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소설회랑

잃어버린 것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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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0 Mar 0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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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TTERS

  • By ㄹㅍ
협업 참여 동의

딸랑, 딸랑.

종소리와 함께 열린 문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까페에 들어온 손님을 응시했다. 젊은 여자였다. 아름답지만 서늘한 기색을 가진. 어쩐지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계곡의 푸른빛을 연상케 하는 그런 느낌의 여자였다. 

“어서오세요.”

별난 일이었다. 개점한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지만, 새벽 3시 이후에 오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주택가 골목 까페는 새벽이 찾아오면 인적이 뚝 끊기기 마련이다.

“차 종류, 뭐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메말라 바스락거리는 낙엽 같은 목소리였다. 잠깐의 사고과정 끝에 나는 그녀의 말이 물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없나요.”

“차가··· 있긴할텐데, 잠시만요.”

아래쪽 선반 깊숙이 처박혀 있던 분홍색 철제틴을 꺼내 들었다. 한 번도 개봉되지 않은 틴은 뚜껑이 비닐로 밀봉되어 있었다. 나는 이리저리 틴을 돌려보며 겉면에 쓰여진 문구를 슥 훑었다. 티 한스푼, 100도, 5분동안 물은 차가 푹 잠길 정도로. 퍽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있는거죠.”

“홍차 종류인데 괜찮으세요?”

“그걸로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갖다 드릴게요.”

머리를 긁적였다. 구색 맞추기로 메뉴판에 차를 올려놓긴 했지만 주문받기는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술을 찾거나 커피를 찾았다. 야간 까페란 대체로 그런 종류의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차를 끓일 일이 도통 없는 것이다.

그런 배경사정 끝에 완성된 차는 어찌어찌 구색은 갖추고 있었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미리 시음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까 전부터 여자는 카운터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듯이.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앞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행히 그녀는 별말 없이 차를 마셨다. 여자는 말이 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고, 피로에 잠겨 기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흐트러진 자세는 아니었다. 곧게 세워진 허리, 차분히 무릎 위에 얹어진 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행동거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우아하다는 생각이 들게 할만한 여자였다. 그녀는 어딘가 사람의 이목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인데도.

“이 찻잎, 어디 제품인지 알아요.”

여전히 그녀의 말에는 고저가 없었다. 올바른 문장부호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모조리 온점을 박아넣은 것 같았다. 그녀가 이 찻잎을 안다는 건지, 아니면 내게 묻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제품 이름을 그대로 읊는 걸 택했다.

“포트넘메이슨 사의 Rose-Pouchong··· 인 것 같네요.”

“포트넘메이슨의 가향차는 대체로 맛이 괜찮아요. 로즈포총은 그 중에서도 꽤 고가품이고.”

그녀는 처음으로 찻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올바른 방법이 아니면 찻잎은 그 맛을 내지 못해요. 아무리 비싼 찻잎이라도요.”

“아···.”

“맛없다는 소리에요.”

그녀는 그렇게 단언했다. 잠깐 홀에 적막이 맴돌았다. 찻잔 손잡이를 보기좋게 되돌리며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한국물은 대체로 연수에요. 경도로 따지면 50에서 80ppm 사이일까. 그래서 유럽보다 물의 경도가 낮아서 홍차가 우러나는 속도가 더 빨라요. 또 한국에서는 권장 온도보다 낮게 우려내야 떫은맛이 적어지고. 유럽에서는 경도가 200ppm까지 높아지는 경우도 많으니까 몇 분이고 우려내지만, 이곳 물로 그랬다가는 아예 못 먹을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지금 마시고 있는 이것처럼요.”

처음으로 길게 말을 꺼낸 그녀는 우아하게 일어서 카운터로 다가왔다.

“제가 새로 우려도 되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이곳에서 차를 찾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고, 또 차를 찾을만한 사람도 그녀가 마지막인 것 같았으니까. 나는 잠자코 그녀가 하는 행동을 뒤에서 지켜봤다.

여자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스트레이너에 찻잎을 부어 넣었다. 계량저울과 조리온도계를 내밀었지만 그녀는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런 일에 꽤 익숙해 보였다. 차를 우리는 것도, 다른 사람의 주방을 빌리는 것도.

눈 깜짝할 사이 그녀는 다 완성된 티팟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가고 있었다.

“같이 마셔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에둘러 거절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어쩔 수 없이 찻잔 하나를 챙겨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서 옅은 장미향이 맴돌았다.

“보통 홍차 베이스의 가향차들은 80도가 알맞아요. 하지만 로즈포총은 여리고 약해서 더 낮은 온도에서 우리는게 좋아요. 72도, 2분 10초 정도. 이런 종류의 가향차들은 강하지 않은 맛으로 먹어야 해요. 그렇게 기획된 블렌딩이니까. 기억했나요.”

“72도, 2분 10초. 기억했습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어딘가 훈계조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찌 됐건 제대로 된 차를 내놓지 못한 건 까페주인의 잘못이니까.

“오늘은 그거면 됐어요.”

“오늘은?”

“앞으로도 종종 찾아올 테니까요. 이 시간에.”

