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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요한과 말라깽이 노스페라투] NIGHT 2. 흡혈귀 ~ 전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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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7 Nov 0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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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타니아

 

 

 

 

 

NIGHT 2.

흡혈귀 ~ 전야 (3)

 

 

 

 

젖은 벤치에 앉아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있던 매리는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의 강변이었다. 둑 아래에 자란 키가 큰 들풀과 수생 식물들이 어둠속에서 물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산책로로 꾸며진 강변에는 거니는 사람도 없는데 희멀건 조명들이 빠짐없이 켜져 벌레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매리는 물에 젖어 축축한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추위와 찜찜함으로 구겨진 얼굴을 들고 주변을 둘러본다. 부스스한 눈에 낯선 인영이 포착되었다.

 

다리 건너편이었다. 매리가 있는 강변의 산책로는 다리의 아래를 관통하고 있었는데, 그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매리와 낯선 인물이 각각 있었던 것이다.

 

그 인물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커다란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가끔 뭔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너무 멀어서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개에게 말을 걸고 있는 모양이었다.

 

 

“…….”

 

 

이 시간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는지 매리는 그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쪽에서는 아직 매리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개에게 정신이 완전 팔려 있었다. 개는 어린 여자애 정도는 등에 태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랬고, 꼬질꼬질한 검은 털이 몸을 뒤덮고 있었다. 꼴이 지저분한 게 아마 떠돌이 개인 듯싶었다.

 

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 앞에서 펄쩍펄쩍 뛰거나 꼬리를 흔드는 등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한껏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떠돌이 개치고는 말을 잘 듣네.”

 

 

매리는 서커스 관람이라도 하듯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감상을 남겼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겨우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저쪽과 이쪽은 마치 별개의 세계 같았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듯하다. 저런 당연한 행복과 자연스러움이 묻어있는 풍경을 보면 벽이 점점 좁혀져 왔다. 불이 꺼진 거실을 봤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쓸쓸하고 괴로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닿는 곳에 있던 따뜻함이 점점 멀어졌다.

 

더욱 가슴 아픈 건 남겨진 어둠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이다. 지금 사무치는 이 추위나 외로움 전부가 아주 오래되어 이가 빠지고 낡은, 하지만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골동품처럼 느껴졌다.

 

매리는 자신이 온기라는 것을 점점 잊어간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그런 것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것처럼 몸이 변해갔다. 감각이 둔해지는 게 아니라 아예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머리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매리의 몸은 그 변화를 착실히 뒤따라갔다. 침묵 속에서 소리를 들었고, 그저 어둠뿐이던 밤의 세계에서 입체성을 찾아냈다.

 

세상을 보는 법이 바뀌자 자신이 서 있는 장소도 달라진 것 같았다. 세상 모두가 하루아침에 변해버렸다. 작은 샘 안에 얼굴을 밀어 넣자 그 안에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는 옛날 얘기가 불쑥 떠올랐다. 매리는 숨겨져 있던 그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변화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싫어서 매리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자꾸만 오그라드는 다리를 억지로 뻗었다. 건너편의 남자애ㅡ처음엔 여자인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랬다ㅡ는 개에게 악수를 시도하려고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여전히 매리를 보지 못한 눈치다.

 

가로등이 없는 다리 아래는 습한데다가 아주 어두웠다.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으로 비린내가 나는 물이 뚝뚝 떨어져 매리의 머리나 어깨를 적셨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매리는 저절로 발소리를 죽였다. 남자애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상당히 둔한 애다. 가냘픈 몸은 가까이서 봐도 여자로 착각할 법했다.

 

이번에는 앞모습이 보고 싶다. 얇은 팔뚝이나 날렵한 허리 라인은 묘하게 상상력을 자극했다. 매리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일순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지만 그 감정도 곧 욕망에 삼켜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을 손으로 붙잡고 싶다. 질투심을 유발하는 가늘고 예쁜 손가락을

깨물어 보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하얀 피부 아래에 흐르는 붉은 액체를 ‘맛보고 싶다’…….

 

매리는 남자애의 연한 피부를 손톱으로 찌른 다음 상처 부위에서 나온 피가 남자애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침을 삼켰다. 죄책감과 양심은 어느새 아침 이슬처럼 덧없이 증발해버렸다. 매리는 입술을 한 번 핥은 다음 말을 걸었다.

 

 

“얘.”

 

 

남자애는 펄쩍 뛰어올랐다. 카메라가 있었다면 뛰어오르는 순간의 표정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빈손이 아쉬웠다.

 

 

“이 시간에 뭐하니? 그건 네 개야?”

 

 

검은 개는 꼬리도 흔들지 않고 짖지도 않고 매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남자애도 마찬가지였다. 두 쌍의 순수한 눈동자가 한 번에 자신을 바라보자 매리는 덜컥 부담스러워졌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매리는 남자애의 긴 속눈썹과 달아오른 볼을 보고 조금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신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리는, 이 남자애가 한밤중에 길가에서 돈을 받고 어른을 기쁘게 해주는 그런 이색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 걸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다. 지금보다 1세기 전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으므로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남자애는 정말로 그런 직업을 가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참고로 책에서는 그 직업을 남창이라고 불렀다.

 

어쨌든 그런 실례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남자애는 예뻤고, 또 묘한 페로몬을 뿜어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저절로 말을 걸어오게 할 만큼 말이다. 전문용어로는 헌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매리도 시도해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다니, 그게 얼마나 창피하고 대담한 일인지 매리도 자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뒤늦게 매리는 자기가 건넨 첫마디가 너무 두서없거나 진부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어떠랴. 집에서 도망쳐 나와 수 시간 동안이나 추운 강변에 쪼그려 앉아있다 보니 매리는 자신에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오히려 부끄러움은 잃어버린 매리의 인간성을 찾아줄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이건 제 개가 아니에요.”

