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요한은 무언가를 기르는 일에 자신감이 부쩍 줄었고, 식물 재배마저 실패했을 때는 이제 완전히 그 일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르지 않았다.

사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오랫동안 잘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면 설령 병들거나 죽은 생물조차도 다시 건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요한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기르는’게 아니라고 요한은 생각했다. 그 행위는 굳이 말하자면 장난감을 조립하고 분해하는 일에 가까웠다. 생명을 기른다는 것은 분명 그보다 훨씬 섬세하고 또 진심을 요하는 일이다. 요한도 그걸 알기에 애완동물을 기를 때는 자신의 능력에 기대지 않았다. 설령 그 결과가 아주아주 나쁘더라도,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시멘트로 된 안뜰의 바닥은 아주 차갑고 우둘투둘했다. 요한은 그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떨었다. 날씨가 너무 추웠다. 어떻게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잤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발이 시렸다. 요한이 흘낏 내려다보자 하얗던 발은 불에 구워진 것처럼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가져오고 싶었지만 밤중에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다른 사람을 깨우게 될까봐 그러지 못했다. 방문을 여는 것마저 조심스러워서 일부러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것이다.

 

결국 신발은 포기하고 요한은 추위를 떨치기 위해 안뜰을 몇 바퀴 돌았다. 날카로운 통증마저 느껴지던 발바닥은 차츰 끝부분부터 감각이 죽어갔다. 이제는 맨바닥을 거닐어도 크게 괴롭지 않았다.

 

마침내 요한은 달뜬 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췄다. 좁은 안뜰에서 잠깐 뛰어다닌 정도로 벌써 숨이 찬다. 자신의 허약한 체력에 요한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나뭇가지에 슬쩍 걸린 달이 그런 요한을 시종일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요한도 문득 달을 마주보았다. 둥근 달은 꼭 밤하늘에 다소곳이 박힌 푸른 눈동자 같았다.

 

요한은 제자리에서 허리를 숙였다가 펴는 스트레칭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마쳤다. 그 정체불명의 동작은 요한이 인터넷에서 본 것인데, 허리가 구부정한 사람에게 좋다고 쓰여 있었다. 별 근거도 없는

 

얘기였지만 요한이 지금까지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가볍게 운동을 마치자 몸이 한결 따뜻해졌다. 요한은 안뜰을 나왔다.

 

손바닥만 한 정원이 갈색 담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너머에는 텅 빈 도로가 있다. 길 건너편에는 카센터와 자동차 용품점 등이 나란히 들어서있었다. 황토색의 가로등이 거니는 사람도 없는 인도를 태웠다.

 

눈이 부신 듯 요한은 정원에서 거리를 내다보았다. 너무나 적막하고 깨끗하여 현실의 광경이라고는 믿겨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조용할 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거리로 나온 요한은 차도 한 가운데에 멀거니 서보았다. 낮에는 차들이 거침없이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지금은 죽은 듯이 평온했다. 진동도 비명도 없었다. 집 안에 있을 땐 항상 이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부대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다 거짓말 같았다.

 

어쩐지 신이 난 요한은 발바닥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한동안 도로 위에서 뛰놀았다. 감각을 상실한 발바닥은 더 이상 어떤 고통도 요한에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아늑했다.

 

이윽고 다리가 저려진 요한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거칠게 입김을 뿜어내며 휴식을 취한 뒤 그는 도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의 끝에는 다리가 있었다. 집 옆의 강을 건너는 큰 다리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요한의 집이 있는 곳과는 주소 상으로 다른 동네가 된다. 요한은 잠옷 바람으로 너무 멀리 가는 것이 꺼려져 잠시 다리의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때였다.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다리 건너편에서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차츰 강해지면서 적막한 밤의 세계를 가로질러 요한의 귓가에까지 들려왔다.

 

요한은 눈을 부릅떴다. 표정이 굳은 그는 갑자기 망설임 없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부르튼 맨발로 황토색으로 물든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뾰족한 돌을 밟아 발바닥에 상처가 났고, 도로 가운데의 화단을 건너다가 철쭉 가지에 다리를 긁혔지만 요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통증과 신음을 삼키며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지나면 길은 세 갈래로 나눠진다. 어느 쪽이든 요한에게는 낯선 길이었다.

 

요한은 오른쪽으로 꺾었다. 노랫소리가 그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강변을 따라 다시 황토색의 도로를 달리다가 이번엔 왼쪽으로 꺾었다. 좁은 골목이 나왔다. 이곳은 가로등이 없어 컴컴했다.

 

불이 꺼진 주택들과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요한은 숨을 죽이고 차분히 그 사이의 좁은 길을 걸었다.