“앞으로도······?”

“싫은가요.”

“아뇨, 아뇨. 그럴리가요. 그냥··· 좀 의외라서 그랬죠.”

“여기는 좋은 곳이니까요, 차는 잘 못 끓이지만.”

대답할 말이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주택가 골목 깊숙한 곳에 박혀있는 까페를 운영하면서 좋은 곳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별 특색도 없고, 밤에만 여는 비좁은 까페일 뿐인데.

“여기가 왜 좋은 곳인지 생각하고 있었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네, 여긴 객관적으로도 썩 좋은 가게는 아니니까요. 차도 잘 못 끓이고.”

그녀는 말이 없이 빈 찻잔에 차를 따라냈다. 장미향이 옅게 흘러나온다. 강렬하지만, 천박할 정도로 짙지는 않게. 그녀 말대로 이 차는 옅음에 그 의미가 있었다. 그녀 또한 이 가게의 소박함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란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왜 밤에 까페를 열었나요.”

그녀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건 뭐, 주택가 까페의 숙명 같은 거죠, 반쯤 술집 가깝게 운영해야 단골이 생기니까요. 커피보다는 술이 더 잘 팔리는 까페니까.”

“그럼 왜 3시 이후에도 열어요. 이 시간엔 ‘사람’이 들어온 적 없잖아요.”

“······취미 같은거죠. 취미. 그리고 어찌됐건 손님분도 이 시간에 들어오셨잖아요? 기다리다 보면 가끔은 한두분씩 들어오니 있는거죠.”

거짓말이다. 개점한지 몇 개월동안 새벽 3시 이후에 누군가 들어온 건 그녀가 처음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정확히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차를 마시고 살아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타준 차를 마셔야만 살 수 있어요. 그래서 한참을 떠돌다 이 가게를 찾은거에요, 이 근방에는 당신 말고는 내게 차를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

“요정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요정?”

“요정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 앞에는 나타날 수 없어요. 그래서 항상 찾아다니는 거예요. 홀로 남겨진 사람을요.”

“제가 생각하던 요정과는 영 동떨어져 있네요. 그건 뭐랄까··· 꼭 귀신 같은데요?”

“귀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요정이라고 불러요. 요정은 요정이니까. 당신도 나를 홍차의 요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홍······ 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진지해보였다. 취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고. 컨셉? 스트리머? 정신병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딘가 팽팽했던 긴장감이 툭 풀어진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 말고도 다른 이들이 올지도 몰라요. 나보다 욕심 많고, 자제력 없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요. 나는 사람이 해주는 홍차 정도만 마셔도 만족하지만, 요정 중에는 당신 같은 사람 자체를 탐하는 요정도 많으니까요.”

“뭐··· 음··· 그럼 홍차의 요정님?”

“프레르.”

"네?"

"프레르라고 불러요.“

”꼭 프랑스 사람 이름 같네요. 외국인처럼 보이진 않은데.“

”내가 이름지은게 아니에요. 그렇게 이름 붙여졌을 뿐이라구요."

그녀는 가볍게 테이블을 툭 걷어찼다. 밀쳐진 테이블의 철제프레임이 내 발목을 때렸다. 끙.

“사납고, 거칠고, 방정맞고, 품위 없는 것들. 그런 요정들을 마주치게 된다면 당신도 본능적으로 알게 될 거에요.”

"······그럼 그것들을 쫓아내는 방법 같은건요?"

"나를 기다려요."

"당신을?"

"요정들은 대접받았던 걸 잊지 않아요. 나는 당신에게 차를 대접받았어요. 맛없는 차였지만. 그래도 내가 당신을 지킬 이유는 충분해요."

“그것 참 든든하네요.”

나는 건성으로 말했다. 힐끗 벽면에 걸친 시계를 확인했다. 5시, 얼마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2시간 가까히 지나버렸다. 이제 문을 닫을 시간이다.

"이만 가봐야해요."

프레르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지갑 속에서 메뉴판에 적힌 그대로 현금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현금영수증을 하겠노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요정이라 주장하는 사람답게, 실로 아날로그적인 인간상이었다.

그날 가게의 마감시간은 5시 15분, 평소보다 조금 늦은 퇴근시간이었다. 가게 윗층의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죽은 듯이 잠자리에 들었다.



* * *


새벽의 기묘한 손님은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 날은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늘어놓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 무렵 새벽 3시에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프레르였다.

“오늘은 차 종류, 뭐 있나요.”

프레르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그렇게 물었다. 여전히 말투에는 고저가 없어서, 물음표가 슥슥 지워져버린 문장이었다.

“정말로 또 오셨네요.”

“오늘도 로즈 포총 뿐인가요.”

“뭔가를 더 들여놓기엔 짧은 시간이라.”

프레르는 어깨에 걸친 핸드백을 열어 잠깐 뒤적거리더니 깡통 틴 하나를 꺼내놓았다. 그 과정에서 내용물이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카운터 위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틴트를 쥐어 잡아 그녀에게 건넸다.

“손님은 요정치고는 세속적인 물건이 많네요.”