 

 

소년이 그렇게 처음 입을 뗐을 때, 매리는 그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아파트 단지 근처에 사는 떠돌이 개에요. 이름은 존이구요, 티베탄 마스티프라는 종이에요. 왜 떠돌이 개인데 이름이 있냐면 목걸이에 그렇게 적혀 있었거든요. 지금은 줄이 다 닳아서 떨어져 버렸지만. 아파트 사람들은 이 개가 너무 커서 동네에 있는 게 불편하다고 해요. 그래서 요즘은 경비 아저씨가 보이면 쫓아내는 바람에 이렇게 강변까지 나와 있기도 해요. 그렇게 붙임성이 있는 성격은 아닌데요. 나름대로 귀여운 면도 있어요.”

 

 

소년은 개에게 손을 핥게 하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매리를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그런 것치고는 술술 잘도 얘기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저는 산책 중이었어요. 밤산책이요. 취미거든요.”

“……그래?”

 

 

말을 마친 소년은 멀뚱히 매리를 쳐다보았다. 매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낯선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에 중압감을 느끼고 있던 자신이 조금은 굴욕적으로 느껴졌고, 그 이상으로 어딘가 낯이 익은 소년의 목소리에 혼란스러웠다.

 

 

“뭐 할 말 있으세요?”

 

 

매리가 잠자코 있자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미안해. 딱히 용건이 있어서 말 건건 아닌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소년은 매리가 말한 저의가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문 하나만 더 해도 될까?”

“그러세요.”

 

 

이런 템포로, 이런 분위기에서도 대화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다른 사람이라면 성질이

나서 돌아서버렸을 것이다. 매리는 소년의 참을성이 감탄스러웠다.

 

 

“우리 혹시 예전에 만난 적 있지 않니?”

 

 

이번에는 제법 헌팅다운 대사였다. 그것도 몹시 스테레오 방식의.

 

소년은 그다지 짚이는 게 없었는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조용히 매리를 올려다봤다.

 

 

“잘 모르겠어요.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

“그래……. 그럼 됐어. 그냥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매리가 도망치듯 말을 정리했다. 이제는 자신이 정말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이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얼간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뒤늦게 소년의 눈매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뭐?”

 

 

매리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이국적인 눈매에 속눈썹이 긴 소년의 눈이 매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이름을 들어보면 생각날지도 모르잖아요.”

 

 

소년은 매리의 뜬금없는 질문을 꽤 진지하게 생각해준 모양이었다. 아니면 소년 본인 역시 거슬리는 점이 있었던 걸까?

 

 

“매리야. 한글로 매리…….”

 

 

매리는 조금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특이한 이름인지라 예전부터 자주 놀림감이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때는 몽고메리라고 불렸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까닭이었다. 그 당시의 아이들은ㅡ심지어 매리 본인조차도ㅡ얼굴에 주근깨가 있고 머리가 빨간 여자애의 이름이 앤이 아니라 몽고메리인 줄 알고 있었다. 그 착각은 실컷 놀림을 받고 중학생이 된 뒤에야 교정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우울하고 창피한 이야기였다.

 

 

“매리?”

 

 

소년은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측했으므로 매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름이 매리에요?”

“응.”

“정말요? 그거 그렇게 흔한 이름 아니죠?”

“……그렇다니깐. 너 지금 놀리는 거니?”

 

 

매리가 눈을 빛내자 소년은 목을 움츠렸다. 매리의 눈이 너무 눈부셨던 모양이다. 농담이 아니라 최근에는 종종 붉은빛을 띠기도 했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라서요.”

 

 

소년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매리를 살폈다.

 

 

“혹시 아버님이 의사 아닌가요? 백화점 사거리 근처에 개인 병원 갖고 계시는…….”

“……. 맞는데.”

 

 

매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년은 그 표정을 보더니 조금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이어서 매리의 아버지가 순환기 내과의라는 것과 5년 전에 은색 쿠페를 몰고 다녔다는 것을 연달아 맞췄다.

 

 

“집은 역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산 아래 동네고, 2층짜리 단독 주택에 개가 한 마리 있어요.”

“5년 전에는 그랬지.”

 

 

매리는 박수를 쳤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다른가요?”

“2년 전에 이사 갔어. 지금은 강 건너야. 여전히 주택이지만. 개는 다른 사람 줬고,”

 

 

그래도 정말 놀랍다는 듯 매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목 뒤가 따끔따끔 거리기도 했다.

 

 

“근데 넌 대체 누구니? 탐정이라도 고용한 거야?”

 

 

방석만 깔면 되겠네.

 

매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소년은 조금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기억 안 나세요? 전 이제 기억났는데.”

 

 

말하곤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운 얼굴이다. 긴 머리 때문인지 남자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이런 예쁜 애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 봐요.”

 

 

요한은 조금 답답해졌는지 긴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뒤로 넘겼다.

 

 

“그땐 머리가 조금 짧았으니까.”

 

 

귀가 다 드러나도록 머리를 잡아당기자 작고 둥그런 얼굴이 더욱 부각되었다.

 

 

“자세히 보세요.”

 

 

소년은 머리를 붙잡은 채로 한 걸음 다가왔다. 매리는 그의 말대로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피부가 하얗고 잡티가 없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조금 안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미지다.

 

피상적인 이미지들이 플래시가 터지듯 매리의 머릿속에서 깜빡거렸다.

 

매리는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토끼가…….”

 

 

중얼거린다.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매리는 바짝 마른 입술로 되뇌었다.

 

토끼가, 토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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