 

노랫소리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운 향기가 느껴졌다. 심연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던 기억을 일깨우는 노래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억은 손에 잡힐 듯 거세게 꿈틀거렸고 요한은 점점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상자의 뚜껑을 아주 조금만 열어놓고 그 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상자의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기억은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요한을 애태웠다.

 

기억을 억지로라도 움켜잡기 위해 요한은 쉴 새 없이 걸었다. 낯선 동네를 맨발로 걷고 있다는 창피함은 전혀 없었다. 이윽고 노랫소리가 아주 가까워졌을 무렵, 요한은 숨을 죽였다.

 

그는 골목의 모퉁이 앞에 있었다. 노랫소리는 길이 꺾이는 곳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그 목소리가 선명했다.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요한은 발소리를 죽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갔다. 벽에 몸을 밀착시킨 다음 숨을 한 번 고르고 단숨에 모퉁이를 돌았다.

 

지금까지보다 더욱 어둡고 지저분한 길이 있었다. 쇠창살이 달린 아파트 단지의 담장이 어둠속에서 희번덕거렸고 전신주 아래에는 뜯어진 쓰레기들이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하수구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사람 그림자는 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랫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바로 곁이었다.

 

요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보았다. 담장 위였다.

 

어둠보다 더욱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조신하게 앉아 금빛 눈으로 요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지만 눈부신 눈동자는 어둠 속에 유유히 떠올라 흔들림이 없었다.

 

요한은 몸을 떨었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검은 고양이였다. 어떤 감정도 없는 무덤덤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고양이는 끊임없이 노래한다. 담장 아래에서 그 광경을 올려다보자 고양이는 마치 밤하늘에 안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창문 너머로 봤던 달이 고양이 근처를 조명마냥 맴돌았다.

 

모든 것이 꿈처럼 몽롱하고 환상적이었다. 어쩌면 정말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은 땅 위에 자신의 두 발을 붙이고 있다는 감각을 분명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환각의 일부일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고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자신은 여전히 방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이다. 요한은 그런 상상을 했다. 꿈이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인지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고양이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요한도 알고 있는 노래다. 아주 오랫동안 들어왔던 것. 하지만 분명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단편적인 이미지만이 존재했다.

 

그리운 것은 언제나 물에 번진 물감처럼 흐릿하며 손에 쥐려하면 그 사이로 홀연히 빠져나가곤 한다. 그 노래 또한 그랬다. 아주 그립고 애틋한 노래임에도 요한은 그것이 어떤 노래였는지 제대로 기억해낼 수 없었다. 노래도 기억도 전부 한 군데 뒤섞여서 결국은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남는 것은 불투명한 감정과 눈물뿐이었다.

 

요한은 어느 샌가 울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기억의 일부일지 모른다. 고양이가 부른 노래는 모난 돌처럼 요한의 마음에 거칠게 굴러들어와 어떤 소중한 부분을 건드리고 만 것이다. 아주 소중한 부분을.

 

젖은 눈 위로 푸른 달과 고양이의 금빛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낯선 동네의 이질적인 어둠속에서 그리운 노래를 들으며 요한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고양이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시선으로 그런 요한을 줄곧 살피고 있었다. 노래 또한 멈추지 않았다.

 

그 풍경이 아주 이상했다. 어두운 골목을 잠옷만 입은 채 서성이는 소년과 노래하는 고양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어둠과 그것을 간신히 꿰뚫는 푸른 달빛. 아주 괴이한 밤이었다. 그리고 또한 잊을 수 없는 밤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생동감이 있는 한편, 또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불확실하기도 하다. 피부에 맞닿는 바늘 같은 추위는 환각이 아닌 것 같지만 고양이가 불러주는 노래는 그 생각을 의심케 만든다. 갑자기 찾아온 두통은 깊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고 정신을 어지럽혔다.

 

요한은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탈색되어가는 걸 느꼈다. 거대한 해일에 집어삼켜지듯 기억도 감정도 깊은 수심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지금 이 순간이 끝나려하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요한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면 여기서의 시간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다 잊어버릴까. 아니면 의외로 선명히 기억이 날까. 선명히 기억이 나서, 눈을 뜨자마자 봇물처럼 샘솟는 기억에 감동하게 될까. 그리고 포근히 미소 지으며 “아, 그 노래였지.”하고 중얼거리게 될까.

 

부디 그렇게 되길 바라며 요한은 눈을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넘쳐 마르고 껍질이 벗겨진 뺨 위로 주르륵 흘렀다. 마지막 순간에조차 얼어붙은 피부 사이로 스며드는 따가운 눈물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게 모든 것이 생생했지만 결국 그것은 꿈이었다.

 

이른 아침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요한은 잘게 부서진 햇살 아래 있었고, 포근히 미소 지으며 “아, 그 노래였지.”하고 중얼거릴 수 있었다.

 

꿈은 선명히 기억이 났다.

 

거울 앞에 섰을 때 자신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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