“현대의 아름다움은 대부분 화장에서 나오니까요. 그걸 보충할 개연성일 뿐이에요.”

“예컨대 지금 입고 있는 겨울옷처럼 말이죠?”

그녀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 니트조끼와 회색 H라인 울 스커트, 그리고 검정 스타킹. 키가 큰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처음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참으로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맞아요. 여름옷을 입고 다녀도 상관은 없어요. 얼어 죽는 요정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람 앞에 나타났으니, 계절에 맞는 복장을 갖춰야만 한다는 거죠?”

“이제는 요정에 대해 익숙해졌나요.”

“뭐··· 손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강 알 것 같네요.”

나는 꾹 웃음을 찾았다. 얼어죽는 요정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 치고는 그녀가 꽤나 추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떨리는 손가락 끝이나, 빨갛게 상기된 볼, 작게 훌쩍거리는 것까지. 하지만 그녀는 내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틴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선물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오늘 타야만 하는 차.”

“예상은 했지만··· 손님은 정말 별나네요.”

“어차피 내가 먹을 거니까요. 어제 베를린에 가서 가져온거에요. 포트넘 보다는 중저가의 브랜드지만, 그래도 겨울에 잘 어울리는 차에요.”

Nr.1438 Gebrannte Mandel-Tea Gschwendner, 독일어라 읽기도 어려운 이름의 차였다. 그래도 로네펠트라는 브랜드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끓이면 될까요? 까페 사장으로서 부끄러운 소리지만, 잘 끓일 자신이 없는데요.”

“어려울 거 없어요. 브랜드 가향차들은 대부분 용법이 규격화돼있으니까요. 크게 두 가지만 구분하면 돼요. 녹차 베이스인가, 홍차 베이스인가. 이건 어제처럼 홍차 베이스로 블렌딩 된 가향차에요. 온도는 80도 내외, 2분 30초 정도. 물량은 그램 당 100ml 정도에요. 기억했나요.”

“그렇게 어려울 건 없네요.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금방 내갈게요.”

“저도.”

팔목에 서늘한 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 프레르는 내 팔을 잡은 채 약간은 다급하게 말했다.

“저도 옆에서 지켜봐도 되나요.”

“안될 것도 없지만······ 왜요?”

“오늘은 먹을만한 차를 마시고 싶단 말이에요. 딱 한 번 마실 수 있는 건데.”

투정에 가까운 말투였다. 고저 없게 들리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묻어나온 것 같았다.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코트를 벗어 테이블 의자에 걸쳤다. 그러고는 쪼르르 테이블 안으로 들어왔다.

차를 우려내는 건 어제보다는 훨씬 간단하게 됐다. 프레르는 팔팔 끓인 물이 아니라는데 만족했고, 제대로 된 물양이 부어졌음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 스스로 주장하는대로 홍차의 요정인지는 모르겠으나, 홍차를 엄청나게 사랑한다는 건 알 것 같았다.

티팟을 테이블로 내놓고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카운터에서 디저트용으로 쓸만한 과자를 찾았다. 쟁반을 들고 홀로 나갔을 땐 그녀는 이미 차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옅은 훈연향과 사과향이 동시에 느껴졌다. 꽤나 달달한 느낌의 차였다.

“오늘은 마실만 한가요?”

“맛있어요.”

“그거 다행이네요.”

프레르는 내 쪽의 찻잔에 찻물을 부어넣으며 물었다.

“유럽에 가본 적 있나요. 거긴 이런 종류들의 향이 많아요. 달콤하고,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은 신 그런 향이요. 독일은 이 티처럼 벌꿀에 절인 구운 사과를 좋아해요.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글루바인Glühwein을 만들어서 곁들여 먹는 거예요.”

“글루바인?”

“보통은 뱅쇼Vin Chaud라고 부르는거요.”

“와인 졸인 거 말하는 거죠? 예전에 먹었을 땐 너무 시던데.”

“하지만 겨울에 먹으면 좋아요. 겨울에는 따뜻하면서 달고, 신맛이 어울리니까요.”

그녀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꽤나 즐거운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는게 재밌어서 턱을 괴고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무언가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따뜻한 차를 마신 탓에 체온이 올라가 그런 느낌이 드는 걸지도 모르고.

“······그건 그렇고, 그동안 이상한 것들은 찾아오지 않았나요.”

“이상한 것들?”

“한눈에 봐도 음험하고, 위험한 것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얘기를 꺼낼 때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마음에 걸릴만한 일은 딱히 없었다.

“제 기억으로는 없는 것 같은데요. 술 취한 아저씨들이야 뭐, 항상 음험하고···.”

“그럼 됐어요.”

프레르는 차를 쭉 들이켜고는 차분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쩐지 대답을 잘못 선택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가 흥미 있어할 내용을 꺼내놓았다.

“그러고보니 손님 말고도 새벽 3시 넘어서 다른 손님이 찾아오긴 했었네요.”

“이 시간에요.”

“네, 이 시간에요. 그래서 이제는 이 시간에도 손님들이 오는구나, 생각했죠. 그분은 뭐, 간단히 맥주 한잔하시고 30분도 안 돼서 나갔지만.”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나요.”

“예의 바르시던데요.”

다시 말이 없었다. 프레르는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옅은 갈색빛을 띠는 눈동자가 조명빛을 받아 빛났다.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기 부담스러워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붉게 칠해진 입술이 유독 눈에 띄었다.

“요정들은 고립된 사람한테만 찾아가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모든 연결이 끊겨버린 사람이요. 어느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도 어느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을만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당신은 그런 향을 풍기기 시작한거에요. 요정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강하게.”

“고립?”

“모든 관계가 단절된 사람.”

“제가 그렇게 친구가 없어 보였어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는 전교회장까지 했던 사람인데.”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그런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럼 의미 있는 관계는 뭔데요?”

프레르는 내 쪽으로 바짝 몸을 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사랑을 기대하지 않아요. 사랑을 할 생각도 없어.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고립이란 건, 그런 거예요. 관계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이 단절을 선택해버린 사람, 그게 지금의 당신이에요.”

모두 당신이 자초한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새벽시간에 편안하게 얘길 나눌만한 대화 주제는 아닌데.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이가 들면 사람에 대한 기대가 적어지죠. 그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은데요. 고립? 글쎄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납품거래처와 통화하고, 단골손님들을 마주하는 내가 고립된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잃어버린 걸 잃어버린 채로 놔두고 있나요.”

“내가 뭘 잃었는데요?”

“이미 당신도 알고 있는 답 아닌가요.”

프레르는 단언하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으로 넘기기엔 꽤나 불쾌한 말들의 연속이었다. 툭 튀어나간 말은 짧았다.

“그럼 당신은? 얼마나 잘하길래?”

“요정은 항상 새벽에만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그 아주 적은 시간만이 요정에게 허락된 시간인 거에요. 어떤 흔적을 남겨도 모든 건 해가 뜨면 사라져버려요. 요정이란 그런 거에요. 필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존재.”

“이젠 그 요정 컨셉도 좀 지겹네요. 차에 대한 훈계라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어요. 나는 까페 사장인데다 차 우리는 실력도 없으니까. 하지만 아가씨, 인생에 대한 훈계는 어느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은 얘기에요. 누가 말하건 주제넘은 얘기라고요.”

나는 인상을 쓰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금 짜증이 나있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내 아픈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더는 그녀가 하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슬슬 마감 준비를 해야 돼서요. 테이블 치울께요.”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들을 정리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녀는 첫날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일어나 코트를 입고,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놓았다. 어딘가 축 늘어진, 기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굳이 화해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테이블을 정리하는 사이 그녀는 이미 나가버리고 없었다. 문 위에 달린 종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 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답답했다. 끝맺음이 좋지 않은 하루였다.



* * *


요 근래 눈이 며칠 동안 내리고 있었다.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눈이 쌓인 탓에 틈틈이 가게 앞에서 제설을 해야만 했다. 길가 양옆으로 치워진 눈이 허리께까지 올만큼 쌓여 있었다. 사정이 이런터라 까페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숫자는 나날이 적어져 갔다. 심지어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물론 그녀, 프레르도 찾아오지 않았다. 유럽에서 주문한 차들은 아래선반에 차곡차곡 쌓여 개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덕에 새벽마다 새로운 차를 우려내며 하나씩 시음하는 취미가 생겼다. 테이블에 앉아 쏟아져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세상에 홀로 남아버린 것 같았다.

그것들은 그런 우울한 날에 찾아왔다.

“여기 술도 파나?”

문에 달린 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두 명의 사내는 어느새인가 가게 안에 들어와 있었다. 머리가 짧은 사내와 더벅머리를 한 사내 둘이었다. 어디 공사장의 작업복처럼 보이는 카모플라쥬 바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덩치가 큰 사내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화난 것처럼 보였다. 얼굴 가득히 자리한 주름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술, 팝니다.”

“뭐 파는데?”

“소주도 팔고··· 맥주도 팔고··· 여러 가지 팝니다.”

“양주도 있나?”

“보드카나 위스키 종류는 몇 가지 있긴 한데···”

“제일 맛있는 걸로 줘봐. 안주는 적당한 걸로.”

맛있는 것과 적당히, 둘 다 어렵기 그지없는 주문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적당한 가격대의 보드카를 준비했다. 안주는 웨지감자와 브라운해쉬를 튀겨 내놨다. 내 기준으로는 좋은 술과 적당한 안주였다. 하지만 사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내들은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몇 번씩 연거푸 마시고, 손으로 감자튀김을 집어 입에 욱여넣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음미한다는 개념을 모르는 것 같았다.

몇 분동안 걸신들린 것처럼 모조리 술과 음식을 집어삼키고는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지나가던 개도 이딴 술은 안 마시겠네.”

“안주는 또 푸석푸석하기 그지없고,”

“여기 사장은 귀가 먹었나?”

“아니면 우릴 무시했던가.”

“이봐! 우리가 우스워보였나?”

“응? 우리가 우스웠던거지, 그렇지?”

그들은 짠 것처럼 말을 주고받으며 비난의 화살을 이곳으로 돌렸다. 큰 덩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손님들, 계속 이러시면 경찰 부르겠습니다!”

“경찰?”

“경찰을 부른다고?”

두 사내는 서로를 마주보며 낄낄대며 웃었다. 얼굴의 주름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더벅머리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부른다고? 당신이? 어떻게? 왜 항상 당신 같은 인간들은 반응이 똑같지? 위기에 빠질 때만 타인을 찾아. 어떻게 고립된 인간이 누군가를 부를 수 있다는거지?”

“멍청하군, 멍청해. 하긴 멍청하니까 고립된 채로 스스로를 방치했겠지.”

“얼간이. 당신은 이제 끝이야.”

“그래도 운이 좋은 줄 알라고, 우린 금방 끝내는 편이니까.”

더벅머리 사내도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순간을 맞이하고 나서야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자들은 사람이 아니다. 막연하게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발밑에서부터 밀려들었다.

천장 조명이 깜빡거리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언뜻언뜻 그들의 진짜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얼굴은 지네의 대가리를 하고 있었다. 코앞에서 무언가 썩어가는 냄새가 훅 밀려왔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네 대가리가 쩍하고 입을 벌렸다.

목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몰려왔다. 뒤이어 종아리에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몸이 저절로 퍼덕거렸다. 물속에서 끌어 올려진 생선처럼 숨쉬기 위해 몸을 비틀어댔지만 점점 숨이 막혀왔다. 목구멍이 퉁퉁 부어올라 숨구멍을 막고 있었다.

죽는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죽으려고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다. 삶을 살면서 쉽게 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비어버린 틈으로 어떤 것도 다시 채워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틈으로 마주치지 않아야만 하는 것들이 새어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죽음에 대한 개연성이 완성됐다. 나는 몸부림을 멈추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나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


소리가 들려온 건 의식이 희미해지기 직전이었다. 저 멀리서 희미한 물결 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 같기도 했고, 새벽 파도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점점 선명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거센 물길이 흐르는 소리가 됐다.

‘······잖아요.’

목소리가 점점 크고 선명해졌다. 어느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날 기다리라고 말했잖아요.’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부유감이 몸을 맴돌았다. 폐가 공기를 찾아 가쁘게 들숨을 찾았다. 나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천장 조명 빛이 보였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올려다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나는 내가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흠뻑 젖어 뚝뚝 물방울을 흘려내고 있었다.

“프레르.”

“차를 마시러 왔어요.”

“홍차의 요정은, 인간의 홍차를 마셔야만··· 살 수 있으니까.”

“이젠 제 말을 믿나요.”

툭, 툭, 툭.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내 목 주변을 적셨다. 이젠 그녀가 뭘 말하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파랗게 질려있는 그녀의 입술을 보면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꼭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에 통증이 느껴졌다.

“추워요?”

“추워요.”

“얼어 죽는 요정은 없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추운 거랑 추워서 죽는 거랑은 전혀 다른 소리에요.”

“요정도 만능은 아니네요.”

“만능이었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통해서 당신을 구하진 않았을 거예요.”

프레르는 그렇게 말하며 두 팔을 들어 내보였다. 코듀로이 코트는 탈수를 거치지 않은 세탁물처럼 푹 젖어있었다. 외투뿐만 아니라 속에 입은 니트원피스까지 물을 먹어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찝찝함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옷, 갈아입을래요?”

“······어디서요.”

“바로 윗층에서요. 거기가 내 집이에요.”

“그곳도 까페에 속할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까페 건물에 딸린 2층도 까페의 일부분일까? 까페 운영에 필요한 자재들을 쌓아두고 있으니, 까페 창고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나는 약간의 억지를 섞어 말했다.

“거기도 까페죠. 까페 운영에 필요한 시설이니까.”

비척거리며 일어서서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프레르를 일으켜 세웠다. 까페 바닥은 물청소라도 한 것처럼 물이 흥건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테이블도 있었고, 다리가 부러진 의자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산조각난 유리잔이 눈에 들어왔다.

치우려면 온종일 청소에 매진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오늘은 이만 방으로 들어가 쉬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어봐야만 하는 것들도 있고.

나는 몇 가지 찻잎을 챙기고 까페 문을 닫았다. 까페 조명을 끄자 아까 겪었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불쾌한 악취와 살점이 뜯겨나가는 통증. 나는 망설이다 카운터 조명 몇 개를 다시 켜뒀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섭나요.”

팔목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차갑네요.”

“···차를 마시면 나아질 거예요. 당신도, 나도.”

“그럴지도요.”

팔목을 잡은 그녀의 손을 풀어 그대로 마주 잡았다. 꼭 얼음을 잡은 것처럼 손바닥이 아려왔다. 하지만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내게 안정감을 줬다. 나는 그녀를 끌고 2층 계단으로 올라섰다. 그녀는 순순히 나를 따라 올라왔다.

그녀를 거실 쇼파에 앉혀두고 방에서 흰 티와 반바지를 꺼내왔다. 사이즈가 조금 크긴 할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옷을 건네면서 방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갈아입으라는 소리였다. 그녀는 별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나는 부엌에서 차를 끓였다. 이제는 그녀의 조언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베르가못 얼그레이. 이미 여러 번 맡아본 익숙한 향이었다. 포트에서 끓인 물을 부어 찻잎을 거의 다 우려낼 무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큰데요.”

그녀의 키 덕에 티셔츠의 길이 자체는 문제없었지만, 어깨가 문제였다. 티셔츠가 계속 한쪽으로 흘러내려 그녀의 흰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불편한 듯 연신 티셔츠를 위로 끌어올렸다. 반바지도 허벅지 기장이 제대로 맞지 않아 꼭 와이드 팬츠처럼 보였다.

“······그래도 잘 어울리긴 하네요.”

“이런게요.”

“뭐, 정말로 잘 어울리니까요.”

“······이상한 사람.”

거실 테이블에 찻잔을 올려놓으며 미리 준비했던 담요를 건넸다. 그녀는 고치를 만들 듯 담요로 몸을 칭칭 둘러버렸다. 바닥에 앉은 그녀는 작게 코를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베르가못 얼그레이네요.”

“괜찮나요?”

“상관없어요. 홍차는 저마다의 매력이 있는 법이니까. 제대로만 끓인거라면 뭐든 좋아요.”

그녀는 찻잔을 기울여 시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마음에 들었는지 말없이 찻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아요.”

“해답을 묻고 싶나요.”

“해답?”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가장 묻고 싶은 걸 말하자면, 맞아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찻잔이 몇 번씩이나 다시 채워지고, 찻물이 바닥날 때까지 그녀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당신이 잃어버린 건 뭔가요.”

“잃어버린 것.”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까페를 개점하면서 잃어버린 걸 적자면 노트 한 권을 빽빽이 채울 자신이 있었다. 고연봉의 직장을 때려치웠고 그동안 쌓은 인맥들을 모조리 다 잃어버렸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손해사정사 면허를 따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보험법인을 다니면서 대학에 다녔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같은 직장에 있었죠. 직급과 더불어 연봉도 늘어났고, 한때는 고가의 외제차를 끌고 다녔던 때도 있었어요. 고정적으로 의뢰를 맡기는 클라이언트도 많았고···.”

나는 약간 자조하듯 말했다.

“그러다 까페를 개점하면서 모든 걸 다 잃었죠. 가장 많이 잃은 걸 말하자면 돈이네요.”

“돈.”

“이 까페를 운영하면서 1년 동안 버는 수익을 합해봐야, 이전 직장에서 한두 달 남짓 일하는 만큼밖에 나오지 않으니까요. 적자가 날 때도 있고.”

“하지만 당신은 까페를 열어야만 했던 건가요. 일을 그만 두고서라도.”

나는 그녀의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꼭 까페가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일을 그만두고서 뭔가를 할만한 게 필요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을 하기 시작한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에요. 선택지가 없었거든요. 엄마는 당뇨합병증으로 꽤 오래전에 돌아가신데다, 아버지는 중금속중독으로 알츠하이머가 와버렸거든요. 중학생이던 여동생을 책임질 사람이 저밖에 없었죠. 그래서 그 일을 선택한거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사명감 비스므리했던게 없었다면 금방 그만뒀을거에요. 가끔 업무를 맡아 산정서를 작성할 때면 온갖 사진을 다 보게 되거든요. 팔이 절단된 사람, 손가락이 반쯤 곤죽이 된 사람, 귀가 찢어져 버린 사람··· 그런걸 보는 날이면 밤에 악몽을 꾸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항상 사직서를 품에 들고 다녔죠. 그랬었어요.”

두서없이 시작된 이야기는 오래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반쯤 하소연하는 심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래도··· 버티니까 나중에는 버틸만 해지더군요. 그 돈으로 여동생을 대학에 보내고, 아버지가 있는 요양원에 돈을 바치고. 대부분은 나쁘지 않게 흘러갔어요. 겉으로 보기엔 비교적 안정된 가정이었고, 여동생도 대학을 졸업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에 들어갔으니까.”

“겉으로 보기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시선으로 보기엔 그랬다는 거죠. 난 아무것도 몰랐던 거에요. 일이 너무 바빴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어느날 여동생이 말하더군요. 결혼하겠다고. 몇 년간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하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동생이 무슨 생활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도 몰랐어요. 그래서 남자친구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죠. 좀 놀라긴 했지만 그러라고 했어요. 결국 그건 걔 인생이니까.”

갑자기 담배를 피고 싶은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다. 나는 길게 숨을 몰아쉬며 여동생을 떠올렸다. 그러자 마음 한 켠이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왔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에게 연락왔어요. 담담하게 말하더군요. 애를 유산했다고,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미 임신했었다고. 여동생의 말투엔 감정이 없었어요. 꼭 상사에게 결과를 보고하는 것처럼 사무적인 말투로 말하더군요.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죠.”

“잘못됐다.”

“나는 몇 번인가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을 마주한 적 있어요. 조사업무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일들을 겪게되는 법이니까. 그 사람들은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지 않아요. 뭔가를 더 기대하지도 않고. 그런 사람들은 자기 삶을 꼭 남의 일처럼 말해요.”

“꼭 여동생처럼 말인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매제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기 부인이 베란다에서 추락했다고.”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뭔가를 더 말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로 잃어버린 것. 그런 것들은 되찾고 싶어도 되찾을 수 없다. 영영 잃어버린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잃어버린 걸 잃어버린 채로 놔두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것들은 되찾을 수가 없는데.

“추운가요.”

손등 위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물기 어린 눈으로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덜덜 떨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 내 몸이 몹시 차갑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보일러를 안 틀었던가.”

“그건 당신 마음의 문제에요.”

“이렇게 추운데?”

“이리와요.”

그녀는 등 뒤에서 부드럽게 나를 껴안았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에서 오렌지 향이 났다. 나는 목을 휘감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차갑지 않아요?”

“체온을 나누는거에요. 요정은 추워도 죽지 않지만, 사람은 다르니까.”

“이것도 차를 대접한 보답인가요?”

“그런 셈이라고 쳐요.”

나는 가만히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등에서 느껴져 오는 그녀의 젖가슴에선 심장박동이 유독 크게 들렸다.

“프레르.”

“네.”

“잃어버린 걸 잃어버린 채로 놔두지 말라고 했었죠. 그렇다면, 나는 뭘 되찾아야 하는거죠?”

“무언가에 대한 기대. 사람들은 그걸 희망이라고 불러요.”

“희망.”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부를지도 몰라요.”

쿵, 쿵.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내 속 안에서 울려오는 심장소리였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도, 무언가에 대한 기대를 갖는걸까요?”

“그걸로 당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요.”

나는 고개를 돌려 자연스럽게 그녀와 입맞춤했다. 그녀의 혀에서는 아까 마신 가향차의 맛이 났다. 달콤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그런 맛이었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눈이 마주친 그녀는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싫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 침실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그녀가 벗어놓은 옷들이 이곳저곳에 널려있었다. 꼭 허물을 벗어놓은 것 같은 풍경에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꼭 허물 벗어놓은거 같네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녀의 주먹이 내 가슴팍을 두드렸다. 하지만 허물이라는 건 꽤 올바른 묘사였다. 그녀의 몸을 칭칭 두른 담요와 옷을 벗겨내고 드러낸 그녀의 나신은 꼭 허물을 벗은 나비 같았으니까.

긴 정사를 마치고 그녀는 품속에서 작게 노래를 불렀다. 외국어로 된 노랫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그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알려주지 않았다.

“내일도 찾아오나요?”

“잘 모르겠어요.”

“여기 계속 남아있는 건 어때요?”

“요정은 아침 이슬 같은거에요. 해가 떠오르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럼 당신을 보고 싶으면 어떡하죠?”

“내 이름을 기억해요. 그리고 내 이름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프레르.”

“네.”

“내가 당신 이름을 왜 잊겠어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더 세게 껴안았을 뿐이다.

그 뒤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기절하듯이 잠에 들었다.



* * *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눈을 떴을 땐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오지도 않은 것처럼, 방은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나는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처참했다. 거의 목 전체에 붉은 멍이 들어있었다. 꼭, 목 매달아 자살을 시도한 사람처럼. 나는 몇 번이고 목을 매만지며 상처를 확인했지만,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른쪽 종아리에도 푸른 멍이 들어있었다. 둔탁한 무언가에 세게 부딪힌 것 같은 멍자국이었다.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1층 까페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발걸음이었다.

까페는 엉망진창이었다. 어젯밤의 기억과 거의 모든게 동일했지만, 기억과 다른게 하나 있었다. 줄, 꽤 굵은 줄이 천장 수도배관으로부터 길게 늘어져 있었다. 중간부분이 푹 패여버린 수도배관 파이프에서는 물방울이 약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기억에 없었다. 기억에 없는 일들이다.

그러다 돌연 머릿속에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것, 몸부림 치던 도중에 종아리에 통증이 느껴졌던 것. 나는 목을 매고 발버둥치다 테이블과 의자에 부딪혔다. 그리고 죽기 직전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수도배관이 내려앉았고, 물이 쏟아져나왔고, 나는 바닥에 누워서···

두 가지 기억이 부딪힌다. 나는 정말로 요정들을 만났을까? 지네의 대가리를 한 요정이 나를 죽이려 했고, 홍차의 요정이 나를 지켰던 걸까? 이성적인 판단이 합리적인 기억을 택한다.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수도배관이 터졌다. 그 뿐이다.

모르겠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일단 뭐가 됐건 매장을 청소하는 게 먼저였다. 어제 자살을 시도한 마당에 매장 청소를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무언가 해야만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축 늘어진 몸은 청소를 시작하자 점점 나아졌다. 배관은 업체에 전화를 걸어 출장수리를 부탁했다. 테이블과 의자는 부서진 것들과 물에 젖은 것들을 한데 모아 폐기물 쓰레기로 내놨다. 이참에 바꿀 생각이었다.

정리가 하나둘씩 끝나고, 모든 흔적이 사라지자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홀이 텅 비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채워 넣을지 고민에 빠졌다. 잃어버린 만큼,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채로 놔두면 안된다.

누군가 했던 말이 바람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떤 여자였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누군지, 도통 떠올릴 수 없었다.

그 고민은 생각보다 오래가서 여름이 될 때까지 나는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꼭 유령을 쫓아다니는 것 같은 일이었다.

내가 그녀와 무언가 했다고 느끼지만, 그걸 뒷받침할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상의 무언가에 투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무척이나 애를 썼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그 여자를 떠올리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내가 그녀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며칠 동안 비가 쏟아져 내리던 여름날의 어느 날이었다.

“사장님, 이거 찻잎 따로 보관해야되지 않아요?”

알바생이 쌓여있는 찻잎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여름 동안 찾아온 장마기간 탓에 찝찝할 정도로 습도가 높아져 있었다. 확실히 오래된 찻잎들은 제습제를 넣고 밀봉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알바생의 말대로 따로 보관용기와 실리카겔을 주문해 일일이 찻잎을 옮겼다.

깡통 틴은 보기엔 좋지만, 보관용기로는 영 별로였다. 몇 개월 동안 차를 마시며 깨달은 사실이었다.

“정말 차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사장님은.”

“나도 원래는 이런거 안 모았어. 근데 까페하는 사람이 취미 가질게 또 뭐 있겠냐. 이런거나 모으면서 만족하는 거지.”

“처음에 차 쌓여있는거 보고 티룸인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차가 주력인줄 알았는데···.”

“시키는 손님 하나 없는거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지?”

“위치가 위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저기 쌓여 있는 깡통 틴들을 보고서도 시키는 사람 한 명 없는거 보니까 기묘하기까지 하던데요.”

“동네 야간 까페의 특징이야. 일 순위 술! 그 다음으로는 커피. 그것도 달달하게.”

“알기 쉬워서 알바하긴 편하긴 하지만요.”

알바생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인테리어를 바꾸고 난 뒤 손님이 꽤나 늘어 야간알바를 들였다. 무언가 점차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 여기에도 찻잎이 있었네?”

“뭔데?”

알바생이 아랫선반 깊숙한 곳에서 틴을 하나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꺼내지 않은 듯 먼지가 가득 묻어있었다. 나는 행주로 틴 겉면을 대충 닦아내며 포장지에 쓰여진 글자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Nr.1438 Gebrannte Mandel-Tea Gschwendner. 기억에 없는 제품이다. 그러나 어딘가 익숙했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마주한 것 같았다. 에어컨 바람을 맞은 틴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내게 무언가를 연상시켰다.

누군가의 손.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때때로 자주 차가워지는 손. 그녀의 손가락은 희고 길었으며, 상처하나 없이 깨끗했다. 손가락 끝에 달린 손톱은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만들어진 것처럼 아름다운.

불쑥, 기억이 솟아올랐다. 베를린에서 직접 사왔다고 했던가. 나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까페 사장에게 차를 선물하는 그녀가 별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왜 당신을 잊었지.”

“네?”

“잠깐만 가게 보고 있어. 급한 볼일이 있어서.”

"이 시간에요?"

앞치마를 벗어 벽에 대충 걸었다.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름에 대해서.

“사장님! 우산, 우산은 갖고 가셔야죠!”

알바생이 뭐라 외쳤지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거리는 후덥지근했다. 굵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금세 온몸을 적셨다. 골목마다 켜진 가로등을 따라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프레르.

‘날 보고 싶다면 이름을 떠올려요.’

품속에서 속삭인 목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울렸다. 당신 말대로 이름을 떠올렸어. 조금 늦었지만, 당신 이름을 기억해냈어.

빗물이 라운드 넥 티셔츠 안쪽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가 묻어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동맥에서조차도 빗물이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몹시 차갑고, 고독한 계절이었다.

빗길을 지나가는 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세상은 온통 빗소리로 가득했다. 어느 곳에도 의미 있는 소리가 없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정말로.

“당신은 추운 날에만 나를 찾네요.”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하얀 우산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느라 너무 늦었어.”

“늦은 건 알고 있었나요.”

“미안해.”

그녀는 손을 내밀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누군가를 녹일만한 온기를 갖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차갑게 식은 행성에서 그녀만이 지각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세계, 나의 행성을 추동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그녀가 필요하다.

”네가 그렇게 말했었지. 요정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사람에게만 찾아간다고.“

”맞아요.“

"난 그 동안 많은걸 되찾았어. 미래에 대한 기대감, 희망, 용기. 그런 추상적인 것들 말이야.“

”요정은 그런 사람에게 찾아가지 않아요.“

”그래, 너는 그런 사람에게 찾아갈 수 없어. 오로지 내가 널 찾아야만 만날 수 있는거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게 정답이라는 걸 거의 확신했다.

“프레르, 나는 네가 필요해.”

“어째서요.”

“널 사랑하니까.”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한 발자국 다가와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녀는 한쪽 손을 기울여 내게 우산을 씌워주며 작게 속삭였다.

“나도 당신이 필요해요. 세상이 뒤흔들릴 정도로.”

그녀는 웃고 있었다.

더 이상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옅은 미소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껴안으며 맹세했다. 이 온기를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고.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나는 비로소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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